버스 안에서


자자의 노래 [버스 안에서] 라는 곡을 좋아한다. 신나는 음악이기도 하고, 가사를 보면 내 학창시절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경험은 특히 그것이 이성과 관련된 경험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잘 잊혀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외부 회의에 참여해야 해서 한 낮에 버스를 탔다. 최근에는 외부 일정도 멀리서 잡히는 경우가 많지 않고 대부분 동네 안에서 이동하다보니 낮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은 드물다. 어지간한 거리는 그냥 걸어다닌다. 이번엔 걸어갈만한 거리를 조금 넘어섰고 회의 시간에 맞추려다보니 버스를 탔다. 버스는 대낮이었지만, 좌석이 꽉 차 있었고, 나는 양쪽으로 하나씩 좌석이 있는 앞쪽 구역과 양쪽으로 두 개씩 좌석이 있는 경계 지역, 그러니까 뒷문 근처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버스가 운행하는 중에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번갈아 나왔고, 그 와중에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성 한 분이 몸이 기울어지며 내가 손잡이를 잡고 선 팔에 기댔다. 버스가 흔들리니까 당연히 기댈수 있는 일이니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 분이 다음 순간 몸을 일으켜 바로 설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분은 바로 일어서지 않고 계속 내 팔에 기대어 계셨다. 그런데 그 기댄 부위가 그 사람의 겨드랑이 부분이었다. 내 팔에 그것도 여름이라 당연히 반 팔을 입었으니 내 맨 살에 여성이 겨드랑이를 끼고 기댄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도 가끔 버스는 흔들렸고, 그 때마다 여성의 가슴 부위 살이 내 팔에 닿았다. 분명 이 상황을 본인이 모르지 않을텐데. 만약 그 분이 가만히 있었는데, 내가 그 쪽으로 손을 뻗어서 이렇게 된 상황이었다면 분명 성추행이 될 상황인데, 그 분은 계속 내게 몸을 기댄 채로 가고 있었다.


한 낮이라 엄청 더웠고, 버스 에어컨은 그 더위를 식힐 정도가 되지 못해서 나는 버스 안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 여성 분이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더 더웠고, 나는 내 팔로 그 분의 몸무게 일부를 지탱하고 있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냥 팔을 확 빼버릴까? 그럼 이 분이 기우뚱 넘어질 뻔하다가 중심을 잡겠지? 그러고 나를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면 어떻게 눈치를 줘야하나? 정중히 이야기를 하기엔 이 분이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그렇게 갔을까? 몇 정거장을 지날동안 계속 그 분은 내게 기대어 있었고, 나는 무거웠고, 땀이 차서 불쾌지수가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혹시 주위에서 누가 유심히 보면 오히려 내가 파렴치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이젠 팔을 빼야지 하고 생각할 때쯤에 갑자기 여성이 몸을 세우더니 하차 벨을 눌렀다. 그리고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다.


90년대 초반이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아침 일찍 버스정류장에 가면 여러 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 있었다. 그 버스는 인문계 고등학교와 상업고등학교를 다 합쳐서 5개쯤의 여고와 그 이상의 남고를 지나는 노선이었다. 아침에 내가 기다리는 정류장 정도 오면 버스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였다. 그럼에도 그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 될 확률이 높으니 학생들은 어떻게든 몸을 밀어 넣어야 했다. 매 정거장 마다 여학생들의 비명소리와 남학생들의 신음소리와 함께 밀고 밀리는 힘싸움이 벌어졌다. 그렇게 20여 분을 달려서 학교들이 모여있는 구역의 첫 번째 정류장에 도착한 후에, 학생들이 대거 내리면 그제서야 조금 숨통이 트인곤 했다.


내가 저 자자의 [버스 안에서]라는 노래를 듣거나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기억은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위해 학교에 갈 때 일어났다. 보충수업이라서 지각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때는 학기 중에 비해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왔다. 당연히 버스 정류장에도 평소 보다는 학생들 수가 적었다. 그때 매일 마주치는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매일 마주쳤기 때문에 당연히 내리는 곳도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 직선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은 여고였다. 학기 중에 비해서는 완전 여유가 있는 버스였지만, 그렇다고 앉아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조금 널널하게 서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버스의 운행 경로엔 급경사가 많았다. 급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타나고 급 커브도 많았다. 하루는 버스를 타서 서 있는데, 그 여학생이 내 바로 옆에 섰고, 한참 가다가 그 급경사가 반복되는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여학생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나를 향해 몸이 기울었고 당연히 내게 기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세워 서 있다가 또 내게 몸을 기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버스가 급커브를 돌았다. 서 있던 모든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고, 나도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팔에 힘을 주면서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여학생은 '어머!'하고 소리를 내며 몸의 균형을 잃고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넘어졌다. 나는 몸을 살짝 틀어서 몸으로 그를 받아줬다. 그는 내 품에 푹 안긴 자세로 한동안 머물렀다. 마침내 버스가 급경사, 급커브를 벗어났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고개만 숙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참을 가다가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고 그는 또 내게 안겼다. 이번에는 그가 몸을 일으키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 몸을 일으킨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나는 아마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봤던 것 같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은 우연이었지만, 그 다음은 우연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로 그 여학생은 자주 내 바로 옆에 섰고, 그날처럼 극적으로 넘어지면서 내게 안기지는 않았지만, 내 팔이나 몸에 기대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얼마 후 나는 용기를 내어 버스정류장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그에게 만나자고 제안을 했고 짧은 기간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린 다시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서로가 불편해서 등교 시간,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에 나가는 시간대를 바꿨다.


앞서 얘기한 며칠 전 버스에서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던 그 여성 덕분에 잊고 있던 오래전 학창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그 날들도 참 더운 날들이었다. 그 더위에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버스를 타고 그렇게 인파에 시달리며 학교를 다녔었지. 하고 잠시 추억에 잠겼다.


아침 달리기


내가 일하는 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1박2일 프로그램으로 탐방을 갔다. 나는 조합원들을 이끌고 행사를 진행하는 입장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사람들을 살피고, 인원 수를 체크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바쁘고 힘든 날이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 내가 맡은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팀 대항 놀이를 진행했다. 준비하면서 과연 참가자들이 재미있어 할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더더욱 재미있게 해보려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참가자들이 정말 즐겁게 참여했고, 올해 가장 많이 웃은 날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만족스러워했고, 참가자 중 한 분은 내가 만든 놀이를 본인이 다른 교육 프로그램에 접목해서 이용하겠다고 했다. 뭐 나 역시도 흔히 하는 놀이를 조금 바꿨을 뿐이니 딱히 권리를 주장할 처지는 아니라 당연히 좋다고 했다. 암튼 그렇게 공식 프로그램을 마치고 이후로는 열심히 먹고 마시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랜 활동가의 경험 상 늦게까지 이어지는 뒤풀이에서도 무슨 사고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어지간하면 모든 참가자들이 다 주무실 때까지 남아서 뒷정리를 하는 편이다. 그날도 당연히 마지막까지 남아서 다들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구석 자리를 찾아 잠을 청했다.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잠꼬대 소리도 작게 들렸다. 무엇보다 근처 계곡의 개구리 소리가 크게 들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늘 그랬다. 잠자리에 조금 예민한 편이라 쉽게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뒷정리를 마친 후에야 억지로 잠을 청하곤 했다. 그래도 엄청 피곤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긴 했다.


아침에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소리 때문에 깼다. 늦게 잠들었다는 핑계로 조금 더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몸이 너무 피곤했다. 그런데 다시 잠들려고 할 수록 더 정신이 또렸해졌다. 누군가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씻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어나서 움직였다. 화장실을 막 다녀와서 아침을 준비하는 걸 도우려고 하는데, 친한 형이 아침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았다. 그 형이 나를 보더니 마침 잘 됐다며 따라 나서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형은 간밤에 술을 많이 드시고 쓰러져 잠든 분이시라 아침에 이래저래 많이 불편하시리라고 예상했건만,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음에도 아침 달리기를 하기엔 너무나도 몸이 피곤했다. 그때부터 잠시 실강이가 있었다. 그 형은 내가 달리기 모임을 이끌 정도로 잘 달리는 지 봐야겠다며 따라 나서라고 했고, 나는 우리 달리기 모임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나는 다음에 컨디션이 좋을 때 형이랑 같이 달리겠다고 했다.


사실 그 형은 거의 준 프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마라톤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100일 동안 매일 6킬로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다. 첫날 그러니까 탐방을 위해 아침 7시 반에 모였을 때에도 그 전에 6킬로미터 달리기를 마치고 시간 맞춰 집결지로 왔었다는 얘길 들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뻗어서 주무신 다음 날에도 깨자마자 6킬로미터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전날 징검다리를 건너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 여성 선배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든 바람에 휴대전화가 젖어서 작동이 되지 않으니 내 폰의 달리기 앱을 통해 달린 거리와 시간을 인증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따라 나섰다. 한 편으로는 그 형과 같이 한번 달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나는 장거리 달리기가 내 목표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 형처럼 마라톤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에 한 번에 쉬지 않고 그렇게 긴 거리를 달리지 않아서, 과연 그 형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둘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형은 일부러 내 속도에 맞추겠다는 생각인 것인지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무릎이 조금 아프기도 했고, 어깨와 뒷목 쪽이 뭉친 느낌이 들기도 해서 무거운 몸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묵었던 펜션을 나와서 한적한 시골 도로에 접어들어 그 형이 길을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위쪽 길을 택해 달렸는데, 가다보니 끝없이 굽이 굽이 오르막길이 나왔다. 와! 이건 군대에서 주로 했던 산악구보 수준이라 도저히 이 늙은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형은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인생이나 달리기나 다 똑같다며, 오르막이 있으면 언젠가는 내리막이 나타난다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나는 오르막길을 뛰느라 얼마 뛰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숨이 차서 더는 이 길로는 못 가겠다고 다시 내려가겠다고 했다. 


내려가다가 옆으로 빠지는 평탄한 길이 나와서 그 쪽으로 길을 정해 달렸다. 오르막이 아닌 평지는 확실히 달릴 만했다. 몸에 열이 나니 조금씩 컨디션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달리기를 시작하면 조금씩 여기저기 아프거나 피로를 느끼지만, 조금 달려서 몸에 열이 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달릴 준비가 되곤 했다. 그래서 워밍업이란 것이 필요한 법이다. 암튼 평지를 뛰면서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달렸다. 물론 이 형의 평소 속도에는 한참 미치지 못 했겠지. 어느 순간부터 이 형이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어쨌거나 지기 싫은 마음에 따라 잡으려고 애를 썼다. 뭐, 그렇다고 아주 많이 빨리 달린 것도 아니어서 조금 숨이 차긴 했지만 따라갈 만하다 싶었다. 한참 달리다가 그 평탄한 길 끝에 다시 산 길이 나타났다. 길이 그 길 밖에 없었다. 아, 다시 산악구보가 되는 구나. 이번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산길을 따라 뛰었다.


알고보니 이 형은 매일 6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30분을 달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본인이 30분을 가볍게 달리면 딱 6킬로미터가 되니 딱 그 만큼만 달리는 거라고. 달린지 15분이 되자 이 형이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6킬로미터를 다 뛰지 않아도 30분이 되면 끝나는구나 하고 조금은 안도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 겨우 15분 지났을 뿐인데 나는 상당히 지쳐 있어서 남은 절반을 어떻게 달리나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잠시도, 한 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을 안 쉬고 달린 적은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중장거리 달리기가 목표가 아니라 단거리 달리기가 목표이기 때문에 내가 낼 수 있는 최도 속도로 짧은 거리를 달리고 좀 쉬다가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길 좋아한다. 그래도 달리기 모임을 할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 속도가 아닌 다른 참가자들과 적당히 보조를 맞춰 달리고 다들 힘들어하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달리길 반복했다. 주로는 1킬로미터씩 서너번을 뛰거나 2킬로미터씩 두세번을 뛰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휴식을 충분히 취해가며 5~6킬로미터를 달리기는 했지만, 전혀 발을 멈추지 않고 그 정도 거리를 달려본 적은 없었다.


한 25분 정도 달렸을 때 우리가 출발했던 펜션을 지나쳤다. 처음에 선택하지 않았던 아래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내 왼쪽 신발 끈이 풀렸다. 형에게 말하고 처음으로 발을 멈춰 신발 끈을 묶었다. 이 형은 그 사이에도 발을 멈추지 않고 내 주위를 계속 왔다갔다 하며 달렸다. 그리고 다시 남은 5분 정도를 채우기 위해 달렸다. 이 형이 또 갑자기 속력을 높였다. 나는 이제 완전히 지쳤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쫓아갔다. 체감 상으로는 3분 이상 지난 것 같은데, 왜 펜션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형에게 물었다. 이 형은 뛰느라 펜션을 지나쳤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였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고, 이 형은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표정과 말투로 아, 몰랐네. 그럼 돌아가자 이러고 다시 달렸다. 이 와중에도 당연히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직 펜션이 보이기도 전에 30분은 지났고, 우리는 여전히 펜션을 향해 달렸다. 나는 이제 30분이 지났으니 그만 달리고 걷고 싶었으나 이 양반이 멈추지 않으니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5킬로미터 가량을 달렸다. 역시 초반 오르막길에서 내 속도에 맞추느라 그 형의 평소 기록보다 1킬로미터나 적게 달린 결과가 나왔다. 아니 초반 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나를 배려하느라 평소 보다는 천천히 달렸겠지. 이 형은 펜션에 도착한 후에도 쌩쌩한 모습으로 신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나는 거의 패잔병 모양으로 비틀거리며 간신히 계단을 한발씩 올랐다. 달리기를 멈추고 보니 내 옷은 이미 땀에 완전히 젖어 있었다. 속옷까지 모두. 그리고 쉼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완전히 땀으로 목욕을 한 모양이었다. 


런닝앱의 기록을 살펴보니 몇 가지 신기록을 한꺼번에 달성했다는 알림이 떴다. 가장 긴 시간 달리기 기록, 가장 먼 거리를 달린 기록 등 지금까지 이 앱을 3년 정도 쓰면서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기록들을 오늘 달리기 한 번으로 모두 달성했다. 약간 억지로 끌려가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한번은 같이 달리고 싶었던 사람과 달릴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있었다. 내 몸이 과연 버텨줄까?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던 건, 이 형이 일부러 맞춰준 덕분에 괜찮았고, 그럼에도 완전히 내 페이스로 맞추지 않고 중간부터 본인이 먼저 치고 나갔기 때문에

내게는 지금까지 못해봤던 한계에 도전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여러 모로 내 달리기 경험 중에 다시 없을 좋은 경험이었지만, 아침 달리기는 정말 너무 힘들기는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계속 땀이 났다. 땀에 젖은 옷은 한참이 지나도 마르지 않았다. 전날 밤에 샤워하고 하나 가져온 여벌 티셔츠를 갈아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티셔츠는 갈아입었지만, 반 바지는 여벌로 더 챙기지 않아서 방법이 없었다. 젖은 옷을 그냥 입고 있을 수 밖에.


이 한 번의 힘든 달리기가 내게는 다시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덥다고,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조금 덜 열심히 운동했던 최근의 상황들을 반성하며 다시 열심히 땀 흘려 운동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울러 또 기회가 되어 이 형이랑 다시 달리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잘 달려서 일부러 배려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체력을 올려놓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이 형이 작정하고 제대로 달리면 역시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아, 그래서 프로와 아마추어는 완전 다른 차원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 양반이 완전 프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준 프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프로는 또 얼마나 다른 차원에 있는 걸까 하고 깨닫게 된다.


저녁에 시작한 회의가 밤에 끝나고, 일을 조금 더 하려고 남았다가 이 글을 두드렸는데, 이제 자정이 가까워온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던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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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7-10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에피소드가, 실화가 아니었다면 하는 마음으로 일었네요. 감은빛님 넘 곤란하셨겠어요....

감은빛 2023-07-17 23:41   좋아요 1 | URL
네, 더워서 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그랬어요. 뭐라 말하고 싶었는데, 상대가 여성이고 내가 남성이라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루피닷 2023-07-11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안에서 추억으로 읽었다가 달리기 운동의 중요성 프로와 아마추어 배울게 많았던 글 잘보고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은빛 2023-07-17 23:4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루피닷님.
배울 건 별로 없었을텐데,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씀 남겨주신 것도 고마워요!

다락방 2023-07-1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딩때 버스의 그 사건으로 그 여성과 실제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었었다니. 완전 재미있는 로맨스 드라마 보는 것 같았어요. 이런 거 또 없습니까? ㅋㅋ

감은빛 2023-07-17 23:4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이런 거 또 있었으려나? ㅎㅎ
사실 어떤 이야기라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죠.
좀 더 극적인 이야기가 두어개 떠오르긴 합니다.
그걸 어떻게 극적으로 잘 풀어낼지는 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네요.
좀 생각해볼게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락방님.
 

어쩌다 보니 매월 마지막 날에는 여기 알라딘에 글을 하나씩 쓰려고 노력하는 듯하다. 오늘도 6월의 마지막 날이니 하나 남겨야지. 시간 관계상 평소처럼 길게 쓰긴 어려울 것 같고, 조금 짧더라도 일단 쓰고 보자.


강의


최근에 강의를 두 번 했다. 하나는 초등학생들과 했고, 또 한 번은 어르신들과 했다. 초등학생들 강의는 내가 실수로 일정을 잘 못 기록해두어서 준비를 거의 하지 못하고 갑자기 불려갔다. 하지만 초등학생 강의도 이미 여러 번 해봤었고, 강의 주제는 뭐 눈 감고도 외울 정도로 많이 했던 내용이라 평소 실력대로 했다. 특히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괜히 욕심 내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주입 시키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쉽게 설명하고 이야기 중심으로 진행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강의를 했는데, 처음에 조금 경계하던 센터 선생님들이 강의 도중에 점점 표정이 바뀌어 내 강의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의를 다 마치고 나서도 인사를 나누며 쉽고 재밌게 해주셔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 학년인지 물어보지는 못했으나 그 중 제일 나이가 많을 것처럼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하나 있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었기에 그리 어려운 내용이 없었지만, 가끔 어려운 용어가 나와도 대답을 척척 잘 해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 내가 알려준 내용 중에 거의 6~70 프로 정도를 그 친구는 이미 다 알고 있더라. 주위에 있던 센터 선생님들 반응을 보니 다른 과목이나 분야에서도 늘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 가끔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어르신들 강의는 좀 힘이 빠지는 시간이었다. 어르신들 대상 강의도 워낙 많이 해봤기 때문에 그들 특유의 몇몇 태도들에 익숙했지만, 그날은 좀 강적인 분들이 계셨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분들은 그냥 젊은 친구가 자신에게 가르치려고 든다고 느끼고 그것이 기분 나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평소처럼 내가 차분하면서도 친근한 태도로 분위기를 잘 추스려보려고 애 썼는데, 쉽지는 않았다. 나중에 강의를 섭외했던 주최측 담당자가 와서 그 분들 대신 사과한다고 했다. 나는 그러실 필요 없다고, 이런 일 많이 겪는 편이고 익숙하다고 답했다. 답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내 내공이 아직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그때는 좀 더 잘 수습할 수 있기를.


잠이 모자라


지난 주부터 이틀 전까지 좀 중요한 일정이 연달아 있었고, 문서 작업들이 좀 밀려있었다. 낮엔 회의를 비롯해 외부 일정이 많고, 저녁에는 매장을 보는 시간이 많아서 근무 시간에 문서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잘 나지 않았다. 가끔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고 이런저런 이유로 집중이 잘 안 되어서 낮에는 제대로 진도를 나가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고, 야근이 야근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밤샘 작업으로 이어지는 날도 많았다. 한 7~8년 전에는 하루나 이틀 정도는 밤샘을 해도 일과시간을 소화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어느 해부터인지 몰라도 이젠 밤샘 후에 낮 일정을 소화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더니 약간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평일을 보내고 주말에는 정말 죽은 듯이 잠만 자고 다시 월요일부터 야근과 밤샘이 이어졌다.


결국 중요한 일정들을 다 마쳤고, 문서 작업들도 완전히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은 조금 여유를 즐기려고 했지만, 또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마음만은 여유 있게 지낸 편이다.


덥다 더워


온도는 높고 습도도 높으니 불쾌지수가 그냥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진다. 아, 한여름 낮에는 가능하면 외부 일정을 안 잡았으면 좋겠다. 어디 나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그런데 내 이런 생각과는 관계없이 자꾸 외부 일정이 생긴다. 


남부 지방엔 폭우가 와서 또 여기저기 피해가 심각하다고 한다. 뭐 인도는 6월 비정상적인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1백명을 넘겼다고 했고, 캐나다는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절반 가량이 산불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폭염과 산불로 고통을 받고 있다.


기상학자들에 따르면 올해 여름이 역대 가장 더운 여름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이미 티핑 포인트(더는 바로잡기 어려울 정도로 한계를 넘어간 지점)를 넘겼다는 의견들이 벌써 2018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전세계가 2030년까지 1.5도씨를 넘기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약속도 이미 부질없어진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뭐,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다 포기하고 그냥 살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살 수 밖에.


최근에 인구 절벽이나 합계 출산율 급감이니 하는 뉴스도 종종 나오던데, 어차피 기후위기 때문에 살기 어려워진 지구에 인구가 줄어들면 그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고령화 문제와 노동자 감소 문제 등은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늘 청소년과 어린이들이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의 미래를 훔쳐 쓰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 그리고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방류 문제로 주위에서 말들이 많다. 나도 할 말이 많은데, 자꾸만 사람들이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하는 것이 안타깝다. 과학적인 견해과 그렇지 않은 시선이 있다는 이야기들. 누군가는 괴담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과학이라고 부르는 의견들. 옮고 그름의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당파적 사고방식에 매몰된 태도가 가장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 벌써 매장 문 닫을 시간이 지났네. 오늘은 여기까지. 7월의 첫날인 내일은 토요일인데도 일정이 몇 개 있다. 그걸 다 소화할 수는 없을 것이고, 꼭 필요한 두어 군데만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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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치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내 주위 기계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까? 저녁까지 매장을 보는 날이라 점심때 출근하는 날이지만, 오전에 약속이 잡혀 있어서 조금 일찍 사무실에 나와야 했다. 방문하신 분과 약 30분 가량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매장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걸레를 찾아와서 닦으며 어디서 물이 새고 있는지 찾아보니 에어컨에서 나온 물인 것 같았다. 우리 매장 에어컨에서 나온 물은 호스를 통해 밖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다. 지금껏 한번도 물이 샌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 물이 샜을까? 밖에 나가 호스를 살펴보니 그 끝부분이 화단 흙에 박혀 있었다. 이래서 물이 샌 건가? 호스 끝 부분을 꺼내고 묻어있는 흙을 털고 닦아냈다. 호스 안 쪽이 막혀 있지는 않아서 이러면 해결이 된건가 하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그래도 여전히 물이 새어 나왔다. 일단 이미 바닥에 고여있는 물을 닦아서 짜내고 다시 닦기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된 바닥을 정리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도 에어컨에서는 계속 물이 새어나왔다. 일단 에어컨을 껐다. 밖엔 비가 와서 문도 못 열어두는데, 에어컨을 끄고 나니 덥고 습한 공기 때문에 턱 숨이 막혔다.


에어컨과 호스의 연결부위가 빠지거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해서 뒤쪽을 살펴봤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와중에 더러워진 필터를 발견했다. 일단 필터를 꺼내 청소했다. 깨끗하게 씻어서 말려두고 한동안 다른 일을 했다. 나중에 다 마른 필터를 끼우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물이 새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것은 확실한데, 나로서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에어컨을 끄고 일하는 수 밖에.


지난 주에 바쁜 와중에도 쓰레기 처리시설 탐방을 다녀왔다. 약 20년 전에 환경단체에서 일할 당시에 선별장 실태 조사를 여러 번 나간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선별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요즘 선별장의 상황은 가끔 이런저런 매체들을 통해 접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탐방 소식을 접하고 신청했었다. 오랜만에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야 또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 꺼리들이 생길테니. 게다가 이번 탐방에서는 소각장과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 하수 처리장 등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고 했다. 두 번 없을 좋은 기회라 생각해 바쁜 일을 제쳐두고 다녀왔다. 선별장은 정말 많이 자동화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지저분하고 열악한 상황인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더라. 소각장은 20년 전에도 다녀온 적은 있지만, 소각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소각로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은 처음 보았는데, 깔끔하고 자동화 된 공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고작 가축을 기르는 사료로 만든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자동화 된 공정을 통해 생산한 사료가 헐 값에도 팔리지 않고 그대로 쌓여 처치 곤란한 상황이지만 말이다. 이 사료들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도 안 팔리면 결국 저 멀리 해외의 가난한 나라로 수출된다고 한다.


아, 이 탐방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음, 그 탐방에서 찍은 사진이 엄청 많았다. 사진 정리를 좀 하려고 노트북으로 사진을 받아서 각 폴더에 찾기 쉽게 옮겨 놓으려고 하는데, 사진을 옮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사진의 용량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처음에는 시스템 리소스가 문제를 일으켜 컴퓨터가 멈춘 줄 알았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사진을 옮기는 중이라고 그 처리 과정을 보여주는 바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길래 강제 종료하고 다시 시도했다. 해당 폴더로 엑세스 할 수 없다고 오류 메세지가 떴다. 음, 또 뭐가 문제일까? 띄워놓은 모든 프로그램을 다 종료하고 시스템을 재부팅했다. 그리고 다른 프로그램을 하나도 안 띄우고 우선 사진 옮기는 작업만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도 상태 표시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성급한 건가 싶어서 한동안 매장으로 가서 다른 일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는 사진을 다 옮겼겠지 싶어서 노트북을 들여다봤는데, 아까 8% 였는데, 이제 겨우 11% 였다. 음, 이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인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일단 3%가 올랐으니 일을 하고 있긴 한 것이겠지.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다시 매장으로 나가 다른 일들을 했다. 적어도 1시간 가까이 다른 일들을 하다 돌아왔는데, 이번엔 아까와 같이 11% 그대로다.


하! 오늘 따라 왜 에어컨과 노트북이 말썽일까?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긴가? 이 사진들을 빨리 정리해서 공유해야 하는데, 겨우 몇 십장의 사진 옮기는 것 뿐인데, 왜 몇 시간이 지나도 처리를 못 하는 것일까? 평소라면 그보다 더 많은 사진들도 훨씬 더 빨리 처리했는데.


노트북(컴퓨터), 에어컨, 냉장고, 스피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쓰다보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오류나 고장을 접하기도 한다. 나는 나이에 비해 이런 기계들을 잘 다루지 못해 스스로 기계치라고 생각하곤 한다. 일을 하면서 컴퓨터는 제법 많이 안다고 여기기도 하는데, 가끔씩 오늘처럼 어이없는 일들을 겪기도 한다. 주위에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물어보곤 하는데, 이상하게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살펴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문제가 안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아, 정말 그나저나 저 사진들 빨리 분류해서 보내줘야 하는데, 언제까지 11%에 멈춰 있을 거니? 답답하다 정말.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내일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을 불러 해결해야겠다.


대화의 효능


저 위에서 언급한 쓰레기 처리시설 탐방을 갔을 때, 주최 측에서 임의로 조를 편성해줬다. 당시 집결지에 여기저기 흩어져 기다리던 사람들을 편의상 가까이 서있는 사람들끼리 묶어서 조를 짰다. 나는 남성 1분과 여성 3분과 한 조가 되었다. 우리는 주어진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통해 역할을 나눴다. 이동하는 버스에서는 우리 조에 편성된 여성 1분과 앞 뒤로 앉게 되었다. 그날 처음 만난 이 분과 몇 시간동안 함께 탐방을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제법 나눴고, 막판에는 좀 친해졌다. 이 분은 작년까지 다른 지역에서 우리 매장과 같은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운영하셨었고, 최근에는 다른 일을 찾고 있다고 했다. 주로 매장 운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금방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서로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면서 친해졌다.


거기에 더해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다른 조 여성 2분과 아까 그 우리 조 여성 분과 나까지 이렇게 4명이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이때 정말 네 명이서 대화를 많이 나눴다. 콩을 주로 사용하는 식당은 음식도 정말 맛있었고, 우리의 대화도 정말 재미있었다. 어느 정도로 대화를 나눴는가 하면, 우리가 전체 참가자들 중에 두번째 혹은 세번째 정도로 일찍 들어가서 테이블에 앉았고, 식사 주문도 곧바로 해서 음식도 빨리 나온 편이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살펴보니 이미 우리 4명을 제외한 다른 탐방 멤버들은 모두 식사를 마치고 다 나간 후였다. 식사를 늦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그날 배가 고팠기도 했고, 주문한 콩국수가 엄청 맛있어서 엄청 빨리 후루룩 다 먹어 치우고, 콩국도 남김없이 모두 마셔버렸는데, 그러고 아마 30분 이상을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분들이 늦게 먹은 탓도 있지만, 그 늦게 먹은 이유 중 하나가 대화에 열중하느라 그랬던 것이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이제 일어서야 할 때가 되니 대화에 가장 열심이었던 여성 2분(우리 조 1분, 다른 조 1분)은 너무 아쉽다는 듯이 더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다음에 꼭 뵐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약 뒤에 다른 일정이 없었다면 커피까지 같이 마시자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조 2분은 원래 지인이어서 다른 선약이 있다며 함께 떠났고, 나와 우리 조 여성은 함께 지하철 역을 찾아서 10여 분을 걸었다. 우리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져 지하철 역에서도, 열차에 올라서도 계속 되었고, 그 분이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릴 때에야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쳤다. 헤어질 때 그 분은 꼭 우리 매장에 놀러 오겠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낯선 이들, 처음 만나는 이들과 뭔가 함께 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별로 없었지만, 과거에는 제법 많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처음 만난 이들과 공감대가 잘 형성되어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던 일들 말이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혹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뭔가 내가 잘 아는 주제라면 말을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 아는 주제니까 남들과는 달리 나만 아는 정보들이 분명 있고, 그런 정보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흥미롭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제법 잘 알고, 잘 전달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가장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 중에도 처음 시작이 그랬던 경우가 제법 있다. 다른 어떤 인연인 경우들도 있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금방 공감대가 형성되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다가 친해진 경우 말이다.


어쨌거나 나로서도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대화에 참여한 적이 최근에는 별로 없었다.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 잘 아는 이들하고만 어울렸고, 그들과의 대화는 대개 비슷한 패턴이기에 한 편으로 익숙하지만, 한 편으로 식상하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흥미로운 대화를 가진 그 경험이 내게도 약간의 흥분으로 남았다. 탐방 장소에서 사무실까지 먼 길을 전철을 갈아타고 돌아오면서 내내 묘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위기 교과서를 냈다. 해외 출간 소식은 벌써 접했었는데, 드디어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왔다. 음, 읽어야 할 책은 계속 늘어나는구나. 이 책은 나중에 학생들 교육 자료로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빨리 읽고 필요한 부분들을 잘 챙겨 놓아야겠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이번처럼 전국이 동시에 장마에 들어가는 일은 기상관측 이래 4번째라고 했던가? 암튼 이 기후위기 시대에는 더위도 장마도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내일은 에어컨이 말을 좀 잘 들을 것인가? 아님 결국 수리기사님을 불러야 할 것인가? 노트북은 일을 잘 해줄까? 아님 또 공치게 만들까? 아, 안돼! 내일도 일을 제대로 못하면 정말 큰일이다. 제발 내일은 좀 잘 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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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27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모르지만, 지금 같은 때는 에어컨 수리 기사 부르기 어려울 것 같아요 불러도 오기까지 시간 많이 걸리겠죠 부르는 곳이 많을 테니... 에어컨에서 물은 왜 샜을지... 노트북에 사진 옮기기도 왜 안 됐을까요 프로그램을 지우고 다시 깔고 하면 될지... 지금까지 잘 되던 게 안 된 것 같네요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말이 잘 돼서 다행이네요 그럴 때 말이 잘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할 것 같기도 한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도 괜찮은 일이죠 저는 잘 못하지만...

감은빛 님 장마철이니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감은빛 2023-06-30 20:31   좋아요 0 | URL
다행히 에어컨 문제가 잘 해결했어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저랑 동료랑 머리를 맞대어 해결했어요.

희선님도 장마철 건강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어떤 꿈들 두번째 이야기


어제 쓰려다가 다 못 쓴 잡다한 꿈 이야기를 다시 이어 쓴다.


#3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거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비에 완전히 젖은 옷은 무겁게 축 늘어져 불편하고 찝찝했고, 신발 안에 들어찬 물 속에서 양말은 물을 흡수하며 불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는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위에 하나 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모두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두 명, 세 명 다시 네 명으로 늘어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까지 식별할 정도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까만 형체로만 보였다. 내가 더 자세히 보려고 다시 눈가에 흐르는 빗물을 오른손 손바닥으로 훔쳐내자 그들도 같은 동작을 보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고개를 조금 들더니 오른손을 들어 얼굴 높이를 훔치는 동작을 취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이젠 아예 물폭탄을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이미 온 몸이 다 젖어버린 상태라 비가 얼마나 더 오든 상관은 없었지만, 머리와 어깨로 쏟아지는 빗물의 무게와 강도가 세진 것은 좀 곤란했다. 나는 피곤했고 간신히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서 있었는데, 내리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조금씩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까운 듯 멀리 보이는 내 주변의 인물들도 그때마다 같이 휘청거렸다. 나는 일부러 왼발을 한 발작 옆으로 빼면서 살짝 무릎을 굽혀 넘어질 것처럼 동작을 취했다가 버텼다. 그들 역시 거의 동시에 같은 동작을 취했다.


피곤함에 잠시 눈이 감겼다. 빗물이 계속 흘러내려 눈을 바로 뜨고 있기가 힘들기도 했다. 눈을 감고 서 있으니 더더욱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양쪽 무릎이 휙 꺾이며 비틀 몸이 기울었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렇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동작을 유지한 채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그림자들 또한 같은 동작이었다. 다만 아까 대여섯 명에 불과하던 그림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젠 눈 대중으로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꿈에서 깬 시점에서 나는 꿈 속의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잊어버려 다시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꿈 속의 나는 분명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안 올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 속의 내가 그 비를 다 맞으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절실히 그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였을까? 꿈 속의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사람은.


자꾸만 눈이 감겼고, 축 늘어진 옷은 자꾸만 무겁게 몸을 끌어내렸다. 계속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지만, 그래도 넘어지지 않고 계속 버텼다. 문득 시간이 궁금해서 손목시계 유리의 물기를 손목으로 닦았다. 시간은 9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던 것 같다. 오전이었을까? 오후였을까? 비 내리는 어두운 하늘 탓에 아침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듯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가 다음 번에는 가까운 곳인 듯 크게 울리기도 했다. 종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9번을 울렸다. 종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가늠해보려고 다시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엔 오른쪽에서 들렸고, 또 다음 순간엔 왼쪽에서 들렸다.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더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아무리 오래 비를 맞고 기다려봐야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아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꿈 속의 나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돌로 변해 세월의 풍화에 가루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여기에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내 주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나만 혼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 말고도 수많은 어떤 이들이 나처럼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비록 비참하게 버림 받고 쓸쓸하게 혼자 기다리고 있었어도 나는 결코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계를 보고 싶었는데, 왼손 손목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떨궈진 고개를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림자들이 내 주위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빗줄기는 아까보다는 가늘어졌다. 졸고 있었던 걸까? 비틀 한 차례 크게 몸이 왼쪽으로 꺾였다. 무언가를 짚으려고 왼손을 들어보려 했으나 빈 허공을 휘저으며 나는 쓰러졌다. 철퍼덕 하고 큰 소리가 나며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튀어 물보라가 일었다.쓰러지며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몸을 뒤집으며 누워버렸다. 물보라가 그렇게 크게 솟아 오른 건 내 온 몸으로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누워서 비를 맞으니 입과 코로 자꾸만 빗물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고 생각은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옆으로 돌아 눕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머물렀던 그림자들도 함께 넘어졌을까? 궁금했는데 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찰박 찰박 들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가 흩어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발소리는 점점 내게 다가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볼 수 없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간절히 원했던 그 사람일까? 아니면 넘어진 나를 보고 누군가 놀라서 다가오는 것일까? 혹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어떤 사람일까? 마침내 발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가왔고 그때 투명한 비닐 우산의 한 쪽 끝이 내 머리 위에 나타났다. 내 얼굴로 계속 떨어지던 빗물이 우산에 막혔다. 대신 상체로는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이 더 많이 떨어졌다. 발소리는 거기서 멈췄고, 이제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비닐 우산의 한 쪽을 올려다 보았다. 우산 뒤쪽으로 흐리던 하늘이 갑자기 맑아졌다. 짧은 순간 순식간에 비가 그쳤다. 나는 우산을 든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그는 내 얼굴을 막아준 후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으으으 온 몸에 힘을 주고 얼굴을 찡그리며 입가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계속 힘을 줬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무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다가 잠에서 깨는 경우는 흔하다. 보통은 피하거나 도망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힘을 쓰다가 깨는 경우가 많았다. 이 꿈 속에서 나는 반대로 누구든 무엇이든 내게 와주기를 바랐다. 그게 날카로운 칼 끝이라도 피하지 않고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게 누구였는지 알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 버렸다. 궁금했다. 누구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것인지. 마침내 나타난 인물은 과연 누구였는지. 꿈에서 깨어버린 이상 이젠 결코 알아낼 수 없겠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쓰려던 꿈 이야기를 다 못 썼다. 더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지금 나는 저 꿈 속의 나처럼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또 다른 꿈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써야겠다. 오늘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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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22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꿈을 자세하게 기억하시는군요 저는 꿈 한 장면밖에 기억 못하기도 해요 일어났을 때는 좀 길게 기억하지만... 예전에 꿈을 적은 적도 있는데, 그걸 보니 별난 꿈을 꿨네 했어요 비를 맞고 누군가를 기다리다니, 혼자가 아니었다니 조금 무서운 느낌도 드네요 그림자는 뭐였을지...


희선
 

어떤 꿈들


#1

구체적인 내용들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꿈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쫓기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일들을 겪다가 어느 순간부터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축제에서 무대에 서기 위해서. 어떤 노래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꿈에서 깬 직후에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때 적어 두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마도 최근 연습해서 잘 부르게 된 몇 곡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꿈 속에서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친한 후배가 내게 노래를 가르쳐줬다. 실제로 나는 그 후배 덕분에 몇 달 전에 두성으로 노래 부르는 방법을 익혔고, 그 전까지 그저 고함 지르는 수준에 머물렀던 노래 실력이 그나마 노래처럼 들리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암튼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엄청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도, 어떤 특정한 맛을 잘 살리지 못했고, 그래서 가르치던 후배에게 계속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꿈 속의 나는 그 녀석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내 실력에 이 정도면 잘 부르는 것이라고 여기며, 이 정도라도 부르는 것이 어디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야 하는 축제 날이 왔다. 내가 무대에 올라야 할 시간이 다가올 수록 초조함과 긴장감을 느끼며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는데, 내 무대 직전에 한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너무나도 매력적인 목소리에 너무나도 훌륭한 가창력이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긴장감과 초조함은 사라졌고, 그저 그 목소리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깬 순간 자기 전에 틀어놓은 플레이리스트에서 이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커버곡을 주로 부르던 제이플라가 최근 계속 자신의 곡을 발표하고 있다. 이 곡은 분위기도 좋았고 창법도 평소 제이플라와 달라서 좋았고, 특히 가사가 좋았다. 최근에 낸 서너곡들이 모두 제이플라 자신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듯한 가사라서 좋다. 암튼 이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자주 듣는 편인데, 하필 잠에서 깨는 시점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아니 잠에서 깬 후 멍한 상태에서 조금 생각하다가 깨달았는데, 꿈 속에서 내 차례 바로 앞 무대가 바로 이 곡이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이 노래를 들으며 자고 있던 나는 꿈 속에서도 이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꿈 속에서 무대에 섰던 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실제 제이플라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의 나는 나름 노래를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음은 잘 안 올라가지만, 분위기 있게 잘 부르는 편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졌었다.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발성을 조금 배웠는데, 내 목소리와 내 성향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 노래를 조금 배운 덕분에 결혼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실마리를 잡았었다. 암튼 내가 정말 노래를 못하는 구나 하고 깨달았던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축제 무대에 우리과 동기 한 명과 둘이 올랐다. 연습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나랑 같이 무대에 오른 친구는 심각할 정도의 박치에 약간 음치였다. 이런 친구와 왜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이 녀석이 실수하고 노래를 못 할수록 내가 잘 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라고 재수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나서 나도 참 노래를 못하는 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로 절대 노래 실력에 대해 자만심을 갖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동기 녀석은 당연히 계속 박자를 틀리고 절정에서는 음이탈도 일어나는 등 실수가 많았고, 그건 예상했던 부분이었지만, 나 역시도 내 생각처럼 노래가 잘 되지 않아 무척 당황했다. 당황은 계속 실수로 이어졌고, 우리 무대는 그야말로 코메디가 되거나, 귀와 마음을 괴롭히는 고문이 되어버렸다.


이 꿈을 꾸고 나서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방금 얘기했던 최악의 축제 무대였고, 또 하나는 신입생 환영회를 가서 즉석으로 짧은 꽁트 대본을 쓰고 그 속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역할을 나 자신에게 배정해서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 불렀던 모습. 하나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나름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 노래 실력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는 여기지만, 그래도 어떤 노래들은 내 나름의 스타일로 잘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더는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2

그 길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골목길이었다. 그리고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기도 했다. 나는 쫓기고 있었다. 오르막을 뛰어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멈추고 싶었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든 와중에도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어느 순간 나는 사방이 탁 트인 어떤 공원 같은 곳에 올라 있었다. 어디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데, 내 뒤를 빠르게 쫓아온 일행들이 어느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한 후에 어디 빠져나갈 틈이 없는지 살폈지만, 그들은 잘 훈련받은 몸 놀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옆으로 퍼지며 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들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손에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들려있었다. 각목, 야구방망이, 곤봉, 삼단봉, 쇠파이프까지. 계속 뒷걸음질을 치다보니 나는 어느새 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섣불리 들어오지 않고 포위한 채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어느새 절벽 앞 난간에 내 등이 닿았다. 빠르게 뒤돌아보니 절벽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 라고 생각했다. 내 정면 쪽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야구방망이를 든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둔 상태로 더 들어오지 않고 멈췄다. 앞으로 나선 그는 몇 발자국 더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가면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어서 무척 답답하고 두려웠다. 그는 한 서너 발걸음 간격을 두고 멈추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를 과시하듯이 크게 공중에서 한 번 휘두르고 그대로 방망이를 땅에 짚고 양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왼손을 들어 가면을 벗었다. 


턱에서부터 천천히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가면을 벗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된 것처럼 무척 길게 느껴졌다. 대체 누구야? 얼른 가면을 벗어! 그 얼굴을 보여줘.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가면이 올라가면서 이제 입매가 드러났다. 웃는 모습이었다. 비웃음이었을까? 빨간 입술과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러면서 양 볼에 살짝 패인 보조개도 드러났다. 보조개가 있다. 나는 머리를 굴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보조개가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천천히 가면을 벗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이었다. 이제 콧날 끝이 보일락 말락 했다. 콧날이 제법 높았다. 여기까지 드러난 하관을 보며 나는 계속 내가 아는 얼굴들과 비교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안면 인식 장애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완전히 얼굴이 드러나도, 그 사람이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도 누군지 금방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콧등이 조금씩 드러났다. 하얀 피부와 높은 콧날. 누군지 모르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얼굴일 것이라고 느꼈다. 아주 느린 그의 움직임은 눈이 드러나기 직전에 멈췄다. 그는 가면을 칠할 정도 드러낸 상태에서 멈추고 나와 대치를 이어갔다. 그 다음에는 몇 발작 뒤쪽에 멈춰있던 이들이 일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걸음을 맞췄다. 그들은 앞서 가면을 벗다가 멈춘 이와 함께 정확하게 반원 모양이 되는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에 그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각자의 손에 든 곤봉이나 삼단봉이나 쇠파이프 등을 크게 휘두르는 동작을 하고는 땅 바닥에 짚고 섰다. 그리고 하나둘씩 가면을 벗어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일사분란하게 딱 맞췄던 것과는 달리 가면을 벗는 동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아직 손을 들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벌써 가면의 아랫쪽을 쥔 사람도 있었고, 입매가 드러나는 지점까지 가면을 들어올린 사람도 있었다. 


나는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며 한 사람씩 얼굴을 보려고 애썼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촛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제각기 저마다의 속도로 가면을 올리는 그 손길들은 역시 정확히 눈이 드러나기 직전에 멈췄다. 그들은 손으로 가면의 턱을 쥔 동작 그대로 멈춘 채 마치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쯤 깨달았던 것 같다. 이거 아마도 꿈일 것이다. 악몽은 자각몽이 되어 버렸고,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꿈이었어.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의 가면을 하나씩 벗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꿈이란 것을 깨달았어도 꿈 속의 나를 마음대로 통제하지는 못했다. 꿈이란 것을 깨닫자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들은 과연 누구이고 왜 무기를 들고 나를 쫓아 이 절벽으로 몰았을까? 무엇을 복수하려는 걸까? 무엇을 비난하려는 것일까? 꿈이라고 깨닫기 전의 두려움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절박한 어떤 감정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음 순간 멈춰있던 그들이 일제히 가면을 벗어던지고 손에 든 무기들을 높이 들어 올리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내 시야는 갑자기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으로 채워졌다. 푸르게 맑은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갑자기 빠른 속도로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아마도 꿈 속의 나는 스스로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겠지? 그들이 가면을 벗어 던진 찰나 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잠에서 깨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불을 머리 위로 덮어 쓰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채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한참을 곱씹은 후에야 그들은 아마도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분신처럼 여러 몸으로 복제했지만, 실은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고 꿈에서 깬 이상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그냥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편이 나았다.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 속의 그 얼굴처럼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한 사람은 현재 내 주변에는 없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아닐 거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있었다. 그렇게 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예쁜 입술. 남성 중에서도 있었고, 여성 중에서도 있었다. 그들 모두를 한 때 꽤나 좋아했었고(이성으로서도, 친구로서도) 꽤나 원망하거나 싫어하기도 했었다.


물론 꿈은 꿈일 뿐이므로 그 얼굴이 실제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과 꼭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신기하게도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나이대가 달랐으므로 아이들은 생김새가 달랐지만, 꿈 속의 나는 그들이 내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꿈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 그러니 저 꿈 속의 가면 속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졌건 실제 내가 아는 사람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더 많은 꿈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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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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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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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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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2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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