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적반하장
어제와 오늘 이틀 연속으로 어이없는 메일을 받았다. 함께 사업을 진행하는 타 단체 활동가로 부터였는데, 작년까지 담당이었던 활동가가 일을 쉬게 되면서, 인수인계를 받은 사람이다. 한때 같은 건물에서 일했었고,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처음엔 인수인계를 받을 당시에 세세한 부분까지 전달이 안되어 뭔가 오해가 생긴거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처음부터 정확한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그냥 자신의 말만 통보하여 전하는 태도도 예의가 아니었고, 마치 내가 뭔가 부당한 요청이라도 한 것처럼 표현해놓은 부분은 참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서 한참을 다시 읽고 또 읽어봤다.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건 너무 도가 지나치다 싶어서, 답장을 보냈다. 그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근거를 설명하고, 나에게 보낸 글에서 잘못 표현된 부분을 발췌해서, 그렇게 판단한 것이 어이가 없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하다고 해서 보냈다. 혹 내 감정이 잘못 전달될지도 몰라 꼼꼼하게 다시 살펴보고 발송버튼을 눌렀다.
오늘 아침에 메일을 열어보니 다시 답변이 왔다. 자신의 잘못은 전혀 깨닫지 못한 듯. 계속해서 똑같은 말투와 태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자신이 할 말이 아닌 주제넘은 표현들. 마치 자신이 내 상관이라도 된 것인양 단정짓는 표현들이 그대로였다. 어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다른 일도 못하고!) 메일을 쓴 것이 허무해진 꼴이었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자칫 언성이 높아지면 더 상황이 나빠질 듯 하여, 그냥 다시 메일을 썼다.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상했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다시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표현에 대해서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괜히 둘러서 말해봐야 또 똑같은 상황만 반복될 것 같았다. 어쨌거나 앞뒤 생각없이 직설적으로 말이 앞선건 그가 먼저였으니, 나로서는 더이상 그의 기분을 배려할 상황도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자꾸만 감정이 앞서는 걸 꾹 누르고 애썼다. 문장 하나를 쓰면서 몇 번을 지웠다가 다시 썼는지 모른다. 오해가 풀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가 쓴 표현이 잘못이었다는 점만 분명하게 전달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보다 해당분야에서 몇 년 먼저 시작한 선배이고,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는 점을 분명히 적었다.(이건 나이나 경력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라, 맘에 안들긴 하지만 다른 표현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 시간의 상당부분을 보내고나서도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급한 일이 두어건 있는데, 머리도 손도 그쪽으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다시 답장이 와 있었다. '굉장히 불쾌한 글이군요.'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여, 더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내용을 짧게 적어놓았다. 이런 상황을 '적반하장'이라고 표현하던가? 불쾌하다고? 사과가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나는 불쾌하지 않아서 그냥 점잖게 글을 보낸줄 아나? 먼저 불쾌한 글을 보냈던 사람에게 나름 굉장히 예의를 갖춰서 정성스레 답장을 보냈더니, 도리어 먼저 화를 내는 꼴이라니! 이건 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란 생각 밖에 안든다. 나로서도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러, 다시 답장을 보내야 하나, 전화를 걸어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는데, 도무지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더 나가면 싸움 밖에 안되지 싶은데, 굳이 내가 먼저 그 기본이 안된 인간에게 싸움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냥 이렇게 넘어가면 왠지 굉장히 손해보는 것 같고, 억울하기만 한데.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젠장 이틀째 기분이 나빠서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다!
둘. 고열
이번주는 출장으로 시작했다. 작년에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가급적 출장을 안가려고 노력했고, 꼭 가야할일이 있어도 그날 안에 돌아오도록 일정을 잡았다. 내가 없으면 밤에 아내 혼자 아이들을 돌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꼭 1박을 해야할 상황이었다. 이젠 아기가 제법 자라서 괜찮겠지 싶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없을 때 일이 생겼다.
함께 출장을 간 이웃 일터의 친구가 한턱 내기로 해서, 맛있게 저녁을 먹으며 술도 한잔 곁들이고 나온 길이었는데, 전화가 왔다. 둘째가 열이 나고 있다는 아내의 전화였다. 모텔 방으로 돌아와서 친구녀석과 맥주를 한잔하고 있는데, 다시 고열이 나고 있다는 아내의 연락이 왔다. 아이가 아프다는데, 옆에 없으니 아무것도 해주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해열제를 먹이고, 미지근한 물로 닦아주고 있다고 했다. 밤에 아기가 열이 나면 어른들은 밤새 잠을 못잔다. 계속 이마를 짚어보고, 열이 오르면 미지근한 물을 받아와서, 수건을 적셔서 닦아주어야 한다. 둘이라면 번갈아서 아이를 보면서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는데, 아내 혼자서는 힘든 일이다. 마침 아이의 큰외삼촌이(아내의 큰오빠) 야간에 대리운전을 하신다는 사실을 떠올라서, 전화를 드렸다. 아기가 열이 심하다는데, 혹시 근처에 계시면 잠시 들여다보고, 도와주시라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곧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 걱정이 되어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친구 녀석은 함께 걱정을 해주다가 먼저 잠들고, 나는 하릴없이 틀어놓은 티비로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전화기만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새벽 늦은 시간에 해열제 덕분에 열이 조금 떨어졌다고, 오빠가 와서 도와주고 있다는 문자가 왔다. 조금 안심하고 나도 눈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뒤척이다가 한참만에 잠이 든 덕분에, 아침에 힘겹게 눈을 떴다. 전화기를 보니, 새벽녁 다시 열이 심하게 올라서 응급실로 달려갔었다고 한다. 큰 아이는 자도록 놔두고, 오빠의 도움으로 아내와 아기만 병원으로 갔다고. 그랬더니 큰 애가 혼자 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장모님께서 새벽부터 집으로 달려오셨다고 했다. 아기는 막상 응급실에 가서는 다시 열이 떨어져서 간단한 진찰만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그랬는데 병원비는 엄청나게 나왔다고!) 사실 몇 해전 첫째가 딱 지금 둘째만 했을 때에도 고열때문에 밤새 고민하다가 새벽에 응급실로 뛰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별 도움은 받지 못하고, 병원비만 엄청나게 나온 적이 있었다. 어쨌든 다시 상태가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문자를 받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도 아기는 주기적으로 열이 올랐다. 거의 40도까지 열이 오르곤 해서, 아예 아기를 물 속에 담가놓고 열을 떨어뜨렸다. 아기는 계속 울었고, 얼르고 달래가며 열을 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아기는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은 열이 오르는 빈도가 많이 줄어들고, 아주 고열이 아닌 39도 수준으로 온도가 조금 떨어졌다. 며칠동안 잠을 못자서 아기의 눈 주위에 다크써클이 생겼다. 10개월된 아기가 다크써클이라니! 아내도 나도 잠 못자고,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다. 큰 아이도 밤에 아기 우는 소리 때문에 자꾸만 깨다보니 역시 피곤해하고 있다. 온 가족이 다 죽을 맛이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