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고양이


작년 11월 초였다. 애들 엄마가 사무실 근처에서 아기 고양이를 마주쳤는데, 주위에서 엄마 고양이를 찾지 못했고, 건강 상태가 나빠보여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가 집으로 데려왔다. 마침 그 날은 내가 아이들과 만나는 날이었다. 애들과 밖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데려다주면서 잠시 그 집에 머물렀는데, 애들 엄마가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애들과 함께 나중에 애들이 '차차'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차차와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별로 없었다. 그 집을 나온 지도 이제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아이들은 차차와 빠르게 친해졌고, 차차만 바라보고 지내게 되었다. 이젠 나를 만나는 저녁에도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차차와 시간을 보내느라 나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그러다 12월 말에 애들 엄마가 애들과 제주에 여행을 계획했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 집에 들러 차차의 밥과 물을 챙겨주고, 화장실을 치워주길 부탁했다. 그 정도는 해줄수 있으니, 당연히 승락했다. 그런데 큰 아이가 갑작스레 여행을 안 가고 혼자 집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애들 엄마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을텐데, 큰 아이가 아빠 핑계를 댔다. 아빠랑 같이 지내면 괜찮지 않냐고. 나는 큰 아이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아이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일주일에 항상 3일 정도는 아이들이 우리집에 머물도록 해왔지만, 큰 아이는 학원과 숙제, 공부, 친구들과의 약속 등을 이유로 오지 않는 (혹은 못 오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작은 아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큰 아이와 둘이 지낸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엄마 보다 아빠 라는 말을 먼저 했던 아이,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빠 딸이었던 아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시를 잘 써서 나 뿐 아니라 유명한 시인도 놀라게 만들었던 아이, 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예고 문창과를 가고 싶다고 했던 아이, 원하던 예고 문창과에 합격했다고 엄청 좋아하던 아이, 몇 년 전부터 키가 훌쩍 자라 엄마를 제치고 이젠 아빠와 비슷할 정도로 자란 아이. 태어나자마자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 탯줄을 잘랐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언제 저렇게 자랐나 싶은 아이와 며칠 연속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함께 그 집에서 생활하는 일은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 집에 며칠 머물면서 큰 아이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장난도 많이 치면서 사춘기 이후로 다시 한층 가까워졌는데, 또 아기 고양이 차차와도 친분을 많이 쌓았다. 물론 내 관점에서 차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차차가 동거인인 자신들보다 나를 훨씬 더 좋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단 애들 엄마나 아이들이 차차를 안으면, 곧바로 내려달라는 듯 애처로운 느낌의 울음소리를 내곤 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가려고 몸을 뒤틀고 네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런데 내가 안으면 가만히 내게 안겨 있는다. 울음소리도 안 내고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내려가려고 버둥거리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면 그땐 버둥거리다가 내려가버리곤 한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 되었는데, 내가 그 집에 가서 차차를 안는 순간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신감을 호소하는 감탄사를 내질렀고, 애들 엄마는 물끄러미  나와 내게 안긴 차차를 쳐다보며 샐쭉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또 한 편으로 차차는 다른 고양이들이 으례 그러듯이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몸을 부비지 않는데, 그러니까 동거인인 애들 엄마와 아이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데, 가끔 내가 그 집에 가면 내게는 그런 행동을 한다. 작은 아이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차차가 수컷이라서 남자인 아빠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좀 많은 편


어린이들이 유난히 나를 잘 따르고 좋아하곤 하는 일은 익숙하다. 차차도 어린 고양이니까 어린이라고 본다면 나는 유난히 어린 생명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어떤 숙명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어려서부터 명절이 되어 할머니네 댁에 가면 내 밑으로 사촌과 육촌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는데, 대략 10명 가량의 동생들을 모두 내가 돌봐야했다. 어른들은 내게 돈을 쥐어주며 동생들에게 공평하게 과자를 사주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나도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이였건만, 나는 늘 맏이라는 이유로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숫자의 동생들을 떠맡아야 했다.


대학 시절 농활을 가면 동네 어린이들은 모두 내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고작 열흘 남짓의 농활에서 돌아오면 그 꼬맹이들 중 한 두명이 연필로 삐뚤빼뚤 눌러 쓴 글씨로 내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음 해에 그 마을에 또 가면 다시 아이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서로 내 손을 잡으려고 싸우고, 내 무릎에 앉으려고 싸우곤 했다.


대학 시절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그 중 쌀 배달도 있었다. 쌀 한 포대 값을 치루려면 액수가 좀 크다보니 보통 지갑에서 그만큼의 돈이 나오지 않고 어디 서랍장을 뒤지거나 하느라 돈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엄마가 그렇게 돈을 찾느라 바쁜 순간, 아이들은 낯선 사람인 쌀 배달부에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 쌀을 어깨에 이고 오느라 땀이 범벅인 내게 아이들이 다가와 뭔가 질문을 한다던가. 관찰하면서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한번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기가 내 쪽으로 기어오다가 내 바로 앞에서 일어서더니 양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시늉을 했다. 땀에 젖은 몸으로 아기를 안으면 안 될것 같아서 웃으며 지금은 못 안아 라고 말했는데, 아기는 팔을 벌린 자세 그대로 내게 한 발 다가오다가 넘어질 것처럼 몸이 기울어졌다. 나는 급하게 아기를 붙잡아 안았다. 아기는 내게 기대어 뭔가 옹알이를 하기 시작햇다. 잠시 후에 아기 엄마가 돈을 찾아왔길래, 상황 설명을 하고 아기를 돌려주려 했다. 엄마가 안아서 받으려고 하는데도 아기는 그 작은 손으로 내 옷을 쥐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삶을 시작한 후로는 선배 활동가들의 아이들이 또 나를 엄청 따랐다. 어느 출장에 아이를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선배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3일 정도 같이 지냈는데, 3일 내내 내 옆에만 붙어 있었고, 헤어지는 날에는 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다.


애들 엄마가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동네 찜질방에 같이 놀러갔었다. 구석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인형을 갖고 놀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들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인 내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인형 놀이를 했다. 그걸 보면서 당시 애들 엄마는 꽤나 놀랐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내가 전생에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얘기하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사소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은데, 정작 나는 왜 그런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기를 좋아하고, 잘 노는 건 맞는데, 단지 그 이유 만으로 낯선 아이들도 쉽게 다가오는 건 설명하기 어렵다.


아기 고양이 차차 이야기를 하다가 좀 멀리 왔는데, 어쩌면 차차도 같은 이유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외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다. 













지인들 중에 강아지를 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들의 집을 방문하곤 하면서 고양이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 아이들이 반려묘 차차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나도 덩달아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며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고양이는 참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와 SNS 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일상에서 저자가 찍은 고양이 사진을 자주 봐왔고, 고양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이 읽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엄청 많은 것에 비해 그들의 반려 고양이들이 그만큼 그들을 좋아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척 도도하게 행동하는 것이 고양이에게 확실히 더 어울리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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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2-2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얘기 너무 좋아요. 감은빛님은 분명 투명하고 맑은 어린 존재들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으신 걸거예용! 멋져용!

감은빛 2021-02-28 19:54   좋아요 1 | URL
아우, 붕붕툐툐님. 이렇게 자꾸 칭찬에 길들여놓으시면 큰일납니다. ㅎㅎ
아우라 까지는 모르겠지만, 첫 인상이 선한 느낌이란는 얘기는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또 유독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구요.

희선 2021-02-28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한테 잘 해 줄 것 같은 걸 아이가 아는가 봅니다 어디선가 아이는 그런 걸 잘 안다고 하는 본 적 있는데... 새끼 고양이도 좋아한다니, 그것도 좋을 듯하네요 고양이와 살아 본 적은 없지만, 괜찮은 듯해요 잘 모르지만, 그냥...

이월 마지막 날이네요 어느새 그렇게 되다니... 시간은 늘 잘 갑니다 이월 마지막 날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감은빛 2021-02-28 19:57   좋아요 2 | URL
2월의 마지막 날이 이렇게 가네요. 희선님.

또 3월의 첫날이 올테니, 2월의 마지막 날을 미련하게 붙잡으려 둘 필요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붙잡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봐요.

3월에도 희선님의 시와 산문들을 계속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출처 : 감은빛 > 두 번째 책

10년 전 오늘 쓴 글이다. 처음 공저자로 참여했던 책 [100인의 책마을] 이후, 두 번째 공저자로 참여했던 책 [녹색당 선언] 곧 출간될거라는 소식을 전하고, 당시 참석했던 문학상 수상식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선배들의 책 몇 권을 담은 글.

지난 10년간 내 삶도 참 많이 변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술잔을 부딪히곤 했던 노동자 문학 판의 선배들과 못 만난지도 오래되었고, 예전에 일했던 단체들의 선후배 활동가들과도 연락을 안 한지 오래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출판계 친구들, 선후배들도 아주 가끔 소식을 주고 받을 뿐, 점점 관계가 멀어져 감을 느낀다.

책 한 권 쓰자는 제안을 몇 번 받고도, 제대로 된 아이템을 찾지 못해 기획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기만 했다.

그래도 북플이 알려준 덕분에 10년 만에 그 시절의 기록을 읽어볼 수 있어서 좋다. 오늘 쓴 글을 또 10년 지나서 읽어볼 수 있으려나. 과연 알라딘 서재가, 북플이 그때까지 서비스를 제공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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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1-02-2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의 지난 오늘은 가끔씩 읽어보기 좋은 기능 같아요.
10년은 긴 시간 같은데, 진짜 빨리 지나가네요.
감은빛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감은빛 2021-02-26 23:36   좋아요 2 | URL
북플이 페이스북 따라해서 만든 기능이죠.
저는 정작 페이스북에서는 별로 좋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북플에서는 꽤나 괜찮다고 여겨요.
과거의 오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뭐라고 적었는지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고

비록 친하지는 않았더라도, 잘 알지는 못 했더라도 얼굴을 알고 어떤 공간과 어떤 시간을 함께 한 적이 있는 아는 사람의 갑작스런 부고는 한순간 나를 일시정지 시킨다. 뇌를 비롯한 모든 인체 기능이 잠시 중단된 느낌이었다. 마치 전자제품이 EMP Shock wave 를 맞은 것처럼. 제주 지역에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해온 활동가의 부고였다. 내세를 비롯해 죽음 이후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영면을 빈다거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들이 모순이긴 하지만, 그를 애도할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고생 많으셨다고 짧지만 그대와 함께한 기억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해본다.

요즘 오랜만에 다시 만나거나 연락이 닿은 많은 이들은 일단 깜짝 놀라고 시작한다. 죽을 뻔 했다면서요? 크게 다치셨다고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이고!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등등.

그 말과 마음이 너무나고 고맙고, 잠시라도 그에게 걱정을 끼친 것이 미안해진다. 업무로든, 운동으로든, 마을 활동으로든, 녹색당 활동으로든 나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잠시라도 나를 떠올리며 생각해 준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어쩌면 끝났을 지 모를 내 남은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야겠다.

당장 어제 밤 11시까지 온라인 회의를 마치고, 스트레스에 괴로워하다 쓰러져 누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생각했는데, 자고 일어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하긴 하루에 몇 십번이라도 바뀔 수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일테니.

오늘도 할 일이 많다. 일시정지 버튼을 풀고 이제 다음 일정으로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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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25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항상 건강 조심하시길..

감은빛 2021-02-25 22:08   좋아요 2 | URL
이렇게 말씀 남겨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비연님께서도 코로나 조심하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책 왔다!

꽤 오랫동안 한번에 많은 책을 사지 않았다.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서너권 가량을 골라오는 정도가 한번에 산 걸로는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많았을 정도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계속 늘어나는 책들이 쌓이고 쌓여 더 책을 놔둘 공간도 없었고,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랬다. 그런데 설 연휴를 앞두고 [듄] 신장판 발매 소식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버렸다. 이왕 질러보기로 마음 먹은 김에 보관함도 한 번 털어봤다. 그런데 보관함을 살펴보다가 너무 시간을 끄는 바람에 연휴 전에 배송받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놓쳐버렸다. 정확히는 주문을 다 끝낸 다음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배송 예정일이 연휴가 지나고 한참 후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안내를 자세히 읽어보니, 한 20여분만 일찍 주문했어도 연휴 전에 받을 수 있었던 거였다. 뭐 어쩔수 없는 일. 연휴 동안 듄을 읽으려던 계획을 수정해 집에 쌓여 있던 책들 중 한 두 권 정도를 읽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지난 주에 연휴 전에 주문했던 책들이 도착했다. [듄] 6권을 포함해 총 13권이었다. 예전에는 여유가 생기면 한 번에 책을 주문하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네 서점이나 중고서점에서 책을 소량으로 꾸준히 구매하는 것으로 습관이 바뀌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한 번에 10권 이상의 책을 주문했다. 암튼 크고 무거운 책 상자를 받아들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어서 상자를 열어 제일 먼저 듄 상자를 열었다. 책들과 박스는 외관상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책을 꺼내 보려니까 책들이 너무 꽉 끼어 있어서 잘 빠지지 않았다. 박스가 너무 작아서 책들이 너무 빡빡하게 들어찬 것 같았다. 이게 조금은 여유가 있어야 부드럽게 스르륵 책을 넣고 뺄 수 있을텐데, 이렇게 빡빡해서야 책을 넣고 뺄 때마다 힘이 들기도 하고, 잘못 힘을 주다가 책이 상하거나 박스가 찢어질까봐 걱정이 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것 참! 이렇게 비싸게 책을 팔면서 이런 사소한 것들도 못 챙기나 싶다.

책을 꺼내느라 한참 애를 쓴 것 때문에 약간 기분이 상한 탓에, 책이 오면 바로 [듄] 부터 읽겠다는 생각이 바뀌었다. 듄을 장식용으로 책상 위에 잘 놔두고 나머지 책들도 여기저기 빈 공간에 잘 쌓아놓고 제일 먼저 [오 헨리 단편선]을 집어들었다. 큰 아이가 글을 쓰고 싶다고 한참 글쓰기 공부를 하더니 목표로 삼았던 예고 문창과에 합격한 후로 나는 적극적으로 아이에게 이런 저런 책을 골라주고 읽어야 한다고 권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아이가 주로 쓰는 단편소설과 꽁트에 도움이 될 책으로 가장 적당한 것은 단연 오 헨리의 단편들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마 국민학교 5학년 무렵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기가막힌 반전들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강했던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시 나보다 5살이 더 많아진 아이에게 오 헨리의 단편들을 바로 추천한 것이다. 두 달쯤 전에 중고서점에 오 헨리 단편집이 하나 있길래 아이에게 사 주고, 나중에 나도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내가 다시 읽고 싶었던 단편이 이 판본에는 없었다.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엄청난 반전의 단편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막상 그게 없으니 너무 서운했다. 그래서 이번에 민음사에서 낸 판본으로 다시 구매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 단편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번에도 찾을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배송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그 단편을 찾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확실히 어릴 때의 기억에 비해 지금 읽어보니 그만큼의 강렬한 반전은 아니었다. 30년이 훨씬 넘은 시간 동안 내 생각이 많이 변한 탓이리라. 그래도 그 어린 시절에 감명깊게 읽었던 걸 다시 찾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얼른 다 읽고 아이에게 갖다 줘야겠다. 그리고 아이가 다 읽고 나면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는지, 인상적이었는지를 물어봐야겠다. 과연 아이는 뭐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마감 스트레스

지난 주 금요일까지 소식지 원고 하나를 넘기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이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분에게 다른 급한 업무가 생겼고, 원고의 주제가 내가 잘 아는 내용이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큼 잘 쓸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내가 쓰겠다고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맡지 않아도 될 원고를 덜컥 맡아놓고 정작 다른 일이 바빠서 계속 그 원고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착실히 머리 속으로 글의 얼개를 구상해놓고는 있었다. 자리에 앉아 두드리기 시작하면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수요일과 목요일에 갑자기 몸이 좀 안 좋았다. 날씨 영향도 있었고, 업무 복귀 후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인지 금방 피곤해지고 회복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금요일 오후까지 원고를 쓰지 못하고 퇴근하면서 주말동안 완성해서 월요일 아침 출근하면 바로 열어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토요일 밤이었다. 토요일 하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정말 겨울잠을 자듯 먹지도 않고, 화장실 한 번 가지도 않고 약 20시간 동안 잠만 잤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원고 마감에 대해 떠올렸다.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3시간이면 충분할텐데, 빨리 끝내놓고 마음 편히 주말을 즐기자고 머리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대로 생각만 했다. 내 몸은 이불 밖으로 나가는 걸 거부하고 누워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24시간 이상 아무것도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음악을 틀어놓고 이불 속에서 잠시 뒹굴거리다가 나와서 간단히 먹을 거리를 준비했다. 먹기 전에는 잠시 몸을 움직여 근육을 긴장시켰다. 제대로 운동할만큼 여유는 없으니 간단히 몸을 풀어서 온 몸의 근육을 깨우는 정도로 만족했다. 배를 채우고는 책을 조금 읽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 기어들어갔다. 잠시 누워서 SNS와 유튜브 등을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다니. 정말 겨울잠이라도 자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어차피 오늘 안에만 해결하면 될 일. 조금 여유를 부렸다.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가 되었다. 이제는 원고를 써야했다. 써야했는데, 써야..... 아! 왜 이렇게 몸을 움직이가 싫은 건지.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책상 앞으로 가질 못하는 건지. 왜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또 잠이 들었고, 꿈 속에서 나는 이불 속에 누워서 원고 마감 걱정을 하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 꿈 속에서도, 그러니까 꿈 속에서 꾸는 그 꿈의 나는 또 이불 속에 누워서 원고 마감을 걱정하며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되는데 라고 혼자말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 이거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같은 건데. 이거 영화 [인셉션] 처럼 꿈 속의 꿈 속의 꿈 이런 식으로 무한 반복되는 건가 하고 꿈 속에서 생각했다.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꿈에서 깼다. 이제 일요일 저녁이었다. 이쯤되면 정말 일어나서 빨리 글을 써놓고 다시 누우면 될 것을. 나는 그러면서도 이불 속에 계속 머물렀다.

결국 어떻게든 글을 완성해서 월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 원고를 보내는 것은 성공했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것보다 더 잘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자만에 가득찬 생각을 떠올리며 출근했다. 주말은 정말 잠만 자고, 원고 걱정만 하다 시간을 다 보냈다. 꿈 속의 나는 끝없이 걱정과 잠을 반복했다. 그렇게 계속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다보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상태에 빠진다면 내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식물인간처럼 되어 버리는 걸까? 이런 허튼 생각들을 하면서 월요일 아침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잤는데도 몸은 여전히 피곤했고, 머리는 멍했다. 또 바쁜 한 주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머리가 지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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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4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2-24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고 일어나기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꿈속에서도 잠이 오고 잘 일어나지 못해요 실제와 꿈이 섞이고, 어떤 때는 꿈인지 제가 생각한 건지 모를 때도 있어요 감은빛 님은 꿈속의 꿈을 자꾸 꿔서 잠을 많이 잤다 해도 피곤했던가 봅니다

읽고 싶은 책이 잘 빠지지 않아서 아쉬웠겠습니다 그런 건 책이 잘 빠지게 만들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힘을 줘서 빼면 빠지겠지요 책 즐겁게 보시기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1-02-25 22:12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경우 많아요. 희선님. 그게 꿈이었는지, 꿈에선 깬 후에 상상했던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요.

cyrus 2021-02-24 1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꿈을 꿨어요. 꿈속의 제가 혼자 등산을 하고 있었어요. 하산하는 도중에 책이 잔뜩 꽂힌 책장들을 발견했어요. 저는 야외 도서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책을 그냥 가져갈 수 있게(!) 만든 책장이었어요. 책장에 붙여진 조항에 두 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고 적혀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 욕심이 생겼어요. 왜냐하면 책장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분량이 두껍고 가격이 비싼 책들을 막 골랐는데, 어느새 내 손에 쥔 책들이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저는 사라진 책을 찾는 동시에 새로운 책을 찾으려고 계속 책장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예전에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꿈을 몇 번 꾼 적 있어요. 그런 꿈을 꾼 날에 저는 항상 헌책방에 갔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헌책방에 가고 싶은 유혹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무의식 속에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욕구를 최대한 줄이고 방에 있는 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

감은빛 2021-02-25 22:14   좋아요 1 | URL
사람의 욕심이란 건 참 무서워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책 욕심이 클 수 밖에 없겠죠.

저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두껍고 비싼 책들 위주로 열심히 챙겼을 것 같아요. ㅎㅎ

붕붕툐툐 2021-02-2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왤케 공감가요? 하고 놀면 좋을 것을 늘 끝까지 끝까지 미루다가-그 사이 노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어정쩡하게 스트레스만 받다가-하는 패턴. 지금 제가 딱 그런 거 같아요... 새학기 준비 할 거 많은데, 놀 시간도 이제 별로 안 남아서 둘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데, 지금까진 역시 계속 놀고 있어요..ㅋㅋㅋㅋㅋ

감은빛 2021-02-25 22:20   좋아요 1 | URL
이렇게 격하게 공감해주시다니! ㅎㅎ

저는 늘 저렇게 살아와서 이젠 나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한심해하는 것도 지쳤어요. 그냥 저렇게 살다 죽어야 할 것 같아요. ㅠㅠ
 



요즘 유명인들의 과거 학교 폭력 가해행위들이 속속 폭로되며 사회가 온통 떠들썩하다. 뛰어난 실력으로 국가대표로 활약한 쌍둥이 배구 선수에서부터 몇몇 배구선수로 넓혀지더니, 이젠 야구선수와 가수, 배우 등 연예계로 점점 폭로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과거에도 이런 논란들은 많았다. 특히 유명한 연예인들에게는 자주 따라붙는 구설수 중에 하나가 일진설 따위의 소문이었다. 그것이 소문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까지 밝혀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것 같고, 그 소문이 지금처럼 널리 퍼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온라인 문화 그리고 SNS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 파급 효과가 엄청나게 커졌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폭풍처럼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성폭력에 대한 폭로들이 조성해놓은 어떤 감수성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쌍둥이 선수들에 대한 논란을 접했을 때에는 개인적으로 실력과 외모에서 돋보이는 존재들이어서 참 안타깝다고 여기고 말았는데, 성폭력 미투가 확산되던 때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빠르고 뜨겁게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낸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바일과 SNS가 대세가 된 시대의 모습이자, 우리 사회의 교육과 집단 문화 그 실체를 드러내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단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은 쉽게 그 실체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티비에 나오는 저렇게 멋진 사람이 설마. 저렇게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설마. 내가 좋아하는 저 맑고 순순한 사람이 설마. 바로 그 설마가 사람을 잡기 마련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태도가 마치 지목받은 유명인들을 진실 규명과 관계없이 가해자로 단정하는 것 같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당연히 그들의 과거는 그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지켜본 목격자들만 알 수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난 과거일 수록 이제와서 그 폭력을 증명하고 사실 관계들을 밝히는 일은 어렵다. 다만 나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학교 폭력이라는 단어는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의 틀이 공간적인 배경과 사춘기 혹은 10대 혹은 중2병이라는 단어들로 지칭할 수 있는 시간적인 배경에서 존재한다. 실제 감옥보다 더 감옥처럼 지어진 학교라는 건물에 하루종일 갇혀, 숨 쉴틈도 없이 살아야 하는 사춘기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뉴스에서 아주 경악할만한 10대 청소년들의 범죄 사실들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그들이 아주 나쁜 아이들이어서가 아니라, 악마를 숭배하거나,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벌어지기도 한다는 가능성의 측면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 단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본다면, 지금 가해자로 지목받은 몇몇 유명인들을 비판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 그들이 가해자로 내몰린 시스템에 눈을 돌려 더 늦기 전에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두드린다.

우선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측면은 이 나라 체육계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은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쇼트트랙 선수를 장기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코치나 철인삼종경기 선수를 자살로 내몰았던 감독, 물리치료사, 주장의 사례 등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운동부 학생들에게 다른 공부는 안 시키고 오로지 운동만 시키는 교육 환경이 큰 문제고, 좋은 성적을 거둔 소수만 상위 명문학교를 거쳐 일류 국가대표 혹은 프로선수를 꿈꿀 수 있으므로 어떻게든 성적만 잘 나오면 된다는 체육 교육계의 환경이 또한 문제고, 성적을 위해서는 고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감독과 코치 등의 부당한 언행과 폭력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부모들과 학생들의 현실이 또 문제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지점이 소위 말하는 학폭. 왕따라고 불리는 폭력들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자. 이 나라의 학교 교육이라는 것은 그 시작이 일제시대였다는 점. 지금의 학교 교육 시스템은 일본 제국이 식민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잘 세뇌시켜 그들이 이용해 먹기 좋은 성인으로 길러내는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독재자 박씨였다. 시대가 흘러 독재자가 박씨에서 전씨로 바뀌고, 선거라는 형식을 거치기는 했지만 군인 출신 살인마 노씨가 이어 집권하는 동안 계속해서 학교는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국민들을 세뇌하고 길들이는 감옥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놀랍게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많이 바뀌었다. 안다. 전교조를 비롯한 수많은 희생과 노력과 흐름들이 있었음을. 그럼에도 큰 틀에서 구조를 보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진단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국가는 늘 국민들을 권력과 자본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노력한다. 그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틀이 바로 학교다.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본질이 그렇다는 얘기다. 권력에 순응하고 자본에 잘 길들여진 충실한 노예를 만드는 일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벌어지는 일이다. 성적, 경쟁, 입시라는 재료는 시기와 질투와 갈등과 왕따라는 과정을 거쳐 폭력을 낳는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점은 사춘기라는 시기의 특성이다. 흔히 질풍노도, 반항기 등으로 사춘기를 말하고, 요즘은 중2병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더라.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중2의 무서움 때문이고, 북한이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도 중2 덕분이라고. 놀랍게도 큰 아이는 초등 6학년 즈음부터 감정이 예민해져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에도 사납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절정이 바로 딱 중2때였다. 그리고 중3은 코로나19라는 판데믹으로 인해 조용히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또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겠지만, 지금 바람은 그저 지금 정도로만 넘어가주기만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다. 암튼 참 신기하게도 딱 중2라는 시기가 그 정점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왜 외계인과 북한군이 그토록 중2를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나이에 내 사춘기를 돌아보는 일은 꼰대로서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일이 되겠지만, 내가 가장 잘 알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내 경험 밖에 없으니 슬쩍 들춰보면서 학교와 사춘기와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당연하겠지만 사춘기의 시기와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이대와 성별에 따른 어떤 패턴은 존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시기가 극도로 불안하고 예민하고 세상 모든 것 갖다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시기인 것만은 보편적이고 부를 수 있겠다. 본인은 아직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고 말하는 50대 선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 분은 바깥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는 사춘기라 여길만한 특징을 별로 내보이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그 분도 그 시절에 내면에서는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되돌아보니 밖에서 보면 그닥 눈에 띄는 현상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내 사춘기는 정말 충격적이고 충동적이고 겉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태풍이나 폭풍 같은 것이었다. 수많은 폭력 사건들이 벌어졌고, 애정과 증오와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시기였고, 극도로 예민하고 민감한 성격 때문에 가족도 친구들도 나를 무서워했던 시간들이었다. 친한 후배는 지금도 농담으로 ˝이 분이 한 때는 부산에서 주먹으로.......˝ 라고 말하며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한다. 그가 자주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 외모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농담이 재미있게 혹은 흥미롭게 받아들여 질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폭력전과를 얻었다. 이걸 뭐 자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도 말했듯 누구라도 어떤 상황에 처하면 폭력사건으로 얽힐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고, (피해를 호소하는 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해자로 지목되는 사람들도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시스템과 시대 상황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조금 조심스럽게 해보고 싶어서이다. 예전에도 이 서재에 몇 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키도 작고 체구가 작었던 나는 지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내가 뭔가를 빼앗기거나 부당한 상황에 처하면 무조건 저항했다. 상대가 어른이라도, 아무리 힘이 쎈 상급생이라도, 아무리 싸움을 잘 하는 친구일지라도. 맞더라도 내 주장이 옳고 그들이 틀렸음을 밝혀야했다. 비록 힘에 굴복해 두들겨 맞더라도 그렇게 저항하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맞는 것이 두려워 저항하지 않은 날엔 나 스스로 그걸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싸움을 참 많이 하고 자랐다. 싸움을 많이 했다는 말이 내가 누군가를 많이 때렸다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 때리면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는 뜻이고, 누군가 때리겠다고 위협하는 것도 피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건 전적으로 나 개인의 변명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방어의 측면에서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고 소위 말하는 정당방위로 내 입장을 옹호해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언제나 변두리 우범지대였다.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돈을 뜯어내는 풍경이 일상이고, 누군가 위협하고 때리는 모습이 길을 가다가 횡단보도를 마주하는 것처럼 평범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선생이라는 인간들이 죄다 깡패들이었고,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범죄자들이었다. 그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당연히 깡패가 될 수 밖에. 내가 졸업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부산에서도 폭력 혹은 깡패라는 단어와 곧바로 연결되는 유명한 학교였다. 앞서 상대가 아무리 힘이 쎄더라도 저항하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불행히도 그 상대가 선생인 경우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교육제도라는 것이 그래서 무섭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단 한명의 선생도 예외없이 회초리 혹은 몽둥이라고 부르는 막대를 들고 다녔다. 마치 해리포터 세계관의 마법사들이 항상 마법봉을 휴대하듯이. 남자 선생들은 대체로 길이가 긴 몽둥이를 갖고 다니며 사소한 이유에도 마구잡이로 매질을 일삼았고, 여자 선생들은 대개 짧은 막대를 갖고 다니며, 손바닥이나 어깨나 머리를 때렸다. 남자 선생들이 힘으로 매질을 주로 한 것에 비해 여자 선생들은 훨씬 미친 방식의 체벌을 일삼았다. 예를 들면 늘 뺨을 때리는 선생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마치 마법 주문을 읊조리듯 특유의 대사를 말하며 양 손으로 양쪽 뺨을 빠르게 십여차례 이상 쫙쫙 소리나게 때리는 것을 마치 무대에 선 삐에로가 묘기를 선보이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수행하곤 했다. 그러면서 ˝오늘은 좀 빗 맞았다.˝. ˝오늘은 손목이 아파서 좀 덜 때렸다.˝ 등의 감상을 남길 정도로 미친 선생이었다. 또 손톱만 골라서 때리는 선생이 있었는가 하면 손가락 사이에 막대를 끼우고 고문하듯이 누루는 선생도 있었다. 가장 최악은 나이가 좀 든 여선생(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봤자 지금 내 나이 정도였을 것 같은데)이었는데, 남학생들(남중, 남고였으니 당연히 학생들은 전부 남자였겠지) 생식기를 꽉 쥐고 비틀고 고문하는 걸 일삼았다. 나도 딱 한 번 당했는데, 그 수치심과 통증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한 체육 선생은 학기 마지막 수업에 혹시 아직 자신에게 매를 맞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미친 선생들에게 별 시덥잖은 이유로 맞는 것이 너무 싫어서, 선생이라 저항이나 반항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맞을 짓을 하지 않는 것으로 잘 피해다니곤 했는데, 마침 그 선생에겐 1년 동안 한번도 맞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 상이라도 주려나 싶은 생각에 손을 들었는데, 그 미친 선생은 나를 앞으로 불러내더니 엎드리게 하고 엉덩이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로서 본인에게 한 대도 맞지 않은 학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수업을 마쳤다.

이런 미친 선생들 밑에서 생활하면서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3년 내내 나는 반에서 가장 싸움을 많이 한 아이였다. 만약 내가 싸움을 잘하는 아이였다면 아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학년 초 한 두번의 싸움으로 실력이 드러나면 그 다음부터는 서열이 대충 정해지고 웬만하면 잘 안건드리게 되니까. 그런데 나처럼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한 아이는 만만하니까 누구나 자주 건드리고, 나는 또 참지 않는 성격이라 그 모든 위협과 협박에 맞서고, 그러다보면 많이 맞게 되고, 맞다보면 또 반격을 하게 되는 법이니 결과적으로 중학교 내내 가장 싸움을 많이 한 사람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이 경험이 이후 꾸준히 운동을 해서 힘을 기르게 된 원인이고, 맷집이 세진 원인이고, 싸움에 익숙해져서 경험적으로 싸움을 좀 잘하는 편에 속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앞서 체벌에 미친 선생들 이야기만 언급했는데, 내 인생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한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선생님을 만났었다. 그 분이 1학년과 3학년 담임이었다.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에 팔뚝이 엄청 두꺼운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묵직하게 내리 깔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음악 선생님이었다. 한때 권투를 했었기에 상체 근육이 엄청났다. 그 선생님은 교실에서 나와 누군가의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단순히 양쪽 모두에게 벌을 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사정을 알아보고 그에 맞게 훈계와 조언을 내리는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내 우표를 훔치걸 발견하고 돌려달라고 하니 내게 주먹을 휘둘렀던 아이가 얼굴이 퉁퉁 붓고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어도, 나에게 훈계만 내리고 별도로 벌하지 않았고, 내 앞으로 새치기 하려다가 내가 막아서니까 내게 주먹질을 한 덩치가 큰 아이가 눈 밑이 찢어져 피를 엄청나게 흘렸을 때에도 크게 혼내지 않았다.

싸움도 자꾸 하다보면 느는 법. 중3때 학교 태권도부에서 잘 나가는 아이 하나가 시비를 걸어와 싸움이 벌어졌다. 녀석이 먼저 뻗은 주먹과 발길질에 나는 나가떨어졌고, 이후 엄청 두들겨 맞았는데, 맞다가 본능적으로 뻗은 주먹이 녀석의 관자놀이에 명중했고, 녀석이 주춤 멈춰섰다. 그 틈에 나는 녀석의 목을 감싸쥐고 관자놀이와 뺨에 주먹을 쏟아 부었고, 녀석은 웅크리고 벗어나려고 애쓰다가 쓰러지며 계속 맞았다. 나는 더이상 팔에 힘이 안 들어가고 주먹을 쥘 수 없을 정도로 지칠때까지 때렸다. 그 후로는 다른 아이들이 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요 앞에 언급했던, 먼저 때린 녀석들이 나중에 내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던 두 건의 사건들도 영향을 미쳤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폭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했더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중학교 3년의 그 지긋지긋한 폭력을 당하는 삶을 또 반복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2에서 중3으로 올라가는 동안 키가 좀 자랐고, 운동을 하면서 체격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해 그 전처럼 그렇게 비실비실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소문도 한 몫 했다. 우리 중학교 출신 중에 누군가가 3년 내내 싸움질을 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선생들은 그래도 중학교 선생들 정도로 폭력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남자든 여자든 선생들이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니며 별 것도 아닌 일로 휘두르긴 했지만, 그 정도와 빈도는 참아줄만한 수준이었다. 반에서의 시비나 위협도 중학교에 비해서는 훨씬 줄어들었다. 폭력에 익숙해진 삶에서 폭력에 대비하는 일은 내 몸을 단련해 내가 휘두르는 폭력이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에 몰두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가끔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기도 했다. 어쩌다 운동을 좋아하고 힘 좀 쓰는 친구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공부따위 관심조차 없는, 학교와 선생의 눈으로 보면 문제아일 뿐이겠지만, 순박하고 친절한 친구들이었다. 본격 사춘기라고 부를만한 예민해진 시절 그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미세하게 관촬하다보면 그 전까지 내 세상의 전부였던 가족과 몇몇 힘없고 착해빠진 친구들에게서 무언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다르고 싶었고 달라 보이고 싶었다. 당장 선생은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 왜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냐고 타박했고, 나는 그런 선생의 태도가 싫어서 보란 듯이 더 어울렸다. ˝공부도 잘하는?˝ 나는 공부를 아주 잘 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평소엔 더 노력하라고 그렇게 난리더니 왜 이번엔 그들과 비교하며 공부라는 잣대를 갖다대나 싶어서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일부러 공부를 안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친구들과 동네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며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시비는 싸움으로 번졌다. 그쪽은 사람 수도 더 많았고, 먼저 내 친구를 때렸고, 주위에서 막대나 플라스틱 파이프 등을 찾아서 휘둘렀다. 우린 맨 몸으로 맞섰고, 더 많이 맞았지만 눈에 띄는 큰 상처는 없었다. 반면 상대 중 한 두명이 이빨이 흔들렸고,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나는 등 피가 났다. 상대가 막대나 파이프를 휘두르는 바람에 나도 더 흥분했고, 더 화가 났다. 주민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파출소에서 병원으로 이동해 각자 진단서를 떼고, 경찰서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상대 측의 피해가 더 크다는 이유로 우리는 가해자가 되고, 상대는 피해자가 되었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밤새 취조를 당했는데, 그게 참 웃겼다. 누구를 어떻게 얼마나 때렸는지 말하라는 거였는데, 상대는 다수였고 손에 뭔가를 들었기 때문에 흥분한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누굴 얼마나 어떻게 때렸는지는 별로 기억나지 않았다. 형사는 자기 마음대로 소설 지어내듯 진술서를 작성하고 내게 큰 소리로 윽박지르더니 검은 잉크를 묻혀 열 손가락 지장을 찍게 했다. 그게 정말 너무나도 기분이 나빴다. 사건은 그렇게 검찰에 넘어갔고 그렇게 폭력 전과를 얻었다.

검찰은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들을 불러 강제로 합의를 시키고 사건을 종결했다. 우리는 폭력전과를 달고 청소년 교정 프로그램과 사회봉사 프로그램으로 넘겨졌다. 이 과정도 내게는 마치 코메디 같이 느껴졌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고 먼저 때렸던 녀석들이 어느 야간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깡패 학교로 소문난 학교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문계였다는 이유로 검사보가 가해자인 우리들을 오히려 더 잘 대해주고, 피해자들에게는 욕설을 퍼부었다. 특히 나를 따로 불러서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비교적(어디까지나 비교적) 성적이 괜찮은 편에 속했던 나만 따로 불러서 공부도 잘 하는 녀석이 왜 그러냐?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해라. 저런 놈들하고는 어울리지 말아라 등의 잔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때문에 검사님께서 특별히 신경써서 가볍게 처리한 거라는 등의 말을 전했다. 나는 내가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또 공부를 좀 잘하는 편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대접해준다는 식의 태도도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다.

그 검사보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혔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나 역시 공권력과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불태우며 남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사회가 나를 문제라라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문제아가 되어주마 라고 생각했다. 학교 중앙 현관에서 담배를 피웠고, 야간자율학습을 제끼고 커피숍이나 술집을 찾았고, 여학생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몇 차례 더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했고, 운 좋게 도망치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마치 민감한 뇌관이 삽입된 폭탄 같았다. 누군가 건드리면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상태였다.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입장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가치관이 뚜렸해서 누가 먼저 건드리면 절대 참지 않는다. 다만 누가 건드리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힘을 쓰지는 않는다 라는 내 나름의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교정 프로그램에서 만난 전과자들은 참 각양각색이었다. 온갖 미친 인간들이 다 있더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여자 아이들도 많았다. 웃긴 건 그 안에서도 서열이 있어서 폭력전과는 상대적으로 높은 서열이었다. 다행스럽게 거기서 나를 건드리는 인간은 없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먼저 폭력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맞지만, 맞서 싸운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나를 가해자라고 지목하고 낙인 찍어버린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피해자라고 지목된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없이 잘 살았겠지만, 나는 묵묵히 교정프로그램과 사회봉사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살아야했다. 물론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그 전과로 인해 차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 억울함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긴 시간을 감정을 마구 소모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그 사건을 되돌릴 수 없으니 후회는 부질없지만, 지금 후회가 되는 건 이후 내가 그 사건에 얽매여 살아온 시간들이다. 조금 더 일찍 그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라고 생각해본다.

노동운동을 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뿌리부터 공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고 살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에 대한 불신과 공권력에 대한 혐오가 커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이후 지금까지 사회변혁운동이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다. 나는 학창시절 이후에는 경찰과 용역깡패들로부터 공권력으로 인한 폭행을 엄청 많이 당했다. 내 인생은 좀처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렸을 때는 전경들과 깽패들이 또래니까 맞으면 그냥 열받고 말았지만, 나이 들어서 맞으니까 좀 서럽더라. 이 나이에 내가 저 새파랗게 어린 애들한테 맞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이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사건의 본질이 법의 판단이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알려진 내용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고, 또 한 편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는 그들 모두가 실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인한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가끔 그 시절에 저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많이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성격이나 성향조차 달라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하게 그런 내 자신을 상상해보는 건 좀 끔찍하다. 암튼 지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 그런 과거가 지금의 나라는 인간을 만든 건 사실이다. 학교 폭력으로 인한 수많은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찬찬히 자신의 과거와 마음을 돌아보고 부디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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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21-02-23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죽거리 잔혹사]와 그 영화에 삽입된 김진표, ‘학교에서 배운 것들‘ 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네요. 저도 부당한 걸 참지 않는 성향을 가졌지만 겁쟁이라서 그렇게 못했는데 감은빛님은 겁이 없으신가봐요.

감은빛 2021-02-25 22:23   좋아요 0 | URL
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겁이 좀 나더라도 참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어려서부터 가졌던 것 같아요. 맞는 건 자꾸 맞다보면 익숙해져서 괜찮은데, 아니다 싶은 일을 그냥 넘어가는 건 스스로 못 견디겠더라구요.

ebond 2021-02-2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향이 단호하고 반항적인 기개가 있는 사람이라
더러운 꼴 못 보고 같이 싸우고 참지 않고
계속 그러다 보면 저절로 싸움꾼이 되는 거고
점차 억울해지는 일은 더 많이 생기고, 그것이 결국 님의 팔자가 세서 그래요,ㅎㅎ
여자가 이혼하고 또는 사별하고 여러 일을 당하면 세간에서 팔자가 세다 하잖아요,
남자에게는 잘 안 쓰는 단어죠.
결국 사람은 자기 기질대로 살게 되더군요.

붕붕툐툐 2021-02-23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삶의 일부분이 담겨 있는 글이네요. 교육현장에서 체벌을 없앤 건 정말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폭력은 어찌되었든 사회의 문제도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비굴하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신 거 같아 멋져 보입니다!! 감은빛님도 평안하시길~🙏

감은빛 2021-02-25 22:31   좋아요 1 | URL
아이고, 멋지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제 시각에서 쓴 것이니 저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린 형사들이나, 진단서 상 피해를 더 크게 입어서 피해자 취급을 받았지만 검사보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애들 입장에서는 또 완전히 다른 기억과 입장을 취할지도 모르죠.

체벌은 특히나 매질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시절 학교 선생들은 마치 미치광이처럼 학생들을 때렸어요.

페넬로페 2021-02-24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교 폭력이 자행되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 이 글 읽고 하루종일 맘이 안 좋아요. 학교폭력하면 떠오르는 영상은 제가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로 받은 체벌보다 한 친구가 선생님에게 무차별폭력을 당한게 아직도 눈에 선해요.
더군다나 우리는 여학생이었는데, 그 친구가 그렇게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선생이 교실로 와서 여학생을 무차별적으로 때리더라구요.
학교 졸업하고 그 친구 소식 전혀 모르지만 말해주고 싶어요
넌 잘못 없다고.
혹시라도 아직까지 그 일로 힘들고 맘 아프면 정말 잊어버리라고요.
그 놈이 진짜 나쁜놈이었다고 위로해주고 싶어요^^

감은빛 2021-02-25 22:34   좋아요 2 | URL
에구, 제 글 때문에 마음이 안 좋으셨다니 죄송합니다!

어느 학교에나 그런 미치광이 선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의 그 마음이 어떻게든 가서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희선 2021-02-24 0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보여도 어떤 일인가 했는데, 감은빛 님이 쓰신 글 보고 조금 알게 됐네요 사람은 겉만 보면 모르겠지요 그때 일어난 일을 다 알기는 어렵겠습니다 피해자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인터넷 SNS로 그런 게 빨리 퍼지기도 하는군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한 사람 많았다고도 하던데...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거나 뭔가 잘하는 아이는 그렇게 뭐라 하지 않기도 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지요 부모가 높은 자리에 있는 아이는 그걸 이용하기도 하고, 이건 소설에서 봤던가 공부나 입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학교 폭력은 학교뿐 아니라 부모도 함께 애써야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희선

감은빛 2021-02-25 22:39   좋아요 1 | URL
이런 사회현상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 흥미로워요. 점점 다양한 영역에서 부당함에 맞서고 진실을 드러내려는 시도들이 생기고 빠르게 확산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런 폭로가 모두 진실이라고 볼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워서 또 문제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