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다시 자판을 두드린다. 지난 글에도 썼듯이 사고로 다친 주요 증상 8가지에 대해 쓰려다가 그 첫번째인 안와 내벽과 하벽 골절 이야기만 간신히 쓰고 글을 마쳤다. 오늘은 두번째인 비골(코뼈) 골절부터 다시 써야겠다. 그 전에 잠시 이번 주 일상을 아주 짧게 이야기 하고 시작하겠다.
이번 주는 8월의 마지막 날이 월요일이었다. 만약 일하는 입장이었다면 정말 정신없이 바빴을 날이다. 나는 그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심지어 출근하던 시절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속을 비우고, 다친 몸을 조심스럽게 씻느라 길게 샤워를 하고 (대충 급하게 씻으려다가는 통증 때문에 못 씻는다.) 나와서 전날 저녁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 샌드위치와 두유를 꺼내고, 계란 프라이를 하나 만들고, 견과류를 작은 접시에 담아 책상 앞에 앉아 뉴스를 보면서 먹었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다쳐서 누군가는 고생을 하고 있을텐데,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참 팔자 좋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매 순간 통증을 견디는 입장에서 잠에서 깨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통증 때문에 늦잠을 자기도 어렵도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면 빨리 뭔가를 먹고 약을 먹어야 통증이 줄어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이내 간밤 내내 통증과 싸우며 땀흘린 몸을 씻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앞서도 말했듯 조심조심 씻느라 오래 씻고 나와서 빨리 먹기 위해 비교적 간단히 아침을 먹고 약을 먹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사고로 다쳐서 출근도 안 하고 팔자가 좋다고 말한다면 출근해서 누구보다 빡세게 정신 없이 일해도 좋으니 다치지 않았다면 좋았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행히도 약은 강하게 졸리는 약이라 약을 먹고 조금 쉬다보면 금새 졸거나 잠에 빠진다. 오래 자지는 못한다. 금방 깨서 통증에 괴로워하다가 다시 다음 끼니를 준비하고, 먹고, 약을 먹고 조금 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병원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가거나, 경찰서에 피해자 진술서를 작성하러 가거나, 아이들을 만나러 가거나 밖에 나가야하는 일들도 생기고, 가끔은 오래 나가 있어서 졸린 약을 먹고도 잠들지 못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견디는 날들도 있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번 주는 겨우 3일이 지나가는 상황인데, 그 중 이틀 동안 일정이 많았다. 밖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고, 집에서는 사고와 관련해 이것저것 정보를 찾아보거나,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글을 쓰거나, 내 경과를 자세히 알리는 글을 써야 했다. 결코 팔자가 좋은 일이 아니다.
-02 비골 골절 / 성형외과
앞서 첫번째 이야기를 하는 중에 성형외과 수술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코 뼈 골절에 대해서도 일부 이야기를 했었다. 쉽게 말하면 왼쪽 눈밑뼈가 부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코 뼈가 함몰될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코는 그냥 무너져 내려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추정하는 말투를 쓰는 이유는 일부러 사고 초기 일정 시기까지 내 얼굴을 볼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외면했다. 혹시라도 그때 내 얼굴을 보았다면 평생 그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이 꿈에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는 것도 너무나도 싫었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 라는 현재의 상황은 오히려 내겐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서 다행이란 말을 쓰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다.
우선 코로나 덕분에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무조건 보호자 없이 환자만 입원하도록 시스템을 갖췄다.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사소한 일들은 직접 하거나, 직접 할 수 없다면 간호사나 간호조무사의 손을 빌리거나, 아니면 그냥 포기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게 무척 서운하거나 힘들었다. 혼자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호자 없이 하루종일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호사나 간호조무사의 도움은 무척 고맙지만, 일정 부분 형식적이고 그 한계가 명확했다. 나처럼 혼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절대 보호자의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코로나 덕분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만약 보호자가 늘 내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면 훨씬 더 어려워 졌으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 사는데, 대체 누가 내 보호자로 병실에 오랫동안 머물러 줄 것인가? 사고가 나고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일정 시간동안 이혼한 아내가 내 곁을 지켜줬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너무나도 싫기도 했다. 이미 내 인생과는 관계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내가 발목을 잡는구나 싶은 기분. 진짜 너무 끔찍하게 싫었다. 고통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내 곁에서 내 손을 꽉 잡아주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 순간 억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끄집어 내어 돌아가도 된다고,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울먹이며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애들 엄마는 새벽에 사고 소식을 접하고, 애들 고모, 즉 내 여동생에게 연락했고, 동생은 부모님께 연락을 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걱정을 짊어지고 부산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분명 엄마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렇게 다쳤는데,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엄마가 곁을 지켜준다면 말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몸이 약한 엄마가 내 걱정과 스트레스를 견디며 제대로 된 보호자용 침대 하나 없는 병실에서 나를 돌보는 일은 어마어마한 중노동이 될 터였다. 나 때문에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원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혼한 아내, 엄마, 아버지, 사랑스러운 아이들 등 그게 누구라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망가진 내 얼굴을 보는 일은 결코 원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랬다. 아이들이 받을 충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고 초기에 애들 엄마가 애들이 나를 너무 보고 싶어 한다고 병원에 데려올테니 잠시 얼굴이라도 보라고 할 때 아직은 절대 안 된다고 강하게 거절했다. 나도 일부러 내 얼굴을 안 보려고 버티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코로나19 덕분에 병실에는 보호자가 머물 수 없었고,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 사이에 혼자 남아 묵묵히 견딜 수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게다가 퇴원한 이후에도 집 밖으로 나설 때엔 늘 마스크를 써야 하니 아직 회복되지 못한 얼굴을 드러내보이지 않아도 좋다. 모자 하나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쓰고 나면 얼굴에서 눈만 남는다.
잠시 코로나19 가 미친 영향 덕분에 다행이란 이야기로 새버렸는데, 암튼 성형외과 수술을 통해 무너진 코를 세우긴 했는데, 그것은 의사가 표현한 것처럼 '세워만 놓았을 뿐'이었다. 원래의 내 코보다 낮았고,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비록 내 얼굴이 잘생긴 편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못 생긴 편에 가까웠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얼굴이 좋았다. 아무리 못 생겼었어도 내 얼굴이었으니까. 그 얼굴로 최대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재수술을 통해 내 코를 되찾고 싶다.
코 수술을 받고 나니 코 속에는 깊이에 따라 3중으로 코가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 물질을 채워놓았다. 제일 바깥쪽에 있는 것들은 수술 후 일주일 후에 의사가 꺼내주었다. 그때까지 코 전체가 지지물질에 꽉 막혀 코로는 숨을 쉴 수 없었고,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니, 말을 하거나 먹는 일이 힘들었다. 미음을 먹다가도 숨이 막히기도 하고,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발음이 잘 되지도 않고, 숨이 차서 말을 길게 하기도 어려웠다.
코 중간쯤을 막은 물질들은 수술 후 약 2~3주 사이에 녹아서 흘러내렸다. 이때는 마치 축농증이나 비염에 걸린 사람처럼 줄즐 흘러내리는 물질을 닦기 위해 늘 손에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코로 숨 쉬지 못하는 답답함이 많이 해소되었고, 발음도 많이 좋아졌고, 먹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마지막 맨 안쪽을 막아놓은 물질들은 수술 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녹아서 흘러나왔다. 불친절한 성형외과 의사가 잘 설명해주지 않아서 나는 중간을 막았던 물질들이 흘러나온 이후에 더이상 막아놓은 건 없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완전히 코로 숨을 쉴 수 없는 건 다친 상처 때문이 아닐까 예상했다. 앞으로 평생 이 답답함, 혼자서는 제대로 숨을 잘 쉴 수도 없는 답답함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한참 더 시간이 지나서 맨 안쪽을 막고 있던 것들이 흘러나오고서야 비로소 코가 뚫린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결코 다치기 전 편하게 숨쉬었던 느낌은 아니었다. 여전히 무언가 답답하고, 불편하고,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아마 아주 오래 갈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코 속에는 지지물질을 채워놓았다면 코 위에는 딱딱한 재질로 되니 코의 굴국을 살린 모양의 보호대를 덮어서 붙여놓았다. 이게 또 참 얼굴을 살벌하게 만드는데 한 몫했다. 병원에 있을 때는 이걸 하루종일 붙이고 지내는 것이 참 답답하고 불편했는데, 퇴원하고 나서는 집에서는 벗어 놓고 있다가 자기 전에 다시 붙이곤 했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 수시로 낮잠을 자곤 했기 때문에 집에서도 거의 늘 붙이고 있어야 안심이 되긴 했다. 혹시 자가다 실수로 코가 눌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잘 때는 꼭 붙이고 있으라고 의사가 강조했었다.
그리고 이 보호대는 아직 낮은 나의 코를 오히려 감춰주는 역할과 내가 다친 사람이라고 낯선 이들에게 알려주는 효과를 일으켰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러 가거나 누군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야 할 자리에는 꼭 이걸 붙이고 갔다. 나중에 성형외과 외래 진료 때 이제는 코 뼈가 많이 아물었으니 안 붙여도 된다고 하면서 내게 묻지도 않고 그 보호대를 버려버렸을 때는 좀 화가 나기도 했다.
언젠까지 그 보호대 뒤에 숨어서 내 낮은 코를 감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버려버리다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03 얼굴 열상
사고를 당하자마자 나는 피를 많이 흘렸다. 그 피는 대체로 다 얼굴에서 흘렸다. 피는 코와 뺨의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와 귀를 타고 머리칼을 적시다가 목으로 내려왔다. 온 얼굴과 귀와 머리칼과 목이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가해 운전자는 기겁을 했을 것이고, 출동한 구급대원들과 경찰들도 내가 아주 심하게 다쳤다고 여겼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심하게 다친 것이 맞다.
코 아래쪽은 인대가 다 드러날 정도고 깊게 찢어졌고, 양쪽 뺨으로도 심하게 찢어졌고, 상처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부었고, 얼굴이 제대로 된 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의 나를 처음 찾은 보호자는 앞서도 말했듯 이혼한 아내였다. 그는 내 주위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망가진 내 얼굴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었다.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었을텐데, 꽤 오래 같이 살았던 사람인데, 그런 얼굴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게다가 그는 약 3시간 가량 걸린 1차 봉합수술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았다.
처음 실려간 병원 응급실에서였다. 레지던트 두 명이 부분 마취하고 봉합수술을 시작했다. 찢어진 상처로 인한 통증이 부분 마취 덕분에 오히려 안 느껴져서 조금은 견딜만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이 봉합 수술을 하는 동안에는 최대한 몸을 안 움직이려 조심하면서 내 몸의 상태를 어떻게든 파악해보려고 애썼다. 상체를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오른팔도 팔굼치 아래로 손을 쥐거나 손목을 움직이는 건 가능하지만, 팔 자체를 들어올리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행히 왼팔과 왼손은 아무 이상없이 쓸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봉합수술이 길어지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두 레지던트가 내 얼굴 위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걸 고스란히 느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마취 덕분에 통증은 잠시 잊을 수 있었지만, 살갖을 꿰뚫고 잡아당기고 묶는 감촉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봉함수술이 길어지면서 일부 부위에 마취가 풀리기 시작했다. 의사가 먼저 경고했다. 봉합수술이 길어져 곧 일부 마취가 풀릴텐데, 사정 상 다시 마취를 할 수 없으니 최대한 참으라고. 가능하면 빨리 마무리 해보겠다고 했으나, 한 명은 더 일찍 자리를 떠났고, 다른 한 명도 결국은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 부분 마취가 풀리기 시작한 시점이 내겐 지옥문이 열린 것이나 다름 없는 시간이었다. 너무나도 아팠다. 고통 때문에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입을 꽉 다물고 간신히 낮은 신음 소리만 내며 버티려 안간힘을 썼다. 곁에서 걱정스런 시선으로 계속 지켜보던 애들엄마는 내 손을 찾아 잡고서 꽉 쥐어주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의연하게 통증을 참고 싶었지만, 현실은 늘 찌질하기 마련이다. 점점 나는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점점 신음 소리는 커졌고, 자꾸만 몸이 움직여졌다. 그때마다 눈 앞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레지던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실은 그가 그렇게 긴 시간 고생하면서 꼼꼼하게 봉합을 해준 덕분에 그나마 얼굴이 이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래도 그 순간에는 그 레지던트가 너무나도 싫고 미웠다.
그리고 너무나도 물이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는 내게 물을 마실 수 없다는 처분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부분 마취이긴 하지만 마취를 했었고, 봉합 수술을 한 부위가 하필 입 바로 위쪽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무 목이 말라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물이고, 제일 먹고 싶은 것도 물이고, 물 외에는 어떤 산해진미도 다 맛이 없고, 의미도 없다고 여겼다. 더 바라지도 않고 그냥 딱 물 한 컵만 벌컥벌컥 시원하게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타는 목으로 마른 침을 억지로 삼켰다.
아마 1차 봉합 수술을 마치고 서너시간 쯤 지나서 부산에서 출발한 엄마와 아버지가 도착하셨고, 내 곁을 계속 지켰던 애들 엄마와 교대해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고 낮게 말했고, 나는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고 억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엄마라고 한 번 부르고는 눈물에 눈 앞이 흐려져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 간호사가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고, 상체를 일으킬 수 없어서 빨대로 물 한 모금을 마셨는데, 그렇게 상쾌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이 물 맛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오후 늦게 처음 봉합수술을 했던 두 명의 레지던트가 다시 와서 동시에 2차 봉합수술에 들어갔다. 부분 마취를 하고, 오전에 완벽하게 봉합하지 못한 부위들을 짚어가며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번의 봉합 수술은 거의 4시간이 걸렸고, 그들은 최선을 다 했으나 찢어진 상처가 워낙 깊었고, 상처 단면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지 않고, 지저분하게 찢어져 있어서 완벽히 꿰맬 수 없었음을 설명했다. 그들은 후유증이 생길 확률이 크다는 말로 나와 엄마를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봉합 수술이 끝난 후에 해당 병원에서는 그야말로 나를 짐짝처럼 응급실 한 구석에 방치했다. 그들은 더이상 나를 치료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네 병원에서는 더는 치료할 수 없으니 치료가 가능한 다른 병원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났다. 그렇게 밤이 되어서야 이송할 병원이 정해졌다고 했다.
두 번째로 옮겨간 병원은 외상외과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 사전에 연락이 되어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처럼 생겼지만, 다른 환자들과는 분리된 아마 외상외과가 별도로 사용하는 응급실이 아니었을까 싶은 공간에 옮겨져 대략 열 댓명 정도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둘러쌓여 발가벗겨졌고, 온 몸의 피해 정도를 보여주고 설명하고 있었다.
외상외과 레지던트들은 얼굴 상처를 비롯한 온 몸의 상처 치료에 전문가들이었다. 또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메디폼이라는 상처 치료의 새로운 기술을 접했다.
이 병원에서는 대략 사흘 정도마다 한 번씩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의 상처를 소독하고 메디폼을 갈아줬다. 얼굴은 특히 더 신경을 많이 써줬다. 봉합 수술 후 8일 혹은 9일 정도 지나서 실밥을 제거해줬다. 당시 봉합수술 했던 레지던트들이 코 안쪽은 녹는 실을 사용했고, 바깥쪽과 뺨 부위는 녹지 않는 두꺼운 실을 썼다고 설명했었다.
나는 그러니가 사고 후 약 10일 가까이 지나서 실밥을 제거한 후에야 비로소 거울로 내 얼굴을 보았다. 붓기가 많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망가진 얼굴. 전혀 내 얼굴처럼 느껴지지 않는 어떤 낯선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피부가 찢어진 상처는 그로 인해 주위 신경 조직이 죽어버려서 감각이 일부 없어지거나 감각 이상 및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나는 왼쪽 뺨과 코의 거의 대부분 감각을 잃었다. 코와 뺨을 만지면 내 살이, 내 피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꼭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자꾸 이상한 감각들, 예를 들면 봉합수술을 할 때처럼 실로 꿰어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감각 혹은 살을 후벼 파내는 것 같은 감각들이 느껴졌고, 자주 통증을 동반하기도 했다. 이런 이상 감각들은 심할 때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밤에 자려고 누으면 더 심해져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행히 내 설명을 들은 의사가 딱 맞는 약을 처방해줬고, 그 약을 먹은 이후로는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닐만큼은 나아졌다. 사고 후 약 한 달 반이 지난 지금도 매일 그 약을 먹고 있으며, 만약 그 약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벌써 정신 병에 걸렸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괴롭고 힘든 증상이었다.
문제는 이 증상이 상당히, 아주 오래갈 것이라는 의사들의 예언이 있었다. 적어도 1년. 아니 1년이 넘게 지나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어쩌면 이 감각 부분은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을테니 결국 어느 시점에서 적응하고 평생 살아야 한다고 말한 의사도 있었다.
천만 다행으로 안면 근육을 다치지는 않았다. 양 뺨과 입과 코 근처의 근육들은 다 움직일 수 있다. 다만 아직 붓기가 덜 빠져 원활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근육도 있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거나 어색하긴 하지만 이론적으로 표정은 다 지을 수 있다.
언젠가 나는 페이스북에 매일 아침 샤워하고 거울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썼었다. 벗은 내 몸이 너무 예뻐서 눈이 즐겁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보는 일이 너무나도 괴롭다.
몸에는 일단 오른쪽 가슴 근육 옆으로 길게 수술자국을 봉합한 흉터가 있고, 그 조금 아래로 짧게 폐에 튜브를 삽입했던 흉터가 있다. 뭐 이 흉터들은 다 아물었고, 어차피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어서 이젠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얼굴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저 낯선 얼굴은 대체 누구인가?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내 익숙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정말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평생 이 낯선 얼굴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하고 겁나고 힘들고 괴롭다.
퇴원 후 몇 명의 지인들을 만났다. 어지간하면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안 만나고 싶었지만, 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만난 사람들이 있었고, 또 도움을 주신 분들도 있었다.
일 때문에 만난 조합 이사이자 선배들은 얼굴 때문에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고. 이 정도면 바로 복귀해서 일 해도 되겠다고 했다. 물론 이 분들이 표현은 본인들의 솔직한 심정이며, 일부러 나를 건드릴 의도는 없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들의 말이 비꼬는 것처럼 들리거나 왜곡된 의도를 숨긴 것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친한 선배는 몇 해째 독거 어르신 반찬 봉사를 해왔는데, 내가 퇴원한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죽과 반찬을 해와서 전해줬다.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안 챙겨줘도 된다고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도 않고 계속 가져온다. 그나마 바쁜 양반이라 자주가 아니라 주 1회 정도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 선배도 마스크를 쓴 상태의 나를 보더니 걱정한 것과 달리 멀쩡하다는 표현을 썼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은 아니 꽤 오랫동안 계속 마스크 쓰고 살아가야 하는데, 찢어진 상처 흉터 몇 개와 코는 마스크 쓰면 안 보이니까 괜찮다고. 나중에 다시 재 수술 받으면 되지 않냐고 말했다. 그래 그 말이 틀린 말은 분명 아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는 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더라.
역시나 오늘도 글은 길어졌다. 그래도 지난 번과 오늘까지 해서 얼굴 부위 3가지 손상은 마쳤다. 다음에는 아래로 내려와 얼굴 다음으로 큰 손상이었던 가슴 부위 손상에 대해 적어야겠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혼자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 못해 아무거도 할 수 없음을. 그렇게 무기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소변과 관련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고민이 깊었다.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의 영역이었다. 총 3주 간의 입원 기간 동안 1주일 정도 혼자 움직일 수 없었는데, 그 시간이 뒤의 2주일에 비하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고 괴로웠었다.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다. 다음에 또 언제 책상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컨디션이 괜찮으면 빨리 돌아올 수 있겠지.
매미에 비교할 정도로 위력이 강한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부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 특히 내 고향 부산에 피해가 없기를. 부산에서도 우리 부모님께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