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가치
여러 사람들과 회의를 하다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일의 생산성과 속도 면에서 보면 답답함이고, 사람으로 보면 안타까움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고 일이 성사되도록 논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의 말은 거의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반복하면서 논의를 방해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외로 후자의 사람들을 생각보다 자주 보게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전제 하나만 깨달아도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면 안타깝다.
더불어 세상의 이치는 우리가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더 나은 방향, 더 바람직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건을 두고 누구나 비슷한 감정과 생각만 떠올린다면 우리는 늘 그 범주에서 머물뿐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확률이 높다. 누군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과 감정을 말하고, 주위 사람들이 그에 호응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 생기고, 그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런 다름의 가치가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똑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연인이나 부부라해도, 부모 자식간에도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거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친한 사이라면 보다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비슷하거나 다른 생각과 감정이 있다. 그런데 각자의 감정과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쩌면 사고방식 혹은 수용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기준
나는 확실히라고 말해도 좋을만큼 남들과 좀 다른 기준들이 있다. 물론 삶에서 모든 부분이 그런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남들과 좀 다른 면들이 두드러지는 측면들이 있다. 노동운동가이자 민주화 투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랬는지 몰라도 늘 남들이 다 쉽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나는 의문이 많았다. 그래서 별난 놈이라거나, 괴짜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남들과 가장 다를 거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으로서의 일을 선택할 때 돈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터를 찾을 때부터 이후 일터를 옮길 때마다 급여조건은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어떨 때에는 식비는 고사하고 교통비도 안 될 돈을 받고 환경단체에서 일할 때, 누군가 막노동 이삼일 뛰고 한 달 내내 놀아도 그 보다는 많이 받겠다고 했다. 결국 그 단체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지만, 돈 때문은 아니었다. 단체 내부에 회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발견했고, 이를 문제제기했지만, 윗선에서 덮어버리면서 내부 고발자인 내가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그 단체를 그만둔 후에 급여 조건이 훨씬 좋은 다른 시민단체에 들어간 뒤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앞의 단체에 오래 일하지 않고 그만둔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긴 했다.
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무래도 생활비를 걱정할 수 밖에 없어서 상대적으로 좀 더 급여가 많은 일을 찾거나 고민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는다면 반드시 매달 양육비를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을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돈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돈이 조금 부족해도, 아니 많이 부족해도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 생각까지 하면서 그 일을 선택하는 것이 나의 기준이라는 얘기다.
앞서 교통비도 안 될만큼의 급여를 받았던 단체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면서 돈을 조금 모아두었었다. 그 단체 활동가로 있을 때에도 외부 강의나 원고 등을 끊임없이 알아보곤 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그 단체에서 내가 지속가능할만큼의 급여 수준을 만들어 가고 싶었고, 만들어갈 자신도 있었다. 지금의 일터도 마찬가지다. 처음 여기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었던 선배들이 물었던 제일 핵심 질문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이 급여를 받고 생활이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일과 병행해 부수입이 생길 수 있는 일거리를 찾을거라고 답했다. 실제로 가끔 교정교열 일거리를 병행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급여만으로는 생계비를 다 감당하기 어려워서 은행 대출을 이용하고, 지인들에게 단기간 돈을 빌리기도 했다. 나중에 이혼하고 따로 월세방을 얻으면서는 양육비와 내 생황비를 감당하기 위해 이런저런 부수입거리를 많이 찾기도 했다. 다행히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최저임금도 많이 오르고, 내 급여도 많이 올라서 최근에는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과거에 빌렸던 돈은 대부분 짧은 기간 안에 다 갚았다.
수포자
누군가 수학을 포기한 사람을 '수포자'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수포자였다. 국민학교 2학년때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매일 남들 다 하교한 후에도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지만, 결국 다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구구단을 모른다. 술자리에서 구구단 게임을 하면 나는 무조건 빠져야 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구구단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가 정말이냐고 막 질문을 해대길래 실제로 대답을 못했다. 그때 일행들의 표정과 반응이 잊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보충수업시간에 국영수 성적에 따라 우열반을 나눠서 운영했다. 나는 국어는 전교 등수가 거의 1등이어서 최상위 등급반(소위 서울대 반이라고 불렀다.)에 들었고, 영어는 전교 등수 상위권에 속하는 두번째 등급반(소위 연고대 반이라고 불렀다.)에 들었는데, 수학은 아예 대학 공부 자체를 하지 않는 최하위 등급(여기는 소위 말하는 별칭조차 없었다.) 반에 속했다. 왜냐하면 수학은 전교 등수가 거의 꼴찌에 가까웠다. 한번은 중간고사에서 수학 0점을 받았다. 충격이었던 건 모든 문제를 실제로 다 풀어서 답을 썼는데 0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나는 수학 점수가 낮은 것에 대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포기하고 살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평생 수학은 쳐다도 보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내 머리에서 수학이라는 카테고리를 깨끗하게 지웠다.
내 기준에서는 수학이란 일상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다를 것이다. 수학을 좋아하고, 일상에서 수학과 관련한 지식이 꼭 필요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나는 큰 아이가 초등 4학년 즈음부터 수학을 가르쳐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역시 이제 초등 고학년이 된 작은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마 작년부터였던 것 같은데, 수학 숙제를 물어봐서 살펴봐도 알수가 없었다. 큰 아이는 지금도 가끔 수학 숙제를 하다가 내게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아빠는 모른다를 반복한다. 만약 살펴보고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백만번이라도 살펴보겠지만, 나는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다.
최근에는 친한 거래처 담당자와 업무 이야기를 하다가 '코싸인' 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부피와 면적과 각도 이야기였는데, 그 분이 이래저래 설명을 하시다가 "코싸인을 적용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계산하면 000가 나오는데"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전 부분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던 나는 코싸인이란 단어가 나온 후로는 아예 막혀버렸다. 음, 평생 수학은 쳐다보지 않고 살아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일하다가 코싸인을 만날 줄이야! 그런데 사실 내가 그 부분에서 세부적인 계산을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 부분은 그 분이 알아서 잘 계산해주시고, 나는 그 자료를 받아서 이후 업무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 분이 내게 그 부분을 계산식까지 나열하며 설명하실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몸에 잘 맞는 옷
토요일인 오늘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온 몸으로 기분 좋은 근육통을 느꼈다. 이 감각 참 오랜만이다. 오늘 근육통을 느꼈다는 얘기는 이틀 전인 목요일에 강도 높은 운동을 했다는 뜻이다. 나는 정말 정확하게 이틀 후에 운동 부위에 근육통을 느낀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면서 한여름이 아닌가 싶다. 더워서 이불을 안 덮고 잤다가 약간의 감기 기운을 느끼긴 했는데, 또 잠들 무렵에는 더워서 자꾸 이불을 안 덮게 된다. 얇은 여름 이불이라도 마찬가지다. 올해 여름은 엄청 더울거라는데,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다. 재작년 여름은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유튜브에서 운동 동영상을 주로 보는 편이라 유튜브를 딱 켜는 순간 '운동 동기', '모티베이션' 등의 단어들이 붙은 영상들이 눈에 띈다. 주로 근육이 잘 발달된 사람들이 멋지게 운동하는 모습, 몸매를 뽐내는 모습 등을 담은 것들이다. 보면서 '멋지다!', '예쁘다!' 감탄은 하지만, 그걸 보면서 운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나는 운동을 할 때도 확고한 기준이 있다. 근육의 크기를 키우는 운동인 고립운동과 펌핑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온 몸의 협응력을 기르고 특정한 기능을 살리는 동작들을 선호한다. 주로 몸체의 안정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코어 단련을 우선 순위로 둔다.
내게 제일 큰 운동 동기부여는 사실 여름 옷이다. 몸에 잘 맞는 옷. 여름 옷은 몸매가 잘 드러난다. 예전부터 반팔 옷은 몸에 붙는 옷을 좋아해서, 대부분 그런 옷이다. 내 기준에서 제일 보기 싫은 것이 배 나온 사람이 몸에 붙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아마 남들도 대부분 싫어하지 않을까. 그래서 항상 여름을 대비해 봄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몸매 관리를 하곤 했다. 올해도 4월부터 운동을 했다. 나름 꾸준히 하긴 했는데, 운도을 본격적으로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운동 강도를 높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준비운동을 통해 예열을 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운동 강도를 높여 본운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자꾸만 몸 컨디션이 그만큼 올라오지 않았다고 생각되어 제대로 본운동을 해보지 못하고 운동을 끝내는 날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이제 고질병이 되어버린 관절통증이 큰 영향을 미쳤다. 몇 년전부터 관절을 크게 다친 이후로, 관절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는 겁이 나서 원하는 동작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무리했다가 또 관절을 다치면 몇 달을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공포가 생겼다.
운동 수행 능력 저하
그렇게 봄을 다 보내고 이른 더위와 함께 여름이 왔는데, 여름 옷을 딱 입으려고 보니 영 핏이 살지 않는 거다. 상대적을 몸에 덜 붙는 옷을 입으며, 날렵한 몸매를 잘 뽐낼 수 있는 멋진 옷을 입기 위해 운동 강도를 좀 높여야지 생각한 것이 지난 주였다.
그 전부터 달리기와 맨몸 운동 중심으로 몸을 좀 만들어 놓았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운동에 들어가도 큰 무리가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너무 오래 쉬어서 그랬는지 내 몸의 운동 수행 능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늙어서 운동도 마음대로 안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서러웠다.
어쩌면 다시 조금씩 꾸준히 하다보면, 다시 조금씩 운동 능력이 올라가긴 할 것이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서둘러서 오버 트레이닝을 해버리면 꼭 부작용이 생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올해 여름은 망했다는 것. 몸에 잘 맞는 예쁜 옷을 올해 여름에는 못 입을 확률이 클 것 같다. 지금 예상은 그렇다. 어쩌면 만에 하나 당장 다음주에 또 몸 컨디션이 확 올라가서 운동에 불이 붙고, 술을 좀 줄이면 7월 말이나 8월 초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몸매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둘레길
몇 주 전에 친하게 지내는 몇몇 지인들과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예전에 지역 녹색당에서 만든 등산모임이었는데, 이젠 그 모임에 속한 이들이 모두 탈당했다. 탈당은 했고, 이젠 더이상 녹색당 등산모임은 아니지만 그 멤버들은 꾸준히 산에 가고 있다. 그 모임의 초기 운영자로서 최근 몇 년간 거의 산에 가지 못한 입장에서 기회가 되면 꼭 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주말 마다 아이들과 지내느라 산행은 꿈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애들 엄마가 장인어른 산소에 아이들과 함께 가야한다고 토요일 저녁에 아이들을 데려갔고, 일요일은 하루종일 비어 있는 날이 생겼다.
예전에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같이 북한산에 자주 다녔다. 아랫쪽 평탄한 길에서는 양쪽에 아이들 손을 잡고 걷고, 비탈길에서는 작은 아이를 안고, 큰 아이 손을 잡고 올랐다.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운 곳에서는 하나씩 안아서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셋이 산에 다니는 일이 내게는 일상의 즐거움이었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힘들어했고, 무서워했다. 결국 나 좋자고 계속 싫어하는 아이들을 산에 끌고 가는 일은 안된다고 결론 내리고 산을 포기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암튼 아이들 없이 친한 사람들과 둘레길을 걷는 것도 참 좋았다. 일행 중 친한 형이 그냥 둘레길만 걸으면 재미가 없으니 중간에 바위 하나만 올라서 등산다운 등산을 맛만 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당연히 찬성이었다. 안그래도 평탄한 둘레길을 걷는 건 너무 심심하다 느끼던 참이었으니. 비탈길과 바위길을 30분 가량 올라가서 중턱쯤의 바위에 올랐다. 거기서 그 형이 준비해 온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시원한 바람과 멋진 경치를 즐기다가 내려와서 둘레길을 마저 걸었다.
올라갈 때는 빠르게 잘 올라갔다. 어려서부터 산동네에 살았기에 산을 잘 타는 편이라고 늘 자부해왔었다. 꽤 오래 산을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내려올 때가 문제였다. 이놈의 무릎과 발목이 자꾸 신경쓰여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뛰어서 내려왔을 길을 천천히 내려오는 것 만으로도 힘들었다.
둘레길의 막바지에 단계적으로 높이가 높아지는 철봉 3칸이 나타났다. 남자들은 꼭 철봉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철봉에 매달렸다. 키가 제일 작은 형이 제일 아랫칸 철봉에서 뒤돌아오르기 기술을 시전했다. 나도 중간 높이 철봉에서 같은 동작을 했다. 이어 후배가 제일 높은 칸에서 더 어려운 동작인 머슬업을 했다. 그쯤하고 그냥 내려가려 했는데, 이제는 턱걸이를 누가 많이 하느냐 얘기가 나왔다. 형은 시도해보다가 하나도 못하고 말았다. 후배는 머슬업 하느라 힘을 다 써버렸는지 역시 턱걸이를 하나도 못햇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집에 실내 철봉이 있어도 옷걸이, 빨랫대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예전에는 아침에 눈 뜨면 매달리고, 집에 들어와 씻기 전에 매달리고 하루 두 번씩은 매달렸건만, 어깨 통증을 핑계로 참 오래 외면해왔다. 과연 몇 개나 할 수 있을지 나로서도 궁금했다. 결과는 3개. 힘을 더 쓰면 한 두개는 더 할 수 있었을텐데, 모양 빠지게 막 끝까지 힘을 쥐어짜내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혼자였다면 당연히 도저히 더 안 당겨질 때까지 당겨서 운동했겠지만. 옆에 있던 형이 역기 드는 사람이 그 정도는 해야지 라고 한 마디 하길래 좀 부끄러웠다. 어깨 관절 통증 핑계와 예전이었다면 어쩌고 하면서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날 이후로 다시 실내 철봉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가 가끔 크고 무거운 빨랫대라고 말한 것이 생각나서 더 열심히 매달렸다. 어깨와 손가락 마디 통증 때문에 원하는 만큼 운동이 잘 되지는 않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다시 예전의 페이스를 찾을 수 있겠지.
화상 회의
토요일 아침인데, 화상 회의가 하나 있었다. 어쩌다 올해 운영위원장을 맡게 된 단체 운영위 회의를 오늘로 잡았었는데,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화상 회의를 하는 것으로 바꿨다. 화상 회의라는 게 참 익숙해지기도 어렵고, 잘 운영하기는 더 어렵고 좀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더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잠든 아이들 이마에 입맞추고 책을 읽었다. 머리 맡에 쌓아둔 책 여러 권 중에서 딱 손에 잡히는 책이 이 책이었다.
단편 SF 소설집인데, 첫 작품부터 흥미진진하고 짜임새도 좋다고 느꼈다. 이 작가 이름을 많이 들었는데, 역시 이름이 알려질만한 필력이더라.
나중에 큰 아이가 깨서 학원 갈 준비를 했고, 작은 아이는 깨자마자 팬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재료와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나는 책을 더 읽다가 아이들 밥을 챙기려 했는데, 큰 아이는 늘 그랬듯이 안 먹고 그냥 나가버렸고, 작은 아이는 팬 케이크를 만들어 먹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곧 화상 회의를 해야 하니, 알아서 만들어 먹으라고 했다.
화상 회의라 집에서도 접속이 가능하니 참석률이 높았다. 다들 편안한 옷차림에 머리도 조금씩은 헝클어진 모습. 평소 회의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작은 아이가 팬 케이크 재료를 사러 가겠다고 해서 이것저것 당부하느라 접속이 조금 늦었는데, 딱 들어가자마자 "드디어 위원장님께서 접속하셨네요."라고 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회의 진행을 위원장인 내가 해야하는데, 사전에 실무책임자에게서 회의 안건을 전달 받지 못해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화상 회의는 왠지 적응이 되지 않아서 영 자신이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대표님께 진행을 부탁드렸고, 대표님께서 회의 진행을 맡아주셨다.
다행히 특별히 중요한 논의 안건이 있는 건 아니어서 문서로 회람한 보고 안건들을 짧게 브리핑하고 공유해야 할 정보들을 나누고, 한 두 건의 짚어야 할 상황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운영위원들이 대체로 화상 회의가 익숙하지가 않아 원활한 회의 진행이 어려웠다. 앞으로 코로나19와 이후 또 인류를 덮칠 다른 전염병들 때문에 화상 회의에도 익숙해져야 할 텐데, 나는 아무래도 좀 자신이 없다. 회의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회의를 많이 하는 편이고, 회의 진행에도 익숙한 편인데, 화상 회의는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것도 자꾸 하다보면 익숙해 지긴 하겠지.
회의 중간에 작은 아이 팬 케이크 만들기를 도와주느라 자주 자리를 비웠다. 반죽이 적당한지를 봐주고, 타는 냄새가 나서 가스레인지 화력 조절을 해주고, 처음 구운 케이크를 살작 맛보고 맛있다고 폭풍 칭찬도 해주었다. 자꾸 작은 아이가 와서 회의 장면이 신기한지 막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여러모로 오래 기억에 남을 토요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