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자마자 출판계는 날벼락을 맞았다. 국내 대형 도매상 중에서 거래량 규모로 2위인 송인서적이 부도를 맞았다. 페이스북 지인들 중 출판계 선후배가 많아서 금방 이 소식을 접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만약 내가 아직도 출판 영업자로 일하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만한 소식이다. 순간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중소형 출판사 영업부장을 맡고 있거나, 창업해 1인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송인서적에 아주 오랫동안 일해왔던 친구가 떠올랐고, 여러 선배들 얼굴이 떠올랐다.


부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떠오른 생각은 '중소형 출판사 피해가 어마어마하겠구나' 였다. 송인서적은 예전부터 그런 경향이 있었다. 큰 출판사들은 오히려 거래 규모에 비해 잔고도 낮고, 수금도 현금으로 받아가고, 중소형 출판사들은 잔고가 높고, 지불을 4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아가야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은행 어음이나 전자어음으로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예전에는 문방구 어음이라 부르는, 4개월 후에 송인서적에서만 다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종이조각을 지불했다. 오래전 맨 처음 영업자로서 이 문방구 어음으로 지불받았을 때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게다가 송인은 북센에 비해 재고도서 파악이 잘 안 되고, 잔고에서 전국 서점에 깔려있는 도서와 송인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를 뺀 금액(업계 용어로 '공간'이라 부름)도 알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 힘없는 중소형 서점들은 더욱 제대로 된 수금이 어렵다. 이는 거래량에 비해 계속 잔고가 높아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어디 지역 소매 서점 하나가 폐업하거나 부도나면 반품 폭탄을 맞기도 한다.


한편 송인은 '일원화'라고 부르는 다른 도매상과 거래하지 않고, 송인하고만 거래하는 출판사가 꽤 많은 곳이다. 내 주변에 그런 출판사가 제법 있었다. 어차피 규모가 작을 때는 여러 도매상에 책을 뿌리는 것 보다는 한 곳을 통해 배포하는 것이 나을 수 있고, 일원화 출판사에 대한 배려나 혜택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도가 난 지금 송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일원화 출판사들은 더 큰 폭탄을 맞았을 것이다.


나는 첫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출판사에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송인서적의 잔고를 줄이고, 현실적인 수금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수금액을 결정하기 위한 전무님과의 면담이 무척 어렵고 힘들었다. 한편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나중에는 그 전무님과 많이 친해져서 대부분 내가 원하는 수준의 수금을 받아갈 수 있었다. 


오늘 저녁 몇몇 친구들과 선배들과 통화를 했다. 피해액을 물었더니 대개 예상 범위였다. 좀 적으면 1천만원에서 2천만원, 좀 많으면 3천만원에서 4천만원. 경우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중소 규모 출판사에서 3천~4천만원은 1년치 순수익의 3분의 1이나 절반(어쩌면 그 이상)에 해당할 수 있는 돈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타격이다. 어렵게 만들어 유통시킨 책들과 수금받아온 어음들이 한순간에 종이 쓰레기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아니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일했던 출판사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그만두고 거의 3년 동안 딱 한 번, 그것도 볼일이 있어서 찾아갔을 뿐,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큰 일이 닥치니 연락이 왔다며,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바빠서 연락을 못드려 죄송하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 피해 규모를 물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만둔지 꽤 되었지만, 매출 규모를 뻔히 짐작하는데, 굳이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암튼 내가 그만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잔고를 줄여서 생각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타격이 크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출판사를 그만두면서 나는 대표님께 전달한 인수인계 문서에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송인서적에는 신간을 최소한의 수량(10권 이하)으로 보낼 것"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잔고가 늘어날 위험이 있었다. 신간을 적게 보낸 것이 다행이었다고, 내가 인수인계 문서에 적어놓은 말 덕분에 피해가 줄었다는 말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작스런 내 연락에 친구들은 한결같이 "송인 부도 덕분에 네 연락을 다 받아보네!" 하는 반응이었다. 인정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간 출판계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거의 연락을 안 하고 살았다. 업계를 떠난 이후로 대화 주제나 공감대가 달라진 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정말 물리적으로 바쁜 삶을 살기도 했다.


이번 부도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없어보인다.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짐작컨데 방법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중소형 출판사들 중 피해액이 큰 업체들의 연쇄 부도 가능성을 의미한다. 쓰레기 조각이 되어버린 어음은 고스란히 빚(대개 4개월이 되기 전에 인쇄소, 지업사 등 거래처에 현금대신 지불하므로)이 되고, 전국 소매서점과 송인 창고에 묶여 있을 도서들은 송인 채권단에게 압류 당할 게 뻔하다. 그리고 그 압류된 도서들이 나중에 다른 유통망을 통해 반품도서로 돌아오면 2중 피햬를 당한다. 안 그래도 책이 안 팔려 단군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을 해마다 갱신하는 판에, 이정도 피해를 견디고 버티기는 쉽지 않다. 출판계에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불어닥치지 않을까 두렵다.


마침 다음 아고라에 '부도난 송인서적에 공적 자금 투입 필요합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송인은 이미 IMF 시절에 한번 부도가 났다가 출판계의 수혈을 받아 간신히 다시 살아난 도매상이다. 이번에도 외부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속으로 무척 안타깝지만 나는 이제 외부자의 시선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가고, 썩어들어가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부디 이 사태를 잘 이겨내시길 바란다!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petition/read?bbsId=P001&articleId=197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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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1-0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선배 둘도 중소출판사를 운영하는데 화가 미치지 않기를 바라네요. 걱정입니다. 안 그래도 불황의 나락에서 허덕이는 출판계가 얼마나 더 떨어지게 될지...

2017-01-04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0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MF 때처럼 출판사가 문 닫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체부는 개인 업체의 부도라고 해서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정유라 챙겨줄 때부터 알아봤지만, 문체부야말로 해체되어야 합니다.
 

뜀박질과 성격


작은 아이는 늘 뛰어다닌다.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뛴다.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 큰 아이는 조금 달랐다. 가끔은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주로 걸었던 것 같다. 나는 어땠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늘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늘 뛴다. 아침에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갈때 뛰고, 일터 건물 안에서 화장실을 다녀 올때도 뛰고, 회의실로 이동할 때도 뛰고, 외근을 나갈 때에도 늘 뛴다. 퇴근후 버스를 타러 가거나, 버스를 내려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도 뛰고, 약속이 있어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도 뛴다.


작은 아이가 뛰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어린이들은 늘 뛰는 구나. 나도 늘 뛰는데, 그럼 나도 아직 어린아이처럼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큰 아이는 그렇게 뛰지 않았던 것 같다고 기억하면서, 그럼 이건 성격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큰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다녔다는 기억이 거의 없기도 하고, 어느 기억 때문에 잘 뛰지 않는 아이라고 기억한다. 한 서너살 때였다. 잡화점 지하에서 아이가 어느 물건에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내가 물건을 찾기 위해 진열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든 아이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불안한 마음에 나를 찾기 위해 우다다다 뛰어다녔던 것이다. 아이의 뜀박질 소리만 듣고도, 녀석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며 나도 뛰었다. 마침내 진열장 모퉁이에서 마주쳤을 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안겼다. 나는 녀석을 번쩍 안아 올려서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아빠를 잃어버린 줄 알고 깜짝 놀랐으리라. 그러면 큰 소리로 아빠를 불러 찾았으면, 내가 대답을 했을텐데, 녀석은 겁을 먹고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암튼 그때 아이가 그렇게 뛰었던 것이 의외였던 기억이 확실히 남아있다.


또 한 번은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은데, 집앞 공터에 아이가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 걸, 애들 엄마가 보고 얘기해주었던 기억이다. 큰 아이는 유난히 겁이 많아 울퉁불퉁 바닥이 고르지 않은 흙길을 무서워했다. 넘어질까봐 겁을 먹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신나서 뛰어노는데, 우리 아이 혼자만 꽤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 공터에 아이 손을 잡고 가끔 놀러 가는데, 아이는 조금만 경사가 진 길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양 팔을 벌렸다.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나와 둘이서 그렇게 산책을 나가서도 아이는 내 손을 꼭 잡은 상태에서만 뛰어 놀았다. 작은 아이는 반대다. 내가 손을 잡고 있으면, 내 손을 뿌리치고 혼자 뛰어다닌다. 이건 확실히 성격(혹은 기질) 차이인것 같다.


서오능 한 바퀴


크리스마스 날 점심 무렵 아이들을 만났다. 일주일 만의 만남이었다. 지난 주는 저녁 내내 일정이 있었다. 평일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해서,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분식집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어디론가 놀러가려고 했다. 아이들은 공원에 가자고 했는데, 아주 작은 소공원 말고, 좀 놀만한 곳은 가장 가까운 공원조차도 버스나 지하철로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그러다가 서오능이 생각났다. 그나마 버스 이동거리가 짧은 곳이었다. 예전에 차를 팔기 전에는 주말에 종종 갔었다. 몇 해 전 차를 팔고 나서는 한번도 안 갔던 것 같다.


버스를 내려 입구를 찾는데, 풍경이 많이 변해있었다. 대대적인 공사를 한 모양이다. 얼마나 오래 안 왔던 건지 실감했다. 작은 아이는 우리 중 제일 최근에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왔던 모양이다. 입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 옛날 기억만 떠올려 익숙한 풍경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입구를 지나쳐 더 걸었다. 결국 한참을 들어가도 내 기억에 있던 그 입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아까 지나쳤던 입구로 돌아가야 했다. 작은 아이는 본인 말이 맞았다며 큰 소리를 냈고, 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서오능 안에서 아이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았다. 나도 가끔 그 장난에 합류했다가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하면서 돌아다녔다. 예전에 마지막으로 왔을 때, 장희빈의 묘 근처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만나, 아이들 둘 다 그 오르막을 오르기를 거부해서 다시 돌아나왔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과연 한 바퀴를 다 걷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좀 컸으니 가능할 수 있겠다고 내심 기대하며 걸었다.


이번에 아이들은 장희빈 묘를 만나기도 전에 다리가 아프다며, 배가 고프다며, 피곤하다며, 졸리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졸랐다. 나는 이런저런 말들로 좀 설득을 해보다가 안 되자, 그냥 애들을 두고 혼자 성큼성큼 걸었다. 일단 장희빈 묘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볼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자신들을 버리고 올라가버리자 불안했는지 결국 장희빈 묘까지 따라왔다. 묘 앞에서 잠시 장난을 치고, 사진을 찍고 돌아나와서 오르막길로 더 올라갈 것인지 내리막길로 가서 입구로 돌아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아이들은 양쪽에서 내 팔을 하나씩 붙잡고 찰싹 달라붙어서 돌아가자고 졸랐다. 나는 몇 년 전에 왔을 때, 여기서 너희가 돌아가자고 해서 그냥 갔는데, 오늘은 꼭 한 바퀴를 돌아보고 싶다고 설명하고, 일단 갈 수 있는데까지는 좀 더 가보자고 했다. 더 떼를 쓸 줄 알았던니, 아이들은 어쨌든 따라왔다.


애들에겐 조금 가파른 오르막을 다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내리막길로 가면 더 크게 한 바퀴를 도는 셈이고, 좀 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길은 더 힘들지 모르나, 시간과 거리상으로는 더 이득이었다. 아이들에게 설명했더니 그냥 왔던 길로 되돌아 가자고 했다. 나는 이제 그렇게 돌아가는 길이 더 멀거라고, 여기 오르막이 제일 빠른 길일거라고 설득했다. 아이들은 그 흙길을 무서워했다. 양 손으로 아이들 손을 꼭 붙들고 오르막을 올랐다. 조금만 오르면 평탄한 길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크고 작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짧지만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하나 만났고,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아주 길고 가파른 내리막 계단을 만났다. 아이들은 조금 무서워도 내 손을 꼭 잡고 따라왔는데, 여기서는 둘 다 무척 겁을 내며 걸음을 멈췄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가파른 계단이었다. 폭이 좁아서 양 쪽에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갈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 내 손을 잡지 않으면 내려갈 수 없었다. 아니 아이들은 무서워서 못 내려가겠다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간신히 설득해서 작은 아이를 옆에 두고 큰 아이는 왼손을 뒤로 뻗어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내가 마치 아이들을 세뇌시키듯 안 무섭다 안 무섭다 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작은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따라했다. 이 계단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왜 이렇게 또 길어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긴 계단을 모두 내려왔다. 밑에서 우리가 내려왔던 계단을 올려다보며 아이들에게 잘 했다고 격려하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남은 길은 꼬불꼬불 돌아 내려가는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도중에 벤치를 만나서 잠시 쉬었다가 왕릉 하나를 더 살펴보고 입구로 돌아갔다.


밑에서 찍은 사진이라 별로 가팔라 보이지 않는데, 위에서 볼때는 엄청 가팔랐다.



나는 처음으로 한 바퀴를 다 돌아서 무척 재미있었다. 아이들도 신나하긴 했지만, 그 계단을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입구를 나오자마자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 배가 고프다 난리가 났다. 근처에 음식점들이 많아서 바로 뭔가 사먹을까 생각했는데, 큰 아이가 계속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싫다고 했다. 결국 버스를 타고 동네로 돌아가서 닭한마리 집을 갔다. 큰 아이는 처음에 그 집도 싫다고 했으나,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아이가 양보했다.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떡 사리를 시켜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다시 왔더니 아이들도 예상외로 맛있게 먹었다.


재밌게 놀면서 산책도 하고, 맛난 음식으로 배도 채웠으니 성공이었다. 다음 날이 휴일이라면 함께 늦잠을 자며,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장난을 칠 수 있을 텐데, 월요일이라 아쉬웠다. 게다가 난 출근할 생각에 급 우울해졌다. 닭과 함께 소주 한 병을 비웠건만, 술이 땡겨서 막걸리를 샀다. 아이들은 과자를 먹고, 난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책 읽고 싶어, 기타 치고 싶어















올해 마지막으로 구매한 책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들이다. 예전에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앞부분만 조금 읽다 말았는데, 그 책부터 먼저 읽고 하나씩 마저 읽어야지. 연말에 바쁘긴 하지만 꼭 하루 휴가를 내서 책을 읽어야겠다.



아이와 함께 갔던 광화문 집회에서 "근혜는 아니다 근혜는 아니다" 노래를 들은 큰 아이가 크리스마스 노래라고 알아듣길래, 집에 와서 이 영상을 보여줬다. Walk off the Earth 는 예전에도 기타 하나를 다섯명이 연주하는 동영상을 보여줬는데, 이번에는 [펠리즈 나비다]를 그렇게 연주했다.



이 동영상은 한동안 계속 무한 반복으로 봤었다. 기타를 다섯명이 치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연주 솜씨가 훌륭해서 더 놀라웠고, 세 명의 보컬 모두 개성있는, 매력적인 목소리가 좋아서 또 놀라웠다. 처음엔 여성 보컬의 외모에 자꾸 눈이 갔는데, 자꾸 반복해서 보다보니 화면 맨 오른쪽에 수염 기른 아저씨가 제일 귀여워서 그 아저씨만 보고 있게 되었다.


아,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고향집에 있는 기타는 네크가 휘어서 못 쓸텐데, 하나 새로 살까 말까 하는 생각을 벌써 2년째 하고 있다. 사려니 사놓고 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묵혀둘까봐 걱정인데, 가끔 이렇게 치고 싶은 때는 아쉽다. 큰 아이가 기타에 관심을 가지면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그냥 확 사버릴텐데, 녀석은 가야금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2년 전 술 자리에서 나와 같이 기타가 치고 싶다고 막 공감했던, 그래서 곧바로 기타를 샀던 친한 형은 이후 기타를 몇 번 만져보지도 않고 방치해 두고 있다고 했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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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2-27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께서는 기타를 치시는군요^^: 자신만의 악기를 가지고 계신분들이 부럽습니다.

감은빛 2016-12-28 17:09   좋아요 1 | URL
기타를 안 친지 거의 20년이 다 되었어요.
물론 그 동안 가끔 기타를 잡아서 몇 번 튕겨볼 기회는 있었지만,
제대로 안 친지 벌써 그만큼 되었네요.

이젠 코드도 많이 잊어버렸고, 주법도 예전만큼 안 되겠지만,
다시 연습하다보면 또 금방 되리라 생각해요.
문제는 늘 시간이 없다는 것이겠죠.

마녀고양이 2016-12-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삼릉이랑 서오릉 완전 좋아요.
사람도 많지 않고, 고즈넉하고, 다리 운동하기 딱 좋고.

음..... 출근할 생각을 하면 급우울해진다는 말에 백번 공감하며,
내년에는 즐거운 일,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

감은빛 2016-12-28 17:10   좋아요 0 | URL
서삼릉은 아직 가보지 못했어요.
다음에 가봐야겠네요.

마녀고양이님도 내년에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yureka01 2017-01-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또 시간의 트랙위를 달려야죠..
한해도 늘 활기차게 달려기로 해요..

새해도 화이팅~되시길 바랍니다 ~

서니데이 2017-01-0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더 좋은 일들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은빛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1월의 마지막 날, 올해 두 번째로 정장을 꺼내 입었다. 단순 참가로 신청했던 적정기술 국제심포지움 사전행사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해달란 요청을 그 며칠 전에 받았다. 적정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책도 좀 읽고 공부도 좀 했지만, 아직 토론자로 나설 깜냥은 안된다 싶어 거절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두 발제자의 발제문을 꼼꼼히 살피긴 했지만, 토론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채 토론회 장소로 향했다. 어쨌든 앞에 나서는 자리인데,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다가 그냥 정장을 꺼내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면서 역시 난 정장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멋진 모습을 보며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비록 준비는 부족했지만) 왠지 말도 잘할 것 같은 기분이다.


토론자가 무려 8명이었다. 발제자 2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이 앞에 앉았다. 토론회 참가자가 많지 않았고, 토론자와 발제자가 모두 앞에 앉으니, 청중으로 남은 사람이 단상에 앉은 사람의 사람의 두 배도 채 되지 않았다. 일부러 제일 왼쪽(청중석에서 보면 제일 오른쪽) 자리에 앉았는데, 사회자가 첫 발언을 나부터 시켰다. 소속 단체와 본인 소개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말하라고 했다. 이런 건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다.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서 발전소 견학이나, 소모임 발표 등을 많이 해봐서 차분하게 하던대로 말을 이었다. 첫 발언이라 오히려 더 좋았다. 나중에 말씀하신 분들 중에 나와 비슷한 활동 영역에 계신 분들은 내가 했던 내용을 피해서 다른 내용을 중심으로 말해야 했다.


각 토론자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할말이 전혀 없을거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두 번 모두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시간 조절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마침 당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RPS 개선안에 대해서도 내 의견을 덧붙일 수 있어서 좋았다. 지하철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며 언론 기사를 꼼꼼히 살펴봤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나고 만족스러웠다. 스스로 돌아봐도 서두르거나 버벅대지 않고, 하고 싶었던 말을 또박또박 잘 전달했던 것 같다. 적절한 톤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청중석에서 평소 관련 분야 활동으로 종종 마주치는 분들이 아는 척을 해주거나 응원해줘서 또 좋았다. 한 선배는 내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사진을 찍어서 메신저로 보내줬다. 바쁜 시기에 토론회에 참석하느라 많은 시간(준비와 이동시간 포함)을 할애했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행사에 참여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보람을 느꼈다. 



그날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영화 [판도라]에 대한 내용이었다. 토론자 중에 시사회에서 [판도라]를 보고 오신 분들이 두 분 계셨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탈핵에 성공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판도라] 보기 운동을 함께 펼치자고 제안했다. 잘 만든 영화라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현실을 깨닫고 나면, 탈핵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를 나서면서, 버스 안에서 '영화 [판도라] 천만 관객 추진위원회(이하 천추위)]를 곧바로 결성했다. 그 자리에서 천추위 위원장도 바로 추대되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계속 어느 날짜에, 어느 영화관을 빌려서 함께 보자는 얘기도 나왔고, 각 동네마다 상영관 앞에서 탈핵 서명을 받을 사람들을 조직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 분들이 어떻게 각 분야에서 나름의 위치에 올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 마디로 행동력 짱인 분들이었다. 



<판도라를 보러 가실 분들은 동지날(12월 22일) 저녁 서울극장으로 가자! 무려 5천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사회적경제 수업으로 중학교에서 '에너지 전환'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수업이나 강의를 하는 일이 즐겁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 특히 요즘처럼 일이 잘 안 풀리고, 삶의 회의를 느끼는 시기에 아이들과 소통하고, 내 강의를 집중해서 듣고 에너지 감수성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쓸모있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다. 


지난 번 수업에서 핵 에너지의 위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핵발전소를 짓고, 핵폐기물을 계속 만드는 행위가 인류와 지구에 대한 매우 심각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핵 사고가 한번 나면 주변 30km 이내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매우 오랜 시간 사람이 살 수 없다. 그 뿐인가? 대기와 바다로 방사능은 끝없이 유출되고, 농작물과 수산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민 전체가 내부 피폭을 당한다. 내부 피폭은 외부 피폭에 비해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할까?


게다가 10만년 이상 자연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하는 핵폐기물을 만드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범죄행위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10만년을 상상할 수 있나? 10만년이면 국가도, 사회도, 언어도 다 변할만한 시간이다. 아마 1만년도 채 되기 전에 언어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조선시대에 주로 쓰던 말과 다르다.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도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한 마디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얘기다. 만약 그런 기술을 갖고 핵폐기물을 밀폐 보관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곳에 '핵폐기장'이라고 '절대 위험'이라고 적어놓아도, 후손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튼튼하게 안전하게 핵폐기물을 밀폐했다 해도, 지진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수업의 마지막에 영화 [판도라[에 대해 설명했다. 지루해하던 아이들도 영화 얘기를 하니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로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이 영화를 한번 보는 것이 훨씬 더 핵발전소의 진실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가 12세 관람가이니 중학생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을 갖고 꼭 보러 가라고 권했다.


정말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해서, 많은 사람들이 핵 에너지의 진실을 마주하고, 탈핵에 힘을 모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녹색당에서는 '탄핵 다음 탈핵'이란 구호로 광장에서도 탈핵을 외치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녹색당에서도 공식적으로 영화 [판도라]를 홍보하고 있다. 


http://www.kgreens.org/commentary/%EB%85%BC%ED%8F%89-%EC%98%81%ED%99%94-%ED%8C%90%EB%8F%84%EB%9D%BC%EB%A5%BC-%EB%B4%85%EC%8B%9C%EB%8B%A4-%EB%8B%B5%EC%9D%80-%ED%83%88%ED%95%B5%EC%9E%85%EB%8B%88%EB%8B%A4/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02&aid=0002021894


과연 대통령이 바뀐다고 탈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부산과 울산이라는 대도시 주변에 핵발전소 단지가 위치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나라다. 만약 핵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수많은 인구의 절대 다수가 피하지도 못하고 재앙을 맞을 것이다. 더 늦기전에 핵발전을 중단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후쿠시마 참사 이후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서서히 핵발전을 포기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재생에너지는 다른 에너지원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신규 발전설비의 양으로 따지면 이미 핵발전과 화석연료를 이용한 발전시설보다 더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유독 국가 에너지 정책에 핵 마피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우리나라만 비정상적으로 재생에너지가 바닥에 머무르고 있다.


탄핵 다음은 탈핵이다! 이제 미래 세대와 지구에 대한 범죄 행위를 그만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이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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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16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토론자로 나오신 모습 봤으면 좋았을텐데요^^ 저도 탈핵에 동참합니다~~~

감은빛 2016-12-21 22:37   좋아요 0 | URL
꼬마요정님, 탈핵에 동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국민들이 핵을 제대로 알면 정부가 계속 밀어붙이지 못 하겠죠.

:Dora 2016-12-1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의 저예산 탈핵영화 스톱도 상영 중입니다.

감은빛 2016-12-21 22:37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영화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찾아봐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12-16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1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6-12-1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일은 원자력발전 완전 철폐를 선언할 때 명박이는 원자력발전을 팔러다녔죠. 지구 말고 다른 행성에서 살 생각인지. 인류가 망해야 지구가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16-12-21 14:12   좋아요 0 | URL
영화 보는 내내 samadhi님 댓글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건지..
아마도 인류가 망해야 지구가 살아날 거라는 생각..

samadhi(眞我) 2016-12-21 14:14   좋아요 0 | URL
쭉 그 생각을 해요. 나 때문에 하루하루 지구가 병든다는 생각. 그래서 육아도 여태 미루고 있었고요. 핑계지만 ㅋㅋㅋ

감은빛 2016-12-21 22:42   좋아요 0 | URL
제발 그 인간들끼리 다른 행성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핵 발전을 하던 말던 알아서 하라구요.

인류도 언젠가는 망할지도 모르죠.
지금처럼 사는 건 도저히 답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식 세대 혹은 바로 그 다음 세대에
일어날 일이라면 그땐 정말 죄책감이 많이 들 것 같아요.

가끔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어서요.

나와같다면 2016-12-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영화 ‘판도라‘를 보고 왔어요
영화가 영화에서 그칠 것 같지 않았고.. 영화 속 불행이 머지않아 우리에게 일어날것 같아서 너무나 공포스러웠어요..

감은빛 2016-12-21 22:45   좋아요 0 | URL
아, 보셨군요.

저는 다음주에 지인들을 잔뜩 데리고 갈 예정입니다.

한수원은 벌써 영화를 두고 고증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어요.
다큐가 아닌 상업 영화를 두고 고증이라니.
 

사진 1장


페이스북에서 2012년 2월에 열린 서울녹색당 창당대회 단체 사진을 봤다. 그 사진에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맨 앞자리 있었다. 보는 순간 놀랐다. 겨우 4년 10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참 많은 것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우리 아이들이 참 많이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두 번째, 그리고 나 정말 많이 늙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거울로 보는 나는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는데, 저 사진과 비교해서 나는 진짜 많이 늙었다. 그 사진 밑에 그 말을 그대로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아는 선배가 몇 년 사이에 폭삭 늙었다고, 자기도 주사 좀 맞으라는 댓글을 달았다. 아, 그런 주사 맞을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 살고 있겠어? 


또 다른 선배가 그 날 내가 시당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기억을 일깨워줬다. 그래. 창당전부터 운영위원을 맡아왔고, 몇몇 회의나 행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당일 추천을 받아 억지로 선거에 나섰었지. 당시 아내는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위원장이 되면 이혼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나는 앞에 나서자마자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지. 추천하신 선배님의 의견을 존중해 차마 사퇴는 하지 못하지만, 표는 다른 분께 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내려왔지. 결국 3달 전 발기인대회에서 운영위원장이 되었던, 그릇이 모자란 인물이 나보다 2표를 더 받아 다시 선출이 되었지만, 채 2달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역량이 모자람을 인정하고 자진 사퇴하고 말았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가끔 내가 위원장이 되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아마 지금보다 더 늙은 외모가 되지 않았을까? 이혼도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아이들과 보낼 수 있었던 많은 날들도 더 줄어들었을거다. 아마도. 그리고 나라고 그 위원장 직을 잘 수행했으리란 보장이 없다. 어쩌면 내가 욕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채 5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늙었을까? 슬프다! 술이나 퍼야겠다.


목도리


금요일 아침, 애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내 목도리를 찾아서 현관 앞에 놔뒀으니, 애들 데려갈 때 찾아가라는 거였다. 저녁에 애들을 만나서 목도리를 보니 낯선 물건이었다. 이게 내 목도리가 맞나? 폭이 넓고 긴 검은 목도리는 손으로 뜬 것이었다. 이 목도리는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내가 하고 다닌 기억은 커녕, 누군가에게 받은 기억 조차 없었다. 애들 엄마는 왜 이 목도리가 내 것이라고 가져가라고 했을까? 어쩌면 자기 목도리가 아니니 당연히 내 것이라 여기고 가져가라고 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애들 엄마가 직접 손으로 떠서 선물했던 것일까? 그럼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할까? 


난 유독 귀찮은 걸 싫어해서 목도리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아이가 아주 긴 목도리를 직접 짜서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마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 회색 목도리가 아마 내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고 다녔던 목도리였다. 그건 그 여자아이와 헤이지고도 한동안 더 하고 다녔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서울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왔다가 단체로 어느 선배 집에 자러 갔다가 놓고 나왔다. 나중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목도리를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그 선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목도리를 핑계로 다시 만나기도 싫었고, 어차피 나는 이미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 대신 그 따뜻한 목도리를 잘 매고 다니길 바라며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후로 내가 목도리를 매고 다녔던 기억은 없다. 저 검은색 털 목도리를 짜서 내게 선물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 왜 나는 기억하지 못할까? 궁금하지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저걸 매고 다닐 생각도 없다.


첫 눈 그리고 집회


토요일 아이들과 함께 집회에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들 둘과 함께 참여했던 마지막 집회는 언제였던가? 확실한 건 올해는 없었다. 아마 작년 3월 탈핵 집회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럼 거의 2년이 다 되었다. 큰 아이는 무조건 안 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이라고 했다. 작은 아이는 무조건 언니 편이다. 언니가 가면 가고, 안 가면 안 간다. 나는 집회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긴 시간 아이들만 집에 둘 수도 없었다. 저녁도 챙겨 먹여야 하고, 뭔가 불안했다.


페이스북을 보다가 눈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현관문을 열어봤다.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을 보고 환호했지만, 잠시 그러고는 다시 이불 속에서 인형놀이에 몰두했다. 나는 백미현의 [눈이 내리면]이란 곡을 떠올리며 잠시 슬픈 감정에 빠졌다.


한참 후에 생각해 낸 것이 서점에 가자고 애들을 꼬시는 거였다. 광화문에 나간 김에 교보문고나 알라딘 중고서점이나 잠시 들러야지 생각한 거다. 서점에 가면 늘 두 녀석에게 만화책 한 권씩 사주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었다. 아빠가 만화책을 사줄거라는 생각 때문에 큰 아이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작은 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나가서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작은 아이의 마음도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안에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광화문으로 가지 못했다. 도중에 내려서 한참 걸어야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아이들을 놓치면 큰일이라 두 녀석에게 꼭 아빠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른손으로 작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왼손엔 우산 3개를 들었다. 큰 아이는 내 왼팔에 팔짱을 꼈다. 인파에 휩쓸렸다. 녹색당 깃발을 찾으려다 포기하고 전화를 걸었다. 녹색당 깃발은 청운동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한참을 걸어 청운동 앞까지 갔지만 깃발은 찾지 못했다. 거기서 한동안 머물렀다. 주최측은 메인 행사를 위해 광화문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수많은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다. 큰 고래 풍선이 있었고 풍선 위에 작은 노란 배가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풍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후에 세월호 유가족의 차량과 행렬을 마주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저 분들이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하다가 나는 목이 잠겼다. 갑자기 울컥 울음이 터져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큰 아이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잠시 멈춰 섰다. 한참 후에야 감정을 추스리고 하려던 말을 마쳤다. 


광화문 근처에선 아예 움직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인파에 떠밀려가다가 전광판을 통해 행사를 지켜봤다. 레미제라블의 노래를 뮤지컬 배우들이 불렀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저 노래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치환이 나올 때쯤, 큰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작은 아이는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다시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경복궁 옆 시장통으로 가서 어딘가 들어가서 배를 채우고,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 버스가 인도와 차도를 분리시켜 차벽을 쌓아놓았다. 저 차벽만 아니면 인도를 통해 더 빨리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속으로 욕이 나왔다. 자꾸 사람들에게 떠밀렸다. 키가 작은 작은 아이가 자꾸 사람들에 떠밀려 넘어질 뻔 했다. 한 번은 아이를 보호하려다가 내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더딘 걸음으로 빠져나가던 중에 후배 활동가를 만났다.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10년 만인가. 그 친구는 아기때 보았던 큰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의 키는 그 친구와 비슷했다. 곧 그 친구와 헤어지고 우린 널널한 차도로 빠져나왔다. 시장통에 있는 많은 가게는 이미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과 어딘가 마땅한 곳을 찾아 헤매는 인파로 좁은 골목이 꽉 차있었다. 작은 아이는 계속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고,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하며 마땅한 식당이나 술집을 찾았다. 마침내 한적한 술집을 찾아 들어가서 곧바로 작은 아이를 화장실에 보냈다. 모듬 소세지와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앉았다. 큰 아이는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소세지가 나와서 두 녀석은 그걸로 배를 채우고, 나는 맥주로 배를 채웠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녹색당 깃발을 찾다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녹색당 사람들은 경복궁 역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우린 청운동쪽으로 들어가다가 돌아나왔다. 한참 후에 깃발을 찾았는데, 플라스틱으로 된 중앙분리대 때문에 바로 합류하지 못했다. 작은 아이와 큰 아이를 차례로 안아서 넘겨주고, 나도 넘어가서 비로소 녹색당 깃발 아래 섰다. 아이들은 이제 나보다 더 열심히 구호를 따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하야송이 나올 때는 춤을 추기도 했다. 훗날 아이들은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무대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힘들어했고, 시간이 늦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주고, 나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함께 뻗었다.


맥주 네 캔, 꼬치 5개


일요일에는 다같이 늦잠을 잤다. 새벽에 작은 아이가 자꾸 이불을 차서, 자주 깨서 이불을 덮어줘야 했다. 늦은 아침을 차려줘야 했는데, 뭔가를 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애들을 데리고 동네 분식집에 가서 배를 채웠다. 그리고 어제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한 만화책과 아이스크림을 위해 버스를 타고 나갔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아이들 만화책을 하나씩 사주고, 나는 네 권의 책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집에서 설겆이를 비롯한 집안 일을 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애들은 만화책을 금방 다 읽고 놀았다. 아이들이 또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동네 슈퍼로 가서 뭔가 만들어줄 재료를 사왔다. 된장찌개에 두부와 호박과 팽이버섯과 열무김치를 씻어서 넣었다. 생선을 굽고 엊그제 반찬가게에서 사온 시금치 나물과 애들 엄마가 챙겨준 김치를 내어서 밥을 먹였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늘 허탈한 기분이 든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우울할 것 같아서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이었다. 저녁 8시쯤 아이들이 떠날 때, 읽던 책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이것만 더 읽고 나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술이 땡겼다. 그리고 맛있는 뭔가를 먹고 싶었다. 고민했다. 오늘 밤 한 두가지 일을 처리해 놓아야 내일 해야 할일을 다 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때는 먹어줘야지.


옷을 입고 나가서 자주 가는 닭꼬치 집에가서 꼬치 5개를 포장해왔다. 사모님이 날 보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바쁘셨냐고 묻길래. 저번에 밤에 사장님만 계실 때, 문닫을 시간때쯤 한 번 왔었다고 답했다. 곧이어 사장님이 나왔고, 주문한 꼬치를 준비했다. 사장님은 어제 가게문을 닫고 촛불집회에 갔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니 새벽 2시, 문닫을 시간에 혼자 찾아온 내게 괜찮다고 조금 늦게 들어가면 된다며 꼬치와 맥주를 내주고 둘이 한참 시국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긴 싸움이 될 가라고. 언론이 언제 등을 돌릴 지 모른다고. 반기문이 들어와 비박쪽에 붙으면 언론이 반기문에 촛점을 맞출 것이고, 그러면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흑맥주 네 캔을 샀다. 맥주 네 캔과 꼬치 다섯개로 배를 채우며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오늘 산 다른 책들도 주욱 훑으며 읽었다. 도중에 금요일 이후 처음으로 담배도 피우고 돌아와 이 글을 두드린다. 내일은 또 바쁜 날이 될텐데. 잠이 오지 않는다. 술이 모자라지만, 지금 더 마실 수는 없을테고,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해야겠다.


아래는 오늘 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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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1-28 0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래 위에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집회 때마다 화장실이 문젠데 이번에도 카페화장실을 제 집인양 생각하고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2층화장실에 갔다 바로 나왔습니다. 서울 집회장소 근처 스타벅스는 집회 때 사람 많을 주말인데도 저같은 사람 때문에 일찍 문을 닫았다는 기사를 보고 울컥했네요. 집회 참석한 사람들이 여태 그 비싼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줬을텐데 어쩜 그런 약삭빠른 짓을 하는지...

감은빛 2016-12-16 07:1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고래를 보고 울컥 했어요.

어른들은 그래도 기다렸다가 화장실을 쓸 수 있지만,
아이들은 오래 기다리지 못해서 무척 불안했어요.

두번째 아이들을 데리고 집회에 나갔던 날은
마침 경복궁 근처에 있는 녹색당 당사를 이용했어요.
당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다행이다 싶었어요.
아이들 화장실도 보내고, 물도 마시고,
잠시 의자에 앉아 쉬다 나왔어요.
당 사무실이 경복궁 근처에 있어서 나름 혜택을 보았네요.

2016-11-28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28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에 광장에 계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감은빛 2016-12-16 07:14   좋아요 1 | URL
당연히 함께 해야죠.

그 다음 주에도 아이들과 함께 또 광장에 나갔어요.
 

칭찬


교정지를 들고 동네 선배인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교정사항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탈자와 띄어쓰기 수정이 대부분이었고, 글 내용을 고치는 건 거의 없었다. 디자인을 앉히기 전에 초벌 교정을 꼼꼼하게 봤기 때문이다. 이번 교정도 정말 꼼꼼하게 봤다. 다른 일도 많았고, 무척 시간에 쫓겼지만, 사소한 띄어쓰기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교정지에 별 다른 특이 사항은 없고, 특정 문단이 정렬이 좀 다른 부분과 목차부분 글자 구성에 대해 말씀 드렸고, 최종교정 일정을 조율했다. 디자이너가 주말 작업해서 일요일에 디자인 파일을 보내주시기로 했다.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교정지를 받아서 대조교정과 최종교정을 마치고 월요일 오전 중에 인쇄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이번 교정지 전달이 예정보다 하루가 늦었던 점을 사과 드렸는데,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깔끔하게 잘 정리해서 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작업하면 처음부터 원고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다가 중간에 원고 갈아엎는 경우도 많고, 작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내 경우에는 항상 처음 받는 원고부터 틀이 잘 잡혀 있어서 작업하기 편하다고 했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번주 내내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어제는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던 것과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출판사에 있을때 교정을 정식으로 제대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은 제대로 익혔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그거다. 초벌 교정을 최대한 꼼꼼하게 잘 봐서 넘겨야 후반 작업이 편하다는 거다. 초벌 교정을 제대로 못 보고 엉망인 원고를 넘겨 놓으면, 나중에 원고 갈아엎어야 하고, 교정지가 시뻘겋게 딸기밭이 된다. 그러면 나도 피곤하고 힘들고, 디자이너도 힘들다. 


내 원칙은 초벌교정에서 문장은 되도록 거의 손을 보고 넘기는 거다. 오탈자와 띄어쓰기는 2교나 3교에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지만, 그때 문장을 손 보려면 진짜 머리가 아프다. 이번에는 초벌 교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덕분에 후반 작업에선 문장을 손 댈 부분이 거의 없다. 물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처음 받은 원고 상태가 워낙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을 대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이번 작업은 23명에게 28개의 글(내 글 포함)을 받았는데, 진짜 글의 형식도 제멋대로고, 톤도 하나도 안 맞았다. 최소한의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미리 정해진 틀을 주고, 글을 받았건만, 친절하게 이렇게 이렇게 써 주세요 라고 샘플 원고까지 보내줬건만, 돌아온 글 중에 그나마 어느정도 수준을 맞춘 글은 3분의 1도 되지 못했다. 나머지 3분의 2의 글은 죄다 고쳐써야 했다. 글이 아니라해도 본문에 기본적인 정보와 주제가 잘 들어가 있으면 그걸 바탕으로 글을 고칠 수 있는데, 이건 도통 정보도 없고, 주제도 없는 글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난감했다. 친한 사람 몇 명에게는 차라리 기본 자료를 달라고, 내가 그 자료들을 살펴보고 쓰겠다고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아는 선배는 내가 글을 다시 써야 하니 기본 정보들을 있는대로 다 보내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상처 받았다고 했다. 아, 그럼 처음부터 좀 제대로 써주시던가. 그 사람이 쓴 글 두 개를 다시 고쳐 쓰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데. 게다가 제일 중요한 글 세 개를 쓰기로 한, 믿었던 후배에게 진짜 배신감을 느꼈다. 제일 늦게 원고를 받은 데다 글 세 개가 죄다 형식도 안 맞고, 내용도 실망스러웠다. 맨 처음과 맨 마지막에 들어갈 제일 중요한 글인데, 내용조차 충실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대로 실을 수가 없어서, 이 세 개의 글은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썼다. 아, 나는 책임편집을 맡아 교정교열을 보는 사람이지, 이 많은 분량의 글을 내가 다 새로 쓰고, 고쳐 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맡기 전에 당연히 예상했다. 일정도 촉박하고, 당연히 원고의 수준이란 게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또 눈높이는 높아서 성과물은 잘 나오길 기대할 것도 알고 있었다. 동네에서 이런 작업을 한 두번 맡다 보니 이제 이 정도는 그냥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작업을 하다보니 조금씩 편집 일에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맡았던 단행본 작업은 친한 선배 출판사에서 외주로 일을 받았던 건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엉망이었다. 일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기본이어야 할 교정 작업도 제대로 못 해낸 것 같다. 그때 자심감과 자존감을 많이 잃었다. 어쩌면 지금이 차근차근 이 편집이라는 작업을 배워가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소책자나 보고서 같은 류의 작업으로 내공을 쌓았다면 단행본 외주 작업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단행본 교정으로 시작했기에 너무 힘들고 벅찼다. 하나 변명은 맡았던 단행본들이 대부분 번역서였는데, 번역자 대부분이 첫 단행본 작업이라 원고 수준이 형편없었다는 거다. 사실관계가 잘못된 경우도 많았고, 고유명사를 엉뚱하게 번역해 놓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아예 번역을 안 하고 원서 그대로 남겨놓은 부분도 있었다. 어쩌라고? 편집자가 번역도 해야 하나? 글은 거의 전체가 비문에, 번역투여서 문장은 완전히 다 고쳐 써야 했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원서를 펼쳐놓고 내가 새로 번역하는 기분으로 작업을 한 적도 있었다.


제일 편했던 건, 책 작업을 여러번 해본 국내 저자와 일하는 거다. ㄱ만 말해줘도 ㅎ까지 다 알아듣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국내 저자와의 작업은 대부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작업의 디자이너인 동네 선배와는 벌써 몇 번의 작업을 함께 했는데, 그래서 서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나는 믿음이 있다. 그분도 어제의 칭찬을 보면 나에게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관계 좋다. 하나 하나 일일이 지적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말 안 해도 다 알아서 해주는 거. 이런 건 기본이야 라고 생각하는 건 알아서 다 해주는 거. 다만 출판사에 있을 당시에 나랑 작업했던 디자이너들이 워낙 손이 빠른 사람들이라 그 분량이 많은 단행본도 며칠 되지 않아 뚝딱 작업했던 기억에 이 정도 보고서야 금방 하시겠지 생각하고 일정을 잡으면 항상 그보다는 더 걸리더라. 이건 내가 기억해두고, 만약 다음에 또 작업을 하게 되면 그걸 감안해서 일정을 짜야 할 거다.


평화로운 아침


오랜만에 맞는 평화로운 아침이다. 새벽에 눈을 떠 쌀을 씻어서 불려놓고, 세탁기를 돌리고, 잠든 아이들 사이에 누워 하나씩 껴안아주고 잠시 누워있다가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지옥 같은 한 주가 이제 거의 끝나간다. 오늘도 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사무실에 나가 일을 좀 마무리짓고, 집회를 다녀올 예정이지만, 내일은 아이들과 멀리 어디 행사를 다녀와야 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 평화로운 아침을 보내고 있으니 벌써 지옥 같은 한 주가 끝난 기분이다.


이번 주는 진짜 일이 많았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잠도 계속 못 자고, 입맛도 없었다. 잠은 잘 자면 4시간. 것도 피곤에 지쳐 거의 쓰러지듯 뻗었던 거였다. 그제는 단 한 순간도 졸지 않고 완전히 밤을 샜는데, 어제 밤 10시까지 회의가 있었다. 38시간 이상을 거의 쉬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있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 마감을 쳐야 할 일이 4개였다. 그 중 하나는 결국 끝내지 못해 오늘 사무실에 나가서 마무리 할 예정이다. 그래도 도저히 혼자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정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냈다. 이틀을 사무실에서 밤을 새긴 했지만, 그래도 해냈다.





스트레스


점점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입맛이 없어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진짜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 그저 속이 좀 허하고, 힘이 좀 없는 느낌. 일을 집중해서 하기 위해 억지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켜 먹는다. 맛있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 연료가 필요하듯이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기 위해 음식을 넣는 느낌이다. 술도 마찬가지다. 5일동안 3일 술을 마셨는데,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연락이 와서 사람을 만났고, 참석해야 할 자리라서 가서 술을 마셨다. 


담배도 그렇다. 담배를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이 피웠지만, 피우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거 맛도 없는 담배 따위 왜 피고 있나 계속 생각했지만, 문서 작업을 하거나, 교정 작업을 하다보면 담배를 피울 수 밖에 없다. 그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도저히 그 스트레스를 견딜수가 없다. 날씨가 추워져서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리지만, 아무리 추워도 담배를 피워야 이 지옥 같은 일정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러고나면 이제 담배를 좀 줄이겠지. 


이건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입맛이 없는 것도, 술이 별로 땡기지 않는 것도, 담배가 맛이 없는 것도. 다시 음식을 많이 먹고,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가 땡기게 되겠지. 그냥 이런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어제 저녁에는 좀 짜증이 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회의를 갈 수 밖에 없어서 함께 갔는데, 회의가 너무 길어서 앉아 있는게 짜증났다. 원래는 송년모임이라고 들었기에 아이들을 데려가도 괜찮겠지 생각했던 건데, 오히려 평소보다 회의가 더 길었다. 문제는 막판에 회의를 끝내야 할 타이밍에 누구 한 사람이 들어와서 다시 또 얘기가 길어진 거였다. 아이들은 지루해하고, 나도 38시간 이상 한 숨도 자지 못해 피곤했고, 집중력의 한계가 다 되었는데, 자꾸 얘기가 길어지니 짜증이 났다. 아,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글을 쓰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깨어나 무릎 위에 올라온다. 슬슬 밥을 하고 빨래를 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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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2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 조별 레포트할 때 최종 정리는 제가 맡았습니다. 레포트 작성하는 일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끔 성의 없는 자료를 보내는 조원이 있었어요. 그럴 때 잔소리를 했습니다. ^^;;

감은빛 2016-11-28 02:05   좋아요 2 | URL
저는 발표를 잘 하는 편이었죠.
제가 발표를 맡으면 무조건 A 이상이었어요.
레포트를 잘 정리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