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날, 올해 두 번째로 정장을 꺼내 입었다. 단순 참가로 신청했던 적정기술 국제심포지움 사전행사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해달란 요청을 그 며칠 전에 받았다. 적정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책도 좀 읽고 공부도 좀 했지만, 아직 토론자로 나설 깜냥은 안된다 싶어 거절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두 발제자의 발제문을 꼼꼼히 살피긴 했지만, 토론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채 토론회 장소로 향했다. 어쨌든 앞에 나서는 자리인데,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다가 그냥 정장을 꺼내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면서 역시 난 정장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멋진 모습을 보며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비록 준비는 부족했지만) 왠지 말도 잘할 것 같은 기분이다.


토론자가 무려 8명이었다. 발제자 2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이 앞에 앉았다. 토론회 참가자가 많지 않았고, 토론자와 발제자가 모두 앞에 앉으니, 청중으로 남은 사람이 단상에 앉은 사람의 사람의 두 배도 채 되지 않았다. 일부러 제일 왼쪽(청중석에서 보면 제일 오른쪽) 자리에 앉았는데, 사회자가 첫 발언을 나부터 시켰다. 소속 단체와 본인 소개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말하라고 했다. 이런 건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다.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서 발전소 견학이나, 소모임 발표 등을 많이 해봐서 차분하게 하던대로 말을 이었다. 첫 발언이라 오히려 더 좋았다. 나중에 말씀하신 분들 중에 나와 비슷한 활동 영역에 계신 분들은 내가 했던 내용을 피해서 다른 내용을 중심으로 말해야 했다.


각 토론자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할말이 전혀 없을거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두 번 모두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시간 조절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마침 당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RPS 개선안에 대해서도 내 의견을 덧붙일 수 있어서 좋았다. 지하철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며 언론 기사를 꼼꼼히 살펴봤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나고 만족스러웠다. 스스로 돌아봐도 서두르거나 버벅대지 않고, 하고 싶었던 말을 또박또박 잘 전달했던 것 같다. 적절한 톤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청중석에서 평소 관련 분야 활동으로 종종 마주치는 분들이 아는 척을 해주거나 응원해줘서 또 좋았다. 한 선배는 내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사진을 찍어서 메신저로 보내줬다. 바쁜 시기에 토론회에 참석하느라 많은 시간(준비와 이동시간 포함)을 할애했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행사에 참여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보람을 느꼈다. 



그날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영화 [판도라]에 대한 내용이었다. 토론자 중에 시사회에서 [판도라]를 보고 오신 분들이 두 분 계셨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탈핵에 성공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판도라] 보기 운동을 함께 펼치자고 제안했다. 잘 만든 영화라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현실을 깨닫고 나면, 탈핵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를 나서면서, 버스 안에서 '영화 [판도라] 천만 관객 추진위원회(이하 천추위)]를 곧바로 결성했다. 그 자리에서 천추위 위원장도 바로 추대되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계속 어느 날짜에, 어느 영화관을 빌려서 함께 보자는 얘기도 나왔고, 각 동네마다 상영관 앞에서 탈핵 서명을 받을 사람들을 조직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 분들이 어떻게 각 분야에서 나름의 위치에 올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 마디로 행동력 짱인 분들이었다. 



<판도라를 보러 가실 분들은 동지날(12월 22일) 저녁 서울극장으로 가자! 무려 5천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사회적경제 수업으로 중학교에서 '에너지 전환'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수업이나 강의를 하는 일이 즐겁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 특히 요즘처럼 일이 잘 안 풀리고, 삶의 회의를 느끼는 시기에 아이들과 소통하고, 내 강의를 집중해서 듣고 에너지 감수성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쓸모있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다. 


지난 번 수업에서 핵 에너지의 위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핵발전소를 짓고, 핵폐기물을 계속 만드는 행위가 인류와 지구에 대한 매우 심각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핵 사고가 한번 나면 주변 30km 이내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매우 오랜 시간 사람이 살 수 없다. 그 뿐인가? 대기와 바다로 방사능은 끝없이 유출되고, 농작물과 수산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민 전체가 내부 피폭을 당한다. 내부 피폭은 외부 피폭에 비해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할까?


게다가 10만년 이상 자연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하는 핵폐기물을 만드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범죄행위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10만년을 상상할 수 있나? 10만년이면 국가도, 사회도, 언어도 다 변할만한 시간이다. 아마 1만년도 채 되기 전에 언어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조선시대에 주로 쓰던 말과 다르다.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도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한 마디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얘기다. 만약 그런 기술을 갖고 핵폐기물을 밀폐 보관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곳에 '핵폐기장'이라고 '절대 위험'이라고 적어놓아도, 후손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튼튼하게 안전하게 핵폐기물을 밀폐했다 해도, 지진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수업의 마지막에 영화 [판도라[에 대해 설명했다. 지루해하던 아이들도 영화 얘기를 하니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로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이 영화를 한번 보는 것이 훨씬 더 핵발전소의 진실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가 12세 관람가이니 중학생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을 갖고 꼭 보러 가라고 권했다.


정말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해서, 많은 사람들이 핵 에너지의 진실을 마주하고, 탈핵에 힘을 모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녹색당에서는 '탄핵 다음 탈핵'이란 구호로 광장에서도 탈핵을 외치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녹색당에서도 공식적으로 영화 [판도라]를 홍보하고 있다. 


http://www.kgreens.org/commentary/%EB%85%BC%ED%8F%89-%EC%98%81%ED%99%94-%ED%8C%90%EB%8F%84%EB%9D%BC%EB%A5%BC-%EB%B4%85%EC%8B%9C%EB%8B%A4-%EB%8B%B5%EC%9D%80-%ED%83%88%ED%95%B5%EC%9E%85%EB%8B%88%EB%8B%A4/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02&aid=0002021894


과연 대통령이 바뀐다고 탈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부산과 울산이라는 대도시 주변에 핵발전소 단지가 위치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나라다. 만약 핵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수많은 인구의 절대 다수가 피하지도 못하고 재앙을 맞을 것이다. 더 늦기전에 핵발전을 중단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후쿠시마 참사 이후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서서히 핵발전을 포기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재생에너지는 다른 에너지원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신규 발전설비의 양으로 따지면 이미 핵발전과 화석연료를 이용한 발전시설보다 더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유독 국가 에너지 정책에 핵 마피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우리나라만 비정상적으로 재생에너지가 바닥에 머무르고 있다.


탄핵 다음은 탈핵이다! 이제 미래 세대와 지구에 대한 범죄 행위를 그만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이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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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16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토론자로 나오신 모습 봤으면 좋았을텐데요^^ 저도 탈핵에 동참합니다~~~

감은빛 2016-12-21 22:37   좋아요 0 | URL
꼬마요정님, 탈핵에 동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국민들이 핵을 제대로 알면 정부가 계속 밀어붙이지 못 하겠죠.

:Dora 2016-12-1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의 저예산 탈핵영화 스톱도 상영 중입니다.

감은빛 2016-12-21 22:37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영화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찾아봐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12-16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1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6-12-1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일은 원자력발전 완전 철폐를 선언할 때 명박이는 원자력발전을 팔러다녔죠. 지구 말고 다른 행성에서 살 생각인지. 인류가 망해야 지구가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16-12-21 14:12   좋아요 0 | URL
영화 보는 내내 samadhi님 댓글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건지..
아마도 인류가 망해야 지구가 살아날 거라는 생각..

samadhi(眞我) 2016-12-21 14:14   좋아요 0 | URL
쭉 그 생각을 해요. 나 때문에 하루하루 지구가 병든다는 생각. 그래서 육아도 여태 미루고 있었고요. 핑계지만 ㅋㅋㅋ

감은빛 2016-12-21 22:42   좋아요 0 | URL
제발 그 인간들끼리 다른 행성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핵 발전을 하던 말던 알아서 하라구요.

인류도 언젠가는 망할지도 모르죠.
지금처럼 사는 건 도저히 답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식 세대 혹은 바로 그 다음 세대에
일어날 일이라면 그땐 정말 죄책감이 많이 들 것 같아요.

가끔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어서요.

나와같다면 2016-12-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영화 ‘판도라‘를 보고 왔어요
영화가 영화에서 그칠 것 같지 않았고.. 영화 속 불행이 머지않아 우리에게 일어날것 같아서 너무나 공포스러웠어요..

감은빛 2016-12-21 22:45   좋아요 0 | URL
아, 보셨군요.

저는 다음주에 지인들을 잔뜩 데리고 갈 예정입니다.

한수원은 벌써 영화를 두고 고증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어요.
다큐가 아닌 상업 영화를 두고 고증이라니.
 

사진 1장


페이스북에서 2012년 2월에 열린 서울녹색당 창당대회 단체 사진을 봤다. 그 사진에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맨 앞자리 있었다. 보는 순간 놀랐다. 겨우 4년 10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참 많은 것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우리 아이들이 참 많이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두 번째, 그리고 나 정말 많이 늙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거울로 보는 나는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는데, 저 사진과 비교해서 나는 진짜 많이 늙었다. 그 사진 밑에 그 말을 그대로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아는 선배가 몇 년 사이에 폭삭 늙었다고, 자기도 주사 좀 맞으라는 댓글을 달았다. 아, 그런 주사 맞을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 살고 있겠어? 


또 다른 선배가 그 날 내가 시당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기억을 일깨워줬다. 그래. 창당전부터 운영위원을 맡아왔고, 몇몇 회의나 행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당일 추천을 받아 억지로 선거에 나섰었지. 당시 아내는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위원장이 되면 이혼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나는 앞에 나서자마자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지. 추천하신 선배님의 의견을 존중해 차마 사퇴는 하지 못하지만, 표는 다른 분께 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내려왔지. 결국 3달 전 발기인대회에서 운영위원장이 되었던, 그릇이 모자란 인물이 나보다 2표를 더 받아 다시 선출이 되었지만, 채 2달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역량이 모자람을 인정하고 자진 사퇴하고 말았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가끔 내가 위원장이 되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아마 지금보다 더 늙은 외모가 되지 않았을까? 이혼도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아이들과 보낼 수 있었던 많은 날들도 더 줄어들었을거다. 아마도. 그리고 나라고 그 위원장 직을 잘 수행했으리란 보장이 없다. 어쩌면 내가 욕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채 5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늙었을까? 슬프다! 술이나 퍼야겠다.


목도리


금요일 아침, 애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내 목도리를 찾아서 현관 앞에 놔뒀으니, 애들 데려갈 때 찾아가라는 거였다. 저녁에 애들을 만나서 목도리를 보니 낯선 물건이었다. 이게 내 목도리가 맞나? 폭이 넓고 긴 검은 목도리는 손으로 뜬 것이었다. 이 목도리는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내가 하고 다닌 기억은 커녕, 누군가에게 받은 기억 조차 없었다. 애들 엄마는 왜 이 목도리가 내 것이라고 가져가라고 했을까? 어쩌면 자기 목도리가 아니니 당연히 내 것이라 여기고 가져가라고 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애들 엄마가 직접 손으로 떠서 선물했던 것일까? 그럼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할까? 


난 유독 귀찮은 걸 싫어해서 목도리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아이가 아주 긴 목도리를 직접 짜서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마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 회색 목도리가 아마 내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고 다녔던 목도리였다. 그건 그 여자아이와 헤이지고도 한동안 더 하고 다녔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서울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왔다가 단체로 어느 선배 집에 자러 갔다가 놓고 나왔다. 나중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목도리를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그 선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목도리를 핑계로 다시 만나기도 싫었고, 어차피 나는 이미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 대신 그 따뜻한 목도리를 잘 매고 다니길 바라며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후로 내가 목도리를 매고 다녔던 기억은 없다. 저 검은색 털 목도리를 짜서 내게 선물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 왜 나는 기억하지 못할까? 궁금하지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저걸 매고 다닐 생각도 없다.


첫 눈 그리고 집회


토요일 아이들과 함께 집회에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들 둘과 함께 참여했던 마지막 집회는 언제였던가? 확실한 건 올해는 없었다. 아마 작년 3월 탈핵 집회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럼 거의 2년이 다 되었다. 큰 아이는 무조건 안 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이라고 했다. 작은 아이는 무조건 언니 편이다. 언니가 가면 가고, 안 가면 안 간다. 나는 집회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긴 시간 아이들만 집에 둘 수도 없었다. 저녁도 챙겨 먹여야 하고, 뭔가 불안했다.


페이스북을 보다가 눈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현관문을 열어봤다.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을 보고 환호했지만, 잠시 그러고는 다시 이불 속에서 인형놀이에 몰두했다. 나는 백미현의 [눈이 내리면]이란 곡을 떠올리며 잠시 슬픈 감정에 빠졌다.


한참 후에 생각해 낸 것이 서점에 가자고 애들을 꼬시는 거였다. 광화문에 나간 김에 교보문고나 알라딘 중고서점이나 잠시 들러야지 생각한 거다. 서점에 가면 늘 두 녀석에게 만화책 한 권씩 사주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었다. 아빠가 만화책을 사줄거라는 생각 때문에 큰 아이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작은 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나가서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작은 아이의 마음도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안에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광화문으로 가지 못했다. 도중에 내려서 한참 걸어야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아이들을 놓치면 큰일이라 두 녀석에게 꼭 아빠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른손으로 작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왼손엔 우산 3개를 들었다. 큰 아이는 내 왼팔에 팔짱을 꼈다. 인파에 휩쓸렸다. 녹색당 깃발을 찾으려다 포기하고 전화를 걸었다. 녹색당 깃발은 청운동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한참을 걸어 청운동 앞까지 갔지만 깃발은 찾지 못했다. 거기서 한동안 머물렀다. 주최측은 메인 행사를 위해 광화문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수많은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다. 큰 고래 풍선이 있었고 풍선 위에 작은 노란 배가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풍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후에 세월호 유가족의 차량과 행렬을 마주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저 분들이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하다가 나는 목이 잠겼다. 갑자기 울컥 울음이 터져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큰 아이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잠시 멈춰 섰다. 한참 후에야 감정을 추스리고 하려던 말을 마쳤다. 


광화문 근처에선 아예 움직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인파에 떠밀려가다가 전광판을 통해 행사를 지켜봤다. 레미제라블의 노래를 뮤지컬 배우들이 불렀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저 노래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치환이 나올 때쯤, 큰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작은 아이는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다시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경복궁 옆 시장통으로 가서 어딘가 들어가서 배를 채우고,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 버스가 인도와 차도를 분리시켜 차벽을 쌓아놓았다. 저 차벽만 아니면 인도를 통해 더 빨리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속으로 욕이 나왔다. 자꾸 사람들에게 떠밀렸다. 키가 작은 작은 아이가 자꾸 사람들에 떠밀려 넘어질 뻔 했다. 한 번은 아이를 보호하려다가 내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더딘 걸음으로 빠져나가던 중에 후배 활동가를 만났다.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10년 만인가. 그 친구는 아기때 보았던 큰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의 키는 그 친구와 비슷했다. 곧 그 친구와 헤어지고 우린 널널한 차도로 빠져나왔다. 시장통에 있는 많은 가게는 이미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과 어딘가 마땅한 곳을 찾아 헤매는 인파로 좁은 골목이 꽉 차있었다. 작은 아이는 계속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고,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하며 마땅한 식당이나 술집을 찾았다. 마침내 한적한 술집을 찾아 들어가서 곧바로 작은 아이를 화장실에 보냈다. 모듬 소세지와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앉았다. 큰 아이는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소세지가 나와서 두 녀석은 그걸로 배를 채우고, 나는 맥주로 배를 채웠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녹색당 깃발을 찾다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녹색당 사람들은 경복궁 역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우린 청운동쪽으로 들어가다가 돌아나왔다. 한참 후에 깃발을 찾았는데, 플라스틱으로 된 중앙분리대 때문에 바로 합류하지 못했다. 작은 아이와 큰 아이를 차례로 안아서 넘겨주고, 나도 넘어가서 비로소 녹색당 깃발 아래 섰다. 아이들은 이제 나보다 더 열심히 구호를 따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하야송이 나올 때는 춤을 추기도 했다. 훗날 아이들은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무대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힘들어했고, 시간이 늦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주고, 나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함께 뻗었다.


맥주 네 캔, 꼬치 5개


일요일에는 다같이 늦잠을 잤다. 새벽에 작은 아이가 자꾸 이불을 차서, 자주 깨서 이불을 덮어줘야 했다. 늦은 아침을 차려줘야 했는데, 뭔가를 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애들을 데리고 동네 분식집에 가서 배를 채웠다. 그리고 어제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한 만화책과 아이스크림을 위해 버스를 타고 나갔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아이들 만화책을 하나씩 사주고, 나는 네 권의 책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집에서 설겆이를 비롯한 집안 일을 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애들은 만화책을 금방 다 읽고 놀았다. 아이들이 또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동네 슈퍼로 가서 뭔가 만들어줄 재료를 사왔다. 된장찌개에 두부와 호박과 팽이버섯과 열무김치를 씻어서 넣었다. 생선을 굽고 엊그제 반찬가게에서 사온 시금치 나물과 애들 엄마가 챙겨준 김치를 내어서 밥을 먹였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늘 허탈한 기분이 든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우울할 것 같아서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이었다. 저녁 8시쯤 아이들이 떠날 때, 읽던 책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이것만 더 읽고 나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술이 땡겼다. 그리고 맛있는 뭔가를 먹고 싶었다. 고민했다. 오늘 밤 한 두가지 일을 처리해 놓아야 내일 해야 할일을 다 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때는 먹어줘야지.


옷을 입고 나가서 자주 가는 닭꼬치 집에가서 꼬치 5개를 포장해왔다. 사모님이 날 보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바쁘셨냐고 묻길래. 저번에 밤에 사장님만 계실 때, 문닫을 시간때쯤 한 번 왔었다고 답했다. 곧이어 사장님이 나왔고, 주문한 꼬치를 준비했다. 사장님은 어제 가게문을 닫고 촛불집회에 갔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니 새벽 2시, 문닫을 시간에 혼자 찾아온 내게 괜찮다고 조금 늦게 들어가면 된다며 꼬치와 맥주를 내주고 둘이 한참 시국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긴 싸움이 될 가라고. 언론이 언제 등을 돌릴 지 모른다고. 반기문이 들어와 비박쪽에 붙으면 언론이 반기문에 촛점을 맞출 것이고, 그러면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흑맥주 네 캔을 샀다. 맥주 네 캔과 꼬치 다섯개로 배를 채우며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오늘 산 다른 책들도 주욱 훑으며 읽었다. 도중에 금요일 이후 처음으로 담배도 피우고 돌아와 이 글을 두드린다. 내일은 또 바쁜 날이 될텐데. 잠이 오지 않는다. 술이 모자라지만, 지금 더 마실 수는 없을테고,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해야겠다.


아래는 오늘 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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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1-28 0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래 위에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집회 때마다 화장실이 문젠데 이번에도 카페화장실을 제 집인양 생각하고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2층화장실에 갔다 바로 나왔습니다. 서울 집회장소 근처 스타벅스는 집회 때 사람 많을 주말인데도 저같은 사람 때문에 일찍 문을 닫았다는 기사를 보고 울컥했네요. 집회 참석한 사람들이 여태 그 비싼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줬을텐데 어쩜 그런 약삭빠른 짓을 하는지...

감은빛 2016-12-16 07:1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고래를 보고 울컥 했어요.

어른들은 그래도 기다렸다가 화장실을 쓸 수 있지만,
아이들은 오래 기다리지 못해서 무척 불안했어요.

두번째 아이들을 데리고 집회에 나갔던 날은
마침 경복궁 근처에 있는 녹색당 당사를 이용했어요.
당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다행이다 싶었어요.
아이들 화장실도 보내고, 물도 마시고,
잠시 의자에 앉아 쉬다 나왔어요.
당 사무실이 경복궁 근처에 있어서 나름 혜택을 보았네요.

2016-11-28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28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에 광장에 계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감은빛 2016-12-16 07:14   좋아요 1 | URL
당연히 함께 해야죠.

그 다음 주에도 아이들과 함께 또 광장에 나갔어요.
 

칭찬


교정지를 들고 동네 선배인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교정사항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탈자와 띄어쓰기 수정이 대부분이었고, 글 내용을 고치는 건 거의 없었다. 디자인을 앉히기 전에 초벌 교정을 꼼꼼하게 봤기 때문이다. 이번 교정도 정말 꼼꼼하게 봤다. 다른 일도 많았고, 무척 시간에 쫓겼지만, 사소한 띄어쓰기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교정지에 별 다른 특이 사항은 없고, 특정 문단이 정렬이 좀 다른 부분과 목차부분 글자 구성에 대해 말씀 드렸고, 최종교정 일정을 조율했다. 디자이너가 주말 작업해서 일요일에 디자인 파일을 보내주시기로 했다.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교정지를 받아서 대조교정과 최종교정을 마치고 월요일 오전 중에 인쇄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이번 교정지 전달이 예정보다 하루가 늦었던 점을 사과 드렸는데,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깔끔하게 잘 정리해서 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작업하면 처음부터 원고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다가 중간에 원고 갈아엎는 경우도 많고, 작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내 경우에는 항상 처음 받는 원고부터 틀이 잘 잡혀 있어서 작업하기 편하다고 했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번주 내내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어제는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던 것과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출판사에 있을때 교정을 정식으로 제대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은 제대로 익혔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그거다. 초벌 교정을 최대한 꼼꼼하게 잘 봐서 넘겨야 후반 작업이 편하다는 거다. 초벌 교정을 제대로 못 보고 엉망인 원고를 넘겨 놓으면, 나중에 원고 갈아엎어야 하고, 교정지가 시뻘겋게 딸기밭이 된다. 그러면 나도 피곤하고 힘들고, 디자이너도 힘들다. 


내 원칙은 초벌교정에서 문장은 되도록 거의 손을 보고 넘기는 거다. 오탈자와 띄어쓰기는 2교나 3교에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지만, 그때 문장을 손 보려면 진짜 머리가 아프다. 이번에는 초벌 교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덕분에 후반 작업에선 문장을 손 댈 부분이 거의 없다. 물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처음 받은 원고 상태가 워낙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을 대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이번 작업은 23명에게 28개의 글(내 글 포함)을 받았는데, 진짜 글의 형식도 제멋대로고, 톤도 하나도 안 맞았다. 최소한의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미리 정해진 틀을 주고, 글을 받았건만, 친절하게 이렇게 이렇게 써 주세요 라고 샘플 원고까지 보내줬건만, 돌아온 글 중에 그나마 어느정도 수준을 맞춘 글은 3분의 1도 되지 못했다. 나머지 3분의 2의 글은 죄다 고쳐써야 했다. 글이 아니라해도 본문에 기본적인 정보와 주제가 잘 들어가 있으면 그걸 바탕으로 글을 고칠 수 있는데, 이건 도통 정보도 없고, 주제도 없는 글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난감했다. 친한 사람 몇 명에게는 차라리 기본 자료를 달라고, 내가 그 자료들을 살펴보고 쓰겠다고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아는 선배는 내가 글을 다시 써야 하니 기본 정보들을 있는대로 다 보내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상처 받았다고 했다. 아, 그럼 처음부터 좀 제대로 써주시던가. 그 사람이 쓴 글 두 개를 다시 고쳐 쓰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데. 게다가 제일 중요한 글 세 개를 쓰기로 한, 믿었던 후배에게 진짜 배신감을 느꼈다. 제일 늦게 원고를 받은 데다 글 세 개가 죄다 형식도 안 맞고, 내용도 실망스러웠다. 맨 처음과 맨 마지막에 들어갈 제일 중요한 글인데, 내용조차 충실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대로 실을 수가 없어서, 이 세 개의 글은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썼다. 아, 나는 책임편집을 맡아 교정교열을 보는 사람이지, 이 많은 분량의 글을 내가 다 새로 쓰고, 고쳐 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맡기 전에 당연히 예상했다. 일정도 촉박하고, 당연히 원고의 수준이란 게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또 눈높이는 높아서 성과물은 잘 나오길 기대할 것도 알고 있었다. 동네에서 이런 작업을 한 두번 맡다 보니 이제 이 정도는 그냥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작업을 하다보니 조금씩 편집 일에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맡았던 단행본 작업은 친한 선배 출판사에서 외주로 일을 받았던 건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엉망이었다. 일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기본이어야 할 교정 작업도 제대로 못 해낸 것 같다. 그때 자심감과 자존감을 많이 잃었다. 어쩌면 지금이 차근차근 이 편집이라는 작업을 배워가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소책자나 보고서 같은 류의 작업으로 내공을 쌓았다면 단행본 외주 작업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단행본 교정으로 시작했기에 너무 힘들고 벅찼다. 하나 변명은 맡았던 단행본들이 대부분 번역서였는데, 번역자 대부분이 첫 단행본 작업이라 원고 수준이 형편없었다는 거다. 사실관계가 잘못된 경우도 많았고, 고유명사를 엉뚱하게 번역해 놓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아예 번역을 안 하고 원서 그대로 남겨놓은 부분도 있었다. 어쩌라고? 편집자가 번역도 해야 하나? 글은 거의 전체가 비문에, 번역투여서 문장은 완전히 다 고쳐 써야 했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원서를 펼쳐놓고 내가 새로 번역하는 기분으로 작업을 한 적도 있었다.


제일 편했던 건, 책 작업을 여러번 해본 국내 저자와 일하는 거다. ㄱ만 말해줘도 ㅎ까지 다 알아듣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국내 저자와의 작업은 대부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작업의 디자이너인 동네 선배와는 벌써 몇 번의 작업을 함께 했는데, 그래서 서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나는 믿음이 있다. 그분도 어제의 칭찬을 보면 나에게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관계 좋다. 하나 하나 일일이 지적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말 안 해도 다 알아서 해주는 거. 이런 건 기본이야 라고 생각하는 건 알아서 다 해주는 거. 다만 출판사에 있을 당시에 나랑 작업했던 디자이너들이 워낙 손이 빠른 사람들이라 그 분량이 많은 단행본도 며칠 되지 않아 뚝딱 작업했던 기억에 이 정도 보고서야 금방 하시겠지 생각하고 일정을 잡으면 항상 그보다는 더 걸리더라. 이건 내가 기억해두고, 만약 다음에 또 작업을 하게 되면 그걸 감안해서 일정을 짜야 할 거다.


평화로운 아침


오랜만에 맞는 평화로운 아침이다. 새벽에 눈을 떠 쌀을 씻어서 불려놓고, 세탁기를 돌리고, 잠든 아이들 사이에 누워 하나씩 껴안아주고 잠시 누워있다가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지옥 같은 한 주가 이제 거의 끝나간다. 오늘도 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사무실에 나가 일을 좀 마무리짓고, 집회를 다녀올 예정이지만, 내일은 아이들과 멀리 어디 행사를 다녀와야 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 평화로운 아침을 보내고 있으니 벌써 지옥 같은 한 주가 끝난 기분이다.


이번 주는 진짜 일이 많았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잠도 계속 못 자고, 입맛도 없었다. 잠은 잘 자면 4시간. 것도 피곤에 지쳐 거의 쓰러지듯 뻗었던 거였다. 그제는 단 한 순간도 졸지 않고 완전히 밤을 샜는데, 어제 밤 10시까지 회의가 있었다. 38시간 이상을 거의 쉬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있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 마감을 쳐야 할 일이 4개였다. 그 중 하나는 결국 끝내지 못해 오늘 사무실에 나가서 마무리 할 예정이다. 그래도 도저히 혼자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정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냈다. 이틀을 사무실에서 밤을 새긴 했지만, 그래도 해냈다.





스트레스


점점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입맛이 없어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진짜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 그저 속이 좀 허하고, 힘이 좀 없는 느낌. 일을 집중해서 하기 위해 억지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켜 먹는다. 맛있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 연료가 필요하듯이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기 위해 음식을 넣는 느낌이다. 술도 마찬가지다. 5일동안 3일 술을 마셨는데,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연락이 와서 사람을 만났고, 참석해야 할 자리라서 가서 술을 마셨다. 


담배도 그렇다. 담배를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이 피웠지만, 피우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거 맛도 없는 담배 따위 왜 피고 있나 계속 생각했지만, 문서 작업을 하거나, 교정 작업을 하다보면 담배를 피울 수 밖에 없다. 그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도저히 그 스트레스를 견딜수가 없다. 날씨가 추워져서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리지만, 아무리 추워도 담배를 피워야 이 지옥 같은 일정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러고나면 이제 담배를 좀 줄이겠지. 


이건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입맛이 없는 것도, 술이 별로 땡기지 않는 것도, 담배가 맛이 없는 것도. 다시 음식을 많이 먹고,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가 땡기게 되겠지. 그냥 이런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어제 저녁에는 좀 짜증이 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회의를 갈 수 밖에 없어서 함께 갔는데, 회의가 너무 길어서 앉아 있는게 짜증났다. 원래는 송년모임이라고 들었기에 아이들을 데려가도 괜찮겠지 생각했던 건데, 오히려 평소보다 회의가 더 길었다. 문제는 막판에 회의를 끝내야 할 타이밍에 누구 한 사람이 들어와서 다시 또 얘기가 길어진 거였다. 아이들은 지루해하고, 나도 38시간 이상 한 숨도 자지 못해 피곤했고, 집중력의 한계가 다 되었는데, 자꾸 얘기가 길어지니 짜증이 났다. 아,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글을 쓰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깨어나 무릎 위에 올라온다. 슬슬 밥을 하고 빨래를 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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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2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 조별 레포트할 때 최종 정리는 제가 맡았습니다. 레포트 작성하는 일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끔 성의 없는 자료를 보내는 조원이 있었어요. 그럴 때 잔소리를 했습니다. ^^;;

감은빛 2016-11-28 02:05   좋아요 2 | URL
저는 발표를 잘 하는 편이었죠.
제가 발표를 맡으면 무조건 A 이상이었어요.
레포트를 잘 정리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
 

안아주는 사람


페이스북으로 일본 반한시위 옆에서 프리허그를 하는 여성의 동영상을 봤다. 한복을 입고, 눈을 가린 한국 여성에게 여러 일본인들이 와서 안아주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것, 포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건 안는다는 행위 자체보다 누군가를 감싸주고 위로해준다는 심리적인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그 영상을 보면서 나를 안아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연인이었던 사람들을 빼고 한 명씩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 선배


아마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약 3배 가량 많았던 우리 과의 특성 상 여성 선배들이 많았고, 새내기들 중에서 톡톡 튀었던 나는 선배들의 애정을 많이 받았다. 그 중 4학년 선배 한 명이 유독 내게 잘 해줬다. 자주 만나지는 못 했지만, 만날 때마다 잘 챙겨줬다. 하루는 그 선배를 비롯해 몇몇 선배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그 선배는 그날따라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고,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내 어깨를 감싸거나, 내 손을 잡는 등 스킨쉽을 했다. 취하면 그렇게 스킨쉽을 하는 것이 술 버릇이었을까? 어느 학회실에서 초저녁에 시작된 술자리는 새벽까지 끝날 줄을 몰랐고, 예비역 남자 선배들이 계속 술을 사다 날랐다. 점점 더 그 선배는 취했고, 나중에는 내가 이쁘다고, 귀엽다고 하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꼭 끌어안기도 했고, 내 얼굴을 본인의 가슴에 끌어와 안기도 했다. 


같이 술 마시던 다른 선배들이 뭐하는 거냐고, 막 뭐라고 해도 그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가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거나, 또 끌어안곤 했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여러 사정으로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안아주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나중에 택시를 타고 어느 선배의 집으로 이동할 때도 내 옆에 앉아 내 팔을 끌어안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뜰 무렵 어느 낯선 방에서 다같이 잠들었고, 아침 늦게 일어나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와 학교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그날 이후 그 선배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가끔 마주치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반겨주고,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이성 친구


한때 친했던 여성인 친구도 나를 안아준 적이 있었다. 당시 짝사랑하던 여성과 집안 문제와 운동권 내부의 파벌 문제 등 여러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힘들어 할 때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학교 안 어딘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그 친구가 주머니에서 따뜻한 캔 커피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커피를 받아 들었는데, 잠시 후 가방에서 화장지를 꺼내더니 내게 줬던 캔을 다시 달라고 했다. "내가 남자친구 외에는 이렇게 잘 챙겨주지 않는데, 고마워 해야 해"라고 하며, 캔 뚜껑 쪽 입이 닿는 부위를 깨끗이 닦아서 다시 돌려줬다. 내가 "영광입니다."라고 웃으며 답하자, "그럼 영광이지. 이 바쁜 내가 특별히 시간 내서 만나준 것도 영광인 줄 알아."라고 했다. 실제로 그 친구는 과외와 학원강사 등으로 무척 바빴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도 같은 학원에서 강사로 지내면서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신의 연하의 남친 얘길 한참 들었고, 자연스레 내 얘기를 했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다 어렵고 힘들다는 얘길 했고,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아 많이 답답하다고 했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친했던 사람들이 적으로 돌아서서 억울하다는 말도 했다. 말하던 중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내가 담배를 피우자 눈을 찡그리며 싫은 표정을 짓던 친구가 내 깊은 한숨과 그늘진 표정을 보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담배를 끄고,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가 나를 불러 자기 옆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앉자마자 몸을 돌려 나를 살짝 안더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잘 될거라고 위로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출판사 후배


마지막으로 다녔던 출판사에 제일 늦게 들어온 여성은 나이에 비해 경험이 부족했다. 출판쪽 경험은 전혀 없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잡지쪽 일을 중심으로 했고, 나와 그 친구가 주로 단행본 일을 했다. 사장님이 모르는 건 모두 나한테 물어보라고 했고, 나는 늘 그렇듯 그 친구가 잘 적응하길 바라며,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줬다. 자세히 설명해주고, 어려운 점은 특별히 주의하라고 알려주고, 작은 실수들은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고 격려해줬다. 이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좀 다르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을 먹으러 걷다보면 나에게 바짝 붙어서 걸으며 말을 걸었고, 좀 지나치게 붙어서 그의 팔이나 가슴이 내 팔에 닿기도 했다. 뭔가 질문하려고 내 자리로 올 때도 너무 가까이 붙어서 좀 이상하다 싶었다.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바로 출근했던 날이었다. 점심 때 사장님이 맛있는 내장탕 집을 가자고 해서 다 같이 차로 이동했다. 평소 조수석은 내가 앉는 자리였다. 뒷좌석 세 명이 끼어 앉아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넓고 편한 자리를 직급으로나 나이로나 사장님 다음이었던 내가 앉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내 몸에서 워낙 술냄새, 담배냄새가 심하게 났고, 사장님 옆 자리에 앉으면 뭔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뒷 자리에 앉으며, 후배 기자를 앞 자리로 보냈다. 뒤의 세 자리 중에서 이 친구가 제일 불편한 중간 자리에 앉았고, 자연스레 내 옆이 되었는데, 나에게서 술냄새, 담배냄새가 장난이 아니라고 웃으며 말했다. 난 미안하다고 말하고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이 친구가 '정겨운 냄새'라는 표현을 썼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줄 몰랐다. 얘기를 다 듣고, 아직 술이 덜 깬 머리로 한참을 생각해서야 이해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과 담배를 즐기셨고, 늘 아버지에게서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많이 났다고 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익숙하기에 그 냄새가 싫지 않았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냄새가 그립다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나에게서 그 냄새를 맡아서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했다.


어느날 영업 일로 누군가를 만나 술을 한 잔 하고, 늦은 시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에 멈춰선 버스 앞쪽 창문이 열리더니, 이 친구가 거의 창 밖으로 몸을 내밀듯이 하면서 큰 소리로 "팀장님!"하고 불렀다. 양 팔을 크게 흔들며 어찌나 반갑게 웃던지. 나는 그 반응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주위의 시선이 좀 부끄럽기도 했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줬다.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어서 타지 않았고, 버스는 곧 출발했고, 그 친구는 여전히 웃으며 내게 양 팔을 흔들고 있었다. 술을 한 잔 더 먹고 싶었는데, 이 친구가 이토록 반가워하니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좋다고 했고, 그 친구의 집과 우리집 중간쯤의 먹자골목에서 만났다.


좀 힘든 시기였다. 책이 팔리지 않아 영업 이익이 예상만큼 잘 나오지 않았고, 편집 작업 중인 책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애들엄마와 오랜 불화로 인해 서로 감정이 많이 상해 있는 상태였고, 이 어정쩡한 상태가 답답해서 웬만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 늘 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을 했던 때였다. 내 힘든 상황을 한참 떠들고, 그 친구의 어려운 점을 들어주면서 늦게까지 술을 더 마셨다. 술집을 나와 헤어질 때, 이 친구가 정색하면서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약간 취해서 대답은 않고, 그저 눈을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힘내세요. 늘 그렇듯 잘 해내시리라 믿어요." 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 떨어지더니 씩씩한 걸음걸이로 택시를 잡으러 갔다. 조금 놀랐지만, 그 걸음걸이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후배 활동가

 

활동하는 공간이 달랐으니 자주 마주치는 건 아니었고, 가끔 만나는 여성 활동가였다. 몇 번 마주치는 동안 인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중에 어느 토론회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는데, 웃으며 "저는 선배님 잘 알아요."라고 했다.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며 또 몇 번을 마주쳤고, 한 두 번 술자리도 가졌다. 그때까지 그 친구는 그냥 가끔 마주치는 후배 활동가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주 많은 술자리에서 그가 여러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시는 장면을 봤다. 우리 테이블은 다들 좀 재미없는 사람들과 재미없는 얘기들만 있어서 혼자 딴 생각에 빠져 술을 홀짝였다. 재미없는 술자리는 질색이라 차라리 집 근처에서 다른 후배를 불러내 술을 마셔야지 생각했다. 일어설 타이밍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내 옆에 앉았다. 이미 많이 마신듯 살짝 취한 느낌이었다. 내게 술을 권해서 잔을 부딪혔다. 술을 마시고, 내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물어왔다.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는데,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몇 번인가 잔을 더 부딪히고 웃으며 술잔을 비웠고, 여러 얘기들을 더 나눴다. 갑자기 담배를 달라고 했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또 뭔가 떠들며 담배를 피웠고, 담배를 끄고 돌아설 무렵 갑자기 이 친구가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두 팔로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당시 처해있던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지쳐 있었는데, 그 포옹과 토닥토닥이 나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술잔을 들고 또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중에 보니 또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껴안고 토닥토닥을 해주고 있었다. 저건 동지로서의 교감의 포옹일까, 아니면 취해서 그런걸까? 그와 술을 자주 먹지 않았고, 취한 걸 처음 보는 터라 알 수 없었다.


후회


누구나 실패를 겪고 또 실수를 한다. 나는 지나치게 많은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무언가를 망치며 살았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시간을 돌릴 수 없기에, 이미 엎지른 물을 담을 수는 없다. 할수만 있다면 그 많은 실수들을 바로 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모두 내 잘못이고, 내 책임이다.


아직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유난히 운이 나쁜거라고, 유독 나에게만 그렇게 나쁜 상황이 닥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 상황을 만든 것이 나였거나, 그 나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 나였다. 그리고 나쁜 선택을 한 것도 나였고, 실수를 저지른 것도 나였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었다. 


엊그제 함께 술을 마셨던 후배가 그랬다. "형, 왜 그렇게 살아요?" 모르겠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라서 그런 거겠지. 나약하고, 겁이 많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쉽게 감정에 휘둘리고, 스스로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그렇겠지.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로 인해 교훈을 얻고 고쳐야 할텐데, 후회하고 반성은 하지만, 정작 바로 잡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사람을 잃고, 적을 만들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후회를 하면서도 결국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놈이야 라고 생각한다. 이제 부터라도 그러지 말아야겠다. 후회와 반성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라도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아프고 힘들지만 그 감정에 머물지 않고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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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11-25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이렇게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보이는 글! 나도 덩달아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은빛 2016-11-28 02:0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쓴 같은 제목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요.
좋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samadhi(眞我) 2016-11-25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먼저 가 앵깁니다. 제일 처음은 신영복 선생님이었고요. 김용택 시인, 금난새씨, 백경우씨(이매방류 살품이품 전수자)... 김용택 시인 빼고는 세 분 다 얼마나 당황해하시고 부끄러워하시는지... 세 분 모두 제 남자입니다 ㅋㅋㅋㅋ

감은빛 2016-11-28 02:08   좋아요 0 | URL
그 네 분이 모두 부럽네요.
저도 언젠가 유명해지면, 진아님의 포옹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

samadhi(眞我) 2016-11-28 04:49   좋아요 1 | URL
세 분은 강연회였고 한 분은 공연 때 뵈었으니 언젠가 강연을 해주시거나
우리춤을 아주 잘 추시면 제가 먼저 ˝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되요?˝ 묻고서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덥썩 안아버릴 거예요. ㅋㅋㅋ 그분들이 좋아서 제가 헤벌쭉해져 그러는 것이라... 제가 안아드려봐야 퐁신퐁신 따끈따끈하지도 않고요 ㅋㅋ
 


꿈을 꾸었다. 쫓기고, 다치고, 떨어지는 꿈. 반복되는 꿈. 전생이라는 것이, 윤회라는 것이,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가끔 믿고 싶을 때가 있다. 난 전생에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이렇게 자주 일제 경찰에 쫓기는 꿈을 꿀까? 뭐 어차피 전생이란 건 없는 거다. 그저 뇌의 작용에 의한 착각일 뿐. 친한 형은 (이렇게 속된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어린 여성과 결혼했고 애도 셋이나 낳아서 전생에 나라는 구한 장군이 아니냐는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럼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뭐 같은 삶을 사는 걸까?

아니,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이 새벽 시간이 참 좋다! 마시려다가 피곤해 잠들어 버려 못 마신 와인을 마시는 것도 좋고, 아직 밝아지지 않은 어둠에 쌓인 창 밖 풍경이 좋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심지어 평소라면 짜증 났을 밖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 차소리조차도 좋다.

와인을 홀짝이며 생각한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꿈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내 의식의 반영이 아닌가? 소설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만들어 봐야겠다.

해가 뜨면 책을 읽어야겠다. 지금은 그저 기차 소리 들으며 와인을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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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1-20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집도 기찻길옆 오막살이 입니까? 우리집도 그래요 ㅠㅠ 비행기가 하루종일 날고 기차는 쉬지도 않고 달리며 차들은 쌩쌩 달리는 변두리에서 사는 고충을 살아본 사람만이 알지요.

감은빛 2016-11-22 00:41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썼어요.
한때 기차길 근처에 산 적이 있었어요.
다행히 기차가 많이 다니는 노선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새벽에 기차 소리에 종종 깨긴 했었죠.
소음 피해는 진짜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매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 밖에 없고,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힘드시겠어요!

yureka01 2016-11-2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은 현실의 반영,,내면의 투영,,,체게바라처럼 살고 싶었던건 아니었을까요...

감은빛 2016-11-22 00:43   좋아요 1 | URL
체 게바라 보다는 이 책에 나온 몇몇 선배 혁명가들의 생애에 관심이 많아요.
과연 내가 저 시대를 삻았다면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