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토요일 아침.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잠시 일본어를 들여다보다가, 조금 더 자고 싶어서 눈을 감고 아이들 곁에 누워서 이마에 입을 맞추고 꼭 껴안았다. 녀석들은 귀찮다고 몸을 돌려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안와서 포기하고 일어났다. 어제 세탁기를 돌렸다가 아이들 씻느라 마지막 헹굼을 못 했던 걸 떠올리고, 우선 빨래를 다시 돌렸다. 쌀을 씻어서 불리고, 뭘 만들지 고민하면서 냉장고를 열어봤다. 어제 저녁에 된장찌게를 끓이려고 두부와 애호박을 사놓았다. 그리고 야채 몇 가지가 있으니, 샐러드를 만들어야 겠다. 며칠 전에 사놓은 곤약을 썰어서 끓는 물에 데치고, 쌈채소와 깻잎을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파프리카를 씻어서 썰었다. 큰 그릇이 없어서 재료를 많이 썰지 않고 적당히 양 조절을 해야 한다. 곤약을 찬 물에 헹궈서 다시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소스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다. 간장, 다진마늘, 참기름, 식초, 매실액, 후추를 섞었다. 준비한 재료 위에 뿌려서 섞은 후 먹어보니 맛이 괜찮았다. 뭔가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긴 했지만, 없는 재료로 만든 것 치고는 이만하면 괜찮은 거지 뭐. 된장이 끓을 무렵 충분히 불은 쌀을 압력밥솥에 넣고 물을 맞춘다. 밥 맛은 무조건 물조절이다. 기준선 근처에서 조금 따랐다가 다시 조금 부으면서 맞추고 불에 올렸다.


밥이 다 되고, 된장찌개가 다 끓고,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녀석들은 오늘따라 늦잠을 잔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빨래를 널었다. 라디오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를 듣고 있는데, 알라니스 모리셋의 'Thank you'가 나왔다. 20년 전에 무척 좋아했던 가수였다. 잠시 옛 추억에 젖었다가 방으로 돌아오니, 두 녀석이 깨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들어가서 한 팔에 하나씩 껴안았다. 


왜 하필 나를


며칠 전 어느 단체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자기 후계자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단체 회원일 뿐, 아무런 업무 연관성도 없는데, 왜 하필 나를. 또 며칠 전 어느 회의에 꼭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솔직히 내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될 회의라서 안 갈 생각이었는데, 부탁을 받고 보니 안 갈수가 없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나에게 와달라고 요청했던 선배 말고 다른 선배가 나를 꼭 원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 회의 논의 내용과 크게 관계가 없는데, 왜 하필 나를.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많았다. 왜 사람들은 나처럼 못난 인간을 좋게만 봐줄까? 그건 본질을 잘 모르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는 면이 어떤 것들인지 한번 생각해봈다. 우선 외모에 대한 건 대부분 착하게 생겼다는 얘기다. 인상이 좋다. 순한 인상이다. 뭐 이런 얘기들. 다음으로 태도. 사람들의 이야기나 의견을 주의깊게 열심히 듣는 편이라 그런 점에서 좋은 평가를 자주 받는다. 잘 듣는 사람. 그래서 후배들이 고민 상담을 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말할 때는 차분하게 진지하게 신중하게 말한다. 내 말 한 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계속 생각하면서 말하는 편이다. 학원 강사를 했던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내 말을 상대방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면 그 생각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쉬운 설명과 자신감 있는 태도 등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 


내가 잘 하고 또 좋아하는 건, 강의나 발표인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알고 있는 뭔가를 알기 쉽게 알려주는 일이 좋다. 아이들 대상으로 한 강의도 좋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도 좋았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나 자신은 좀 많이 멋있어 보이고, 재밌게 설명을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뿌듯하다. 또 글쓰는 일도 좋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지만, 업무와 관련된 글이거나 청탁받은 글이라서 부담감이 생겨서 그렇지. 평소 내가 원해서 쓰는 건 재밌다.


활동가가 되고 나서 제일 많이 한 일은 아마 회의가 아닐까? 수많은 회의들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 회의를 잘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그 회의의 성격과 안건에 대해 충분히 알고 들어와야 하고, 자신이 아는 것만 떠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자신의 의견을 핵심적인 내용만 짧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의 주최자가 되면 또 입장이 달라진다. 그때는 빅마우스(말이 많은 사람)를 견제하고, 입을 잘 열지 않는 사람들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 분위기를 읽고 흐름이 끊기지 않으면서 원활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잘 조율해야 한다.


최근 누군가 나를 '회의쟁이'라고 불렀는데, 예전에 누군가는 '회의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라고 그 많은 회의를 원해서 다니겠나? 회의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회의 결과에 따라 늘 해야할 일이 따라온다. 몇 해 전, 녹색당 초창기에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다보면 늘 이야기가 산으로, 바다로, 엉뚱하게 흘러가곤 했는데, 그런 흐름을 바로 잡고 제대로 논의를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나에게 많은 역할이 주어지고, 많은 일을 떠안게 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몇몇 연대단위 회의를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일을 자꾸 떠안게 되어서 이젠 웬만하면 회의에서 안 떠들고,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하는데, 뭔가 분위기가 잘못 흘러간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내가 잘 못하는 일들, 나의 단점도 무척 많다. 우선 나는 다소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다. 이게 어떨 때에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단점으로 작용한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보니, 어떤 일을 두고 판단할 때, 이게 완벽하게 될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잘 손을 대지 않게 된다. 그게 꼭 필요한 일이고, 급한 일인데, 내 판단에 아무리 봐도 완벽하게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으면 하기가 싫고, 자꾸 피하게 된다. 또 해야할 일들의 목록 중에서 우선 순위가 높아도, 아직 이 일이 완벽하게 풀려갈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완벽한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경향도 있다. 그렇게 일을 미루는 것은 매우 나쁜 버릇인데, 이 완벽을 추구하는 기질 때문에 쉽게 고치지 못하고 있다.


또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지치고 상처받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와 예민한 성격 탓에 별거도 아닌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이건 다음에 또 일 때문에 그를 만날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그 불편함이 결국은 그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느긋하고 여유있는 삶을 좋아한다. 어쩌다 이렇게 정신없고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본성은 그런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불 속에 누워 하루를 보내는 주말이 제일 좋다. 평소엔 잠을 못자고 밤 늦도록 일을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지만, 늘 바쁘게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쯤은 푹 자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어디에도 가지 않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야만 이 삶을 버틸 수 있다. 


이렇게 단점이 많은데, 업무 연관성도 없는 곳에서 나를 원하는 건, 그저 보이는 모습이 괜찮아 보이고,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기 때문이겠지. 그냥 단순히 사람 좋아 보이고, 일도 괜찮게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겠지. 어쨌거나 돈 많이 줄 수 있는 곳에서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20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늘 나를 원하는 조직은 돈이 없는 조직이었다.


이런 삶, 슬프다
















강수돌 선생의 [여유롭게 살 권리]를 읽고 있다. 늘 원하는 건, 그런 삶이다. 여유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고, 그 책에 대해 충분히 느끼고 고민할 시간도 가질 수 있는 삶. 그 고민과 느낌을 글로 풀어낼 여유가 있는 삶. 또 그 고민과 느낌을 주위 사람들과 만나 함께 나눌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삶.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삶. 누군가를 만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고, 일상의 고단함과 현실의 비루함을 한탄할 수 밖에 없는 삶이다. 


이 책에는 일중독을 일종의 질병으로 생각하고 본인이 일중독에 거렸는지 아닌지 스스로 진단하는 테스트가 있다. 읽어보니 나는 분명히 일중독이더라. 이 병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가 바뀌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회가 바뀌어야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건 개인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일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펴고, 조금씩 인식을 바꿔나가다보면 조금씩 사회도 바뀌지 않을까 싶다.


며칠 전 일 때문에 어느 협동조합 활동가에게 연락을 했다. 퇴근시간을 살짝 넘긴 6시 5분쯤이었다. 그는 '의무 정시퇴근날'이라 사무실을 나왔기 때문에 지금은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의무 정시퇴근날'이라. 나도 그렇고 대다수 협동조합은 열악한 상황에서 많은 일들을 해야 하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자주 할 수 밖에 없다. 얼마나 야근이 일상이면, 정시 퇴근을 의무 사항으로 정한 날이 따로 있겠나. 


요즘 너무 바쁜 시기인데, 너무 일이 하기 싫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어디 아무도 모를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그래야 할까? 그럴수 있을까? 모르겠다. 


오늘 백남기 어르신의 노제가 열렸고, 저녁엔 집회가 있을 예정이다. 낮동안은 아이들과 지내야 하니, 나가지 못하지만, 저녁에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마음은 당연히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는 급한 교정 일거리를 맡아 일정에 쫓기고 있다. 오늘밤 교정을 보지 못하면 인쇄 일정을 맞추지 못한다. 일을 해야겠지. 아무리 집회에 나가고 싶어도 꾹 참고 일을 해야겠지. 비록 토요일 밤이지만 꼼짝말고 일을 해야겠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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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5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많이 알수록 그 상대방의 감정을 최대한 맞추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저도 쉽게 지치는 편입니다. 진짜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데, 괜히 제가 불리해질까 봐 꾹 참고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힘든데, 제 자신의 소극적인 행동에 한 번 더 괴로워집니다. ^^;;

감은빛 2016-11-08 18:43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에 따라 꽤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인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오래하다보니 이젠 좀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이런 건 좀 불편하다는 느낌을 주거나,
이런 태도는 좀 아닌 것 같다는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일로 만나는 사람들에겐 좀 쿨하게 대할수 있게 된 것 같아요.

samadhi(眞我) 2016-11-06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엘라니스 모리셋 노래 좋아해요. 엊그제 같은데 그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요. 목소리가 정말 예쁜데. 너무 빨라서 차마 따라 부르지는 못 하고.

감은빛 2016-11-08 18:46   좋아요 0 | URL
세월이 참 빠르죠!
[You Oughta Know]를 매일 들었던 게 96년이었던 것 같아요.
완전 빠져있던 가수였어요.
 


멋쟁이 얼어 죽는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마땅히 입을 겉옷이 없어서 좀 망설였다. 분명 추울텐데, 그렇다고 겨울 잠바를 꺼내입기는 좀 그렇고, 이맘때 입을 만한 옷이 없네. 시청에 가서 공무원을 만나야 해서 조금은 격식을 갖춰야 하는데, 뭘 입어야 할까? 몇 해 전 누군가에게 얻은 얇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나왔다. 나올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낮에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는 오히려 덥기도 했다. 계속 뛰어다녔으니. 그런데 해가 떨어지고 나서는 찬 바람에 많이 추웠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서는데, 동네 형님과 마주쳤다. 쓱 보더니. 멋있다고 한 마디 하신다. 그냥 웃으며 지나치려는데, "멋쟁이는 얼어 죽는다"고 한 마디 하신다. 아니 그러니까 난 멋쟁이는 절대 아니고, 그저 입을 옷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얻은 낡은 코트를 입었을 뿐이라구요. 하지만 찬 바람 맞으며 식당을 찾아 나서는데, 진짜 추웠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ㅜㅜ


그제와 어제 입었던 옷은 분명 겉옷, 즉 잠바였는데, 나한테 완전 꼭 맞아서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입으면 지퍼가 잠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퍼를 열고 다니면 완전 안 어울리는 스타일이라 입을 수가 없었다. 이 옷도 몇 해 전에 누군가가 준 것인데, 이런 옷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이사올 때 옷 정리를 하다가 발견했다. 이런 옷이 있었네. 내가 돈 주고 살만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못 입겠다고 판단하고 다시 옷걸이에 걸어 두려다가 생각했다. 티셔츠를 안 입고 입으면? 그래서 셔츠를 벗고, 속옷(런닝셔츠)만 입고 그 위에 입어봤다. 지퍼가 간신히 잠겼다. 다행히 요즘 배가 쏙 들어가서 입을 수 있었다. 숨을 좀 깊게 쉬면 가슴이 부풀어올라 가슴이 꽉 쬐는 느낌이 들만큼 내 몸에 딱 붙었다. 이건 쫄티가 아니라 쫄잠바라고 불러야 하나. 


안감이 기모로 되어 있어서 따뜻했고, 겉은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셔츠 안 입고 다닐 수 있겠구나. 그러고 이틀 동안 돌아다녔는데, 난방이 잘 된 실내에 있으면 더워서 땀이 났다. 그렇지만 이 옷을 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속옷만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 밤이 되어 찬 바람이 불면 배 밑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서 또 추웠다. 이 옷도 참 입기 애매한 옷이구나. 


거울 보는 것이 즐겁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거울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제 거의 결혼 전, 그러니까 20대 후반 몸매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공복일 때 그렇다는 얘기. 식사를 하고 나면 배가 좀 나온다. 아직 아랫배가 살짝 나왔고, 옆구리에 조금 군살이 있는데, 이건 아마 술 때문일 듯. 술을 좀 적게 마셔야 완벽한 몸매가 될텐데, 지금 이 삶에서 술마저 마시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 술이 있어서 그나마 지금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계속 입맛이 없어서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아침과 점심은 거의 거르고, 저녁엔 술을 마시며 안주를 조금 먹었다. 밥을 안 먹었더니, 이제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어제는 너무 힘이 없고, 자꾸 몸이 축 쳐져서 늦은 점심을 김밥 하나로 때웠는데, 세상에 김밥 한 줄을 다 못 먹겠더라. 삼분의 이 정도 먹고 나서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예전엔 김밥에 라면까지 다 먹어도 모자랐는데.


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요 며칠은 계속 못하고 있다. 바쁘기도 하고, 의욕이 안 생기기도 하고. 내 목표는 옷맵시를 위해 뱃살을 빼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막 근육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전체 근육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내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 근육을 키우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래서 늘 하는 것이 스내치 운동이다.


지금은 바벨을 들 기회가 없어서 케틀벨로 스내치를 익히고 있는데, 아직 자세를 충분히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들기에는 무게가 좀 무겁다. 좀 더 가벼운 무게로 하나 사고 싶은데, 지금 집에서 언제 이사 나갈지 몰라 짐을 늘리는 것이 또 한편으로 부담스럽다. 이미 들어올 때보다 짐이 많이 늘었다. 그래서 덤벨로 마치 바벨을 든 것처럼 스내치를 하는데, 그러기엔 바벨이 또 너무 가볍다. 이래저래 운동에 흥미가 잘 안 생기는 상황이다.


마치 속옷 모델처럼


집을 나와 산 지, 몇 달이 지났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전신거울을 사는 거였다. 그리고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옷을 벗고 거울 앞에서 운동을 했다. 운동을 마치면 내 몸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그 사진들만 놓고 보니, 마치 속옷 모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속옷만 입은 채로 사진을 찍었으니, 다른 건 바뀐 게 없이 매번 다른 속옷을 입고 찍은 사진들. 속으로 부업으로 속옷 모델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으나, 그러기엔 얼굴도 안 되고, 키도 작았다. 근 선명도가 좋은 편이라 보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근육이 큰 편이 아닌 것도 문제다.


그래도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속옷 상자에 실린 사진에는 얼굴이 안 나온다. 키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겠다. 그저 복근이 선명하고, 허벅지 근육이 탄탄하면 좋겠다. 복근은 뱃살이 빠지면서 많이 선명해지긴 했지만, 아직 좀 부족하다. 허벅지는 음 글쎄. 예전부터 워낙 하체 운동을 등한시해서 그닥 자신이 없다. 역시 안 되는 구나. 속옷 모델.


관심 도서


누구한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늘 혼자 운동을 하다보니 책을 읽으며 자꾸 배워야한다. 동영상도 계속 찾아봐야 하고. 운동 관련 책은 늘 비싸서 사려면 부담스럽다. 도서관에도 책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지 않고, 빌려 읽어서는 또 아쉽운 점이 많다.


한동안 맨몸 운동에 집중했을때, 데스런 동영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전에는 맨몸 운동만으로 충분한 효과를 얻기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완전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맨몸으로도 엄청난 강도로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책은 어떨지 궁금하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재밌어하는 운동은 온 몸의 힘을 코어에 집중해야 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코어 근육을 강화하는 방법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늘 나오는 프랭크와 복근 운동 몇 가지 외에도 더 재밌고 다양한 운동이 있을테고, 따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책이 있었네.


요거 조만간 구해서 따라해 봐야겠다.







바벨 운동은 어렵고 힘들다.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맞지 않고, 무게가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내어 한계에 가까운 무게를 들어올리는 기쁨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기초를 탄탄히 다져야 실력이 꾸준히 늘텐데, 어릴 때 약수터에서 어떤 아저씨에게 돌 역기를 들어올리는 방법을 배운 게 다였고(다행히 인상과 용상 둘 다 배우긴 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바벨 운동을 안 하면서 다 잊어버렸다. 


스내치에 미쳐서 운동에 다시 흥미를 가진 게, 2013년이었던가? 그때부터 4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별로 실력이 늘지 않았다. 좀 안정적인 집을 구하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바벨을 사는 것. 지금까지처럼 띄엄띄엄 헬스클럽에 등록했을 때에만 해서는 당연히 실력을 늘릴 수 없다. 가까이 두고 자주 해야 그만큼 더 늘겠지.


그냥 덜컥 구매하기엔 책 가격이 좀 부담스럽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한 번 살펴본 후에 구매를 결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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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2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 아침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근데 감은빛님 글케 식사를 제때 안하고 거르심 나중에 위염으로 마니 고생하실수도 있으니 저염식 다이어트 식단으로 될수있음 꼭 챙겨드세요.여의치 않으심 닭가슴살과 과일.채소 만이라두요^^

감은빛 2016-11-02 12:1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매너나린님.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평소엔 잘 챙겨먹는 편이예요.
요즘 좀 유난히 입맛이 없어서 그랬네요.
말씀하신대로 잘 먹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매너나린 2016-11-02 12:25   좋아요 0 | URL
멋도 좋지만 감기 걸림 멋있긴 커녕 더 추레하게 보일수 있으니 옷도 따뜻하게 챙겨 입으시구요^^
꼭 빈속에 술과 안주로 때우는 일은 없으시길 바래요!건강한 하루 되세요~~

다락방 2016-11-02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위에 매너나린 님 말씀처럼 나중에 위염으로 고생하시지 않게 끼니 잘 챙겨드세요.

2. 거울 보는 게 즐겁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언제나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외치고 있는데요 ㅠㅠ
뻐킹 다이어트 ㅠㅠ

3. 운동 화이팅!!

감은빛 2016-11-02 12:2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1. 잘 챙겨 먹을게요.

2. 다이어트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뱃살은 빠졌네요.
잘 먹고 사는게 좋은 거죠. 다이어트 따위 신경쓰지 마세요.

3. 아무래도 조만간 케틀벨을 사야겠어요.
바벨을 사긴 어려우니, 케틀벨 스내치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려구요.

cyrus 2016-11-0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 관련 책까지 살 정도로 꾸준히 운동하는 감은빛님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게으른데다가 만약 운동을 한다고 해도 운동 관련 책은 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감은빛 2016-11-05 13:06   좋아요 0 | URL
혼자 운동을 하다보니 늘 불확실하고 모르는 게 생겨요.
누구 물어볼 사람도 없고,
검색은 늘 한계가 있으니, 책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죠.
벌써부터 좋은 책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름


                                이한주


우리말 갈래사전을 사고

선생인 네 이모네 반 출석부를 몰래 훔쳐보며

특별한 이름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이름

떵떵거리며 출세하는 이름보다는

메아리처럼

나즈막히 들리는 이름 어디 없을까

네가 평생 간직할 나의 첫 선물

네 얼굴만큼 선한

어디 그런 이름 없을까

벌써 며칠째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고

책방을 둘러보고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평생 멍에처럼 달고 다녀야 하는 것만큼 부당한 것이 있을까?' 시인은 시를 소개한 바로 다음 페이지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그래. 내 이름은 발음하기가 어려워 가끔 좀 더 부드러운 발음의 이름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던 적도 있다. 이젠 가수라기 보다는 코메디언에 가까운 <호랑나비>의 가수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한때 내 별명이었던 '나비'는 그 <호랑나비>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 내막을 모르는 친구들은 그 '나비'가 흔히 고양이를 부르는 이름이라 생각하고, 내 외모가 고양이를 닮은 것도 아닌데 왜 나비라고 불리는 지 묻기도 했다.


내 이름은 '나라에서 으뜸'이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큰 아이가 태어날 때 나도 아이에게 멋진 뜻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작명법을 공부하고, 한자를 찾아 익히기도 했다. 사실 나와 아내는 서로 합의해 놓은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양쪽 집안 어른들의 반대도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쪽 집안에서는 불교 냄새가 강하게 난다고 싫다고 하셨고, 다른 쪽에서는 발음이 이상하다고 싫다고 하셨다. 그래서 작명법에 따라 다른 이름들을 몇 개 더 지어봤다. 전화번호부를 뒤져보기도 했고, 국어사전을 뒤져서 순 우리말 이름을 찾아보기도 했다. 몇 개의 새 이름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솔직히 우리 부부에겐 미리 정해놓은 이름 외에는 그닥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나는 우리가 정한 이름을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뜻을 그 이름에 붙여서 최대한 설득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여전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출생신고를 마감 시점인 한 달까지도 이름을 정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도중에 어른들께서 제안한 이름도 몇 개 있었으나, 너무 흔한 이름이거나, 촌스러운 이름이어서 다 거부했다. 마지막 날 나는 다른 대안이 없다면 그냥 우리 생각대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른들은 마지못해 승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마침내 아이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가끔 아이가 자라서 나를 원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좀 더 예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냐고, 친구들이 놀린다고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엄마와 아빠가 이 이름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이야기 해줘야지 생각하곤 했다.


나중에 작은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도 쉽지 않았다. 큰 아이의 이름이 워낙 특별한 느낌이라 그에 맞는 적절한 이름을 찾기가 어려웠다. 5년 만에 다시 작명법을 새로 공부하면서 한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전화번호부를 뒤져보기도 하고, 내 폰에 저장된 온갖 이름들을 다 써보고 불러보고 했다.


의외로 작은 아이의 이름은 예상치 못하게 쉽게 지었다. 맨 처음 큰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를 생각했다. 아이의 이름은 독립운동가의 호에서 따왔다. 사회주의 계열이라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아니 이 사람은 스스로 바꾼 이름이라고 봐야 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호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이 엄마와 나도 모두 지금까지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작은 아이의 이름은 그 독립운동가의 친구이자 동료인 독립운동가의 호를 그대로 가져왔다. 이 사람은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사람이지만, 호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에 그 제안은 내가 했지만, 나는 제안을 하고서도 왠지 익숙치 않은 느낌이라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아내는 마음에 든다고 적극적으로 그 이름으로 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적극적인 태도가 정말 다행이었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아이들 이름을 물어본 후 예쁜 이름이라고 누가 지었냐고 묻는다. 둘 다 내가 짓긴 했지만, 그때마다 아내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가 있었다. 지금 그 두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아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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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0-3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편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 이름을 한글 외자로 지었어요. 여태 그 이름을 쓸 기회(?)를 만들지 못 했지만 ㅋ

감은빛 2016-11-02 00:13   좋아요 0 | URL
이미 이름을 지어놓으셨군요.
˝쓸 기회를 만드셔야겠네요.˝
라고 답하면 너무 참견하는 것에 되겠죠?
외자라면 성과 연관되어 발음과 뜻에 영향을 미치겠네요.

2016-11-02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2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2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4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5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 자가 저자다


지난 번에 페이퍼에 썼던, 담배를 엄청 태워가며 쓴 에너지협동조합연합회의 홍보 소책자가 나왔다. 책자를 딱 보는 순간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예전부터 이렇게 쉽게 쓴, 대중적인 홍보 책자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다. 구성은 내가 평소 강의하는 순서로 잡았다. 나는 늘 글을 쓰던, 강의를 하던 쉽게 풀어 설명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쓰는 것이 목표였다. 바쁜 상황이었고, 도무지 짬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쓰겠다고 했던 건, 이런 거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기회도 좋았다. 프로젝트로 홍보물을 만들 돈이 있었고, 실력있는 디자이너가 있었다.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믿고 글을 쓸 수 있었다. 




연합회 사무실에서 실물을 딱 처음 보는데, 와! 완전 색감이 예뻐서 만족스러웠다. 편집자로서 그리고 공동저자로서 책을 여러권 내봤지만, 이 소책자만큼 만족감을 준 적은 없었다. 완전 기분 좋았다. 홍보 담당자로서 나에게 원고 독촉을 하다가 "오늘 안 주시면 저 울어버릴거예요" 라고 협박까지 했던 여성 활동가가 나에게 저자 싸인을 해달라고 네임펜을 갖고 왔다. 무슨 책도 아닌데, 저자냐구. 시끄럽다고 무시했건만, 이 친구 내 옆에 딱 버티고 서서 싸인해 줄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속 몇 쪽 되지도 않는 책자를 보고 또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내가 도무지 싸인을 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 친구가 자꾸 내 칭찬을 한다. 평소 옷차림이나 외모에 대한 지적질을 당했던 처지라 칭찬을 해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못 이기는 척 해줄수도 있지만, 난 엄청난 악필이고, 내가 글씨를 쓰는 순간 또 뭔가 지적질을 하며 놀림을 당할 게 뻔했다.


결국 옆에서 보고 있던 처장님이 이 친구를 밀어내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저 자가 저자다. 싸인을 받고야 말겠다." 이러는 거다. 무슨 젊은 여성이 아재 개그를 다 하냐? 외부 일정 때문에 몇 부만 챙겨서 일어서는데, "살이 찌셨나? 아님 부으신건가?" 이런다. 평소 이 친구에게 옷과 외모에 대한 지적 혹은 놀림을 많이 당했던 터라 그냥 무시했다. 어쨌거나 난 소책자가 예쁘게 나와서 무척 기분이 좋았고,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던 별로 상관이 없었다. 


마침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창립 7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열어, 이쪽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거기서 친한 연구원에게 소책자를 보여줬더니 좋아했다. 그리고 그날 만난 여러 사람에 보여줬더니 쉽게 잘 썼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아, 나 칭찬을 받으면 완전 우쭐해지는 인간이라. 그렇지. 내가 좀 잘났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 글도 잘 쓰고 강의도 잘 하는 사람이야. 막 이런 생각하면서 혼자 완전 들떠 있었다.


열심히 많이 뿌려야지. 그래서 얼른 다 소진하고 또 찍어야지. 그땐 주위 사람들에게 냉정한 의견을 듣고 반영해서 더 잘 만들어야지. 기분이 너무 좋다!


기대고 싶은 사람


최근 몇 달 동안 힘든 일이 많았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은 술 밖에 없었고, 술은 잠시 그 모든 문제를 잊게 해줬지만, 술이 깨고 나면 그 모든 문제는 고스란히 내게 남아 있었다. 힘들었다. 괜히 나를 원망했다. 나라는 인간, 왜 이렇게 멍청하고 바보같고 못난 걸까? 남들은 이 나이에 버젓이 잘들 살던데, 난 뭐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이렇게 살고 있나! 운동을 20년을 넘게 했는데, 뭐 하나 이룬 것도 없이 이러고 살고 있나!


스스로 이렇게 힘든데, 자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고 의지하려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어 몇 십분씩 통화를 하면서 어려운 점을 이야기한다.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 하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난 그 사람이 아니니까. 


어떤 이는 오래전 업무 때문에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당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욕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다. 얼마나 욕을 하고 다녔는지, 친하게 지냈던 조금 멀리 살던 사람이 날 만나면 내 걱정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막 묻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몰아내기 위해 단톡방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다고 했다. 그들에게 나는 공적이었다. 살면서 참 적을 많이 만들고 살았다. 그런데 그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요즘은 또 나에게 엄청 잘 대해준다. 그러면서 나에게 약간 기대는 느낌이 든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한테 전화를 걸고, 뭔가 본인이 잘 모르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나를 찾는다.


그래. 오래전부터 나는 늘 후배들, 특히 여성 후배들에게 좋은 상담자였다. 잘 들어주고, 섯불리 조언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잘 들여다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험상 이렇게 해보면 조금 나아질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비록 성별은 달랐지만, 난 예민한 성격이었고, 내가 겪었던 불편함과 어려움을 그들도 그대로 겪고 있었다. 에전엔 유난히 여성 후배들이 날 많이 찾았건만, 요즘은 여성 선배들조차 그런다. 


하지만 실은 나는 늘 내 삶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한심한 처지다. 지금의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내 처지가 나아질 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발 지금 말고 좀 나중에 기대면 안 될까? 내 앞가림이라도 좀 제대로 하게 되면, 그땐 더 열심히 들어줄게. 뭔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줄게. 그러면 안 될까?


한 숨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주 한 숨을 내쉬는 버릇이 생겼다. 몇 해 전 출판사에서 일할 때, 내 자리에서 제일 멀리 앉아 계신 사장님이 어느 날 지적했다. 왜 그렇게 한 숨을 자주 쉬냐? 무슨 일 있냐? 내가 그런 줄 의식하지 못했기에, 좀 놀랐다. 그랬구나. 나 자주 한 숨을 쉬는 구나.


공무원을 만나고 돌아와 일정이 계속 늦춰지는 상황을 걱정하며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며, 해야할 일들을 머리속에서 정리하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한 숨이 나왔다. 에휴! 왜 이렇게 일이 많나? 이 많은 일들을 다 언제 하나? 일은 많은데 왜 이렇게 하기가 싫나? 미치겠다. 휴!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자꾸 한 숨이 나온다. 웹자보 하나를 수정하면서 한 숨. 업무 메일 하나를 보내면서 한 숨. 공문을 받아 출력하면서 한 숨. 연락해야 할 명단을 작성하면서 한 숨. 해야할 일들 목록을 죽 훑으면서 계속 한 숨. 아, 진짜 나 왜 이렇게 사는거냐?


pretend


고등학교 3학년의 나, 여성을 만나기 위해 잠시 교회를 다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들 나에게 잘 해줬는데, 여름 수련회를 가서 다들 내가 제일 착해 보인다며 짧은 연극에서 예수 역을 나에게 시켰다. 난 못 이기는 척 예수 역을 맡아 연기했다. 


대학 1학년의 나, 흥부전을 각색한 영어 연극에서 주인공 흥부 역을 맡았다. 착하게 생겼다는 이유 만으로. 놀부 마누라 역을 맡은 동기 여자아이에게 주걱으로 뺨을 수십차례 맞고, 키 크고 잘생긴 놀부 역을 맡은 남자 동기에게 수십차례 두들겨 맞았다. 아, 진짜 주인공인데, 왜 이렇게 맞아야 하는 거야? 그 영어 연극을 본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 너 생각보다 연기도 잘 하고, 잘 어울리더라.


최근에 만난 어떤 사람은 내가 거짓말을 못할 사람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렇지 않다. 난 거짓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겐, 혹은 어떤 순간에는 도저히 거짓말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나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인간이 나라고 생각한다. 


palpitate


연말이고 금요일이라 행정업무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손 댈 틈조차 없었다. 왜 그리 일이 많은 건지. 일이 많으면 하나씩 빨리빨리 처리를 해야 하는데, 머리 속에서는 자꾸 최근에 만난 사람과의 즐거웠던 순간이 불쑥 떠오른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그와 주고 받은 문자를 열어 하나씩 하나씩 읽어본다. 어쩌면 별 것도 아닌 말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뛰고, 설레는 감정이 든다.


영화 [라빠르망]에서 리자(모니카 벨루치)가 막스(벵상 카셀)를 만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리자는 공원에서 막스가 자신을 부르자 몸을 돌려 뒤돌아 선 후 눈을 감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막스를 향해 몸을 돌린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뒤 돌아서서 눈을 감으면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좀 정리가 되나? 아님 더 사랑하는 감정을 갖기 위해 그런 걸까?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어떤 기분이 들지. 얼마 전 좋아하는 사람이 지하철 역에서 내려 올라오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척 설레였다. 이런 기분 얼마만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멀리서 그가 보일 때 차마 뒤돌아 서진 못하고, 그냥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떳다. 그 짧은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다가왔을 때 활짝 웃고 싶었다. 바보같은 얼굴 근육이 어색한, 이상한 표정을 만들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눈을 잠시 감고 있으니 정말 셀레는 감정이 폭발하듯이 커지더라. 오! 이런 느낌이구나. 이번에는 좀 민망해서 몸을 돌리지도 못했고, 아주 짧게 눈을 감았다 떴지만, 다음엔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는 중에 계속 그의 빨간 입술이 생각 났고, 내 손을 잡았던 그의 손의 감촉이 생각났다. 


 


책 이야기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교정을 보거나 글을 쓸 때 도움을 많이 준 책이다. 지금은 집에 책상이 없지만, 예전엔 책상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자리.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이 책을 두고 살았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특별판이 나왔다고 계속 사라고 하네. 난리를 치네. 과연 구판과 신판은 어떻게 차이날까? 특별판이라면 뭐가 달라지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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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29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느라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

감은빛 2016-11-02 00:10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만들고 싶었던 책자였기 때문에,
글 쓰는 것 자체는 고생은 아니었어요.
다만 많이 바쁘고 정신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쓰려다보니 좀 힘들었어요.

samadhi(眞我) 2016-10-2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나는 소책자인데요. ㅋㅋㅋ 귀여워요.

감은빛 2016-11-02 00:10   좋아요 0 | URL
진아님께도 보여드리고 싶네요. ㅎㅎ

samadhi(眞我) 2016-11-02 00:12   좋아요 0 | URL
주세요 ㅋㄷㅋㄷ 정식 출간되는 거면 사고 싶네요.

yureka01 2016-10-29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의 모순이 석화에너지의 불균형에서 나온다는 평소 생각인데..솔라 에너지라..의미가 상당할듯합니다.표지도 깔맞춤인데요..

감은빛 2016-11-02 00:10   좋아요 0 | URL
표지가 참 예쁘고 귀여워요.
마음에 꼭 들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10-2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문장 강화가 이렇게 세련된 디자인으로 나오다니요.. 사야겠네요.. 집에 노란 문장강화 있는데..ㅎㅎ. 글구... 작은책 표지 정말 마음에 듭니다..

samadhi(眞我) 2016-10-29 09:38   좋아요 0 | URL
저도 노랑 문장강화 있는데 새 책 욕심나네요. 이건 출판사에 낚이는건데...

감은빛 2016-11-02 00:11   좋아요 0 | URL
저도 계속 고민 중이지만,
당분간은 책을 안 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언제 다시 사버릴지도 모르겠지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10-2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문장 강화가 이렇게 세련된 디자인으로 나오다니요.. 사야겠네요.. 집에 노란 문장강화 있는데..ㅎㅎ. 글구... 작은책 표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아이유와 번데기


아침 알람이 울렸다.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멀리서부터 조용히 울리던 음악이 점점 커졌다. 아마 뭔가에 쫓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달리다 말고 멈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이건 꿈이고, 알람이 울리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힘겹게 눈을 떠 전화기를 찾기 위해 손을 뻗어 더듬었다. 알람을 끄고, 왼쪽에서 자고 있는 큰 아이를 깨웠다. 녀석은 아직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이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작은 아이는 내 오른팔을 베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내 몸에 바짝 붙어 있었다. 새벽에 잠시 깨서 저 멀리 이불 밖으로 나가있는 아이를 안아서 내 몸에 바짝 끌어놓고, 팔베게를 해줬는데,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작은 아이를 깨웠는데, 요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작은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이어서 큰 아이의 이마에도 입술을 대었다가 몸으르 일으켰다.


곧 큰 아이가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들이 지난 번에 가져왔다가 먹지 않은 수제 쵸코 쿠키와 삶은 계란과 치즈를 준비했다. 쿠키를 세 조각으로 나누고, 삶은 계란 세 개의 껍질을 까서 한 접시에 담아 두었다. 치즈 세 개는 비닐에 포장된 상태 그대로 포개두었다.


최근 작은 아이가 우리 집에 오면 유난히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늦게 일어나면 또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울기도 했다. 지난 번에는 그렇게 울고 난리를 치는데, 억지로 보내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쩔수없이 데리고 출근했었다. 오늘은 어떻게 깨워야 할까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켜고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유튜브에서 볼 빨간 사춘기의 <나만 안되는 연애>를 틀어서 잠시 듣다가 작은 아이의 가방을 챙겼다. 음악은 자동으로 다른 곡으로 바뀌었는데, 뒤이어 아이유와 울랄라 세션이 부른 <애타는 마음>이 나왔다. 큰 아이가 계란을 먹다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 했다.


"아빠, 나 일곱살 때 아이유 언니의 노래 좋아서 맨날 따라 불렀다." 큰 아이가 입에 든 계란을 다 씹고 물을 마시며 말했다. 기억이 난다. 당시 이 녀석이 아이유의 <좋은 날> 의 곡에 가사를 바꿔 불렀던 걸로 서재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한 이삼일쯤 전이었다. 아침에 작은애가 응가를 하는 통에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어쩌구 하느라고 아내와 내가 정신이 없을 때였다. 혼자 부엌(겸 거실)에 앉아서 놀고 있던 큰 애가 그 노래의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다.  


'왜 내 옆엔 아무도오 없는건지 ~ ♪ 빰빰빠바밤빰~빰~ ♪ 엄마 아빠는 모두 동생곁에 있는건지 ~ ♪~ 빰빰빠바밤~빰~♩~' 


동생이 태어난 지 이제 곧 1년. 약 5년간 독점하고 있던 엄마, 아빠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동생에게 빼앗긴 채 지나간 세월이었다. 그동안 숱한 설움과 고통과 화를 참아왔을 것이다. 가끔 백창우 동요집에 나오는 '애기때문에 못살겠어~ ♪ 애기때문에 못살겠어~ ♪ 할퀴고~ 차고~ 할퀴고~ 차고~ ♪' 이 노래를 종종 부르기도 했는데, 이번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노래가사를 바꿔가며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꼬마 여우 두 마리 (http://blog.aladin.co.kr/idolovepink/4729682) 2011-04-19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곱살 때 네가 그랬어. 기억나? 이렇게 묻고 싶었는데, 녀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와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 온 모양이다. 아이는 입에 물고 있던 치즈를 빠르게 먹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이가 나가기 전에 유튜브를 검색해 <좋은 날>을 켰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깨웠다. 작은 아이는 그냥 깨웠으면 안 일어났겠지만, 노래 소리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제일 먼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본다. 큰 아이가 나가고, 작은 아이를 화장실에 들여 보냈다.


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작은 아이를 쳐다보니, 이불로 온 몸을 감싸고 얼굴만 내놓고 누워있다. 아이를 불러 가자고 하니, "저는 지금 번데기예요. 번데기는 움직일 수 없어요." 라고 말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 장단을 맞춰 놀아주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나와서 잠바를 입고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저는 번데기예요. 아빠가 와서 꺼내주기 전에는 못 움직여요." 라고 했다. 아이의 가방과 내 가방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방으로 가서 작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안아 일으켰다. 녀석은 내 품에 꼭 안겼다. 사랑하는 이를 꼭 껴안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어 참 좋다. 어쩌면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아이들을 꼭 안아보기 위해 이 지겹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당신을 조종하는 '간디스토마 유충'은 누구?














업무 관련 책들, 글쓰기 위한 자료로 발췌 독서를 한 책들 외에는 책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 후 우리 집에 놀러왔던 친구는 내 책장을 보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앞으로 공부하러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우리집에 오겠다며, 자기가 원하는 책들 대부분이 다 있다고 했다. 속으로 못 읽은 책이 많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하나씩 천천히 읽어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뽑아든 책은 [너희들의 유토피아]였다. 출간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아마 2010년 겨울에 샀고, 사자마자 좀 읽다가 방치했었다. 다시 읽으려니 앞부분 내용도 하나도 생각이 안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머릿말에 나오는 간디스토마 유충이 개미의 뇌를 조작해 조종하는 이야기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듣고, 의식하고, 기억하고, 믿는다. 똑같은 장면을 본 두 사람의 기억은 절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함께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서로 다르다. 빨간 약을 선택한 네오와 파란 약을 선택한 네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을 알기전의 나와 알고 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보고 의식한다.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의 나와 후의 나도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배우냐가 뇌를 움직이는 어떤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나의 뇌를 조종하는 '간디스토마 유충'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확실한 건 박근혜를 조종한 '간디스토마 유충'은 최순실이었다. 그럼 최순실을 조종한 건 뭘까? 이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으려나?


입맛이 없다


참 의욕이 생기지 않는 나날이다. 트위터는 각종 분야의 성폭력 사례로 폭발했고,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부검 영장 집행 때문에 또 계속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일터에서 몸은 바쁜데 이상하게 일이 자꾸 꼬여서 잘 풀리지를 않고 있다. 마을에서 이런저런 급한 일들이 자꾸 들어오고, 나는 이런저런 일정에 치여서 뭐하나 똑부러지게 해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최순실 게이트의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계속 담배만 피워댔다. 평소 일주일에 한 갑 가량 피우던 게, 요즘은 이틀에 한 갑 가량 피우고 있다. 물론 한창 담배를 피던 시절엔 하루에 한 갑 반 이상을 피웠으니, 비교하면 아직 양호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담배양을 확 줄인 몇 년 동안 이렇게 피운 적은 별로 없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목이 아팠다. 그리고 며칠째 계속 입맛이 없었다. 뭘 먹어도 그게 맛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점심에 입맛이 없어, 그냥 안 먹으려고 했는데, 옆 사무실에서 밥을 했다고 와서 먹으라고 하시길래, 숟가락을 얹었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먹을 때는 괜찮았는데, 다 먹고 돌아서니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이다.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려나. 뭐 그래도 저녁에 술 한 잔 들어가면 괜찮아지겠지.


저녁 약속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내일로 미뤄졌고, 5시에 회의에 참석하면, 아마 1시간 안에 마치고 뒤풀이를 갈 것이다. 거기서 배를 채우면서 가볍게 한 잔 하고, 친구나 후배를 불러 술을 좀 마셔야겠다.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날들이다.


※ 입맛이 없다는 내 문자에 친구가 오늘이 탕탕절이라고 탕수육이라도 먹으라고 했다. 탕탕절이 뭐냐고 물으니,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가 간 날이라고 탕탕절이라고. 그렇구나. 오늘이 그런 날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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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8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연속 충격 뉴스 접하느라 국민들은 입맛을 잃고 있는 중인데, 여당 사람들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밥이 잘 넘어가고 있을 겁니다.

감은빛 2016-10-28 17:29   좋아요 0 | URL
네. 그 인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밥 잘 넘어가겠죠.

samadhi(眞我) 2016-10-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냄새 나는 아이를 안았을 때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꽉 차죠. 아이가 내게 안겼는데 내가 안긴 듯한 포근함. 생명체의 거대함을 느끼죠.

감은빛 2016-10-28 17:30   좋아요 0 | URL
그래요. 내가 안긴 듯한 포근함.
아이를 매일 보지 못하게 되고 나니,
그 잠깐 아이를 안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