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더 달콤한 꿈 속에 머물고 싶어, 이미 깨버린 잠을 다시 청해보지만, 인정사정없이 알람은 맹렬하게 울어댄다.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틈틈히 나도 씻고, 아이가 남긴 밥을 먹는다. 시계는 어느새 나서야 할 시간을 가르키는데, 아이는 자꾸만 딴 짓을 한다. 예쁜 분홍색 바지가 싫다고 징징대는 아이에게 파란색 어벙벙한 바지를 간신히 입히고, 두터운 잠바가 싫다고 또 징징대는걸 겨우겨우 달래어 입혀서 나선다.
뛰고 또 뛰어서 간신히 출근시간 세이프. 컴퓨터를 켜기도 전에 이런저런 일거리들이 밀려들어온다. 각종 서류들과 메모지들을 살펴보면서 머리속으로 우선순위를 정한다. 순서대로 해야할 일들을 입력하면서 컴퓨터 부팅을 기다린다. 아참, 아무리 바빠도 커피는 한잔 마셔야지.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는 소화가 안되어 커피를 마시지도 못했다. 한 잔만 마셔도 하루종일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없어서 입에 대질 않았는데,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하루에도 서너잔씩 마신다. 거래처를 방문할 때마다 나오는 믹스커피 한 잔. 졸릴때마다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 정말 몇 년 전에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시던 사람 맞나 싶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는 고프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뭐 먹으러 갈까 하고 물어보는 동료에게 글쎄, 입맛도 없는데 아무데나 가자 하고 답한다.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배를 채우는 행위에 가까운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잠시 웹서핑을 하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슬슬 눈치를 봐야 한다. 꼭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사장님과 상사들이 먼저 퇴근을 하고 난 후에 일어서야 할 것 같다. 애들을 데리러가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오늘따라 사장님 퇴근이 평소보다 늦다. 에라 모르겠다. 더 늦으면 어린이집에 혼자 남아 기다려야 할 작은 녀석에게 미안해진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서둘러 발을 놀린다.
지하철을 내리자마자 계단을 뛰어 오른다. 큰 아이는 학원에서, 작은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1분 1초라도 먼저 가고픈 마음에 숨이 차도록 뛰어간다. 막상 만난 큰 녀석이 엄마를 먼저 찾는다. 엄마는 오늘 약속이라고 말해주면 입을 삐죽거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듯한 눈치다. 웃는 얼굴로 잘 다녀오셨어요 라는 인사는 못할지라도, 엄마를 찾으며 울먹거리면 숨이 차도록 뛰어온 사람으로서는 화가 나게 마련이다. 이럴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애써 화를 참고 아이를 달래면 아이는 오히려 더 짜증을 내고 엄마를 찾으며 우는 경우가 많다. 달래면 달랠수록 아이는 더 울고, 짜증은 더 낸다. 아이를 달래기만해서 쉽게 풀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 반대로 화를 내거나,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아이의 태도를 따끔하게 야단치면 아이는 처음에는 더 울거나 혹은 울음을 참으며 억지로 따라오지만, 조금 지나면 금새 태도를 바꾼다. 이후에는 오히려 아이가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대며 잘 따라온다.
큰 아이를 만난 후엔 이제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간다. 작은 녀석은 조금 걷다가 두 팔을 벌려 아나됴! 라고 말한다. 좀 더 걷자고 대답하고 손을 끌면, 이내 발을 질질 끌며 아나됴! 아나됴를 반복한다. 안아서 조금 더 걷다보면 그제서야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좀 있다가 올거야 라고 답하면 그말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끝을 올려서 질문으로 답한다. 응 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하나는 안고, 하나는 손을 잡고 집에 들어선다. 아침에 급하게 나선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는 집은 말 그대로 엉망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장난감과 인형 등을 꺼내 늘어놓는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마땅한 반찬거리는 없고, 딱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대충 남아 있는 반찬들과 계란과 김으로 아이들 밥을 먹인다. 밥 먹다가 자꾸만 딴 짓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해가면서 밥 한 공기를 다 비운다. 아이들이 빨리 밥을 먹어야 상을 치우고 설겆이를 하던가 할텐데, 녀석들은 여전히 밥은 놔두고 장난을 치거나 딴 짓을 하고 있다. 잔소리도 하루 이틀이다. 화를 내고 밥그릇을 뺏고나서야 아이들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밥을 싹싹 긁어 먹는다. 빽 화를 내고 났더니 설겆이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이들을 씻기기 전에 잠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열어본다. 그 동안 큰 아이에게 학교 숙제를 다 끝내라고 일러두고, 작은 녀석은 언니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내 주위에서 놀게 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 큰 녀석에게 숙제 빨리 끝내라고 잔소리를 시작하고, 작은 녀석을 먼저 씻기기 시작한다. 씻기고, 닦고, 말리고, 바르고, 입히는 동안 또 소리를 몇 번이나 질러야 하는지. 그래도 다 씻은 후의 아이들은 밝고 예쁘다. 두 녀석의 뺨에 뽀뽀를 하고 잠자리에 눕힌다. 녀석들의 장난은 누워서도 계속된다. 어느 정도 까지는 봐주지만, 장난이 길어지면 아침에 일어날 때 힘들어하기 때문에 두 놈을 격리시켜야 한다. 유난히 늦게 자는 작은 녀석을 데리고 나와서 큰 녀석이 먼저 잠들기를 기다린다.
한동안 놀아주다보면 작은 녀석도 곧 졸리다고 코 자러 가겠다고 말한다. 작은 녀석까지 간신히 재우고나면 그제서야 나도 씻을 수 있다. 씻고 나와서 잠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졸리면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직전, 문득 설겆이를 못한 것이 맘에 걸린다. 나중에 돌아온 애들엄마가 하겠지. 정안되면 내일 아침에 대충 하던가.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남들이 얘기하는 티비 프로그램이나 영화나 음악 얘기 따윈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친구 녀석은 맨날 나를 무슨 원시인이나 외계인 취급하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도 대화에 잘 끼질 못한다.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영화, 듣고 싶은 음악은 많은데, 늘 일상에 쫓겨 겨우겨우 살아가는 내 모습이 참 한심하다 싶다. 피곤에 지쳐 겨우 겨우 잠이 드는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느새 잠이 든다.
정신분석학이라면 의례 프로이트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한방에도 정신 질환 혹은 심리치료를 다루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녹색당에서 만난 한 한의사는 공황장애를 전문으로 다루면서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분이었다. 장애인 무료 진료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고,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투쟁현장에도 달려가서 활동가들에게 무료 진료를 하는 분이었다. 지난 여름 그 분이 강정마을에 다녀온 후 들었다. 그 분 말씀이 이런 정신 질환에 처방하는 약은 오히려 흔한 질병에 쓰는 것보다 약값이 더 비싸다고 한다. 현장 활동가들이 많이 지치고,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 마음의 상처가 깊은데, 제대로 치료하자면 돈도 많이 들고,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강정마을에는 불법으로 해군기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활동가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연행되곤 한다. 그 곳을 떠나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데, 떠나지 못하고 계속 상처를 받아야 하는 처지의 활동가들을 생각하며 긴 한숨만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은 이 책의 저자도 역시 한방으로 정신 질환이나 심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분이다. 폭식, 소화불량, 편두통, 습관성 음주와 흡연 등 우리 주변에 만연한 다양한 몸의 문제들이 사실은 마음의 문제는 아닐까 생각해왔다.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받는 갖가지 스트레스들이 결국은 몸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병원에서 이런저런 처방을 받아도 결국은 다 임시조치일 뿐이고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 것이다.
요즘 누굴 만나던 '바쁘다'와 '정신없다' 그리고 '재미없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만큼 내 마음은 피폐해져서 상처를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을 차근차근 읽으며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