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태가 많이 안좋다.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속출하고 있는데, 전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그리고 다양한 활동공간들에서도.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몰린 적이 있었나를 생각해보면, 그런 적은 절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려운 일 하나를 풀어내는데에도 끙끙거려야 할 판에, 몇 가지 문제가 동시에 겹쳐서 오니까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것이 방법일까? 그래서 최근 정신 나간 놈처럼 살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나름 잘난 놈이라고,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잘난 척 하면서 살아왔는데, 한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놈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어제 밤 아이들을 재우고, 설겆이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악몽일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나면 잊혀질 그런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다시 나는 예전처럼 목에 힘주고 잘난 척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설겆이를 마치고 잠들었다.

 

아침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리고, 딱딱한 목과 어깨 근육을 주무르면서 나비는 결코 장자가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구나. 당연한 생각을 이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깨닫는다.

 

 

**********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책 정보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이 책 뒷부분에 있는 우리나라 사례들은 내가 쓴 글이다. 존경하는 선배님께 부탁받았기 때문에 잘 쓰려고 했지만, 자료도 부족했고, 시간도 부족했고, 경험도 부족했다. 그래도 지금 읽어보니, 좀 더 시간을 갖고, 더 자료를 찾고, 더 글을 다듬었다해도 이거보다 더 잘쓰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건 아마도 나의 역량이 이정도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하다. 여러모로 나의 모자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맨 뒤에 포함된 내 글은 많이 부족하지만, 이 책은 정말 값진 책이다. "말은 그만! 이제 나무를 심자!"라는 이 아이들의 직접행동은 말만 번지르르한 나 같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이들에게 권하기에도 좋고, 어른들이 읽어도 여러모로 느끼는 바가 많다.

 

지구를 구하는 길은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한 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고민과 토론과 논의 보다는 묵묵히 행하는 간단한 행위 하나가 답일 수도 있겠다 싶다.

 

 

 

 

 

 

 

 

 

 

 

 

 

 

 

 

※ 좀 전에 출판사로부터 실수로 내 이름이 빠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1쇄가 모두 판매되면 2쇄를 찍을 때 이름을 추가하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음, 아마도 이 글을 읽으신 걸까?

이름이 빠진 건 별로 상관없는데, 책이 어서!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이 책이 많이 알려지는만큼, 지구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 많아질테니.

(2012-11-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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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1-15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또 여러 문제가 겹칠 때면 한 가지가 실마리가 보이면 나머지도 실마리가 보이는 경우가 많더군요(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요.) 가장 쉬운 문제부터 풀어라,는 수능문제 풀 때만 쓰는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내시고 문제들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감은빛 2012-11-15 15:22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따뜻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 저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뭐가 가장 쉬운 문제인지 판단조차 어렵네요.
세상 돌아가는 문제, 이 사회의 문제점과 지구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뭐가 가장 중요하고 또 뭐가 가장 쉬운 문제인지 잘 알 수 있을 듯한데,
정작 제게 닥쳐온 문제들에 대해서는 판단이 되지 않네요.
그저 눈 앞에 닥친 문제들을 고민하고 속을 썩이기만 할 뿐이예요.

맥거핀님의 응원 덕분에 조금은 힘이 납니다!
힘 내보겠습니다! ^^

숲노래 2012-11-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 보면 '나무심기'란 어른들이 만든 어떤 제도권과 같아요. 예부터 '나무를 심은' 적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씨앗을 받아 나무를 키웠지, '나무를 심지' 않거든요. 아이들이 나무심기 행동을 한다 할 적에도 '나무를 심는 일'이 무엇인지를 슬기롭게 깨닫도록 돕는 책이기를 빌어요.

감은빛 2012-11-15 15:25   좋아요 0 | URL
이 책의 가치는 거기에 있는 듯 해요.
이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켜서 나무를 심지 않거든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지요.
어른들이 말로만 떠들고, 싸우는 동안
아이들은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 직접 행동하는 것.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루쉰P 2012-11-2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감은빛님 글이 책에 실렸군요. ^^ 왕가리 마타이라는 흑인 여성이 생각이 나네요. 아프리카에서 나무를 심으며 대 격투를 벌이던 여성이었는데 요근래에 자서전도 나온 듯 싶더라구요.
이 책에 감은빛님의 글이 실렸다면 안 살 수가 없죠. ㅋㅋ
저는 항상 여러 문제와 싸우고 있어요. '영원의 도읍'에서 주인공이 한 말인데요.
'항상 위기에 싸우고 있는 사람은 더 문제가 발생해도 담담하다.'란 그런 류의 말이었던 것 같아요. 인생은 고뇌나 문제가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도 제 인생관이었는 데 20살 넘어 사회를 나오면 바뀌었어요.
인생은 고뇌나 문제가 있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죠. 없는 게 이상하다고 ㅋ 인정하고 들어가니 좀 맘은 편하더라구요. 대신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말자. 마음 먹었는 데 이런 10년 수양 도로아미타불 이라구. 집착어린 사랑에 빠져 완전 맛이 갔네요 -.-
요즘은 출근 전에 거울을 보며 내 마음은 태평양 미사일 수백만 발이 떨어져도 다 받아들이는 태평양이라고 외치며 집을 나서고 있어요. 풉!
암튼 감은빛님의 성지 순례 덕에 리뷰 하나 올렸습니다. ㅎㅎㅎㅎ 역시나 순례객의 발걸음이 무서워요. ㅋ 와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감은빛 2012-11-20 13:20   좋아요 0 | URL
루쉰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맹렬히 환영합니다! ^^

이 책 맨 끝에 조금 포함된 건 제가 쓰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제 글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자료조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이 책에 어울리는 말투로 정보를 전달한 것 뿐이예요.

게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모자란 글이예요.
책에 제 이름도 안 나와있고 해서,
여기에 밝힐 생각이 없었는데, 책 소개를 하다보니 그냥 말하고 말았네요.

루쉰님 서평 기대됩니다.
지금은 여유가 없고, 이따가 꼭 찾아 읽을 게요! ^^

2012-11-21 0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 학교 텃밭 - 초등학교에서 많이 심는 채소 9종과 곡식 3종 가꾸기 철수와영희 그림책 5
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노환철 감수, 바람하늘지기 기획 / 철수와영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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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내가 지역의 생협 조합원들과 함께 텃밭을 분양받았다. 아내는 주말마다 나가서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곤 했다. 나도 아내도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농사라곤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내는 같이 농사짓는 조합원들에게 배워가면서 즐겁게 일을 했다. 아주 가끔 나와 아이들도 함께 텃밭에 따라갔다. 초등학생인 큰 아이는 싹이 올라오는 모습을 신기하게 관찰했고, 조그맣던 싹이 점점 자라나 줄기가 굵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흐릿한 기억에 나도 그 나이때쯤 강낭콩을 심어서 몇 알을 밥에 넣어 먹었던 기억이 났다. 몇 알 되지도 않는 콩이 들어간 밥을 한술 뜨시며 아버지께서 칭찬해주셨던 말도 뒤이어 떠올랐다. 아이가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아내의 텃밭을 지켜본 기억은 아마 오래 남을 것이다. 아내가 상추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쌈채소를 따오고, 방울토마토를 따오고, 고추를 따오고, 옥수수를 따올 때마다 아이는 엄마가 농사지은 채소들이 사먹는 채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이의 학교에는 아직 텃밭이 없는데, 최근 초등학교에서 텃밭을 만들어서 이것저것 키워본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작은 텃밭이라 해도 고사리 손으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아마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글에는 학교 텃밭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깨닫게 될지 잘 표현되어 있다. 직접 수확한 싱싱한 제철 채소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특히 농사를 통해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깨닫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며, 살뜰히 보살핀 만큼 수확을 할 수 있어요.” 라는 저자의 말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계속 마음속에 남는다.

 

이 책 『우리학교 텃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많이 심는 채소 9종과 곡식 3종을 가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농사계획표를 짜고, 농기구와 거름을 준비하는 일부터 수확한 작물들을 깨끗하게 씻고 다듬어서 요리하는 방법까지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띄엄띄엄 아내의 텃밭을 살펴보곤 했던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아내와 아내의 동료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어왔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마운 흙’, ‘고마운 비’, ‘고마운 해’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꼭 필요한 자연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자칫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자연의 가치에 대해 깨우쳐 주는 것도 마음에 든다. ‘고마운 풀’에서는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는 풀들 중에서도 나물로 먹을 수 있는 풀이 있으며, 또한 풀이 있어서 땅이 마르는 것을 막아주고, 땅의 힘을 길러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마운 벌레’에서는 식물과 곤충의 공생관계를 알려주고 특히 꽃가루받이를 가장 많이 하는 ‘벌’이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을 알려준다.

 

가장 마지막에 부록처럼 실린 내용들도 모두 흥미롭다. 올해 농사를 지은 수확물로 다음해에 뿌릴 씨앗을 얻는 방법이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현되어 있고, 천연 거름을 만드는 몇 가지 방법들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줌과 똥으로 거름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빗물을 모아서 사용하기 등 학교에서 조금만 더 신경 쓰면 훨씬 더 텃밭 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백 마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을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깨닫는다. 도시에서만 자란 탓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텃밭 농사였는데, 책에 실린 그림으로 1년 농사 과정을 쭉 보고나니,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은 아니구나 싶다. 아이들도 이 책을 본다면 흥미를 갖고 텃밭 농사를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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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1-1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에서 꽃그릇 하나 마련해(아무 플라스틱 상자도 다 되니까요)
아무 씨앗 하나만 심어도 돼요.
아무 씨앗을 안 심고 흙만 있어도 돼요.
숲에서 한 봉지 주워 와서
꽃그릇에 담고는 가만히 지켜보면,
햇볕이 잘 들고 빗물을 받을 만한 데에 두고 보면
온갖 풀이 돋아요.

사실, '텃밭'이란 집에 딸란 밭이란 소리인데,
주말농장은 '텃밭'이 아니거든요.
주말농장은 '멀리 찾아가서 일하는 논밭'이니,
집안이나 집앞에 진짜 텃밭을 마련해 보셔요.

감은빛 2012-11-16 11:41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베란다에 파와 방울토마토 등 몇개 야채를 길렀죠.
올해는 옥상에 스티로폼 상자와 큰 화분을 이용해서
상추와 고추 그리고 방울토마토 등을 길렀구요.

그런데 역시 밭에서 키우는 야채들이 더 잘 자라고, 많이 열리더라구요.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도 심어 먹을 수 있구요.
저희 텃밭은 완전 집 앞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동네 텃밭이었으니까요.
 

 

눈을 뜨면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더 달콤한 꿈 속에 머물고 싶어, 이미 깨버린 잠을 다시 청해보지만, 인정사정없이 알람은 맹렬하게 울어댄다.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틈틈히 나도 씻고, 아이가 남긴 밥을 먹는다. 시계는 어느새 나서야 할 시간을 가르키는데, 아이는 자꾸만 딴 짓을 한다. 예쁜 분홍색 바지가 싫다고 징징대는 아이에게 파란색 어벙벙한 바지를 간신히 입히고, 두터운 잠바가 싫다고 또 징징대는걸 겨우겨우 달래어 입혀서 나선다.

 

뛰고 또 뛰어서 간신히 출근시간 세이프. 컴퓨터를 켜기도 전에 이런저런 일거리들이 밀려들어온다. 각종 서류들과 메모지들을 살펴보면서 머리속으로 우선순위를 정한다. 순서대로 해야할 일들을 입력하면서 컴퓨터 부팅을 기다린다. 아참, 아무리 바빠도 커피는 한잔 마셔야지.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는 소화가 안되어 커피를 마시지도 못했다. 한 잔만 마셔도 하루종일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없어서 입에 대질 않았는데,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하루에도 서너잔씩 마신다. 거래처를 방문할 때마다 나오는 믹스커피 한 잔. 졸릴때마다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 정말 몇 년 전에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시던 사람 맞나 싶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는 고프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뭐 먹으러 갈까 하고 물어보는 동료에게 글쎄, 입맛도 없는데 아무데나 가자 하고 답한다.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배를 채우는 행위에 가까운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잠시 웹서핑을 하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슬슬 눈치를 봐야 한다. 꼭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사장님과 상사들이 먼저 퇴근을 하고 난 후에 일어서야 할 것 같다. 애들을 데리러가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오늘따라 사장님 퇴근이 평소보다 늦다. 에라 모르겠다. 더 늦으면 어린이집에 혼자 남아 기다려야 할 작은 녀석에게 미안해진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서둘러 발을 놀린다.

 

지하철을 내리자마자 계단을 뛰어 오른다. 큰 아이는 학원에서, 작은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1분 1초라도 먼저 가고픈 마음에 숨이 차도록 뛰어간다. 막상 만난 큰 녀석이 엄마를 먼저 찾는다. 엄마는 오늘 약속이라고 말해주면 입을 삐죽거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듯한 눈치다. 웃는 얼굴로 잘 다녀오셨어요 라는 인사는 못할지라도, 엄마를 찾으며 울먹거리면 숨이 차도록 뛰어온 사람으로서는 화가 나게 마련이다. 이럴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애써 화를 참고 아이를 달래면 아이는 오히려 더 짜증을 내고 엄마를 찾으며 우는 경우가 많다. 달래면 달랠수록 아이는 더 울고, 짜증은 더 낸다. 아이를 달래기만해서 쉽게 풀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 반대로 화를 내거나,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아이의 태도를 따끔하게 야단치면 아이는 처음에는 더 울거나 혹은 울음을 참으며 억지로 따라오지만, 조금 지나면 금새 태도를 바꾼다. 이후에는 오히려 아이가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대며 잘 따라온다.

 

큰 아이를 만난 후엔 이제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간다. 작은 녀석은 조금 걷다가 두 팔을 벌려 아나됴! 라고 말한다. 좀 더 걷자고 대답하고 손을 끌면, 이내 발을 질질 끌며 아나됴! 아나됴를 반복한다. 안아서 조금 더 걷다보면 그제서야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좀 있다가 올거야 라고 답하면 그말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끝을 올려서 질문으로 답한다. 응 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하나는 안고, 하나는 손을 잡고 집에 들어선다. 아침에 급하게 나선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는 집은 말 그대로 엉망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장난감과 인형 등을 꺼내 늘어놓는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마땅한 반찬거리는 없고, 딱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대충 남아 있는 반찬들과 계란과 김으로 아이들 밥을 먹인다. 밥 먹다가 자꾸만 딴 짓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해가면서 밥 한 공기를 다 비운다. 아이들이 빨리 밥을 먹어야 상을 치우고 설겆이를 하던가 할텐데, 녀석들은 여전히 밥은 놔두고 장난을 치거나 딴 짓을 하고 있다. 잔소리도 하루 이틀이다. 화를 내고 밥그릇을 뺏고나서야 아이들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밥을 싹싹 긁어 먹는다. 빽 화를 내고 났더니 설겆이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이들을 씻기기 전에 잠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열어본다. 그 동안 큰 아이에게 학교 숙제를 다 끝내라고 일러두고, 작은 녀석은 언니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내 주위에서 놀게 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 큰 녀석에게 숙제 빨리 끝내라고 잔소리를 시작하고, 작은 녀석을 먼저 씻기기 시작한다. 씻기고, 닦고, 말리고, 바르고, 입히는 동안 또 소리를 몇 번이나 질러야 하는지. 그래도 다 씻은 후의 아이들은 밝고 예쁘다. 두 녀석의 뺨에 뽀뽀를 하고 잠자리에 눕힌다. 녀석들의 장난은 누워서도 계속된다. 어느 정도 까지는 봐주지만, 장난이 길어지면 아침에 일어날 때 힘들어하기 때문에 두 놈을 격리시켜야 한다. 유난히 늦게 자는 작은 녀석을 데리고 나와서 큰 녀석이 먼저 잠들기를 기다린다.

 

한동안 놀아주다보면 작은 녀석도 곧 졸리다고 코 자러 가겠다고 말한다. 작은 녀석까지 간신히 재우고나면 그제서야 나도 씻을 수 있다. 씻고 나와서 잠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졸리면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직전, 문득 설겆이를 못한 것이 맘에 걸린다. 나중에 돌아온 애들엄마가 하겠지. 정안되면 내일 아침에 대충 하던가.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남들이 얘기하는 티비 프로그램이나 영화나 음악 얘기 따윈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친구 녀석은 맨날 나를 무슨 원시인이나 외계인 취급하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도 대화에 잘 끼질 못한다.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영화, 듣고 싶은 음악은 많은데, 늘 일상에 쫓겨 겨우겨우 살아가는 내 모습이 참 한심하다 싶다. 피곤에 지쳐 겨우 겨우 잠이 드는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느새 잠이 든다.

 

 

 

 

 

 

 

 

 

 

 

 

 

 

 

 

 

 정신분석학이라면 의례 프로이트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한방에도 정신 질환 혹은 심리치료를 다루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녹색당에서 만난 한 한의사는 공황장애를 전문으로 다루면서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분이었다. 장애인 무료 진료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고,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투쟁현장에도 달려가서 활동가들에게 무료 진료를 하는 분이었다. 지난 여름 그 분이 강정마을에 다녀온 후 들었다. 그 분 말씀이 이런 정신 질환에 처방하는 약은 오히려 흔한 질병에 쓰는 것보다 약값이 더 비싸다고 한다. 현장 활동가들이 많이 지치고,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 마음의 상처가 깊은데, 제대로 치료하자면 돈도 많이 들고,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강정마을에는 불법으로 해군기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활동가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연행되곤 한다. 그 곳을 떠나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데, 떠나지 못하고 계속 상처를 받아야 하는 처지의 활동가들을 생각하며 긴 한숨만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은 이 책의 저자도 역시 한방으로 정신 질환이나 심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분이다. 폭식, 소화불량, 편두통, 습관성 음주와 흡연 등 우리 주변에 만연한 다양한 몸의 문제들이 사실은 마음의 문제는 아닐까 생각해왔다.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받는 갖가지 스트레스들이 결국은 몸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병원에서 이런저런 처방을 받아도 결국은 다 임시조치일 뿐이고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 것이다.

 

요즘 누굴 만나던 '바쁘다'와 '정신없다' 그리고 '재미없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만큼 내 마음은 피폐해져서 상처를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을 차근차근 읽으며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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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10-3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많이 바쁘시군요. 저는 시험 끝난지 이제 며칠 밖에 안 지났는데 이상하게 학교 생활이 여유롭지가 않네요, 책 읽고 글 쓰는 시간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요. ^^;;

감은빛 2012-11-12 17:46   좋아요 0 | URL
댓글 많이 늦었네요.
저만 그런게 아니라, 요즘 다들 바쁜 것 같아요.
이제 연말이 다가오니 더더욱 그런 듯 해요.
시루스님과 저에게 여유가 생기기를 바래봅니다. ^^

북드라망 2012-10-3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감은빛 2012-11-12 17: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글을 읽으셨다니!
부끄럽네요.
열심히 읽고 열심히 들여다보려고 노력중입니다.

조선인 2012-10-3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까지 우리집 풍경이군요. 큰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작은애가 일곱살 이상이 되면 한숨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까지 힘내세요!!!

감은빛 2012-11-12 17:48   좋아요 0 | URL
늘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조선인님.
그렇지만 거기까지 아직 여러해가 남았단 말이죠.
그리고 저는 하루하루가 참 힘들게 느껴지네요.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2-10-3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하루, 감은빛님의 아이들은 자라서 아버지의 이 성실함과 따뜻함을 추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화이팅!

감은빛 2012-11-12 17:48   좋아요 0 | URL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기억해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지요.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북극곰 2012-11-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저의 일상하고 판박입니다. ㅠ.ㅠ
감은빛님 화이팅입니다!!!

감은빛 2012-11-12 17:4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북극곰님.
공감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북극곰님도 힘내시길 바랄게요!

hanicare 2012-11-1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조선인님 페이퍼에 달아놓으신 명료한 댓글을 타고 이 서재에 착륙했는데
바로 이 페이퍼를 읽고는 댁의 남편은 도대체 뭐 하시는데요?하고 답글을 달았다가
남의 가정사에 내가 왠 참견이람 싶어 넘치는 오지랖을 우산 접듯 착 접고는 댓글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어떤 분의 피아노 연습 페이퍼에 달린 댓글을 보니 어이쿠 남자분이셨군요.
내 시야에 구멍이 숭숭 났나 도대체 어떻게 읽었길래 이런 황당한 착각을.
우스꽝스런 첫인사가 됐네요.아무튼 새 서재인을 발굴하게 되어 반가와요.
힘들다고 하시지만 행복해보이는데요^^


감은빛 2012-11-15 11:1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니케어님(이렇게 불러드리는 것이 맞나요?)
먼저 찾아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어 저도 반갑습니다! ^^

이상하게 제 글을 읽은 분들이 저를 여성으로 단정짓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이 글처럼 육아에 대한 글이 아니라도 그냥 서평도 그렇더라구요.
그런 착각이 처음은 아니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글에는 제가 아빠임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여럿 있어요.
긴 글이고, 제 글재주가 워낙 미천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이들 키우는 일도 그렇고, 세상 사는 일도 그렇고,
힘들고 지치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그게 행복이 아닌가 싶고 그렇더라구요. ^^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산책을 나섰다. 골목을 벗어나 작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폐타이어를 재활용한 고무가 깔린 놀이터를 밟으며, 발암물질을 비롯한 온갖 화학물질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아이들이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흙을 한번 밟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과 학교 그리고 학원을 오가면서, 골목길과 큰길 어디에서도 흙을 밟아볼 기회는 없다. 아이들이 만나는 나무는 매연에 찌든 가로수가 유일하고, 아이들이 만나는 동물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뿐이다. 주말에 어디 도시 외곽으로 나가야 비로소 자연을 만나고, 다양한 생명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한번 뿐인 그 기회조차 매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쁘고 피곤한 직장인으로서 휴일에는 방콕하고 싶은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딴 생각을 한참동안 하다가 아이들을 불러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층 빌딩은 없지만 단층 주택들이 하나둘 허물어지고 4~5층 빌라로 다시 지어지면서 점점 시야에서 하늘이 가려지고 있었다. 문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무척 낯설게 느껴지면서,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이 삶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어느 행사에서 한 여성이 이렇게 인사말을 시작했다. “영화 워리를 보면 생명이 없는 지구에” 여기까지 얘기하고 잠시 말을 끊은 그 분은 대부분 사람들이 무슨 영화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더 덧붙인다. “제가 발음이 좀 안 좋습니다. 월! 이! 를 보면 쓰레기 밖에 남지 않은 지구에서 월-이가 작은 새싹 하나를 발견하여 지켜내는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라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워리’라고 듣고 무슨 개가 나오는 영화인가 생각했던 나는 월! 이! 라고 강조해서 발음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아이들과 함께 본 그 애니메이션을 떠올렸다. 쓰레기를 치우는 로봇 월-이가 탐색로봇 이브(월-이는 ‘이바’라고 발음한다)를 만나 함께 작은 새싹을 지켜내고, 지구를 떠나 오랜 세월을 거대한 우주선에서 생활해 온(그래서 걸음도 걷지 못하게 퇴화되어 버린) 인류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도록 하는 모험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그리고 최근에 또 다른 애니메이션을 하나 보았다. 흙이라곤 단 한 줌도 없는 도시. 나무는 모두 플라스틱이고, 배터리를 넣으면 다양한 색깔의 조명을 보여주며, 심지어 노래방 기능까지 갖고 있다. (마치 요즘 생수통을 배달하는 것처럼)집집마다 산소통(생수통과 똑같이 생겼다.)이 배달되고, 산소를 파는 회사 사장은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그런 도시에 살고 있는 주인공 남자 아이는 이웃집 누나를 좋아하는데, 그 누나는 ‘살아있는 나무’를 보고 싶어 하고, 나무를 선물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혼할거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엄마에게 ‘살아있는 나무’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엄마가 답하길 “그런 지저분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뭐하려고 찾니?” 라고 말한다. 바로 [로렉스]라는 영화 속 얘기다.

 

 

 

 

 

 

 

 

 

 

 

 

 

 

 

 

 

[로렉스]와 [월-이]의 세계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지구에 인간을 제외한 생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가 대략 1m쯤 되어 보이는 정육면체로 압축된 쓰레기 덩어리들이 웬만한 고층빌딩 보다 더 높이 쌓여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월-이]의 지구는 충격적이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곤 바퀴벌레처럼 생긴 벌레 하나 밖에 없는 지구. 움직이는 것은 쓰레기를 압축해서 쌓고 있는 로봇 월-이 뿐이다. 물론 [로렉스]에서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인간 외에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없는 인공물 속에서 살고 있지만 한 여자 아이를 제외하고는 자연에 대한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도 [로렉스]의 세계에서 한 100여년 후쯤의 미래가 [월-이]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모든 인공물들은 자연적으로 분해되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로 남는다. 인공물 밖에 없는 세계는 곧 모든 물건들이 쓰레기가 된다는 얘기. 거대한 쓰레기 처리장이 되어버린 지구는 로렉스의 세계로서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지금 이 상태로 간다면 저 낯설어 보이는 [로렉스]의 세계가 바로 얼마 후의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일상에서 자연을 접하지 못하고 자란다. 머지않은 미래의 아이들이 ‘살아있는 나무’가 뭔지 모르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새싹’을 지켜내어 생명이 돌아온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두 영화 모두 이야기의 중반 이후는 바로 작고 여린 ‘새싹’을 지켜내기 위한 모험으로 그려진다. 생명 혹은 자연을 상징하는 이 작은 새싹은 황량하고 삭막한 그래서 생명이 살 수 없는 별이 되어버린 지구가 다시 크고 작은 생명체로 가득 찬 초록별이 되리라는 희망을 뜻한다. 이미 생명이 다 사라져버린 땅에서 또다시 생명을 키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막화가 진행되는 땅에 나무를 심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니, 작은 씨앗 하나에, 작은 새싹 하나에 매달려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잃어버리기 전에 지켜내는 것.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리를 지금 인류는 모르는 듯하다.

 

 

[로렉스]를 다 보고나서 큰 아이는 인형놀이를 하다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새싹(씨앗)’을 지키는 상황을 연출했다. 역시 아이들은 쉽게 그런 이야기를 흡수한다. 나는 아이가 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나 역시 그 나쁜 어른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작은 생명도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아니 그보다 나는 먼저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빠가 자랄 때는 매일 동네 뒷산에 가서 놀다오곤 했어. 키 큰 나무가 많은 숲이 우거지고, 그 속에 다람쥐와 청서가 살았어. 아름다운 목소리를 뽐내는 이름 모를 새들이 그 숲에 살았어. 그리고 골짜기를 따라 작은 개울이 흘렀고, 쪼그만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가재와 개구리와 미꾸라지가 살았지. 아빠는 숲 속을 뛰어다니고, 골짜기에서 물장난을 치고, 가재와 미꾸라지를 잡고 놀았단다. 그런데 너희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또 다른 학원으로 옮겨 다니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속에서만 살고 있구나. 아빠가 미안하구나! 이렇게 생명이라곤 없는 죽은 도시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해마다 새로운 도로가 뚫리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새로운 마트가 생기고, 사람들은 자꾸만 회색 도시를 넓혀가고 있다. 자연은 점점 더 줄어들고, 사람들은 자꾸만 도시로 모여든다.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가 겪어 온 급격한 변화들을 생각하면 아이들이 겪을 변화는 또 얼마나 클 것인지 쉽게 예측되지 않는다. 혹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아닐까? 무섭다! [로렉스]의 세계와 [월-이]의 세계가 현실이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 뱀발 하나

 지난 달 모 매체에 실었던 글이다.

※ 뱀발 둘

 이 글에 대한 편집장님의 평은 "글이 정교하지 못하다!"였다.

※ 뱀발 셋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글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꼈다. 역시 아직 나는 한참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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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두 병

 

 

그 날 저녁엔 정말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면서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서 아이들 밥 먹이고, 씻기고, 재워야지.
그 생각 밖에 없었다.

하나 변수는 큰 아이가 의료생협 소모임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
아이에게 시간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숙제를 끝마치고 저녁을 다 먹지 못하면
모임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약속 받았다.

당연히 아이는 약속시간을 넘겼지만,
워낙 가고 싶어하는 눈치라서 
서둘러 아이들 손을 붙잡고 집을 나섰다.
추울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더 추웠다.
작은 녀석의 바지가 딱 맞는데,
안았더니 바지 아랫단이 자꾸만 올라가서 
맨 종아리가 찬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안그래도 감기 기운이 살짝 있는 녀석인데......
큰 아이에게 날씨가 너무 추운데 그냥 집에 돌아가자고 했더니,
안된다고 가고 싶다고 한다.

작은 녀석의 여벌옷을 챙겨나오긴 했는데,
종아리를 가릴 담요 같은 걸 챙기질 못했다.
할 수 없이 내 잠바 지퍼를 열고 녀석을 잠바 속에 쏙 집어 넣고,
그 상태로 안고 다녔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워서 더 힘들고 불편했지만 어쩔수 없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큰 아이가 학교 준비물로 병뚜껑 두 개를 가져가야 한단다.
플라스틱 뚜껑이 아닌, 금속 뚜껑.
아무래도 맥주병 뚜껑을 말하는 것 같은데,
맥주병 뚜껑 두 개를 어디서 구하나?
어디 술집에서 달라고 해볼까?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에 아이 손을 붙잡고
술집에 가서 병뚜껑을 구걸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술 생각이 없었음에도,
집 앞 슈퍼에서 병맥주 두 병을 샀다.
서둘러 아이들을 씻기고, 재운 다음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잠들었다.
사실 이렇게 찬바람 부는 때에는 맥주보다
따뜻한 정종이 더 땡기는데......

 

 

 

그래서 결론은?

술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찬바람 맞으며 돌아다니다보니  갑자기 정종이 땡겼으나,

아이의 학교 준비물 때문에 결국 맥주 두 병 마시고 잤다는 거.

 

 

정종 한 병

 

 

그리고 그 이틀 뒤,

여전히 바람이 차가웠던 저녁.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놓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땅한 찬거리가 없었다.

큰 아이에게 동생이랑 놀고 있으라고 해놓고,

집 근처 슈퍼로 뛰어갔다.

 

그냥 간단하게 햄이나 소세지 정도로 밥을 먹일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오뎅과 곤약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 속에서 오뎅탕에 따뜻한 정종 한 잔이 떠올랐다.

얼른 장을 봐서 집으로 달려왔다.

 

급하게 오뎅탕을 한 냄비 끓이면서,

아이들부터 먼저 밥을 먹였다.

나도 밥은 후다닥 먼저 해치우고,

정종을 한 주전자 데웠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정종 한 잔을 마시고,

따끈한 오뎅탕 국물을 한 모금 마시니,

뭔가 소원성취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열심히 밥 그릇을 비웠고,

나는 느긋하게 주전자를 비웠다.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면서 나도 기분좋게 잠이 들었다.

 

요즘 여러가지 일들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잠들기는 또 오랫만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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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2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춥다, 춥다를 내뱉고 있었거든요. 출근길도 그랬지만 사무실도 그랬어요. 그런데 따뜻한 정종이라니, 오늘 퇴근길에 당장 마셔줘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어제 새벽 내내 가위 눌리느라 잠을 못잤는데, 정종 한 잔이면 잠을 푹 잘 수 있을것 같아요. 아, 따뜻한 정종이 꽤 필요해지네요. 지금은 점심시간인데..

감은빛 2012-10-24 14:06   좋아요 0 | URL
혹시 어제 저녁에 드셨을까요?
다락방님과 함께 정종잔을 부딪히는 영광을 누리고 싶네요! ^^

야클 2012-10-2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뎅국물'에는 '어묵국물'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어요. 아무리 일본말이라고 남들이 뭐라 해도요.

감은빛 2012-10-24 14:07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최근에 알게된 일인데,
이 '오뎅'은 단순히 '어묵'을 뜻하는 일본어가 아니래요.
실제로는 어묵과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간 음식 이름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