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걸음
인도 영화 <까비 쿠쉬 까비 감(Kabhi Khushi Kabhie Gham)>을 보면 아기가 첫 걸음 뗀 순간을 기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도 우리 아기가 자라면서 말을 하고, 장난을 치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그런데 가만 첫째 녀석이 첫 걸음을 뗀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였던가. 개월 수(월령)에 비해 무척 늦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둘째 녀석은 둘째라는 이유만으로 늘 언니와 비교당하기 마련이다. 아내는 둘째가 무슨 말이나 행동만하면 ‘첫째 때도 저랬어요?’ 라는 질문을 매번 던진다. 둘째는 첫째에 비해서 말은 늦고, 행동은 빠르다. 첫째는 좀 겁이 많은 편이었는데, 둘째는 비교적 겁이 없다. 행동은 무척 빠르고, 힘도 엄청 쎄다! 가끔 뭔가를 안 뺏기려고 힘을 쓸 때 보면 제 엄마도 못 당해낸다.
아내 말로는 어린이집에서는 혼자 서너 발짝 이상씩 걷기도 했다는데, 우리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손을 잡고 걷다가, 슬쩍 손을 놓고, 혼자 걸어보라고 시킬 때마다, 슬그머니 주저앉아 버리곤 했다. 그러더니 어제 처음으로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서너 발짝 이상을 걸었다. 그 순간 영화 속의 장면이 떠올랐다. 첫째의 첫 걸음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은 언제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을까?
어제는 퇴근길에 땀을 좀 많이 흘렸다. 아기를 안고, 큰 애 손을 붙잡고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셔츠는 물론 속옷까지 몽땅 땀에 젖어버렸다. 집에 들어서니 완전히 찜통이었다. 저녁 준비보다는 샤워가 더 급했다. 옷을 벗어젖히고, 아이들을 홀딱 벗겨서 씻기면서, 나도 함께 씻었다. 씻고 나와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물론 잠시 후에 저녁 준비를 시작하면서 다시 땀을 흘리기 시작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 큰 녀석에게 작은 녀석을 맡겨 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뭔가 장난감이나 인형을 두고 둘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큰애는 나에게 큰 소리로 동생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고, 작은 녀석은 열심히 기어와서 내 발을 붙잡고 일어서서 ‘아나, 아나’ 소리를 낸다. 안아 달라는 뜻인가 보다. 물 묻은 손을 보여주면서, 좀 있다가 안아 줄 테니, 언니랑 놀고 있으라고 해도, 자꾸만 내 발 주위를 돌면서 떨어지지 않는다. 대충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한번 시험을 해봤다. 작은 녀석이 요즘은 혼자 서 있는 것 정도는 잘 하니까. 조금 거리를 두고 세워놓고, 이쪽으로 오라고 불러봤다. 녀석은 웃으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떼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 째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는 걸 붙잡았다. 다시 시켜봤다. 이번에는 여섯 걸음까지 걷고 내 품에 안겼다. 큰 애와 내가 잘 했다고 칭찬을 하고, 박수를 쳐줬더니 아주 좋다고 입이 귀에 걸렸다.
밤늦게 돌아온 아내에게 이 얘길 들려줬더니, 놀라면서 자기만 못 봤다는 사실 때문에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늦게 돌아와서 못 본 걸 어쩌겠나. 그렇다고 자는 애를 깨워서 보여줄 수도 없는데.
다시 읽는 책, 새로 읽는 책
2차 희망버스가 대규모로 부산을 다녀왔다. 그날 함께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그 새벽에 일어난 경찰의 폭력은 똑똑히 기억해두고 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김진숙 선배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소금꽃나무> 한정판을 냈다. 가격을 확 낮췄다. 한정판의 판매수익은 전액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사실 예전에는 끝까지 안 읽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얼마전 출판평론가 최성일씨가 별세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있어서 곧바로 부고 소식이 날아왔다. 작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5권의 책으로 엮어낸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이 합본호가 되어 1권짜리로 묶여 나온 직후였다.
그분을 기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책장을 넘겨본다. 작년에 나온 5권을 조금 뒤적이다가 말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긴 호흡으로 한번 읽어봐야겠다.
'초록당 사람들'에서 열린 출간기념파티에 가고 싶었으나, 급한 일정이 생겨서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밤늦게 뒷풀이 자리에가서 책을 구입하고 서명도 받았다. 12시를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여러사람들이 '생태 철학'과 '녹색정치'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 저자의 강연도 듣지 못했고, 아직 책장을 펼쳐보지도 않아서, 어떤 책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일단 읽어보자.
호랑이는 왜 호랑이일까? 어디서 온 말일까?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을까? 언젠가 큰 애가 다섯살쯤이었던가. 무슨 말을 하던 '왜?'를 반복적으로 묻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니, 그 시절 아이의 말투가 자꾸 생각난다. '아빠, 이건 뭐야?'(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묻는다!) '어, 호랑이네.'(알면서 왜 묻느냐는 말투로 귀찮은듯 대답한다!) '왜?' '뭐가 왜?' '왜 호랑이냐구?' '호랑이니까 호랑이지.' '왜?' '또 뭐가 왜?' '아니 왜? 호랑이야?' 이쯤되면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지게 마련. 녀석이 포기할 때까지 나도 따라서 '왜?'를 반복하는 장난을 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뭔가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