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달프


오늘 오랜만에 만난 동네 활동가 한 분이 나를 보고 "이젠 거의 간달프가 되셨군요." 그제서야 오늘 머리를 감고나서 채 다 말리기 전에 집에서 나온 통에 머리를 묶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묶고 다니면 그래도 흰 머리가 덜 눈에 띄는데, 머리를 풀고 다니면 흰머리가 눈에 확 들어오지. 게다가 흰 수염까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간달프는 좀 심한거 아닌가? 가끔 차라리 간달프처럼 완전히 흰 머리만 남는 것이 더 멋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흰 머리만 남은 것은 아닌데. 당연히 그가 나쁜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뭔가 좀 기분이 나쁘다.이제 정말 늙긴 늙었구나. 간달프라고 불리다니. 아, 오히려 간달프라는 훌륭한 인물(비록 창작물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에 비유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


간달프처럼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초능력이나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약속에 많이 늦었을 때 순간 이동 능력을 바라고, 순간적으로 어떤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을 때, 짧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바라고, 시민들이 잘 이용하던 공적 공간을 시민들의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철거해버리는 미친 시장과 철거 업체 용역들을 만나면 어떤 마법의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몰아내 버리고 싶다. 그런 상상 만으로 아주 짧은 순간 만이라도 조금은 스트레스를 내려놓을 수 있다. 현실에는 초능력이나 마법은 없다. 물론 존재하는데 내가 모를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겠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관계와 단절


최근에 단체 대화방에서 이런 저런 갈등들이 많이 벌어진다. 나는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 온라인 상의 대화가 가진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어지간하면 그렇게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다툼이나 갈등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나도 모르게 몇차례 연루된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너무 선을 넘어서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이런 대화는 피곤하다. 상대는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하더라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받아들이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근거없는 비난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어떤 사람이 계속 교묘하게 나를 공격하거나, 비난 하려고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당하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맞섰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예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거의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해서 하고,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었다. 그가 나를 공격하건 비난하건 뭐 별로 상관은 없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떠들어대는 말 따위에 흔들리지는 않으니. 그렇지만 기분은 나빴다. 이제 그런 사람하고 더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일들로 이미 너무 피곤하고 힘든데 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더 해야 하는가. 일 때문에 마주치는 일까지 다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그와 엮이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인간 관계는 늘 어렵다. 그 어려움을 다 안고 가고 싶지는 않다. 단절이 필요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오늘 북플에서 지난 오늘 내가 쓴 글을 보니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이란 책을 읽고 쓴 서평이 있었다. 그래, 이 책 꽤나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났다. 토머스 페인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 등에서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며, [상식]이라는 책을 써서 글을 읽을 수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미국 초기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내가 살면서 가장 공감하며 읽었던 책이며, 누군가에게 책을 권할때마다 늘 포함하는 책인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을 낼 때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토스 페인의 저 책에서 따와서 [21세기의 상식을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내기를 원했다고 한다. 경제성장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제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자는 것이 상식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요즘 이 나라 꼬라지가 정말 상식이 없는 세상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전세계가 다 보는 앞에서 비상 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법원과 검찰이 합작해서 풀어주더니, 이제는 헌제가 탄핵 인용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있다. 이러다 기각을 시킬 작정인가? 나는 그래도 이번주 금요일, 그러니까 오늘은 꼭 판결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대로는 다음 주에 한덕수 탄핵 여부를 먼저 다루고 이재명 재판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이후에 판단을 하겠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짓인가? 그 인간들은 상식이란 것도 없나? 아니 온 국민들이 아니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 미친 자식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다 아는데, 헌법 재판소의 판사라는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고? 왜?


아! 제발 이런 나라에서 저렇게 상식도 없는 인간들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다. 그런 더러운 꼴을 보느니 그냥 확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든다. 이번 주 내내 하루도 못 쉬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내일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외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지금 꼬라지가 이렇게 돌아간다면...... 내일 나도 꼭 거리로 나가고 싶었다. 그거라도 해야 그래도 조금은 화가 풀리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탄핵 선고가 내려지고, 내란 수괴로 구속해서 평생 사회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해야 조금은 화가 풀리겠지. 암튼 나는 내일 중요한 총회가 있어서 거리에 나가지 못한다. 총회 참석 확인을 위해 연락을 돌리다가 다들 지금 나라가 이 꼴인데 총회가 중요한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조합은 내일 총회를 치뤄야 한다. 이 총회를 치루지 못하면 엄청 일이 틀어질 것이고, 그럼 또 엄청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다들 거리로 나가고 총회에 오지 않으면 상당히 큰 문제가 생긴다. 모르겠다. 나도 이 조합에서 임원을 맡고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사실 거리에 나갔을 것이다. 


점점 현실 감각이 없어지고 있다. 21세기에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비상 계엄에 이어 탄핵 기가까지 벌어진다고? 내란 수괴라는 범죄자를 석방시킨다고? 뭐 이런 미친 나라가 다 있나?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시기를 나는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이 나라라면 나는 이 나라 국민이기를 거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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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22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루만이 아닌 간달프였음에 감사해야죠. 인물도 좋고 게다가 악이 아닌 선이니....이게 긍정의 힘이죠. ㅎㅎ 그 긍정의 힘으로 탄핵을 기다립니다.

감은빛 2025-03-24 17:06   좋아요 0 | URL
네, 잉크냄새님 말씀처럼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물은 아닐테고, 그저 흰머리와 흰수염이 눈에 잘 띄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긍정의 힘으로 탄핵을 기다려야 하는데, 왜 자꾸 조바심이 나고, 왜 부정적인 생각들이 더 자주 드는 것인지. 에휴! 정말 힘드네요.

잉크냄새 2025-03-24 19:49   좋아요 1 | URL
네, 사실 저도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맘이 불안합니다. 다만 아직 우리가 그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다고 믿기에 기다립니다.

감은빛 2025-03-28 23:21   좋아요 0 | URL
설마 이번 주를 넘길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기다림이 길어지네요. 주말에는 좀 쉬어야 하는데, 주말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어요. 힘드네요.

2025-03-23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직 마라톤

작년에 여성 연예인들의 철인삼종경기 참가 과정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 무쇠소녀단을 열심히 봤었다. 그때 마침 나도 막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들의 도전이 내게도 꽤나 자극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 자전거도 못타고, 수영도 못하는 내 입장에서 자전거를 못타는 유이와 수영을 못하는 진서연의 도전이 또 엄청난 자극이 되기도 했다. 짧은 기간 연예인이라는 바쁜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결국 전원 철인삼종경기 완주라는 엄청난 결말을 보여줬다.

이 프로그램을 볼 때 꽤나 재미있게 지켜본 것이 잠실 롯데타워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었다. 비교적 초반에 나왔었는데, 실제로 열리는 대회를 보고 만든 내용이라고 했다. 와! 이거 실제로 참여해보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요즘은 무릎이 아픈 날이 자주 있어서 예전만큼 계단을 오르지 못하지만, 몇 해전까지 계단 오르기를 운동 삼아 열심히 했었다. 내가 계단 오르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평택의 농사짓는 마을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환경단체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옆마을에 친하게 지내면서 잘 챙겨주시던 형님이 계셨다. 당시 나는 20대 후반, 이 형님은 40대 초반. 큰 딸이 그해에 대학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사실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의 나이차 라는 생각이 들수 있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친했던 활동가 형들이 대체로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까지 있었기 때문에 나이 차이에 대한 감각이 좀 없었다. 암튼 그시절 그 형님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것저것 많이 받으며 살았다. 당시 형님은 어떤 이유로 내가 참 마음에 드셨던 것인지, 자신의 큰 딸과 사귀어보라는 권유도 하셨다. 사위로 삼고 싶으시다고. 한창 새내기로 청춘의 봄날을 만끽하고 있을 그 큰 딸이 나같은 사람에게 눈길을 줄 이유도 없지만, 나도 당시에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암튼 그렇게 친했던 형님이 나에게 자주 추천한 운동이 계단 오르기였다.

결혼을 하고 서울에 자리를 잡으면서 늘 달동네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 살았고, 전철 역까지 꽤 거리가 있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일단 출퇴근 만으로도 충분히 하체 운동이 될만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 생활 거의 대부분 등산하듯 오르막을 올라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 형님의 충고를 받아서 나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거의 타지않고 늘 계단을 올랐다. 주로 이용하는 노선이 6호선이나 5호선이었는데, 알다시피 4호선 이후 뒤쪽 호선들은 승강장이 매우 깊은 곳에 있었고 긴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 계단을 실제로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은 나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한동안 계단 오르기를 즐기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나서 동시에 전철에서 내리면 맨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거기서도 걸어 올라가는 사람과 나 혼자 대결을 벌이곤 했다. 어느 젊은 남성이 가장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걸어오르기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비슷한 속도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해서 마지막에 누가 먼저 끝까지 올라가나 하는 대결을 혼자 머리 속으로 벌였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 계단을 오르다보니 나중에는 조금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도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절대 지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한때 일터가 9층에 있었던 기간이 있었다. 아마 4년 정도었던가. 그때 나는 매일 집에서 일터까지 약 30분을 걸어가서 마지막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서 출근했다. 9층은 생각보다 힘들기는 했다. 초기에는 한 6층 정도에서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고, 늘 8층에서 숨이 차서 헉헉 대며 마지막 한 개층을 오르곤 했다. 이걸 몇 년 꾸준히 해서 나중에는 7층까지는 덜 지치고 오를 수 있게 되기는 했었다. 이때 매일 계단을 오르면서 20대 대학생 시절에 아파트 단지에서 쌀배달을 했던 시절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서재에도 두어번 쓴 적이 있는 엘리베이터 점검하는 동에 계단으로 쌀을 배달했던 날을 떠올리며 계단을 오르곤 했다.

계단 오르기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작년에 보문사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길의 긴 계단을 오른 일이었다. 보문사는 강화도 서쪽 작은 섬인 석모도에 있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석모도로 들어갔었는데, 언젠가 다리가 놓였다. 친한 지인이 주말에 심심한데 강화도나 갈까요 해서 그냥 따라나섰던 건데, 그가 보문사로 향했다. 이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마애불을 만나러 오르는 길이 소원을 비는 소원계단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계단이 총 419개 있다는 정보도 봤다. 가을이었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천천히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전철역 계단이나 예전 9층 사무실 계단을 올랐던 리듬으로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이게 무척 즐거웠다. 한동안 전철을 탈 일이 자주 없었고, 고층으로 계단을 오를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자주 무릎이 아파서 어쩌다 계단을 마주해도 오르지 못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계단을 빠르게 오르는 것이 무척 좋았다. 같이 오르던 지인은 처음에는 따라오는 듯 숨소리가 들렀지만, 중간쯤 올라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내려다보니 어디쯤 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중간쯤 올랐을 때부터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정말 멋졌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지만,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잠시 숨을 좀 고르고 다시 출발했다. 대략 3분의 2정도 오른 시점에서 나도 많이 지쳤다. 긴팔 상의는 땀에 흠뻑 젖었고, 속옷도 다 젖었다. 다리가 무거워졌지만,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헉헉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고 다리는 질질 끌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끝까지 올라왔을 때의 나는 허리가 완전히 꺽인 채로 거의 기어오르는 것처럼 자세가 무너진 채로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무나도 갈증이 났는데 마실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오른 사람들은 다들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시원한 물을 판다면 아무리 비싸도 사 마실거라고 함께 쉬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중간에 있는 벤치에서 쉬기도 하고 천천히 올라온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지만, 나는 일부러 운동하려고 빠른 속도로 올라왔기 때문에 갈증이 더 심했다. 하지만 뭐 방법이 없었다. 함께 온 지인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간 후에 절 아래에서 물이나 음료수가를 사거나 구할 수 밖에. 한참을 기다려도 이 친구는 올라오지 않았다. 중간에 뭔 일이 생겼나 걱정이 들 정도로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저 아래에 그 친구가 보였고, 이미 지친 그는 거기서부터 나에게 오기까지 다시 한참이 더 걸렸다.

자, 이제 다시 원래 하던 수직 마라톤, 잠실 롯데타워 계단 오르기 대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작년에 이 대회의 존재를 알고 나서 내년에 참여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무릎이 걱정이었다. 거리를 달리는 대회는 무릎이 조금 안 좋아도 진통제 먹고 달리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계단은 무릎이 조금만 상태가 나빠도 오르기 어렵다. 대회 당일 무릎이 아플지 괜찮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이걸 신청하기가 망설여질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신청하는 일 자체가 또 쉽지 않다. 요즘은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엄청 많고, 각종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서 매번 대회 서버가 열리는 시간 5분전에 알람을 맞춰두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정시에 들어가도 단번에 신청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3월 말에 열리는 불광천 대회는 그렇게 유명한 대회도 아닌데, 서버가 열리는 시간에 동시에 접속자가 몰려서 잠시 오류 메시지가 뜨기도 했었고 나는 간신히 신청 성공했지만, 달리기 모임 구성원들 중 다수는 결국 신청을 못했다고 전했다. 버튼을 누르고 정보를 입력하고 나니 이미 마감되었다고.

저 수직마라톤은 신청 서버가 열리고 채 5분도 되지않아 마감되었다는 글을 봤었다.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유명하지않은 대회들도 금방 마감이 되는데, 이건 독특하기도 하고, 한번쯤 도전하고픈 대회라 사람이 몰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 수직마라톤 올해 대회 신청 일이 어제였다. 나는 어차피 신청하려고 시도해도 성공률이 높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무릎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망설이다가 그냥 포기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냥 그렇게 포기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대회인데, 신청이라도 해볼걸. 안 되더라도 시도라도 해볼걸. 높이 555미터, 총 123층, 2,917개의 계단을 오르는 이 대회 내년에는 꼭 도전해보리라. 올해 달리기를 꾸준히 하면서 무릎 컨디션에 따라 계단 오르기도 꾸준히 훈련해야겠다.

원래는 아산에서 열린 여자농구 챔피언 결정전 1, 2차전 결과 이야기도 하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에 써야겠다. 마지막으로 온라인으로 예매나 신청하는 각종 대회나 경기 등에 대해 짧게 얘기해보자. 사실 해마다 두 번 있는 명절을 앞두고는 부산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하는 것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에는 열차표를 구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매번 버스를 탔고 대개는 10시간 남짓, 좀 심한 경우엔 12시간에서 15시간, 그리고 가장 오래 걸렸던 폭설이 왔던 설날의 경우에는 17시간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나면서 나는 앞으로 절대 버스는 안 타기로 마음 먹었고, 그즈음부터 코레일 앱을 통해 예매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명절 예매는 미리 예고한 특정한 날 오전 6시에 열리고, 몇 분이 지나지않아 모든 표가 사라진다. 허탈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정시에 접속해도 대기번호 숫자 혹은 오류 메세지 등만 보다가 표를 구하지 못하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은 이후로는 이제 그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 시간에 표를 구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나중에 막상 명절이 코앞에 다가오면 무더기로 나오는 취소표를 노리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것도 혼자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하기도 하는데, 아이들과 함께는 또 난이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작년에 야구장에 총 6번 갔다. 고척돔 1번, 잠실 2번, 문학 2번, 사직 1번. 나는 롯데 팬이라 서울과 인천의 3개 구장은 모두 원정팀이고 부산 사직구장이 홈이다. 원정 5번은 모두 롯데가 졌고, 홈에서 본 날만 유일하게 그리고 아주 감동적으로 승리했다. 이 이야기도 작년에 쓴 적이 있는데, 어렸을 때와 청소년기에 야구장을 자주 갔었다. 당시 사직구장은 7회가 되면 문을 열어줬기 때문에 돈이 없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야구장 근처에서 소리만 듣다가 7회에 들어가서 보곤 했다. 마지막으로 야구장에 갔던 건 아마도 대학생이었던 95년이었다. 그리고 거의 30년만에 작년에 야구장을 다시 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과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속에 품고 야구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왔던 것이다. 작년에 비로소 여유가 생겨 처음엔 중계 방송을 챙겨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야구장에 가보고 싶어져서 롯데의 원정경기 일정을 찾아서 예매를 했던 것이다. 프로야구는 구장에 따라 예매하는 앱이 각각 다르고, 구장의 크기와 좌석 상황도 그리고 가격도 저마다 다르다. 미리 예고된 예매 시작 시간에 들어가면 괜찮은 자리 표가 있을줄 알았던 나는 물정을 몰랐다. 각 구단마다 시즌권이라고 부르는 선예매가 가능한 등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즉, 일반 예매가 시작되기 전에 시즌권 구매자들이 먼저 좋은 자리를 모두 선점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작년의 나는 여기까지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 위에 다시 프리미엄 등급 같은, 구단마다 이름도 다르고 혜택도 다르겠지만, 돈을 더 주고 사야하는 등급이 있었고 이들이 선선예매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본 뉴스에서는 선선선예매가 가능한 제도를 만든 구단들이 있다고 한다. 참, 영화 [1승]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며칠 전에 곧 있을 프로야구 개막전 암표가 엄청 기승이라는 소식을 봤다. 한 2만원 정도 하는 썩 좋지 않은 자리의 표를 10만원 가까이 팔아도 없어서 못구한다고. 게다가 좋은 자리는 20만원이 훌쩍 넘어간다고 했다. 아,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작년 연말인가 암튼 최근에 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공연을 처음으로 보러 갔었다. 꼭 보고 싶은 마음에 암표를 거의 3배 가량 주고 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암표를 사면 안 된다고, 우리가, 누군가가 결국 사니까 그들이 그렇게 비열한 짓을 계속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마라톤 대회도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아서 찾아본 적은 없지만, 여기도 찾아보면 뭔가 잔뜩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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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21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강이 안좋아서 한때 계단 오르기를 한 적이 있어요.아무래도 살고 있는 건물에서 하면 다른 분들께 폐가되니 집 근처 육교를 이용했는데 오르락 내리락 한 시긴정도씩 몇달을 한 기억이 납니다.고층 건물의 계단 오르기 보다는 아무래도 쉽긴한데 이것도 매일 하니 무릎등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 안했는데 육교마자 철거되어 이젠 할 수 없네요ㅡ.ㅡ

감은빛 2025-03-21 21:23   좋아요 0 | URL
오호! 육교를 오르내리는 방법도 있군요.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언젠가 뉴스에서 계단 오르기를 위해 계단만 있는 건물이 있다고 본 적이 있어요.
아파트 단지 거주자들을 위한 건물이라고 하더라구요.

카스피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카스피 2025-03-22 13:57   좋아요 0 | URL
주변에 육교가 있으면 가능하긴 한데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은 좀 힘들죠.제가 사는 곳은 외진곳이라 저녁이면 육교 사용자가 없어 가능했어요.그리고 아무래도 육교다보니 고층 빌딩 계단오르기보다는 운동효과가 좀 없던것 같습니다.
감은빛님도 건강하게 주말 보내셔요^^
 

지난번에 내가 광택이란 가수의 곡 공심 空心 이란 곡을 펑티모와 완쯔요 라는 두 명이 부른 버전으로 자주 듣고 있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그 글에 서재 이웃 잉크냄새 님께서 댓글로 여러 중국 노래들을 추천해주셨다. 하나씩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곡을 찾아들었다. 과연 한 곡도 뺄 것 없이 다 좋은 곡이었고, 딱 내 취향이었다. 아니, 잉크냄새 님께서는 어떻게 내 취향을 이렇게 잘 아시고 추천한 걸까 하고 생각했다가, 그게 아니라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추천하신 건데 내게도 와닿은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했다. 자, 한 곡씩 노래를 알아보자.

成都

잉크냄새 님이 소개해주신 노래 중에 제일 처음 곡은 자오레이 赵雷 의 청두 成都 였다. 청두는 중국 서쪽 쓰촨성의 도시 이름이다. 노래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자오레이 라는 가수의 저음이 무척 잘 어울리고 좋았다. 노래 가사를 찾아보기 전에 그냥 들었을 때부터 청두 라는 도시를 그리워하는 느낌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사를 찾아보니 딱 그랬다. 처음엔 병음이 나오는 버전으로 듣다가, 당연히 내 실력으로는 뜻을 알 수 없어서 이미 올려진 번역 영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신기하게 예전에 중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 자주 보았던 김성민 중국어 라는 채널에 이 노래 가사를 알려주는 영상이 있었다. 반가웠다. 이 김성민이란 아저씨, 선생님이나 강사님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이 분의 강의 영상이 재미있어서 계속 돌려보다가 나 혼자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서, 약간 옆집 아저씨 느낌으로 불러보고 싶어서, 굳이 아저씨 라는 표현을 써본다. 자, 내글은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가 다시 원래 내용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잠시 청두 노래 얘기는 옆으로 살짝 옮겨두고 이 재미있는 아저씨의 중국어 강의 얘기를 해보자.

우리가 중국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두 가지는 성조라고 부르는 말의 높낮이 차이와 한자 라고 생각한다. 한자는 음, 워낙 많은 글자를 알아야 하는데, 복잡한 글자들도 많고 헷갈리는 글자들도 많다. 나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한자 수업을 받은 세대인데도 글자를 많이 알지 못한다. 열심히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중국어를 배울 때 이걸 좀 후회했다. 사실 당시에는 신문에도 중요한 단어들은 한글이 아니라 한자로 적어놓았었고, 책도 마찬가지였다. 전공서적들은 한글보다는 한자 단어가 훨씬 많았다. 공부를 하려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한자를 잘 모르면 일단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한자를 많이 아는 친한 법학과 선배들에게 책에 있는 한자들에 한글로 음을 적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전공서적은 두껍고 한자가 엄청 많아서 그걸 일일이 음을 적어주는 일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친했던, 그래서 자주 술을 사주곤 했던 선배들은 귀찮은 내색도 없이 음을 달아주곤 했다. 사실 이때라도 한자 공부를 꾸준히 했어야 했는데, 그냥 내가 가진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 해결해버려서 두번째 한자 공부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미 옆길로 잠시 빠졌는데, 여기서 한번만 더 빠지면, 당시 가장 친했던 법대 선배가 있었다. 학교 앞 언덕을 오르면 그 언덕 중턱에 그 선배의 자취방이 있었다. 쌍둥이였고 둘이 같이 우리학교를 다녔다. 나는 둘 중 형이랑 친해졌고, 동생인 분과는 끝내 친해지지 못했다. 그 선배는 자주 술을 사주셨고, 술을 마시다가 늦어져 막차가 끊기면 본인 자취방에 재워주셨고, 아침이 되면 학교 식당에서 밥도 사주셨다. 심지어 매점에서 담배를 사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나와 나이 차이도 제법 나고, 복학생에 고학년이라 사법고시 공부하느라 엄청 바쁘셨을텐데, 내 공부를 자주 도와주셨다.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궁금해진다. 술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담배도 사주고, 재워주고.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주구장창 그랬으니. 뭐 가족이나 연인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나중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한자 이야기를 했으니 성조 이야기를 해야지. 이제서야 곁가지로 빠진 저 김성민 아저씨 이야기가 나온다. 아, 잠시만 한번만 더 곁가지로 빠졌다가 돌아오자. 중국어를 처음 배웠던 것은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베이징 출신 유학생 덕분이었다. 나는 중국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 유학생의 생활비 때문에 사람들을 모아 중국어 강의를 만들자는 어느 선배의 강권에 의해 참여하게 되었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다들 바쁘다고 다 그만둔 후에도 나만 마지막까지 남아 수업을 들었다. 막상 배워보니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중국어 대해 얘기할 때 내가 부산 사람이라서 성조가 조금은 익숙하고 재미 있어서 중국어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김성민 아저씨가 아마도 부산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을 하는 영상을 보면 처음에 그 얘기를 한다. 부산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다고. 이 분은 본인이 중국어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중국에 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중국어를 잘 익혔는지 이야기 하면서 절대 공부하지 말라고 한다. 이건 그냥 언어를 익히는 것이고 그건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영어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긴 시간 영어를 배웠지만, 정작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영어를 익힐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이 아저씨의 강의 영상을 많이 봤는데, 이 분이 늘 하는 말, 가장 자주 하는 말은 필기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보라는 말이다. 실제로 이 분의 학원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면, 과연 나는 중국어를 잘하게 되었을까? 현실의 나는 영상으로 한동안 강의를 봤지만, 딱 그때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그러다 몇 년 후에 생각나면 또 잠시 들여다보고, 또 한 몇 달을 흘려보내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중국어를 완전히 잊지 않는 것은 노래와 영화 덕분이다. 자주 듣는 노래들. 좋아하는 영화들 때문에 잊고 있다가도 다시 중국어를 다시 익혀야지 생각하는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청두 노래로 돌아와서 김성민 아저씨가 알려주는 가사의 내용은 짐작했던 대로 청두라는 도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이 아저씨가 부산 사투리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면서 부산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서울말로는 혹은 다른 어느 지역 사투리로는 이 느낌을 살리기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네이티브로서 부산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김성민 아저씨 말로는 이 노래가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관광객들이 이 도시에 올 때마다 택시를 타고 노래 가사에 나오는 위린루 玉林路 라는 곳으로 가자고 한단다. 근데 이 위린루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로, 북로 등 많이 있어서 택시 기사님들이 곤란해 한다고. 그리고 위린루 중에 유명해진 카페 거리가 있는데, 거기 가면 샤오지우관 小酒馆 이 잔뜩 있는데, 다들 가게 이름이 따로 없고 간판이 그냥 小酒馆 이라고. 관광객들이 다들 택시 타고 위린루에 小酒馆 을 가달라고 하는데, 거기 가면 그 가게가 너무 많아서 택시 기사님들이 곤란하시다고. 무슨 얘기인지는 노래 가사를 들어봐야 알 수 있다.

好久不見

잉크냄새 님이 알려주신 두 번째 노래는 천이쉰 陳奕迅 의 하우지우부지엔(오랜만이야) 好久不見 이라는 곡이다. 처음 소개한 청두 랑 분위기가 비슷했다. 피아노 반주 하나에 저음으로 시작하는 곡은 조용하게 슬픈 느낌을 품고 있었다. 뒤로 가면서 현악기 반주가 더해지며 한층 그 슬픔을 더한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약간 절제라고 할까 더 큰 슬픔까지 가지 않고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한다. 나는 이 점이 참 좋았다.

이 곡도 가사를 찾아봤다. 노래의 첫 소절이 ˝네가 사는 도시에 와서 네가 걷던 거리를 걸었어.˝ 였다. 앞의 곡 청두 가 도시를 그리워하는 내용이고, 이 곡은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하는데, 그가 작중 화자와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서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 두 곡 모두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잉크냄새 님께서는 중국에서 이런 곡들을 들으며 고향과 그 고향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봤다.

至少還有你

세번째 노래는 린이롄 林憶蓮 의 쯔샤오하이요우니 至少還有你 였다. 제목을 우리 말로 옮기면 적어도 아직 나에게는 당신이 있기에 라고 할 수 있을까? 가사를 찾아본 영상에서는 그냥 간단히 당신이 있기에 라고 옮겼더라. 일단 린이롄의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첫 소절부터 너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거 분명 아는 노래인데, 나는 린이롄이란 가수는 몰랐다. 그런데 노래는 분명 엄청 자주 들었던 곡이었다. 그랬다. 이 노래는 내가 즐겨듣던 펑티모가 엄청 자주 불렀던 곡이었고, 그가 부른 여러 버전의 영상을 보고 들었던 내 입장에서는 엄청 익숙한 곡이었을 수 밖에. 펑티모의 음색에 익숙한 나에게 이 원곡은 느낌이 좀 달랐다. 펑티모는 뭐랄까 좀 더 신나게?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발랄하게? 아니 그것도 아닌데, 딱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지만 좀 더 활달한 느낌으로 불렀다면, 원곡은 훨씬 차분하고 아련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원곡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펑티모가 곡 해석을 잘 못했거나, 본인이 나름 다른 느낌으로 해석해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혹시 다른 가수가 부른 버전이 없나 찾아보는데, 와!세상에. 장국영이 부른 영상이 있었다. 장국영의 목소리로 듣는 이 곡은 또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장국영의 음색은 훨씬 더 깊으면서도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노래 가사가 훨씬 더 와닿는 음색이라고 해야할까. 특히 후렴구로 들어가는 부분, 온 세상을 포기하더라도 당신이 있기에 내 사랑은 가치가 있다는 부분이 원곡인 린이롄이 부른 것과 펑티모가 부른 것보다 훨씬 공감이 되었다.

계속 펑티모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으면서도 가사를 찾아볼 생각을 못했는데, 가사는 그냥 들었던 느낌과는 완전 달랐다. 앞서도 말했듯 펑티모의 노래는 뒤로 갈수록 조금 빠르고 그래서 이런 가사일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가사 중에 당신의 머리카락에 백설이, 그러니까 흰눈이 내린 흔적이 있다는 부분을 들으며 거울을 보았다. 흰 머리가 가득한 내 모습이 딱 가사 속의 인물이었다.

练习

다음 노래는 류더화 刘德华 의 연습 练习 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잘 생기고 유명한 배우 유덕화의 노래였다. 와! 유덕화라는 배우의 영화를 엄청 많이 봤을텐데, 노래는 처음 들었더니 음색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저 앞에 장국영이 부른 노래를 언급했는데, 비교하면 장국영은 감정을 잘 담아 나쁘지 않게 노래를 부르는 배우라는 느낌이었고 유덕화는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였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 곡씩 밖에 안 들어봤으니 제대로 된 비교가 될 수는 없겠지. 장국영이 부른 다른 노래들도 많을테니 나중에 천천히 들어봐야겠다.

이 노래는 일단 가사를 찾아보기가 조금 번거로웠다. 우리말 가사 뜻을 찾으려고 제목인 练习 에 번역이라고 검색했더니 말그대로 번역 연습에 대한 영상들만 잔뜩 나왔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영상들 중에 한자와 병음이 함께 나오는 걸 찾아 보았다. 나중에 제목에 가사 라고 검색해보니 우리말 해석이 담긴 영상이 하나 나왔다. 여러 노래들을 찾다보니 중국어 학원에서 운영하는 채널들 중에 노래 가사 해석 영상이 많았다. 이 노래까지 잉크냄새 님께서 추천한 노래들을 찾다보니 대체로 분위기가 비슷했다. 공통된 느낌은 역시 그리움이라고 느꼈다.

后来

다음 노래는 류뤄잉 劉若英 의 호우라이 后来 였다. 어, 이 곡도 뮤직비디오를 틀자마자 분명 들었던 노래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 곡은 특정한 누군가의 영상을 많이 보고 들었다기 보다는 워낙 유명한 곡이라 나도 들어본 곡이었던 것 같다. 가수 류뤄잉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매력적이었다. 가창력이라는 단어로 생각해보면 독보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라고 느꼈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한글 자막이 있어서 따로 가사 해석을 찾아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해석이 다를 수 있으니 찾아보았다. 확실히 내가 알 정도로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노래가 맞았다. 지금까지 찾아본 다른 어떤 노래보다 우리말 해석 영상이 많았다. 이건 이번에 잉크냄새 님의 추천곡만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궁금해서 찾아보는 다른 중국노래들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영상들을 찾아보다가 어떤 공연 영상을 보았다. 류뤄잉이 마이크에 산, 얼, 이 라고 숫자를 세면 관객들이 호우라이 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방식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노래 간주 부분에서 지금 이 공연이 2년 동안 53번의 공연이라며, 더불어 마지막 공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류뤄잉은 다시 노래를 이어부르다가 갑자기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끊겼는데, 맨 처음 노래를 관객들이 소위 말하는 떼창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끊어진 노래를 관객들이 떼창으로 이어불렀다. 멋진 장면이었다. 만약 저 공연장에 있었다면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생각해봤다.

이 노래는 처음에 일본 노래였다고 한다. 그걸 중국어로 번안한 곡이 지금 이 노래라고 했다. 그래서 원곡인 일본 노래도 찾아봤다. 키로로 キロロ 라는 오키나와 출신 여성 듀오가 부른 미라이에 未来へ 라는 노래가 원곡이었다. 들어보니 둘은 곡의 분위기도 달랐고, 가사의 내용도 완전히 달랐다. 원곡은 밝고 맑은 음색으로 미래의 희망 같은 것을 노래하는데 반해, 호우라이 는 후회와 아쉬움이 묻어나는 음색으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호우라이 라는 곡 제목이자 노래의 첫 단어가 원곡의 첫 단어 호라 ほら 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어 호라 는 ˝자,˝ 이렇게 누군가를 부르거나, 청중들을 주목하도록 말을 떼는 표현이다. 그 뒤로는 내용이 완전히 다른데, 이 첫 소절 첫 단어를 비슷한 소리로 옮긴 재치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중국어 버전을 한국어로 번역해 부른 노래를 찾아 들었는데, 여기서도 후에 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비슷한 소리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이 호우라이 라는 단어가 나중에 혹은 그 이후로 라고 옮길 수 있을 텐데 그걸 우리말 후에 라는 단어로 옮겨서 뜻도 소리도 잘 살린 훌륭한 번역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유튜브에 리스트를 하나 만들었다. 키로로의 원곡과 류뤄잉의 곡과 방금 찾은 한국어 번역 버전까지 담아서 나중에 비교해 듣기 위해서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가수들의 커버곡들을 찾아서 추가할 생각이다. 나는 시간이 나면 좋아하는 노래의 다른 언어 커버곡들을 찾아 리스트를 만들어 듣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많은 언어의 커버곡을 찾았던 것은 데스파시토 였는데 몇 개의 언어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렇게 여러 영상들을 찾아보다가 이번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부르는 영상을 찾았다. 중국어로 메이리야 美依礼芽 라고 하고 일본어로 메리야 メイリア 라는 활동명을 쓰는 일본 가수가 불렀다. 어느 공연 현장이었는데 중국이어서 일본 가수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앞부분을 중국어로 부른 후 일본어로 이어부르길래 누군지 찾아봤다. 본명이 마즈하시 마이라는 가수로 일본에서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한 것 같았다. 암튼 공연 영상에서는 중간에 후렴구로 가면서 갑자기 화면이 바뀌어 어느 건물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이 호우라이 라는 중국어 노래를 떼창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서 메리야가 다시 노래를 중국어와 일본어를 바꿔가며 불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영상 설명에 있는 중국어를 번역기에 넣어봤다. 자세한 설명이 있지는 않았는데, 어느 학교의 여름 졸업식 장면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 수백명이 노래를 부르는 건물은 기숙사인것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국이 아닌 대만의 학교라고 생각했다. 앞서 원곡과 중국판 번안곡인 이 곡의 가사를 보니 일본 원곡은 확실히 졸업식에 어울릴 곡인데, 류뤄잉의 이 곡은 가사 내용으로는 졸업식에 어울릴 노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일본 문화에 친숙하고 반일 정서가 약한 대만의 어느 학교에서 일본 문화의 영향으로 이 곡을 그러니까 원곡을 부르기는 어려우니 자신들이 잘 아는 곡으로 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 본 것이다. 물론 아무 추가 정보 없이 그냥 추측한 것이라 아닐 확률이 더 높겠지만.

마지막으로 이 곡의 가수인 류뤄잉이 아마도 이 곡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 지어야겠다. 호우라이더워먼 后来的我们 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2018년에 개봉했는데 가수인 류뤄잉의 영화감독 데뷔작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제목은 [먼 훗날 우리] 라고 옮겼더라. 찾아보니 넷플릭스에 있었다. 추가 정보를 보니 유명한 배우들이 나왔고, 우리나라 리메이크 버전 영화도 있었다. 조만간 찾아봐야겠다. 근데 이 우리나라 제목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우라이 노래 가사 해석 영상을 볼 때 호우라이 라는 표현은 어떤 특정 시점 이후에 라는 뜻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봤다. 그럼 먼 훗날의 우리가 아니라 예전에 우리가 같이 했던 어느 날 이후 다시 만난 우리라는 뜻이 아닐까? 그게 엄청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먼 훗날이란 단어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먼 훗날이란 단어는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십여년, 수십년 후라는 느낌이 먼저 드는 단어다.

언젠가 한번은 글로 쓰고 싶은 주제가 엉뚱한 한국어 제목을 가진 외국영화들이다. 찾아보면 아주 많겠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영화 기준으로 [청춘 스케치](원제 Reality bites), [욕망의 대지](원제 burning plain) 등이 있다. 이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보고 이 두 영화만큼 좋은 영화라는 느낌이 들면 묶어서 글을 쓰던가 길어지면 따로 쓰던가 해야지. 아, 노래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 라는 주제로도 엮어볼 수 있겠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 라는 노래로 만든 동명의 드라마이고, 음, 음 그 다음은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분명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노래를 바탕으로 내용을 만든 것은 대만 만화가 임정덕의 [영건] 이란 만화에서 처음 접했었다. 그는 각 장의 제목을 유명한 팝송 제목으로 붙여놓았었다. 오래 전 만화이고, 이제는 내용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각 내용이 해당 곡의 가사와 어느 정도 비슷한지, 아니면 곡의 느낌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에도 유명하다고는 해도 나는 모르는 노래가 대부분이어서 검증해 볼 생각은 못했었다. 암튼 이 만화의 영향으로 나중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몇몇 팝송을 각 장의 제목으로 해서 청춘 연애 소설을 쓰려고 시도했었다. 단편 분량은 아니었고, 장편으로 생각하고 써나갔지만 어딘가에서 막혀서 중단했고 나중에 한참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너무 유치해서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어서 그냥 버렸었던 기억이 난다. 피씨도 없던 시절이라 공책에 비뚤빼뚤 손글씨로 쓴 것이라 나중에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쓴 것이니 어렴풋하게 대략의 내용은 떠올릴 수는 있다. 언젠가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시도해서 완성하고 그게 나중에 유명해져서 영화로 제작이 된다면 그때는 이 노래를 바탕으로 만든 영상물이 하나 더 늘어날 수 있겠네. 아, 이제 그만 써야지. 자꾸 길게 쓰다보니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 자, 이제 일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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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5-03-19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 류뤄잉 노래 듣고 유레카를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后来 저도 무척 좋아하는 곡이에요! 영화감독도 하시는 건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죠^^;

감은빛 2025-03-21 19:35   좋아요 0 | URL
와, 거리의 화가님도 그 노래 좋아하시는군요.
류뤄잉 노래 정말 잘하고, 목소리도 정말 좋더라구요.
저 영화 봐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바빠서 짬이 나지 않네요.

잉크냄새 2025-03-19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노래 몇 곡 추천하고 너무 멋진 댓글을 받아버린 기분입니다. 그저 노래만 듣고 노래에 관한 다른 스토리는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노래에 관한 다른 많은 내용들도 알게 되었네요. 장국영의 노래는 장국영 본인의 노래보다는 그가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부른 곡을 몇 곡 접했는데 그 특유의 감수성이 아주 잘 묻어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중국어는 중국인이 볼 때도 경상도 사람들의 발음이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그 특유의 억양이 중국어의 성조와 리듬과 유사한가 봅니다.

감은빛 2025-03-21 19:38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 님, 노래 추천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게다가 어떻게 하나도 안 빼고 다 제 취향이었어요.
요즘 자주 듣고 있어요.
잉크냄새 님 덕분에 중국어를 조금 더 열심히 하게 될 것 같아요.

카스피 2025-03-20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인들이 중국 노래를 접하는 주요 통로는 그간 홍콩영화(중국 영화가 아님)이었지요.특히 80~90년대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영화속에서 들려오던 중국노래들이 우리 귀에 많이 익수해졌습니다.예를 들면 영화 첨밀밀에 등장하는 등려군의 첨밀밀이나 황비홍에 등장하는 성룡의 남아당자강,영웅본색에 등장하는 장국영의 당년정이 가장 대표적이죠.소호강호에 등장하는 허관걸의 챃해일서소가 대표적인죠.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당시 홍콩의 4대천황(유덕화,곽부성,여명,장학우)의 노래를 즐겨듣던 분들도 게시겠지요.하지만 홍콩이 중국의 억압을 받으먄서 홍콩영화의 자율성이 떨저지자 한국에서 홍콩영화의 인기는 떨어졌고 더이상 우리 귀에 익숙한 홍콩노래는 더 이상 들릴지 않게 되었던것 같습니다.게다가 중국에서 인기를 끌던 많은 노래들중 한국 인기곡을 무단 번역해 부른것이 많앙서 더더욱 인기가 없어진것 같네요.

감은빛 2025-03-21 19:51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말씀하신 노래들 중 기억나는 노래도 있고, 모르는 노래도 있네요.
덕분에 재미있었던 홍콩영화들도 기억나네요.
한때 첨밀밀도 여러 가수들이 부른 것들, 커버곡들까지 모아서 듣기도 했었어요.
나중에 챙겨 들어봐야겠네요.
 


근육 경련

어제 올린 글에 썼듯이 글을 올리고 이런저런 준비를 좀 하다가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사실 일요일 오후 무렵부터 SNS에 계속 올라오는 동아 마라톤 소식들 때문에 마음은 얼른 달리러 나가고 싶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수십명이 기록증과 메달 사진을 올리면서 초반 페이스와 중반 몸 상태, 마지막 상황 등을 적어서 공유하곤 했다. 동아 마라톤은 하프 코스는 없었던 건지, 아니면 유독 하프 참가자만 스레드를 안 적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하프 참가자들의 인증글이 나한테만 안 보였던 건지 눈에 띄지 않았다. 뭐, 10킬로 참가자들은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겨우 10킬로 코스 대회 두 번 참가했고 기록도 좋지 않지만, 이젠 평소에도 10킬로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달릴수 있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이나 어떻게 달렸는지 하는 경험은 이제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 워낙 많이 읽기도 했고.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풀코스 참가자들이었다. 와! 풀코스 참가자가 정말 많더라! 그뿐인가 기록들도 다들 엄청나더라. 내가 자주 언급하는 마라톤 경험이 많은 친한 형이 지난 2월 말에 대구 마라톤을 뛰고 왔는데 썩 그리 좋은 기록은 아니었다. 나랑 같이 갔던 작년 9월 철원DMZ 마라톤에서도 제한시간에 걸릴까봐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내 주위에서 가장 잘 달리는 사람인데, 최근에는 이렇게 좋은 기록을 못 내고 있다. 아, 뭐 사실 기록은 운동 경력과 나이도 고려해야 하긴 한다. 다른 사람들의 대회 인증 글을 보면서 늘 제일 부러운 것은 젊음이었다. 물론 그냥 젊다고 다 기록이 좋은 것은 당연히 아니고 젊으면서 운동도 꾸준히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것이겠지만.

암튼 그렇게 일요일 오후에 꽤 많은 인증글을 긴 시간동안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내가 지금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는 지난 주 목요일에 조금 무리한 달리기를 하고 난 후라 일요일까지 회복이 덜 되어 있어서 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책도 읽어야 했고. 그런데 어제 월요일에 책 모임이 연기되었을 때 그럼 이제 달리기 하러 가볼까 하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월요일에 달리고 한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조금 가볍게 달리면서 슬슬 체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암튼 그래서 거점에 두터운 잠바를 벗어놓고 몸을 충분히 풀고 나갔다. 지난 번에 바람막이와 장갑을 두고 나갔다가 후회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잘 챙겨나갔다. 분명히 충분히 몸을 풀었음에도 날이 너무 추워서 그런지 좀 몸이 굳어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서서히 달리면서 몸에 열을 올리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지난번에 무리했기 때문에 이번엔 최대한 가볍게 달릴 생각이었다. 가볍게 달리되 가능하면 거리는 최대한으로. 그런데! 그랬는데! 정말 달리고 싶어서 날이 추웠음에도 일부러 나온 것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달리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갑자기 왼발 종아리 근육이 뭉쳐버렸다. 갑자기 근육이 딱딱하게 굳으며서 아팠다. 아직은 통증을 참고 달릴수는 있었는데 달리는 동작은 부자연스러웠다. 사실 이런 근육 통증은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그때 곧바로 달리기를 중단하고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욕심이 많고 미련한 나는 이왕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멈추고 싶지 않았다. 통증을 참으며 계속 달렸다. 사실 나는 몇 년째 여러 관절 통증을 겪으면서도 참으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달리기 뿐 아니라 다양한 근력운동을 하면서 계속 통증 부위에 무리가 가지는 않도록 잘 달래가며 해온 경험이 있었다. 이게 차라리 발목이나 무릎 관절 통증이라면 훨씬 익숙한 일이라 좀 더 현명한 대처가 가능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렇게 종아리 근육이 뭉치면서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일은 정말 처음이었다. 달리다보면 혹시 저절로 풀리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살짝 다리를 절면서 달리기를 계속 했는데 당연히 거리가 늘어날수록 통증은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아무리 달려도 근육이 풀리기보다는 더 뭉치기만 한다고 결론을 내린 시점이 약 2킬로미터 즈음이었다. 조금만 더 갔다가 돌아가면 5킬로는 채울수 있겠네. 오늘은 아쉽지만 5킬로로 만족하자고 생각하고 조금만 더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이젠 진짜 달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지며 약간 경련 증상이 일어났다. 결국 그 자리에 멈추고 왼발을 벤치 위에 올리고 종아리 마사지를 했다. 일단 햄스트링 스트레칭을 하면서 뒤쪽 근육을 풀면서 늘려주고, 양 손 주먹으로 딱딱하게 뭉친 종아리 근육의 측면을 쾅쾅 때렸다. 마치 돌덩이리인것 처럼 굳어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때려서 근육이 조금은 풀린 느낌이 들었다. 이제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 뛰었다. 여기서도 조금 실수를 했는데,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게 천천히 조심해서 뛰었어야 했는데, 날도 춥고 아프니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냥 평소대로 뛰었더니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다시 통증이 심해지고 근육이 뭉쳤다. 다시 절뚝 절뚝 뛰다가 다리 난간에서 또 스트레칭을 하면서 근육을 풀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든 억지로 1킬로미터를 더 달려서 최종 3킬리미터를 찍었을 때 나는 더는 달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걸었다. 절뚝 절뚝 걸으며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약 1.5킬로 정도 되었으려나? 뛰면 7분 남짓이면 갈 거리를 절뚝이며 천천히 걸어야 했다.

갑자기 이렇게 근육이 뭉치고 경련까지 이어진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답답했고, 이게 과연 얼마나 오래 갈지, 언제 완전히 회복하고 다시 달릴 수 있을지 몰라서 좀 화가 나고 불안했다. 오늘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얼른 회복하고 다시 달리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땀이 났다가 차가운 바람에 식으면서 엄청 추웠다.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는 길이 왜이리 멀게 느껴지는 건지 미칠 것 같았다.

마치 지옥이라도 겪고 온 기분으로 거점에 돌아와 물을 마시고, 앉아서 한참 종아리 마사지를 했는데 별로 소용이 없었다. 몸은 추웠고 배도 고팠다. 얼른 잠바를 껴입고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적당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리집은 경사가 급한 언덕 위에 있어서 눈이 쌓이면 큰일이다. 게다가 지금 내 다리로는 느리기도 하고 제대로 돌발상황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어쩔수없이 식당을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려고 생각은 했으나 내 다리는 생각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느리기만 했다. 아까 출발지점까지 돌아오는 길이 천리 만리라도 된 듯 멀게만 느꼈는데,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랬다. 그나마 지금은 두터운 잠바를 입어서 조금 덜 추워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모든 일은 끝이 있다는 진리가 고맙게 느껴졌다. 마지막 어지간한 등산 코스 보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며 더욱 거세진 눈발을 보았다. 이거 잘못하면 내일 집 밖에 나서기가 두려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다. 배달앱을 켜서 음식을 주문하고 땀을 씻고 근육이 뭉친 종아리를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아주 아주 조금 나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걸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마시지볼과 주먹을 이용해 마사지를 했다.

음식을 받아놓고 통증 부위에 뿌리는 파스를 엄청나게 뿌렸다. 눈이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진동하는 파스 냄새를 참으며 밥을 먹고 나서 잠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졸았다. 잠시 졸았는데 근육 통증 때문에 잠이 깨버렸다. 이번엔 아예 불을 끄고 누워서 자려고 했는데 왼발 종아리에 묵직하게 통증이 느껴지니 잠도 오지 않았다. 자야하는데 자야 조금이라도 더 회복이 될텐데. 이런 생각을 할수록 더 통증이 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고 잠은 더 오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종아리에 쥐가 나서 다시 깼다. 너무 심하게 아팠다. 벽에 발을 대고 간신히 쥐를 잡았다. 다시 이불 속에서 불면의 시간이 흘렀다. 자꾸 발의 통증을 의식하다보니 이제는 허리도 아픈 것 같았다. 결국 진통제를 먹었다. 평소에는 진통제를 먹으면 졸려서 금방 잠들곤 하는데, 오늘은 진통제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별의 별 짓을 다 해보다가 창 밖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는 포기하고 음악을 켜고 폰으로 북플에 들어와 이 글을 두드린다. 뭐, 지금 상황으론 제대로 걸어다니기 어려우니 오늘 일정을 다 취소하고 진통제나 더 먹어야겠다. 진통제를 더 먹고 잠들면 어쩌면 저녁에는 조금 다리를 절더라도 걸을 수는 있겠지.
그럼 어쩌면 저녁 일정은 소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좀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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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8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5-03-19 12:07   좋아요 0 | URL
마음 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북플에서는 비밀댓글로 답을 달 수 있는 기능이 없네요. 일단 이렇게 답을 드리고 나중에 피씨에서 수정해야겠어요.

희선 2025-03-1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울 때는 달리기 가볍게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겠습니다 저는 많이 걸은 날 종아리 근육이 뭉친 적 있어요 고등학생 때는 자주 자다가 그래서 참 안 좋았네요 다른 거 안 하고 그냥 손으로 풀어줬어요 얼마 전에 자다가 다리가 무척 아팠는데, 그때는 다리가 풀려도 며칠 아팠습니다 근육이 뭉치면 조심해야 합니다 달리다 그랬으니 더 아팠을 것 같네요 그걸 참고 달리다니, 그런 거 생각만 해도 아프네요 며칠 아플 듯합니다 따듯한 수건 같은 걸로 찜질하면 좀 괜찮을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감은빛 님 한동안 다리 쉬게 해주세요


희선

감은빛 2025-03-19 12:01   좋아요 0 | URL
희선님,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처럼 날이 춥기도 하고 바로 직전의 달리기를 좀 무리하게 했었기에 가볍게 뛸 생각이었습니다만, 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이 꼬이네요. 처음에 통증을 느꼈을때 바로 멈췄어야 했는데 경험 부족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다행히 약 36시간이 지난 지금은 훨씬 나아져서 걸을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카스피 2025-03-19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달리가 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셨는데 아마도 건강을 위해서겠지만 유행도 한 몫 한것 같아요.달리기는 가벼워 보여서 의외로 무리하기 쉬운데 간과하기 쉬운것이 바로 운동화입니다.자신의 발생태와 맞지않는 운동화를 신고 오래 달리면 나중에 탈이 생긴다고 하덕군요.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10km 달리기를 하실 정도면 자신의 발에 맞는 운동화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네요.

감은빛 2025-03-19 12:06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고맙습니다! 저도 예전에 짧은 거리, 주로 3~5킬로미터 정도 달릴 때에는 가벼운 런닝화만 신고 달려도 괜찮았는데요. 작년에 10킬로미터 대회를 신청해놓고 거리를 7, 8, 9 킬로미터 늘려가다보니 그냥 가볍기만한 운동화로는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큰 맘 먹고 비싼 런닝화를 하나 샀어요. 그래서 대회에 나갈 때나 10킬로 이상 장거리를 뛸 때에는 그 신발을 신어요. 평소에 10킬로 미만을 달릴 때에는 비싼 런닝화를 아끼려고 가벼운 런닝화를 신고요.

페크pek0501 2025-03-23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뭉친 근육은 제가 느끼는 어깨 통증과 많이 다른가요? 저는 어깨와 팔꿈치가 가끔 아파요. 그럴 땐 뜨거운 물을 틀고 샤워기로 어깨나 팔을 적시죠. 온찜질인 셈이죠. 병원에 물리치료 받으러 가면 어깨에 뜨거운 것 대 주잖아요. 그 대신이에요. 온수 샤워기가 생각보다 효과가 있어요. 통증이 사라지거든요.^^

감은빛 2025-03-24 17:20   좋아요 1 | URL
크게 보면 관절 통증과 근육 통증이 있고, 그 안에서 다시 세부적으로 나뉩니다. 관절은 인대 손상이나 연골 손상이 대부분이고, 아주 드물게 연골 손상이 심해지면 뼈까지 상하기도 하구요. 아니면 큰 외상을 당해 인대, 연골, 뼈가 한번에 다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근육 통증은 대체로 근육을 과하게 사용하는 경우에 나타나지만, 잘못된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는 경우 등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특별히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제 경우에는 근육이 순간적을 과도하게 수축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깨와 팔굼치는 아마도 인대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저도 어깨 인대 부상으로 긴시간 고생한 적이 있었어요. 물리치료사에게 들으니 온수 샤워와 냉수 샤워가 모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효과가 다르긴 하지만. 온찔짐과 냉찜질도 모두 효과가 있지만, 사용방법과 효과가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떠도는 정보들을 보면 과연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이라고 하더라. 만약 4차원에 사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시간까지 초월한(?) 존재인걸까?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컨택트]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리와 다른 외계 종족이 나온다. 주인공은 그 외계 종족과 소통을 시도하면서 그들처럼 미래를 미리 느끼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런 이야기 자체는 정말 재미있지만, 그런 상황을 실제로 겪은 일처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시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과 다르게 흐르는 세계라는 것. 당연히 겪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것이겠지. 상상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오늘은 SF읽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지난 모임에서 내가 이번에 읽을 책을 내가 좋아하는 필립 케이 딕 으로 추천했고 다들 동의했다. 내가 추천한 책이라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모임을 어떻게 운영하면 더 효율적이고 재미있을지 생각하면서 사전에 이야기 꺼리들을 각자 자유롭게 제시하고, 이것들을 모아서 마인드맵 형태로 만들어 차례 차례 공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속으로 오늘 어떻게 진행할지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준비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행한 소식들이 들렸다. 누군가는 오늘 야근을 해야해서 못 온다고 했고,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도 요즘 일이 많아서 빠지겠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번주 토요일 총회 때문에 부담스럽다고도 했다. 나 역시 2월과 3월이 일 년 중에 제일 바쁜 시기다. 다들 바쁜 것은 당연히 이해하고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특히 야근 때문에 못 오신다는 선배님은 엄청 긴 시간 다른 독서 모임을 이끌어오시면서도 거의 빠진 적이 없는, 아니 한번도 없는 분이라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암튼 갑자기 모임이 연기되어서 나는 달리기를 하러 나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내 몸은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 폰을 들고 북플 앱을 열고 있었다. 음, 이 글만 쓰고 달리러 나가야지.

예전에, 아마 거의 20년 전에 필립 케이 딕 단편들을 제법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단편집을 구매하면 읽었던 단편이 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읽기로 한 책은 헐리우드에서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든 [토탈 리콜]의 원작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가 수록된 책이고, 나는 이 책을 구매하면서 역시 영화로 만들어진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는 책도 함께 구매했다. 책을 받고 보니 둘 다 700쪽이 훌쩍 넘는 벽돌책이었다. 특히 먼저 읽고 있는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는 25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이중 23편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고 했다. 어쩐지 특유의 분위기는 익숙하지만 딱 읽었었다라고 기억나는 작품이 계속 안 나와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미리 읽었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구나.

내가 책을 읽는 순서는 판권면을 가장 먼저 보고, 서문, 해설이나 후기, 부록, 역자 후기 등을 다 살펴보고 그제서야 목차를 확인하고 읽는다. 본문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고 목차를 보면서 제일 끌리는 곳으로 먼저 가곤 한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할 장편소설이면 이러면 안 되지만, 단편집은 상관없으니. 역자 후기에도 적혀있지만, 필립 케이 딕은 헐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영화의 원작을 가진 작가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원작으로 인정한 것들도 그렇지만, 실은 이 다작 소설가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원작으로 인용하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들도 제법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그가 현재의 영화와 드라마 산업에 미친 영향은 훨씬 더 클 것이다. 온라인 상에 필립 케이 딕의 영향으로 만든 영화 라고 언급된 영화들 중 하나는 놀랍게도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도 있었다. 와! 이것도 필립 케이 딕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거였다니.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은 [어긋난 시간]이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했다.

사실 이런 부분이 또 필립 케이 딕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결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다. 매끄럽고 매력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고, 이야기를 촘촘하게 잘 짜는 사람도 아니다. 살아있는 듯한 흥미로운 인물들을 잘 만드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엄청나게 극적인 인생을 살았고, 그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바쁘게 글을 써내느라 개별 작품에 크게 공을 들이지는 못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주제와 그 주제를 제시하는 방식의 독창성이고 그가 만드는 세계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블레이드 러너]도 [토탈 리콜]도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모두 그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영화의 시나리오에서는 소설에 담겨진 내용 보다는 훨씬 더 확장된 세계에서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원작인 소설은 사실 그렇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런 점이 그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을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읽을 때에도 이 이야기를 내가 다시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집어넣고, 좀 더 세부적인 설정과 비어있는 이야기들을 넣어서 장편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을 읽어보니 실제로 당시 미국 SF 작가들 중 일부는 이렇게 필립 케이 딕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처럼 전적으로 모든 설정을 받아온 것은 아니겠지만.

시간의 정방향과 역방향

각 단편마다 흥미로운 설정과 이야기들이 펼쳐져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좋았다. 그 중에서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약속은 어제입니다] 라는 작품은 1965년에 완성해 편집자에게 넘겼고, 1966년 발표된 것인데, 시간이 정방향으로 흐르는 세계와 시간이 역방향으로 흐르는 세계가 공존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워낙 짧아서 더 구체적인 설정을 알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 중 다수는 내일을 지내고 오늘 그리고 어제를 향해 살아간다. 하루 중에서도 밤과 저녁, 오후를 거쳐 오전으로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이 부분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작중 등장하는 어떤 발명품의 영향에 따라 어떤 인물들은 또 정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나중에는 어떤 아이디어 때문에 일정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혹은 그 세계 전체가) 특정한 시간대를 기점으로 정방향과 역방향을 계속 반복해서 오가는 일종의 시간 감옥 안에 갇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만, 이 흥미로운 설정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펼치다가 뚝 끊어버리고 끝낸다. 작가가 직접 쓴 설명이 담긴 부록과 역자 후기를 보면 이 이야기는 [거꾸로 도는 세계] 라는 장편으로 다시 써서 출간했다고 되어있다. 국내에 발행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꼭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이 이야기 완전히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일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스콧 피츠제랄드의 1922년 소설과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 있다. 나는 책은 읽지 못했고, 영화만 봤었다. 이 이야기는 모두가 정방향으로 살아가는데, 딱 한 명만 기이하게도 역방향으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까지 변하지 않고 주욱. 이걸 필립 케이 딕은 시간의 흐름이 어떤 발명품에 의해 정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고 그게 또 역전되기도 하는 등 복잡하게 바꾸었고, 여기서 다시 이 발명품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눠서 더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설정을 만들었다.

자, 이쯤에서 뭐 생각나는 것 없을까? 그렇다. [테넷] 이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보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린 스크린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즉 컴퓨터 그래픽이 전혀 없이 아날로그 특수효과만으로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큰 규모의 첩보 액션 영화이지만, 그 안에 인버전 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넣어서 시간을 역행하게 만들어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그냥 첩보 액션물로 아주 재미있게 보았고, 그 인버전이 이용되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인버전 부분은 영화로 본 것만 세 번이고, 이걸 해석해 준다는 영상들을 여러차레 보았음에도 솔직히 완전히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어쨌건 어떤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 일부 등장인물만 시간이 역방향으로 흐른다는 이 이야기는 저 필립 케이 딕 소설의 설정과 같다. 찾아보지 않아서 자신할 수 없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마 이 소설들을 읽어보지 않았을까?

뫼비우스의 띠

시간이 반대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라는 일본 영화로 나나츠키 타카후미 라는 작가가 2014년에 출간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책은 읽어보지 못했고 고마츠 나나 주연의 영화만 봤는데 정말 인상적인 작품이었고, 무조건 두 번 볼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참 좋아하는 입장에서 원작을 읽지는 않았지만, 원작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진짜 천재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필립 케이 딕의 소설을 읽고 이 영화 생각이 났다. 디테일은 많이 다르지만, 시간을 정방향으로 사는 사람들과 역방향으로 사는 사람들이 얽힌다는 부분은 혹시 여기서 가져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미나미야마 타카토시는 후쿠쥬 에미라는 동갑내기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이 여성은 자신과는 시간이 반대로 흐르는 세계에서 건너온 사람이었다. 타카토시의 세계와 에미의 세계는 서로 5년에 한 번씩만 통로가 열리고, 한 번에 40일(영화에선 30일)만 열린다고 한다. 이둘의 운명은 정말 ‘운명의 장난‘ 이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없을 것 같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5살의 타카토시를 우연히 35살의 에미가 구해준다. 10살의 타카토시에게 30살의 에미가 상자를 건너주며 타코야끼를 사준다. 15살의 타카토시를 25살의 에미가 만난다. 그리고 20살의 타카토시와 20살의 에미가 만난다. 25살의 타카토시가 15살의 에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30살의 타카토시가 10살의 에미를 찾아간다. 그리고 35살의 타카토시가 5살의 에미를 구해준다.

30년 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구해주는 이 인연. 처음 타카토시 기준에서 우연히 어떤 어른이 구해주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미 입장에서는 30년 전에 타카토시가 구해준 것을 갚기 위함이고, 또 두 사람이 서로의 스무살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를 반드시 구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5년 단위로 이렇게 얼핏 보면 둘이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둘이 스무살인 해에 만나고 헤어지는 하루 하루를 보면 여성인 에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왜냐하면 남성인 타카토시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지만, 에미의 시간은 역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둘이 공평하게 서로 반대가 아니라, 반대는 반대인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정방향과 무조건 불리한 역방향이라는 방향성을 내포한 반대라서 무척 차별적인 구조다. 그러니까 만약 입장을 바꿔 에미가 정방향, 타카토시가 역방항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고 그러면 그 차별은 반대로도 가능하지만 이 작품에선 에미가 불리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른 에미는 청소년 타카토시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고, 그보다 어린 10살의 타카토시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상자만 건네도 괜찮다. 타카토시는 그 모든 일들을 정방향으로, 즉 시간 순서대로 겪을 예정이니까. 하지만 어른 타카토시는 청소년 에미에게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미가 타카토시를 찾아가지 못하고, 그러면 이 뫼비우스의 띠는 끊어진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에미 입장에서는 점점 자신과의 기억을 잃어가는 타카토시와 만나야 한다. 마침내 타카토시는 에미를 처음 마주치는 날 에미는 마지막 날이라 다시는 동갑내기 연인인 타카토시를 보지 못하는 날이 된다.

찾아보니 영화에는 없는 설정인데 소설에서는 에미 쪽 세계에서만 타카토시 쪽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고 나와있다. 그러면 왜 에미만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다 배워서 반대 방향으로 시작해야 하는지가 조금 납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타카토시가 먼저 에미를 찾아갈 수 없다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으니.

필립 케이 딕의 소설과 영화 테넷에서는 역방향인 경우 시간을 정방향에서 그대로 뒤집는 것이라서 날짜만 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중 시간도 반대로 간다. 밤에서 저녁으로, 오후에서 오전으로. 이 영화에서 정방향과 역방향인 두 인물이 만나면 그럼 두 사람은 실제로는 단 한 순간도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아주 짧은 순간 서로 스쳐지나갈 뿐. 각자의 시간 흐름이 적용되는 상태에서 마주친다면.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에미가 타카토시의 세계로 넘어와서 타카토시 시간대를 살아가는데 원래 세계로 넘어가면 다시 반대인 상황을 하루 단위로 반복하는 것이다.

뭔가 복잡하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맨처음에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경험을 할 수 없으니, 그것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겠지.

언젠가 나도 시간 흐름을 비트는 독창적인 글을 써볼수 있을까? 나는 그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어려울 것 같다. 자, 이제 달리기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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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7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토탈 리콜][마이너리티 리포트][트루먼 쇼]의 원작자라니...하나도 힘든데 명작 SF를 이렇게나 많이 쓰다니 대단하네요. 스릴러의 대가 스티븐 킹과 필적할만 하겠네요.

감은빛 2025-03-21 20:57   좋아요 0 | URL
유명한 영화들만 언급해서 그렇고,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소설들이 훨씬 더 많다고 해요. 제가 잘 모르거나, 미국에서는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덜 알려진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