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해했다. 또는 직관했다. 이것이 질투라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인지 몸인지 어느 한쪽을, 또는 경우에 따라서 둘 다를 누군가가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 한다.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 넣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 -60~1쪽
아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논리도 믿지 않고 비논리도 믿지 않아. 신도 믿지 않고 악마도 믿지 않아. 거기에는 가설의 연장도 없고 도약 같은 것도 없어. 다만 그것을 그 자체로 말없이 받아들일 따름이지. 그게 바로 내 근본적인 문제점이야.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벽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어. -104쪽
흠, 분명 재능이란 건 때때로 유쾌하기는 해. 폼도 나고 남의 눈을 끌기도 하고 잘만 하면 돈이 되기도 해. 여자도 붙어. 그야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하지만 재능이란 말이야, 하이다, 육체와 의식의 강인한 집중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해. 뇌의 어느 부분에서 나사가 하나만 빠지거나, 아니면 육체의 어딘가 연결선 하나만 툭 끊어지면, 집중 같은 건 새벽 안개처럼 사라져 버려. 예를 들어 어금니 하나가 욱신거리기만 해도, 어깨가 심하게 결리기만 해도, 피아노는 제대로 칠 수가 없어. 사실이야. 난 실제로 그런 걸 체험했으니까. 고작 충치 하나 때문에, 뭉친 어깨 근육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비전과 울림이 휙 사라져 버려. 사람의 육체란 이렇게 나약하고 물러. 육체란 놈은 무섭게 복잡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 사소한 것에도 자주 상처를 입어. 그리고 한번 고장이 나 버리면 대부분 회복이 어려워. 충치나 뭉친 근육쯤은 아마도 쉽게 고칠 수 있을 테지만, 못 고치는 것도 잔뜩 있지. 그렇게 한 치 앞도 모르는 허약한 기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재능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겠어? -104~5쪽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 색깔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알아?" "아니, 모릅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 보여." 미도리카와는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핥듯이 마셨다. "그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가요?" 하이다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미도리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천적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자격이야.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어져.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지. 그 자격은 지금 나에게 주어졌지." 하이다는 잠시 침묵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말했다. "세상에는 기분 좋은 색깔이 있는가 하면 보기 괴로운 색깔도 있어. 즐거운 색깔이 있는가 하면 슬픈 색깔도 있지. 빛이 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엷은 사람도 있고. 이거 정말 피곤한 일이야. 그런 게 보기 싫어도 보이니까 말이야.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 싫어져. 그러니까 이런 산골로 흘러들어 온 거지."-108~9쪽
나는 결국 혼자 남겨질 운명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왔다가는 이윽고 사라진다. 그들은 쓰쿠루 속에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찾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체념하고(또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설명도 없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 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150~1쪽
"사람은 변하는 모양이야." 사라가 말했다. "물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일지도 몰라. 우리가 아무리 친밀하게 지내고 가슴을 열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잘 모를지도 몰라."-175쪽
사람들은 어디서랄 것도 없이 줄줄이 밀려와 스스로 질서 있게 늘어서서 차례차례 열차에 올라타고 어딘가로 실려 갔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쓰쿠루는 감동했다. 그리고 또한 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녹색 철도 차량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차량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조직적으로 옮겨진다는 것.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가야 할 장소와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 -181쪽
"난 이렇게 생각해.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어. 그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후자 쪽이야. 오해를 풀든 말든 넌 원래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아니야. 그건 잘 알아." "잘 알아?" 쓰쿠루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잘 알게 되었다는 말이야." "쌓였던 모래가 날아가 버려서?" 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지." "뭐랄까,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우린 역사 이야기를 하는 거야."-229쪽
"재능이란 그릇과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이즈는 쉽게 바뀌지 않아. 그리고 일정한 양을 넘으면 물은 더 들어가지 않아." -231~2쪽
그는 의자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건 고요한 슬픔뿐이었다. 가슴 왼쪽이 뾰족한 칼에 베인 듯 아릿해져 왔다. 뜨끈한 피가 흐르는 느낌도 들었다. 아마도 그건 피일 것이다. 그런 아픔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 친밀했던 네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감고 물에 몸을 누이듯이 아픔의 세계를 떠돌았다. 아픔이 있는 편이 그래도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위험한 건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이다. 온갖 소리가 하나로 섞여 귀 저 안쪽에서 찡 하는 날카로운 잡음을 일으켰다. 끝도 없이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수한 소음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건 없다. 자신의 장기 안쪽에서 만들어 낸 소리다. 사람은 누구든 그런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 -286쪽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친구가 한 말이야."(중략) "그 가운데는 완전히 굳어 버려서 벗겨 낼 수 없는 뚜껑도 있을지 몰라." "억지로 벗겨 낼 필요는 없어.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게 어떤 뚜껑인지 정도는 내 눈으로 보고 싶어."-340~1쪽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363~4쪽
"있잖아, 쓰쿠루, 넌 그 여자를 잡아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지금 그 여자를 놓쳐 버리면 넌 앞으로 아무도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자신이 없어." "왜?" "아마도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내가 품어 온 문제였어. 난 언제나 나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 왔어. 뭔가를 넣을 용기로서는 어느 정도 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내용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사라는 낙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너한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전혀 텅 비지 않았어."-380~1쪽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있는 그릇으로."-381쪽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통근하는 데 소비하는 걸까, 쓰쿠루는 생각해 본다. 편도 평균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아마 그 정도 아닐까. 결혼해서 어린아이가 하나 아니면 둘, 도심에 직장이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 집 한 채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통근 시간을 그 정도 들여야 하는 '교외'까지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루 24시간 가운데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이 통근하는 데 소비되는 셈이다. 만원 전차 안에서 잘하면 신문이나 문고본 정도는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팟으로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거나 스페인어 회화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눈을 감고 장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색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하루에서 그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을 인생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시간, 양질의 시간이라 부르기는 힘들지 않을까.사람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이런 (아마) 의미 잆는 이동을 위해 박탈당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소모시키는 것일까? -412~3쪽
사라는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호감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아주 많다. 인생은 길고 때로는 가혹하다. 희생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무르고 쉽게 상처 입고 피가 흐르게 되어 있다. -434쪽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는 지금 자신이 품은 그런 기분을 놓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그 온기를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잃어버릴 거라면 차라리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편이 낫다. -435~6쪽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것도 그는 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주어야 할 것이 있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내일 일이다. -436쪽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4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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