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구판절판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상관하지 않는다. 요즘 내가 마음에 두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은희가 살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이 생의 업, 그리고 연. -28쪽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으냐고 묻는다. 인간을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51쪽

"박주태는 어떻게 만났니?"
아침을 먹다 은희에게 물었다.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63쪽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딱 한 가지에만 능했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 -114쪽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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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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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생각났습니다. 그때 그애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인간은 변하지 않네요, 라고. 인간이 하는 짓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떤 체제를 만들고 그 속에서 박해하거나 박해당한다. 박해당할 것이 두려워 남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실제로 마녀사냥이나 이단심문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가 밀고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남을 먼저 밀고하기도 했고, 밀고당한 사람이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절대권력을 가진 교회에 이의를 제기하면 자기가 마녀나 이단자로 고발당할까봐 두려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까 이건, 하며 증인 혼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그런 상태가, 현재 학교교육 현장과 비슷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라 생각했습니다."
"학교라는 체제 안에서 학생은 그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죠."
"그렇습니다.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체제에 반항하면 처벌을 받으니까요."-254~5쪽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권력자인 교회와 무력한 신자 일개인의 관계와 닮았다는 걸까요."
"신자끼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고당한 자와 밀고자의 관계는 이를테면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학생과, 그가 당하는 걸 알면서도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두려워 못 본 척하는 주위 학생들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단숨에 말을 쏟아놓고 단노 선생이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이건 엄청난 확대해석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현재의 학교교육 시스템이 중세 교회와 마찬가지라는 건 너무 비약이죠. 실제로 학교는 그만한 권력도 없습니다. 교사의 입장은 한없이 약하니까요."-255쪽

"가시와기 군이 오이데 군 일행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말하자면, 마녀나 이단자로 몰려 박해당하는 자가 박해하는 자들을 향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질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그게 악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느냐'고. 좀더 나아가자면, 그것은 이토록 무자각한 악이 날뛰는 세상에서 선하고자 하는, 올바르고자 하는 자가 살아갈 의미가 있느냐, 살아갈 의의를 찾을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도 이어집니다."
이노우에 판사가 증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이 학교, 현대사회와 교육체제 속에서 줄곧 그런 생각을 해왔겠죠. 교사에게는 획일교육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받고 선별되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외모나 신체적 능력, 사교성 등으로 또다시 추려져 배척당하거나 공격당한다. 거기에는 엄연한 '악'이 존재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악'이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누구도 감히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반문하지 않는다. 가시와기 군은 그런 데 정나미가 떨어진 겁니다."-259쪽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남들 눈에 띄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와 관계없는 곳에서 돌아간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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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2 - 결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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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게이코도 입을 다물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이런 난문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가능한 한 함께 의논하란 거야." 기타노 선생이 말했다. "진짜 재판처럼 검사 측과 변호인으로 갈라져서 자기주장만 하다보면 결론이 안 나. 너희는 아직 중학생이니까."
"서로 협력하라는 뜻이죠?"
"그렇지. 터널 파는 거나 똑같아. 좌우에서 동시에 파기 시작해 한가운데서 만나는 거야."
그 한가운데 진상이 있을 거라고 기타오 선생이 낮게 말했다. -75쪽

"우리는 중학생인걸." 겐이치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가시와기는 자기가 중학생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을 거야. 나는 왜 어른이 아닐까. 좀더 빨리 어른이 될 수는 없을까.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는 게 괴롭다."
주위에서 어른이라고 인정해줄 때까지.
"머리가 너무 좋았던 건가?"
겐이치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곧바로 기타오 선생의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로 현명한 녀석은 시간과 타협할 줄 알아. 자기가 아이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꼭 남에게 말하거나 일기에 쓰지 않더라도 알고 있어. 아니까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거야."-324쪽

'웃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겐이치는 생각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닌 것처럼 이 경우 또한 '슬픔'은 아닐 것 같았다. '분노'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겐이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그 감정이 표정이 되어 가시와기 노리유키의 얼굴에 떠올랐다.
부부는 서로 말을 보충해가며 다쿠야의 내성적인 부분, 내향적인 부분,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던 부분, 반면에 그래서 사려 깊은 아이로 보이기도 했다는 것, 적어도 학교에 다닐 때는 큰 고민이 있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때로는 변명이나 변호로 바뀌었고, 겐이치에게는 시종 부모의 애정과 너그러운 시선에 바탕을 둔 해석처럼 들렸다.
지금 이 자리에 당사자 가시와기 다쿠야가 있었다면 이런 부모를 내심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 얘기를 할 입장이 아니다. 우리 집도 이렇게 서로 어긋나 있다. -527~8쪽

료코는 간바라 가즈히코의 과거를 모른다. 그의 친부모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의 최후를 맞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유령이 되어버린 것도 모른다. 줄곧 사막을 떠돈 것도 모른다.
그래서 료코는 깨닫지 못한다. 가즈히코가 이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건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는 걸. 인간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부부나 부모자식간의 정, 사회의 규범, 상식, 체면, 그런 것들이 단번에 날아가버리는 순간이 인간에게는 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몸소 겪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57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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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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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들의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구니코의 눈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쓰자키 교장과 다카기 학년주임이 연못가에 선 어린아이들처럼 보였다. 연못에 돌을 던지자 수면에 파문이 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잠잠해질 때까지 지켜본다. 잠잠해지면 어떤 물고기가 튀어오릴까 하고 뚫어져라 바라본다. -110쪽

어딘가에서 길을 바로잡아줄 수는 없었을까-료코는 생각했다. 가시와기 다쿠야의 길. 그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그의 지도는 그만의 것이었다. 부모 형제조차 그 지도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몰랐던 걸까. -153~4쪽

"부탁이 있습니다. 부디 우리 다쿠야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여러분은 앞으로 많은 것을 배우며 어른으로 자랄 것입니다. 때로는 괴로운 일도 생기겠죠. 벽에 부딪힐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다쿠야를 떠올려주십시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다시 이를 악물어주십시오.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살아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그것이 다쿠야의 유언입니다. 그 아이도 지금 하늘 위에서 틀림없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다쿠야는 그런 확신을 얻기 위해, 구태어 죽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지 모릅니다."-156쪽

자살이었구나-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여전히 코를 훌쩍거리며 마리코가 말했다.
"조금 안심했다고 하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라고 퉁명스레 받아칠 뻔했지만 료코는 말을 삼켰다.
안심하겠지. 모두 안심할 거야. 학교에는, 반 아이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안심하고말고. 당사자의 부모가 그렇게 인정했으니 무죄방면된 느낌일 테지.
하지만 그렇게 안심했다면 우는 건 위선 아닌가? 안심했다면서 넌 어떻게 그렇게 울 수 있니?-156쪽

생각해보면 형제자매 관계도 일종의 체제다. 가정이라는 체제에 흡수되어 있긴 하지만 '독립된 관계성'을 지닌 사회인 것이다. 다쿠야는 그 사회 내에서 폭군처럼 행동했다. 부모의 착한 마음씨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형 히로유키는 그 파괴력에 맞설 수 없었다. 휘두르는 대로 얻어맞고 학대당했다.
유일하게 현명했던 행동은 그 사실을 깨닫고 도망친 것이다.
다쿠야가 자폭한 것은 어쩌면 도망간 형에게 약이 올라서인지도 모른다. 놓쳤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좀더 오래도록 형을 먹잇감으로 삼으려 했는데. 더 큰 사회로 나가기 전에 형을 토대로 파괴력을 단련하려 했는데. 형의 인생의 기반을 철저하게 무너뜨려 만족을 느끼고 싶었는데.
자살을 하면 적어도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수 있다. 내가 죽은 건 형 때문이야.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어줄 수 있다. -196쪽

저는 학교란 세상살이를 배우는 장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어느 정도 되는 인간이고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장이요. 선생님들은 나름의 잣대로 그것을 가늠하고 우리에게 납득시키려고 하죠. 그렇지만 납득하면 대부분 패자가 돼요. 선생님들이 '승자'로 뽑고 싶어하는 학생들은 극소수니까. -296쪽

미숙함은, 젊음은 모두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 어떤 일을 하면 금방 결과를 보고 싶어한다. 인생이란 곧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교훈은 평균수명의 절반 이상을 살아보지 않고는 체감할 수 없다. 그리고 진절머리 나는 일이지만 그 교훈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으려면 아마도 남은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301~2쪽

같은 학년이나 같은 반이라고 모두가 격의 없이 지내는 건 아니다. 현실은 반대다. 성적. 외모. 운동신경. 적절한 상황에 재치 있는 말을 던지는 능력. 밝거나 어두운 성격. 학생들은 서로 온갖 잣대로 측정하고 측정당한다. 그렇게 해서 친하게 지낼 상대를 정한다. 선생님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어른의 사회에 구별이나 격차가 있듯 학교에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그것을 안다. 이해한다. 인정한다.
안 그러면 살아갈 수 없다. -3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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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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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해했다. 또는 직관했다. 이것이 질투라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인지 몸인지 어느 한쪽을, 또는 경우에 따라서 둘 다를 누군가가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 한다.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 넣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 -60~1쪽

아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논리도 믿지 않고 비논리도 믿지 않아. 신도 믿지 않고 악마도 믿지 않아. 거기에는 가설의 연장도 없고 도약 같은 것도 없어. 다만 그것을 그 자체로 말없이 받아들일 따름이지. 그게 바로 내 근본적인 문제점이야.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벽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어. -104쪽

흠, 분명 재능이란 건 때때로 유쾌하기는 해. 폼도 나고 남의 눈을 끌기도 하고 잘만 하면 돈이 되기도 해. 여자도 붙어. 그야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하지만 재능이란 말이야, 하이다, 육체와 의식의 강인한 집중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해. 뇌의 어느 부분에서 나사가 하나만 빠지거나, 아니면 육체의 어딘가 연결선 하나만 툭 끊어지면, 집중 같은 건 새벽 안개처럼 사라져 버려. 예를 들어 어금니 하나가 욱신거리기만 해도, 어깨가 심하게 결리기만 해도, 피아노는 제대로 칠 수가 없어. 사실이야. 난 실제로 그런 걸 체험했으니까. 고작 충치 하나 때문에, 뭉친 어깨 근육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비전과 울림이 휙 사라져 버려. 사람의 육체란 이렇게 나약하고 물러. 육체란 놈은 무섭게 복잡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 사소한 것에도 자주 상처를 입어. 그리고 한번 고장이 나 버리면 대부분 회복이 어려워. 충치나 뭉친 근육쯤은 아마도 쉽게 고칠 수 있을 테지만, 못 고치는 것도 잔뜩 있지. 그렇게 한 치 앞도 모르는 허약한 기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재능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겠어? -104~5쪽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 색깔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알아?"
"아니, 모릅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 보여."
미도리카와는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핥듯이 마셨다.
"그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가요?" 하이다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미도리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천적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자격이야.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어져.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지. 그 자격은 지금 나에게 주어졌지."
하이다는 잠시 침묵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말했다. "세상에는 기분 좋은 색깔이 있는가 하면 보기 괴로운 색깔도 있어. 즐거운 색깔이 있는가 하면 슬픈 색깔도 있지. 빛이 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엷은 사람도 있고. 이거 정말 피곤한 일이야. 그런 게 보기 싫어도 보이니까 말이야.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 싫어져. 그러니까 이런 산골로 흘러들어 온 거지."-108~9쪽

나는 결국 혼자 남겨질 운명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왔다가는 이윽고 사라진다. 그들은 쓰쿠루 속에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찾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체념하고(또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설명도 없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 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150~1쪽

"사람은 변하는 모양이야." 사라가 말했다.
"물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일지도 몰라. 우리가 아무리 친밀하게 지내고 가슴을 열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잘 모를지도 몰라."-175쪽

사람들은 어디서랄 것도 없이 줄줄이 밀려와 스스로 질서 있게 늘어서서 차례차례 열차에 올라타고 어딘가로 실려 갔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쓰쿠루는 감동했다. 그리고 또한 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녹색 철도 차량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차량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조직적으로 옮겨진다는 것.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가야 할 장소와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 -181쪽

"난 이렇게 생각해.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어. 그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후자 쪽이야. 오해를 풀든 말든 넌 원래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아니야. 그건 잘 알아."
"잘 알아?" 쓰쿠루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잘 알게 되었다는 말이야."
"쌓였던 모래가 날아가 버려서?"
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지."
"뭐랄까,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우린 역사 이야기를 하는 거야."-229쪽

"재능이란 그릇과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이즈는 쉽게 바뀌지 않아. 그리고 일정한 양을 넘으면 물은 더 들어가지 않아."
-231~2쪽

그는 의자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건 고요한 슬픔뿐이었다. 가슴 왼쪽이 뾰족한 칼에 베인 듯 아릿해져 왔다. 뜨끈한 피가 흐르는 느낌도 들었다. 아마도 그건 피일 것이다. 그런 아픔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 친밀했던 네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감고 물에 몸을 누이듯이 아픔의 세계를 떠돌았다. 아픔이 있는 편이 그래도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위험한 건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이다.
온갖 소리가 하나로 섞여 귀 저 안쪽에서 찡 하는 날카로운 잡음을 일으켰다. 끝도 없이 깊은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수한 소음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건 없다. 자신의 장기 안쪽에서 만들어 낸 소리다. 사람은 누구든 그런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 -286쪽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친구가 한 말이야."(중략)
"그 가운데는 완전히 굳어 버려서 벗겨 낼 수 없는 뚜껑도 있을지 몰라."
"억지로 벗겨 낼 필요는 없어.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게 어떤 뚜껑인지 정도는 내 눈으로 보고 싶어."-340~1쪽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363~4쪽

"있잖아, 쓰쿠루, 넌 그 여자를 잡아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지금 그 여자를 놓쳐 버리면 넌 앞으로 아무도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자신이 없어."
"왜?"
"아마도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내가 품어 온 문제였어. 난 언제나 나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 왔어. 뭔가를 넣을 용기로서는 어느 정도 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내용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사라는 낙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너한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전혀 텅 비지 않았어."-380~1쪽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있는 그릇으로."-381쪽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통근하는 데 소비하는 걸까, 쓰쿠루는 생각해 본다. 편도 평균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아마 그 정도 아닐까. 결혼해서 어린아이가 하나 아니면 둘, 도심에 직장이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 집 한 채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통근 시간을 그 정도 들여야 하는 '교외'까지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루 24시간 가운데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이 통근하는 데 소비되는 셈이다. 만원 전차 안에서 잘하면 신문이나 문고본 정도는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팟으로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거나 스페인어 회화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눈을 감고 장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색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하루에서 그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을 인생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시간, 양질의 시간이라 부르기는 힘들지 않을까.사람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이런 (아마) 의미 잆는 이동을 위해 박탈당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소모시키는 것일까? -412~3쪽

사라는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호감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아주 많다. 인생은 길고 때로는 가혹하다. 희생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무르고 쉽게 상처 입고 피가 흐르게 되어 있다. -434쪽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는 지금 자신이 품은 그런 기분을 놓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그 온기를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잃어버릴 거라면 차라리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편이 낫다. -435~6쪽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것도 그는 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주어야 할 것이 있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내일 일이다. -436쪽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4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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