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둘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는 공상을 할 때가요. 친구라면 서로 소개라도 시켜주겠지만, 좋아하는 작가라면 마음대로 소개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쓰지 신이치 선생님의 전작인 <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을 담당했던 인연으로, 새 원고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을 받았을 때 '와, 이 두 사람이 함께한 여행이라니!'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여행작가 김남희 선생님과 일본의 환경운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쓰지 신이치 선생님은 아무 접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한일 공동 NGO 교류 행사인 '피스 앤드 그린 보트'에서 만나 동료이자 친구가 되고 부탄을 시작으로 한국와 일본을 함께 여행한 이야기를 책으로 만나다니 원고를 읽으며, 책에 들어갈 사진을 고르며 여러 번 가슴이 두근, 했습니다.

 

  '느리기에 행복한 삶'이라는 지향은 같아도 한국인과 일본인, 남자와 여자라는 시각의 차이를 가진 두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행복지수는 여느 나라보다 높은 부탄을 함께 여행하며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에게 행복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을 품게 됩니다. 이에 홋카이도, 안동, 오사카와 나라, 지리산을 거쳐 강원도와 제주도까지 함께 여행하며 타인의 시선이나 경제적인 풍요 때문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의 속도'와 '행복의 방향'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섭니다.

 

  이들의 여행은 단순히 관광지를 돌고, 그곳에서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삶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나 산속에서 살다 제주도에서 지속가능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부부, 신문사 사진기자 출신으로 펜션을 운영하는 진동 2반 반장님, 귀농해 산촌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부부 등 이들이 만난 사람들은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자신들처럼 바꿔야 한다고 강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수를 저지르고 실패를 반복해도 괜찮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들은 현명하게 포기하고, 현대인을 압박하기만 할 뿐인 '긍정의 힘'이라는 이상한 최면에서 이제는 풀려나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줄 뿐입니다.

 

  새로운 방식의 삶을 모색하는 사람을 만나는 여행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여행이자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행입니다. 가족에 얽매이는 삶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택했던 김남희 선생님은 한국을 여행하며 전통적 가치, 그리고 민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합니다. 아버지가 황해도 출신인 쓰지 신이치 선생님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고국의 아픈 역사를 만나는 시간, 그리고 아버지에게 한국이 어떤 곳이었을지 반문하는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1년간 함께 여행한 뒤 1년간 따로 또 같이 집필하며 두 분은 여행을 다시 한번 반추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만났지만 김남희 선생님과 쓰지 선생님의 글은 다른 빛깔, 다른 관점입니다. 김남희 선생님의 글이 따뜻하고 섬세한 에너지로 차 있다면, 쓰이 신이치 선생님의 글은 이성적이고 냉철하지만 포용력이 있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 하나의 여행이지만 그 시선이 다르기에 두 개의 여행 같고, 또 별개의 여행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이어지는 여행. 그 가슴 따뜻해지는 여정을 맨 먼저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덧) 사진만으로도 두 분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 출간기념회 자리에서 찍은 두 분 선생님 사진을 보너스로 덧붙여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섬의 기적 - 쓰나미가 휩쓸고 간 외딴 섬마을 고양이 이야기
이시마루 가즈미 지음, 오지은 옮김, 고경원 해설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모님이 싫어하는 터라 지금은 고양이를 못 키우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 그래서 그 대신이랄까 고양이가 있는 카페에 가서 고양이를 쓰담쓰담 하거나 고양이 사진을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고양이 책이 나와도 한번씩 들춰보곤 했는데, 그러다 눈에 들어온 책이 <고양이 섬의 기적>이다. 유유자적하게 모여 있는 고양이 사진에 이끌려, 그리고 '쓰나미가 휩쓸고 간 외딴 섬마을'에 대체 어떤 '기적'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 '기적'을 만나러 갔다.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아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양이 섬'으로 불리는 다시로지마 섬. 어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주민의 8할이 65세 이상인 노령화된 낙도다. 관광상품이랄 것도, 편의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낚시꾼과 애묘인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끌어왔다. 고양이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지내던 소박하고 평온한 섬생활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덮치며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한다. 어선, 그물, 굴 양식대 등을 모두 잃은 섬 사람들. 국가의 지원을 기다릴 수도, 금융기관의 융자도 힘든 상황 속에서 몇몇 섬 사람들이 다시로지마 섬만의, 다시로지마 섬의 자원을 살린 재건 프로젝트인 '냥이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구좌 1만 엔으로 한 구좌 이상 지원하는 주주를 모집해 쓰나미로 사라진 어업 전반에 필요한 자재 구입비, 통신비, 유지관리비, 그리고 고양이 사료비와 수의사비 등으로 사용하고 답례로 다시로지마 섬의 특산물인 굴 1킬로그램을 보내준다는 '냥이 프로젝트'는 일본 전국 애묘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놀랍게도 단 두 달 만에 목표액을 달성한다. '냥이 프로젝트'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한 것은 고양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쓰나미를 딛고 일어서려는 섬 사람들의 의지가 분명 많은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리라. 고양이를, 섬 사람을, 섬을 살리려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그것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다시로지마 섬에는 여전히 폐자재 더미가 쌓여 있지만 '냥이 프로젝트' 덕분에 섬 재건을 위한 첫발은 내디딜 수 있었다.

 

  '냥이 프로젝트'라는 착안도 재미있었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다시로지마 사람들과 고양이의 관계였다. 누에치기의 적인 쥐를 퇴치하는 고양이를 귀중하게 여기던 풍습 때문에 '개 반입 금지'라는 점이나 고양이를 모시는 '고양이 신' 신사가 섬 중심부에 위치한다는 점도 재미있었지만, 고양이를 "안 좋아해요"라고 말하면서도 항구에 모인 고양이에게 상품으로 못 쓰는 생선을 던져준다는 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양이를 좋아하건 말건 다시로지마 섬에서는 고양이는 섬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는 듯했다.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고양이와 섬 사람들의 모습에 종은 다르지만 '가족 같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중간중간에 들어간 고양이들의 귀욤귀욤한 사진에 몇 번이나 멈춰 이 '기적'에 감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섬의 기적 - 쓰나미가 휩쓸고 간 외딴 섬마을 고양이 이야기
이시마루 가즈미 지음, 오지은 옮김, 고경원 해설 / 문학동네 / 2013년 3월
장바구니담기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고양이를 살리자, 그러려면 사람을 살리자, 그러려면 섬을 살리자, 이렇게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고양이를 통해서 너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 되었고 그로 인해 타인을 도울 힘이 생겨났다. 그리고 결국 섬이 살아났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가끔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그 매개가 나에게는 음악, 다시로지마 섬에게는 고양이였다. 무엇이 매개가 되었든 마음이 오갈 때, 세상은 빛이 난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빛이다. -7쪽

'냥이 프로젝트'는 1구좌 1만 엔으로 한 구좌 이상 지원하는 주주를 모집한다는 형식을 갖췄다. 목표는 '1만 5천 구좌, 1억 5천만 엔'으로 잡았다.
산리쿠 굴 프로젝트와 다른 점은 모인 자금을 굴 양식업에만 쓰는 것이 아닌, 쓰나미로 사라진 어업 전반에 필요한 자재 구입비와 통신비, 유지관리비, 그리고 경비로 '고양이 사료비, 수의사비'로도 쓴다는 점이었다.
고양이에 대한 부분은 전체 프로젝트의 1할을 차지하지만, 이 때문에 '냥이 프로젝트'는 일본 전국 애묘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의 '답례'는 다시로지마 섬 특산물인 굴을 1킬로그램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단, 굴은 1년 만에 수확을 할 수 없고, 빨라야 4년 정도는 걸리지만, 그 사실도 물론 명시되어 있었다. -50쪽

옛날부터 함께 생활하던 고양이가 손님을 불러왔고 재난 후에는 복구 지원모금까지 불러왔다. 그리고 '섬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섬사람들의 의식을 '섬을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로 바꾸었다.
오른발을 들어 손짓하는 고양이는 '돈과 복을 부른다'고 하고, 왼발을 들어 손짓하는 고양이는 '사람을 부른다'고 한다. 아무래도 다시로지마 섬의 고양이는 양발을 들고 손짓하는 마네키네고인 것 같다. -77쪽

앞서 말한 것처럼 다시로지마 섬에는 지금도 재건과는 아직 조금 먼 '광경'이 펼쳐져 있다. 니토다 항에 도착하기 전, 배가 항구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눈앞에서 커지는 항구의 폐자재 산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면 그곳에 고양이가 있다. 내가 있는 곳을 응시하면서 처음엔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곧 일직선으로 뛰어온다. 아마도 재난 후에 태어난 듯한 몸집이 작은 턱시도 고양이가 다리에 감겨오길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눈을 감는다. 여기 고양이들은 길고양이이지만, 실제로는 고양이들에게 섬 전체가 커다란 집이다. 따라서 집에서 길러지는 고양이처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사람 목소리를 들으면 다가온다. -1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절판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온종일 입 한번 열지 않을 때도 많다. 역의 매표소 직원이나 버스 승무원에게 고작 몇 마디 할까. 그걸 빼면 숙소로 들어올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할머니와 얘기한들 할아버지와 얘기한들 달래지지 않는다.
이때 요긴한 방법이 멋진 남자에게 다가서서,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묻는 것이다.
'저어……' 또는 '실례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면 반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몇 시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니, 누구든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시계가 있는 한 대답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까지 가죠? ㅇㅇ온천? 서두르지 않으면 비가 올 거예요"라는 말도 해준다.
그렇다고 혼자 여행하는 여자의 그 말이 인연이 돼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로 발전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아방튀르(모험)는 세상의 스캔들이나 주간지의 기사처럼 손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저어…… 지금 몇 시예요?'로부터 안개가 낀 듯 야릇해지다가 드디어 의기투합해서 한 여관에 묵는 일 따위는 있을 리 없다. -15쪽

나는 혼자 사는 서른한 살의 여자다.
특별히 혼자인 게 좋아서 혼자 지내는 건 아니다. 부득이하게 혼자인 것이다.
뭘 하든 혼자다. 혼잣말, 홀로 잠, 홀로 웃기, 홀로 울기, 홀로 먹기, 홀로 텔레비전(그런 말이 있다면), 홀로 끄덕이기, 홀로 신음하기(이상한 걸 상상하면 곤란하지만).
혼자 산다는 건 어렵다.
오해받기 쉽다. 고영오연하게 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한다.
그러나 또한 어딘지 조금 애처로운 데가 없으면 얄밉게 보인다.
그러나 또한 너무 애처로운 태를 내면 색기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균형이 어렵다. -63~4쪽

그리고 혼자인 게 좋아서 홀로 사는 게 아닌 이상 여러 가지로 바쁘다. 물론 결혼 상대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남자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미묘한 부분이 있다.
남자가 건드려주길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의연하게 퇴짜 놓는 자세를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 기다렸습니다 하는 구석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건드리길 기다린다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남자는 다가오지 않는다. 남자라는 물고기를 낚아올리려면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한 법. 적당히 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첫째로,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아무나 좋다고 하면 안 된다. 상대도 그렇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신은 여러모로 바쁜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호박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공상 속에서는 버젓이 행세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엉덩이가 무거운 애들이 많다. 그러면서 해마다 주문이 까다로워진다. -64쪽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다. -75쪽

정말 내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 이 사람이다 싶은 남자가 없다. 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결혼했겠지. -81쪽

"외로워."
"외롭지, 외로워."
"역시 혼자는 재미없고."
"재미없지, 재미없어."-82쪽

미카코는 냉랭한 집 안으로 들어가 봄코트를 입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어지르지 않으면 영원히 깔끔하게 치워진 채로 있을 실내.
그건 대자연의 정적. 말하자면 북극과 같은 정적과 비정을 생각나게 했다. 미카코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엄마게에 의존하는 존재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만든 요리, 엄마의 배려, 엄마의 수다, 엄마의 냄새로부터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한 의지가지없는 아이 같은 존재.
자신의 인생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자신의 발로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했건만…… 엄마의 보호 속에 따뜻하게 몸을 웅크리고 입으로만 잘난 듯이 떠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110쪽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추상능력, 분석능력, 표현능력이 있는 남자를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여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134~5쪽

나는 다카하타 씨가 건축금속물 부서에서 가정금속물 부서로 옮겨 왔을 때부터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자란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좋다.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남자라도 말 붙이기 힘든 사람은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는 부류다. -139쪽

'여보, 즐거웠어요. 재밌었어요. 덕분에 잘살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나얏코의 눈에 처음으로 진심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부부로서의 인생이 끝날 때,
'즐거운 삶이었어. 재밌었어. 고마워'라고 상대에게 말할 정도의 행복이 또 있을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인생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172쪽

"함께 살지 않을래?"
쓰루가 씨는 성실한 사람이라 그 말을 할 때도 성실하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수습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재미있는 친구로 지내왔는데 아까워요. 결혼 같은 거 해버리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럴까?"
쓰루가 씨가 말했다.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다케우치 씨하고는 오래 만나와서 서로 마음도 잘 알고."
오래 만나왔다는 점이 수상쩍은 것이다.
너무 오래 만나와서,
'그래, 가는 거야!' 하는 데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로맨티스트라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 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구식 여자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의 가슴에 뛰어드는 격정 같은 것을 기대한다.
나는 쓰루가 씨와 마음이 잘 맞고 좋긴 하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 여자로서의 기쁨에 몸을 떠는 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난처하다. -197~8쪽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 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1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영화도 책도 재미있게 봤는데 어째서인지 다나베 세이코의 다른 소설과는 인연이 없었다. 국내에 번역서가 여러 권 소개되었던 터라 관심만 있다면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건어물녀마냥 건조한 나는 연애소설이라니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소녀같군 하며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과는 자연 멀어졌다. 그러다 서른이 되고 봄바람 불자 <서른 넘어 함박눈>의 분홍분홍한 표지에 마음도 부농부농해져서 오랜만에 다나베 세이코를 만났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는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 사랑이 진행될 때의 열정, 그리고 식어버린 사랑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을 폭넓게 보여준다면 <서른 넘어 함박눈>의 여자들의 모습은 그보다 조금 구깃구깃하다. 여행지에서 멋진 남자에게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물으며 다니기도 하고, 룸메이트의 남자가 두고 간 듯한 특대 흰 팬티를 보고 공상을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그물을 쳐놓고 남자가 걸리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서른이 넘어 한 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음을(혹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내심 우연한 계기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팟, 하는 계기로 결혼에 골인하기를 꿈꾼다. 

 

  사실 이 책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그리 낯설지 않다. 카페 옆자리나 술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부부의 대화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농밀한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이 책 속의 여자들처럼 어느샌가 나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30대 여자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와 일본드라마 <결혼하지 않는다結婚しない>를 볼 때처럼 무한공감하며 읽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지만 등떠밀려서 하고 싶지는 않은, 이왕이면 조건에 맞춰 결혼하기보다는 내 힘으로 사랑을 이뤄가고 싶은,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서른 넘어 함박눈>에서 만난 여자들의 모습 속에 나를 슬쩍슬쩍 만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아, 봄이구나.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고개를 들었다. 아아, 봄도, 서른도, 사랑하기 좋은 때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