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절판


카렐라가 다시 연락을 취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까닭은, 경찰 조직은 작은 군대와 비슷하며 그중에서도 살인 사건은 끝없는 전쟁 중 벌어지는 큰 전투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군대에서라면 작은 전투들도 심각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 조직 같은 작은 군대에서는 살인 사건 같은 커다란 전투가 발생하면 일선에서 싸우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당한 주의와 참여가 요구된다. 그들이 최전선에 배치된 이 도시에서는 살인 사건에 배정된 분서 소속 형사는 대개 원래 담당하던 사건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가 새 사건을 담당하는 동시에 원래 사건은 같은 팀 내의 다른 형사들이 떠맡게 된다. 한 형사가 "그 사건은 내가 맡지" 혹은 "내가 굴려보겠어" 같은 말을 하거나 그러한 취지의 다채로운 전문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그 사건은 공식적으로 그 형사의 담당이 된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거나 상부의 결재가 끝날 때까지(이 둘은 사건을 해결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사항이 아니다.), 아니면 자포자기해서 두 손을 놓아버릴 때까지 그 형사는 여기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50~1쪽

그러나 살인 사건은 매우 중대한 공격적인 태세로 취급되기 때문에, 수사반 내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경찰 조직 내에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분서 수사반 소속 형사가 '제대로 된' 살인 사건을 담당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해야만 했다.

1. 경찰청장
2. 경찰청 국장
3. 지방경찰청장
4. 시체가 발견된 지역에 따라 동부 살인반, 혹은 서부 살인반
5. 시체가 발견된 지역 분서의 형사들 및 형사 반장
6. 검시관
7. 지방검사
8. 본부 정보통신과
9. 경찰 감식반
10. 경찰 사진반-51쪽

번스는 그의 모습을 이해하려 심리학 지식을 짜냈다. 심리학이야말로 경찰 업무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들만 있을 뿐, 더 이상 악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좀도둑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이기 전까지는 심리학은 굉장히 유용한 도구였다. 하지만 일단 한번 차이게 되면, 그 좀도둑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상처받은 영혼이라고 상상하는 일이 조금 더 어려워졌다. 같은 이치로 번스는 클링의 행동에는 그 사건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거 몇 년 전 이야기야? 카렐라는 문득 궁금했다.) 그렇긴 해도 카렐라는 클링이 스스로 나락에 빠지는 경찰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클링은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169~170쪽

브라운은 자신이 경찰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자신을 피하는 진짜 이유가 백인들은 흑인이 모두 도둑 아니면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사로 승진한 일을 자주 후회하곤 했다. 자신의 갈색 피부와는 달리 경찰임을 증명하는 푸른색 제복을 더 이상 입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자신과 같은 인종인 사람들을 불시 단속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흑인 녀석들이 그에게 "에이, 친구. 한 번만 봐달라고" 같은 말을 하는 걸 특히 좋아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브라운의 친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브라운과 하마와의 관계보다 더 먼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브라운의 세계에는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존재하듯 백인과 흑인이 존재했고, 두 구분 방법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브라운은 좋은 놈들 중 하나였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놈이었다. -179쪽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뭘 받으셨습니까?"
"살인 사건."-192쪽

많은 사람들은 하루는 자정에 끝난다고 믿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여전히 같은 날인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비로소 다음 날이 시작된다. -233쪽

미치광이들은 경찰 업무를 더욱 힘들게 했다. 미치광이를 상대하게 되면 교범 따위는 내던져버리고 감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미치광이가 행동하는 방식이 딱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는 수많은 미친놈들이 살고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대부분은 지구 종말을 알리는 팻말을 들고 다니거나 시장이나 날씨에 대해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홀 애버뉴를 떠돌아다니는 정도에 만족하며 지냈다. 이 도시의 미치광이들은 날씨에 대한 책임은 시장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시장 책임일 수도 있었지만. -291쪽

그는 보통 때에는 철학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가장 두꺼운 코트를 입고(그 아래에는 재킷을, 그 아래에는 스웨터를, 그 아래에는 플란넬 셔츠를, 그 아래에는 양모 속옷을 입고 있었다.)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경찰 일이란 겨울과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사람을 닳게 만들었다. 눈이나 얼음, 진눈깨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비 같은 것들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의사를 표시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이닥쳤다. 그러나 봄이 찾아와 얼음을 녹이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면 다음 겨울이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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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구판절판


사진이나 교과서에서 현실의 금각을 이따금 접하기는 하였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아버지가 들려 준 금각의 환상이 훨씬 멋진 것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결코 현실의 금각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 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었다. -7~8쪽

금각은 넓은 연못-경호지-에 면한 3층 누각의 건축으로서, 1398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 2층은 침전 모양으로 만들어 덧문을 달았고, 3층은 4면 3자의 순수한 선당, 불당식으로 만들어, 중앙에 잔당호(틀을 짠 다음 얇은 판자를 붙인 문), 좌우에 화두창(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창)을 달았다.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금동의 봉황이 올려져 있다. 또한 연못에는 ㅅ자형 지붕을 올린 수청이라는 낚시터를 돌출시켜, 전체의 단조로움을 없앴다. 지붕의 경사는 완만하며, 처마는 산뜻하게, 가느다란 나무로 경쾌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내는 등, 주택식 건축에 불당 양식을 가미하여 조화를 이룬 정원 건축의 수작으로서, 귀족 문화를 도입한 요시미쓰의 취미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전하여 주고 있다.
요시미쓰의 사후, 기타야마 저택은 유언에 따라 선찰로 바뀌어, 녹원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곳의 건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황폐되거나 했지만, 금각만은 다행히도 남아 있다. -24쪽

밤하늘의 달처럼, 금각은 암흑 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꿈꾸는 금각은, 그 주위에 몰려드는 어둠을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름답고 갸날픈 기둥의 구조가, 안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발하며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이 건축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더라도 아름다운 금각은 잠자코 섬세한 구조를 드러내 보이며 주위의 어둠을 참고 견디어야 했다.
나는 또한 그 지붕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시달려온 금동 봉황을 생각했다. 이 신비스러운 금빛 새는 새벽을 알리지도 않고 날갯짓도 하지 않고, 자신이 새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날지 못할 듯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다른 새들이 공간을 난다면, 이 금으로 만든 봉황은 번쩍이는 날개를 펴고 영원히 시간 속을 나는 것이다.-24~5쪽

금각은 내 손 안에 잡히는 작고 정교한 세공물처럼 생각되는 때도 있었고, 혹은, 하늘 높이 끝없이 솟은 거대한 괴물과도 흡사한 건물이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미라는 것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적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소년인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여름철의 꽃들이 아침 이슬에 젖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구름이 산 저편을 가로막고 천둥을 머금은 채 암담한 테두리만을 금빛으로 번쩍일 때에도, 그 웅대한 광경을 보며 금각을 연상했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마음속으로,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형용하기에 이르렀다. -26쪽

그리하여 그토록 꿈에 그리던 금각은 너무도 싱겁게 내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내었다.
나는 연못의 이쪽에 서 있었고, 금각은 연못 건너편의,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에 그 정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청은 왼쪽 저 건너에 절반 가려져 있었다. 물풀 잎사귀가 드문드문 떠 있는 연못에는, 금각의 정교한 투영이 비치어, 그 투영이 오히려 완전한 모습으로 보였다. 연못 물에 반사된 석양이 각층의 추녀 밑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원근법을 과장시킨 그림처럼 고압적인 금각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 -28~9쪽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내부의 낡은 금박도 그대로, 외벽에 칠한, 여름 햇빛에 빛나는 옻의 보호를 받으며, 금각은 쓸데없이 고귀한 가구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타는 듯이 푸른 숲 앞에 놓인, 거대하고 텅 빈 장식 선반, 이 선반의 크기에 맞는 장식품은, 터무니없이 커다란 향로라든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라든지, 그러한 것들밖에 없으리라.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 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더욱 기묘한 것은, 금각이 이따금 보여 주는 미 가운데서도, 이날만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내 심상으로부터, 아니, 현실 세계로부터도 초탈하여, 변하기 쉬운 모든 것들과는 무관하게, 금각이 이토록 견고한 미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68~9쪽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 -204~5쪽

생각하는 도중에, 해학적인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금각을 불태운다면'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교육적인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에 연못가에 계속하여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존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 시간의 응고물에 둘러싸여 유지되고 있었다. -205쪽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210쪽

그 무렵 불과 불은 서로 친밀하였다. 불은 이처럼 세분되어, 멸시당하는 일도 없이, 언제나 불은 다른 불과 손을 잡고, 무수한 불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인간도 아마 그러하리라. 불은 어디에 있거나 다른 불을 부를 수 있었고, 그 소리는 곧바로 전하여졌다. 절의 화재가 실화나 비화 혹은 전쟁에 의한 것일 뿐, 방화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설령 나와 같은 사내가 옛날의 어느 시절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기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절은 언젠가 반드시 불탔다. 불은 풍부하고, 방자하였다. 기다리기만 하면, 기회를 노리던 불이 반드시 봉기하여, 불과 불은 손을 마주 잡고,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 금각은 실로 보기 드문 우연으로 불을 모면하였을 뿐이다. 불은 자연히 일어났고, 멸망과 부정은 정상이며, 세워진 건물은 반드시 불에 타, 불교적인 원리와 원칙은 엄밀하게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설령 방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의 힘에 호소한 것이었기에,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것을 방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216쪽

"지금 생각하면, 이 불행한 연애도 나의 불행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날 때부터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내 마음은, 환하게 밝은 세계를 전혀 몰랐던 듯이 여겨진다."-224쪽

"남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유별난 짓을 저지르면, 또 남들은 그렇게 봐 주지. 세상은 건망증이 심하니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지.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가야만 돼.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최후의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저를 꿰뚫어봐 주십시오"라고 결국 나는 말했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본심을 꿰뚫어봐 주십시오."
스님은 술을 입에 부어 넣고는, 나를 잠자코 보았다. 비에 젖은 녹원사의 크고 검은 기와지붕처럼 침묵의 무게가 내 위에 있었다. 나는 전율하였다. 갑자기 스님이, 더없이 맑고 쾌활한 웃음소리를 발하였다.
"꿰뚫어볼 필요는 없어. 전부 네 얼굴에 나타나 있거든."-2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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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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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년 전,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드라마를 볼 때 겸사겸사 읽었던 『점과 선』이 새 번역과 새 옷을 입고 출간됐다. 기존에 동서판에서는 『제로의 초점』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법 두꺼웠지만, 이번에는 『점과 선』만으로 부담없는 분량으로 다시 만났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은 『모래그릇』이었지만, 뇌리에 가장 오래 박힌 작품은 『점과 선』이었기에 '마쓰모토 세이초 월드'로 다시 만난 이 책이 더 반가웠다. 『모래그릇』을 비롯해 그동안 읽어온 세이초의 작품들이 현실을 날카롭게 그리는 경우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락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경우가 많았다면, 첫 장편소설인 『점과 선』은 그보다는 트릭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쿄 역 13번 플랫폼의 숨겨진 4분'부터 시작해 철벽같아 보이는 알리바이를 깨나가는 과정이 짧은 분량이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요정의 여급인 오토키와 중앙 관청의 과장대리인 사야마 겐이치가 후쿠오카의 외딴 해안에서 청산가리가 든 주스를 마시고 함께 죽은 채 발견된다. 모두가 정사(情死)라고 생각하지만, 베테랑 형사인 도리카이 준타로는 사야마의 소지품 가운데 1인으로 되어 있는 열차 식당의 영수증에 의문을 품는다. 도리카이는 마침 사야마가 진짜 자살을 한 것인지 확인차 온 경시청의 형사 미하라에게 이런 의문을 털어놓고, 이후 미하라는 이 사건에서 뭔가 지나친 우연으로 인한 작위의 기운을 감지한다. 난공불락처럼 보이지만 어딘가에 있을 작은 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하라, 그리고 마침내 알리바이의 벽은 무너진다. 

 

  너무나 '완벽'한 알리바이였기 때문에 그 알리바이가 깨져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간파했을 때의 통쾌함은 다시 읽어도 즐거웠다. 시대적인 흐름 탓도 있겠지만 사실 트릭 자체는 엄청나게 놀라운 정도는 아니고 그리 자극적이지도 않다. 어쩐지 끼워맞추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4분 간'을 비롯해 치밀하게 짜여진 트릭은 마쓰모토 세이초가 얼마나 꼼꼼한 작가인지 실감하기엔 충분하다. 이래서야 1분까지도 허투루 넘길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다. 사실 이 책의 메인은 시간표 트릭이지만 인간 심리에 대한 부분도 놓칠 수 없다. 1인 영수증을 두고 "식욕보다 애정의 문제"라는 말로 절묘하게 표현하는 부분이나 함께 죽은 남녀의 사체를 보고 자연스레 정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선입관이 맹점을 만드는 경우를 풀어가는 과정은 다시 읽어도 허를 찔리는 듯했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치밀함과 의식, 트릭 등은 잘 짜여 있어 『점과 선』이야말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지 않나 싶다. 중간중간 삽화와 함께 읽어 한결 새로웠던 『점과 선』.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감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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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2-1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도 매니아가 많은 일본에서 나올만한 책이지요^^

이매지 2013-02-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런 점도 영향이 있었겠죠. ㅎ
 
푸른 묘점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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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모토 세이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호칭은 '사회파 미스터리'다. <점과 선> <짐승의 길> <모래그릇> 등 그동안 출간된 작품들은 조금씩 분위기나 정도의 차는 있었지만 내 나름대로 구축한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작가의 이미지와 그리 거리가 멀진 않았다. 하지만 <푸른 묘점>은 기존의 작품과는 구분됐다. "유명 작가에게 씌워진 표절 의혹과 살인사건, 편집자 콤비가 이를 추적하다가…… 연애한다"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띠지문안에 키득거리며 책을 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묘점>을 편집하다가 살인낼 뻔했다는 솔로편집자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됐다.


  이야기는 문예잡지 편집부의 신입 사원인 노리코가 담당 작가인 무라타니 아사코에게 어떻게든 원고를 받아내기 위해 하코네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까탈스럽지만 글만은 빼어난, 무라타니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의 탈고를 기다린다. 그렇게 원고의 완성을 기다리며 산책을 하던 노리코는 안개 속에서 이상한 조합의 두 쌍을 목격한다. 원고 마감으로 바쁠 무라타니 아사코와 잡지사에 자극적인 기사를 팔고 다니는 다쿠라 요시조가 하나, 아사코의 남편인 무라타니 료고와 미지의 여자가 다른 하나였다. 호기심이 동하지만 그냥 넘길 수도 있었던 이 일은 다음 날 다쿠라 요시조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채 발견되며 급변한다. 과연 다쿠라는 자살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은 노리코는 이를 편집장에게 제기해 그의 지시로 동료 편집자 다쓰오와 함께 이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이후 무라타니 아사코의 남편의 실종, 아사코의 대필 문제의 대두, 그 외의 살인과 자살 등으로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두 아마추어 탐정은 계속해서 고전하게 된다. 


  여류 작가의 표절과 그 주변인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중심 소재고, 문학을 매개로 한 욕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사건을 함께 조사하는 노리코와 다쓰오의 관계다.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사키노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었다" 정도의 감정이었던 것이 어느샌가 그가 땀을 닦는 모습에 흐뭇해하고, 그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그의 손을 잠시 잡고는 그 감촉을 한동안 못 잊는 지경에 이른다. 단서를 쫓기 위해 무단결근에 특근도 마다않고 함께 수사를 진행하며 아옹다옹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가 없)았다. 너무 우연이 잦고, 사건이 늘어지는 경향도 없잖아서 본격미스터리로는 갸웃할 수밖에 없지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에게는 '세이초가 이런 소설도 썼구나' 하는 발견의 기쁨도 있다. 세이초가 이렇게 부농부농한 이야기를 쓰다니! 

 

  다쿠라 요시조는 사고사일까, 타살이라면 누가 왜 죽였을까, 무라타니 료고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무라타니 아사코는 표절을 했는가, 그렇다면 누구의 글인가 등 다양한 의문을 던지고, 이 의문을 아마추어인 두 편집자가 풀어가는 터라 사실 굉장히 어설프고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읽다보면 의문점이야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싶어지면서 미스터리에는 손을 놓고 몸을 배배 꼬면서(때로는 절규하면서) 연애감정이 생겨날 무렵의 두 사람을 지켜보게 된다. 하나의 사건의 비극적 결말, 다른 한 사건의 해피엔딩이 묘하게 엉켜 있지만 산만하지는 않으면서도 낯간지러워서 지금까지 출간된 세이초의 어떤 작품보다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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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묘점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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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시라이 편집장이었다. 경험도 많고 기획력도 나쁘지 않아 불평하는 부원도 없었다. 노리코는 잡지 편집장이 '원맨'으로 나서지 않는 한 잡지의 특색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수의 의견을 모아 봐야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독도, 약도 안 된다. 최대 공약수적인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다. 번뜩이는 무엇인가가 없다. -224쪽

짧은 여행이었지만 노리코는 다양한 인생의 단편을 엿본 기분이었다. 이누야마에 사는 하타나카 젠이치의 여동생과 기소가와 강변에서 청춘을 즐기던 청년들, 도요하시의 택시 기사, 히로코의 아버지와 계모, 모두 각자의 생활과 인생이 있다-.-288~9쪽

"나도 어젯밤 내내 고민해 봤어. 하지만 추리는 실제와는 다르니까 여러 가지 모순이 생기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실제로 부딪쳐 가면서 이쪽이 생각하던 모순과 새롭게 발견한 내용을 선으로 연결해 조정해 나가다 보면, 진실의 선이 점처 드러나게 될 거야. 뭐, 앞으로의 일은 후지사와에 가서 다쿠라의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다음의 문제지."-307쪽

"아는 사람이야?"
다쓰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당연히 모르지."
"맞아, 모르는 사람이지?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자기와 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리고 방금 그 사람이 우연히 여기에 왔어. 그저 우연일 뿐이지. 하지만 제삼자에겐, 그 사람이 여기에 마침 그 시간에 왔다는 게 의미심장하게 비칠지도 몰라. 즉 그것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의미를 지닌 행동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어."-45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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