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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이든 필포츠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11월
평점 :
어느새 2012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한 달이 남긴 했지만, 2012년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남들한테는 큰 의미도 없겠지만 혼자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이런 걸 두고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올해의 시리즈만큼은 고민 없이 정할 수 있겠구나 싶어 흐뭇했다. 몇 초의 고민도 없이 올해의 시리즈로 꼽은 것은 바로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다. 기존에 DMB(동서미스터리북스)과 라인업이 겹쳐서 <환상의 여인>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미 본 책인데...'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DMB와는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홀딱 반한 뒤 <가짜 경감 듀> <어두운 거울 속으로> 등 별 다섯을 줘도 아깝지 않을 작품을 잇달아 만나는 행복을 누렸다. 그리고 연말, 마치 선물처럼 또 한 권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이 채워졌다. 바로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이다. 이 작품 또한 기존에 DMB에서 <빨강머리 레드메인즈>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다행히 아직 읽기 전이었던 터라 편견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서른다섯이라는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런던경시청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실력 있는 형사 마크 브렌던. 매년 다트무어에서 송어 낚시로 휴가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한눈팔지 않고 범죄자들을 체포하며 활약한다. 여느 해처럼 앞만 보고 달리다 휴가차 다트무어를 찾은 마크는 난생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낚시차 간 외딴 채석장에서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여자와 우연히 마주친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마크는 그녀처럼 예쁜 여자가 혼자일리 없다고, 그녀 같은 사람이 자신을 쉽게 좋아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스쳐보낸다. 그렇게 아쉬운 만남과 이별 뒤 그녀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의 아내가 마크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피해자의 집에서 그가 만난 것은 그의 마음을 빼앗아간 그 여인. 삼촌이 남편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그녀를 위해서 마크는 온힘을 다해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오토바이로 도주하는 처삼촌(로버트 레드메인)의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기에 쉽게 끝날 것 같이 보였던 이 사건은 예상 외로 로버트 레드메인의 행방은 묘연해지면서 미궁에 빠진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해외로 도주했으리라 추정했던 로버트 레드메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형을 살해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양상으로 흐른다.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은 독특하게도 탐정이 두 명 등장한다. 전반부를 영국인 형사 마크 브렌던이 담당한다면 후반전은 미국인 탐정 피터 건스의 몫이다. 하지만 탐정이 두 명이라고 해서 독자가 혼란스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초반에 작가가 한껏 띄워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마크 브렌던이 형사로, 탐정으로 실격에 가까울 정도로 정줄을 놓고 끊임없이 자충수를 두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덕분에 끝까지 바보 인증을 하는 마크는 심하게 얘기하자면 탐정실격이다. 피해자의 아내 제니를 자신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저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마크의 모습에서 몇 번이나 '저기, 니가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정신 좀 차리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니니' 하며 가슴을 쳤다. 마크 때문에 때론 속이 터졌지만 사실 그게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의 매력이기도 하다. 엘릭시르 편집부에서는 띠지에서 "이 작품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따라 읽으세요"라고 권장(?)했는데, 그 말처럼 이 책은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먼 형사 마크 브렌던과 제3의 눈으로 통찰력 있게 사건을 조사하는 베테랑 탐정 피터 건스를 각각의 축으로 놓고 봐도 재미있겠지만, 이 책에서 (그들의 붉은 머리색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레드메인 가문의 사람들이다. 도주중인 로버트 레드메인을 비롯해 서적수집가인 앨버트 레드메인, 형과 달리 책이라곤 <모비딕>만 소중히 읽을 뿐인 퇴역 선장 벤디고 레드메인, 그리고 삼촌에 의해 남편을 잃은 제니 펜딘. 이들의 행동과 심리가 다른 어떤 추리소설보다 꼼꼼하게 묘사된다. 여기에 남편을 잃은 제니의 마음을 어느샌가 사로잡아 마크의 질투를 사는 이탈리아인 주제페 도리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압권은 거의 마지막 챕터인 '고백'인데, 사이코패스의 이 고백 앞에서는 오싹하지 않을 독자가 몇 안 되지 싶었다.
인물뿐 아니라 영국의 다트무어, 크로우즈 네스트, 이탈리아의 코모 등의 배경에 대한 묘사도 돋보였고, 각각의 배경이 인물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듯했고, 같은 인물이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성격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거 진짜 물건인데' 싶었지만, 밑줄 그어둔 부분을 옮기느라 부분부분 들춰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모르는 사이에 그냥 스쳐간 복선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작가가 잘 짜놓은 프레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어리숙한 독자는 그저 읽었을 때 한 번, 읽고 나서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한 번 놀랄 뿐이다. 세계문학전집으로도, 미스터리 시리즈로도,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작품. 엘릭시르가 다음에는 또 어떤 책으로 '미스터리 책장'을 채워줄지 설렌다.
덧) 작품만큼이나 역자 후기도 깨알같이 재미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