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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평점 :
가끔 무작정 끌리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표지가 예쁘다거나, 작가가 매력적이라던가, 그도 아니면 그 책을 접했을 때의 내면상태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한동안 독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기에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어 이 책 저 책 읽다가 던지기를 반복하던 차에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을 만났다. <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좋아했기에 로맹 가리야 전부터 전작을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고, 진 세버그야 <네 멋대로 해라>로 워낙 유명한 여배우라 설명을 덧붙여봤자 사족이리라.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유기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작품은 작품만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작가의 사생활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지라 사실 이 둘이 부부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스물한 살의 진 세버그와 마흔다섯 살의 로맹 가리. 서로 처음 눈을 마주친 몇 초 동안 "말 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한 두 사람,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두 사람. 이 책은 이 두 사람의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다.
나이차만큼이나 자라온 환경도, 살아온 시간도 다른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이미 기혼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비난도 이들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끝은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가 아니다.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라는 책 속의 말처럼 두 사람은 각자의 개성이 강했다. 그랬기에 서로를 상처줄 수밖에 없었고, 격정적인 사랑이 두 사람을 휩쓸고 간 뒤 폐허만 남았을 때도 서로를 떠나지 못했다. 서로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것처럼 끝내 헤어지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죽는 게 삶"이니 말이다.
"함께 산 8년, 갈라섰지만 결코 떨어지지 못한 채 필사적인 애정으로, 운명이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에게 묶인 채 지낸 12년"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 두 사람이 현대사에서 겪은 일도 한 편의 소설(혹은 영화) 같아서 읽는 재미를 더했다. 두 사람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굵직굵직한 사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흑인인권운동과 사회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FBI에게 감시를 당했던 진 세버그, "스물한 살에 이미 성공과 친근해"진 그녀가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차에서 죽은 채 발견될 때까지 그녀는 성공한 여배우였고, 끊임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의 빛이 강했던 만큼 그 그림자도 깊고 어두웠다. 로맹 가리의 삶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유대계, 러시아 출생, 프랑스 이주 등으로 사회적 편견과 내내 맞서야 했다. 군인, 외교관, 작가 등 다양한 직업 속에서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쓰고 또 썼다.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프랑스비평계의 호평을 제외하고)을 얻었지만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또한 녹록치는 않았다.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두 사람을 삶을 담아내기에 너무 짧지 않나 싶다. 하지만 시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은 두 사람의 삶을 단순히 관조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게끔 돕는다. 행간 속에서 독자는 그들과 교류하는 영광을 얻는다. 우연히 만나 시작된 운명. 그것이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결말이 아닐지라도, 아니 그렇지 않기에 두 사람의 삶은 매력적이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셨을 때 그 쓴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하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커피의 향과 맛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책은 그들의 삶을 음미하느라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볼 만한, 멋진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