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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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해야 하는 시대예요. 말하는 본인도 듣는 상대방도 당최 모르겠는 말을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게 다 듣기 교육이 안 돼서 그래요. 잘 듣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냥 자기 얘기만 하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라고요. 오기만 해봐요. 잘 듣기로는 대한민국에서 일 퍼센트 안에 들게 해 줄 테니까.-11쪽

나는 그동안 독자들에게 마음을 연 작가였던가……. 내 가슴에 깊이 박힌 이야기는 꽁꽁 숨겨 두고, 머리로 쥐어짠 이야기를 내놓으며 말로만 떠들지는 않았을까.
독자들에게 가슴을 열지 않은 작가라니.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새로 만난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마음으로 대한다면……. 안 된다. 진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려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닫아 놓고 입으로만 하는 이야기, 그러면 안 된다. -14쪽

"착한 사람만 잔뜩 나오는 동화는 별로예요."
종원이가 영 시원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착한 거하고 순수한 건 다른 거야. 왜? 진짜 나쁜 사람 나오는 동화 들려줄까? 기다려 봐. 그런 이야기도 곧 들려줄 테니까. 착해서 미치겠는 것만 동화인 줄 아니?"
종원이 녀석, 순간 어깨가 움찔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원이도 동화와 동화작가에 대해 오해를 했던 게 분명하다. 동화에는 착하고 의리 있는 아이가 나와야 하고, 그런 이야기를 쓰는 동화작가는 세상 물정에 상관없이 착하고 순진한 아이 같을 거라는 오해. 심한 사람은 동화작가를 두고 '뽀뽀뽀 친구'의 뽀미 언니를 떠올리기도 한다.-35~7쪽

참 이상하지? 근사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가진 게 많아서 듬뿍듬뿍 퍼 주는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건널목 씨를 좋아했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 건널목 씨 한 사람만 더 와서 사는 건데 아리랑아파트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이웃끼리 인사도 더 자연스럽게 했고 더 상냥해졌지.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내가 이걸 해 주면 저 사람도 그걸 해 주겠지? 하는 계산된 친절이나, 나 이 정도로 잘해 주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용 친절도 아닌 그냥 당연하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건널목 씨야. 그런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77쪽

아파트라는 곳이 그래. 커다란 네모 속에 작은 네모들로 가득 찬 것만 같잖아. 그 속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사는 것 같고.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모두 행복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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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식객 - 생명 한 그릇 자연 한 접시
SBS 스페셜 방랑식객 제작팀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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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살면서 기억에 남는 음식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음식이 아니라도 '사연'이 담긴 음식은 누군가를 떠올릴 '힘'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설탕을 솔솔 뿌린 계란 토스트가 그런 존재다.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요리지만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계란 토스트를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에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진다. 여기 그런 따뜻한 마음을 담은, 정성을 담은 요리를 하는 한 사람이 있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면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 집 주위에서 나는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는, 어찌보면 기인 같은 남자, 자연요리연구가 산당 임지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차려주는 따뜻한 한 끼 밥 같은 길 위의 이야기, 『방랑식객』이다.

  열두 살에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며 음식을 다루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했다는 그는 요리에 빠져 들면 들수록 자신이 하고자 하는 요리가 어느 주방에도, 책에도 없는 두 발로 내딛고 선, 길 위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물속에 땅 위에 바람결에 진정한 '맛'이 깃들어 있다는 신념으로 집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해 '자연요리연구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임지호. 단순히 패스트푸드의 반대 의미로의 슬로푸드가 아니라 집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같은 공간 속에 있는 재료를 통해 식탁 위를 채우는 것을 지향하는 그의 요리철학은 자못 충격적이다. 곰취, 우엉, 무 등 익숙한 식재료도 있지만 이끼, 갯벌, 잡초, 갯벌 같은 "못 먹을 걸 가지고 어쩐다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낯선 재료도 많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재료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그들의 인생에 한 켠을 자리하게 될 요리를 정성껏 차려낸다. 요리를 먹게 될 사람의 사연과 몸 상태를 모두 고려한 배려와 애정이 담긴 요리. 그저 한 번 스쳐가는 길 위의 인연이 아니라 한 번을 만난 것이어도 두고두고 떠오를 맛난 만남을 쌓아간다.

  SBS 스페셜을 통해 임지호의 삶이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방송을 접하지 않은 이도 쉽게 그와 친해질 수 있다. 지리산, 신안, 제주도, 백두산, 일본 등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이로 한 번 걸러져 전해지는데도 아릿하면서도 따스하다. 『방랑식객』을 읽으며, 낯선 사람, 낯선 식재료, 낯선 요리와 어느샌가 거리를 둔 것이 내가 만든 편견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들은 늘 밥을 먹기 전에 "이따다끼마스(いただきます)"라는 말을 한다. 무슨 의미가 담긴 것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는데, 한 일본드라마에서 식물, 동물 등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의 의미 즉 그들 덕분에 자신이 살아간다는 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방랑식객』도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자연에 대한 감사,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이웃에 대한 감사, 그 모든 감사가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자꾸 손이 가는, 자연 그대로의 맛과 잘 어우러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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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8-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봤는데 느낌이 참 좋더라고요

이매지 2011-08-10 17:18   좋아요 0 | URL
따뜻한 이야기예요.
저는 방송은 보지 않고 책만 봤는데도 생생하게 다가오더라구요^^

2011-08-11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1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1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1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6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5
아리카와 히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품절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평등했다면 적재적소라는 말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 모두가 평등하게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연수에서 나뉜 맹렬 사원과 요령 좋은 우수 사원. 먼 훗날 어느 쪽이 회사 중역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회사에는 양쪽이 다 필요하다. 그리고 사원들은 자기가 회사에 얼마나 공헌할 수 있는가를 각자의 업무로 주장하면 끝이다. 연기가 능숙한 것도 저돌적으로 직접 부딪치는 것도 능력의 하나다.
여하튼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억지소리로 회사나 비판하는 풋내기 따위는 회사에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이지가 바로 그런 필요 없는 풋내기였다. 도대체 입사한 지 고작 석 달 남짓한 신입사원이 뭘 안다고 회사 운영 방침에 항의할 수 있겠는가. -139~140쪽

젊음, 그리고 자존심이 타협을 하면 끝날 일을 타협 못하게 만든다. 그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발버둥을 쳐보지만, 전보다 나은 곳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일류대학 신규 졸업생은 유유히 몇 군데씩 내정을 받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고, 그 나머지는 대학 수준 순서대로 또 다시 신규 졸업생들이 획득해간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국물이라도 차지하겠다고 다리가 뻐근하도록 헤집고 다닌다. 이력서 몇십 장은 허사가 되고, 좌절해서 또다시 움츠러들어 시간을 낭비한다. 가까스로 회복해서 일어서면 사회는 그 좌절의 시간들을 태만이라 비난하는 것이다.
혹시 그럴 때 세이지가 '신규 졸업생, 절대 사절'이라고 강조하는 문구를 내건 회사를 발견했다면 그곳이 아무리 영세한 기업이었다 해도 뛰어들었을 것이다. 기존 졸업생. 백수 알바. 사회에서 한 번 미끄러지고 학력도 자격도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자기들을 제일 먼저 원해주는 회사가 있다면. -2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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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바닥의 달콤함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1
앨런 브래들리 지음, 성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의 첫 권인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나 스웬슨 시리즈였다. 코지 미스터리로 장르도 같은데다가 제목에 음식명이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열 장도 채 읽기 전에 같은 코지 미스터리일지는 몰라도 한나 스웬슨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작은 마을에서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는 삼십대 미혼녀 한나의 연애담과 살인사건 그리고 특제 레시피가 어우러져 진행된다면 플라비아 들루스 시리즈는 화학 덕후인 십대 소녀의 재기발랄한 모험담에 곁가지로 파이가 곁들여진다. 성격은 전혀 다르다 하여도 오랜만에 읽는 코지 미스터리. <파이 바닥의 달콤함>은 먹는 위치에 따라 맛이 제각각인 파이처럼 페이지마다 제각각 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외모에만 관심을 쏟는 첫째 언니 오필리어와 늘 책에 몰입해 대사를 따라하기 일쑤인 둘째 언니 대프니, 아내가 떠난 후 가족에게 심드렁하지만 우표수집광인 아버지, 어딘가 모자라지만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정원사 도거, 너무나 맛이 없어 아무도 손대지 않는 파이를 만드는 가정부 멀릿 부인. 그리고 이들과 함께 벅쇼 저택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플라비아 들루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뭔가 건수를 찾아 돌아다니고, 운명처럼 만난 화학 공식 속에서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괴짜 소녀 플라비아.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언니에게 립스틱에 독소를 집어넣어 입술이 부풀어오르게 하는 식의 복수로 일상의 무료함과 반항심을 달랜다. 그렇게 별 일 없는 일상을 보내던 플라비아의 집 문앞에서 부리에 우표가 꽂힌 채로 죽어 있는 꼬마도요새가 발견된다. 그냥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인가 싶지만, 새의 시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를 본 아버지는 뭔가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날 밤, 플라비아는 아버지가 서재에서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 다음 날 새벽에는 아버지를 협박한 남자가 오이밭에서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대체 이 정체 모를 남자는 누구인가. 아버지가 그를 죽인 것인가 등 정답을 알 수 없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플라비아는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게 되는데……

  독자와 작가의 두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교한 트릭이 등장하는 정통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코지 미스터리를 읽는 것은 정통 미스터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혹은 정통 미스터리와는 다른 매력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대개 추리소설 하면 먼저 떠올릴 피가 난자하는 현장이라던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번뜩이는 트릭 그리고 그것을 간파해내는 탐정은 코지 미스터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정통 미스터리 속의 주인공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프로'라면 코지 미스터리 속의 주인공들은 '아마추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숙한 면도 보이고, 사건을 해결해가며 실수도 하지만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매력으로 다가온다. 독자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아마추어'기 때문에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플라비아도 그렇다. 화학 실험, 그 중에서도 독극물에 열중하지만 살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화학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그리고 두 언니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행하는 작은 장난 수준이다. 화학을 가장 좋아하지만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플라비아는 그저 자리에서 회색 뇌세포를 이용해 사건을 풀어가는 타입이 아니라 마치 사냥개처럼 여기저기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발랄한 소녀다. 때로는 서슴없이 독설을 날리는 이 앙큼한 소녀가 돋보이는 순간은 역시 그래도 열한 살짜리 꼬마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피해자를 죽였다고 터무니 없는 고백을 하는 장면에서 암만 쎈 척하고 똑똑한 척하는 꼬마지만 역시 아직 애구나 하는 생각에 슬몃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플라비아가 매력적인 이유는 때로는 오싹할 정도로 영리한 아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다운 매력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플라비아가 조금 더 어리바리했더라면 그저 꼬마 소녀의 모험담 정도에서 그쳤을 테고,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뭐 이런 징그러운 애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정 떨어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 미묘한 균형을 잘 맞춰 '이런 사촌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동생일 경우 당할 숱한 복수는 바라지 않는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감 있는 책이지만 플라비아의 좌충우돌 모험을 따라가다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 아직 열한 살이니만큼 앞날이 창창한 플라비아.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는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그리고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오랜만에 만난 앙큼한 소녀탐정, 그녀의 대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아주 딱 미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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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지 미스터리 친곤 500페이지면 상당히 두껍네요.저도 한나 스웬슨 시리즈를 9권(뭐 한권사면 수집벽상 멈출수가 없네용ㅜ.ㅜ)를 갖고 있지만 읽을때 마다 2%로 부족하단 생각을 갔는데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시리즈는 과연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이매지님의 리뷰를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이매지 2011-08-09 22:59   좋아요 0 | URL
한나 스웨슨 시리즈는 전 당췌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ㅠㅠ
한나 시리즈가 뒤로 갈수록 연애담에 무게가 쏠리는데 반해서(어느 순간 그 맛에 읽게 되더군요)
이 꼬맹이는 탐정 놀이를 제대로 해요 ㅎㅎ
귀여운 꼬마 탐정이니 한번 만나보셔요~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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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고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 하고 발음하면 '그것……' 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너비. 가끔은 그게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11쪽

살면서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매는 해답은 때로 전혀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 어느 때는 문제 자체가 정답과는 별 상관 없는 맥락에서 출제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29~30쪽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라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중 열일곱을 넘긴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내가 보기에 기적은 내 눈앞의 두 분,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였다.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47쪽

책은 내게 밤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이자,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선생님, 그리고 비밀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파 자주 나가놀 수 없었던 나는 세계의 온갖 저자들과 함께 스포츠를 즐겼다. 나는 플로베르가 공격수로 나서고 호메로스가 미드필드를, 셰익스피어가 골대를 맡은 가상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나는 플라톤이 포수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투수로 나선 스타디움에서 야구를 했다. 경기장의 풍경은 대략 이랬다. 플라톤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면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러면 곧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변화구가 고대로부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나는 내 키보다 큰 방망이를 멍청하게 휘두르며 헛스윙을 했다. -51~2쪽

물론 철학서는 꽤 어렵고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데가 수두룩하지만, 나는 그걸 우아하고 긴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당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언젠가 내게 제 발로 걸어와 '나야……'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터였다. 마치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나중에야 도착하듯 말이다. 시인들과의 테니스, 극작가들과의 바둑, 과학자들과의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하지 않고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52쪽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그건 단순히 피로나 권력, 또는 타락의 냄새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그 입구에 서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번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이었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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