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식객 - 생명 한 그릇 자연 한 접시
SBS 스페셜 방랑식객 제작팀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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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헥 길 위에서 온몸으로 뒹굴던 젊은 날의 치기가 음식에 대해 새로이 눈뜨게 해주었다. 진정한 '맛'은 물속에 땅 위에 바람결에 깃들어 있었다. 우리 땅, 우리 물에서 나는 재료들만 가지고 얼마든지 이 세상 최고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어느 일류 레스토랑의 주방이 아니라 길이, 자연이 곧 나의 스승이었다. -6~7쪽

요리란 물, 바람, 불, 빛을 담은 우주의 재료에 영혼을 보태는 작업이다. 그 긴 시간과 광활한 공간 속에서 무르익어가는 삶이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 나의 요리였으며, 그것은 곧 자연 그 자체였다. -9쪽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다. 이름 모를 풀들도 다 존재 이유가 있다. 척박한 산골마을 주변에 피어 있는 이 풀들은 모두 산골마을 사람들을 위한 보양식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기에 다름 아닌 그곳에 피어 있는 것이다. -22쪽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위해 작은 지게를 맞춰주셨다. 그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고 약초도 캤다. 산에 있는 게 좋아서 나무하러 간다고 하고서 이 산 저 산 돌아다녔다. 산에 있으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겐 숲속이 놀이터이자 침대였다. 요즘도 생활에 지쳐 맥이 빠질 때 산에 오르면 힘이 솟는다. 방전된 힘이 충전되고 다시 아이처럼 생기발랄해진다. 그게 산, 자연이 주는 에너지다. 그렇게 산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나면, 그 좋은 기운을 마음에 실어와 다시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주곤 한다. 그러면 그이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어도 그 기운을 그대로 먹을 수 있다. 나는 자연을 옮겨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64~5쪽

나는 만나는 분들에게 평소 어떤 음식들을 주로 해 드시는지를 묻곤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늘 해오던 모습 속에 우리네 음식의 본류가 있고,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레시피와 재료를 내 방식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 재미나다. -93쪽

기분에 의해, 몸의 상태에 따라 혀로 느끼는 맛은 기복이 심하다. 혀에 의존하지 않고 냄새와 색, 질감과 같은 다른 감각으로 맛을 보는 것 또한 훈련이다. 몰입할수록 맛보지 않고도 제 맛에 근접해간다. 수행하듯이 맛있다, 맛있다는 생각을 심으면 그 생각이 음식에 녹아든다. -95쪽

음식의 맛은 재료를 섞을수록 복잡해지는 게 아니라 단순해지는 것이 좋다. 그러려면 주재료를 다른 요리들에 두루 쓰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문어를 먹을 때도 문어에서 나온 소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양념도 단순한 게 좋다. 그래야 각 재료의 맛을 자연스럽게 살릴 수 있다. 그게 자연식을 즐기는 방법이다. 양념이 뒤범벅되거나 너무 세면 재료의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양념의 맛으로 먹게 된다. -120~1쪽

어릴 적 마을 뒷산에 나무하고 약초 캐러 다녔을 때는 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생각보다는 먹을 수 있나 없나, 효과가 있나 없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후 전국 각지를 방랑하며 얻은 깨달음은, 자연이 열려 있는 것처럼 재료의 쓰임도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일기가 변하듯 바람의 성질, 흙의 성질에 따라 자연의 재료를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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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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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푹푹 찌는 여름, 지쳐서 침대에 누워서 무슨 책을 읽을까 하고 가만가만 눈으로 책장을 훑다가 눈에 들어온 한 권의 책. 바로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이었다. 더이상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김승옥. 하지만 어디서 국문과 나왔노라고 얘기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그의 작품을 '자발적으로'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작품의 기억 때문인지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 등을 그린 작가라고 나도 모르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표제작인 <내가 훔친 여름>의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나의 그런 선입견은 산산이 부서졌다.

  표제작인 <내가 훔친 여름>은 어느 날 두꺼비 같이 생긴 한 청년(장영일)이 주인공(이창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울대 뱃지를 달고 나타난 영일은 절에서 '고신가 지랄인가'를 준비하다가 놀러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창수는 자신 앞에 나타난 영일이 자신이 어린 시절 알던 그 영일이가 맞는지 영 의심쩍다. 하지만 "마치 뚱뚱보는 다른 뚱뚱보에게, 포마드는 다른 포마드에게, 철모는 다른 철모에게, 개는 개에게 친밀감을 느끼듯" 서울대생인 창수는 서울대 뱃지를 한 영일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낀다.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영일에 대해 창수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가져갈 것도 없기에 영일의 구라를 즐기다 결국 그와 함께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나게 된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여행. 여행의 시작과 함께 영일과 창수의 소소한 사기극 또한 시작된다.

  <내가 훔친 여름>이 유쾌한(하지만 날카로운) 청춘소설이라면 <60년대식>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아내와 이혼을 암묵적으로 약속한 주인공(도인)이 유서를 쓰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의 짐을 하나씩 정리한다. 하지만 신문사에 간곡히 자신의 유서를 게재해줄 것으로 요청했지만 그것이 묵살되자 자신의 죽음이 흔해빠진 염세 자살로 취급돼버릴 것만 같아 선뜻 자살을 감행하지 못한다. 다음 날까지 일단 자살을 유예하고 수첩을 뒤적이다 잊고 지냈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는 도인. 하숙집 주인 딸인 돌싱 애경양을 임신시키고는 냅다 도망쳐버렸던 기억이 떠오른 도인은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기 위해 애경양을 찾아 길을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도인은 애정양이 결혼상담소에서 맞선녀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 날, 도인의 마지막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내가 훔친 여름>(1967)과 <60년대식>(1968) 두 작품은 모두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2011년인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시대를 초월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내가 훔친 여름>에서 만난 '재기발랄함'이었다. 미워할 수 없는 두 청년의 사기행각(?)을 읽다보면 그들이 속이는 것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지, 아니면 서울대 뱃지로 상징되는 '간판'에 현혹되는 소설 밖의 독자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오늘날 잊을만 하면 신문을 장식하는 학력위조, 학력사기 같은 사건과 창수의 영일이 카바레 장식을 해주겠노라며 강동우에게 얹혀 지내는 모습은 거기서 무엇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만 다를 뿐 사실 사기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지방 유지인 강동우네 일가가 서울대생으로 상징되는 지식인(하지만 그 또한 사기)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은 킥킥 웃게 하다가도 슬몃 가슴 한 켠을 쿡쿡 찌르고 들어온다.

  <내가 훔친 여름>이 다소 에둘러 뜨끔하게 했다면 <60년대식>은 조금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촌철살인을 날린다. 도인(道仁)이라고 한자가 병기되어 있지만 어딘가 도인(道人) 같은 주인공 도인은 "본인의 죽음이 작으나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같은 얼토당토한 내용의 유서를 신문사에 보내고, 유서가 신문에 실리지 않자 어떤 죄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침 생각이 났으니 용서나 빌어보겠다며 총각딱지를 떼어준 애경양을 찾으러 나선다. 그렇게 만난 애경양은 "제가 맡은 역은 돈 많고 가정적이고 젊은 과부 역이거든요. 호호호, 왜 그렇게 어리둥절해하세요? 남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닌가요?"라며 "필요 이상으로 용서를 구하려 한다는 건 죄악에 속하는 것일 거예요. 전 요즘 행복해요. 제 직업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있고, 그러니 도인씨는 저로부터 용서받은 게 아니겠어요?" 하고 우문현답을 한다.

  애경양과의 사건 외에도 자살을 유보한 하루 도인은 여기저기 발길 닿는 데로 떠돌며 짧은 시간 동안 온갖 군상을 만난다. 누군가는 도인에게 "식료품을 공업용 색소를 넣어 만들어 판다고 야단이지요? 난 그런 놈이 많니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놈이 있어야 소비자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단결합니다. 무장간첩? 얼마든지 오라지요. 그놈들 덕택에 국민의 단결심은 더욱 강해지지. 사기꾼? 얼마든지 있어도 좋습니다. 한번 사기를 당해봐야만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데 영리해지는 법이거든. 살인강도? 좋아요, 경찰 기술이 발달됩니다. 어떤 미련한 친구가 한탄하더군. 요즘은 살인하는 수법도 끔찍해졌다고 말야. 하지만 그것이 바로 좋은 징조란 걸 모르는 멍텅구리가 하는 소리지. 요컨대 먹겠다는 놈과 먹히지 않겠다는 놈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거요. 먹겠다는 놈이 극악스러우면 극악스러울수록 먹히지 않으려는 놈도 극악스러워지는 거지. 그걸 알아야 해요"라고 자뭇 인생의 선배처럼 충고한다. 도인이 사표 낸 학교의 교장은 "우리 이런 내기 하나 합시다. 십 년 후에 말야, 누가 더 재벌이 돼 있나 말야. 어떻소?" 하며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재벌'이라며 도인에게 내기를 건다. 도인이 만난 다양한 사람을 통해 김승옥은 돈에 대해, 정숙에 대해, 사랑에 대해 비꼬듯이 비난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에게서 제가 느낀 바로는, 형은 많은 지식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교양도 있어 보이고 선량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뭐랄까요, 정열은 없는 사람 같습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저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결국 무엇보다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정열을 잃은 도인(혹은 독자)이라고 한다. 김승옥은 이렇게 "과도한 정열"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아닌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비판소설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한바탕 웃고 넘길 수 있는 청춘명랑소설. 3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60년대식'인 한국사회를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60년대식'에서 나아가지 못한 우리를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책을 놓은 뒤에도 망설여진다. 하지만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한국문학사에 있어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있었음에, 그리고 그가 남긴 <내가 훔친 여름>을 함께 훔칠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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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 썸 - 내세에서 찾은 40가지 삶의 독한 비밀들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절판


내세에서 당신은 지상에서 겪은 모든 일을 다시 한번 겪는다. 단 이번에는 순서가 새롭게 정렬된다. 같은 종류의 경험이 한데 묶이는 것이다.
집 앞에서 운전만 하며 2개월을 보낸 다음, 섹스만 하면서 7개월을 보낸다. 한 번도 깨지 않고 30년 동안 내리 잠만 자고 일어나서 5개월 동안 변기에 앉아 잡지를 뒤적인다. -13쪽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기억하는 이들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번 스쳐갔던 여자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동급생 대부분은 함께 이곳에 있다. 옛 연인들도 당연히 있다. 당신의 부모, 사촌, 오랜 세월에 걸쳐 사귀었던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다. 상사와 할머니, 점심시간에 음식을 날라준 웨이트리스 들도 있다. 데이트를 했거나, 거의 데이트를 할 뻔했거나,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사람도 모두 이곳에 있다. 평생토록 당신이 엮어온 수많은 인간관계를 즐기면서 그동안 놓치거나 소원해진 관계를 새롭게 다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23쪽

당신네 지구인이 가장 시끄럽고 불만이 많은 종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 예측에 따르면, 당신들이 사용하는 전쟁 무기는 갈수록 요란해질 거예요. 우주탐사 프로그램으로 엄청난 굉음을 내는 우주선을 만들어서 우주를 누비고 다닐 거고요. 로켓의 추진 소음은 귀가 먹을 정도로 심각하죠. 당신네 지구인은, 탐험가 코르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태평양의 모든 해안을 누비고 다니며 소란을 피울 궁리나 하는 족속이죠. -33~4쪽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아가는 다른 창조물과 달리 인간은 마음을 쓰고 추구하고 그리워하고 죄를 범하고 갈망하고 고통을 느꼈다. 마치 그들을 만든 신처럼. -42쪽

자신들이 이룬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 생명체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우리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들은 그 질문의 해답을 직접 찾는 대신 그 대답을 찾아줄 슈퍼컴퓨터를 설계하기로 했다. 그리고 수대에 걸쳐서 엄청난 노동력을 그 작업에 쏟아부었다.
우리 인간은 바로 그들이 만든 컴퓨터이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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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모노레일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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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의 소설의 맛은 '장난스러움'에 있다. 표지뿐만 아니라 본문 곳곳에 들어간 그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면 역시 김중혁은 '재간둥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 인터뷰에서 <미스터 모노레일>은 좌석버스 맨 뒷좌석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며 쓴, 자신이 즐겁기 위해 쓴 작품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읽는 내내 정말 작가가 즐기며 썼구나 하는 게 느껴져 읽는 나도 무작정 즐기며 읽었다.

  <미스터 모노레일>은 하나의 이야기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안과 밖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점은 '헬로, 모노레일'이라는 주인공 모노가 만들어 대박친 게임을 매개로 동그랗게 이어진다. 어린 시절부터 게임에 익숙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모노가 일주일 동안 방에 콕 쳐박혀 실제로 한 번도 가본 적 없은 유럽을 배경으로 만든 보드게임 '헬로, 모노레일'. "제한된 환경 속에서 누가 오랫동안 살아남는가를 겨루는" 이 게임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모노를 돈방석 위에 앉힌다. 그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헬로, 모노레일'의 업그레이드판을 만들기 위해 이번엔 유럽으로 직접 떠난 모노. 하지만 그 사이를 틈타 모노의 동업자인 고우창의 아버지가 5억을 들고 사라진다. 책임감이 강한 고우창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찾고 5억도 되찾으려 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좇던 고우창은 아버지가 볼교(ball敎)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를 좇아 볼교의 본부가 있는 벨기에로 떠난다. 마치 '헬로, 모노레일'의 캐릭터 블루(형사), 화이트(소설가), 레드(농부), 블랙(은행강도), 핑크(미용사)를 연상케 하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유럽에 하나둘 모여 유럽을 배경으로 일생 일대의 모험을 시작한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보드게임 위에 놓인 말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숫자가 매번 바뀌듯이, 어떤 때는 생각보다 버스가 일찍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악천후로 연착되기도 하는 인생. 작은 것에 만족하고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꼬일대로 꼬여서 자포자기하고 싶게 만드는 일상도 있다. 이런 인생에 대해 <미스터 모노레일>은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뭐 아무렴 어때, 하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힘을 준다. 뭐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다 있지 싶다가도 이런 얘기가 없으리라는 법도 없잖아 하고 어느새 볼스 무브먼트, 특별기동검표반, 동네 디자이너 등의 이야기를 믿게 되버린다. 뭐 그렇게 심각하냐고 어깨에 힘 좀 풀고 그냥 즐기는 것도 좋지 않냐고 나를 무장해제시킨 김중혁. "어떤 숫자가 나오든 상관없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라는 표지문구처럼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상관없다. 삼천포로 빠져도 상관없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숨바꼭질하듯, 술래잡기하듯 책 속의 주인공들과 한바탕 잘 뛰어놀았다.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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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매드 픽션 클럽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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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는 비, 거세게 부는 바람, 태풍은 그것을 접한 사람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가 쏟아지던 날 읽으면 더 실감났었을 이야기, 미치오 슈스케의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이다. 원제는 <용신의 비>지만 한국어판은 그보다 더 시적이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라 과연 어떤 작품부터 읽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그중에 가장 '무난'하다는 평을 받은 이 작품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미치오 슈스케란 작가의 성향을 파악하기에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해 엄마를 잃은 렌과 가에다. 새아버지가 일은 하지 않고 빈둥대는데다가 폭력을 일삼고, 동생 가에다를 성추행까지 해서 렌은 새아버지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한편, 아빠를 병으로 잃고 새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다쓰야와 게이스케 형제. 다쓰야는 사실은 새엄마가 엄마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였다고 생각하며 늘 새엄마를 괴롭히고, 그런 형과 새엄마 사이에서 동생 케이스케는 우왕좌왕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모와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는 이들의 운명은 어느 비오는 날 얽히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의 가정 환경 때문인지 어딘가 사회파 추리소설 같은 느낌도 들면서 긴장감 있는 전개가 돋보였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부모에 대해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살인사건에 얽히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지만 그 속에 잔가지들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반전처럼 등장하는 이야기가 다소 뜸금없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의외의 결말이 이어지는 데에는 가벼운 충격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설정 때문에 맥이 빠지는 듯했다. 비 갠 후의 하늘이 더 맑은 것처럼 고생 끝에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이들이 살아갈 날들은 더 맑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미치오 슈스케.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는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일단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들어 많은 작품이 번역되고 있는 작가니만큼 앞으로 만나게 될 작품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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