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2003년 2월
절판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내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신을 좋아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말의 의미가 처음에 입 밖에 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원한다는 걸 예고한 것이다. 내가 그러길 바라는지도 물어보지도 않고.-17쪽

나는 변하지 않아, 라고 아사코는 말한다. 단지 세이이치하고 있는 자신을 좋아할 뿐이라고.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잘 보인다고. 그리고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건 그가 처음이라고. 그렇군,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 역내의 매점에 놓인 껌과 같은 존재가 아닌 것이다.-68쪽

도대체 사랑은 왜 나를 변온동물로 만드는 걸까? 정답은 나와 있지 않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어. 정상 체온으로 돌아온 지금은 이해가 안 가지만, 한참 좋아한다고 느낄 때는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 범이지. 억지로 참고 있으면 상처를 입게 된다. 그렇다면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뜨거워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것들은 전부 정열적인 사랑과는 무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정열적인 연애 상대였던 사람이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냉담하게 만들고 있다. -99쪽

나도 그와 헤어지면 혼자가 됩니다. 예전에는 그런 상황을 생각하며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외로이 맞게 될 미래를 상상하면서 한탄하게 되고, 그러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고 행복해했습니다. 혼자가 아닐 때 혼자라고 생각하는 건 매우 달콤한 슬픔입니다-101쪽

누군가를 항상 걱정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로군. 타인에 대한 사소한 배려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니까. 그는 그런 생각에 푹 빠져들어 감사기도를 올리고 싶어진다. 자신이 배려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사랑은, 원한다. 하지만 사랑과 배려가 하나가 되어 자신에게 베풀어지면 그는 뒷걸음질치고 싶어진다. 공포를 느낀다고 해도 좋다. 자신이 엄청난 힘에 침식당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자신도 누군가를 침식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은 영향력을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161~2쪽

점점 재미있어졌다. 인생이란 처음부터 엉망진창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기가 쉬워진다. 사람은 엉망이 된 인생을 이야기 속에서만 즐기지만 사실은 나도 바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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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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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총 5가지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평범하지 않을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근친상간이나 불륜, 짝사랑 등의 소재부터 영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읽으면서도 그다지 좋은 기분을 가지기 힘들었다. 5개의 이야기중에서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샴푸>라는 제목의 이야기였고, 가장 기분이 나빴던 이야기는 <피에스타>라는 제목의 이야기였다.

 <메뉴>에서는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오빠와 동생의 근친상간을 오빠로 나오는 도키노리가 자신의 근친 상간을 왠지 어머니의 죽음과 연결지어서, 마치 자신은 어머니의 죽음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같지만 실은 그로인하여 상처를 받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 왠지 호감이 가지 않았던 캐릭터였다. 도키노리의 영향을 받은 동생인 세이코(친동생은 아니지만)의 행동들도 도키노리의 행동을 그저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체온재기>에서는 불륜의 상대의 아버지와 그의 애인(요시즈미 부인)을 만나는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죽음을 숨겨놓고 있었다는 요시즈미 부인의 말이 왠지 모르게 호소력있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인공인 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좀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피에스타>에서는 짝사랑하던 남자가 있는 추녀의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욕망'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욕망이 화자이기때문인지 몰라도 이 이야기가 가장 껄끄러웠다. 주인인 추녀에 대한 비하뿐만 아니라 욕망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나타내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물론, 추녀가 화자가 되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보다는 좀 더 직설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강점이 있지만, 읽는 난 그다지 유쾌하게 읽혀지지 않았으니...

 <공주님>에서는 가진 것도 개뿔없으면서 공주인 척 도도함만 가지고 있는 노숙자 히메코와 우연히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하인처럼 행동하는 어리숙한 마슈가 등장한다. 마슈를 사사건건 무시하면서 그를 통해서 자신의 내부에서 비어진 크로스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는 히메코의 모습은 '얜 대체 뭐야?'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물론, 그것이 메코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로 인하여 히메코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여튼 후에 마슈가 사랑이었음을 알고 마슈를 찾아가다가 지하철에서 사고로 죽고 마는 히메코의 모습에서 만약에 마슈와 다시 만나게 됐다면 둘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둘은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됐지만...

 <샴푸>는 어찌보면 요시모토 바나나적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바나나 특유의 멜랑꼴리함은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소라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소라뿐만 아니라 소라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야기와 얽혀서 보여지고 있다. 건물의 창문을 닦는 일을 하는 소라의 아버지의 애인으로부터 사고가 나서 병원이라는 소리에 함께 걱정하며 병원으로 달려가는 소라와 그의 남자친구. 그리고 창문을 닦다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음을 알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쁨의 만세를 부르는 소라의 남자친구의 일들은 왠지 모르게 풋풋함을 주었다.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은 처음 접해보는 것이라서 흥미반, 기대반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그다지 매력적인 존재는 아닌 것 같다. 한 작품만 접해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으니, 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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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악셀 하케 지음, 조원규 옮김, 토마스 마테우스 뮐러 그림 / 북라인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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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한가운데서 손가락을 치켜들거나 손을 흔들면서 웨이터의 눈길을 기다릴 때의 그 느낌은 정말 싫다. 소리 없는 회전목마처럼 한참만에 한 번씩 주위를 둘러보고 가는 그 눈길 말이다. 나를 바라보기 직전에 웨이터는 눈이 멀어 버리는 모양이다. 일 초 동안 아주 깜깜절벽이 된다. 그 눈길은 나를 보지 못한 채 스쳐가고, 그런 다음에 웨이터는 마술처럼 눈에 덮여 있던 콩꺼풀이 떨어져 나간다. 그의 눈은 다시 주의 깊어지고, 누군가 불과 일 초 동안 치켜든 턱의 움직임이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만한 눈짓 하나에도 바삐 달려간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내가 유리로 만들어 진것도 아닌데!-100쪽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일은 지겹다. 당신이 어딘가 가고 싶어하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도 당신과 똑같은 곳에 가고 싶어하면, 당신은 할 수 없이 줄을 서게 된다. 뱀처럼 긴 줄이다. 당신은 줄 맨 끝에, 즉 참기 어려운 일이짐나 뱀의 꼬리 부근에 선다.-106쪽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유년의 꿈을 이루어야만 할까? 아니면 그 꿈을 그냥 간직해야 할까? 꿈을 간직했던 때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면 어쩌지? 옛 시절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너는 카누는 가졌지만 꿈은 잃어버리는 거야.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거지-123쪽

그를 보는 것은 습관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창가로 가서 그를 살폈다. 습관이란 원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어제의 일이 오늘도 이어지고 내일도 그러하리라. 이런 것이 인생에 따라붙는 불안을 가시게 해준다. -126쪽

아마도 그는 죽고만 것이리라. 그는 시간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제 그와 내가 공유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같은 리듬으로 똑딱거리는 벽시계들마저 이제 우리를 연결하지 않는 것이다-127쪽

우리는 사소한 일들로 자신을 괴롭힌다. 그런 사소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고달픔을 덜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는 식당에 가면 우선 방대한 음식 리스트가 적힌 메뉴판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진다. 수많은 텔레비젼 채널들, 쏟아져 나오는 여행 안내 책자, 수백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넘쳐나는 서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산더미 같은 건초 더미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의지력이 없는 배고픈 당나귀 꼴인 것이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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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악셀 하케 지음, 조원규 옮김, 토마스 마테우스 뮐러 그림 / 북라인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며칠 전에 읽은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와 비슷한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에 대해 조심스레 얘기하지만 그 일상이라는게 때로는 공감을 얻어내고, 때로는 흥미롭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쪽이 좀 더 유머의 강도가 쎄다는 느낌이...

 주인공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냉장고에게 반복되는 일상을 투덜대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책 속에서는 주인공인 하케와 그의 아내 파올라, 그리고 그의 아들 루이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아들 루이스는 그리 전면적으로 부각되지 않고, 이야기는 주로 하케의 이야기나 파올라와의 대화가 주가 된다. 하케와 파올라가 말싸움을 하는 부분은 키득키득 웃을 수 있게 해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비단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비행기에 대한 공포나 밤 기차에 대한 공포, 그리고 모기를 비롯한 각종 벌레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도 퍽 흥미로웠다.

 여하튼 이 책도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처럼 키득거리면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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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품절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69쪽

"...좀 있다가 할어버지 집까지 모셔다 드릴 사람은 있나요?" "인샬라. 누군가 분명 있을 게다. 난 신을 믿는다."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 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172쪽

"...약속해주겠지?" "약속해요." "카이렘?" "카이렘." 카이렘, 유태어로 '당신에게 맹세한다'란 뜻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203쪽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거의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닌 듯 느껴질 때처럼,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이제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227쪽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이건 아닌데, 생이 이런 건 아닌데,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사람들은 말없이 하나둘 줄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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