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역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좋아하는 분야라고 손 번쩍 들어 편협한 독서취향 강조 말고. 문학은 역사를, 역사는 문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뛰어넘으려는 존재여야 할까. SF문학도 결국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 대다수의 문학이 역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사실 아닌가. 역사는 과거가 될 현재의 기록이고 문학은 흔히 말하듯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을 그리는 (예술)학문의 일종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문학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이고, 역사는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거나 기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르다면 섭섭하다. 닮았다고 갈등이 없는 게 아니듯 문학과 역사는 필연적으로 얽혔으니, 이 (제발트) 논쟁은 새삼스럽지 않다. 랑케와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처럼 문학이 (거대하게) 역사의 일부이거나 전부 또는 전혀 다르다고 하더라도 틀린 건 아니다. 물론 제발트가 (독일)문학이 역사 앞에 침묵했다고 말한 것 역시 일리가 있다. 일반론적인 문학과 역사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을 골자로 한 유럽, 더 좁혀 독일이라는 무대에 국한된 주장이라고 해도 받아들여진다. 전세계는 이 논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2012년 선거를 해놓고 (무의식적으로) 1970년대로 돌아가 사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럴 리도 없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3,4공화국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제대로된 문학이 나오겠는가. 나온다고 해도 온전하겠는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걸로 진정 괜찮겠는가.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p.183)
방에 앉아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한 채로, 거리로 바다로 하늘로 지구 반대편으로 우주로 은하계로, 여기 아닌 저곳에만 눈길이 멎던 날들, 땅에 발붙이기보다 구름에 실린 듯 꿈꾸고 느끼던 날들, 나는 대다수의 비물질적인 것에 남달리 애착이 강하고 욕심이 많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서가 남다른 걸로 잘 살아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즈음 나는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며 줄 위에 선 곡예사마냥 위태위태했으리라. 알게 모르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이해 안되는 행동과 말로 나를 타당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확신과 자기신념이 강한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위험에 사로잡혀 어떤 날에는 조금만 옅어졌으면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 현재와 꿈의 괴리가 큰 만큼 사람은 불행하다. 세포를 건드리는 황홀하거나 위험한 순간, 절묘한 진실의 상실, 선택지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불쑥 솟아오르는 위화감을 몸소 느낄 때만큼 서늘한 순간이 있을까. 전율할만치 섬뜩하고 잔혹했던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더 많이 읽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사유의 확장과 근사한 리뷰를 선사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침묵했다. 무엇으로도 채우거나 덮을 수 없는 더위 끝의 냉소와 불시착. 나는 여름 내내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책 곁에서 책을 뒤로한 채 더위와 화해하고 한 살 더 먹었다.
실제와 평가, 현실과 기록 사이의 미묘한 어조를 예리하게 써내려간 작가는 제발트, 그는 북극곰을 지켜주기 위해 틀지 못했던 에어컨 때문에 더 유난하고 별스러워진 여름에도 장엄과 숭고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다. 서늘하고 고결하고 견고하게 샘솟는 문장은 도시와 거리가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조차 아름답게 그린다. 유연하고 적확한 문체, 눈에 보이듯 생생한 거리,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력 등 그를 찬탄할 만한 요소는 많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저 멀리 잿빛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듯 눈앞에서 사라진다. 진실이 꿈 같고 비판이 애정 같고 잡힐 듯하다가 달아나는 글. 손택이 사진을 보고 그랬듯, 실제로 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의 글을 따라가면 텅 빈 거리에 세운 하나의 도시가 완성된다. 망각된 역사 아니, 역사가 망각된 사실 그리고 역사가 망각된 사실의 '고착'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도시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세심함과 예민함 덕에 '제발트 논쟁'이라 불리는 취리히 대학 강연의 고상한 논점에 다가설 수 있었다. 성급하고 변덕스러웠으나 이제는 더없이 신중하고 솔직해진 갈증. 해소는 각자의 몫이다.
당장 이름을 두 개쯤 댈 수 없다고는 해도 제발트가 문학과 역사, 실체와 기억, 폭로와 침묵 사이에서 고민한 첫 번째 작가는 아닐 것이다. 작가와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늘 시대의 고발과 존재의 엄숙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걸 안다. 내 지난 여름은 독일의 파편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위대한 문학의 탄생을 갈망하고 또 쌓아온 모든 지식과 감정을 지우고 짓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이민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민을 갈 수도 없고 전쟁의 아픔을 배우기 위해 전쟁을 도발할 수도 없다. 겪지 못한 자들은 결국 책과 매체를 통해 간접적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누군가의 모든 상처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독일은 괴테, 토마스 만, 츠바이크, 슐링크, 제발트를 통해 언뜻 엿본 세계가 전부다. 모두 소설가이고, 역사책을 비롯해 전기나 평전 한 권 읽지 않았으니 소설가가 압축해놓거나 새로 그린 세계를 통해 독일을 배운 게 다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거쳐만 갔던 기억에 비추어도 그 도시와 나라에 대한 뿌리깊은 상처 때문에 오히려 문학에 대한 취향이 제약받을 정도다. 이 협소한 세계에 베른의 기적, 타인의 삶, 쉰들러 리스트, 굿바이 레닌, 몰락 등의 입때껏 봐온 독일영화 몇 편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그간 생성된 독일에 대한 지식, 사유, 느낌이 변할 정도는 아니다. 유대인, 나치,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으로 굳혀진 독일 역사 때문인지 제발트의 문학이 그가 드러낸 사건이나 배경보다 문체나 느낌으로 읽히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가지고 가야 할 기억과 현실 사이의 어떤 괴리, 단호함과 절제 사이 어디쯤에서 실낱같은 끈을 붙잡고 매달리는 이들의 삶에 매혹된다. 훗날, 어느 젊은 날 불볕 더위 아래 아는 게 적어 느낌도 빈약했던 독서를 체화하거나 수정할 날도 오리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아우스터리츠]의 절반을 독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읽던 기억으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으나 2001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면서 기회를 놓쳐버린, 더이상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 없을까, 이미 주어진 글이 흔적 전부일까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제발트의 소설 옆에.
헨리 썰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네 명의 이민자들이 나오는 단편집 [이민자들]은 소설이라기보다 체험수기처럼 다가온다. 네 사람의 사연인데도 하나의 긴 옛날 얘기 같다. 이민의 삶이 가진 다양한 형태와 모습, 고통과 방황, 슬픔과 애처로움이 한데 스며들어 자살이라는 결말로 치닫는 동안 너무도 담담하고 적막해서 암담한 기분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은 외부로부터 발생한 모두 아는 유명한 사건으로 인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고향이나 터전, 가족을 잃게 된 그들의 상처에 닿는다. 속단과 오해, 단절과 애수, 절망과 기억이 타오른다. 이들이 살아있는 이유 그리고 용기가 탕하고 울리는 총소리에 발맞추어 출발한 자들에게나 찾아오는 황홀한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운명이 질기디 질긴 애착과 만났을 때 낼 수 있는 비명과 통증이 여전히 문장 사이를 뛰어다니고 종이 바깥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카지미르 외삼촌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어둠의 경계야. 실제로 우리 뒤의 육지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했고,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한줄의 모래띠만이 물의 황무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I often come out here(여기 자주 온단다).' 외삼촌이 말했다. 'It makes me feel that I am a long away, though I never quite know from where(여기 오면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어디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외삼촌은 큰 바둑판무늬의 외투에서 사진기를 꺼내 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민자들, pp.112-113)
그리고 제발트 이전을 살았던 츠바이크는 또 어떤가 하면, 같은 아픔을 가진 상처에서 쓰고 또 쓰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끝장낸다. 이런 가여운 사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독한 사람일까 가여운 사람일까. 하지만 죽음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말에나 남한, 북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 바다 속으로 뛰어든 [광장]의 이명훈과 충성을 다하고도 버림받은 소년이 투항 대신 기꺼이 죽음의 열차에 올라타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류환처럼 말이다. 츠바이크의 삶이 어떠했든 그의 작품은 사랑과 이별, 남녀 관계의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그린다. [체스 이야기]에서는 유독 제발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지만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다. 1800년대의 유대인과 1900년대의 유대인이 같지 않을지라도 두 작가가 공유해온 유럽의 전쟁, 유대인, 이민자에 대한 감상은 비슷했던 걸로 보인다.
교묘하고 영리해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란 걸 차치하고도 완전한 소설적 구성, 짜임새, 소재, 주제에 감탄하게 된다. 고도의 체스게임 안에 불안, 고립, 상처, 고통, 절망을 겪은 사내의 과거를 녹여내 복잡하고 유기적인 경험과 기억의 관계를 나치의 억압과 광기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한다. 체스판의 말이 된 듯한 남자, 체스로 인해 이미 다 살아버린 남자, 이야기 안팎에 존재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자 의지의 산물인 체스는 주어인 동시에 목적어, 목적어인 동시에 동사로 기능한다. 무에서도 혼란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이승의 연옥쯤 되는 셈인가. 여느 게임이 그렇듯 치고 빠지고 밀고 당기는 전략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체스가 고난과 고비를 넘어 마침내 도달하리라 여겨지는 인생 여정과 닮았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각각 완전한 진공상태, 즉 외부세계로부터 애매모호하게 폐쇄된 각 방에 가둠으로써 채찍과 추위로 인해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도처에 그리고 끊임없이 한 사람 주위에 무만 있었을 뿐입니다. 완전히 무공간적, 무시간적 공허였지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에 따라 생각들도 이리저리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나 생각 자체는 사실 생각이 그렇게 실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생각은 맴돌며 무의미하게 자전하기 시작하거든요. 생각도 무를 견디지 못합니다. (체스 이야기, 중에서)
불행해보이는 부모님, 자기 상처 안에 갇혀 술로 세월을 사는 아버지와 나름의 상처를 가졌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채로 아버지를 지키는 어머니.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 상처를 모조리 알게 된 소년이 묻는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지키셨어요, 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도 젊었을 때 얼마 동안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할 수도 있고, 이 사람과 살거나 저 사람과 살 수도 있지. 그러나 어느 날 너의 행동과 그 사람이 네 인생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때 가서 왜 너는 네 인생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질문이다.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36)
그리고 이렇게 떠난 여자도 있다.
마침내 그녀는 그를 떠났다. "나는 네 머리와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그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서 그의 가슴을 툭툭 쳤다. "이 안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내겐 너무 좁아."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41)
작품 '할례'를 추가해 복원한 슐링크의 작품집 [사랑의 도피]에서 '다른 남자'는 기시감이 짙다. 모든 소설이 미시감으로 읽히는 반기억력의 소유자에게 읽지 않은 작품에의 기시감이라니 새삼스러워서 이전 책을 도서관에서 읽었나 했더니 2009년은 학교에 다닐 때가 아니고 졸업한 후로 시립 도서관 두세 번 외엔 간 적이 없다. 고로 읽었을 리가 없는데 기억이 난다. 다른 소설과 비슷한가 싶긴 해도 그 다른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한 도랑으로 빠졌다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추리. 이건 그저 간간이 흘러내리는 비스킷 찌꺼기 같은 느낌일 뿐, 작품집에 대한 희미하고 미미한 느낌으로 한 편의 리뷰를 쓰기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서 묵히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남기는커녕 읽는 순간의 작은 떨림조차도 모래처럼 빠져나가 이제는 정말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잡히는 게 없다. 소소하고 분산되고 가늠하기 쉽지 않은 균열의 절망만을 확인한다. 더이상 같은 말을 하긴 싫다. 시간이 가면 나이도 먹고 키는 안 크지만 나날이 자라는데 왜 맨날 같은 얘기를 해야 하나. 단편집을 어떻게 한 편의 통일성 있는 리뷰로 표현하란 말이냐, 이딴 웩웩거리는 감상문은 쓰기 싫다. 쓰면 쓰지 못 쓸 건 또 뭔가. 못 쓴다는 건 그야말로 안 써진다는 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소재가 주는 통일감, 해석의 방향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는 아니다.
더 달려야 한다. 상처로부터 도망치든 원하는 것을 가지려 안달하든 방향만 정하면 나아갈 수 있다. 구하기 위해 펼쳐든 팔이나 버리기 위해 내민 팔에서는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행동의 직후를 봐야 알 수 있다. 책도 그렇다. 펼쳐야 알고 읽어야 알고 생각해야 안다. 써져야 쓰는 거다. 안 써지면 안쓰는 거다. 책구경이 취미라 할 수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펼쳐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에 나를 구겨넣고 칵테일 섞듯 춤추고 나면 남을 건 남고 버려질 건 버려지겠지. 약간은 초연한 여름. 흐드러질 수록 옅어지는 욕심. 희미하게 강해지는 의지. 먹고 구역질 하고 또 먹는 폭식증 환자만큼 어리석은 행태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책에 관한 한 폭식환자가 되는 게 진리일 수 있다. 헷갈리는 진단, 애써도 어려운 예방, 궁극적 치료까지 한번에 해치우는 길인 양. 읽으면 읽을 수록 낮아지긴커녕 더 높아지고 더 늘어나기만 하는 책탑은 지난 계절에 이어 그대로인데 진저리나게 애처로운 이 계절은 여전히 온몸에 매달려 지치게 하고, 바라보는 나는 못견디게 숨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