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순간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 유럽 5대 왕실에 숨겨진 피의 역사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파리에서 루브르보다 오르세가 사실상 더 인기있는 것처럼 런던에서 대영 박물관보다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들이 더 익숙한 것은 상대적으로 친숙한 화가의 작품이 많고 시대적으로도 가까워서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의 해질녘 풍경과 비에 젖은 연하늘빛 세상을 좋아한 만큼 오래 그리워했지만 당시에는 몸통을 나란히 붙이고 있는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는 무관심했다. 포트레이트만 걸려있다는 게 그다지 발길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장료 무료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솔깃한 일인데도 우린 그때 런던 전역을 돌며 수줍은 관광객티를 내느라 거의 매일 물에 젖은 새털처럼 무겁고 기운이 빠져 있었다. 평소 배우던 것과는 다른 발음과 억양으로 흘러나오는 묵직한 영어는 훗날 원어민을 만났을 때 트라우마가 되었고, 좁다래서 차라리 귀여운 전철이나 빨간색이층버스에 탄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일 경우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자유는 어둠이 내린 타워브릿지 불빛 찰나에서나 가능했다. 그곳은 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업적 모르는 인물의 얼굴만 나열된 그곳을 좋아했을 리도 없지만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들이 사용되는 방식으로 역사를 대하니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하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케이트 미들턴이었을라나.

 

유럽 왕실 곳곳에 불어닥친 강풍, 피와 광기의 역사, 혈연으로 뒤얽힌 사랑과 파멸의 대서사시. 촘촘하게 밀착된 연대기적 사건을 잔인한 왕에게 죽임 당하거나 버려진 가련한 왕비 중심으로 다섯 챕터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만난다. 

 

여왕들의 경쟁: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푸른 피를 지키기 위한 결혼: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르가리타 테레사


광기의 군주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곱 황비: 이반 뇌제와 황비들


무식하고 야비한 왕에게 평생을 유폐당한 왕비: 조지 1세와 조피아 도로테아


잔혹함에 맞선 왕비의 생존법: 헨리 8세와 앤 불린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1603)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올라, 다섯 살 때 잉글랜드와의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한 궁책 끝에 프랑스 왕비가 된다. 후사를 생산 못한 메리가 권력구도로부터 밀려 조국으로 돌아올 때도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었으니 날 때부터 갈 때까지 지독히도 잔인한 운명에 가려진 그녀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최고의 불운은 예쁜 얼굴과 가녀린 몸매,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라이벌로 둔 것으로, 헨리 8세 여동생의 손녀인 메리는 사실상 서출인 엘리자베스에 비해 왕위계승서열이 앞섰다. 아버지에 의한 어머니의 가혹한 처형을 목격한 엘리자베스가 만개한 아름다움을 지닌 메리를 여자로서 질투하고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이 처연한 피의 현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에 의해 오랫동안 유폐당했다가 종교혁명을 억압하려는 대신들의 요구로 처형당한다. 실패한 세 번의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제임스 1세다.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보이고자 한 그녀의 애처로운 노력은 무참하게 짓밟힌다.

 

 

메리 스튜어트를 담당했던 형리는 동요한 채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최초의 일격은 목이 아니라 뒤통수에 떨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왕의 모습에 더욱 당황한 그는 두번재 시도에서는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 목덜미에 맞기는 했지만 피가 뿜어 나왔을 뿐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세번째에야 겨우 잘라낼 수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목을 벤 뒤에는 늘 그랬듯 그 머리칼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형리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머리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메리가 자신의 백발을 숨기기 위해 썼던 가발이었다. 가발을 움켜쥐었으니 머리는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았다. 그냥 떨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pp.18-19)

 

 

데.굴.데.굴. 작두를 포청천한테서 빌려오든가 하지, 도끼로 몇 번을 치는 거야, 대체. 초반에 저런 장면을 만나 상상력 지나친 나는 웩웩거리다가 읽는 도중에 못견디고 또는 전혀 관련없게 츠바이크가 쓴 평전 <메리 스튜어트>를 주문했다. 유럽역사는 실타래마냥 한군데만 툭 건드려도 줄줄 풀려나온다. 유럽 왕실 역사에 정통하거나 초집중 못하면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뒤얽힌 인물과 가문의 결합이다. 혈연관계로 뭉친 근친결합이 대부분이며, 주로 권력을 나누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한 사람이 두 번 이상 결혼하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누가 누구와, 어떻게, 왜 결혼했는지 정도의 사연은 별 것 아니게 되어버린다. 죽었구나, 왕비 바뀌었네, 나라 넘어갔네, 어떻게 됐지, 하다가 이런 절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대체 결혼은 무엇이고 또 권력은 무엇인가!

 

 

 

메리 1세 (Mary I, 1542-1587)

 

 

엘리자베스보다 메리가 빼어나게 예뻤다고? 어디가? 어떻게? 왜? 아무리 미에 대한 관점이 달라도 그 시대 남자들 보는 눈들 참 거기서 거기다. 목소리, 교태, 지혜 같은 것들과 결합된 여자는 또 훨씬 다르긴 해도. 기록도 하나 없이 달랑 초상화 몇 점으로 남은 왕비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왕실의 그녀들이 그랬다면 아래의 여성들에 대한 대우나 처사가 어쨌을지 뻔하게 그려진다. 그림으로 남은 왕비라 하면,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합이 낳은 근친의 증거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첫 번째 아내이다.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필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녀의 어린시절을 속속들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요란한 가문의 결합사에 비해 독자적으로는 업적이나 일화가 거의 없던 그녀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하다고 잘난 것도 아니고, 잘났다고 유명한 것만도 아니며,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우연과 운명에 의해 이름이 좌우될 수 있다.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6)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다섯 챕터의 왕과 왕비의 연대기가 교묘하게 얽히는 지점을 포착하면 짜릿하다. 순차적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 위아래, 옆을 오가다 마주치는 형식이라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를 들여다보기 위해 헨리 8세와 앤 불린, 카트린 드 메디치와 프랑소와 2세를 등장시키고, 관련된 모든 가문과 국가, 귀족과 대공, 왕실 가계도와 역사를 훑어내려간다.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러시아까지 뻗치고 뻗친 혈족결합의 여파가 어마어마해서, 왕비가 되길 손꼽아 기다렸거나 타고난 왕족도 있겠지만 시장에서 말이 선택되듯 줄지어 섰다가 뽑혀 왕실로 끌려들어간 여자들도 많다. 한 나라의 왕을 사랑과 지혜로 보살피고, 다음 왕을 낳아야 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자리라고 해도 시대와 남자의 손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생을 거듭 감상하는 일이 씁쓸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한 명의 왕에게도 수 명의 왕비가 있고 그로인한 자녀들이 무수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결혼시키고 대를 잇고 그러다보면 반복학습 없는 이상 하루 이상 뇌에 남겨지지 않는, 휘발성 강한 가계도가 그려진다. 안팎의 예외없이 국가 간, 왕실 간, 가문 간 피다툼이 날마다 벌어지는데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불안과 광기, 혼란과 환멸의 시대. 왕은 하룻밤의 욕망을 감추는 법이 없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멀어 점점 더 잔인한 피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살아서 궁전을 나가거나 더이상 평범한 미래를 꿈꿀 수가 없다. 유폐와 죽음만이 기다린다. 이전의 왕비를 공식적으로 없애야만 자리를 채우기 위한 다음의 절차가 타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궁정에는 늘 음모와 복수를 위한 살기가 유령처럼 맴돈다.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대하는 습관으로 피의 역사는 쉼없이 되물림된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일랴 레핀, 1885년

 

 

러시아의 이반 뇌제는 숙청과 암살의 저주와 혼란 아래 세 살 즈음 대공의 자리에 오른다.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건 허울 뿐인 대공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대귀족들의 철저하고 알량한 계산 덕분이었다. 암살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신부 콘테스트에서 뽑힌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샤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의 힘은 광기의 발현조차 깊고 상냥하게 눌렀다.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지혜와 사랑으로 황제를 잘 다스려나간 드물게 현명한 왕비였던 것 같다. 사랑받는 여자가 걱정할 것은 거의 없다는 서글픔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원인불명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저 잠깐 숨겨졌을 뿐인 광기가 폭발하면서 러시아를 공포정치의 소굴로 밀어넣는다. 바로 그 공포정치의 이반 뇌제 시대가 열린 것. 그후 아나스탸샤의 로마노프 가문은 러시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데 시작이 황비 아나스타샤였던 셈이다.

 

여느 왕이 그런 것처럼 아들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던 이반 역시 제대로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황비를 무려 여섯 번이나 갈아치웠는데 이때 폭군의 눈을 피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 간 큰 황비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면 한낱 들판의 꽃을 꺾듯 독약을 들이키게 하고 매를 때리거나 버렸다. 황제의 잔혹한 광기와 여성편력은 그들이 단지 아름다운 장난감에 불과했음을 시사한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사랑한 아나스타샤가 낳은 이반이 왕조를 이을 것은 당연했다. 며느리 엘레나가 배가 불러온단 이유로 궁정의 관례에 따르지 않은 옷을 입었음을 알고 노발대발 지팡이를 휘두르다 손주를 유산시킨다. 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반은 소중한 자식마저 지팡이를 휘둘러 때려죽인다. 러시아 리얼리즘의 아버지 일랴 레핀은 삼백 년이 지난 후 이 순간을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을 그린다. 벨라스케스는 당대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그렸지만 일랴 레핀의 그림은 역사를 제3자의 눈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긴 것이다. 그로부터 130년이 더 흘렀지만 그와 우리가 이반 뇌제를 보는 시각은 아마도 같을 것이다.

 

 

 

당첨!

놓칠 뻔한 <영국사>를 펼치는 날이 온다면 온전히 이 책 덕분이다. 책의 운명에 대해 떠올리는 날이다. 쉽고 수월한 것에서 복잡하고 깊은 내용으로 넘어가는 게 지극히 당연하니까 그 책을 먼저 만났다면 이 책을 만나지는 못했겠지. 이와 반대의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것들이 참 많다. 선택, 책임, 마음, 행동, 인연, 운명. 내것인데도 내맘대로 되는 게 드문 경우의 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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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6-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두를 포청천한테서 빌려오든가 하지, 도끼로 몇 번을 치는 거야, 대체-이 부분에서 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어요, 아이리시스님! 이런 유머감각에 반했습니다. 종종 어떤 책은 그림 속 복식사에 관해, 어떤 책은 정물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더 포괄적인 것을 담고 있군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메리 스튜어트를 읽은 적 있는데, 츠바이크는 그것이 누구든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숨결까지 쥐락펴락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식, 관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정이 드러났어요. 아이리시스님이 읽으실 츠바이크를 기대해 봅니다.



덧-푸른 피를 지키기 위함과 동시에 사각턱도 사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헤헤..

아이리시스 2013-06-30 17:06   좋아요 0 | URL
으흠, 역시 작두는 짱이죠. 제가 포청천을 엄청 좋아해요, 작두가 아니고. 너무 안타까워요. 가발이 잡히고 데굴데굴 굴러간 게 고스란히 상상이 돼서 이건 정말 못할 짓 같아요ㅠ.ㅠ

죽음을 앞에 두고 장난치면 안되는데 나중에 후회했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고치는 것도 이상하고 나름 유머였는데 히히히. 미안해요, 메리! (제가 이제 메리한테 사과해야 하나요.. 미안, 메리할머니!!!) 다만 죽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표면적 초상화 구경에서 더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건 제가 왕실 역사에 무지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메리 스튜어트는 판본이 마리 앙투와네트보다 한참 안예뻐서(응?) 또 어디갔는지 안보인답니다.. 해가 쨍쨍하지도 않은데 하루종일 계곡물에 발담그고 수박 먹는 상상하면서 앉아있어요. 해수욕장이 인산인해인데 오늘 가볼걸, 하루가 다갔네요. 자고 밥먹고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6월의 마지막날을 이렇게 보내나 봅니다..

쟌님은 주말 오후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내일은 더 뜨거워져서 만나요! 7월이니까요.

2013-07-02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을 맨 나중에 설명하다 지친 깊은 밤중에_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책으로 가는 길을 내다.

 

 


7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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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7월 20일에 저장

동생이 없었어도 좋았을텐데(동생 따위 없었으면 좋았을텐데,가 아님),의 감정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동생찾아삼만리. 억지로 떼어놓은 연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애잔하고 절절한 남매의 완벽한 성장 드라마. 아무도, 심지어 아버지도 욕할 수가 없었다. 보내는 그 마음은 또 오죽할까 싶어서. 가난이 죄고,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듯이, 딸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한 방법의 선택은 모두 다르므로. 같은 상황에 처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누구의 선택이 더 옳았는지, 잘못되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방법 역시 없으므로.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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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 도착 15분 전의 상황종료라니 충격적이다. 미세하고 촘촘해서 숨막힐 정도의 고밀도 심리전이 이토록 술술 잘 읽힌다는 것은 츠바이크의 놀랍도록 끔찍한 장점. 연민,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이 애틋한 감정이 실은 나의 기만적 태도와 비열함을 먹고 자란다는 진실과 모순에 몸이 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결국 자기 밑바닥에 자리한 수치와 정면으로 마주한 호프밀러는 용감했다. 우리 중 누구도 온전히 호프밀러의 용기에 다가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서글프다.
월경독서- 감성좌파 목수정의 길들지 않은 질문, 철들지 않은 세상 읽기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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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8월 28일에 저장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고른 텍스트가 훌륭해서 재미로서의 독서와 사유로서의 독서를 잘 분배하는 계획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김대중이나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몬느 베이유, 이사도라 던컨 그리고 최근 새로 번역된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나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가 궁금하다. 사실 목수정이라는 네임밸류가 주는 개성적 에세이로서의 매력은 거의 못느꼈다. 자족하는 수준이지만 리뷰를 꾸준히 쓰다보니 어떤 책이든 문체로서나 해석으로서의 독서에 크게 감명받지 않는다.
에라스뮈스-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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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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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은 다른 이유로 밤을 샜고 요즘은 그런 날이 이어지고 있기에 대수로울 게 없는데 침대로 기어들어야 할 시간에 어떤 소설의 끝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음은 다른 날과 달랐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후 사흘이 흘렀고, 몇 권의 소설을 더이상 필사적일 수 없는 속도로 읽어치웠지만 여전히 귓가에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울려퍼지고, 눈은 아수라장의 세계를 잊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동물은 극복 못할 트라우마였다. 어릴 때 외가식구들과 계곡에서 캠핑 중 자루에 넣은 돼지를 패고 또 패서 나중에 구워먹던 걸 보며 한점을 가까스로 입에 넣었다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속을 모조리 게워낸 이후였나, 무섭고 두렵게만 여겼던 개를 처음 기르기 시작한 스무살부터였나, 그애가 집을 나간 지지난 여름 이후였나, 그게 내 아홉수와 연관이 있었을까, 동생이 어린 마음에 길거리 오토바이를 훔쳐타다 잡히던 전날 심한 설사로 몸을 못가누던 작은 강아지가 다음날 새벽 제집에서 혀를 길게 빼물고 죽어있던 이후부터였나. 어른들은 그걸 액땜이라고 불렀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한동안 아예 귀를 닫고 살았다. 주변에서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낑낑대는 소리만 들려와도 동물학대 현장의 환상에 시달렸다. 계속됐다면 정신과로 가야 했을 터, 아픈 동물 앞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로 인해 침체와 우울이 긴 나날 이어지는 것이, 이런 마음을 평생 지속하여 갖고 살아야 한다는 예감에 어느 날은 살아있는 게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쿠키.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만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를 통해 황홀한 꿈을 꾸었다는 것도." (p.17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자와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둘 사이에 선과 악의 이분법은 당연히 성립하지 않고, 다만 경험의 차이일 뿐이라는 걸 안다.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면 길에서 살아갈 개와 고양이들이 가장 먼저 걱정이었다. 길에 쪼그리고 앉아 빵과 우유를 놓고 괜찮아, 먹어, 를 반복하던 나는 머지않아 뒷다리를 질질 끌며 사차선 한켠의 인도를 기어가는 아가를 무턱대고 데려온다. 영화 같은 그날을 몇 장면으로 기억한다. 퇴근시간 만원버스에 올라타 창너머를 보다 눈에 들어왔다. 가는 내내 잊혀지길 빌지만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아 내리자마자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이 새까매지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달과 별 뿐이던 것과 최초 발견지점에서 가까운 도로 끝에서 발견된, 추위와 두려움에 떨다 이젠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이. 서툴게 구조해 동물병원 문이 닫힐까 두 구역을 죽어라 뛰던 우리. 몇 가지 검사. 내장파열이라면 증세는 금방 나타나지 않는데, 괜찮을 수도 심각할 수도 있다, 자세한 검사는 시간과 돈이 들테니 유기견이라면 구청에 신고하거나 안락사를 권한다, 는 친절한 수의사를 뒤로 하고 엉엉 울면서 케이지에 넣어 집으로 데려온 것까지. 페이드아웃.

 

내가 저보다 분별력 있고 힘센 인간이라서 어떠한 생명체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구청에 가면 어차피 치료도 못받고 애물단지로 전락하다 어찌될지 모르고, 안락사라니, 내 결정으로 그런 걸 하라고? 무턱대고 용감한 편은 아니지만 꼭 일어날 거라 믿었고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혹 숨을 놓더라도 마지막을 봐줄게, 네가 있었던 곳을 기억할게, 내 손으로 너를 묻을게, 약속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차라리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그애가 멈췄던 그곳에 홀로 두는 게 옳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이주는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다. 어느 날 일어서고 배변하고 밥을 받아먹고 마침내 두 다리로 섰을 때, 밤새 코에 손바닥을 대보느라 며칠간 오전 수업을 빼먹고 맘졸인 간절함을 그애가 들은 거라고 그땐 믿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p.28)

 

 

인수공통전염병은 정유정 작가가 눅눅하고 질퍽하기 짝이 없는 진흙같은 곳에서 인간 위주로 돌아가는 가혹한 세계를 펼치기 위해 다음 타자로 사용한 카드다.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소재이긴한데, 특이한 건 시점이다. 개의 시점에서도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점과 등장인물 많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거쳤을 어마어마한 자료조사를 짐작케 한다. 누구나 하나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과정일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 바로 그게 정유정 작가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으리란 것도. 부단한 시점변화와 다양한 인물 입장은 소설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와 맞는 기법 아니던가. 뛰어난 가독성, 영화같은 이야기로는 필연적이게도 문단이나 독자가 원하는 문체의 문학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능력의 문제이기보다는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그러니까 알래스카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황야를 가로지른 철길로 걸어가본 적이 있어요. 레일을 따라 걷다가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손목시계를 풀어서 선로 위에 놔두었죠."

"왜요?"

"초바늘 똑딱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았거든. 나는 좀 더 멀리 가보고 싶었고. 기찻길이 끝나는 곳까지."

"그래서 갔어요?"

"아니. 걷다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똑딱똑딱 소리가 들려왔어요. 귀에서 피가 도는 소리보다 더 크게. 열 발짝, 스무 발짝, 시계는 멀어질수록 더 큰 소리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어요. 결국 집으로 돌아갔죠."

"시계는요."

"화가 나서 선로에 그대로 두고 와버렸어요. 바람이 쓸어 가든가. 기차가 깔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다음에 황야로 갔을 때 또 나를 불러 세우지 않도록."

"다음에 갔을 때에도 확인 안 해봤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어요. 바람에 날려갔다면 지금도 근처 어딘가에서 똑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pp.237-238)

 

 

구원이 아닌 철저한 실험을 그린 세계. '왜'가 아니라 '어떻게',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 중요한 세계. '왜'가 전염병의 이유, '어떻게'가 인간들의 각기 다른 대처라면 '무엇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켜야 할 저 너머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 세계라는 파이 안에서는 거의 언제나 지켜내려는 사람보다 그 반대의 수가 훨씬 많거나 힘의 크기가 크지 않던가. 전염병의 세계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은 병에 걸린 세계의 절규와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잃어가는 소중한 것을 들여다보자는 얘기. 그러면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 보일 터였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재형, 기준, 윤주, 수진, 동해, 링고는 전염병의 희생자가 아니다. 작가에게는 여섯 명의 전염되지 않은 주인공을 설정하며 각각을 통해 하고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배경으로 가장 부각되는 유기견보호센터 드림랜드는 인간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다. 병이 발발하자 절차 하나 없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개들이 집단 사살된다. 죽고 살아남는 데에 타당근거가 없어진지 오래다. 인간은 병이 두려워 아까까지 식구였던 애견을 앞다투어 드림랜드에 버린다. 새 식구들은 재형에게 분노를 품은 동해가 고의로 불을 지르면서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드림랜드 역시 폭삭 내려앉는다. 일순간 희미한 희망의 불씨마저 꺼진다. 살아생전 누군가의 소중한 무엇이었던 피투성이 사체들만이 슬픈 자화상처럼 멍든 드림랜드를 지킨다. 더 무서운 건 국가가 내린 봉쇄령이다. '빨간 눈'의 확산이 두려워 공권력으로 제압, 감금, 집단수용, (사실상) 처형하는 모습에서 인간과 개의 경계가 지워짐을 확인한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스타는 발작을 멈췄으나 죽은 개처럼 몸을 놔버렸다. 링고는 두려움에 휩싸여 스타에게 다가앉았다. 혀를 내밀어 코를 핥았다. 뜨겁고 마른 스타의 숨결이 입안을 어루만졌다. 살아있다는, 틀림없는 증거였다. 살아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정신없이 스타의 젖은 몸을 핥았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스타의 등에 배를 붙이고 누웠다. 거칠게 울리는 스타의 숨소리를 들으며 희망적인 변화를 감지해보려 애썼다. (p.107)

 

 

가장 인간적인 주인공이 다름아닌 개 링고라니, 인간을 상대로 복수하려다 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재형으로부터 저지당하지만 링고가 해낸 일과 하려던 일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옳고 그름 앞에 인간은 늘 판단을 유예하는 미숙아이며, 시간을 끌거나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는다해서 올바른 판단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링고는 아직은 우리를 둘러싼 시계가 고장나지 않았음을, 초침소리를 듣고 뒤돌아보거나 되돌아오기를, 여전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간절함을 품고있음을 입증한다. 잘한 선택이 늘 잘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력하는 그 순간만 인간, 나를 지탱하는 세계와 버팀목이 나를 초월해버리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무너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목적과 대가, 시간과 수단은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아는 자는 드물거나 아주 적다. 내내 잘못된 선택을 묵인하거나 용인하지 말라 경고하는 소리를 듣는다. 고요와 공허 속의 초침 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두 번 다시는 개와 인간이 함께 몰락하는, 그래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극에서 극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읽고싶지 않다. 한 번은 어떻게 지나갔지만 두 번은 극심한 고통과 명징한 몰락을 온전히 견딜 가능성이 없다.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세계는 정말이지 아주 작고, 하찮다.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건너가는 일은 여전히 벅차고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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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6-2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백만스물아홉열!!! 아이리시스님아...

아이리시스 2013-06-27 05:22   좋아요 0 | URL
고맙 백만스물아홉열!!! 포핀스님 오랜만...

2013-07-02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18세기 조선을, 사화와 붕당을, 숙종과 영조와 정조를, 연암과 다산을 좋아한다. 아마 조선을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일 것이다. 그 복잡한 붕당의 흐름과 권력암투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있어서는 안될, 없어도 좋을 당파싸움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현대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융합되지 못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무엇보다 이 시대 얘기들은 무궁무진하고 권력구도와 학문, 사상적 일대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사람을 매혹시킨다. 팽팽한 긴장선을 타고 흐르는 시대의 봉인. 영정조 시대를 가르는 두 줄기. 연암과 다산. 이런 전무후무한 라이벌. 매력넘친다, 이분들. 평생 같이 갈 남자를 고르는 거면 조금 더 끌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데, 인간적으로라면 그럴 수 없다.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 성격, 가치관이 그가 곧 그 사람이므로 가능한 것. 단점조차 인정해주고 싶은 연인이랄까. 생애와 시대가 밀착된 운명, 아름다운 블랙홀 속으로 지금 출발.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암과 다산의 생애와 명리학,양자역학적 사주 분석,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곁들어지는 붕당적 흐름까지. 붕당정치의 흐름을 교양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데도 연암의 벗들이나 다산의 친인척, 정조 곁의 남자들 이름이 낯선 경우가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들. 그들은 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만남이 없었을까.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이를 시작으로 2년에 한 권씩 3탄을 계획중이란다. 두 별의 생애와 업적, 18세기 정치사상지도와 시대적 흐름 그리고 세계문명권 지성사로 넓혔다가 돌아오는 과정으로. 길고 먼 여행이 되겠지.

 

 

물과 불(불을 품은 물과 물을 품은 불). 지혜와 열정. 사건과 사실을 꿰뚫는 힘과 어둠을 밝히는 투시력. 유머와 박학. 좁쌀 한알과 세상 모든 진리. 완격과 급격. 파동과 입자. 수많은 해석과 모호함의 제거. 노론 '벽파'와 남인-성호 '좌파'.

 

앞이 연암, 뒤가 다산의 특징이다. 두 사람의 출생에 25년이라는 격차가 있었다.

 

'삼중주'를 위한 세 개의 연대기

 

연암 : 1737~1805년

정조 : 1752~1800년

다산 : 1762~1836년

 

 

이 연대기가 말해주는 것? 맘고생 하면 권력과 재물을 다 가졌더라도 단명한다. 정조처럼. 권력의 중앙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던 연암이 살 만큼 살았고, 군주를 잃고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학자로 변신하여 18년, 해배되고 18년을 더 산 다산이 가장 장수한 걸 보면 욕심과 화를 놓고 편히 지내는 기간이 길어야 오래 살 수 있다. 권력과 재물 없이 길고 가늘게 살면 뭐하냐고 묻진 마시고.

 

어쨌거나 두 별 사이의 교집합은 조선의 '달' 정조였다. 연암은 느슨한 권력욕, 자유, 호방한 성격, 다산은 강한 집념과 천주교, 정조는 문체반정과 개혁군주로 요약된다. 연암은 쉰 이후 아내가 죽자 생계형 관직에 딱 한 번 진출한 이외에는 관직과 멀어지려 애쓰는 삶을 살았다. 능력이 특출했기에 군주의 부름을 수없이 받지만 한사코 긍정의 응답을 사양한다. 다산은 달랐다. 과거에서 일부러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글을 끄적이다 나오는 연암에 비하면, 다산은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관직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대과에 네 번 낙방하지만 합격 후 왕이 내는 과제를 매번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만큼 훌륭했다. 정조가 시도한 '초계문신'이나 '문체반정'은 정치와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였지만 '문체반정'은 사실상 흩트러진 조선의 성리학적 기반을 다스리고 군주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개혁정치가 아니라 보수정치였던 셈이다.

 

벗과 가문, <열하일기>와 <목민심서>, 연암협과 다산초당, 문체와 서학(천주교). 성리학적 기반과 강상의 모든 것을 뒤엎고 유일신(군주)을 해체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가 사실상 서양의 학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이었기에 더욱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고, 대가없이 목숨 바치는 순교자가 늘어났다. 문체반정은 실패했지만 이 '반정'이 조선 시대의 다른 반정(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과는 다른 모습, 색다른 방향의 개혁구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르고 어르고 벌하고 유배하는 식으로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을 거라 믿었던 어진 군주의 순진한 판단인지는 몰라도. 다산은 원칙주의자에 도덕주의자다. 정조의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타당하다고 여긴 듯하다. 비록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유머와 패러독스를 구사하는 연암의 문체를 군주와 함께 눈감아버림으로서 갈길을 잃어버리지만 말이다. 자신은 배교하지만 피해갈 수 없었던 가족들의 피바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던 군주. 군주의 죽음 후 닥친 신유박해. 다산의 삶은 천주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문체와 서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세계화와 맞물리지만 성리학적 지반을 뒤흔든다는 이유로 극렬한 변주를 시작했고, 많은 목숨을 희생시킨다. 서학으로부터 비교적 멀리있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근거를 갖지도 못한 연암, 서학이 아니라면 후반부 인생을 설명할 수도 없는 다산. 이렇게 두 사람. 균열과 불길에 휩싸이며 꿋꿋하게 나아갔던 신념과 평행가도를 달리는 정반대의 삶, 그 운명이 돋보인다.

 

 

 

 

 

 

 

 

 

 

 

 

 

 

 

 

 

 

신기하다. 무신정권과 대동법이 그런 것처럼 연암 출생부터 다산 사망까지 100년. 영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긴 52년의 재위기간으로 유명하고, 정조는 스물 다섯에 왕위에 올라 약 25년간 자리를 지킨다. 가장 개혁적인(보수든 진보든) 시도를 했던 두 왕의 사후, 조선이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그 세도정치기가 60년이 넘어간다는 것도, 이후 외세의 개방요구에 한없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도.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할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모두 가졌던 정조는 탕평책, 법전편찬 등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는 의아함을 보여준다. 폭군이 되지 않았다. 권력의 무자비를 휘두르지 않는 대신 학문과 개헉으로서 나아가고 싶어했다. 영정조 시대는 거의 77년이다. 연암과 다산이 왕에게로 통한 행태 역시 다르다. 한쪽은 가능할 때까지 도망갔고, 한쪽은 죽을 때까지 해바라기 사랑을 퍼부었다. 다산을 믿고 의지하고 높이 평가한 건 맞지만 왕이 신하 한 명에게 모든 것을 걸었을 리 없으니 다산의 군주를 향한 사랑이 더 맹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인 '정조어찰첩'을 통해 밝혀진 걸로만 봐도 정조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맥으로 통치했다. 정조 시대의 측근으로 늘 다산이 등장하는 이유, 정조만 들어도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 그게 바로 반복과 주입이 주는 교묘한 세뇌라할 수밖에.

 

다산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유배지에서다. 군주를 잃은 후 닥친 피바람이 그를 정숙한 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연암이 <열하일기>만을 남긴 데 비하면 다산의 저서는 나열하기도 벅찬 양이다. 다양한 주제의 사상적 텍스트들은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은 늘 궁을 향해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많은 나날, 이미 없는 군주를 그리워하며 시대에 대한 애환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까. 연암이 훨훨 날아가듯 썼다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한 잘 짜인 백과사전식 구축에 힘을 쏟았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여행하며 붓 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쓴 <열하일기>와 목민관에서 지켜야 할 수령의 도덕적 지침서로 여겨지는 <목민심서>가 서로 다른 문체를 잘 설명해준다. 연암은 자신을 깨진 조각으로 여기며 전체에 필요한 일부가 되려 했다. 호기심 대왕, 유연한 지성, 호방한 성격, 폭발하는 역마살을 가진 그의 인생은 소리없이 흘렀다.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한문소설과 시짓기에 능했고, 성리학과 북벌론이라는 거대담론에 휩싸이지 않았다. 반면 다산은 세세한 사항에 집착했다. 세밀한 디테일과 방대한 주석이야말로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청렴과 절욕, 윤리적 내공 등 덕을 지닌 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도덕성에 기반을 둔 삶이다. 명랑과 진지. 두 사람의 기질은 고루 섞여야 마땅했다.

 

천 개의 '고원'과 천 개의 '계단', 유머와 패러독스 그리고 리얼리즘과 파토스. 쭉 읽어가다 알만큼 알게 되었을 때 이제껏 알던 모든 지식과 합쳐지면서 이 두 가지의 비교가 결국 두 개의 별을 밝히는 모든 것이라는 결론이 섰고,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개인사, 사상사, 생활상, 정치사까지 훑어내려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백 년의 시간이 순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할 때 나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독서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에게는 고문이 어렵다. 적어도 아직은 <목민심서>나 <열하일기>를 읽을 능력은 되지 않는다. 연암과 다산이 지향하는 주제 역시 결국 같은 얘기였겠지만 상당부분 달랐다. 양반과 탐관오리의 무능과 허위를 비판하거나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여러 소설들에 드러난 풍자와 역설이 연암의 소설에서 드러난다면, 적나라하게 표출된 비장한 현실의 재현 속 고난과 분노와 격정을 드러내는 건 다산이었다. 서로 다른 글쓰기는 주제든 문체든 그 자체 측면에서 태생적 한계와 생애,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부조리와 저항 정신만은 꼭 닮았다. 두 사람의 시대를 향한 애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같은 시대를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니. 심지어 먼저 간 지인의 묘비명 짓기에도 뛰어났던 이들의 차이는 애도와 증언인데, 지인의 다한 생을 두고 연암이 시를 지었다면, 다산은 증명하고 요약했다. 차이의 향연과 의미의 명징성, 프리랜서와 정규직, 에세이와 백과사전의 차이. 그들이 서로를 건드리지 않거나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러한 차이를 잘 알았고, 결코 융합되지 못하리라 여겼거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후자였으면 좋겠다.

 

 

 

 

 

 

 

 

 

 

 

 

 

 

 

 

 

<정조와 18세기>는 스스로를 태양과 달로 표현한 군주 루이 14세와 정조를 비교, 지금껏 개혁군주로 통한 정조에 대한 보수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시각을 담았다고 신문 북세션에서 소개하던 책이다. 심한 학술서 냄새, 이런 책이 교양도서로 자리잡을 리도 없지만 그나마 가장 개혁가였던 정조를 보수주의자로 결론내리면 내 사랑 정조, 그 이미지가 깨어지는 건 슬픈 일인데, 어떤 개체가 반드시 한 가지 평가로 귀결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사도세자가 왕인 나라에 살고 싶다고 썼던 기억난다. 아, 그래서 역사와 시각이 진보하고, 덩달아 독서도 진보하는 거라니까. 고집이 세서 태생상 팔랑귀는 절대 될 수가 없지만 역사를 어쩌나. 자, 제가 나서서 진실을 구하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최근 학계의 다수설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당파정쟁의 희생양이기보다는 살인을 서슴지 않던 미치광이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사코 자결을 거부했고, 그 더운날 뒤주에서 홀로 몸부림치다 외롭게 죽었다는 것. 어쨌거나 왕위를 이어야 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진 세자가 뒤주에 갇혀죽은 사실이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닌데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충격이 거듭되고 있다. 진실은 하나일텐데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시각은 뒤집히지 않는다. 역사의 어떤 사건을 두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부치거나 지나친 소설짓기는 불편한데, 그렇다면 재미로 보면 그만이라는 사극도 문제가 된다고 본다. 김태희가 연기하는 장옥정은 인현왕후와 영혼체인지한 것 같다. 비난하기 위해 읽는다는 말도 있으니 난 언제나 그저 보고 읽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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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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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1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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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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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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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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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페이퍼로 변질된 이야기. 이유는 에피쿠로스와 인문주의자들,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그리고 몽테뉴 덕분이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정말이지 이 책을 대하는 아주 쉬운 일부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기원전 1세기, 사물의 본성에 대해 쓴 로마 시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루크레티우스였다. 에피쿠로스의 계승자였던 그의 원자론은 중세의 세계관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내용이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고결하고 끈기 넘치는 한 책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어 그간 지켜져온 총체적 우주질서와 종교적 신념을 뒤엎는다. 제목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학자들은 이 책이 발견된 순간을 근대의 탄생이라 표현한다.

 

 

 

 

 

 

 

 

 

 

 

 

 

 

 

이렇게 서로를 소유하는 동안에도 연인들의 열정은 불확실성 속에서 솟구치며 방황한다. 자신의 눈과 손으로 먼저 무엇을 즐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의 대상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육신에 고통을 가져오고, 대부분의 경우에 상대의 입술에 이를 들이밀면서 서로의 입을 거칠게 부딪친다.  -루크레티우스

 

-<1417, 근대의 탄생>, p.247

 

 

이 순간도 언젠가 역사가 될 것이다. 30세기에도 지구가 굳건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지. 그치만 개인적으로 30세기에 지구와 인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책이 발견되든 괴생명체가 나타나든 세계는 변화한다. 고대의 희귀본 하나를 발굴한 중세의 책사냥꾼이 르네상스(근대)를 연 것처럼 말이다. 철학과 사상을 쭉 공부해왔다면 다르겠지만 생소한 고대 철학자와 정치가는 물론이고, 고대 문헌의 철학적 내용까지 사유해야 한다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크게 보면 라틴어(중세 로마어)를 잘 배운 한 남자의 책사냥기, 사실상 고대중세와 근대의 핵심을 이해해야 하며, 포조와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철학사상가들을 알아야 한다.

 

1390년대 말 청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발들인 어두침침하고 좁은 도시, 페스트의 그림자가 주기적으로 덮쳐오던 중세의 피렌체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어떻게 기회의 도시 로마로 진출했는지, 중세에 '책'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필사가의 지위란 얼마나 경이로운지, 교황청 공증인이자 필사가로서 권력 제일 가까이 다가갔던 포조가 혼란한 정치상황 중 어떻게 일자리를 잃었는지 알아야 한다. 발굴한 후 정작 필사본을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 소유의 첫 필사본이 후대에 전해지지도 못하지만 그로인해 개인적, 문화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포조의 중년과 말년이 어땠는지, 그가 원한 사회는 어떤 것이었으며 인문주의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어떻게 고수할 수 있었고 또 희망은 어떻게 깨어졌는지.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극단적이었으며 맹목적 믿음을 요구했다. 포조보다 몇십 년 앞섰던 시인 페트라르카와 살루타티의 인문주의는 단순히 괜찮은 고대 양식의 모방이 아니라 그를 넘어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더 큰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폐허와 치부를 드러낸 채 부패하고 있었는데, 페트라르카를 이은 포조와 교황청 사무국의 인문주의자들은 살아있는 장(場)에서 비로소 냉소, 혐오, 염세주의, 비관주의와 대치하기 시작한다. 수도원은 면죄부를 남발하며 각종 음모와 속임수, 위협과 고문을 서슴지 않았고 신의 이름으로 살인마저 묵인한다. 포조는 어리석음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이 시대를 로마 옛 영광의 애처로운 그림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계속되던 권력 다툼 아래 발다사레 코사가 수십 가지의 혐의로 고발 당하고 공식적으로 퇴위된 1415년, 주인 잃은 포조는 실직자가 된다. 근근이 같은 일을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 과감히 거절하는데 이는 다른 꿈이 있었고, 더 이상 방관자로 비굴하게 지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독서와 사라진 고전 문헌에 대한 열정이 다시 한 번 책사냥꾼의 기질을 발휘하게 하면서 1416년 갈렌 수도원에서 퀸틸리아누스의 <연설 교육론> 전권을, 1417년 풀다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찾아낸다.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 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시의 언어는 대체로 까다롭고 어려우며, 구문은 복잡하고, 전체적으로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1417, 근대의 탄생>, p.229

 

그렇다면 이 시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표현했기에 '발견한 일'만으로 암흑기를 닫고 재생의 시대를 여는 일이라고 했을까. 설명과 함께 잘 정리된 챕터가 있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주장 - 펼치기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void)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사물은 일탈(swerve)의 결과로 태어난다.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 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혼은 죽는다.

사후세계는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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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정복고기 대표문인 존 드라이든(1631-1700)은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의 성질, 동일한 사랑행위의 반복, 반복된 행위에서 오는 쾌락, 사랑의 감정적인 고통을 공격적인 충동과 황홀경 사이의 갈망으로 이해한다. 첫문단에서 인용한 루크레티우스의 성과 즐거움(사랑이든 아니든)이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면 더 아름다운 표현으로 변한다.

 

...젊은 한 쌍의 연인이 더욱 가깝게 결합할 때,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허벅지와 허벅지를 휘감을 때,

가득 찬 욕망은 부글대는 거품처럼 끓어오르고,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누르고, 함께 속삭이고, 함께 숨을 내쉴 때,

그들은 움켜안고, 꼭 짜내듯 쥐고, 촉촉한 혀로 서로를 찌르니

서로 상대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헛되도다.

그들은 단지 주변만 유람할 뿐이니,

육신은 꿰뚫을 수 없고 서로의 육신 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나니

아무리 그러려고 애써도, 둘이 엮인

격동적인 순간의 분노 속에서 더 확연해질 뿐이라.

그들이 누운 사랑의 둥지 속에 그렇게 뒤엉켜

넘치는 즐거움 속에 녹아내릴 때까지 그러하리. -1685, 존 드라이든

 

-<1417, 근대의 탄생>, p.248

 

 

 

 

중세인들은 비로소 전지전능한 신, 우주의 중심이자 만물의 기원인 인간, 정통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과학, 잘못된 환상, 쾌락과 관능의 마법에서 풀려난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낸 일이었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혼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지전능한 존재는 없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은 충격적이면서 지금까지의 우주질서와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를 모조리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루크레티우스의 책은 아주 오랫동안 금서 혹은 숨어서 몰래 보는 책으로 정의되었다. 포조가 발견했을 때 당연하게도 수도원에서는 이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필사가를 구하라는 닦달이 있을 뿐이었다. 힘겹게 필사한 결과물을 포조가 피렌체의 니콜로 니콜리에게 보냈고, 니콜리 역시 필사한다. 니콜리의 필체가 예술적이었는지 그의 사본은 이후 수십 여 개의 필사본의 기초가 되었다. 포조가 니콜리에게 전하기 전 독일인 필사가를 고용해 만든 최초 사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니콜리의 것은 9세기의 필사본을 베낀 포조의 것을 필사한 것으로 로렌치아나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책은 그 이후로도 10년 이상 니콜리의 책장에 잠자다가 필사본 제작, 인용, 책의 내용을 암시하는 글귀, 미묘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표시로 나타나기 시작해 곧 다른 곳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금서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 채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는 필사본으로, 인쇄술 후에는 기독교 눈을 피해 읽히던 책을,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서점으로 주문 한 통만 넣으면 받아볼 수 있다.

 

 

'죽음이 운명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출한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루크레티우스에게로 계승된다. 여기서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대의 욕구충족과 거리가 있는, 더이상은 갈증이 없는 상태/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의 그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배터지게 먹음으로서의 향락이 아닌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고통의 부재, 정신적 쾌락을 의미한다. '절제'의 측면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연결되며, 아타락시아(ataraxia)로 통한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여기거나, 오늘 배터지게 먹고 내일 다이어트하는 현대인들을 이 이론으로 비판할 수 있다. 신과 교회(교황)가 곧 모든 것인 중세에 죽음과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종교와 지배계급에 비난의 여지를 남기는 회의주의가 환영받았을 리 없다. 추종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지만 늘 수면 아래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낙원,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죄 없는 사회를 주장하던 중세의 세계관으로 볼 때 이단이었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처럼 처형될 가능성도 있었다. 포조는 그런 가운데 한 권의 책을 찾아냄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는 바로 이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로 인해 세계관과 믿음을 바꾸었고, 얼굴에 십자가형을 당한 채 화형되었다. 믿음과 신념은 목숨보다 강했고, 그럴수록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더욱 강력한 힘으로 세상에 울려퍼졌다.

 

브루노의 표현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눈멀고 악의적이며 거만하고 시기심 많은 무지의 동굴 아래 파묻혀 있던 고대의 진정한 철학이라는 태양이 떠오르기에 앞서, 새벽을 알리는 자가 되도록 신들이 임명한 사람이다.

 

-<1417, 근대의 탄생>, p.298

 

 

 

포조와 루크레티우스 사이에는 무려 1500년 이상의 강이 흐른다. 중세의 필사가들, 현대의 독서가들과 닮았다. 책을 수집하고 모으고 진열하고 먹는다. 책벌레, 습기, 곰팡이, 양피지와 라틴어, 희랍어와 싸우던 고대 중세에 비하면 더 많은 책, 더 난해한 책을 우걱우걱 씹어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한다. 책은 때로 나이와도 비례하지 않는다. 당연한 게 조금 두렵다. 쉽게 따라잡기도, 따라잡히지 않기도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인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걷고 달려 발견, 필사, 전도했을 때의 즐거움을 현대인들은 잊은 지 오래지만, 인쇄술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큼은 행운이다. 나는 책구입증이나 책보관증에 걸린 욕심쟁이는 아니다. 뿌듯한 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의 희열이지 책을 사는 순간 자체는 아니다. 다행이다. 책 둘 공간이 없어 가족을 죽이거나 무게에 못 이긴 바닥이 폭삭 내려앉을 염려는 없으니. 그러나 이와 비슷하거나 행여 다른 이유로 오늘도 쌓인 책 사이 어디쯤에서 괴로워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린 이후로 책이 없는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살았을 뿐.

책은 그렇게 인간 역사 너머로부터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세상을 오갔다. 그것이 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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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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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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