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간절한 구원을 바란 적도, 애틋한 감동을 갈망한 적도, 시기와 질투에 시간을 낭비한 적도, 타인의 기회를 뺏은 적도 없다. 하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잘못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시간의 구렁텅이에 한 번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했고, 초강속으로 내려친 번개에 맞고도 무엇이 어긋났는지, 왜 그런 건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쟁이 지나갔다. 부모님을, 언니오빠를, 쌍둥이 동생을, 그것도 모자랐는지 기어이 꽃다운 시간 전부를 할퀴더니 인생 전부를 나락으로 처박았다. 시작부터 끝을 굳이 계산해도 고작 삼 년이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총알의 시간이 추억과 미래를 짓밟고 감정을 앗아갔다. 준이 물 대신 진흙을 오물거리다 더 견디지 못하고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을 때 퇴역참전군인 헥터가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것, 그에게 발견된 건 행운이었다. 슬프고 가혹한 운명으로 한걸음 더 들어갈지언정, 다시 없을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줄 기회.
나는 써야했다. 이 숨막히는 먹먹함을 서툴게나마 표현하는 게 오래도록 애정을 가졌던 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숭고한 빛줄기만으로는 아픔을 용서로 승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감 이상의 연민과 최소한의 예의를 가장하여 늘어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박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영광은 견딘 자들에게 바친다. 여기서 꼼짝할 수 없는데 처절한 상황에 맞닥뜨렸고, 불가항력이 자꾸만 나락으로 떠미는데도 혼자 힘으로는 절대 살아나지도, 아니, 남의 손에 아직은 팔딱이는 나의 숨을 맡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쩔 것인가. 무례한 질문이다. 그저 눈을 감고 처분을 기다리겠는가. 당신의 어느 시절에 뜨거운 피와 심장을 넘겨준 적이 있던가. 특수상황은 말그대로 특수하다. 선택이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부모님을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 처참하게 잃은 기억이 있는 실비는 그 후로 오랫동안 세상과 연결된 한가닥의 실조차 붙잡지 못한다. 1935년 만주에서의 필름 같은 기억은 눈물 없는 울음과 소거된 아우성, 육체에 대한 혐오로 무력과 허무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서서히 영혼을 갉아댄다. 피폐한 영혼으로 지친 실비를 더한 허무와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민다.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철저한 타락과 방종으로 일관, 쾌락조차 고통으로 다가오던 사랑, 선교사 남편에게 정착해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몇 년. 1950년대, 비탈에 세워진 자그마한 고아원.
전쟁을 혐오하는 아버지를 향한 애증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게 했고,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하필 그때 전쟁이 진행중인 땅으로 온 건 죄책감 때문이지만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운 일이어서, 포로로 잡힌 소년을 죽여야 하는 상황과 만나 허리춤 수류탄을 빼앗기고는, 그나마도 살아있는 목숨과 관련없는 전사자처리반에서 일한다. 그조차 적응 못해 부대로부터 퇴출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작은 고아원에서 보낸 시간, 쌓아나간 우정도 사랑도 아닌 희미한 의지는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하지만 같은 전쟁의 피해자들, 준과 실비, 헥터는 한곳에서 만난다. 번뇌에 사로잡히기 싫어 몸을 혹사하고, 지키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성향의 헥터와 준은 닮았다. 몇 번이나 유산을 거듭한 실비의 상처는 똑 소리나는 내조와 버려진 아이들을 돌봄으로서 상쇄되는 듯 보인다. 그녀가 가진 또렷한 흉터, 보이지 않는 외상이 극의 분위기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헥터가 실비의 과거를, 준이 실비의 관심을 갈구하게 되기 시작한 이후,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는 동시에 타인을 통해 나를 비춰본다. 필연적인 애상 아니면 자상 같은 안타까움으로.
중년이 된 준은 과거를 악착같이 붙든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은 기억을 시도때도 없이 회상한다. 마치 삶의 전부인양 복기하며 죽어가고 있다. 참상 중에 가졌던 애정,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순간을 그리워라도 하는 듯, 시간의 타래를 감고 또 감는다. 마약에 고통을 얹고, 헥터가 막 이룬 사랑을 산산조각 내면서까지 실비가 남긴 책, 고아원에서 그녀가 늘 끼고 다니며 읽거나 읽어주곤 했던, 그럴 때면 가녀리면서 총총한 눈빛이 아름다운 슬픔이란 걸 알게 하던, '솔페리노의 회상'과 함께 사라진 아들을 찾아 나선다. 마침내 솔페리노의 성당, 준과 헥터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까. 가슴 가득 들어찬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만주사변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원형으로 사용된 1859년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에서 일어난 참상은 앙리 뒤낭의 회상으로 실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전쟁과 합쳐진다. 상처가 그런 것처럼 회복이라는 말은 언제나 이르다. 지금 평온하다면 전쟁은 끝난 것인가. 끝난 전쟁이 왜 이다지도 누군가의 발목을 그악스럽게 붙드는가. 고아원에 치솟는 불길은 작별, 돌덩이같던 마음과 시간에 대한 복수같은 것이다. 솔페리노의 성당에서 준은 언제까지나 집나간 아들을, 잃어버린 가족을, 떠난 실비를 떠올릴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과 떠나온 고향을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준 구원, 강박, 도덕, 의지, 인간애의 종말이다.
#2.
인도 바닷가 마을 방갈로에 살던 아할리아와 시타는 쓰나미에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된다. 도시로 가기 위해 차를 얻어탔다가 뭄바이 매음굴에 이른다. 지하, 칠흑같은 어둠과 퀴퀴한 냄새,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폭행과 강간의 현장. 자매는 미성년이어서 비싼 값이 매겨져 지하방에 갇힌다. 손을 타지 않아 특별관리된다.
한편, 워싱턴의 잘나가는 변호사 토머스는 휴직권고를 받고 아내 프리야가 사는 뭄바이로 온다. 새로 얻은 인권단체의 일자리는 매음굴의 성노예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은 곳.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 각지에서 행해지는 아동매매, 성노예 문제를 담아내는 소설로, 법의 사각지대에서 인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할리아는 운좋게 구조되지만, 마약이 담긴 콘돔을 삼킨 시타가 파리로 갔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추적은 언제나 한발 늦고, 악은 번식력 강한 효소처럼 뻗어나간다. 적발 위기, 시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인터넷 채팅 포르노 업체에 팔린다. 꼬리를 무는 악, 어린 소녀의 인생을 순식간에 망가뜨릴 수 있는 몰가치, 비도덕, 반인류적 행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경찰, 무능한 정부, 만연한 무지와 악, 비사법제도는 아이들을 조금도 구해내지 못한다. 잘못을 따지기도 묻기도 불합리하다. 부조리가 일상이 되어버린 곳에서 시타는 견딘다. 의연함과 끈기, 지칠 줄 모르는 용기를 보여준다. 빈번한 탈출 실패와 옥죄는 감금에도 초연한 기다림이 비로소 빛을 발한 건 시타 같은 행운아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레샴 법칙이 소설을 철저히 관통한다. 악은 쉽게 적발되지 않고, 낙관은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는다. 지하에서든 지상에서든 어른은 아이를 갉아 제 욕망을 채우는 악마의 존재들이다. 이런 순간조차도 아이의 낙관은 위대하다. 태양을 홀로 건너 저 너머를 비추는 빛처럼.
#3.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해발고도 2400미터에 세워진 나라의 고원지대 '미싱' 병원에서 1954년 늦은 오후, 죽어가는 엄마의 자궁을 빌어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다. 어떤 나라는 태양이 저만 비추는 것 같다. 3000년의 긴 역사, 독재와 내전으로 얼룩진 현대사, 핍진한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버텼던 국민들의 질긴 생명력, 그런 곳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은 차라리 감동이다. 반복되는 폭격으로 폭삭 무너져내린 인프라, 꾸물대는 태동은 그럼에도 이 세상을 지구상 단 하나의 역동하는 아득함으로 비춘다.
인도에서 온 의사부부에게 입양되어 길러지는 매리언과 시바, 어떤 가족은 마치 선택된 것처럼 운명으로 엮어진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정치분쟁으로 피폐해진 이곳에서 더욱 강한 생명력을 꽃피운다.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으로부터 정복당했다는 공통된 아픔을 가진 가운데 식민과 지배, 문명과 비문명, 탄생과 소멸, 사막과 오아시스 같은 반대적 물질을 모두 끌어안고 덤벼댄다. 사람이 칼을 들고 목숨을 구하겠다는 아이러니에서 탄생한 의학, 외과술은 숭고한 대서사시를 달려나가는 또다른 공통분모다. 발전이라는 환상을 명분으로 생명을 앗아가고, 전쟁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고, 최소한의 보금자리조차 꾸리지 못하는 이들의 처절함이 여기저기 스며들면, 그제서야 여기와 저곳의 미묘하게 닮아있는 상실과 운명에 굴복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존엄과 열정은 어쩌면 목숨과 생존을 위협받는 극악무도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현되는, 무거운 질량의 것인 모양이다.
종교, 인종, 종족, 권력,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분쟁하는 현대인들이 이 광활한 자연을 향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이 태동하고 빛이 저무는 일련의 진리 안에 머물기를 악착같이 거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의학의 발전은 죽음의 이유를 늘려주었고, 타당화했고, 존엄을 하락시켰다. 아이와 어른, 환자와 기아, 적군과 아군이 무슨 소용일까. 살아남는 게 사는 것보다 이미 백만배쯤 중요해진 세상에서. 탈선한 열차처럼 전복된 삶의 기구한 운명이 한데 모인들 어떤 역성혁명을 기대할 수 있나. 매리언과 시바가 가족을 만나 의사로 성장해간 것, 자라면서 아픈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와 혁명을 고스란히 겪은 것, 아버지를 찾아나선 것, 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는 하늘 아래 존재하는 작은 땅을 단숨에 성소로 부상하게 한다. 죽음과 파괴의 전조가 가득한 세상에서 희생과 용서, 화해의 의미를 알아간다. 신화와 종교, 믿음과 광기 속에서 공포로 인한 섬멸을 만날 때마다 지나치게 담담하여 되려 두려워지는 이 책을 원망했다. 인정한다. 상당수는 내전의 땅 아디스아바바를 짐작하지 못하고 책으로 배우는 바람에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겐 잔인한 곡해였을 거다. 아니면 생동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의 개척을 향한 환영이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식민과 의학의 상관관계, 현대사와 신화가 어우러지는 낯선 땅을 사랑했을지도. 인간은 운명보다 강하다.
*
저기 별이 걸어간다.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다. 별이 반짝인다. 아이가 비로소 뒤돌아본다. 달려오너라. 두 팔을 활짝 벌리면 아이가 빛의 속도로 달려온다. 나는 엄.마.다. 신이 모든 아이를 지켜보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서 아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는 엄.마.다. 너를 지.켜.줄.게.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다. 오래 전 잊었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평화로부터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