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잠 한숨, 밥 한끼 더 먹는 게 낫겠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할 뻔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좀 다독이고, 우뇌로 좌뇌를 좀 설득했다. 반값에 혹해 몇 달 전부터 지른 e-book 리스트를 캡쳐하려는 만행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페이퍼 창을 연다. 인증샷은 이 나이에 좀 웃기지, 여튼 그렇게 잘 참아오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펭귄세계문학을 지르고, 민음사,열린책들세계문학도 지르고,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대산문학전집을 기웃거리다 한 권씩 지를 때도 꿋꿋하게 참던 건데, 참아지던 건데, 궁금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공짜로 볼 엄청난 기회도 그냥 붐이라는 단어 속에 날려먹었는데 왜 이제 와서, 왜. 진짜 좋은 건지 좋다니 좋은 줄 아는 건지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특필하는 <빅 픽쳐>도 그저 그래서 한 번 더 속는 심정으로, 아니지, 스토리K 선물받은 기념으로 <파리 5구의 여인>을 지를 때도 잘 참았던 충동인데, 그랬는데, 결국 내 손으로 결제버튼을 누른다. 다 이 책 때문이다. 어쩔 수 없어, 네가 원망을 들어야 해.
책을 꽤 샅샅이 뒤졌는데 이 책의 원년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99년이라고 책정보 페이지에서 알려주는데 그때 내 눈은 없었나 보다. 어떤 스웨덴 현실을 담으려 했는지 알지만 이제 북유럽의 대명사가 된 기이한 현상 '백야'만큼이나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다.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북유럽 환상을 한꺼풀 벗겨낸지 오래란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 현상 보다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 치우쳐 설명이 다소 늘어지는 측면이 있다. 다트로 사람 눈을 맞추는 기술은 놀라운데, 그걸 한 번 배워보고 싶기도. 어릴 때 벽에 걸어놓고 가끔 던지고 놀던 다트는 놀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 충분히 연상되는데도 엄마가 사준 걸 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한 국가의 전혀다른 두 얼굴. 복지국가 스웨덴과 동유럽 공산권과 손을 맞잡고 어둠의 터널을 통해 성장한 1980년-1990년대 대기업을 묵인하며 성장해온 스웨덴 말이다. 애견센터 옆에 보신탕 가게가 있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스티그 라르손을 결제하게 된 건 <미스테리오소>가 서문만 열어주고 만다고 생각해서 더 거대한 이야기가 고팠기 때문이다. 아르네 달이 스웨덴에서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마 시기상으로 늦게 나오다보니 앞 타자들이 했던 얘길 반복해 듣는 셈이 된 듯하다. 범죄소설, 추리소설, 경찰소설, 탐정소설 어느 범주에 넣어도 한 권으로는 모자라는 느낌이다. 스웨덴의 굵직한 정계,재계인사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상황, 단서는 '미스테리오소'라는 곡이 담긴 음반. 밝혀진 사실은 충격이라기 보다 수긍을 수반하게 한다. 예전에 하정우가 나오는 드라마 [히트]에서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얼마 전 소지섭이 나오는 드라마 [유령]에서는 'the phantom of the opera'가 깔리는데 무서워서 한동안 그 음악을 들으면 경기가 날 것 같았다. [유령] 보면서는 혼자 있을 때 모니터 불빛만 새어나와도 깜짝깜짝 놀랐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순간적 놀람을 두려움으로 연상시키는 연쇄상상은 공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게 하는 것 같다. 추리소설이나 공포영화가 보는 동안 무서운 게 아니라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게 더 무섭다. 영화 [공모자들]은 그 자체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굳이 영상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 사건 자체가 실화라서 두려운 게 아니라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여객선에 탄 많은 사람들이 아내를 찾아달라는 남편의 목소리를 하나같이 묵인하는 현실이 더 놀라웠다. 어쨌거나 살인사건과 음악은 진짜 찰떡궁합이다. 아마 소녀시대 노래 틀어놓고 살인하면 그걸 못 듣게 될 거야.
쫓겨나게 생긴 이민자가 동족을 대신해 추방에 반대하다 홧김에 벌인 인질극 끝에 감옥에서 자살하자, 그제야 법이 바뀌면서 정작 자기 가족만 추방되게 생긴 몹쓸 아이러니, 국민의 혈세로 자기 배 불리며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이들(금융인과 정치인)을 스스로 벌하려다 국민에게는 박수를, 사회에서는 연쇄살인범으로 찍히게 될 어떤 남자의 서글픈 운명. 사실상 박수라도 보내야 할 입장인데도 그러지 못할 뿐더러, 이들의 희생에도 정작 세상은 그대로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충동처럼 통장에 꽂힌 돈으로 이 책들을 결제하고 있었다. 북유럽 스릴러가 쏟아져 번역되기 시작할 때, 언론은 할리우드의 식상함과 일본의 고전적인 추리에 질린 독자에게 먼 곳의 낯선 시공간이 이질적이면서도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했고, 어느 정도 맞았다. 일본은 가깝고 미국은 날마다 접하니, 변덕 심한 독자들 어느 정도 지겨울 때도 됐다.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이 완전히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읽어가다 보면, 그 호기심 또한 곧 말라버리고 말겠지만.
책장 한 번 잘 넘어가네. 난 내가 책을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이 책으로 세 번째 정도 깨닫는 것 같다. 책만 재밌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평화와 몸의 여유, 시간과 집중력까지 따라줘야 가능한 일인데. 나는 뭐랄까, 이 가을이 많이 행복하다. 이유없이 룰루랄라 ♬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그걸 찾을 필요도 없을 만큼 신이 나 있다.
책을 결제하는 손은 내 손이 아니었던 게지. 그리고 나는 <미스테리오소>한테 진 거다. 인정. 그리고 요즘 눈 뜨나 감으나(응?) 재미나게 읽고 있다. 순식간에 휙휙 넘어가는 페이지가 예사롭지 않다. 영화까지 본 마당에, 알만큼 아는 스웨덴 상황에, 어느 국가든 그런 이중적 아이러니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까지 훤하면서도 재밌다. 언론, 경제 분야에서 사회적 성문제와 소수자 문제 그리고 국가 문제까지 거론하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시리즈별로 각각 2005, 2006, 2007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헤닝 만켈 얘기는 안하겠다. <비스트>와 <쓰리 세컨즈>의 안데슈 루슬룬드(전직 기자)와 버리에 헬스트럼(전과자 출신 사회운동가)도 경험과 취재로 닦은 솜씨로 빚어낸 생생한 리얼리티로 범죄소설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셋 아니 헤닝 만켈까지 넷 모두 성격상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사회고발형 범죄소설에 해당한다. 범죄소설과 추리소설의 내가 느끼는 차이는 범인이 누구인지, 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가 중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다. 이미 이 소설은 범인찾기가 아니라 현실 자체의 묘사가 주는 리얼리티에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개인에 두느냐, 권력에 두느냐에 따라 혹은 탐정이 수사하느냐, 경찰이 수사하느냐에 따라 소재와 스케일이 주는 느낌이 다소 달라지긴 하지만 결국,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날 법한 범죄의 양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스웨덴 복지문제까지 거론하면 뭔가 반칙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도 있고, 재미와 지식의 차이도 있고, 현실과 환상의 차이에서도 반칙의 기운이 스멀거린다. 아주 잘 사는 나라라고 가난한 자가 없을 수 없고, 국민 전체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만 살 수가 없다. 가난과 부, 타락과 도덕은 상대적인 문제지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근절될 수 없는 유형에 속한다. 하다못해 복지정책 자체에서도 초점을 노인에 두느냐 청년에 두느냐에 따라 사회적 효용은 달라지기 마련 아닌가. 어느 사회가 더 현명한 사회인지는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며, 동시에 서로 다른 세대를 구제하지 않는 이상,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복지의 다양성과 불균형 또한 자명한 일이다.
한동안 북유럽 복지플랜과 실용과 폐단에 대한 책들이 다양한 분석적 시각에서 쏟아졌다. 대부분 읽지 못했으니 다양한 시각인지 비슷한 관점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곳의 복지플랜이 뜨거운 지구상에서 가장 핫하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복지가 가능하려면 아무리 모르더라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복지 정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책이 제대로 기능하고 수정,보완되도록 하는 사회제도의 기준치와 제재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먼저다. 또한 국민들의 사회적 합의인 높은 세금 부담율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 없는 돈으로 경제 재분배를 재촉할 순 없는 일일테니까. 그러니까 스웨덴 말마따나 사회주의에서 복지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말은 반만 맞다. 적어도 지금까지, 2000년대 들어 고성장이 압박받지 않을 때까지 스웨덴은 완벽한 모델의 복지국가가 맞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라오스처럼 UN과 관련한 국제법상 영세중립국은 아니지만 지리상 섬나라였기에 외세 침략과 전쟁에서도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쉬웠다. 인구가 적고 단일민족이며 두 번의 세계대전 영향에서 벗어났기에 유럽의 전쟁 이후 물결을 따라 고도의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국가는 신뢰도가 높았고 정부는 성실하게 일했으며 국민은 프로테스탄트 종교적 문화로 한마음이 되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니 기업의 도덕적 신장도 따라왔다. 따라서 전쟁의 뒷수습에 열올리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터져 나오는 복지국가 타이틀에 대한 조심스런 반납은 예고된 일이고, 스웨덴 복지정책을 따라하려는 여러 나라들의 목표는 잘못되었다. 과정은 빼고 결과만 얻어먹겠다는, 허울 좋은 심보로 남이 타던 차에 공짜편승하겠다는 뜻이다.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나라 스웨덴이 성장과 분배의 파이를 최대한으로 잡아 닦아놓은 복지지도를 보며 침흘리면서, 이미 성장할 만큼 성장한 우리가 그대로 덥썩 받아물면 성공할 거라는 순진한 기대는, 지금 여기서 다시 한 번 1970년대 개발성장을 해보자는 대한민국과 뭐가 다른가. 나도 그랬으면 진심 좋겠다. 강남이든 어디든 저개발 된 곳 땅 좀 사놓게. 때문에 스웨덴 복지 또한 고도로 성장한 국가 내에서 점차 삐걱거리게 된 것이다. 새로운 플랜이 필요한 시대에 도입한 것이다. 자국 내 천연자원을 펑펑 퍼다 쓰고 더이상 쓸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와 아마존을 파헤치고 다니는 미국의 개발업자들처럼 말이다.
어떤 정책이 뼈대가 되어줄 순 있지만 같은 상황에서 성장과 발전을 해온 국가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에 100% 재사용될 수 없다. 스웨덴의 복지정책은 정책의 방식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책을 실현할 토대 즉, 국가(정부), 국민, 기업 그리고 지리적 위치와 역사까지 적어도 다섯 가지가 넘는 쳇바퀴가 맞물리며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와 스웨덴을 복지모델로 무조건적 차용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수긍한다. 그런데도 스웨덴 즉 북유럽 복지에 대한 원형과 책들은 왜 한없이 쏟아지는 것일까. 그게 바로 성찰이나 과정 없이 결과만 바라는 잘못된 습성 때문 아닐까.
스웨덴 또한 복지정책의 꾸준한 수정이 필요하고, 그래왔을 것이다. 세계경제가 성장할 만치 성장한 지금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적어도 복지라는 분야가, 반에서 1등하기, 학교 내에서 1등하기 같은 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하다못해 그런 목표도 나보다 수학을 더 잘 하는 아이, 과학을 더 잘 하는 아이가 전학 오면 전략전술을 새로이 짜야 할 판에, 너무 안일하게 스웨덴 복지모델을 차용하고자 하는 건 시장조사 없이 뛰어든 창업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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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스웨덴. 두 가지 양상의 현상. 하나는 책, 또 하나는 정책. 스웨덴은 교육, 건강, 보육, 연금, 노인 복지 등 대부분의 분야를 무상제공해왔다. 석유가 펑펑 나기 때문에 공무원이 10시 출근도장 찍고 티타임, 점심시간 느긋하게 갖고 오후 2-3시면 퇴근한다는 중동 대다수의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무원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인력수급에 애를 먹고, 때문에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는 공공 직업의 자리. 어떤 나라는 그렇기도 하다. 노력 하나 없이 땅에 묻힌 지하자원으로 쉽게 돈벌고 쉽게 안락해지는데 굳이 일할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안일한 국가는 국민을 무능력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들이 대한민국처럼 악착 같았다면 대한인들은 지구상에서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유럽 어느 나라는 파트타임을 쓸 때 한국학생이라면 반색을 한다는데,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자국민들을 천대할 수밖에 없게 되어가는가. 카페 알바 하나도 이리저리 잴 정도로 자리가 없고, 인턴 자리 주면서 생색내고, 남아도는 건 공장 일자리 뿐이니. 우리 중에 제일 게으른 이조차 지구상에서는 상위 5%의 부지런한 이에 들 것이다. 쉽게 얻는데 어렵게 일할 필요가 없고, 쉬울 때에는 어려움을 생각하는 사람이 적다. 묻힌 자원이 언젠가 바닥날 걸 알면서도 그게 자신의 시대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산다. 때문에 돈은 많지만, 집은 좋지만, 점심시간은 세 시간이지만, 일하는 시간이 우리나라의 절반이지만, 사회인프라 시설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갖춰져 있질 않다. 중동은 우리에게 위험한 곳이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서도, 아무리 호화로운 생활이 보장돼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곳이다. 물론 시도때도 없는 테러로 인해 만들어진 인프라 파괴마저 걱정해야 할 판에, 건설해봐야 파괴될 텐데 뭐하러, 이런 얘긴 할 필요도 없지만, 하루가 달리 죽어나가는 판에 책이라니, 영화라니. 진정한 사치다. 차라리 좀 가난해서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밥 먹고 책 읽는 이 나라가 호사스러울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아무 것 가진 것 없는데다, 너무나 격렬한 경쟁과 여유 없는 현실이 인간성마저 좀먹지만, 내 입으로 이 나라가 호사스럽다는 말을 하게 될 줄, 그 시작이 스웨덴 범죄소설 몇 권과 스웨덴 복지를 얘기하는 책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더군다나 스웨덴만의 특별한 현상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스웨덴에 대해 아는 게 뭐냐고?
미안하지만 없.다.
나는 많은 걸 모르지만 스웨덴에 대해서도 역시 모른다.
가을에 문득, 바흐가 다가왔다. 글렌 굴드도, 흑백영화도 참 아름다운 계절. 아니 그렇게 보이는 계절. 몇 개의 영화를 사랑하고 싶은데 마음이 풍선처럼 떠서 자꾸만 자꾸만 영화 앞에 나를 데려다앉히지 못한다. 날이 너무 좋아서 눈으로는 세상을 보고 귀로는 음악을 듣고 몸은 그냥 두었다. 다들 미쳐서 열심히 살아가니까 나 하나 정도는 대충 하늘 아래 바다 위를 좀 날아다녀도 괜찮겠지. 햇살이 쨍하고 바람은 다소 차지만, 어쨌거나 나는 여물고 있다. 대추도 밤도 아니면서. 추석이 지난 지가 언젠데. 빨갛고 새콤한 사과는 매일 아작아작 깨물어 먹는다. 모기가 귀환했고 피부가 거칠어졌고 내가 애정한 드라마는 끝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