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간절함은 인연을 만들고, 기억만이 그 순간을 이루게 한다고."

-드라마, <신의>

 

 

올해는 정말 많은 시간여행자를 만났다. 사실 시간여행자는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다. 영화 [나비효과]는 시간여행 자체가 아니라 사소한 행동과 말, 상황 하나를 원인으로 해서 결과가 뒤바뀐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므로 제외. 끝난 후 시간이 꽤 흐른 몇몇 드라마들도 제외.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많이 써먹은 시공간적 소재들 전부 제외. 더불어 어릴 적 모험소재로 가장 좋아한 만화 돈데기리의 [시간탐험대]도 제외. 그러면 뭐가 남냐면, 음, 일단 점과 선에 대해 말해보자. 책제목 말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평행이론에 대해서도.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모른다. 잘난 척할 철학자의 견해에 대한 지식이 없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유지태와 김하늘이 나오던 영화 [동감]에서 시작됐는데, 그 영화를 떠올리면 그저 지금은 스타가 된 두 배우의 신인시절만 기억난다.

 

고1때 불어시간. 교과서에 실린 [그랑블루]라는 영화의 포스터에 대해 눈짓발짓 동원해 잡담하다 딱 걸려서 짝꿍은 교실 밖에 서있고, 나는 교실 뒤에 무릎꿇고 앉아야 했던 그때를 말해볼까. 나무로 된 바닥이 차고 딱딱하다며 뒤에 앉은 친구들이 저마다 교과서 한 권이나 책받침을 내밀던 사랑스러웠던 순간. 친구들아, 그때 정말로 사랑스러웠어,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 짝꿍과 나는 키가 비슷해 키순서대로 하면 언제나 짝이 되었는데(전혀 서로에게 호감가질 타입들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 걸 보면;; 걔는 새침한 모범생 타입이었고 나는ㅠㅠ), 그래서 억지로 우정과 신뢰를 같은 시공간에서 쌓아나갔다는 게 더 정확한데, 어쨌든 또 다른 어느 날에 우리는 연습장인가 노트에 동그라미를 크게 하나 그려놓고 공간의 1차원,2차원,3차원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공대 지원이 당연시되는 조숙한 이과반 여학생들의 드물게 쓸데있는 쉬는 시간의 심오한 대화였달까. 1학년 때는 문과/이과를 나누지 않았지만 친구와 나는 이과반을 지망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지구와 우주를 갈라놓고 인간은 동그라미 선 위에 살고 이것이 1차원,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면 2차원, 동그라미를 벗어나 살면 3차원 뭐 그렇게. 쉬는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하다가 까다로운 과목쌤 수업시간에 또 걸렸을 때 우린 벌서며 킥킥댔고 교무실까지 불려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린 어떤 프랑스 영화와 시공간의 과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혼나야 하는 건가, 뭐 그런 대화를 하면서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도 대화를 이어갔던 웃긴 기억이 있다. 1999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시간여행자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하루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그렇지만 일단 이 긴 리뷰를 써갈겨댔던 <1Q84>는 어떤가. 난 언제나 하루키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았지만 경이로울 만큼 매료되어서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가지치기가 가능해 다채롭게 읽히고 또한 해석이 가능한 그의 소설리뷰를 쓸 때 주목한 부분 역시 여러 명으로 쪼개지는 '나'라는 존재와 시공간여행이었다. 두 개의 달이 가르는 세상. 나이와 시간이 인위적으로 가르는 나. 방금 전의 나와 잠시 후의 나.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면 충분히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이 되고도 남았다. 이 모든 시작이 반드시, if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은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 그러니까 대장을 구하기 위해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는 때마다 제모습을 여는 하늘문을 오가며 외롭고 아프게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진행중일 것이다. 시간여행은,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언제나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하늘 아래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은 결코 없지만. 내가 여기, 그가 거기 있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런 것. 하나의 선에서 두 개의 점이 함께 평생토록 행복하기란 애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처음 하늘문을 넘어 그를 구할 온갖 약과 도구를 챙겨 다시 하늘문을 넘었을 때 하늘문 너머 세상은 그와 함께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울고 웃었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100년 전의 세상이었다. 제기랄,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도 아니고-_-;;

 

그래서 그녀는 쓴다. 방금 살았던 그와의 추억 속에 있는 시간들 중에 겪었던 수많은 고비마다의 해결법을, 사실 해결이라기에는 가이드라인에도 못 미치는 메모이지만 혹시 몰라서, 그가 위험한 순간, 왕에게로 가야 하는 순간, 사랑한 순간, 아파한 순간, 헤어질 지도 모르는 순간들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저기 숨겨놓는다. 100년 후 고려 공민왕 시대.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기철은 이것들 중 몇 개를 손에 넣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이라 굳게 믿은 나머지 거의 유물 다루듯 그렇게. 거기에는 100년 후 나타날 은수가 쓰던 의료도구와 은수만이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적힌 수첩, 빼곡한 일기와 메모들. 앞으로 펼쳐질 미래들. 100년 후 맞닥뜨려 헤쳐나가야 할 시간들이 빽빽히 적혀있다. 그것들이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고려의 현대인이었던 것이다. 가지고 더 가지고 손에 넣고 다시 버리고 그렇게 공허와 탐욕 사이를 한없이 방황하는 그런 현대인.

 

시간은 평행하다.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100년 전의 나와 10년 전의 나와 1000년 후의 내가 모두 이 세상 아래 존재하는 거라고 시간여행자는 말한다. 각자의 내가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이걸 인정해야 당신과 내가 지금 이 순간 만난 일이 기적이 된다고. 은수에게 최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은수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이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른 세상에 떨어져 나의 그리움이 모자랐을까, 아니면 믿음이..라고 자책하던 은수는 언제까지나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그에게로 가는 시간여행자를 자처할테니까. 그의 목숨이 곧 사랑이었음을 알고 있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사랑은 그것 뿐일테니까.

 

이것이 이 모든 시간여행자들의 사랑과 추억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이론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시간은 앞으로만 흐를 뿐 절대 뒤로는 흐르지 못한다. 하늘문이 열려야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뿐. 100년 전 써둔 바위틈의 이끼낀 필름통 속 메모를 100년 후에 발견할 수는 있어도 시간을 거스르거나 빨리감지는 못하는 법. 그래서 시간여행을 잘못한 그녀를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아직 그는 그녀를 만난 기억이 없으니까. 손택은 저서 [문학은 자유다]에서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 시공간을 시간여행자들은 초월하는 것이다. 두 개 중 어느 하나만 벗어나도 나와 너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데 두 개 모두 합치하거나 하나도 합치하지 못하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다. 읽지 않은 책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면 확 빨려든 문장이었단 얘긴데, 우연찮게 얼마 전 신형철의 칼럼에서도 손택의 이 문장을 만나고는 얼마나 반갑던지. 손택은 진리다. 어제는 손택의 비평집을 후보군의 책들을 끌어내리며 눈물을 머금고 질렀다. 다른 텍스트에 대해 얘기해보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보다 이곳과 저곳이라는 공간으로 더 먹혀드는 곳이 있다. 드라마 [울랄라 부부]에 의하면 전생의 원수가 이승에서 부부로 만나는 거란다. 개는 인간들로부터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이승의 인간이 죄를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난다는 말까지 있다. 게다가 나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다. 다음은, 바로 그 사랑이 이뤄지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이승과 저승을 말하는 드라마 [아랑사또전] 얘기다. 아랑은 무슨 연유인지 모른 채 저승사자를 따라 망각의 강을 건너 저승의 숲으로 들어간 와중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지만 이승에서 대체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왜 죽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랑은 자신에 대해 찾기 위해 사또 은오를 찾아갔다 사랑에 빠진다. 억울하게 죽은 아랑은 맘씨 좋은 옥황상제에게 보름달 세 개의 시간을 받고 죽음의 비밀을 찾아나선다. 둘 다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면서 사람으로 이승을 떠돌다 만나 사랑에 빠진 이들을 가로막는 건 한 공간에 있을 수 없고 한 시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은오는 아랑을 살리기 위해 저승길로 가고 아랑은 한 번 가본 저승길을 떠올리며 가는 길에 만나는 망각의 물을 절대 떠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옥황상제의 배려로 환생한 그들은 꼬마로 만난다. 이승과 저승 두 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승에 살더라도 이 시대와 저 시대가 또 두 사람을 가를 수 있으니까. 그럼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는 또 어떤가.

 

이 소설은 수없이 많은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30년의 세월에 초점을 맞춰보자. 다분히 의도로 보이는 장면이고 그래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갈등이 첨예하지 못하다. 더 깊고 뭉클한 데가 많다. 여백의 美 보다는 보여주기가 우선하는 영화로는 적합치 않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문학으로만 존재해야 할 이 소설은 바로 그 문학적인 면이 해석과 상상과 비극을 동시에 불러온다. 과거의 일을 원인으로, 미래의 일을 결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 모든 이들은 자기가 처한 혹은 만들어낸 현실의 기준으로 사건을 천명(闡明)하는 것. 해석. 시공간의 괴리는 그것을 불가능케 하고, 소설의 바깥에서 우리가 보는 진실 역시, 마지막 남은 이의 목소리 뿐이다. 마지막 남은 이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보이는 진실이다. 시공간의 왜곡이란, 진실을 얼만큼 빗겨갈 수 있나.

 

천산수도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자국. 30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펼쳐지는 두 개의 진실들. 마주하는 명제는 이것. 시공간의 일방향성.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시공간은 변하는 것. 나 없이 만들어지는 영화같은 것. 과거는 미래를 바꾸지만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닮았을지언정 둘은 결코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합할 수 없으므로. 천산수도원 묘지 안의 벽서. 성경구절들. 맞춰지는 퍼즐은 누군가의 상상 속 소설이 아니라 진실이 확실한가.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이제는 확인해줄 수 없는, 누구도 전체조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게 이 소설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인현왕후의 남자] 속 남자 붕도는 저곳에서는 쿠데타에 얽매인, 왕비를 지켜야 하는 비운의 무사로 적에게 죽임 당할 위기에 있지만, 이곳에서도 인현왕후의 남자로밖에는 살지 못한다. 조선 숙종 시대의 인현왕후 시해시도의 밤과 재기를 앞둔 발랄한 스캔들메이커 여배우 희진을 이어주는 건, 조선시대 붕도를 마음에 품은 어느 유곽의 기생이 준 부적 한 장이다. 이 드라마는 로맨스면에서만 탁월하다. 그리고 생생히 재생되는 조선시대상. 현대는 억지스럽지만 그 긴박함은 좋았다. 그리고 애정씬. 둘은 미치게 잘 어울렸다. 사랑을 하고 싶어질 정도로 잘 어울렸다. 함께 있지 못하면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을 수 있을까. 둘은 늘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경복궁에서도 제주 공중전화박스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기다린다. 시공간을 다루는 어느 드라마도 이토록 빈번히 이동을 시도하지는 않았는데 이 드라마만은 유일하게 이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이곳에 나타나고, 저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저곳에 나타나는 인현왕후의 남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동해번쩍, 서해번쩍 홍길동 아니 이 세상에 번쩍, 저 세상에 번쩍 하는 인현왕후의 호위무사 김붕도였다. 둘이 처음 만난 경복궁. 지금 이 순간, 인현왕후와 그녀의 잊혀진 무사에 대한 숨겨진 역사다큐의 내레이션을 맡은 희진. 희진은 붕도를 느낀다. 둘은 그렇게 400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한곳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진실을 부여잡은 채, 자신의 목숨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 모든 식물, 모든 동물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성장하고 서식하며 서로 파괴하는 과정에서, 절대 실질적인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 속에서 하나의 다양성을 맞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무심하게 서로 밀치고 파괴하며 번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형태를 가지고 잠시 나타났다가는 얼마 후 또 다른 형태를 취하며, 그들을 움직이기를 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의 뜻에 따라, 단 하루 사이에도 수천 번씩 그 형태를 바꿀 수도 있으되, 자연의 어느 한 법칙도 그 일로 인해 단 한순간이나마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사드, <미덕의 불운> 중에서]

 

사드의 소설 속 맥락은 그런 게 아니지만, 딱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그래, 괜찮다. 우리가 어떤 존재라도, 어떤 형태라도, 어떤 변화를 맞이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 시간여행자를 이해하려면 남이 볼 수 없는 것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내 생각은, 사드의 문장을 끌어오기 전 이 페이퍼를 딱 끝냈으면 좋을 뻔했다. 말이 길어지면 늘 후회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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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1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저는 시간 여행 보다는 평행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더 좋아요. 어쨌든, 이건 할 소리가 아니고, 저는 예전에 시간여행자의 아내 였던가 하는 책에 구미가 당겨 언젠간 읽겠다 다짐을 했었지만 입때껏 읽지 않고 있어요. 시간 여행은 그 이름 만큼 흥미롭고 다채로운 주제이지만 또 그만큼 뻔하고 지루한 소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나저나 아이님 아랑사또전 정말 좋아하시나봅니다ㅎㅎ 또 오랜만이에요!

아이리시스 2012-11-17 15:5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안녕. 우왕 반가운 마나짱!!! 안녕안녕.

저도요, 그때 그 책 구판으로 우리집에 있다니까요. 먼지 쌓여서. 별로 재미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읽다 말았어--; 아랑사또전(이거 말하기 싫지만) 진짜 재미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 나는 스무번을 봤어요. 스무시간을 넘도록 봤어..( '')

오랜만이에요! 주말에 뭐해요?

댈러웨이 2012-11-1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로운 거 하나 배웠어요. 시간여행이라는 용어가 있는 거네요. 상대성 이론이랑 막 연결되네요? (지금 공부 못한 거 티 내는 거죠? --;)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저는 올해 그런 걸 다룬 책이나 영화를 뭘 봤나 싶은데, 생각나는 게 마땅히 없네요.

이 다방면으로 커버한 페이퍼에 어떤 댓글을 달까 무지 고민하다가, 1. 손택 질렀군요? <타인의 고통>은 완독한 거에요? 2. <지상의 노래>는 이번 주문에서도 밀렸어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ㅠ.ㅠ 3. 저 문단만 저렇게 떼어놓고 보니까 사드의 <미덕의 불운>이 정말 읽고 싶어지는 거에요. orz.

한 페이퍼당 한약 일주일치, 도합 한약 2주일치를 폭탄으로다가! 이 페이펀 참 재미나서 용서해주겠어요! 아이님, 안녕!

아이리시스 2012-11-17 21: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시간여행자라고 했어요. 과학공부하기 싫어요. 재밌을 것 같은데 혼자하기는 싫어요. 멋지지 않아요? 시간여행해서 꼬마 댈러웨이님 만나러 가거나 20대 댈러웨이님 만나러 가고 싶어요. 사실은 저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못다한 사랑을 이루러..( '')

<타인의 고통> 다 못 읽었어요. 매번 펼쳐서 읽다가 자고 읽다가 자고 그래요. 어제는 [해석에 반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잤어요. 논문공부하는 줄 알았;; <지상의 노래>는 재미있어요. 그러니까요. <미덕의 불운>의 가독성은 저한테 짱이었어요. 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최근에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이 없었거든요.

사실은 이거는 <신의> 마지막회볼 때 썼던 거니까 오래 전에 쓴 건데, 지난 달에 쓴 거예요. 지금 끝나고 시작한 드라마가 2주나 방영했어요--; 게으름이 하늘에 닿으려 하고 있어요.

댈러웨이 2012-11-17 22:03   좋아요 0 | URL
저는 못 읽은 책들을 좀 읽으러..(쿨럭~) 그리고 저는 지금의 모습이 더 나아요! 근데 꼬마 때는 정말정말 구엽긴 했어요..(쿨럭~) 아 이 페이퍼는 이런 댓글 다는 페이퍼가 아닌거죠??? 저는 제 방인줄 알았다는. --;

아이리시스 2012-11-17 22:18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거긴 지금 12시 17분이예요? 그러니까 일요일? 저는 지금까지 쭈욱 우리가 처음 알게된 때부터 방금까지 쭈욱 제가 더 빨리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저는 말을 안하고 있으면 꽤 똑똑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2-11-1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 님, 안녕? 여전히 잘 하고 계세요. 흐뭇...ㅋ

아이리시스 2012-11-19 02:07   좋아요 0 | URL
페크님, 우리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맥거핀 2012-11-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솔직히 추천을 잘 안하는데 이글에는 추천을 눌렀습니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시간이나 공간을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뭐 꼭 시간여행이나 시간 거스르기 같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어떤 영화에서 어떤 한 장면에서 며칠 후의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을 압축하는 것이고, 그 시간을 생략하겠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고, 또 그 (압축된) 중간을 상상하라는 관객에게 보내는 권유이기도 하죠. (물론 공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구요.) 그런데 그것이 종종 색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경우들이 있고, 그런 영화들, 그런 이야기들에는 늘 매료되는 것 같아요. (오..진짜 손택의 저 말은 명문이군요.)

아..물론 이 글의 핵심은 나는 고딩 쉬는 시간에도 '차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했던 여자야, 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

아이리시스 2012-11-19 02:13   좋아요 0 | URL
우왕, 추천 잘 안하는 남자 맥거핀님께 낙점된 글입니다(으쌰으쌰).. 그런데 같은 이유로 저도 이 글이 맘에 들어요. 살짝 서정성도 있고 철학성도 있고. 그런데 텍스트를 드라마로 채워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제 드라마 편애 때문이기도 하고, 제 생각에는 맥거핀님이 이 주제로 글을 쓰면 참 재밌을 것 같아요. 좋은 영화들이 등장하는 멋진 글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이미 손택의 저 말을 외워버렸어요..

네, 이 글의 핵심은 고딩 쉬는 시간의 심오한 대화로 타임슬립한 저의 시간여행에 대한 얘기랍니다. 딴 얘기를 시작하면 오늘 안에 안 끝나고 또 오글거리니까..

굳나잇ㅡ 맥거핀님.

Shining 2012-11-1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드라마... 나는 왜 드라마를 못 보는가... 네, 저 그래서 아이님 드라마 얘기는 타임슬립(!)합니다. 고백할게요, 저는 드라마를 못 볼 뿐 아니라 드라마 관련 얘기도 못 읽더군요(흑).

지상의 노래, 에서 죽어가는 아내와의 이야기, 가 제일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 그런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말. 전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거나 용납하는 데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주말 내내 초바빴어요_- 오늘 새벽에 글 하나 올리고 지금 다시 보니까 오타와 비문이 장난 아닌... 부끄러워요_-

아이리시스 2012-11-19 15:54   좋아요 0 | URL
어.. 나는 아내와의 이야기 따위는 완전히 까먹어버렸는데요? 저는 교차편집만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성서구절.. 저 성경책 펼쳐서 사무엘하 13장 읽었어요. 요즘은 랭보의 시를 베껴쓰고 있어요!

같은 드라마(적 요소라고는 해도) 저는 시트콤을 못보거든요. 그냥 그렇게 안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왜 그런 지는 나름 분석이 가능하고 샤이닝님도 알 것 같은데 그거에 대해서는 패스. 저는 아마 잠을 줄여서라도 볼 것 같은 이런 집착--;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배우들의 필모그래피 확인차원이랄까. 얼마 전까지는 송중기의 사랑을 받는 문채원한테 빙의했다가.. 이제는.. [뮤직뱅크 in 칠레] 이런 거 보면서 흐뭇하다는;; (도대체 나의 취향은--;)

그러면 샤이닝님은 미드나 영드도 안봐요? 이건 좀 궁금하다.. 그건 뭐랄까, 좀 아쉬운데요?

Shining 2012-11-20 11:55   좋아요 0 | URL
일드는 본 적 없지만 미드나 영드는 꽤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만 많이 본 건 아니고 보다가 중간쯤 버려둔(로스트, 나 그레이 아나토미, 위기의 주부들 등등) 것들이 많구요_-; CSI는 광팬이고 멘탈리스트나 캐슬, 화이트 칼라 같은 거 잘 보는 편인데 대신 한 시즌을 이틀에 다 보는ㅋㅋㅋㅋ

그러니까 저는 연재를 못 기다리나봐요! 연재소설도 연재만화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보는 걸 보면 그것도 하나의 요인인 것 같아요. 드라마는 최소 16시간 적어도 20시간의 연재를 기다려야하고 클리셰를 견뎌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_- 한 번 보고 오 재밌네, 해도 잊어버리는; 그 다음날 챙겨보는 건 못해요. 아니다, 사실 TV 자체를 잘 안 봐요. 뉴스, 스포츠채널, OCN이나 채널 CGV, 주말 예능(무한도전 빼곤 그것도 챙겨보진 않고;) 이 정도만 봐요ㅎㅎ

근데 뭐지... 쓰다 보니 저의 TV시청 패턴을 다 쓰고 있어ㅋㅋ

아이리시스 2012-11-20 17:04   좋아요 0 | URL
응, 샤이닝님 얘기를 똑같이 하는 동생이 우리집에도 있거든요. 미드나 영드는 원래 한 시즌을 이틀에 다 끝내는 게 정석입니다(!) 요즘 물이 올라서 우리나라 것도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근데 역시 드라마는 일상 속으로 침투시켜서 하루에 한 회씩 보는 연재물 같은 느낌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송중기를 주말 내도록 보면서 생각했어요ㅋㅋㅋ

게다가 드라마 보다는 늘 제 '드라마에 관한 글'이 더 재미있다고 확신합니다!!!(응?)
^_______________^

2012-11-19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0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길어서 중간쯤의 감흥과 댓글용 코멘트를 다 잊어버렸어요. 핸폰으로 읽고 쓰는 중이라 정교하지 못해요~. 아 컴터하기 넘 힘들어요. 집에선 인터넷이 안 되고 직장에선 빨리 퇴근하고 싶고.. 집에 가면 전 석기시대여요. 요즘은 티비도 안 보니까 집에 가면 목욕하고 음악듣고 책읽으며 동굴 파다가 잔다지요~.ㅎㅎ 아이님 이 글 중간에 좋은 게 많았어요. 1q84부분, 고딩회상부분, 손택의 명문장.. 다른 부분의 글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특히 더 좋았더라는.. 신의, 마지막 세 개만 봤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댓글 엉망이죠? 이해하세요.. 투썸에서 야밤에 마땅히 멀리 해야 할 케잌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검지만으로 이 글 쓰고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2-11-20 17:18   좋아요 0 | URL
아니 핸폰으로 이렇게 긴 댓글도 쓰다니, 섬님 짱!! 집에서는 왜 인터넷이 안되는 거여요? 저희집에는 제가 와이파이도 손수 넣어놓고 원래 데스크탑에 들어오는 과속 케이블로부터 연결된 공유기도 있고, 다른집 인터넷도 엄청 잡히던데 그래서 하나 드리고 싶은 심정이여요. 그런데 케잌과 커피와 함께하는 야밤의 알라딘도 재미가 있으니까요. 시골가면 그렇게 되잖아요. 예전에는 산으로 뛰어다니고 나가서 숨바꼭질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커서 각자 노트북/스맛폰 이런 거 다들 들고 시골로 모여드니까 여튼 풍경이 확 변했어요. 동굴 파는 느낌 그것도 굉장히 괜찮은데~ㅎㅎ

제 글이 좋은 건 저도 알아요. 제가 요즘 좀 미친 것 같으니까요, 제 말은 걸러서 들으셔야 돼요!! 꼭이요!!!

루쉰P 2012-11-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시간여행자 한 명 돌아왔어요 제 서재 가 보세요 ^^

아이리시스 2012-11-20 17:19   좋아요 0 | URL
루쉰님 진짜 시간여행자 같아요.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낯설고 반갑고!!
 

 

 

 

활력과 탐구가 동시에 필요해서 사드의 소설을 몇 권 사들였다. 사상가인지 문학가인지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 일명 사드 후작(1740-1814)은 스물 두 살즈음 영화로 처음 만났다. 누구와 함께 볼 영화는 아니고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나온 영화라 혼자 보게 됐던 것 같다. 이제 그를 단지 외설적이고 도착적인 성적묘사로 이루어진 형편없는 작품 몇을 발표한 퇴폐적이고 난잡한 성생활을 한 프랑스 어느 작가라고만 기억하기엔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에 대한 평가나 판단 또한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왜 그런 작품들을 썼는지, 어째서 그토록 방탕한 성생활에 몰두했는지 같은 것들을 아는 게 어떤 도움이 될 지는 모르지만 욕 듣고 씹히는 와중에도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읽히고 회자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하리라.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재밌다기 보다는 호기심에 가득차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읽는다. '초롱초롱한'은 역시 내 바람일 뿐이겠지만. 하지만 처음 사드를 만났을 때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출생으로 어떤 시대와 환경에서 자랐는지 관심없었다. 음란하고 외설적인 글 때문에 쓰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히자, 배설물로 벽에 글을 휘갈기던 광적존재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그 영화는 사드의 여느 작품이 아닌 사드의 일대기를 다룬 [퀼스]였다. "쾌락은 내 인생의 모든 것, 생명과도 바꿀 수 없다"던 사드의 목소리가 두 시간 러닝타임 내내 머릿속에서 뱅뱅 울리는 그런 충격의 도가니를 체험했다. 외설적이거나 사디즘적인 면들이 거부스러웠던 게 아니라, 이토록 쾌락에만 집중하여 온갖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다 장모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그녀의 호소로 왕에게 사면장 없는 구금명령을 받았던 그가 문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다. 사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음란하고 외설적인 작품을 썼다는 것 뿐 아니라 실제 삶이 방탕과 쾌락으로 점철되어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가며 일생을 보냈다는 사실이 논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후 우연한 호기심으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보는데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편 처절하면서도 잔혹한 성적묘사로 일관하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올 여름 동서문화사에서 <살로 소돔의 120일>을 출간했는데 적나라한 내용 때문에 문화부에서 배포와 수거를 결정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설마 이런 시대, 이런 세상에서 책 한 권을 수거한다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파졸리니의 영화는 차라리 고어에 가깝다. 좀비물,하드코어 심지어 뱀파이어물에도 그다지 흥미는 없는데, 이성의 분뇨에 흥분하고 심취하여 먹고 먹이기까지 하는 장면을 흥미와 경악의 중간 즈음한 비명과 탄식 없이 지나치기는 힘들다. 사드는 귀족의 아들이었다. 인간답지 않은 성적취향을 논할 때 처제와의 불륜을 예로 드미는 건 이제 그리 수위높은 예는 아닌 듯하다. 문정희 시인이 골반 위에 부서지는 집으로 그 인생을 표현한 프리다 칼로의 사랑 디에고 리베라 또한 처제 크리스티나 혹은 아내의 친구와의 관계가 탄로나면서 그녀와 이혼한다. 아내가 해주지 못하는 욕구충족을 했다고 말하면 할말 없지만 이후 프리다 칼로와 재혼을 하면서 평생 그녀에게 절망과 고통, 상처를 안겨준다.

 

칸트와 사드와 라캉을 한 번에 철학과 정신분석학적으로 비교하면 재미나겠지만 일단 사드만. 그는 프로방스 지방의 명문 출신으로 통칭 사드 후작으로 불리고, 사디즘이란 명칭을 낳았다. 가학적 변태성욕의 대명사로 자신의 가문마저 사디즘의 대명사로 만들어버렸다. 부친이 죽으며 물려받은 후작 지위에도 불구,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마르세유의 홍등가에서 매춘부들과 쾌락을 즐겼다. 성 도착증과 매춘, 음란물 유포죄 등 줄줄이 열거가능한 죗값을 치르느라 인생의 3분의 1을 감금당한 채 살던 그는 정신병원 또한 번갈아 들락거렸다.

 

 

 

 

 

 

 

 

 

 

 

 

 

 

 

두 자매가 있다. 쥘리에뜨와 쥐스띤느는 분명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가 맞다. <미덕의 불운>(1791)과<악덕의 번영>(1797)은 두 자매의 이야기를 각각 담는다. 두 자매 중 언니인 쥘리에뜨는 <악덕의 번영>, 동생 쥐스띤느는 <미덕의 불운>의 주인공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유산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가문을 나와 세상에 내던져진 어린 두 자매는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든 살기로 다짐하는데, 그 다짐의 양상이 자매치고는 판이하다. 언니 쥘리에뜨는 여자로서 할 수 있고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거나 그러모아 남자를 홀리거나 재산을 모아서 돈 많은 남편을 가진 귀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일명 악덕의 번영. 동생 쥐스띤느는 몸을 팔거나 훔치거나 거짓을 말하는 일을 모두 거부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누구나 그녀를 이용하고 짓밟고 팔아넘기고 성적학대하는 이들 뿐이다. 길에서 굶거나 맞고 있는 거지를 도와 일으켜세워도 그들은 은혜를 갚겠다며 어디론가 데려가서는 팔아넘겨 이득을 취하거나 성적노리개로 이용하거나 일을 시켜먹거나 하는데 일명 미덕의 불운. 두 자매의 일생은 보여준다. 미덕과 악덕의 역설을 논하며 선과 악을 전복시키고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쉽고 이용하고 쉽겠냐고 묻는다. 먼저 출간된 <미덕의 불운>에서는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역경과 고통 끝에 귀부인에게 당도해 죽지 못해 산 이야기, 죽을 뻔하다 도망친 이야기, 죽음에서 갓 도망쳐나온 이야기를 열거하며 도움을 요청하던 동생 쥐스띤느의 얘기를 듣던 귀부인이 바로 언니와 형부임을, 그래서 지금껏 받고 있던 모든 혐의를 벗겨주는 운명론적 결론으로 약간 김빠지지만 그 과정이 워낙 흥미진진하고 생생한 고통 속 증언이라 어렵지 않게 문학성을 획득한다. 구구절절하고 눈물겹다.

 

<살로 소돔의 120일>은 루이 14세 치하 4명의 권력자가 젊은 남녀 노예들을 거느리고 120일간 벌이는 향락을 그린다. 파졸리니의 영화에서는 파시즘 정권하로 무대와 시대가 옮겨진다. 권력과 향락이 닿아있고, 쾌락과 허무가 다르지 않음을 이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시대와 배경을 완전히 옮겼는데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기존의 것들. 가만보면 쾌락을 즐기는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노예라는 이름으로 거부할 특권도 없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근친상간, 남색, 혼음 등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을 그지만 결혼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신성모독으로 체포된 걸 보면 그의 변태성과 가학성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온갖 묘사로 이 작품을 채우면서 비록 어긋난 방향인지도 모르지만 기성의 종교와 도덕에 반기를 들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가 지나쳐 인생을 감옥과 정신병원, 작품을 검열의 표적으로 만든 것만 제외한다면 그는 기실 가장 강하게 기존질서를 반박하는 혁명분자였던 셈이다. 실제로 훗날 반혁명분자로 찍혀 나폴레옹 치하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사드를 두고 성윤리를 논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쾌락을 인생 최대의 가치이자 모든 것으로 여겼고, 권력과 기성질서와 도덕에 매인 삶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의 작품묘사 중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상당수는 나치정권에서 상대에게 가혹함을 가할 때 응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오늘날 그가 추구한 쾌락적 가치는 독재와 권력, 강요와 부자유 등 기존의 것을 반박하는 하나의 혁명 혹은 반항의 이미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새로 쓰여지고 있긴 한 모양이다. 더불어 사드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수도원의 풍경은 스산하고 타락한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성스럽고 경건해야 할 지상 유일한 장소의 추악한 면을 들춰내 상세하게 묘사한다. 하루도 참지 못한다는 비금욕의 수도사들. 같은 대상인 것조차 지겨워 이틀에 한 번씩 다른 여자들을 안는 것. 감금된 여자들을 차례로 취하다 지겨워지면 방사한다는 명분으로 아무도 모르게 죽이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 종교가 성스럽다는 건 오늘날도 통용되지 않는 일인데, 역사상 한 번도 그 성스러움과 경건함을 가진 적이 있을지 의심되는 그 종교라는 이름으로 도덕을 요구받고, 정치라는 이름으로 억압을 강요당하는 현실이 그는 싫었던 것일까. 눈에는 눈, 이에서 이를 명분삼아 같은 방법으로 이 모든 벽을 허물어보려 한 것일까.

 

 

 

 

 

 

 

 

 

 

 

 

 

 

 

 

사드를 검색하니 이렇게 많은 책들이 딸려나왔다. 사드를 시대의 혁명아나 반항아 혹은 사상가로 접근하다가 나도 안드로메다 갈지도 모른다. 역시 사드를 두고 성윤리와 종교적 성에 대한 철학과 사상 강의하기가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다소 어릴 때는 뭘 몰라서 비위가 좋았나 보다. orz 다시 본 파졸리니의 영화는 몇 장면만 겨우 봤는데도 토할 것처럼 메슥거려 참기 힘들었다. 그의 생애와 몇 작품만 보고는 단지 외설적이라든가 저질 작품성이라든가 근본적으로 뒤틀린 반항아라든가 그런 판단을 내릴 수도 없어 보류하겠다. 사랑과 쾌락이 맞닿아 있을 수 있을까. 정작 중요한 건 내가 사드의 작품 속에서 남성의 성적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 다른 인간(약한 남녀 모두)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랑이라든가 증오라든가 미움이라든가 그런 감정들을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한없이 회자될 작품이자, 종교계에서도 거부하겠고, 문학계나 예술계도 미쳤다고들 하는데 대체 이 괴짜 사드를 어디에다 끼워야 하나. 절대본능과 절대자유를 추구했다고 한다면 지독한 쾌락주의자로 보겠는데, 그렇다면 자기 쾌락을 최대한으로 달성하기 위해 끼친 방탕아적 실생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작품 속 권력자/수도자/가해자들에 자신을 빙의한 채 써내려간 저 많은 작품들 속 피해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자유를 추구하기만 하면 쾌락이 달성되고, 쾌락이 달성되기만 하면 끝인가. 실제 그는 감옥과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리며, 어린시절 봐온 아버지의 권위와 강요당한 정략결혼에서 폭력과 억압을 당했고 그것을 사디즘의 시초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에게 가하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 받은 상대방의 '반응'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디즘의 어디쯤.

 

그의 상상력이 끼친 나치즘의 어마어마한 가학적 고통의 끝에 사드를 올려놓으면 그가 약간은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살로 소돔의 120일]을 제정신으로 보면서 나는 적어도 사흘 내내 끼니 때만 되면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이건 사드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파졸리니의 잘못으로 돌려도 맞다. 문화부에서 거부하는 책 <소돔의 120일>을 읽지 않고 파졸리니의 영화 만으로도 충분히 지옥을 경험했으니, 역으로 더욱 더 그의 작품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미덕의 불운>에 상응하는 <악덕의 번영>과 <소돔의 120일>을 나도 모르는 내 손으로 결국 장바구니에 넣어 주문버튼을 누르고 만다. 고통을 가하며 받는 자의 얼굴에 드러나는 고통의 적나라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흥분과 쾌락을 즐겼던 이들, 나중에는 눈을 뽑고 혀를 자르고 유방을 잘라냈다. 나는 책을 주문하는 내 손을 자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상상력이 더 필요한 건지 기어이 보겠다고 사드와 맞짱을 뜨려하나 말이다. 백발백중 내가 질 것 같고, 나는 기대와 충격을 동시에 경험하는 색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참, 4년 전에는 그래도 (아직은) 어디가서 나 젊어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스물 몇 살이었다.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뽑은 백인 나라는 지금도 그때도 오바마를 선택했지만 나는 그들의 선거제도에 대해 몰랐다. 그리고 이제 공부한다. 알고 싶었다. 혹자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룰을 가진 선거제도라고도 한다. 1787 헌법 규정 후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투표.. 25년간 미국이 현재 우리나라처럼 직선제를 하는 줄 알았다가 (내) 무식함에 충격이 컸다. 미국은 대선을 치르고 다음날 오후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당연히 3억표를 다 개표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줄로만 알던 것이다. 동서부 시차가 만들어내는 당연한 현상인 줄은 몰랐다. 이제와 보니, 아무와도 미국의 선거제도를 주제 삼아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튼 몇몇 티비 프로그램에서 미국대선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을 얘기하는데 다른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지금껏 많이 봐주고 있는 오바마가 2기 행정부에선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북한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일 거라고 진단하는 어떤 교수 앞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별로 좋지 않잖아-_-;; 전투와 전쟁과 갈등조장에서 쾌락을 얻는 이들도 다소 있는 것 같으니, 자, 이제 사드에게서 우리가 취해야 할, 상상의 강도를 가장 높여줄 쾌락적인 무언가를 취할 때다.

 

p.s 동서문화사 번역은 여기저기 말이 많다. 보지 못했는데 말로만 들어도 질릴 만큼 많다. 이상해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상한지 콕 집어내지도 못하는 독자에게, 좀 많이 가혹한 일인데, 일단 이 정도 사전지식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또 산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궁금하니까. 그리고 또 읽는다. 읽고나서 낱낱이 까발려준다. 그러다가 내가 번역한다. 마지막 문장은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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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6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6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1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이 페이퍼 정말 잘 읽었어요. 별 체크! 사실 이런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저는 너무 궁금한 거에요. 사드라는 사람 말만 들었지, 요목조목 정리가 잘 되서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겠어요. 내숭을 떠는 게 아니라 읽으면서도 저는 속이 안 좋아져서. 그런데, <미덕의 불운>이나 <악덕의 번영>은 재미있기도 할 것 같은데 좀 세요??? 문학적 가치가 있어요? 저는 <피아노 치는 여자>를 너무 못 읽어서, 이쪽으로 한 번 어떻게 계통을 세워봐야 하나 싶은데, 어떻게 읽기 시도를 해야할지 감이 안 와요. 저 이런 쪽으로 너무 모르니까 (음 저는 순수하니까. --;) 아이님이 좀 알려줘요. 땡큐!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11-17 21:44   좋아요 0 | URL
저는 <미덕의 불운> 괜찮은 것 같아요. 소돔만 빼면 둘은 함께 읽어야 좋을 것 같고, 문학성도 어느정도(생각보다) 획득하는 것 같아요. 저도 <피아노 치는 여자>를 안 읽어봐서(몇 번 중단;;) 비슷한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안 순수한가 봐요--; 재밌어요ㅎㅎㅎ 댈러웨이님 근데 자카란다는 봄꽃이예요? 보라색이 봄에 피는 건 좀 안 순수한 것 같아요.(뭐래?)

댈러웨이 2012-11-17 21:58   좋아요 0 | URL
자꾸 그럼 정말 맨날맨날 빵꾸똥꾸라고 그럴꺼에요. ㅠ.ㅠ 봄에 피니까 봄꽃인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ㅠ.ㅠ 보라색이 그럼 언제 피어야 하는 거죠? 여름?이 더 적격일까요? 가을은 좀 아니고... 멀리서 보면 색감이 정말 끝내줘요. 드문드문 가로수로 있어도 그렇게 끝내주는데 자카란다가 서울 윤중로 벗꽃나무들처럼 있다고 생각해봐요! <미덕의 불운>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피아노->는 한 번에 주욱 읽었는데, 너무 건조하게 읽었어요. 그러니까, 작품에 이입이, 그게 뭐였든, 전혀 안된 상태에서, 그래서?라는 토를 달고 계속 읽은 꼴. 그러니까 다 놓친거겠죠??? --; 이 페이퍼도 드문드문 위트! 아이님 위트!

아이리시스 2012-11-17 22:31   좋아요 0 | URL
아니 예전에 퍼플 웨이브 나왔을 때는 봄이 아니어서 그때 피는 꽃이라고 생각했다가 봄에 또 피길래 일 년내도록 피는건가 싶어서요(푸핫). 소나무인가;; 바보 인증--;

아이리시스 2012-11-17 22:38   좋아요 0 | URL
그럼 기다려주세요, 제가 올해 안에 <피아노->읽고나서ㅎㅎㅎㅎㅎ 비교문학을 한 번 해본 담에 댈러웨이님이 감정이입이 안되는 이유로 저 작품을 비판하는 레포트 쓸게요..(라고 거짓말한다..)

맥거핀 2012-11-1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잔혹함이나 외설적인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필시 실망하게 될 것 같은데 말이죠(라고 짐짓 3인칭으로 말해봅니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 파졸리니의 작품을 보느니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19 02:18   좋아요 0 | URL
파졸리니는 저 영화 속 어떤 소년에게 촬영 후 살해당했다는 게 제일 충격적인 반전인 것 같아요. 의외로 벗고있어도 포르노적 느낌보다는 비위상한다는 느낌이 압도적인 영화여서 잔혹함이나 외설적인 것을 기대하면 말씀대로 실망이예요;; 그런데 저 이제는 밥을 잘 먹습니다..

저도 책이 더 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미안해요, 봐버렸어요. 개봉도 안했는데. 그러니까 요즘 같은 세상엔 꼭 외국과 동시개봉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대신에, 개봉하면 지난 번처럼 꼭 보러간다고 약속할게요. 안갈 수도 있지만. 미안. 사실은 나 본 거 다시 보는 거 엄청 안 좋아해요. 살아갈 날 중 많은 시간, 그 시간 동안 봤던 걸 또 본다고 생각하니까 막 아까워요. 근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것도 이해가 가요. 동의해요. 그러니까 뭘 어쩌겠다고 이랬다저랬다 하냐고요? 아니,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고요.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는 것 같은데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걸 구경하면서 킥킥대는 듯한 느낌이라는 거죠. 둘 다 이해가 되고 맞는 말이지만 나는 본 걸 또 보는 게 아직은 싫은 걸 어쩌겠습니다. 물론 다시 보고 싶은 것들이 많죠. 어쨌거나, 사운드트랙이 엄청나네요. 이 자체로 충분해요. 훌륭해요. 음악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귀에 쏙 들어오는 게 별로 없었거든요. 저는요, 제가 클래식 보다 재즈에 더 귀가 열려있는 것 같거든요. 팝도 올드팝으로 배웠고, 락보다 컨트리가 좋은 걸 어쩌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할머니인 건 아니잖아요. 할머니 취향인지는 모르지만.. 물론 하루키만큼 엄청난 재즈박사라거나 한 건 아니에요. 일례로, 사실은 [재즈피플] 몇 달 보다가 뒷목 잡았습니다. 무식은 깨라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세월이 흐를 수록 나날이 확인하게 되는 그런 무지라니.. 저는 무식함은 별로 확인하고 싶지가 않아요. 모르는 걸 좀 더 부풀리는 게 성향에 맞죠. 저는 사사키 아타루도 아니고 간디도 아니니까요. 저 요즘 <간디 자서전> 읽어요. 나 책을 요만큼 쌓아놨어요. 서재에 책사진 올리는 거 처음 같은데, 제가 사진을 잘 못 찍거든요, 특히 책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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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굴하지 않을 거예요, 재즈 아는 사람만 재즈바에 가란 법 있고, [On the Road] 사운드트랙 들으란 법 있습니까. 방문 닫고 책상 위에 아로마 향초 몇 개 켜고 시디 넣어놓고 아무데나 걸터앉으면(앉아도 웬만해선 바 분위기 안나죠, 그렇죠) 되죠. 게다가 저는 좀 이탈리아 매니아 아니 애호가잖아요. 스치듯 지나칠 수가 없었죠.

 

이봐요, 음반이에요. 이 음반은 예전부터 발매되어 있었어요. 제가 나왔나 안나왔나 한 번씩 영화를 검색하기 훨씬 전부터요.

 

 

 

 

 

 

 

 

 

 

 

[On the Road]는 재즈, [To Rome with Love]는 칸초네거든요. 혹시 영화 봤어요? 책 봤어요?

 

 

 

 

 

 

 

 

 

 

 

 

 

 

 

 

저는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두 번 읽었어요. 2009년 첫 출간 때 한 번, 2012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또 한 번. 그런데 첫 번째는 아마도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덮었을 거예요. 어째서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했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는 1940년대 미국을 살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1980년대생이죠. 거기다 한국 토박이. 조용필이 더 좋은. 아니 조용필을 좋아하는 엄마의 딸로 자라난.

 

분명히 잘 읽히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소설'은 아닙니다. 여행이나 청춘 가이드로서의 산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라이어티한 비극의 변주가 든 것도 아니죠. 그런데 아주 어깨가 들썩입니다. 책으로 만족이 안됩니다. 당장 어디로라도 가야할 것 같아요. 물론 가는 게 어렵진 않죠. 어디로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해진 거죠. 알다시피, 어디론가 가는 것, 너무 재고따지면 아무데도 못 갑니다. 가는 건 말이죠, 일단 출발하고나서 생각해야 해요. 직장에 다니는데 떠나고 싶어지면요, 일단 때.려.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도 편도티켓만 끊어서 여차저차한 경우 되돌아오지 못하도록요. 휴가 그런 거 쓰려고 재고따지기 시작하면 아무데도 못가요. 그리고 용기 없는 자기 대신 용기있게 박차고 떠난 이들의 무모함을 질투하죠. 질투만 하면 애교게요? 욕하죠. 미래에 대한 플랜이 있니없니 하면서요. 부끄럽죠? 그래요, 그럴 거예요.

 

그런데요, 이 책은 아무 것 없이도, 무작정 충동적으로 길을 걷게 해요. 달려나가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한다니까요. 그 길은요, 도시의 길이 물론 아니에요. 한적하기만 한 시골길도 아니고 구경할 거라곤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을 걷자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알아요? 그 허허벌판이 내게 노래해주고 말을 걸어준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죠. 도시의 삶이 처량한 가운데도 반짝반짝 빛난다는 걸 알기 위해서는 도시의 삶 외의 삶 또한 알아야 공평하지요? 그러니까 저는 뭔가를 예찬하려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한 것 가운데'라는 말을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누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까지 다 알 수 있어요? 어느 누가 지구에서 우주까지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냐구요. 인간의 시야는 한없이 좁단 말입니다. 거기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가는 것만이 목표가 되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아요. 유명 혹은 무명의 장소에 가서 형체있는 걸 보고 마치 지구라도 구한 듯 사진이나 글로 변환해 올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여행법이잖아요?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오프닝 기억나요? 그럼요, 그걸 잊기란 꽤 힘들죠. 그냥 그런 장면일 뿐인데 어째서 잊히지 않는지 생각하다가, 그 여자는 왜 하필 그곳에서 내려버렸을까 오랜 시간 생각했었어요. 아무리 화가 나도 말이죠. 나라면 그런 황량한 곳에서는 절대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요? 뒷일도 좀 생각하란 말예요. 네? 그런 경험이 있나요? 어떤 연인은 국도 톨게이트에서 다퉜고 여자는 홧김에 거기서 내려버려요, 한참을 걷고 또 걷다 문득 빽을 잃은 것, 지갑이 없다는 걸 상기하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신만 압니다. 아니, 그 여자의 히치하이크 실력에 달렸죠. 아니면 그 여자의 몸매와 외모의 매력도에 달렸을까요? 또 어떤 여자는 아무도 없는 노루가 나타나도 하등 이상하지 않는 꼬불한 산길을 한 시간이나 걸었죠. 단지 그와 헤어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실험하기 위해 걷는 여정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케루악은 그렇게 했고 그것을 기록으로 옮겼고,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켰어요. 꺄악 >.< 이게 바로 문학의 묘미 아니겠어요. 저는 기행문학을 좋아합니다. 먹고 노는 것보다는 기행이 좋아요. 제가 소이진님에게 따라 가고 싶다고 썼던 고인돌 답사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는 기행문학의 계보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걸 다 들려줄 생각은 물론 아니에요. 이 책들을 읽거나 읽고 있어요. 여행은 어떤 방법으로든 멋진 일이니까요.

 

 

 

 

 

 

 

 

 

[To Rome with Love]의 첫장면은 여기서 시작해요! 어랏, 핀트가 맞는 사진이 하나도 없네요, 이름도 까먹었고, 그치만 파리의 그 강렬한 파스텔톤 아름다움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것. 로마의 중심부에서 시작한다는 것. 그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전부 있어요. 전작이 아기자기한 시간여행을 낭만적으로 표현한다면 로마는 많이 수다스러워요. 로마의 풍경이 파리의 그것보다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는 솔직히 말하기 어려워요. 다음 작품은 케이트 블란쳇과 브래들리 쿠퍼가 만나는 코펜하겐이라고 하니 이게 더 기대될 정도. 감독님, 이렇게 온 로망이 가득찬 유럽의 도시들을 차례로 훑으면서 사람을 낚으시면 안되는 겁니다, 네?

 

[On the Road] O.S.T.은 [브로크백 마운틴](꺄악,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음반이에요!)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영화는 좋아하는데 음악이 기억 안나는데요)과 [바벨]의 음악을 만든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만들었어요. 그럼 한 곡.

 

 

 

또 한 곡.

 

 

다시 한 곡.

 

 

아, 음악만 듣다 페이퍼 끝나겠네.

뜨끈한 미역국을 들이켜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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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0-2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화가 나왔네요. 그러고보니 여기 영화축제할 때도 초청받았었구나! 음악 지금 듣고 있어요. 유튜브 링크시켜주는 센스. 어쩐 일이에요? 게다가 책 사진도 올려주고? 저 이런 거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오늘 기분 좋군요? 좋다요. ^^ 저도저도 뜨끈한 미역국 먹고 싶어요. 막 기분이 노랑노랑해져서 주렁주렁 댓글을 달고 싶은 페이퍼이지만(으악 케이트 블란쳇, 으악 브로크백 마운틴, 으악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으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꾹 참겠어요. ㅎㅎㅎ 그나저나 아이님의 이탈리아 사랑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아이리시스 2012-10-26 22:48   좋아요 0 | URL
그걸 오늘부터 쓰세요, 저 보여줘야죠. 저를 이탈리아로 날려보내버려요(띄어쓰기를 어디에 해야하는 거야), 댈러웨이님. 이걸 세 곡 차례로 들었더니 그냥 미역국 생각이 나요. 끓여야 하나. 할 줄 몰라요. 으악, 댈러웨이님 엄청 기분 좋구나. 저도요. 크.

으악 괴물같은 페이퍼.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 제발제발.. 꾹 참지 말고요, 페이퍼 양산은 주말 자정까지. 으하하.

저 진짜 책사진 못찍지 않아요? 아니면 우리 집이 더러워서 사진빨이 안살거나.

프레이야 2012-10-2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전 영화도 책도 안 봤지만 사운드트랙 당장 담아가요.
물론 '길 위에서'도요. 전에 댈러웨이님 페이퍼에서도 담아두곤 아직 미루고 있었는데 이젠 못 참겠어요.
브로크백마운틴과 모터사이클다이어리의 그 음악을 만든 분이라구요?!!! ^^
오늘처럼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이런 음악 진짜 좋으네요. 잘 들었어요^^
근데 뜨끈한 미역국.. 급히 들이켜면 입천장 다 벗겨져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10-29 21: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관심에 무한감사요, 애정을 표합니다ㅎㅎ
못 참겠다는 얘기는 되게 좋은 말이군요. 영화가 나왔으니 케루악 붐이 일어나서 과거나 해외말고 이 나라 안에서 걷기와 히치하이크로 젊음과 청춘을 찾는 신드롬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세 곡 들으면서 엉뚱하게 칵테일 제조법과 이름을 몇 개 공부했어요,ㅎㅎㅎ

맥거핀 2012-10-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잭 케루악..어떤 영화에선가 주인공이 엄청 좋아하는 작가로 나왔었는데, 어떤 영화인지 도무지 기억이 안나네요.(뭐 제 기억력이 다 그렇죠.) 길은 저런길을 달려야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일단 저렇게 길만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죠. 길 외에 온갖 잡다한 것들(그러니까 뭐 휴게소라던가, 특산물판매소라던가, 톨게이트 같은 것)을 만나야하기 때문에 길 위에서의 사색, 황량함 같은 것은 뭐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이 나라는 뭐가 비어있는 꼴을 못보니까요.)

결국 책 인증을 하셨군요. 저거 다 읽으셨으면 빨리 읽는 비결을, 다 안 읽으셨으면 읽지않은 책을 조바심내며 쌓아두는 것을 견뎌내는 비결을 알려주세요.^^

아이리시스 2012-10-29 21:47   좋아요 0 | URL
응, 저도요, 아니면 책 속에서였나 있었던 것 같은데요, 뭐 제 기억력이 항상 그렇죠. 이제 [밀레니엄]마지막권입니다. 스타트. 맞아요, 좁은 땅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이 나라는 휴게소나 편의점이 없으면 죽는 줄 알아요. 근데 없으니까 진짜 죽긴 죽겠어..( '') 예전처럼 좀 꾸질한 우동과 핫바가 아니라 삐까뻔쩍하게 차려진 푸드코트형 식당에서 전자번호표 빼서 받으러가는 고속도로 휴게소 우동은 확실히 맛이 없더라고요. 비싸기도 엄청나고..

제가요, 한 번 가지런히 모아봤어요. 나름 착하게 정리해서 찍은 거랍니다. 원래는 온 천지에 널려있던 거여요. 한 권 정도 다 읽지 않았나 싶은데, 아, 그 조바심말인데, 책이 많으니까 주체를 못하겠어요, 맨날 펼쳐서 1장 읽고 다른 것도 그렇게 다른 것도 그런답니다. 비결.. 그런 게 있다면 부디 전수해주세요!

알로하 2012-10-2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 Rome with Love 재밌나요? '길 위에서'도 무척 흥미로워요. 어디든 가고 싶은 이 기분ㅋ 저도 빌리 홀리데이 좋아하는데요, 비 올때 들으니까 더 좋더라구요.

아이리시스 2012-10-29 21:54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오랜만이에요. 왜 한 번씩 나타나시는 건데요. 보고싶게.

빌리 홀리데이랑 엘라 피츠제럴드 좋아요. 오스카 피터슨도 좋고요. 혼자 마구잡이로 막 듣던 시절도 있었는데 계보가 없으니까 힘들어요, 음악은 누가 좀 차근차근 가르쳐주면 좋을텐데 그런 마음이에요.

특별히 재밌다고는 못해도 우디앨런을 좋아하고 유럽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충분히 볼만한 것 같아요. 토요일에 비가 많이 왔는데 정작 그때는 음악을 안듣다가 이런, 비오는 날 재즈와 올드팝은 환상궁합인데 말예요.

에세르 2012-10-2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리시스님의 페이퍼는 정말 매력적이네요.
흠뻑 빠져들게하는 마성같은 것이 글 속에 있습니다.
게다가 음악들으시는 취향이 너무 좋으십니다.ㅎㅎ
음악듣고 있자니,우디앨런의 To Rome with Love보고싶습니다.
소싯적에 우디앨런 좋아해서 시네마테크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열심히 보았었는데 말이죠.^^

아이리시스 2012-10-29 21:59   좋아요 0 | URL
에세르님은 우디앨런 좋아하시는구나. 저는 취향에 꼭 맞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초기작들은 좋던데요, 제 20대시절 개봉한 영화들은 워낙 그런 장르를 안보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와닿지 않다가요. 미국여행을 하고 유럽으로 건너온 어떤 언니를 유럽에서 만났을 때 좋아하는 감독이라며 우디앨런과 작품들에 대해 해준 얘기들이 이제 생각나더라고요.

저는 요즘 더 추워지기 전에 배낭매고 걷고 싶어요. [On the Road]의 영향이에요!

Shining 2012-10-3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디 앨런 감독은 도시 시리즈에 빠지셨나봐요ㅎㅎ 라고 쓰려다 보니까... 아이님은 알라딘의 우디 앨런이었군요!
도시 시리즈 매니아ㅋㅋ 저도 몇 년 전에 <길 위에서> 읽으려다 결국 실패. 아이님 말씀 공감. 전 1940년대 미국을 살지 않았으니까요..랄까. 전 여행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요새는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한국인 별로 없고ㅋ 작고 소박한 도시. 크로아티아나 노르웨이 정도가 좋겠어요(전혀 연관성 없는 두 나라;) :D

아이리시스 2012-10-30 13:28   좋아요 0 | URL
제 글은 이제 뭘 써도 도시시리즈 되는 거예요? 후훗. 누가 봐도 '길'이랑 '재즈'가 주제잖아요(라고 우긴다;) 오, 샤이닝님한테 걸린 크로아티아/노르웨이 나이스짱 부럽;; 크로아티아는 여행기 몇 번 봤는데 좋아요. 그런데 그 좋은 게, 관광객들이 막 갈 수 없어서 보존되어서 그런 것도 좀 있는 것 같아요.

한곳에 오래 살면 다른 지방과 도시로 가고 싶은 기분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돼서 이제 거의 포기지경. 이 동네 벗어날 날로 결혼을 꿈꾸고 있어요. :)

2012-11-0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2 0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2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디 자서전은 많이 읽었나요? (제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 식탁 위의 책 중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반갑네요. 저도 서두만 좀 읽은 채로, 요즘 읽는 책의 목록에 올려져 있거든요.
"길 위에서"에 대해, 호기심 돋우는 페이퍼네요. 당장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 하니 말입니다. (실험적으로 써서 정신 많이 없으려니 했던 나의 편견이 있었는데. 이 책에 대해서요.) 그나저나 '어떤 여자'와 '또 어떤 여자'는 실존인물인가요, 책 속 주인공인가요? 궁금해요.
저도 진짜 본 거 또 보는 취미 없는 사람인데, (특히 영화), 근데 사실은 꽂힌 거 보고 또 보는 사람들 부러워해요. 그 사람들은 진짜 뭔가를 사랑하는 거 같아서... 가끔 강제적으로 여러 번 보게 되는 영화가 있는데, 진짜 볼수록 좋긴 하더군요. (빌리 엘리어트,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로 그런 경험 했어요.) 그래도 자의로는 또 보진 않아요.ㅎㅎ

여튼 이 페이퍼 읽으면서 두 번 웃었답니다. 풉, 쿡. 이런 웃음. (어디게요?)
늘 재밌게 글 쓰는 아이님이 부러워요~

이탈리아 애호 증세는 시작이 괴테의 기행문부터인 건가요? 이것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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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한 것도 많고, 막 질문도 많은 댓글이지만, 대답 일일이 안 해도 됩니다.ㅋ (일일이 대답하려면 피곤한 질문이 많아서~)
아, 댓글은 오늘 쓰지만, 사실 이 글을 진작에 읽었었답니다. 좀 자주 써 주세요. 들어올 때 새글이 맨날 있던 옛날 아이님 서재가 새삼 생각나네요.^^

아이리시스 2012-11-14 17:17   좋아요 0 | URL
어떤 여자와 어떤 여자는 서로 다른 여자로, 아는 사람이에요. 소설 속에 안 나와요.. 저는 진짜 웃기게 드라마에 꽂혀서 해마다 또 보고 다시 보고 그래요. 그래서 진짜 뭔가를 사랑하는 느낌을 모르는 건 아닌데도 영화나 책은 자꾸 조바심 나서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요. 자의로는 아닌 섬님처럼도 볼 일이 그다지 없..제 주위에서 책과 영화를 저보다 더 사랑하는 지인은 없는 것 같아서요(불행하다..)ㅠ.ㅠ

괴테 No. 다빈치요,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피렌체서, 단테와 다빈치로부터(ㅋㅋㅋ) 제 이상형 만능엔터테이너 다빈치가 이탈리아 애호 증세의 시작인 것 같아요. 섬님, 이거 대답하는 거 하나도 피곤하지 않네요. 완전 재밌어요. 이상하네(풉)

자주 재밌는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필승!)

참, 웃긴 부분 어디...( '') 이런 건 말씀해주셔야 제가 또 써먹죠(유머력이 빈곤해서..!)

아이리시스 2012-11-14 17:26   좋아요 0 | URL
아 맞다, 간디 다음으로 줄을 쫙 세워놨는데 다음은 만델라였거든요. 근데 간디가..간디가..끝나지가 않아요ㅠ.ㅠ 뭐 매일 한두장 이러고 저 요즘 뒤늦게 애니팡 한다고 미쳐서.. 근데 저 완전 못해요!! 게임도 못하는 애 처음 봤어요, 진짜.. 그래서 올해 간디 할아버지만 일단 읽기로 그렇게.. (올해라고 해봐야;;) 저도 옛날에 산 책 같은데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식탁 위에 왜 등장했는지.. 막 쓸어와서 읽으려고 급조한 사진이라 부끄러워지네요(큭큭)

섬님, 자주 오세요!!

2012-11-15 21:15   좋아요 0 | URL
와오~ 심지어 단테와 다빈치로부터 애호가 시작되었다니 시작부터 엄청났군요. 아이님의 이탈리아 사랑은~^^
늘 재밌게 쓰시니 굳이 유머 포인트는 안 알려드리겠습니다.
저의 많은 질문을 즐기셨다니, (저는 답을 즐겼습니다.ㅎㅎ)
날 잡아서 질문 100개 막 이런 거를?!ㅋㅋ
간디가, 진도가 안 나간다니 그냥 두라고 하고 싶군요. 어떤 식으로든 빨려들어가는 책이 아니라면 이제 읽지 말자는 주의거든요. 요즘 제가요.
만델라까지 읽으실 작정이시군요. 늘 느끼지만 아이님 독서는 진짜 좀 거대한 데가 있어요. 후후후
저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앞에 눈곱만큼 읽고 2달째 쉬고 있는 책이에요. 아이님과 비슷하죠? (분명 읽은 데까지 재미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네요. 흐흐.)

아이리시스 2012-11-16 18:41   좋아요 0 | URL
네!!! 담에 제가 해야겠어요, 섬님 파헤치기 질문 100. 오늘부터 질문모으기에 들어가겠어요^-^

양철나무꾼 2012-11-1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도 책도 안 봤지만... 음반을 주문할래요, ㅋ~.
전 on the road하면 즐거운 나의 도시에서 'on the road'라는 이메일 계정을 쓰던 그가 생각나요.히힛~^^

근데여,브로크백 마운틴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바벨을 들이대면서 부추기시면 말이죠.
제대로 지름신인거 알고 계시죠? ㅋ~.

글이 맛있어요.
소리내어 읽으면 읽을수록 맛잇어요, 헤에~^_________^

아이리시스 2012-11-14 17:20   좋아요 0 | URL
아..그걸 계정으로 쓰는 그가 있었나요? 보기도 많이 보고 까먹기도 대장이고 제가 쫌 그래요, 힛
제대로 지름신인 줄 알았는데..어디보자.. 아무도 음반 사겠다고 안하셨.. 몰래 사셨나?!
음악중에서 저는 O.S.T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스토리가 있고 음악이 떠오르는..

근데 댓글 답 앞으로 안 달아주심 저 삐칠겁니다, 네, 그럴 거예요!!

불꽃나무 2012-11-1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주로 활동하시는 분은 거의 평론가 수준이네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2-11-15 20:35   좋아요 0 | URL
불꽃나무님의 좋은 글들도 앞으로 기대할게요.
감사해요^^
 

 

 

 

차라리 잠 한숨, 밥 한끼 더 먹는 게 낫겠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할 뻔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좀 다독이고, 우뇌로 좌뇌를 좀 설득했다. 반값에 혹해 몇 달 전부터 지른 e-book 리스트를 캡쳐하려는 만행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페이퍼 창을 연다. 인증샷은 이 나이에 좀 웃기지, 여튼 그렇게 잘 참아오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펭귄세계문학을 지르고, 민음사,열린책들세계문학도 지르고,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대산문학전집을 기웃거리다 한 권씩 지를 때도 꿋꿋하게 참던 건데, 참아지던 건데, 궁금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공짜로 볼 엄청난 기회도 그냥 붐이라는 단어 속에 날려먹었는데 왜 이제 와서, 왜. 진짜 좋은 건지 좋다니 좋은 줄 아는 건지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특필하는 <빅 픽쳐>도 그저 그래서 한 번 더 속는 심정으로, 아니지, 스토리K 선물받은 기념으로 <파리 5구의 여인>을 지를 때도 잘 참았던 충동인데, 그랬는데, 결국 내 손으로 결제버튼을 누른다. 다 이 책 때문이다. 어쩔 수 없어, 네가 원망을 들어야 해.

 

 

 

 

 

 

 

 

 

 

 

 

 

 

책을 꽤 샅샅이 뒤졌는데 이 책의 원년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99년이라고 책정보 페이지에서 알려주는데 그때 내 눈은 없었나 보다. 어떤 스웨덴 현실을 담으려 했는지 알지만 이제 북유럽의 대명사가 된 기이한 현상 '백야'만큼이나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다.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북유럽 환상을 한꺼풀 벗겨낸지 오래란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 현상 보다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 치우쳐 설명이 다소 늘어지는 측면이 있다. 다트로 사람 눈을 맞추는 기술은 놀라운데, 그걸 한 번 배워보고 싶기도. 어릴 때 벽에 걸어놓고 가끔 던지고 놀던 다트는 놀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 충분히 연상되는데도 엄마가 사준 걸 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한 국가의 전혀다른 두 얼굴. 복지국가 스웨덴과 동유럽 공산권과 손을 맞잡고 어둠의 터널을 통해 성장한 1980년-1990년대 대기업을 묵인하며 성장해온 스웨덴 말이다. 애견센터 옆에 보신탕 가게가 있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스티그 라르손을 결제하게 된 건 <미스테리오소>가 서문만 열어주고 만다고 생각해서 더 거대한 이야기가 고팠기 때문이다. 아르네 달이 스웨덴에서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마 시기상으로 늦게 나오다보니 앞 타자들이 했던 얘길 반복해 듣는 셈이 된 듯하다. 범죄소설, 추리소설, 경찰소설, 탐정소설 어느 범주에 넣어도 한 권으로는 모자라는 느낌이다. 스웨덴의 굵직한 정계,재계인사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상황, 단서는 '미스테리오소'라는 곡이 담긴 음반. 밝혀진 사실은 충격이라기 보다 수긍을 수반하게 한다. 예전에 하정우가 나오는 드라마 [히트]에서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얼마 전 소지섭이 나오는 드라마 [유령]에서는 'the phantom of the opera'가 깔리는데 무서워서 한동안 그 음악을 들으면 경기가 날 것 같았다. [유령] 보면서는 혼자 있을 때 모니터 불빛만 새어나와도 깜짝깜짝 놀랐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순간적 놀람을 두려움으로 연상시키는 연쇄상상은 공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게 하는 것 같다. 추리소설이나 공포영화가 보는 동안 무서운 게 아니라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게 더 무섭다. 영화 [공모자들]은 그 자체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굳이 영상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 사건 자체가 실화라서 두려운 게 아니라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여객선에 탄 많은 사람들이 아내를 찾아달라는 남편의 목소리를 하나같이 묵인하는 현실이 더 놀라웠다. 어쨌거나 살인사건과 음악은 진짜 찰떡궁합이다. 아마 소녀시대 노래 틀어놓고 살인하면 그걸 못 듣게 될 거야.

 

쫓겨나게 생긴 이민자가 동족을 대신해 추방에 반대하다 홧김에 벌인 인질극 끝에 감옥에서 자살하자, 그제야 법이 바뀌면서 정작 자기 가족만 추방되게 생긴 몹쓸 아이러니, 국민의 혈세로 자기 배 불리며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이들(금융인과 정치인)을 스스로 벌하려다 국민에게는 박수를, 사회에서는 연쇄살인범으로 찍히게 될 어떤 남자의 서글픈 운명. 사실상 박수라도 보내야 할 입장인데도 그러지 못할 뿐더러, 이들의 희생에도 정작 세상은 그대로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충동처럼 통장에 꽂힌 돈으로 이 책들을 결제하고 있었다. 북유럽 스릴러가 쏟아져 번역되기 시작할 때, 언론은 할리우드의 식상함과 일본의 고전적인 추리에 질린 독자에게 먼 곳의 낯선 시공간이 이질적이면서도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했고, 어느 정도 맞았다. 일본은 가깝고 미국은 날마다 접하니, 변덕 심한 독자들 어느 정도 지겨울 때도 됐다.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이 완전히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읽어가다 보면, 그 호기심 또한 곧 말라버리고 말겠지만.

 

책장 한 번 잘 넘어가네. 난 내가 책을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이 책으로 세 번째 정도 깨닫는 것 같다. 책만 재밌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평화와 몸의 여유, 시간과 집중력까지 따라줘야 가능한 일인데. 나는 뭐랄까, 이 가을이 많이 행복하다. 이유없이 룰루랄라 ♬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그걸 찾을 필요도 없을 만큼 신이 나 있다.

 

 

 

 

 

 

 

 

 

책을 결제하는 손은 내 손이 아니었던 게지. 그리고 나는 <미스테리오소>한테 진 거다. 인정. 그리고 요즘 눈 뜨나 감으나(응?) 재미나게 읽고 있다. 순식간에 휙휙 넘어가는 페이지가 예사롭지 않다. 영화까지 본 마당에, 알만큼 아는 스웨덴 상황에, 어느 국가든 그런 이중적 아이러니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까지 훤하면서도 재밌다. 언론, 경제 분야에서 사회적 성문제와 소수자 문제 그리고 국가 문제까지 거론하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시리즈별로 각각 2005, 2006, 2007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헤닝 만켈 얘기는 안하겠다. <비스트>와 <쓰리 세컨즈>의 안데슈 루슬룬드(전직 기자)와 버리에 헬스트럼(전과자 출신 사회운동가)도 경험과 취재로 닦은 솜씨로 빚어낸 생생한 리얼리티로 범죄소설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셋 아니 헤닝 만켈까지 넷 모두 성격상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사회고발형 범죄소설에 해당한다. 범죄소설과 추리소설의 내가 느끼는 차이는 범인이 누구인지, 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가 중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다. 이미 이 소설은 범인찾기가 아니라 현실 자체의 묘사가 주는 리얼리티에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개인에 두느냐, 권력에 두느냐에 따라 혹은 탐정이 수사하느냐, 경찰이 수사하느냐에 따라 소재와 스케일이 주는 느낌이 다소 달라지긴 하지만 결국,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날 법한 범죄의 양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스웨덴 복지문제까지 거론하면 뭔가 반칙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도 있고, 재미와 지식의 차이도 있고, 현실과 환상의 차이에서도 반칙의 기운이 스멀거린다. 아주 잘 사는 나라라고 가난한 자가 없을 수 없고, 국민 전체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만 살 수가 없다. 가난과 부, 타락과 도덕은 상대적인 문제지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근절될 수 없는 유형에 속한다. 하다못해 복지정책 자체에서도 초점을 노인에 두느냐 청년에 두느냐에 따라 사회적 효용은 달라지기 마련 아닌가. 어느 사회가 더 현명한 사회인지는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며, 동시에 서로 다른 세대를 구제하지 않는 이상,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복지의 다양성과 불균형 또한 자명한 일이다.

 

한동안 북유럽 복지플랜과 실용과 폐단에 대한 책들이 다양한 분석적 시각에서 쏟아졌다. 대부분 읽지 못했으니 다양한 시각인지 비슷한 관점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곳의 복지플랜이 뜨거운 지구상에서 가장 핫하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복지가 가능하려면 아무리 모르더라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복지 정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책이 제대로 기능하고 수정,보완되도록 하는 사회제도의 기준치와 제재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먼저다. 또한 국민들의 사회적 합의인 높은 세금 부담율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 없는 돈으로 경제 재분배를 재촉할 순 없는 일일테니까. 그러니까 스웨덴 말마따나 사회주의에서 복지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말은 반만 맞다. 적어도 지금까지, 2000년대 들어 고성장이 압박받지 않을 때까지 스웨덴은 완벽한 모델의 복지국가가 맞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라오스처럼 UN과 관련한 국제법상 영세중립국은 아니지만 지리상 섬나라였기에 외세 침략과 전쟁에서도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쉬웠다. 인구가 적고 단일민족이며 두 번의 세계대전 영향에서 벗어났기에 유럽의 전쟁 이후 물결을 따라 고도의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국가는 신뢰도가 높았고 정부는 성실하게 일했으며 국민은 프로테스탄트 종교적 문화로 한마음이 되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니 기업의 도덕적 신장도 따라왔다. 따라서 전쟁의 뒷수습에 열올리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터져 나오는 복지국가 타이틀에 대한 조심스런 반납은 예고된 일이고, 스웨덴 복지정책을 따라하려는 여러 나라들의 목표는 잘못되었다. 과정은 빼고 결과만 얻어먹겠다는, 허울 좋은 심보로 남이 타던 차에 공짜편승하겠다는 뜻이다.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나라 스웨덴이 성장과 분배의 파이를 최대한으로 잡아 닦아놓은 복지지도를 보며 침흘리면서, 이미 성장할 만큼 성장한 우리가 그대로 덥썩 받아물면 성공할 거라는 순진한 기대는, 지금 여기서 다시 한 번 1970년대 개발성장을 해보자는 대한민국과 뭐가 다른가. 나도 그랬으면 진심 좋겠다. 강남이든 어디든 저개발 된 곳 땅 좀 사놓게. 때문에 스웨덴 복지 또한 고도로 성장한 국가 내에서 점차 삐걱거리게 된 것이다. 새로운 플랜이 필요한 시대에 도입한 것이다. 자국 내 천연자원을 펑펑 퍼다 쓰고 더이상 쓸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와 아마존을 파헤치고 다니는 미국의 개발업자들처럼 말이다.

 

어떤 정책이 뼈대가 되어줄 순 있지만 같은 상황에서 성장과 발전을 해온 국가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에 100% 재사용될 수 없다. 스웨덴의 복지정책은 정책의 방식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책을 실현할 토대 즉, 국가(정부), 국민, 기업 그리고 지리적 위치와 역사까지 적어도 다섯 가지가 넘는 쳇바퀴가 맞물리며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와 스웨덴을 복지모델로 무조건적 차용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수긍한다. 그런데도 스웨덴 즉 북유럽 복지에 대한 원형과 책들은 왜 한없이 쏟아지는 것일까. 그게 바로 성찰이나 과정 없이 결과만 바라는 잘못된 습성 때문 아닐까.

 

스웨덴 또한 복지정책의 꾸준한 수정이 필요하고, 그래왔을 것이다. 세계경제가 성장할 만치 성장한 지금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적어도 복지라는 분야가, 반에서 1등하기, 학교 내에서 1등하기 같은 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하다못해 그런 목표도 나보다 수학을 더 잘 하는 아이, 과학을 더 잘 하는 아이가 전학 오면 전략전술을 새로이 짜야 할 판에, 너무 안일하게 스웨덴 복지모델을 차용하고자 하는 건 시장조사 없이 뛰어든 창업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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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스웨덴. 두 가지 양상의 현상. 하나는 책, 또 하나는 정책. 스웨덴은 교육, 건강, 보육, 연금, 노인 복지 등 대부분의 분야를 무상제공해왔다. 석유가 펑펑 나기 때문에 공무원이 10시 출근도장 찍고 티타임, 점심시간 느긋하게 갖고 오후 2-3시면 퇴근한다는 중동 대다수의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무원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인력수급에 애를 먹고, 때문에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는 공공 직업의 자리. 어떤 나라는 그렇기도 하다. 노력 하나 없이 땅에 묻힌 지하자원으로 쉽게 돈벌고 쉽게 안락해지는데 굳이 일할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안일한 국가는 국민을 무능력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들이 대한민국처럼 악착 같았다면 대한인들은 지구상에서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유럽 어느 나라는 파트타임을 쓸 때 한국학생이라면 반색을 한다는데,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자국민들을 천대할 수밖에 없게 되어가는가. 카페 알바 하나도 이리저리 잴 정도로 자리가 없고, 인턴 자리 주면서 생색내고, 남아도는 건 공장 일자리 뿐이니. 우리 중에 제일 게으른 이조차 지구상에서는 상위 5%의 부지런한 이에 들 것이다. 쉽게 얻는데 어렵게 일할 필요가 없고, 쉬울 때에는 어려움을 생각하는 사람이 적다. 묻힌 자원이 언젠가 바닥날 걸 알면서도 그게 자신의 시대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산다. 때문에 돈은 많지만, 집은 좋지만, 점심시간은 세 시간이지만, 일하는 시간이 우리나라의 절반이지만, 사회인프라 시설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갖춰져 있질 않다. 중동은 우리에게 위험한 곳이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서도, 아무리 호화로운 생활이 보장돼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곳이다. 물론 시도때도 없는 테러로 인해 만들어진 인프라 파괴마저 걱정해야 할 판에, 건설해봐야 파괴될 텐데 뭐하러, 이런 얘긴 할 필요도 없지만, 하루가 달리 죽어나가는 판에 책이라니, 영화라니. 진정한 사치다. 차라리 좀 가난해서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밥 먹고 책 읽는 이 나라가 호사스러울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아무 것 가진 것 없는데다, 너무나 격렬한 경쟁과 여유 없는 현실이 인간성마저 좀먹지만, 내 입으로 이 나라가 호사스럽다는 말을 하게 될 줄, 그 시작이 스웨덴 범죄소설 몇 권과 스웨덴 복지를 얘기하는 책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더군다나 스웨덴만의 특별한 현상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스웨덴에 대해 아는 게 뭐냐고?

미안하지만 없.다.

나는 많은 걸 모르지만 스웨덴에 대해서도 역시 모른다.

 

가을에 문득, 바흐가 다가왔다. 글렌 굴드도, 흑백영화도 참 아름다운 계절. 아니 그렇게 보이는 계절. 몇 개의 영화를 사랑하고 싶은데 마음이 풍선처럼 떠서 자꾸만 자꾸만 영화 앞에 나를 데려다앉히지 못한다. 날이 너무 좋아서 눈으로는 세상을 보고 귀로는 음악을 듣고 몸은 그냥 두었다. 다들 미쳐서 열심히 살아가니까 나 하나 정도는 대충 하늘 아래 바다 위를 좀 날아다녀도 괜찮겠지. 햇살이 쨍하고 바람은 다소 차지만, 어쨌거나 나는 여물고 있다. 대추도 밤도 아니면서. 추석이 지난 지가 언젠데. 빨갛고 새콤한 사과는 매일 아작아작 깨물어 먹는다. 모기가 귀환했고 피부가 거칠어졌고 내가 애정한 드라마는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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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8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9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9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2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0-19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언 어산지도 지금 런던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꼼작도 못하고 보호받고 있잖아요. 스웨덴이 여자 두 명을 내세우면서 말도 안되는 성폭행 혐의를 씌어서는. 아, 진짜 지난 주에 그 다큐보다가 열폭했던거 생각나네요 지금. 스웨덴이랑 미국이랑 아무래도 무슨 내통이 있었겠지 싶은데 여기 정부는 도대체 자국시민 하나 보호도 못하고 미국때문에 나몰라라 눈이나 감고 있고. 줄리언 어산지 아버지 근데 진짜 멋지다요. --;

아이님, 짠~ 하고 나타났군요. 요즘 저도 글렌 굴드 계속 듣고 있는데 저 동영상을 여기서도 보다니. ㅎㅎ 가을을 누리고 있었군요. 좋아요. 글이 좀 쓸쓸하게 읽히기도 하지만 가볍게 날아다니고 있다니, 좋아요. 리뷰도 잘 보고 가요. ^^

아이리시스 2012-10-22 17:1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위키리크스를 읽는데 저는 어산지가 어느 순간 지구상에서 증발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무서웠어요. 그분이 호주 사람이었구나.. 미국인인 줄 알았.. 아..댈러웨이님 네 줄에 음모론 있다..크.. 자국시민 하나 보호 못하는 건(시민의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여기 뿐만은 아닌 것 같네요!

오늘 플레이오프 5차전 해서(부산에서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비바람 그쳤으면 좋겠어요^-^

비연 2012-10-19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가을날. 글렌 굴드의 음악... 정말 좋네요...아...정말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2-10-22 17:09   좋아요 0 | URL
...속에 든 비연님 감정이 훅 다가오는 오늘은 월요일이고 비바람 불고 가을입니다.. 체감으로는 겨울 분위기인데.. 한 순간 좋으셨다니 저도 좋아요 ^_________^

오늘같은 날은 뭘 들어야 할까요. 아까 아침에 3000곡이나 뒤졌는데 뭘 들어도 귀에 쏙 박히지가 않았어요. 요즘 저는 좀 이상해졌어요ㅠ.ㅠ

맥거핀 2012-10-19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델을 좋은 거 들여오는 것도 좋지만, 일단 사고를 좀 바꿔야죠. 며칠 전에 프랑스의 고소득자 세금 정책에 대한 기사와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이 나라가 왜 MB같은 분이 대통령이 되었는지 알겠더라는..이번에는 암튼 스웨덴이군요. 세계일주만 하지 마시고, 알라딘에도 종종 나타나주세요.^^ (근데 이 많은 책은 도대체 언제 읽는 겁니까?)

아이리시스 2012-10-22 17:0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시작만 하면 소설이야 몇 시간 내로 읽히는 거 아시면서..이 많은 책이라니.. 이런 거 물어보심 반칙입니다! 저는 티비 보면서 소설 읽는 건 이제 습관적이라서(ㅋㅋ)

프랑스 고소득자 세금 정책에 대한 기사 궁금하네요..링크 좀..MB같은 분도 이상하지만 대한민국에 안 이상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좀 불신주의자ㅎㅎㅎㅎ

고상하게 선언해놓고 루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장 이후 멈췄습니다.. 맥거핀님께 (혼자) 약속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ㅠ.ㅠ

2012-10-21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역시 뭐 하나 읽었다 하면 그쪽으로 뿌리를 뽑으시는군요. 아이님은.^^
스웨덴 복지 관련 글 완전 공감하며 읽었어요. 복지는 결국 도덕성의 문제이고, 복지 실현은 진짜 조금씩 그 나라 사정에 맞게 만들어가는 과정의 문제이죠. 우리나라는 진짜, 어휴... 전, 이 나라가 매우 싫어요.ㅎ
그나저나 애정하는 드라마는 뭐였을까요? 혹시 "골든타임"?
저의 직장동료는 송지나-김종학을 좋아하여, '신의'를 강추하더군요. 마지막 남은 4화라도 보라며... 그래서 월요일부터 보려구요. 요즘음 슈스케4 빼고 티비 하나도 안 보게 된지 오래됐어요. 그나마 슈스케는 이제 정떨어져서 못 보겠게 되었고.. 맨날 책만 읽고, 음악만 듣고, 인터넷만 해요. 영화도 볼 거 없고...^^;

아이리시스 2012-10-22 16:59   좋아요 0 | URL
저 원래 집착적인(파고드는) 성격 아닌데(맞는 것 같기도하고) 이 서재는 좀 그렇게 만들어요. 좁은 바닥, 치열한 경쟁(그 경쟁심은 나만 느끼죠ㅋㅋㅋ) 홀로서기 하려면 내 분야를 파야 하는거다, 뭐 그런 느낌? 무엇보다 즐찾이웃분들 안 줄어들도록(히히히)

스웨덴 복지는 저도 잘 몰라서 책 한 권 읽으려는 상태구요, 이 나라 같은 경우엔 이민자에게도 철저히 차단되어 있는 듯한데 이민정책도 궁금하네요. 우리나라도 이제 난민법 공포됐는데 갑자기 궁금했어요. 앗, 그 직장동료분이랑 저랑 친구될래요. 소개 좀.. 저 드라마는 '신의'예요. 재밌다고 누구더러 보라거나 하는 성격 못되고 그냥 좋아요. 요즘은 연달아 두 번씩 봐요(ㅋㅋㅋ) 요즘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되는대로 모든 드라마를 다 챙겨보고 있는데 지난 주 끝난 '아랑사또전' 보면서 뒷머리 잡고 '골든타임'은 사실 한 달 전에 종료됐잖아요. 애정했지만 그건 뒤늦게 편승해서 사흘만에..( '') 전 원래 좀 모 아니면 도라서..

영화는 항상 좀 그런 것 같아요. 뭐 딱 맘에 드는 게 없어요..^^;;

2012-10-20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랜굴드 좋아하시나요? 전, 지식채널에서 본 '클라라 하스킬'에 관심있구요. 글구 이무지치의 사계가 너무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7700원짜리) 앨범이 절판이라 절망이에요. 그런 줄 모르고 전에 산 거 친구 줘버렸거든요. 다른 버전의 시디는 함 사서 들어봤는데 영 감이 멀던데... 엊그제 다시 라디오에 이무지치 사계의 가을이 들려와서, 다시금 또 반해서, 월요일에 지르려고 해요. 절판 아닌 앨범 두 개 다! 다른 사계로는 만족이 안 돼요..ㅠ.ㅠ

아이리시스 2012-10-22 16:50   좋아요 0 | URL
섬님, 제가 글렌굴드 좋아할 만큼 음악을 안다면 걱정도 없겠어요ㅠ.ㅠ 글렌굴드가 아니라 저는 바흐를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리고 피아노곡을 좋아해요. 그냥 바흐의 골드베르크 검색하다 글렌굴드가 나와서 저기 퍼온 거예요, 뭐 그런 거예요^-^ 남들 듣는 만큼, 아는 만큼 딱 그 정도 글렌굴드 알고 있어요.

7700원짜리 찾아보고 옴.. 클라라 하스킬이나 이무지치 아예 모르겠습니다.. 그것보다도 다른 사계로는 만족이 안 되는 느낌은 뭐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요..크큭. (아, 이거 좀 부러운데요..)

에세르 2012-10-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엄청납니다.
스웨덴에 대해 여러면들을 들춰내는 압도적인 글입니다. 마지막을 갑자기 바흐로..! Anti-Climax...점강법인가요?ㅎㅎㅎ
너무 멋지네요.

아이리시스 2012-10-29 21:37   좋아요 0 | URL
엄청 많이 비장해졌죠. 북유럽을 동경만했지 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는데요, 이번 기회에 지명이름도 많이 외우고 또 성 같은것들도.. 푸핫. 저는 제가 유럽지도를 그릴 줄 안다고 철썩같이 자신했는데 거기 사실은 서유럽만 있더라고요. 북유럽과 동유럽은 없고..

감사하다는 말은 꼭 끝에 붙입니다, 이 얘길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이진 2012-11-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래라아아아아- 글렌굴드 바흐는 정말 유명하잖아요.
안그래도 오늘 신나게 클래식 왕창 듣고 오는 길인데! ㅎㅎ

아이리시스 2012-11-12 19:24   좋아요 0 | URL
클래식 삼매경 소이진 어린이. (음악에 무식한) 누나한테 많이 가르쳐줘요. -_-V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차백만 옮김 / 미래의창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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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반복보다 더한 강요는 없다. 강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단순의견을 반복적으로 피력할 때에도 같은 의견을 가지지 않은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폭력과 억압으로 변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다수라고, 옳은 건 아니라는 것. 히친스는 '반대파'가 언제나 소수이며, 개인의 올바른 의견이 다수의 그럴 듯한 의견보다 힘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경제, 사회, 종교, 국제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시키며 온갖 분야의 다른 사고방식을 훑으며 당당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질을 젊음이 가진 하나의 특권으로 인식시키려 한다. 그런 점에서 히친스의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며 때로 폭력적이다. 히친스는 도킨스, 촘스키와 함께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 5위 안에 들면서 그의 급진적 사상 또한 관철시켰다. 철저한 무신론자이며 <자비를 팔다>에서 이 시대의 성녀 테레사 수녀를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한 인격비방이 아닌 사회복지와 종교적 차원에서의 그것이다. 이런 급진성은 더욱 뚜렷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불일치가 불러오는 독창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껄끄럽거나 위험하다.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밍밍하게 묻어가려는, 시대에 편입하지도 시대를 비판하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일침이기도 하다. 열여덟통의 편지는 '다른'입장, '다른'반대, '다른'의견을 통해 이 시대를 말하고 있다. 출간과 번역의 시차가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나는 나가지 않겠소. 당신들에겐 나를 석방할 힘이 없소. 나를 석방해서 당신들이 이득을 볼 권한은 더더구나 없소. 나는 다른 모든 이들이 석방됐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리고 모든 폭압적인 법이 폐지됐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이곳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거요."

 

그 순간, 과연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했네. (그리고 그전까지 전 세계 정부들은 이 인종차별주의 정권강탈자들이 노략질한 권력을 유지하고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온갖 터무니없는 외교적 타협안을 제안해왔다네.) (p.151)

 

27년간이나 자신을 가뒀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들로부터 내려온 자유를 거부하며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다. 이어지는 권력의 맛. 감시하고 탄압하고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선동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일. 시몬 베유는 정의는 원래 '승자의 진영에서 도망치기 마련'이라고 했고,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다수 좌파, 진보 진영이 언제나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지도 모른다. 마틴 루터 킹 박사는 암살되기 전날 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를 떨치기 위해 에로스 즉 성적 본능에 골몰해 꽤 추잡한 혼외정사를 벌였고, 이는 생식기 달린 포유동물은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본능적 행위를 인정하면서 영웅적 인물의 인간화(세속화)를 보여준다.

 

카뮈는 조국 알제리가 부당한 식민체제에 맞서 전쟁을 벌이자 고민에 빠졌지. 즉, 반란군들이 무작위로 폭탄테러를 벌이는 과정에서 식민군 병사들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쉽게 자신의 늙은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결국 카뮈는 만약 자신이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네. (pp.160-161)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덫, 양날의 검, 개인인가 단체인가 등의 선택권에서 카뮈조차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로 들며 선택과 저항, 반대의 주체성을 스스로 획득하기를 촉구한다. 양심과 도덕기준. 개인과 역사. 흐르고 변하는 일련의 시간들 앞에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히친스는 이렇게 고한다.

 

자네는 과거의 불행하고 불평등하며 비이성적인 상황에 도전했던 이들의 힘겨운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 되네. 나아가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하네. 즉, 무리나 파벌이 제 아무리 뛰어난 사상을 지니고 있더라도 결코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선 안 되네. 자기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걸세. 자신 있게 '우리'를 내세우거나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 이들을 결코 신뢰해선 안 되네. 만약 이런 목소리가 자네 생각에서도 발견된다면 자네 자신부터 의심하게. 다수로부터 오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늘 연대와 동의어는 아닐세. 오히려 그건 합의와 압제, 그리고 동종의식이라고 할 수 있네. '다수'를 언급하거나 '민중'을 칭송할 때도 이런 무리는 결국 개인으로 구성된다는 걸 절대 잊지 말게. (pp.165-166)

 

최근 MBC <아마존의 눈물>의 주인공 야노마미족의 몰살은 브라질에 만연한 불법 금 채굴업자의 만행과 이를 묵인한 브라질 정부의 합동작전으로 행해졌다. 단 세 사람만이 학살이 자행된 시간 사냥을 나갔다 변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종족과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우리가 해줄 말은, 위로는, 더 보여줄 인간으로서의 도덕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해 히친스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물론 원주민 학살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금이나 광산 채굴로 인해 멸종된 종족이 야노마미 원주민 뿐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TV로 만난, 그 정답고 해맑은 이들의 터전이 이제 없다는 사실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쿤데라의 <농담>에 나오는 주인공은 트로츠키에 관한 농담 한 번 잘못했다가 평생 그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저주에 휩싸인다. 어떤 시대는 어떤 말로도 해명하기 힘든 시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졸라가 타협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할 때, 오스카 와일드는 반대로 했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히친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손을 든다. 사르트르가 반항아는 내심 세상과 체제가 지금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반면, 혁명가는 진정으로 현재 상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길 원한다고 구분짓는다. 또한 촌철살인과 위트는 급진주의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손꼽힌다. 키신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두고 '이보다 더한 코미디는 없다'며 가수를 그만 둔 톰 레러, 1992년 당시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이 대통령 경선에서 유약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정신지체인 흑인 리키 레이 렉터라는 사형수의 사형을 명한 일, 이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침묵, 장시간의 지루함과 간헐적인 공포로 이루어진 전쟁을 급진주의자의 삶과 동일시한 것, 확신과 경험으로 실제 움직여야만 이뤄낼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미미할 수도 있는 반대파의 삶. 많은 사례들이 함께 한다.

 

시사와 논점이 분야/쟁점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박식함 덕에 250쪽 남짓한 이 책을 보름 가까이 붙잡고 있었다. 그래봐야 밑바닥 뚫린 독서력만 확인한 셈이지만, 시야와 관심사를 더 넓혀야 한다는 것과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라는 자신감 그리고 행동과 실천의 중요성을 촉구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세상과 시사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관심 가지는 정도는 얼만큼인가. 히친스가 기준이라면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신이 정의롭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내 조국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워서 몸이 떨린다." (p.103)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의 원죄에 대해 한탄한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국제사회 아니 이 사회만 봐도 늘 의문에 의문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던 조지 오웰의 말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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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0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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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1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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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2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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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8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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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9 07: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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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는 리뷰군요. 별로 즐겁지 않은 것들이지만... <아마존의 눈물> 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리시스 2012-10-18 18:30   좋아요 0 | URL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는 책이었거든요, 섬님. 마틴 루터는 좀 놀랐지만 저게 사실인지에 대한 여부와 책임은 그냥 히친스에게 떠넘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마존의 눈물> 일은 좀 많이 놀랐어요..

ghostsoup 2012-11-0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책의 판권에 이름이 실리진 않았으나, 이 책의 기획자입니다. 낮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인데,
아이리시스 님의 리뷰를 읽으면 이 책이 좀더 다른 독자들에게 와닿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감동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댓글 남기고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2-11-02 16:27   좋아요 0 | URL
와우, 안녕하세요. 리뷰를 이렇게 부끄럽게 달아놔서 부끄럽습니다.. 다행이에요,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최소한 맘속에서 민망함을 좀 내려놓을 수 있겠어요. 재밌었어요. 많이 압축된 시사의 느낌이 들어서 많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어렵지만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히친스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만들어주세요^-^

2012-11-12 1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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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2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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