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쓰려는 얘기의 주제는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로부터다. 이 추리소설 한 권으로 안중에도 없던 포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한 편씩 읽어오던 포가 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흔히 책 속에 길(답)이 있다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책 속에는 모든 것이 있(을 것 같)지만 길은 없다. 그런 게 진짜로 있다면 책을 무기삼아 타당성을 일축하고 억지쓰는 이들이 많아질 거란 건 불보듯 뻔한 일이지.
책을 잘못 읽는 예에 대해 안철수 원장이 힐링캠프에서 얘기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얻을 건 그것 뿐이었다. 나는 그분이 연습장에 빽빽히 분 단위 스케줄을 적어놓고 제 시간에 실천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의 이야기도 그렇고, 미국유학 때 세 식구가 매일 도서관에서 머리 맞대고 각자의 공부를 했다는 것도 알았다. 지난해 말인가 한창 꽂혀서 출연하신 모든 프로그램을 싸그리 봤는데 사실 같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힐링캠프에서 한 얘기는 이미 알던 것과 별다를 게 없어 좀 실망했다. 나는 그분이 이룬 팩트보다 하고 계신 생각이 더 궁금했는데 예능이 그렇게 해주진 못했다. 정치얘기를 많이 할 거라고 생각한 건 내 바람일 뿐이었다.
길을 찾아낼 수 있는 지혜나 지도가 있을 뿐이다. 그 길은 내가 선택해서 시작하고 또 끝낸다. 독서가 지극히 개인적 행위이듯 소설도 대부분 그런데, 그 개인적인 것들이 어느 순간 모두의 것인듯 튀어오를 때가 있다. 개인보다 개인이 속한 사회, 사회를 받치고 있는 더 큰 세계, 그렇게 한 단계씩 늘려가다보면 어느 순간과 마주한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을 얼마 전에 읽었다. 이 페이퍼를 쓰는 중에는 [도둑맞은 편지]를 읽었다. <우울과 몽상>은 여러모로 좋은 책이다. 받침대로도 좋고 베개로도 좋고 심심풀이로 읽기에도 부담 없는데, 읽고나면 부담이 안긴다. 몇 장의 짧은 단편에도 삶의 철학이 들었다. 사건해결을 통찰로 행한다. 에드거 앨런 포는 소현세자나 사도세자만큼이나 많은 죽음에 대한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그는 늘 미쳐있었고, 정신착란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는 건데 <우아한 제국>은 이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물론 이 사실은 배경도 아니고 해답도 아니고 그 일부도 아니며 당연히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정신착란이 예술가나 살인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의외로 다르지 않고, 그것이 촉발되는 양상도 비슷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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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는 되도록이면 줄거리 설명을 아껴야 한다. 어쩔 때는 책정보를 읽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단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의 제목이 내용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배경은 스웨덴의 한 도서관과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박물관이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국가에서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사체가 발견된다. 누가 봐도 살인이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광경이다. 그리고 1500년대 베네치아의 한 수사와 이발사 그리고 사제에게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발사는 머리카락을 깎는 사람이 아니라 칼잡이였다. 해부학자였고 의사였다. 그의 손끝에서 칼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은 사람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모든 것은 기록되었다.
외르켄 브레케는 전통과 문화와 시대를 거스른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지만 살인범이 누구인가 보다 왜 살인을 저질렀나가 중요한 내게는 괜찮았다. '고서(古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와 살인음모는 당연하게도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그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자기화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읽었기에 금서에는 손대지 말라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만큼 알지만 에코의 것이 사회학적 음모(비극만 남기고 희극을 사라지게 하려는 자들의 음모)라면, <우아한 제국>은 있을 만한 역사 속 사건의 팩션에 불과하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속을 알기 위해 살인하거나 공동묘지의 시체를 훔치려 땅을 파는 일련의 과정들이나 양피지로 만들던 책의 겉가죽을 사람가죽으로 만들어 글을 새긴다는 설정은 있을 수도 있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암흑의 중세가 아무리 살인과 음모의 시기였다고 해도 두눈으로 확인 불가능한 이상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이 골몰했던 해부학, 당시 원형 해부극장이 만들어질 정도로 암암리에 성행했던 인간에 대한 해부를 인간 스스로 몸에 대한 자각과 궁금증을 품고 시작했던 첫 의학적 기록으로 본다면 충분히 추적해봄직한 일이 된다. 그래도 에코만큼 많은 문학적 장치와 인문학적 사고를 곳곳에 배치하지는 못했으므로 단지 추리파 소설로 분류되겠지만 말이다. 단지 정신착란, 대상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호기심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옛책의 가치를 역사와 돈으로나 찾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해당사항이 없는 듯하지만 누군가는 살인을 해서라도 얻고 싶은 혹은 재현하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이다. 부정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생애는 한 줄로 말해질 수 없다. 여름밤 지구 반대편의 나라 어느 방에서 흥미진진하게 읽기에 좋았다. 깊지는 않았지만 꽤 탄탄했다. 시리고 차가운 느낌의 오싹한 한기의 느낌은 없지만 이 소설은 분명히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부터 왔다. 여기는 추리소설 매니아로 읽을 때마다 제목과 작가, 범인과 범인이 등장하는 페이지를 목록으로 작성하는 어떤 여자가 나온다. 여기는 캐릭터가 많다. 도서관과 박물관 직원들 그리고 경찰들. 모두가 뚜렷한 성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건 아니지만 범인을 찾기로 맘만 먹으면 압축하기가 쉽다. '왜' 살인을 했는가는 '누가' 살인을 했거나 '어떻게' 살인을 했는가 보다는 중요한데(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우아한 제국>은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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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된 소설 몇 권을 알지만 읽기가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매번 화자와 청자가 달라지고, 시기도 구별해야 하며, 무엇보다 나는 받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상상력 빈곤을 고스란히 체험하곤 했다. 작가는 영국여행 중 알게된, 채널제도의 일환인 건지 섬을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소생시킨다. 건지 아일랜드라면 이 소설을 만나기 전에 알던 바로는 위고가 망명하여 살았다던 곳 아닌가!(위고는 카뮈 다음으로 좋아하는 몇 안되는 작가다) 루이 나폴레옹 정권을 비판하다 반정부 인사로 찍혀 망명한 그는 이곳에서 <레 미제라블>과 <웃는 남자>를 집필했고,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서도 녹록치 않자 다시 건지로 가서 말년작 <93년>을 집필한다. 건지 섬은 제2차 세계대전 중 5년간 독일이 점령했었고, 한 번도 자국영토를 뺏겨본 적 없던 영국으로서는 아픈 손가락일 터, 문학적으로 승격되는 이 섬의 고립과 외로움을 편지라는 매개체로 읽는 순간 그곳에 대한 애틋함이 살아난다. 건지 섬에 있는 한 남자와 런던에 사는 한 여자의 편지가 서로에게 닿게 된 건 책 때문이다. 여자는 작가고, 남자는 그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문학회에 참여중이다. 육지 소식이 잘 가닿지 않는 섬에 있는 남자(도시)는 우연히 여자(줄리엣)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을 갖게 되어 그녀에게 편지를 띄운다. 그들을 오가는 편지 속에서 매개체가 된 책 뿐 아니라 뭍과 육지의 소식이 서로 고루 섞인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줄리엣과 도시의 편지를 시작으로 대륙과 건지 섬 사이, 줄리엣의 친구 소피의 오빠이자 편집장 시드니, 줄리엣과 소피의 연인들, 하지만 전쟁을 겪고난 이들의 멀쩡한 삶이 주제인 만큼, 건지 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자신들을 지켰는지, 돼지 파티가 북클럽으로 변모한 이유가 뭐였는지, 북클럽에 대한 사연을 줄리엣이 쓰는 칼럼에 싣기로 하면서 이야기 보따리가 풀린다. 나는 정적인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추천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저 그랬다. 전쟁의 절박함을 따뜻하게 회상하고 새롭게 삶을 일궈보려 한 진정성 어린 소설이지만 보통 이상의 감동이 오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 읽었던 <안네의 일기>나 <굿바이, 안네>도 같았다. 절박한 상황의 담담한 서술에는 나도 한 발 빼게 돼서 그런가. 다양한 인물이 자신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점은 귀기울일 만하지만 역시 채널제도를 겪은 역사적 순간을 건지 섬의 누구보다 위고로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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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방영중인 주말 사극 [무신]의 주인공이 무신정권에서 막강한 힘과 재산을 가진 두 부자(父子) 최충헌, 최우가 아니라 최충헌가의 노예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최우의 눈에 든 '김준'이듯,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울프 홀>의 주인공은 헨리 8세가 아니라 16세기 튜더 왕조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힘을 얻기 위해 온갖 음모에 휘말리며 목숨을 걸었던 '토머스 크롬웰'이다. 이 원칙은 견고하다. 왕보다는 왕의 주변부를 주인공으로 삼아야 더 많은 이야기를 불러올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소설은 대부분 이 공식을 답습하지만 헨리 8세를 소재로 한 수많은 텍스트가 존재하는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다. 대부분 앤 불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태반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왕을 유혹하는 여인이 그녀 뿐만은 아니었건만, 유난히 잦은 영화 탄생은 튜더 왕조 전체가 아니라 한 여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권모술수를 얕게 구경하게 하는 데서 그친다. 유명한 영화 <천일의 앤>을 비롯 <천일의 스캔들>,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는 모두 1485년부터 1603년 3대 다섯 명에 걸친 118년의 튜더 왕조를 배경으로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헨리 8세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그들의 딸 엘리자베스 1세에 초점이 가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으로부터 간통과 근친상간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앤 불린은 단 3여년을 왕가에 있었다. 전 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해 앤 불린과 혼인했는데 역시 아들을 얻지 못하자 헨리는 또다시 왕비를 버린다.
어머니가 보낸 천일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엘리자베스는 처녀여왕으로 생을 다해, 처형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피의 메리'할 때 그 메리 아님. 그 메리의 본명은 메리 튜더로 엘리자베스와는 이복자매)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이 되는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로는 제임스 6세)가 즉위할 때까지 다사다난한 업적을 남긴다. 후사가 없었던 그녀와는 전혀 상관 없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현재 53개국 영국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역사를 단편적 사건으로 훑어보면, 잉글랜드 왕권을 놓고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가 싸웠던 장미전쟁이 튜더왕조 시작의 배경이다. 장미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는 두 가문의 상징이 장미였기 때문이다. 색은 붉은 것, 흰 것으로 각각 달랐지만. 이 전쟁은 자그마치 30년이나 진행됐고, 랭커스터계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며 마침내 튜더 왕조의 시대를 연다.
주드 로가 영국의 섹시가이라면, 비슷한 눈빛을 지닌 아일랜드 출신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역시 내눈에는 주드 로만큼 섹시하다. 키는 작지만..( '') 배우에게 기대하는 키의 기준치가 어느새 180이 되어버린 이런 눈높이ㅜㅜ 그가 절대군주 헨리 8세로 분한 시리즈 [튜더스]는 앤 불린과의 로맨스 뿐 아니라 그녀를 비롯한 여섯 부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물론 왕가의 음모와 튜더 왕조의 흥망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 스릴러가 아니라 로맨틱 역사물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많은 영화와 비슷하다. 단숨에 끝내기에는 아쉬운 긴긴 역사 속으로 데려가는 몰입감과 시대물 로맨스로는 확실히 기대하게 만들지만. 반면, <울프 홀>은 헨리 8세에게 다가가는 '토머스 크롬웰'이 주인공이므로 좀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주변부의 시선으로 권력을 말하는 것. 원래 시대와 역사,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역사소설에 있어 아무도 객관적 시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는 것 또한 한계인 동시에 장점일 수도 있다.
우려먹어도 너무 우려 먹었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을 정도의 대형군단이다. 헨리 8세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이어지는 영국 정치사가 더 재밌을 지도 모른다. 왕조의 자리다툼은 늘 권력욕 아니면 지위욕, 치정에 얽힌 것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남편없이 '나는 조국과 결혼했다'던 엘리자베스 1세의 결단은 얼마나 훌륭하면서도 덧없는가. 자기 시대는 곧 가버리고 늙고 병든 나를 대신할 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권력과 지위에 목매는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다. 후손 하나없이 먼 사촌조카뻘에게 왕위를 물려준 그녀의 슬픔에 비하면 평범한 행복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는지 감히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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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부터 이듬해 2월 18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결과로 만주 땅에는 일본이 지배하는 괴뢰정부 '만주국'이 들어선다. 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다. 이유가 어쨌든 모두 일본국의 침략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은 1941년부터 5년간,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역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싹싹 빌었지만, 전쟁 중 모든 문서와 장부를 스스로 소각시킴으로서 본인들의 도발과 패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 나라 또라이 같다.(나름 순화한 표현이다)
김약연은 북간도 지역의 한인사회 지도자였고, 윤동주는 이 혼란한 틈에 북간도에서 태어난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활발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피신 겸 개척된 북간도가 만주 땅으로 편입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곳은 지금 연변이라 불리는 조선족 자치주였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이 유명한 곳. 이후 북간도의 수난은 만만찮다. 근현대사는 대부분 눈물과 분노로 점철되었지만 특히 근대사(구한말-일제시대)가 심하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가기로 마음 먹은 때(1941년 말)는 민족말살통치가 이뤄지던 시기로, 유학하려면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했다. 이를 두고 오늘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을 때까지 정식 시인이 아니었던 그가 사후 출판된 시집으로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유학 후(얼마나 큰 꿈을 품었겠는가) 1943년 귀국길에 오를 무렵 민족항일운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여기까지는 팩트다. 그의 삶은 짧았고, 그래서 더 정리가 쉬워진 건 아니지만 더 큰 의미를 갖는 건 확실하다. 1943년 7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으니 1945년 8월즈음 출소했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2월 16일. 그는 6개월을 참지 못하고 숨을 놓았다. 형무소 의무실에서 주사한 의문의 약 때문에 생체실험의 희생자였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패망한 일본이 전쟁 후 모든 문서와 서류를 소각함으로서 말살하려 했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태평양 전쟁 당시(1945년) 구주지방에 불시착한 미국 B29 전투기 조종사 8명을 구주대학에서 생체해부하고 살해한 사건이 조서로 보고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일본이 전쟁 중 자국 병사들의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미국인은 물론 윤동주를 비롯한 건강한 수감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음이 드러났다. 더불어 이들은 조종사 8명에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신장과 폐, 간 같은 장기적출을 시도한 한편, 나중에는 인육파티까지 했다고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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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벌써 이만큼이나 되는 아프리카 관련서들을 읽었고, 내용이 살상, 학살, 전쟁, 분쟁과 동떨어지지 않아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또다시 시리아 내전이 국제뉴스를 타고 들려왔다.
<제노사이드>는 아프리카 어느 소수민족의 대를 끊어 멸종시키려는 백악관의 음모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설이 너무 정치적으로 보인 이유는 '진행중'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을 미국 뿐 아닌 다양한 국제사회가 시도하고 있고, 그들의 목적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기 배 불리기라는 점은 명백하다. 노예제도와 식민화 때문에 발전이 더뎠다는 검은 대륙 뒤에는 언제나 살상무기를 가지고 고도의 지력으로 협박에 협박을 거듭하는 선진국(미국)의 음모와 지략이 있고, 이에 맞서는 덜 문명화 된 이들은 장렬하게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사한다. 아무 연관 없는 마을 전역이 불타 여자와 아이마저 학살 당하고, 수류탄이 터지고 가해자, 피해자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죽어간다.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어느 국가의 수장이나 결정권자다. 정작 싸우는 이들에게는 본인 목숨에 대한 결정권이 없으며,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알량한 돈 몇 푼(윤리적으로 생명 앞에 돈은 늘 알량하다)으로 보상 받는다.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사실상 아프리카 콩고, 백악관, 일본까지 시공간이 다른 세 곳의 주인공들이 얽힌 인프라를 따라가야 하는 고도의 전략전이다. 콩고 탈출을 시도하는 내전상황을 생생히 그리고, 용병과 초인류를 등장시켜 신과 인간이 만난 듯한 숭고한 긴장을 주고, 의자에 앉아 손만 까딱하면 지구 반대편 평화로운 누군가의 삶을 통째 파괴하고 목숨도 끊을 수 있는 백악관 테이블의 권력에 분노하게 하며, 일본의 철거 아파트 안에 갇혀 아버지 대신 현 인류를 구할 신약 개발에 몰두하는 청년을 응원하게 한다. 끊기도 잘한다. 중요한 순간에 화면전환. 영화가 따로없다.
흡인력 굉장하고 흠 잡을 데 없이 잘 씌어진 근래 보긴 드문 작품인데 문제는 평소 아프리카 역사와 내전에 관심이 많았던 나머지,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보고 듣고 읽어 최대한으로 받아야 했던 충격의 임팩트가 현저히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온갖 지식을 짬뽕하면 쓸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순간적으로 날 감쌌다. '살기 위해' 신의 저항군에 세뇌당한 소년병의 살육에 영화 <머신 건 프리쳐>가 생각났고, ICC에 제소되어 국제악질범 1위로 인터폴에 수배되어 있다던 그 놈도 누군지 알겠고, 왜 소년병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더 끔찍하게 여자와 아이들을 죽여나갔는지도 알았다. 그밖에 수많은 국제법 조항들.. 주로 명분에만 머무는 유엔평화유지군 활동.. 거기다 화학융합까지 화학에서 아프리카사, 네안데르탈인에서 초인류까지 건드리고 지나가는 소재의 스펙트럼에 짓눌리며 생각했다. 다 아는 것들인데 이 소설을 쓴 건 내가 아니야. orz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 건 E.H.카였다. 미래가 아니다. 우린 역사가 단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일과 저 일 사이에 어떤 구분이 없다. 벽도 없다. 역사는 좌표 속에 존재한다. 카뮈가 살았던 프랑스와 내가 놀러간 프랑스는 완전히 다른 프랑스다. 시간은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이름 앞에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는 씌어지고 있다는 것. 방에 앉아 글을 쓰는 나는 물론, 잠을 자는 이에게도 흔적이 남는다는 것. 역사는 일방향성을 가진 채 시간적으로 앞으로만 향한다는 것. 누구도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타임슬립이 유행한다고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조선시대로 가거나 미래로 가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재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면 역사의 공간을 넓히면 된다. 시간이 수평이라면 공간은 수직. 내 발걸음 닿는 이곳 뿐 아니라 저곳이나 그곳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방법은 여행 아니면 독서. 직접 발품을 팔거나 누군가 발품 팔아 내놓은 경험담을 책이나 영화로 보고 듣거나. 그러면 그곳에 없었지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역사의 한 순간을 만날 것이다.
지금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는 인생 전체에서 역사적 사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바로 역사의 묘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역사에 기록될 일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