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열린책들 세계문학 194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재혁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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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이달이어야 했다.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을 경악하면서 보고 난 이후 법정 스릴러의 대가 존 그리샴을 닥치는 대로 읽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마지막은 카프카로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 정도의 상처는 없지만 법을 믿지 않는다. 아니, 법이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줄거란 달콤한 희망을 더이상은 믿지 않는다. 법정 범죄물과 카프카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의식의 흐름처럼 떠밀려온 독서기가 중요할 뿐. 존 그리샴의 소설은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The firm, 1991)>에서 시작한다. 그의 출세작이면서 1993년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야망의 함정]을 낳았다. 10년 후의 이야기를 담은 동명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 이 드라마는 정확히 영화의 결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만하면 텍스트의 무한확장을 제대로 체험했대도 과언 아니다. 이전에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1989)>은 그의 처녀작, 이후 <펠리칸 브리프(The Pelican Brife, 1992)>는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턴 주연으로 1993년에 영화가 되었다. 물론 전작의 영화화는 좀 더 훗날 1996년도. 이후 <의뢰인(The Client, 1994)>, <가스실(The CHAMBER, 1996)>, <사라진 배심원(The Runaway Jury, 1996)>, <레인메이커(The Rainmaker, 1997> 등이 영화화 되었고, 작년에는 소설 <고백(The Confession, 2010)>이, 올해는 소설 <소송사냥꾼(THE LITIGATORS, 2011)>의 번역본이 출간됐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0년여간의 변호사 생활로 얻은 다양한 체험을 법정 스릴러에 녹여내며 출간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이 아니면 영화를 달라, 우스갯소리가 통할 만큼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많다.

 

우리나라 법정 드라마는 많지 않다. 재미로 다루기에 사법부가 지나치게 기득권을 갖기 때문에 미국보다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듯하다. 배심원제가 자리잡은 미국과 아직은 법전에 기댄 법관의 의견을 더 중시하는 한국의 사법제도의 차이를 모르지 않지만 범죄 스릴러가 경찰 수사물로만 그려지는 점은 많이 아쉽다. 물론 배심원제 탓만은 아니고 이 제도의 헛점 또한 없지 않다. 정확하기 위해 제3자의 일반인들을 통해 죄의 유무를 따지자는 건데 이게 어디까지 객관성을 획득할지 알 수가 없다. [Law & Order]는 대형 시리즈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범죄 전담반]으로 더 익숙하지만 사실 이건 스핀오프 시리즈 중 하나다. SVU, CI, LA, UK는 전부 스핀오프 시리즈지만 오리지널 시리즈는 시즌 20으로 2010년 종료된 [범죄전담반]이다. 이후 [저스티스], [보스턴 리갈], [해리스 로우], [페어리 리갈], [데미지스] 등이 나왔지만 늘 첫 정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 [의뢰인]과 [부러진 화살] 같은 법정물은 나올 때마다 뜨거운 감자이며, 숨겨져 있는 사법재판 과정과 진실 규명에 기대를 갖게 한다. 발로 뛰는 경찰 위에 검찰이 있다면, 상명하복 관계를 최대한 이용하는 행정부 소속 검찰에 대응하는 사법부가 있다. 진실 규명과 다수 국민과 소수 억울한 자들의 보호가 목적인 점에서 소속 다른 두 기관이 동등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예를 들어, 개인의 자유와 다수의 행복을 논할 때 법조인은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프카 또한 법 앞에서의 인간의 부조리, 심판자의 자리에 있다고 믿는 인간이 심판 당하는 자의 위치에 서도록 묘사하면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의 구속과 억압에 한없이 무력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편적 물음표로 승화시키며 관습과 체제 앞에 진실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한낱 보잘 것 없는 개에 불과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는 마흔 살에 악화된 폐결핵으로 죽었다. 카프카는 당시 체코에서 소수민족이었던 유대인이었고 아버지와도 갈등을 빚었으며 글을 쓰고 싶어했으면서 공부를 관두지 못해 법학 박사학위를 땄다. 너무 일찍 죽었기에 그가 남긴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그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다. <소송> 또한 그의 사후에 출간된 소설이며, 그가 남긴 세 편의 장편소설 중 하나다. 실존철학에 대해서만큼은 사르트르와 카뮈가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조금만 더 번듯한 작품을 많이 내고 조금만 더 번듯하게 긴 인생을 살았다면 실존과 부조리의 수사 앞에는 카프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놓였을 것이다. 체코 출신이면서 독일어 사용을 강요당한 유대인 카프카가 아니라. 그는 장남을 번듯하게 키워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독일인 학교에 다녔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고,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중이었으므로 학교에서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여기와 저기에 속했지만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의 이방인적 고독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붙박혀있다. 완벽한 독일어를 쓰기 위한 피나는 편승과 자국민(체코인)들이 느끼는 배신감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그는 결국 독일어로 써내는 작품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 경계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행간 사이를 빙빙 도는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쓴 많은 문서들은 유언에 따라 소각되었다. 우린 그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최소한에 기댄 유추조차 할 수 없다. 떠도는 의미들을 붙잡고 유령처럼 상상한다. 카프카적으로. 카프카답게 카프카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어렵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것들이 옳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하다. 사회적 모순 한 번 겪지 않고 자라나는 청춘이, 꿈나무가 어디 있으며, 어른은 완전하게 땅에 붙박은 존재인가. 아니다. 카프카의 고민은 여전히 그만의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한 <소송>은 읽혀야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이토록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어째서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그는 희생자였을까, 승리자였을까. 항간에 그가 남긴 문학사적 자취가 웬만한 독일 작가를 능가한다고도 한다. 카프카를 독일인으로 처음 아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그는 성공한 셈일까. 스스로는 행복하다 여겼을까.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궁금하게 한다. 우리에게 늘 카프카적인 생각을 하도록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으니. 대단하다. 릴케-카프카-쿤데라로 이어지는 체코 현대문학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18년에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후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경계에 세 문인이 나란히 연대기순으로 존재한다. 언젠가 동유럽에 가게 될 날이 온다면 세 명의 작가를 마음에 담고 카를교를 열 번쯤 건너야겠다. 동양의 작은 여자아이에게 프라하는 붉은 눈물을 흘린다고, 미치도록 슬프다고, 내 딸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거라고 말해야겠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거란 기대와 희망 속에 산다. 기대와 희망이 한순간에 후회와 절망으로 바뀔지라도 변화를 희망하는 건 보편적 진리다.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며 K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는 순서는 어째서 악의 계수가 클수록 먼저이지 않는지를 원망했을까. 형태 없는 제도와 체제, 권위주의 속에 희생되는 자기를 반성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이 자랑스러웠을까. 이유 없이 심판자가 되고 이유 없이 심판을 당하는 인간들은 누구나 이중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체 없는 경계에 있다. 오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존재를 확인하고 검사 받는다. 일련의 절차에는 오류가 없을 거란 믿음으로. 강력하게 존재의 존재와 삶의 삶을 가만히 놓는다. 여전히 정확하게 놓여야 할 위도와 경도를 알 수도 없고 알 수 있으리란 희망도 없지만 모든 삶이 부서지기 전에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카프카다. 변신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 좁은 안에 갇혀 누군가를 심판하려 하지만 되려 심판 당하는 어리석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한 것은. 이 순간 카프카적으로 사고를 전환하라고 강요하는 건 카프카가 아니라 실존이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이는 생각해야 하므로. 그게 옳다는 걸 미래의 딸에게 전해줘야 하기에. 그는 죽어버림으로서 작품과 말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지만 나는 살아서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많은 뜻을 전해야겠다. 가능하다면. 그러면 이 리뷰는 대체 정체가 뭘까. 나는 요제프 K의 대변인인가, 카프카의 대변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모르면서 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걸까.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가고 상상하는 만큼 움직인다. 왜 죄인이 됐는지, 왜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무엇이 죄고 또한 죄가 아닌지 카프카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말하지 않아서 우린 몰라야 할까. 짧고 쉽고 간결한 문장 행간에 든 엄청난 활자들의 의미가 밤잠 자는 도중 나를 덮칠까봐 겁난다. 오늘밤 나는 혼자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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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2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그리샴 소설 중에 <외뢰인> 제일 좋아해요. 소설도 좋았고, 수잔 서랜든 나왔던 영화도 나쁘지 않았어요. <타임 투 킬>은 영화는 좀 별로였던 것 같고, <레인메이커>는 좋았어요. 좀 심하게 순진한 얘기긴 했지만. 영화화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영화감독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작가가 또 카프카죠. 꼭 소설 그 자체가 아니더라도 모티브를 따온 것들도 있고. (<카프카>라는 영화도 있어요. 보지는 않았지만. 소더버그씨 영화니까 괜찮을듯.)

카프카를 읽기에는 더운 밤입니다. 으갸갸. 잘 지내시죠?

아이리시스 2012-06-27 22:06   좋아요 0 | URL
존 그리샴하고 로빈 쿡하고 그 시절 쌍벽을 이룬 스릴러 콤비였죠! 존 그리샴은 모르겠고 로빈 쿡은 초딩 때 엄마가 읽으시던 책이 엄청 많았어요. 덜덜 떨면서 들춰보고 그랬었는데.. 책을 읽으려니까 너무 많아서 천천히 가기로 했고, 영화는 너무 오래돼서(고전도 아닌데) 이것도 줄리아 로버츠랑 톰 크루즈만.. 천천히 가야겠어요. 해석의 여지가 많으니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 걸까요? 저는 카프카가 장편을 많이 남겼으면 좋았겠다고 그러니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저는 카뮈를 좋아하거든요!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잘생겼어, 카프카는요..

아, 그러니까 <카프카>라는 영화는 카프카의 삶을 다룬 거예요? 그..경계선의 이중적 지위가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기도 한데요. 저는 잘 지내는데요. 여기 날씨가 좀 이상해서요..문을 닫으면 덥고 열면 서늘하고.. 갑갑하네요..

이진 2012-06-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도 <아메리칸 크라임> 보셨군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서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었지요. 이렇구나, 이렇구나. 뭐가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안타깝다.

카프카... 은희경의 소설에서 많이 다루는 것도 카프카예요. 주인공이 관심을 갖게 된 여자친구가 카프카를 좋아하고, 덩달아 주인공도 카프카를 읽게 되지요.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카프카는 어디다 갖다붙여도 다 말이 된다고.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카프카는 하나의 명사가 되어버린 것입니까ㅋㅋ

아이리시스 2012-06-27 22:10   좋아요 0 | URL
애들한테 안 좋아요, 담엔 그런 거 보지마요!! 19세이상관람가 아니덥니까?!(잘 모름) 그리고 애 취급해서 기분 나쁘다면 미안..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히히히

은희경 소설에 카프카 얘기 나오나 봐요. 응, 카프카는 수다쟁이님한테 배우고! 내 생각에 소이진님이 은희경 소설만 보고도 카프카를 완전 잘 이해한 것 같아요. 하나의 명사, 어디다 갖다붙여도 다 말이 되는 거.

근데 그것도 재미없다면서요?ㅜㅜ 미안ㅜㅜ 담엔 재밌는 거 보내줄게요(ㅋㅋㅋ)

이진 2012-06-27 22:42   좋아요 0 | URL
에이, 재미 없는게 아니라 은희경의 견인력이 떨어지는 거죠. 처음엔 그 어떤 소설보다도 마음에 잘 와닿았어요. 아이님이 보내주시는 책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재밌잖아요. 제가 집중해서 안 읽어서 그렇지 <원더보이>도 무지무지무지 좋은 책 아니겠습니까. 문장은 정말 좋은데, 내용 이해가 힘들어서... 제 능력을 탓해야합니다. ㅎ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6-27 22:58   좋아요 0 | URL
뭐야, 위로하는 거.............라니, 엉엉엉엉엉ㅠㅠ

티티카카 2012-06-27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 전까지 읽은 소설은 약간의 문제의식을 일으키거나 유년시절의 그리움을 끌어내는 게 전부였는데... 카프카는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더군요 ㅎ 왠지 이대로 끝나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법정드라마 하니까, 제가 요즘 보고 있는 일드 <리갈하이>가 떠오르네요 ㅋ 저는 지금 남주에게 빠져있어요. 법정드라마인데 울적할 때 보면 좋다는,,,ㅎ,ㅎ

아이리시스 2012-06-27 22:01   좋아요 0 | URL
카프카는..답이 없어서..그 답을 구하려고 하면 막막해지는 것 같아요. 티티카카님 리뷰 보러가니까 아무 것도 없어서 슬펐어요. 진짜 슬펐어, 힝ㅠㅠ

그거 이제 끝났죠? 2분기 드라마들.. 저도 일드 라인업은 알고 있었는데 <리갈하이>도 찜해놨었는데 못봤어요. 요즘엔 일주일마다 딱딱 챙길 여력이..남주에게 빠졌다면 매력있나봐요!

댈러웨이 2012-06-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욕 엄청 돋우는 리뷰였어요. 보면서 짜릿짜릿했어요. 질투도 막 났어요. 고마워요. ^^



아이리시스 2012-06-28 03:28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잠이 안와요. 엉엉엉ㅠㅠ
그..뭐야..지식욕..저는 댈러웨이님한테 받는데요..남 얘기 하실 때가 아니랍니다.
(따라잡으려면 책을 먹어야 돼ㅠㅠ)

저는 쌓아둔 구간들로 추리소설 읽고 있는데요, 이것마저도 진도가..( '')

노이에자이트 2012-06-2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다민족정책에 대한 글을 읽었어요.워낙 여러 민족이 그 안에 분포하고 있으니 군대에서 특히 용어통일이 문제가 되더라고요.아이리시스 님은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가에 대해서도 꼼꼼이 살피시는군요.원래 그래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홀히 하더라고요.그래서 릴케나 카프카를 막연히 독일사람으로 아는 사람이 많죠.

아이리시스 2012-06-28 22:22   좋아요 0 | URL
릴케는 쓰고도 이상해서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 그랬답니다 V.V 카프카는 유대인인 것만 알고 독일사람 아닌 걸 알고 있어서 백과사전 좀 본 거예요! 꼼꼼하다고 칭찬을 듣다니요!(으쓱으쓱)

근데 백과사전 지식도 나름 유용해서 저는 [소송] 읽고 카프카 일대기 공부하면서 유용했거든요. 군대 용어통일이라..정말 실용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되겠네요! 전 세계적으로 의학용어 통일하듯이 군대용어도..
 
독일인의 사랑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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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히 헷갈린다. 방학 때 혼자 버스 타고 외숙모외삼촌네 공부하러 다니던 중1 때(개인과외랄까, 외숙모께는 사회를, 외삼촌께는 수학을 배웠다) 그집 작은 방 책장에서 본 책이 엄마보다 세 살 위, 아빠와 연세가 같은 외삼촌이 학창시절에 읽던 오래된 판본의 <독일인의 사랑>이었는지 <첫사랑>이었는지. 제대로였다면 헷갈릴 수가 없다. 막스 뮐러는 독일인이고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인이다. 이 소설은 동양학자이자 비교언어학자로 유명한 막스 뮐러가 남긴 유일한 순수문학이다. 완전히 다르니까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는데 아직도 기억하지 못한다. 읽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스터리를 푸는 기분으로 시작. 아마도 이 책이었다고 굳게 믿는 중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지만 꼭 안 중요한 것도 아니다.

 

없는 감수성을 빌려와 쓰자면, 내게 한 마디 해주기 위해 너는 수십 번 머리와 가슴으로 말을 고민하는 사람이고, 나는 나름 생각을 거쳤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툭툭 뱉어내는 사람이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이고 본능적이다. 책은 내가 더 많이 읽지만 그게 너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거나 지혜롭다거나 하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읽은 책에 관한 얘기나 읽고 있는 책에 관한 얘기를 너와 나는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문자도 통화도 엄청나게 해대는 그런 커플은 아니다. 대학 때는 함께 도서관에도 종종 갔고 우리가 아직 친구였을 때 너는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나를 무려 토요일에 만나기 위해 일부러 도서관에 와서 끝나는 시간을 기다렸지만 네 맘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던 나는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고 차 타고 떠나는 나를 지켜보던 네 모습을 백미러로 보았다. 이 소설은 우리가 처음 만난 스무살, 다시 만난 스물한 살, 친구들끼리 함께 간 여름여행 후 연인이 되기 시작한 스물두 살에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소중한 편지와 사진들, 빛 바랜 꽃바구니와 이제는 상해버린 샴페인이 들어있던 화이트데이 꽃바구니, 친구집을 빌려 촛불폭탄과 꽃다발과 와인으로 장식한 1주년 기념파티 등이 신선한 향기였을 때. 감수성이 말랑말랑해서 터질 것 같던 때. 사랑을 해서가 아니라 원래 내 감수성이 그정도일 때. 그래서 작은 일에도 서운하고 울고 따지고 토라지고 그랬을 때.

 

너무 진한 사랑소설은 이제 좀 부끄럽다. 화내는 것조차 귀찮고 에너지가 든다. 요즘 관심거리는 주로 어떤 상황에 대한 너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그것도 내 예상을 거의 벗어나지 않지만, 푸하하. 만약 완전 반대 입장이라도 함께지만 여전히 타인이라서 이해하자 치면 이해못할 것도 없다. 정치성향은 좀 같았으면 하는 이상한 바람이 있다. 나는 부모님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게 많이 답답할 것 같다. 아, 이래서 종교적 갈등도 생기는 구나 싶다. 이해가 불가능할 경우 내 삶에 들여놓지 않으면 그만이다. 사랑에 대해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 아무리 예쁘게 치장하고 또 치장해도 더는 추억할 에피소드가 없다. 내게 사랑은 과거가 아니고 우리 사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더이상 예쁜 엽서나 긴 편지지에 너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지 않고 너 또한 그렇다. 가끔 받기는 하는데 쓰기는 진짜 싫더라. orz 진지한 대신 애틋함은 증발했고 사랑이 불길 치솟는 감당못할 감정만은 아니라는 걸 너도 나도 안다. 네 맘까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나만큼이나 너도 많이 까야 하는 양파같은 남자라서. 수많은 영화를 둘이서 봤지만 그것들은 모조리 함께한 시간으로 치환되거나 증발되었다. 하지만 어떤 책도 동시에 읽거나 함께 읽지는 않는다. 그런 적이 없다. 영화 <더 리더>에도 <소피의 선택>에도 남녀가 함께 책 읽는 장면이 나온다. 소피(메릴 스트립)가 폴란드어로 한 줄 읽으면 네이든(케빈 클라인)이 영어로 번역해 한 줄 읽는 울프는 울프라서가 아니라 책이라서가 아니라 와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로맨틱하다. 해보고 싶을 만큼은 아니지만 어딘가 울컥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아니라 '독일인'이 뭐 다른 게 있나 싶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읽는다. 아마 이 소설의 주제는 두 국가의 민족성 차이가 아닐테고, 더군다나 독일인만의 특수한 사랑을 그려낸 것만도 아닐 것이다. '기독교적 사랑' 그러니까 플라토닉한 사랑을 풀어내는 점에서 지드의 <좁은 문>과 상통한다. 그치만 지드를 엄청 좋아하고 <좁은 문>을 특별히 애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소설은 어디를 애정해야 할지, 반이나 이해하긴 한 건지 의심스럽다. 기독교적 색채, 육체와 영혼을 초월하는 사랑, 도덕적 순수(동정이나 순결을 의미하는 것 아님) 등을 대사를 통해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점은 신선하지만, 그 의미가 간결하고 뚜렷한 문장으로 마음에 쏙 박히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하물며 여주인공 이름은 동정녀와 동일한 '마리아'다. <독일인의 사랑>은 그녀를 맘에 품고 다가가는 한 남자의 마음과 상황을 독백 아니 일기로 담아낸다. 그녀는 몸이 성치 않아서 육체적 사랑이 불가능한 나머지 나를 멀리하거나 피한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다리고 다가가고 또 감싸안는 한 남자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회고록과 같다. 8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시간 순으로 간다. 그렇다. 이걸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한 소설이라면 <폭풍의 언덕>, 헨리 제임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까지 알고 있다. 쉽게 읽히지 않고, 느릿느릿하면서도 그 독백을 따라가기가 숨차서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이 소설은 아마 그 중에서 가장 짧은 작품일 것이다. 소설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소년들은 청년기와 장년기에서는 이미 사라진 순수함과 진심,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법이다. 그러면서도 당시 나는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타인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내게 했던 진지한 말들은 건성으로 듣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영혼이 가까워질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이, 그녀의 영혼이 내 영혼에 접근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 이 독백 아니 회고는 <독일인의 사랑>의 주제에 가장 근접한 문장일 것이다.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세속적 재화가 아니잖은가. 우리는 다만, 서로를 발견하고 알아볼 두 영혼이 손을 잡고 마주 바라보며, 이 짧은 지상의 여행을 같이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뿐, 그래서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나는 그녀의 병고의 지팡이가 되고, 그녀는 내게 위안이나 사랑스런 배려자로 머물기를 기원할 뿐인 것이다.

 

이 사랑은 육체와 영혼 둘 중 어느 하나를 앞세우는 법이 없다. 그녀는 몸이 성치 못하다. 그는 몸이 성하다. 그런 차이가 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육체만으로도, 정신만으로도 온전할 수 없다. 그녀는 성치 못한 몸을 가졌지만 사랑은 죽음으로도 파괴될 수 없는 것이며, 죽음으로 승화되어 불멸한다. 그런 온전한 사랑을 갈구한다. 침묵이 사랑을 지켜준다. 상당부분 준 만큼 바라는 사랑의 거래성과 대가성을 조심스럽고 확실하게 비판한다. 에즈워드의 시를 인용하여 드러내는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 육체를 욕망하는 사랑, 정신의 위안을 바라는 사랑, 부모와 자식, 부부간, 박애 등 모든 애정을 능가하는 가장 고귀한 곳의 사랑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의미를 사랑이라는 한 단어 속에 쑤셔넣는가. 가장 사랑다운 사랑은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으면서 사랑가는 또 왜 그리도 많은가. 비록 내게는 가져보지 못한 큰 사랑의 울림과 그 속에 든 고결한 의미가 한꺼번에 다가오지는 않았어도 분명히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구석이 있다. 여전히 사랑 앞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재단하고 또 끼워넣으려는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인형처럼 맞추려하거나 맞춰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대로 삶과 죽음과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란! 그런 게 과연 있긴 있을까.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이 간결하고도 순수한 소설이 사랑받는 것 같다.

 

'독일인의 사랑'의 독일인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 문화적 차이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제목이라고 역자가 전한다. 사랑의 형태와 의미와 철학에 국적이 있을 리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자.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그럼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니, 당신은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가. 기대하는 대답과 직접 듣게 될 대답은 같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마리아가 질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온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보기만 해도 너무 숨차고 피곤한 세상이다.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세요. 꽃한테 왜 피어 있는지를 물어보세요. 태양에게 왜 빛나고 있냐고 물어보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순간 내 존재의 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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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2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2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2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2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6-2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구절, 참 좋아요. 전 요즘 찐~~~한 사랑소설 읽고 싶은데 혹시 이런 소설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

아이리시스 2012-06-26 00:17   좋아요 0 | URL
근데 이건 [기독교적 색채]를 극복할 용기있는 사람만 봐야될 것 같아요. 나한테만 어려운 건지, 난 벌써 타락한 건지, 이런 사랑이 없다고 믿는 건 아니지만, 사랑에는 물론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이건 좀-_-;; 찐~~~한 거?! 로렌스 읽어요.(시루스님은 봤을 것 같지만)

2012-06-23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6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긴 글에 죄책감이 있다. 읽히려면 간결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프로도 아니라 누군가에게 끝까지 읽힌다는 욕심을 오래 전에 버렸다. 담아야 해서 좀 길다. 평소 쓰던 것보다 더 길다. 이 페이퍼는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 몇 편에 관한 얘기고, 오랜만에 찾아보니 밥 먹으면서 읽어도 시간이 모자랄 엄청난 양의 단편이 있더라는 것과, 이제부터는 일부러라도 종종 읽겠다는 다짐이자, 어쨌든 이런 생각으로 글이 시작되었다는 뭐 그런 얘기.

 

단막극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목적이 뚜렷했으나 단막극을 본다고 대본을 쓸 수 있을 리 없었고, 영화대본을 들여다본다고 시나리오가 뚝딱 써지는 것도 아니었고, 주구장창 연극을 봐도 희곡이 짠하고 나타날 리 없었다. 왜냐면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나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패션잡지 에디터가 되기 위해 수 십통의 이력서와 자소서를 우편과 멜로 뿌린 동기는 비로소 연락을 받고 뛸듯이 기뻐하며 간 면접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하도 간절히 이력서를 보내기에 얼굴이라도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궁금했거든요. 결과는 낙방. 간절한 것이 곧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만난 그는 나를 두고 '쓰잘데기 없는 학과'에 다닌다고도 했었다. 푸핫. 옆에 있던 건축학도 친구가 웃었고 공대를 나온 그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래, 21세기에 글로만 먹고 살겠다는 건 얼마나 가시방석인가. 부모님에게 못할 짓인가. 자책하진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어쨌거나 글은 실재 혹은 실존과 비교하면 정말 안드로메다다. 이 왜곡 많은 (글자의)이미지가 나와 당신 사이에 저질러 놓은 섬은 또 얼마나 넓은가. 사랑한다는 고백이 날아가는 속도는 얼마나 덧없으며 또 불가능한가. 나는 수줍은 대신 말을 잘했다. 글이 되기도 전에 생각이 말로 먼저 튀어나왔다. 지금은 (반만 진심인데)말보다 글을 더 잘썼으면 좋겠다. 글보다는 말이 더 먹히니까 완전히 진심은 아니다. 확신이 들지 않는다. orz

 

어쨌거나 아주 오랜만의 한국문학. 밤새워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던 여러 밤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의 숭고했던 자세는 앞으로 영영 없을 듯해서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 스물 셋 커피숍에서 데이트 약속을 기다리며 핫초코를 시켜놓고 전자사전을 펴 뜻을 찾아가며 읽던 <혼불>하며(과제였다), 온갖 문예지들 그리고 수상 단편들을 날마다 읽던 추억이 아련하다. 누리는 시간과 해야 할 일들이 당연히 내 것이 아니란 걸, 그땐 왜 몰랐을까.  

 

 

2011년 단 며칠, 부활한 TV문학관 속에 이 작품이 있었다. 광염+소나타=광기 어린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 얘기다.

 

 

 

 

 

 

 

 

 

 

 

 

 

 

 

역시 C샤프 단음계로서, 제일곡은 뽑아 먹고, 아다지오에서 시작되는데,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수평선 위로 넘어가려는 저녁 해, 이러한 온화한 것이 차차 스케르초로 들어가서는 소낙비, 풍랑, 번개질, 무서운 바람 소리, 우레질, 전복되는 배, 곤해서 물에 떨어지는 갈매기, 한번 뒤집어지면서 해일에 쓸려 나가는 동네 사람의 부르짖음-흥분에서 흥분, 광포에서 광포, 야성에서 야성, 온갖 공포와 포학한 광격이 눈앞에 어릿거리는데, 이 늙은 내가 그만 흥분에 못 견디어, 뜻하지 않고 '그만두어 달라'고 고함친 것만으로도 짐작하시겠지요.

 

이 대목은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 수 있지? 음대 갔었다면? C샤프 단음계에서부터 머리에 쥐나기 시작. 피아노를 들으며 이런 감상이 나올 수 있다면 글이 아니라 음악을 해야 마땅하다고 고개 끄덕끄덕. K선생도 좀 멋있는 사람 같다. 여튼 '성난 파도''피의 선율'은 백성수의 비상한 광기와 열정으로 '우연히' 지어진 곡조다. 방화와 살인. 무너져내리는 잿더미와 이름 없는 자를 갈갈이 찢는 것에서 이 세상 모든 영혼을 울리는 음보가 태어났다면, 천재 작곡가(음악가)가 났다고 칭송할 수 있을까.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는 천재성을 지닌 한 남자가 계통적 훈련 아닌 광기로 뽑아낸 음악으로 인해 짙은 예술성을 획득하지만 존재로서의 파멸을 촉진하며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예술품과 예술가의 반비례 관계를 포착하여 진정한 예술가의 위치를 묻는 동시에, 예술은 어디까지 타당화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의 방화는 어머니의 병환 중 지극히 가난해서 병원에 가지 못하자, 약국 카운터에 약사는 없고 돈이 올려져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는 그 돈을 훔친 것이 발단이다. 주인에게 잡혀 감방에 6개월을 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부르며 기어나와 거리에서 죽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외면했던 당시 주인집에 홧김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 성당에서 광기에 휩싸여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K선생의 눈에 띈다. K선생의 백성수 두둔은 사실상 용인될 수 없다. 어떤 가치로도 방화, 시체 강간, 살인 등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오늘 날의 시각이기도 하지만, 그로인해 설명할 수 없는 흥분과 광기를 갖고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해 어떤 창작물을 만들었더라도, 심지어 살아숨쉬는 예술품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이 예술품과 예술가를 동일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가치판단 혹은 문제는 남는다. K선생은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예술가의 천재적 기질을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미적 세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런 지독한 탐미주의는 자칫 시대/현실 동떨어짐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꿈에서는 가능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절대 허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희곡 시나리오 수업 중 쌤이 제일 많이 언급한 플롯은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윤대녕의 <천지간>이었다. 가장 많이 읽히는 본보기를 들었던 쌤과 하도 들어서 읽지 않아도 익숙한 느낌이 팽배한 나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독서 미완결 상태로 기억 속에 묻혀있는 두 편이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작품이 좋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섬세한 결이 역시 좋아서 당시 무슨 얘길 하시며 어떤 식으로 언급됐었나 궁금했지만 저질 기억력이 그걸 알려줄 리가 없지. 시험공부의 후유증은 오래 남아 디오니소스(술의 신 바커스)를 위한 제천의식(종교적 행사)에서 시작되었다는 희곡(연극)의 기원만이 엄하게 떠오른다. 나는 연극이란 매체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지리적 영향일 가능성이 없지 않고, 연극을 보러가면 언제나 좋았다. 살아 움직이는 배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과 호흡하는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늘 가슴뛰었다. 그러니까 이론을 기억하고 있는 건 당시 신나게 공부했었음을 반추하는 거라서, 오랜만에 연극관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작가의 자전적 경향이 강하게 표출된다. 사랑관도 그렇고, 문학에의 열정과 좌절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나하나 읽다 나도 모르게 전체를 읽었고, 표제작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미지도 없이 이름만 강요하는 것 같네요, 내가.. 어떻게 말이라는 것으로 그를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날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한 사파리에서 야영 중 불현듯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돌아왔다는 그녀의 이력. 어떤 방랑과 초월, 실현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의 이국생활과 경력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지금을 궁금하게 했기에 찾아갔다. 원래는 197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모자였던 권오규란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대치되던 시절, 진리를 한 번 알아버린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벗어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돈다. 이십대의 팔팔한 젊은이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출소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방문을 두드리는 일련의 세월에 덕지덕지 묻은 상처는 아무리 벗기려 해도 지울 수가 없는 거였다. 아직, 여전히, 이 세상과 저 세상처럼 나와 당신 사이에는 벽이, 섬이 견고하게 둘러쳐진 것일까. 그 집엔 강아지가 있었거든.. 그 강아지는 하루 종일 연못가에 놓인 돌에 코를 박고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강아지가 왜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이민자 화백이 대답하데. 강아지요? 아아.. 강아지는 명상을 하는 중이에요. (중략) 무슨 명상이오.. (중략) 글쎄요, 이런 거겠죠. 물속에 고기가 있네..

 

팔십년대의 아들딸들은 달랐다. 감옥에서 이십년 동안 그저 앉아 있던 권오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난한 가방을 달랑 들고 그림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이민자의 모습도 보였다. 비밀결사를 다 결성하기도 전에 체포되는 권오규. 그 무렵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민자.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인도를 맨발로 방랑하는 이민자. 감옥에서 일곱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다시 일곱 걸음 걷는 권오규. 아프리카의 눈 엎인 킬리만자로가 보이는 사파리에서 불현듯 그 무엇인가 깨닫는 이민자. 그래도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지겹도록 이십년 동안 앉아만 있는 권오규. 무엇을 견디려고, 무엇을 기다리려고 그저 앉아 있는 권오규. 화염병을 들고 뛰던 강선배, 휴지뭉치를 들고 코를 풀며 따라가던 나..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나는 누구보다 더 이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십대, 팔십년대가 무섭도록 감흥이 없을 만큼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소설집을 펴면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이다. 샤갈과 눈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초자연적 현상은 분위기를 지배한다. 눈이 내린다고 꼭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것인가. 상대적인 모멸감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 키워온 스스로의 환상에 기만당한 것 같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다를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연대 내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환상에 뜨겁게 사로잡혀 있었고, 이제 그것은 빈틈없이 깨져버린 것이었다. 라는 대사로 둘러처지는 연대라는 환상과 허무, 정치에의 혐오, 그것들은 무기인 듯 보였으나 무력감이었다. '이제는'이라는 회의론과 '그래도'라는 명분론 끝에 술 테이블을 뒤집는 싸움. 그날 그 말을 듣고 어째서 명분론 쪽에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는지, 그 뒤로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없었다. 명분론 쪽에 서 있던 당사자마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나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기에 일종의 심리적 동조의식, 다시 말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어쩔 수 없이 상반되는 견해를 취했지만, 명분론의 이면에도 역시 회의론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재돼 있었으리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해나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당사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연대에는 이탈이 없어야 하나. 이 허무의 술자리가 파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 한 가지. 상실된 대화와 깊은 단절감. 이후 모임에서 계속되는 잡담 또 잡담 그리고 잡담. 의미없는 말만 통용되는 시간. 의미있는 말이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공간. 거기에는 연대와 열정, 기대감과 설렘 따위는 없었다. 술자리에서 절반이 돌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결속감과 새로운 공감대와 은밀한 연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나 '샤갈의 마을'에 가게 된다.

 

'흩어졌다'는 결과보다 '흩어져가고 있다'는 과정 때문에 괴로운가. 결국은 '둘'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지. 여자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온다. 우린 모두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와 자고 누구의 손을 잡고 그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함께 있을 땐 고독을 꿈꾸고, 혼자일 땐 누군가와의 연대를 꿈꾸는.

 

 

 

 

 

 

 

 

 

 

 

 

 

 

 

<신라의 푸른 길>은 신경숙의 <부석사>가 그랬듯 문학기행을 떠나고 싶게 한다. 대학 때부터 경로와 목적을 적어내려간 기행노트가 몇 권이고, 그 중 아직 떠나지 못한 장소, 여전히 느끼지 못한 정취가 또 얼만지. 내가 절 탐방을 좋아하고, 불상도 좋아하고 탑도 좋아하고 고요를 좋아하고(애들 말에 의하면 내가 제일 말이 많다는데!) 무엇보다 얼마 전 친구들끼리 모였다가 나온 템플스테이는 로망인데, '새벽부터 일어나서' 부분에서 약간 좌절(침묵과 수양도 약간 힘들 것 같지만). 하지만 나는 이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보통사람이니 맘먹으면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언젠가,로 약속했지만 지금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임. 석굴암 본존불상 아미타불과 경주에서 강릉까지 가는 7번 국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와 같은 문장에서 시작부터 발이 푹 하고 빠지면 더이상 집중이 되지 않고 안절부절못한다. 경주에서 포항을 거쳐 강릉까지 바다를 끼고 가는 7번 국도. 우왓. 남쪽 항구도시에 사는 나는 이 국도가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전용도로 같다. 어릴 때 임진각 자유의 다리, 통일전망대 가면서 아빠가 달렸던 길과 몇 해 전 여름, 가는 길에 진탕 싸우긴 했어도 나름 신나게 떠났던 여행도 그 국도였나. 김연수의 소설 제목. 나는 운전을 못하니까 모른다.

 

내일은 일찍 움직여야 하고 차를 타고 이 책을 읽을까 한다. 내가 갈 길이 7번 국도도 아니고 여행가는 것도 답사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해야 할 일을 든든히 챙겨서 차를 타는 기분이 기다려진달까. 어디 갈 땐 무거운 거 싫어서 책 잘 챙기지 않는데 이 책이 전자책에..전자책에.. 내일 할 일 만들어둔다고 페이퍼에 구멍을 만들었다. 뭐 가끔 이럴 때도 있어야 재밌지! 빈틈도 있고 구멍도 나고 앞뒤 말도 안맞고 간혹 그래야.. 그래서 안녕. 윤대녕 작가를 엄청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여기 이 책에 구멍을 내다니 다시 와서 이어쓰겠음. 꼬옥 쓰겠음.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겨우 찾았다. 이 작품집에 실린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은 비 오는 날의 삼거리에 서 있던 밝은 핑크빛 원피스를 입은 그녀로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상처 그리고 나의 상처. 그녀는 재일 한국인 그리고 나는 그냥 한국인. 그녀가 내 눈에 띈 까닭도 어쩌면 그녀가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내 행보에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적 시적 걷다 보면 시선마저 느긋해져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아낼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 하고 있었고 나는 일부러 그녀 곁을 천천히 걸으며 질문해오길 기다리다 그녀를 안내한다. 다시 만날 줄 몰랐던 그녀와 몇 번 마주치고, 드러나는 그녀의 삶과 나의 삶, 그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아주 짧지만 강렬하다. 무엇에 대해? 카프카에 대해. 하지만 저지 코진스키를 언급하는 부분이 더 강렬하다.

 

유태인에 관한 거라면 나는 저지 코진스키의 <더 페인티드 버드>를 잊지 못한다. 매 장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소설 9장에는, 집단학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아버린 유태인들이 어린 자식들을 달리는 열차 밖으로 내던진다. 열차가 지나간 마을엔 바퀴에 찢긴 아이들의 사지가 건초 더미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요행히 목숨이 붙은 아이들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한테 신발과 옷을 빼앗기고 얼어죽거나, 여자 아이일 경우엔 거기에다 강간까지 당한다.

 

자신에게 그 소설과 같은 내용의 쓰라린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까지 한 조국을 탈출해 저지 코진스키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언어로 소설을 썼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그러나 선배 유태인인 카프카는, 프라하에 끝까지 웅크리고 앉아, 저 독일인의 언어로 <변신> <실종자> <심판> <성>과 같은 소설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다.

 

재일 한국인 그녀와 유태인 저지 코진스키 혹은 카프카. 나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을 것 같다. 영토와 국토를 잃고 방황하는 그들의 상실과 절망과 소외감을 온전히는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는 내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견딜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김인숙의 소설 중 <소현>이 시대와 문체를 통해 왜 그녀가 써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면(당시 나는 그 문체를 말투로 따라하면서 다녔음), <미칠 수 있겠니>는 발리라는 이국적 공간과 지진이라는 자연재해, 상처와 배신으로 얼룩진 사랑을 치유하려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내면을 슬프지만 절망적이지는 않게 그리려는 느낌을 주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과거와 현재가 버무려지는 느낌 또한 그랬다. 결과적으로 아주 애틋하고 완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때로 아득해져서 손에서 놓아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좋았다. 여류 소설가들이 외국 체류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다 나와 다르지도 않아서 좋았는데(물론 그들의 여행기는 별도로 하고)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니 반가운 기분(와락). <먼 길>은 작가가 1993년부터 1년 6개월을 시드니에서 보낸 경험을 살려 쓴 소설로 1995년 한국일보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기로 보면 거의 20년 전인데, 젊은이들의 방황과 정착이라는 코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걸 보면, 사는 일의 본연적 고민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만은 않은 듯하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청년인 당신... 그래서 서글픈 기억... 나는 그것을 붙들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로 요약되는, 한때,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잊지 않는 이상 서글픔이 사라질 수도 없다는 서연의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이, 절절한 기억 속 주인공일지 가슴이 콩닥거리며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포트 멕콰리로 떠나기로 한 날, 서연의 편지를 받았다는 이는 한영이다. 그리고 한영의 세상에는 낚싯배를 모는 형 한림과 명우가 있다. 8년 전 사랑했던 서연만이 없다. 명우를 처음 만난 날은 이해할 수 없다. 네가 아직도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게 왜 희망처럼 여겨졌는지. 관계를 맺는 모든 일에 실패만을 거듭해왔던 지나간 내 삶이, 왜 그렇게 느닷없이 축복처럼 여겨졌는지... 라는 편지를 띄우고 그녀의 답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민잡지사에서 한국인으로서 난민비자로 영주권을 취득한 명우를 취재하기로 한 건 그것이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특수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이민.. 이것을 끝내고 저것을 선택하는 일. 모든 것의 시작. 그들은 이 시작 앞에, 걸어가야 할 먼 길 앞에 흔들리고 좌절한다.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단절하지도 못한 채, 울컥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한영에게는 그 과거 속에 서연이 존재했다. 한림에게는 노래하지 못한 채 헛도는 자유와 그로인해 실패한 결혼생활이 그랬고, 명우에게는 학생 점거농성으로 받은 1년 반의 징역생활이 그랬다. 모두에게 신열같은 열병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방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서연의 그리움을 토로하는 한영에게 명우는 말한다. 사랑이란 건 비로소 그리움으로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던가요. 자조적 웃음을 날리면서도 형(한림)의 방랑벽과 속박된 자유, 명우의 내가 헛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내 길은 헛되지 않았는데 내 삶이 헛되어졌다는 것,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라는 얼치기 고백에도 그만 마음이 사방으로 철렁하는 몰골이 되어버린 자신이 소외감에 몸서리친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생존의 행렬. 한영은 몰랐고 서연은 직관으로 알았던 바로 그것. 언젠가 세월이 뒤틀릴 것이라는 사실. 가족병력이 있던 서연과의 교제를 반대한 아버지를 당신이라 칭하며 맞섰지만, 미칠 것 같은 소유욕에도 불구하고 병신 자식의 아비가 되고싶지 않았던 비열함이 그를 이민자로 내몰았다. 서연 대신 창녀를 안으면서, 여자의 배에 지폐를 뿌려대면서도 잊지 않고 싶은 것,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집착했던 것, 비열함도 아니고 좌절도 아닌 어떤 신념과 계획. 한영은 그것을 다시 갖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떠나자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풍선처럼 가볍게 살자고 말하던 그는 몰랐고 서연은 알았던 것. 그것.

 

상처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그리하여 그 상처에 온 가슴이 전부 문대질 때까지, 끝끝내 버티는 것. 현주소에조차 온전히 머물지 못함을 아프게 상기하며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저마다의 이유로 남을 여기 이 자리, 현주소에 온전히 머무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 이 페이퍼의 박스글이나 색깔글은 모두 소설 속에서 가져온 인용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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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06-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이님. 나 아이님을 아주 미치게 사랑하고 싶다, 이 한 마디만 하고 갈께요.

아이리시스 2012-06-03 21: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너무 격하게 애정하는 댓글 쓰심 댈러웨이님 오해 삽니다ㅋㅋㅋ
제가 여기저기 사랑을 좀 많이 받긴 하지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돌아왔어요. 댈러웨이님 서재에 제 댓글 확인해요. 오랜만에 비밀이에요ㅋㅋㅋ

이진 2012-06-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이님 디게 오랜만이다.
아이님 비밀은 뭘까. 아참 그리고 댈러웨이님보다 내가 더 아이님 사랑하는거 알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님 단편 극도로 싫어한다며요, 언젠가 본적 있는거 같은데. 몰입하면 끝난다구 ㅎㅎㅎ 저도 그랬는데, 요샌 단편이 더 좋아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지만 간단하게 읽고 읽고 난 후의 그 짧지만 아릿한(?) 여운. 그런게 좋더라구요. 문장도 단편이 더 좋은거 같구.

내 친구도 <혼불> 도저히 읽을게 못된다고 해서 물어봤더니 옆에 사전두고 봐야한다고 ㅋㅋ

아이리시스 2012-06-03 23:10   좋아요 0 | URL
아악, 소이진님 보면 저 꼬마아이 얼굴 떠오르고 소이진님 겹쳐지고 그러면서 막 머리 쓰다듬고 싶어요.(나 나쁜누나 아님-.-) 또 사랑고백 받다니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아람~(지금 음표 찾을라고 다 해봤는데 어딨는지 모르겠음. 여튼 나는 노래중)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응응, 그래요! 난 예전에도 단편을 싫어했어요. 근데 그게 맞아요. 소이진님은 현명한 문학소년^^
국문과 수업 듣는데 시험 쳤었어요. 거기 나오는 어휘의 뜻. 나는 하나하나 읽으며 정리했는데(!) 그거 어휘집이 따로 있더라고요. 덕분에 책은 열심히 읽었는데 쪽지시험은 망했어요. 시험은 역시 꼼수와 요령이 있어야 해요(!!!) 수능 끝나면 소이진님도 꼭 읽어요.(응?) 수능치고나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사랑해요, 소이진님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잘자요.. 안녕.

티티카카 2012-06-04 14:37   좋아요 0 | URL
와우, 굉장히 귀여우시네요 ㅋㅋㅋ두 분 다!

저는 최명희 작가님이 원고를 쓸 때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저 읽기만 해도 힘든데 그런 깊고 무거운 책을 오랜 시간 풀어내려고 애썼던 작가님을 생각하니 끝없는 존경이...!

아이리시스 2012-06-04 16:19   좋아요 0 | URL
히히히 티티카카님 안녕?

소이진님이 귀여운 거예요ㅋㅋㅋ 진짜 귀엽^^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멋지다.. 사실 내용은 잘 기억도 안나는데 책 펴면 적어도 5권까지는 단어마다 뜻이 빽빽하게 적혀있어요. 며느리의 비애.. 저는 그것만 지독하게 떠올라요. 한 권씩 사서 읽었는데 어느새 10권을 사서 모았을 때 뿌듯한 느낌과.. 이제 저 책 다시 뺄 때 티티카카님도 함께 떠오를 것 같아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4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댓글 달러 왔어요..ㅎㅎㅎ 나 매일 서재에 들어와요. 그런데 맨날 빈 화면 앞에 두고 망설여요.
자꾸 말을 고르는거죠. 뭔가 막힘이 있나봐요. 내 안에.

7번 국도 말예요. 우리는 강원도에서 경주갈 때 그 길로 갔었어요. 진짜 좋았어요. 해가 지는게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대학교 때 남동생하고 둘이서는 기차를 타고 그 해안선을 타고 내려갔었어요. 서울에서 출발해서 강릉에서 하루 묵고 부산에서 하루 묵는 그때 나름으론 꽤 먼 거리의 여행이었죠. 남동생 대학입학 기념 여행. (솔직히 걔는 뭐가 좋았겠어요. 누나랑 단 둘이..ㅋㅋㅋ)
그때 가 본 부산. 고분고분한 서울 말씨 쓰는 저와 남동생은 지하철 안에서도 남포동 떡볶이 집 안에서도 시선을 자주 받았던 기억이, 그래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막 나네요. 여행가고 싶다.

우리 7번 국도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요. 지금 당장!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ㅋㅋㅋㅋㅋㅋㅋ
(막 이러면서 전 자러 갑니다. 언젠가는...)

아이리시스 2012-06-04 16:25   좋아요 0 | URL
그 길이 그 길 맞나봐요. 그럼 저는 그 국도에서 대판 싸운 기억이........ㅠㅠ 7번 국도.. 리스본 28번 트램 뭐 그런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김연수의 [7번 국도] 그 책 안 읽었는데 보고 싶어지네요. 책은커녕 윤대녕은커녕 차 타고 잠만 잤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계속 미완성일 것 같아요.

남동생과 여행이라니 저희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요ㅋㅋㅋ 오, 고분고분한..그게 바로 제가 부러운 거예요! 서울 가면 저도 시선 자주 받는데ㅋㅋㅋ 다른 이유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7번 국도 중간에서 만나야 합니까?! 제가 운전 못하니까 데릴러 와요. 데릴러 와요! (막 이런다)ㅋㅋㅋ

댈러웨이 2012-06-04 21:04   좋아요 0 | URL
윤대녕은 커녕...요? --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ㅠ.ㅠ

아이리시스 2012-06-08 00: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읽긴 읽었어요, 짧으니까요, 댈러웨이님ㅎㅎ
근데 별로 재미가 없..신라와 경주와 여자가 왔다갔다하다가 가버렸어요ㅠㅠ

2012-06-04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2-06-0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밤에 이 글을 쓰셨군요 :) 시간의 무게가 더해진 그 밤의 글이 저의 추억까지 환기하네요.
저도 단막극 참 좋아해요. 진부한 드라마들 사이에서 신인 작가만의 톡톡 튀는 전개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재미가 모두 날아가버렸어요. 말씀하신대로 무얼 보더라도 아웃풋이 있어야 하는데, 허무맹랑한 감정의 편린들만 남게되는 것 같아 일체 손을 못 대겠어요. 순수한 재미마저 잃어버린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구요ㅠ;;
파리에서 있었던 사연은 씁쓸하네요. 남들에게는 '쓰잘데기 없는 학과'라고 불려지는 데다 수많은 글쟁이들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게 만드는 학과!!

근데,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아이리시스가 무슨 뜻이죠? 검색해보니까 소설 제목으로 있네요? 아닌감? ㅎㅎ....

아이리시스 2012-06-04 16:31   좋아요 0 | URL
그게..그분 여동생도 같은 학과였어요. 그런데 잡지에디터여서 글과 여행 사이를 하염없이 방황하는 분.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잘 아니까! 아님 기분이 나빴겠죠..저도..^^

요즘도 단막극 하는데 자꾸 연속이에요, 4부작 8부작 이렇게요..

irisis 'i'과 'r'과 's'의 조합이 좋아서 창작해낸 거. 뜻은 없어요.하하. 티티카카님이 뜻 만들어주시길^^ 우왓, 소설을 발견하셨어요? 그건 무슨 뜻일까요?!

티티카카 2012-06-04 19:23   좋아요 0 | URL
http://en.wikipedia.org/wiki/The_Well_of_Echoes

소설 제목이 아니라 주인공 이름이었네요. 영어라 막눈이 도졌나보군요 줴길...ㅋ

아이리시스 2012-06-08 00:19   좋아요 0 | URL
위키피디아 가서 봤어요, 티티카카님. 아..두번째 주인공!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데요..저 해석했어요. 너무 신기했거든요. 나 처음 봤어(ㅋㅋㅋ)

2012-06-06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8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igur Ros - Valtari [3단 에코 디지팩]
시규어 로스 (Sigur Ros) 노래 / 워너뮤직(팔로폰)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그들의 등장을 꼬박꼬박 기다렸다거나 기다려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왜인지도 모르게 기다리는 앨범 중 하나였고 나오면 습관처럼 듣게 됐고 새로 나오지 않는 동안은 이미 나와있는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제정신과 제정신이 아닌 중간. 물론 잠에 곯아떨어지기 전의 새벽 상태를 얘기하는 건데, 나는 머리가 팽팽돌 때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겠다 싶으면 낮에는 편하게(여유롭게) 듣지 못하는 앨범을 틀어놓는다. 평소 시규어 로스 틀어놓고 있으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혼자 안드로메다로 간다. 좋은 뜻이기도 안좋은 듯이기도 한데, 지금은 안좋은 뜻이다. 왜냐면 그게 낮에는 별로 좋지 않다. 제정신이어야 현실을 직시해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실수 안하고 똘망똘망하게 살지, 아이슬란드나 북유럽이나 시규어 로스가 내 '현실'은 분명 아니잖아. 그래서 좀 참다가 밤에 틀었는데 뭐, 밤잠을 설쳤다. 심지어 틀어놓고 자서 아침에 깨어보니 아직도 이어폰으로 흐르고 있는 음악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닥터후가 된 기분. 닥터진의 송승헌, 옥탑방 왕세자의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의 지현우가 된 기분. 여긴 어디고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시작부터 끝까지 꾸물꾸물하면서 시리고 차갑다. 대체 어디 이런 세상이 있나 싶어 유토피아, 샹그릴라를 찾아나서야할 것 같은 충동마저 느껴졌다. 세상에, 이건 꿈이야. 음악이 꿈이다.

 

며칠 전까진 이걸 들었다. 얘(어리니까)는 발음이 살짝 말리는 것마저도 귀엽다. 목소리 톤이 남자치고는 비교적 높은 것 같은데 고음에서 목소리가 커지는(보통 발성연습이 덜됐거나 노래 못할 때 나타나는) 일반인티(!)를 내서.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던 때부터 이미 일반인이 아니었는데도. 잘하는 게 많아 보였고, 갈 길을 명확히 아는 배우처럼 보였다. 이미지관리 플랜이 잘 짜여있는 정갈한 배우라는 이미지도 주지만, 한편으로 먼 느낌이기도 했는데 노래로 일반인티를 내다니. 드라마에 한 번도 삽입되지 않았는데(패션왕은 OST가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나왔음) 종영한 후엔가 종영하던 주에 음원이 나왔다. OST 사서 듣고 결제하고 그러진 않지만 당시에는 종종 찾아보긴 했다. 자고로 OST는 작품 안에서 빛나는 법이니 더 말 안하고 패스.

 

 

다시 시규어 로스. 이 몽롱함과 신비로움과 아름다움. 얼마 전 소설 <조드>를 읽고나서(1권만 본 상태. 내가 그렇지!) 충동적으로 아는 사이트를 다 뒤져 몽골에 관한 (여행이든 뭐든) 다큐를 찾아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남의 사진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시아라는 게, 심지어 아이슬란드보다 더 낯설게 느껴진다는 게 신기해서 아주 오랫동안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그랬다. 웬만한 나라들(심지어 끔찍한 에티오피아나 폭탄 터지는 이라크 어느 마을도)도 가면 가는 거지 뭐, 하는 기분인데 이상하게도 몽골만은 이 곳이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왜?

 

이인화의 <하늘꽃>과 김형수의 <조드>가 지금 몽골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옛날의 몽골을, 전설과 신화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소설들을 내가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의 것이기도 했던 땅이고, 한때 우리의 것을 공유했던 땅이며, 어쩌면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역사라 친근감이 드는건가 하면 그뿐만이 아니다. 몽골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또 어떠냐면, 사하라나 아라비아를 뛰어넘는 어떤 신비의 영역을 구축한다. 더 가까운 곳에, 더 북쪽에, 하물며 같은 인종에. 한마디로 동질감인가 하면 확인할 길이 완벽하지 않다. 모르겠다. 친구는 중앙아시아어과를 다니며 터키어와 또 뭐더라, 다른 한 가지 언어를 공부했다. 다음날 생각하길 우즈벡어였던 것 같다. 졸업 후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스탄불로 떠나거나 여느 전공처럼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택한다고 했다. 중앙아시아. 내게 중앙아시아는 딱 그 정도 상식을 지닌 곳이었고, 친구에게는 친구가 가이드를 하고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놓인 도시 정도일 것이다. 자기가 배운 언어에 대한 애증과 대학생활하며 꿈꿨던 어떤 풍경을 간직한 곳.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슴에 담고 꿈꾸는 건 너나 나나 같아, 수다떨던 이십대 초반이 떠오른다. 역사책 제일 앞 페이지에는 韓족으로서 한국,몽골,터키가 같은 혈통이라고 나온다. 쌍봉낙타가 있는 곳도 몽골, 고구려와 같은 기마민족인 것도 몽골, 고대 중국과 갖은 전쟁을 벌이며 서로 압박하며 살아남은 비슷한 역사를 지닌 것도 몽골. 내게 시규어 로스는 유럽의 몽골 같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 동떨어진 곳, 아무 것도 없는 곳, 갈 수 없는 곳, 가려는 생각조차 없는 곳,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곳, 추운 곳, 얼음으로 뒤덮인 곳,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 유토피아(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나 샹그릴라(신비롭고 아름다운 산골짜기나 그런 장소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며, 티베트어로 '푸른 달빛의 골짜기'라는 뜻)라고 해도 전혀 새로운 비유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비유(이)다.

 

허공의, 미지의, 공감각의, 초현실의, 잔향의, 울림의, 메아리의, 승리의, 장미. 반가워, 나와줘서. 조금은 두렵고 또 조금은 춥고 또 황홀한 밤을 선사해줘서 그리고 금세 사라져버리는 손길, 눈길, 발길 다 닿지 않는 곳에 있어줘서. 한결같이 혹은 새롭게. 여행지에서 들을 수도 있고, 들으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시, 시규어 로스는 자체가 여행이다. 음악이 아니 음악 듣는 내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가 바로 여행이다. 일생에 몇 번, 만날 때마다 매번, 낯설어서 아름다운. 오늘 느낀 기시감이 내일 날이 밝기도 전에 이미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정체모를 느낌이라니, 고맙다. 덕분에 내일이 기다려진다.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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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2-06-0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듣는 내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가 바로 여행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뮤직 비디오가 참 멋지더군요.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프로필 사진은 누구죠?

아이리시스 2012-06-03 02:06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은 이나영, 저는 실비아 플라스!

닉넴이 예뻐요. 그리고 반가워요. 이 밤에, 처음오신 분의 댓글이구나(!) 이러면서 행복해하고 있슴. 행복한 주말밤 되세요. 우리 음악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구요^^

댈러웨이 2012-06-0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글엔 자꾸 먼댓글을 달고 싶어지는데 엄청 참는거 알아요?
어제 계속 시규어 로스 들었어요.
오늘도 계속 들을거에요.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아이슬란드일거에요. 언제부터 그 추운 나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래의 두 음악, 아이님이랑 듣고 싶어요.

http://www.youtube.com/watch?v=9VwjiZmE_jA =>뷰욕이 피쳐링 했어요.
http://www.youtube.com/watch?v=mYIfiQlfaas => 맑고 몽환적이죠.
(성은 같지만 다른 뮤지션이에요.)

일요일 잘 보내요. ^^

아이리시스 2012-06-03 22:06   좋아요 0 | URL
나만 간 건 아니었어요 :) 안드로메다는 댈러웨이님도 같이 갔어..( '') 히히 저는 먼댓글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 까먹어요! 근데 지금은 그 메뉴도 안드로메다로 가버렸어.. 지금 주소로 들어가서 듣고있는 중. 근데요, 세상에 뮤지션들은 왜 일케 많은 거예욧! 것도 제가 모르는..사실은 아는 게 극소수지만, 이야, 가야금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아.. 저 성이 아이슬란드 성이예요? 저는 이런 뮤지션이 있는지 몰랐어요. 오호호. 둘 다 좋네요^^ 맑고 몽환적.. 좀 더 다운되어 있는 듯해요. 시규어 로스는 진짜 이 세상 아닌 것 같았거든요. 잠결에..

얼마 전에 화산폭발했을 때 친구가 더블린까지 재가 날아온다며 아이슬란드 싫다고 했어요ㅋㅋㅋ 저는 그 나라는 이상하게 시규어 로스랑 화산재만.. 얼음도.. 추운 건 싫지만.. 꼭 가보고 싶어요. 꼭 가보겠다고 하지 않으면 지나쳐갈 수 없는 나라일 것 같아요.

오늘 일요일 거기 날씨 많이 추웠어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폭스8월버젯행사)(Last Tango in Paris)
20세기폭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금지된 사랑을 하고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원초적 감정을 건드리는,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격정적이고 예민하고 치열한 사랑과 욕망을 고도의 정밀함으로 표현해낸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멜로나 로맨스 영화를 잘 못본다. 잘 보고 싶은데 극장에서는 아예 고르질 않고 보다가 10분 안에 꺼버리는 게 대다수. 상큼, 발랄, 현실적 얘기들을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고 결론 짓고도 자꾸 보려고 기웃거린다. 예전엔 프랑스 영화, 요즘은 소규모 유럽 영화들 대부분이 그런 것 같은데 그 중에서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는 <베티 블루 37.2>(1986) 다음으로 묘하게 아픈 영화다. 길을 잃은 욕망이 표류하는 것 같은 간절하면서도 치명적인 선이 있는데 스토리보다 이미지로 먼저 다가오는 감독이 그려내다보니 과하게 야한 영화로 포장된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에로틱한 면이 없지 않고 벗은 여자를 샤워시키는 장면은 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선호되는 씬들이 섹스에 골몰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고독. 향할 수 없는 목표. 길 잃은 영혼. 그런 것들이 시대의 흐름창을 만나 폭발적으로 표류한다. 선호하는 감독이 없었는데 이제 알모도바르보다 빔 벤더스와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들이 더 황홀하게 느껴진다. 존재의 무거움을 감당하려고 혹은 감당하지 못해 서로가 서로에게 짐으로 얹혀야 하는, 그 모진 영혼들이 만나 결합하는 모든 장면이 파리의 퇴폐적 아름다움과 만나 야릇하고 살벌하게 진행된다. 이런 영화는 바로 그 야릇함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정말로 끝이다.

 

위태로움이 배제된 사랑은 권태를, 위험을 갈망하는 사랑은 파멸을 몰고 온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로 데뷔한 에바 그린의 엄마이자 배우인 마를렌 조베르는 마리아 슈나이더가 겨우 19세에 잔느 역을 맡은 후 육체적,정신적으로 모두 배우로서도 여자로서도 정체된 고통을 겪은 점을 들면서 에바 그린의 첫 작품을 반대했다고 한다. 내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딸이 노출과 고독의 강도가 강한 작품을 한 후 찾아올 공허를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잘 해냈고 데뷔작은 큰 반향을 일으켜서 지금까지도 할리우드와 유럽 소규모 영화를 넘나들며 고공행진하는 요염한 배우가 되었다. 외모는 그때보다 못해진 것 같지만 이 작품이 첫 주연작이자 대표작이던 마리아 슈나이더에 비하면 에바 그린의 필모그래피는 꽤 단단하고 발전 가능성이 열려있다. 베르톨루치 감독이 스토리보다는 영상미에 치중하는 바람에 지독한 탐미주의자로만 꼽히는 게 아쉽다. 나는 아무래도 이제 몇몇 감독들을 완전히 편애하기로 한 듯한데 아주 좋아하는 것은 동시에 아주 싫어지기도 쉬운 지점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일 뿐이라고만 밝혀두어야겠다. 어느 시점의 나는 이 영화들에 열광했다고, 어느 감독들의 특정 시선에 기댄 이미지들을 간절히 바랐다고 뭐 그렇게 기억 속에 묻어가는 어떤 것으로.

 

다시 <대부> 시리즈를 학습했다. 봤다기 보다 학습이 어울린다. 다시 볼 경우에 생기는 어떤 특별한 시선을 나로서는 부정하기 힘들고(물론 의도치 않게 훌쩍 다가서는 지점까지 부정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지금은 말론 브란도를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느끼고 싶고 푹 빠지고 싶어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의 태생에 59년이란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픈 어떤 시간과 감정이 소중해서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다. 배우 황정민이 장례식장의 슬픔 속에 앉아서조차 다음에 연기할 때 이 감정, 이 느낌을 잊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가 징그럽게 느껴졌다던 일화에 덧붙인 다른 사람의 시각은 그는 진정한 배우가 맞구나, 하는 것이었단다. 오래 전에는 어제 쓴 글이 다음 날 읽어도 창피하고 부끄러워 늘 삭제버튼을 밥먹듯이 눌렀다. 어린 마음이 조금 유치할 수도 있고, 못 가진 걸 숨기기 위해 센 척 했을 수도 있고,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비이성적임이 부끄러워 울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삭제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 영화에 스며든 외로움과 고독,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이 점점 닫혀가는 것, 익명 뒤에 숨어 자꾸만 감춰야 하는 사랑, 다 까발림으로서 놓쳐버릴 것만 같은 상대에 대한 불안, 만나지 못하는 마음과 의미를 상실한 섹스, 쓸쓸한 파리 그리고 현대인들. 모든 것들을 원한다. 혹은 사랑한다. 다가가는 대신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를 이제는 이해한다. 아무 것도 없다. 지독한 눈빛과 광기어린 쓸쓸함 만을 제자리에 놓은 채, 대배우 말론 브란도는, 파리는, 그렇게 떠났다. 다시 꺼내볼 날은 훨씬 훗날이었으면 좋겠다.

 

나, 누군가를 소유하지도, 누군가에게 소유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을 안을 수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을 테지만 아무 것도 될 수 없을 테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 사실 때문에 하루하루를 아주 고달프게 살아서 언젠가 나를 누르고 지나갈 그 기차 앞에 설 날이 오게 될 지도. 존재를 혁명하며 섹슈얼리즘을 간절히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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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5-3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반복되는 행위들 속에서 어떤 고독감과 허무감이 증폭되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볼 때는 말씀하신대로 꽤 영상미가 있는 편이라, 그런 생각을 못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뭐 그런거죠. 저렇게 외롭다고 섹스를 하고 있는 저들이 외로운걸까, 텅빈 방에서 홀로 이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외로운걸까,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다면서 화면은 더럽게 이쁘네, 젠장..뭐 그런 거.

참 생각해보면 나이 70이 넘은 이 분도 올해 영화를 하나 내놓으시고 칸도 다녀가셨으니, 놀라운 할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은 올해 90세가 된 알랭 레네도 올해 영화를 내놓고 칸에 출품했다는 사실..90이 되신 분이 도대체 어떤 영화를 내놓으셨을지 되게 궁금하지 않아요? (나만 그러나..)

아이리시스 2012-06-02 14:34   좋아요 0 | URL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쌍벽을 이루는 우울함이랄까, 사실 <베티블루> 보면서는 우울하진 않았는데요.. 파란 페인트 바른 집에서 살고싶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하하. 이 영화 혼자 보면 정말 그런 기분 들어요. 프랑스 영화들은 대부분 그렇던데.. 영상미가 필터 탓이 아니라 배경 탓일까요. 아직도 모르겠..

90세.. 알랭 레네요..?(찾아봄) 대단하죠.(저도 궁금함) 예전엔 노장감독이라면 고리타분할 거란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몇 번 확인한 후에는 나는 지금도 살기가 귀찮은데(!) 70..90.. 저렇게 오랫동안 살면 대체 뭘 하고 살아야 되나 싶어요.(응?)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31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고독은 파리에서 느껴야 제맛...^^
언제 다시 가서 그 고독을 맛볼 수 있을까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려나....

아이리시스 2012-06-02 14:37   좋아요 0 | URL
원래는 올해 두오모(피렌체) 가야하는 계획표인데 꼬박꼬박 넣는 저축보험 대출을 며칠 전에도 받았다는.. 넣고 쓰고 넣고 쓰고 하는 일의 연속이에요ㅠㅠ 히히히 현맘님은 훌쩍 가심 되죠^^

나 파리 다녀올게요^^(응?)

이렇게 말하는 날이 오겠죠.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3 01:34   좋아요 0 | URL
나 피렌체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난 파리 가요.
그럼 잘 다녀와요.

이렇게 일상적으로다가, 평범하게 대화하면 정말 좋겠다. 그죠?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6-03 02:10   좋아요 0 | URL
현맘님 밤에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묻고, 너는............?!)

나 내일 창원 가요.
잘 다녀오라고 해줘요.(나름 장거리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3 21:39   좋아요 0 | URL
창원 잘 다녀왔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창원도 참 심리적으로 먼데, 뭐...파리는 더하네요..ㅋㅋㅋ)

아이리시스 2012-06-03 23:00   좋아요 0 | URL
저는 비행기 타고 열세시간 영국갈 때 설렘보다는 좀 많이 무서웠거든요.. 몽골 땅 지나갈 때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지겹고 두렵고 발작 일으킬 것 같았어요. 하늘에서 열세시간이나 간다는 게.. 그리고 비행기..나이 먹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잘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실감한 것 같아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비행기 열시간..헐..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요, 현맘님ㅠㅠ 그래도 지금 누가 가라면 당장 가겠어요!(벗으라면 벗겠어요, 그 심정ㅎㅎ)

음.. 창원 멀어요. 멀고 피곤하고 어쨌든 다 지나가서 후련해요. 제가 다 피곤해요. 현맘님은 뭐하셨을까요?! 저 지금 '체리마루' 좀 퍼먹을라구요. 장동건이 나오고 있는데 리모컨 뺏기고 송승헌 보는 엄마한테 점령당했어요! 이런..아이스크림이나 퍼먹죠 뭐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