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다. 조별로 돌아가며 하는 발표수업. 전지에 시해석을 해서 조장이 발표하는 국어시간. 그날 발표자는 나였다. 남 앞에서 떠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자의든 타의든 조장이 되었고 반드시 발표를 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또 막상 닥치면 떨지는 않는 편이라서 좋든 싫든 멍석 깔아주면 곧잘 했는데 그날은 선생님께 된통 혼이 났다. 읽지 말고 다 알아듣도록 설명하듯이 하란 말이야. 나는 다시 했다. 거기부터 다시. 나는 또다시 했다. 몇번 실랑이가 반복된 끝에 짜증이 났다. 그러자, 아아, 안 되겠다. 다음 시간까지 더 보충하고 연습해서 다시 하자. 에잇, 그럴꺼면 자기가 하든지. 내가 선생이야? 짜증이 왈칵 솟고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는 그냥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는 [청포도]였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지금은 배경지식이 널널하니까 이 시에 대해 혼자서 세 시간도 떠들 수 있지만 중3 때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다 내용보다 발표력에 더 문제가 있었으니 그날 이후 나는 혼자 읽고 또 읽고, 설명하고 또 설명하면서 다음 국어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발표를 끝냈을 때,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선생님 해도 잘 하겠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흠, 그렇게 잘 했나?ㅋㅋㅋ 앞시간의 쪽팔림을 만회한 건 뛸듯이 기뻤지만 선생님이라니 세상에, 나는 전혀, 네버!!! 선생님 할 생각이 없다고!!! 쳇!!! 흥!!!
하지만 나는 종종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낭송을 하지는 못했다. 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슴 뛰는 일이었다. 시대를 빼고도 흰색과 푸른색의 시각적 대비, 알알이 열린 청포도 같은 행의 풍성함이 청량하고 따뜻한 기운을 주는 시다. 예쁘고 아름답다. 청포도라니, 청포도. 꺄악!!! 3=3=3=3=3=3 나는 청포도맛 사탕을 엄청 좋아한다.
그것도 최근엔 영 드문드문, 잊고 있었던 이 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준 건 어제 방영한 김동완이 이육사 역할로 열연한 광복절 특집 드라마 [절정].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그가 이토록 격렬한 독립운동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시인은 책상에서 글만 다루는 줄 알았지 총을 들고 싸우기도 하고, 옥중에서 고문을 감내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역사 속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글과 시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진 시대였음에도 내게는 무지한 면이 있었다.
드라마를 첨부터 본 건 아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안락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절절한 고민과 방황이 드러났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지만 자식의 죽음소식 앞에서도 울음과 함께 밥을 삼키고 하나밖에 없는 여인을 두고 떠날 때에도 뼈저리는 눈물을 참을 줄 알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고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의 목숨과 미래를 부지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뒤에서 눈물을 삼킬지언정 앞에서는 당당하고 진중한 남자로 남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훌륭한 독립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의 목숨과 피와 눈물을 조국 앞에 바쳤다.
자신들을 좇는 친일파 일당을 쏠 기회가 있었건만 그는 한 번 망설이고 두 번 망설이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동지를 잃는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오래도록 시를 쓰자 했고 누군가는 폐병을 앓는 자신에게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 소리쳤지만 그는 순응하지 않았다. 후반 그의 인생은 늘 쫓고 쫓기고 잡혀가고 고문 당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로인해 얻은 폐병은 동지들에게조차 버림받을 위기에 처하고 스스로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의 꿈을 지키려 최선을 다한다.
핍박받던 시절, 한순간 사랑해주고 일평생 떠나버리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란 어떨까. 여인에게도 분노와 열정은 있는 법. 그녀에게도 세상은 바꾸고 싶은 대상이었고, 그녀 안에도 자유를 갖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을 것이란 점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하지만 여인이란 어떤 존재던가. 남자의 기둥, 남자의 쉼터, 남자의 보금자리 아니던가. 여자는 오래도록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린 남자의 빈자리를 지키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혼자 그의 아이를 낳고, 투정부리는 아이 입안에 밥을 넣어주고, 아프면 들쳐업고 한달음에 의원으로 뛰어가 동동거린다. 그렇게 한순간의 폭풍같은 일상이 지나면 기약없던 남자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온다. 새처럼 자유로운 비상을 시도했다 절망과 체념의 상처로 지쳐 돌아온 남자에게 그녀는 그까짓 일상의 고단함을 단 한톨도 토로할 수가 없다. 없어서 또다시 검은 울음을 삼킨다. 붉은 투지를 불태운다. 살아야 한다고.
이번에는 오래일까 기대와 불안에 휩싸이면 남자는 다시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인사만 없는 게 아니라 기약도 없다. 떠남을 알지만 기약이 없어 붙잡지도 애원하지도 못한다. 잠든 척 울먹인다. 애원할 때도 있었다. 고문을 견뎌내고 석방돼 돌아온 남편을 잠시나마 돌보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그와의 시간 전부였다. 조심스럽게 둘의 미래를 꿈꾸자면 남자는 제 작은 가슴 안의 터질 듯한 열망으로 미쳐버릴 듯하다. 그녀와 같은 행복을 꿈꾸지만 조국의 독립이라는 자유에 대한 열망 또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열병으로 아이를 잃고나도 남자는 멈출 줄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원동력이 된다. 그는 피와 울음으로 꾸역꾸역 밥을 삼킬 뿐이다. 여자는 안다. 남편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떠나는 발걸음은 물론이고 그의 안에 든 열망과 분노, 욕망 또한 자신이 붙잡아 매어둘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그는 북경에 있는 감옥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죽을 때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길 거부했고 죽기 직전 옥중에서 피로 시를 썼다. 인생 대부분이 그랬듯 완강하고 고고하게.
시를 읽는다.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맞다. 이 때에도 나는 아무도 모르게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온다는 초인을 기다렸었다. 목놓아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나는 기다렸다, 오랫동안, 간절하게. 산맥과 산맥을 넘어 들판에서 들판으로 또 하늘로 세상으로 막 날아오르는 듯한 이 시가 나는 좋았다. 씩씩해서 좋았다. 울컥해서 좋았다. 기다림이 즐거울 것 같았다. 씨를 뿌리고 싶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정말 좋았던 시는 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바로 이 시다.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하는 행에선 특히 손에 잡힐 듯한 절묘한 묘사력에 전율이 일어난다. 그의 절정도 이 시를 쓸 때였을까. 그렇다면 무엇의 절정이었을까. 이 시에는 분노와 절망으로 얼룩진 패배감에 몸서리치는 남자의 모습이 절절하기만 한데. 물론 모든 것을 간단히 눌러버리는 불타는 투지도 함께 읽힌다. 우리가 절정이라 부르는 것들은 보통 아주아주 행복할 때가 아니던가. 그에게 있어 절정이란 분노와 슬픔의 최고조였단 말인가. 아아, 다 이해할 수 없겠다. 다 이해할 수 없다고만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이렇게 말해도 내가 뭘 얼마나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슬픔, 분노, 절망, 패배, 아픔, 가슴벅참, 미래, 희망, 꿈에 대해서.
어제는 66주년 광복절이었다, 교과과정에 버젓이 한국사가 있음에도 삼일운동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는데 광복절 또한 어린 세대에게 그저 그런 쉬는 날 이상은 아닐 듯. 또한 광복은 좋은 일이지만 누군가의 식민지였다 풀려난 날을 66주년이나 기념한다니, 썩 유쾌하진 않다. 하지만 잊을 수도 없다. 잊어서는 안 된다. 광복이라는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얻어냈는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칭찬 일색, 내용 또한 흠잡을 데 없다. 나는 기념일 특집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지만(진부하다고 생각함) [절정]의 몰입도는 최고였다. 엄마가 거실 컴퓨터로 조용필 노래를 듣고 맞고를 치는 와중에도 나는 꿋꿋이 볼륨을 높여가며 봤다.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고민했고 그의 결단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에는 그가 사랑한 단 한 명의 여인처럼 기다렸다. 그가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때에 나는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그의 고통에는 함께 아팠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독립투사들은 역사 속에 셀 수 없을만큼 많다. 그중엔 잊혀진 이도 있고 기억되는 이도 있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그들의 지난하고 붉었던 삶을 기억해줘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누구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다. 운좋게 그들이 꾸려놓은 세상에 들어와 내가 만든 세상인양 잘 살고 있지만 조금만 빗나갔으면 내가 겪을 수도 있었던 내 인생이다. 소리내어 그의 시를 읽는다. 절정에서 꽃은 꺾인다는 진리를 곱씹으면서.
+ 김동완은 더 멋있어졌다. 에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이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