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도서관 타령해봐야 별 수 없다. 여긴 책을 파는 곳이니 나는 별로 좋은 고객이 아닐 터. 이제야 책값 걱정을 한다. 주문하는 책 태반이 문학일 때는 정해진 금액에서 어떤 책을 택하는 게 가장 이상적일까만 고민하면 됐다. 관심사 아니 갖겠다는 욕망이 커질 때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이러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어려운 책을 구입해(그래도 한글로는 쓰여있어야 함) 일 년 내내 읽는다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든가 단테의 <신곡>을 암기해보는 건 어떨지. 이래도 괜찮을까. 이언 매큐언과 슈테판 츠바이크, 요 네스뵈와 줌파 라히리, 산도르 마라이와 옌롄커와 오에 겐자부로, 줄리언 반스가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페이퍼. 지금까진 생각의 골이 얕을 때 페이퍼를 썼다. 이제 그냥 단상이 되어버렸지만. 비교적 같은 시기에 내가 '읽었다는' 사실 빼고는 만날 이유나 까닭이 하나도 없는 작가들. 김경주의 시로 표현하자면,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작가가 내 마음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쓸 책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쓴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김경주, 『몽상가』중에서

 

아빠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설령 맞다 해도 내가 아는 건 당연히 남들도 알고, 하물며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남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0.1%를 제외하면 주어진 정보, 해결능력, 생각의 방향이나 가치 등이 큰 범주내에서는 대체로 일치하는 법이니 상황의 난이에 휘둘리지 말라는, 그럴 경우 특별히 주눅들것도, 특별히 잘난척할것도 없다고 하신 말이다. 좀 유리하다고 나서고 좀 불리하다고 숨으면 언젠가 내가 휘두른 칼에 내가 다치는 거라고. 그렇건 아니건 어떤 범주에서 이 난이를 인정한다 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소통의 불안정성이다.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했다면 이 사회에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퇴폐적이고 예리한 감수성의 천재 피아니스트가 생겼을 리 없고, 누군가 미쳐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왔을 리도 없다. 너무 평범해서 그 평범함이 진저리칠 만큼 싫은 우리는 과연 미치지 않아서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언젠가 그들은 고위 관료가 되고, 경례를 붙이고, 권력을 과시하고, 틀에 박힌 일장 연설을 뿌리다가 유순한 닭대가리가 되어 예전의 적들이 되는 대로 던져주는 부스러기에 감읍하리라. 하지만 잊힌다 해서 과거도 죽음도 묻히는 건 아니다. 시간 안에 시간이 있고 과거는 현재를 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다시 죽을 테고, 저주받은 자들은 다시 저주받을 것이다. 절름발이를 제조하는 체제는 예견된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또 다시 그렇게 작동할 것이다. -니콜라이 그로츠니, <분더킨트>

 

 

분더킨트(Wunderkind)는 '음악, 문학, 예술계의 조숙한 어린 천재나 신동'을 일컫는다. 배경은 1987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2년 전부터 역사가 이뤄지는 날까지, 소피아의 영재음악학교에 다니는 소년 콘스탄틴의 기록이다. 소년의 눈에 비치는 모든 세계-레슨, 연주, 수업의 단상과 친구, 사랑, 선생님에 대한 느낌-는 브람스와 쇼팽과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리스트, 라벨, 슈만,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등 수많은 음악의 불꽃과 절망, 음모의 선율로 형상화된다. 핍박당하는 시대와 체제의 아르페지오. 세속적 속박과 창공의 경계선, 화음과 흐름과 모욕과 경멸의 순간을 허공으로 날려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의 흐느낌은 와인에 취한 자의 눈에 비친 거리의 네온사인처럼 흔들린다.

 

소년은 누릴 수 없는 불행을 타고났다. 이해받을 수 없는 약점. 재능을 갖춘 자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열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를 괴롭힌다. 붉은 저주가 되어 비밀을 속삭이는 음성, 시간 안에 갇혀 시간을 뛰어넘는 자의 슬픔, 생각 없는 시계 같은 연주의 야만성. 예술의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악이란 최면에 걸린, 악령에 사로잡힌 복종과 다름없다. 같은 상황을 남과 다르게 느끼는 것. 천재는ㅡ 땅 밑에 사는 자, 인생 전체에 걸쳐 반쯤 파인 터널을 걸으며 연주하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현실에 갇혀 신음하고, 영혼과 유령을 연기하는 카니발에 음악이라는 도구를 들고 참여한 사람이며, 삶의 대부분을 몽유병 상태로 보내는 존재들이다. 시대가 버린 도주한 용의자들. 이 소설을 읽은 후 열고 나온 문을 닫아야 했다. 쏟아진 이데올로기, 불가능한 사랑, 교만하고 잔인한 십대의 레퍼토리가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을 읽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갇혀있다는 사실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방, 거실, 집, 놀이터, 공원, 하다못해 기차역, 관광객 들끓는 여행지에서조차도. 나는 기꺼이 갇히는 대신 더욱 바짝 더듬이를 세운다. 겨우 주인공과 함께 비슷한 이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고 웃을 수 있었다. 미쳤다는 걸 인정하는 게 보통 정신으로는 되는 일이 아닐테니, 독서가 가능한 만큼 덜 미쳤다는 뜻도 된다, 안심하자. 뛰어난 문장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소소한 사연이 있을 뿐인데도 그게 삶의 본질인 만큼 잘도 굴러간다. 우리가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날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 때문일까. 나라는 존재의 균형점이 타인에게 있다는 역설이 조금은 슬프게 들린다.

 

 

 

 

 

어둠침침한 침실에서 보면 그녀의 집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륙처럼 보였고, 그 광활한 대지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가족들은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어떠한 환상도 없었다. 예전에 자신이 세운 계획들은ㅡ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지만ㅡ시간이 지나 빛이 바랬고,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세운 것이라서 모든 사건을 다 통제하려는 과도한 낙천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육감의 덩굴손을 집 안 곳곳에 뻗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미래에까지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남에 대한 친절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 -이언 매큐언, <속죄> (p.107)

 

호손의 <주홍글씨>, 매즈 미켈슨의 영화 [더 헌트]가 다루는 지점은 같다. 합리의 무모한 도전이 어떻게 불합리가 되는가, 그러니까 마녀사냥 당한 헤스터와 루카스가 어떻게 이 상황을 버텨나가는가 혹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대우 받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속죄>는 <주홍글씨>와 [더 헌트]에 해당하는, 사건발생 후 마녀사냥의 행보와 로비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다만 로비가 군인이 되어 전쟁의 시기를 견디는 순간만으로 로비가 견디는 죗값의 상황이 압축되어 펼쳐질 뿐. <속죄>에 한 챕터를 더 쓸 수 있다면 그건 <주홍글씨>나 [더 헌트]가 될 것이다.  

 

 

 

 

원제는 구판 <연민>이 아니라 신판 <초조한 마음>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츠바이크는 같은 내용이라도 여느 작가들에 비해 굉장히 집요하게 쓴다. 순간을 포착하는 묘사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감정몰입도가 점점 높아진다. 단편도 그런데 심지어 장편에 대해 덧붙여 뭣하겠나 싶으면서도, 이 가능한 상황의 불가능한 묘사, 꼼꼼한 심리전, 예민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연민'이 이토록 양가적인 감정이란 데 어김없이 동의하면서도 어느 경우 소모일 수도 있지만 또 어느 경우 최소한의 호의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연민이 아무리 부조리하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인 한, 좋은 사람이고 싶은 한,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격상 한 작가를 연달아 전작할 가능성은 지금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어떤 독서 스타일이나 습관은 각기 다른 분야의 책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거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위대한 해리 홀레 반장만 기억한다면 이 작가를 잊을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놓칠 때가 많았던 추리 시리즈물 중 그나마 첫 스타트를 첫 (번역)작품으로 시작한 드문 작품인데, 겨우 두 권째. 앞으로도 나는 기존에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가 한 권 한 권 구간으로 전환될 때마다 읽기로 한다. 이왕 늦은 거 책값이라도 굳게. 얼마 차이도 안 난다는 게 함정, 이러다 도서정가제 실시되면 그건 그것대로 또 낭패. <스노우맨>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순백의 눈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면 <레오파드> 역시 흰 이미지가 월등하지만 콩고 때문인지 상상 돋는 살인무기 때문인지 붉고 단단한 강렬함이 먼저 느껴진다. 더 생생하고 더 정교하고 더 가차없는 스토리. 더 말하기에 이미 늦기도 했고, 더 써봤자 앞으로 읽을 분에게 방해라면 몰라도 도움이 될 리 없다.

 

 

 

파리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에서 태어나 심리학자, 사회학자, 연구자로 정부 각 부처에서 고위직 간부와 고문으로 다년간 경력을 쌓아온 다소 지긋한 나이의 작가다. <나의 몫>을 읽는 일은 말하면 입만 아픈 아랍(이란)의 진부한 현실을 꼼꼼하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아프간의 실상을 다뤘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다르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건도 더 알아야 할 사건도 없는 현실을 굳이 두꺼운 책과 힘겨루기하듯 읽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나 오빠에게 돌아가는 대가를 위해 제 입이나 덜어줄 양으로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 한다. 강간과 다름없이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나이 차 큰 남편 수발과 함께 평생 부엌데기로 사는 삶이 나의 몫이 아님을 아랍의 여자들이라 하여 몰랐을 리 없다.

 

여주인공은 가족 몰래 연애를 하지만 오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 남자가 도망가고 힘든 시간을 겪는다. 다행히 잘못된 전통과 관습을 전복시키려는 소수의 반집단(혁명집단) 소속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불행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관습적 결혼과 핍박의 삶으로부터는 구해졌다. 하지만 남편은 가정보다는 바깥 일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아내에게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하고 혁명을 돕게 하지만 가정을 안정감 있게 꾸리지 못한다. 남자가 잡혀가고 홀로 가사와 육아, 생계를 책임지는 마수메에게 더이상의 공부는 무의미하다. 전통과 관습이 고수되는 테헤란에서 여자에게 교육이란 그야말로 삶을 방해하는 사치다. 남편을 잃어도 자식은 커간다. 이 고단한 시간, 지난한 고통의 보상은 아들이 보내는 감사인사다. 서글프고 막막하다. 아직도 이런 사회가 지구상에는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삶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나, 만약 그 반대라면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은 철로를 걷기 위해 사는 것처럼 지루할 것이다. 영혼을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어떨지, 나는 모른다.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문학을 아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다가 약속도 인사도 없이 한 사람이 먼저 떠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믿을 만한 조력자이자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사람들. 어쩌면 다른 사람에 비해 나눌 수 있는 기쁨을 하나 더 가졌기에 잃었을 때 내 팔다리가 두 배로 잘려나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팻에게 바친다'는 줄리언 반스의 헌사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랑고백으로 들릴 즈음, 오랜 시간 침묵을 거듭하다 비로소 입을 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삶의 일부였음을 조심스럽게 선언하는 목소리.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보내기까지 여전히 함께였으므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개 옳다.

 

 

 

 

 

<저지대>를 읽으며 별로 재밌지도 않은 <나의 몫>이 떠오른 이유가 아마도 '혁명'이라는 화두 때문일 것이다.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상황은 별다를 것 없는, 어쩌면 단지 '현재'나 '행복' 혹은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지금 힘든 상황에 대한 '회피'에 치중했을 평범한 선택이 삶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이유. 참으면 현상유지가 가능하지만 삶이 고통스럽고 대항하면 무언가에 나를 바칠 것처럼 살아야 하면서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어지는 것. 혁명. 하지만 이 얘기는 혁명이 주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모든 키를 수바시와 우다얀의 한가운데 있던 가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떠밀렸다기보다는 셋은 혁명이든 책임이든 배반이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이란 걸 했기 때문에. 행복과 사랑의 순간이 무척 짧고 고달팠던 기억과 그 기억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던 한 여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렇다면 유독 정해진 운명에 매몰당한 사람은 벨라가 아니었을까. 출생에 얽힌 비밀, 엄마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 그러나 벨라 역시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꾸리게 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전적으로 '선택'의 범주로 엮인다. 처음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에 휘말릴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그 소용돌이가 날 그저 스쳐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기에 선택을 하면 할수록 더 끈적한 갯벌 속으로 자꾸 빠지는 상황을 혼자서는 도저히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아니란 걸 알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세 명의 주인공, 어쩌면 그들의 딸 벨라와 형제의 부모까지도 그들이 한 선택을 후회했으리라 가정해본다. 하나의 삶이란 곧 포기한 다른 삶에의 영원한 갈증이기도 하니까. 결국 가장 불행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일지도.

 

 

 

 

<아름다운 폐허>는 옅고 싱겁다. 아름다우면서 폐허같은 느낌을 형상화했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제일 외로워졌고, 그 외로움은 정말 폐허같았으니까. 영화로 치면 압도하는 장면이 없다고 해도 좋다.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아쉽다는 기분이 절로 들 때 그건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이다. 서정적인 표지그림과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포르토 베르고냐'라는 배경에 끌렸다. 만약 50년이라는 시간 사이로 흐르는 강과 베르고냐에서 할리우드까지의 거리를 짐작했다면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 외딴 섬마을(한적)과 할리우드(복잡)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감명깊은 스토리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놓칠 수는 없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아무도 모르게 훔쳐 수첩 귀퉁이에 적어두고 싶은 문장이 제법 있다. 잊힌 시간과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관조.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감수성은 역시 멀찍이 떨어져 낯설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난 시간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다.

 

 

 

 

어쩌면 고통이란 밤이 새벽빛에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그렇게 차례를 지켜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숙명이 아닐까. 꼭 만나기로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고, 내가 만든 아이의 평화로움은 순식간이며, 악순환의 고리, 카르마, 불투명한 미래, 오랜 습관, 불행의 꿈나무 같은 사람들. 이 전쟁같은 삶은 실은 아주 극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문학적으로 특별하다는 느낌도 없다. 그런데 간절하다. 뭔가에 쿡쿡 찔리듯 아프다. 현란하고 기교있게 씌어진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흔들리는 정직한 비극. 삶은 계속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 아우성이고, 그걸 지켜내려는 노력은 전쟁과 같다. 아이는 부모의 땀이고 눈물이고 비밀이다. 더 완벽하고 대단하고 멀쩡해야만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둠과 어둠이 만나면 더 짙은 어둠이 된다는 공식은 끝내 믿지 않으련다. 그럴 수가 없다. 여행은 절망이었다. 수많은 위기의 확률을 마지못해 이겨낸 절.망.

 

 

 

 

 

산도르 마라이는 분명 세 명의 주인공 시점에서 각자의 입장을 써내려가기로 철저하게 구상한 후 쓰기에 돌입했을 것이다. 일롱카의 입장에서 일단 쓰자, 다음은 페터의 입장에서 써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디트의 입장에서도 쓰자, 하고 썼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서늘하고 개인적인 독백을 내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다. 총알처럼 달렸던 상권이 끝나고 하권을 시작하며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기 시작했으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좋았다, 고 쓰기에 민망한 책이 될 것 같다. 좋았지만 좋지 않다? 이상하다. 평소대로라면 일롱카의 마음을 읽었으니 페터도 궁금해야 정상 아닌가. 페터를 읽어야 유디트의 마음을 읽을 차례가 오는데, 요즘은 읽던 책을 미뤄두는 경우 없이 대체로 끝나면 다른 책을 시작해왔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미뤄두었다. 이 질식할 듯한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갈 힘이 지금은 부족하다. 

 

 

 

 

동물이라면 또 모르지만 식물에는 통 감정이입이 안 된다. 장미 꽃다발은 집구석에서 몇 년을 갔고 핑크색 국화 다발은 거기서 벌레가 기어나올 때까지 몰랐다. 꽃은 예쁘지만 세심하지 못한 나는 문학 속 꽃들을 일일이 확장시킬 능력이 거의 없다. 한 권의 문학 속에 활짝 핀 꽃들에 동그라미 치며 읽으면 대략 몇 송이의 꽃을 만나게 될까. 저자가 고른 서른 세 편의 문학에서 찾아낸 알록달록한 꽃들을 담은 책이다. 김유정부터 박경리, 박완서, 김훈, 이승우, 신경숙, 정이현까지 골고루 담겼다. 읽고 또 읽어도 꽃이 등장하는 문장은 늘 낯설다. 훌쩍 들판에 나갔다가 한켠에 곱게 핀 야생화 이름을 내가 알아채는 날까지 꽃을 알아가도록 노력해야지. 희고 노랗고 빨갛고 보랗다. 사진이 알록달록 참 예쁘다. 마음이 다 참해진다. 늦기 전에 곱디 고운 꽃을 꺾어 책갈피로 만들어봐야지. 적어도 오늘만은 꽃 생각으로 내 안이 환해진 느낌이다.

 

 

 

 

 

중국에서 인육 식용이나 사체강간은 그리 충격적 소재가 아니다. 내가 읽어온 몇 안 되는 중국문학은 죄다 처음에는 포기하고 싶다가 끝에 가서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같은 대륙의 다른 책을 집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독서는 망각과 기억이 점강과 점증을 반복하는 증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어느 작가의 작품이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좋을 때 비로소 긴 시간에 걸쳐 전작을 읽으려 결심한다. 비교적 최근에는 모옌과 옌롄커, 앨리스 먼로가 그랬다. 딱 두 권씩 읽어봤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는 같은 기간 비교해 모옌이 앨리스 먼로보다 두 배 가까이 덜 팔렸다는데 중국 역사와 문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이질적인지 말해주는 지표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보다 중국이 더 멀게 느껴지기는 한다.

 

앨리스 먼로보다 모옌이 월등하게 좋았다. 첫 권 첫 장에서 간파했다. 모옌은 처음부터 매몰차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나는 대개 고통 속에서 질척거리는 삶, 끝까지 가는 삶, 시대적 핍박과 굴종의 삶을 다루는 작품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에 끌린다. 읽은 작품이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의 처절함과 무거움, 일상의 소소함 중에 내가 끌리는 쪽은 기질상 전자일 수밖에 없다. 기대를 완전히 넘어서거나 배반당할 때 나는 전율한다. <물처럼 단단하게>가 붉고 뜨거웠다면 <사서>는 질펀하고 차갑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나는 이제 중국문학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굳히게 됐다. 미지의 영역에서 성큼성큼 다가온 중국문학은 아직 정체 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을 뿐더러, 오롯이 제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도 않다. 넓고 큰 나라인 만큼 문학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릴 것 같다. <열세 걸음>의 첫 열 장을 다섯 번쯤 재시도한 경험에 비추면 <사서> 역시 읽기 편한 작품은 아니다. 단번에 손아귀에 잡히지 않더라도 일단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교훈, 그러면 더 큰 감동을 얻으리라는 확신이 이제는 생겼다. 뒤죽박죽, 흐릿흐릿, 읽고나서 더 어려워졌다. 절절하고 웅숭깊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한다 해도 직접 읽는 지식인들의 강제노동수용소 묘사는 더 멀고 더 이 세상 같지가 않다. 심상찮다. 문화대혁명, 대기근의 실정은 잘 모르지만, 처연하고 서늘한 느낌만은 다음 읽을 작품에 되려 압사당할 때까지 지속될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정당하고 너그러운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예쁜 애인과 만나고 하는 사이에 틈을 내어, 말하자면 여가가 있을 때 찬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무를 떠맡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것일 터인데, 우리의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가운데 우리가 사랑하는 건 갓 죽은 사람, 마음 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뿐으로 결국 그건 우리들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들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카뮈, <전락>

 

자유를 구속당하고 시간을 빼앗긴다 해서 추억과 사랑을 멈출 수 없듯 고통과 후회와 감동과 의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나는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고, 가장 불행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책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천상의 시간을 흐르게 하고 색다른 세계를 선물받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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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5-3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여전히 많이 읽고 좋은 글 올리시고~^^
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아이리시스 2014-05-31 07:24   좋아요 0 | URL
꿈섬님, 잊을 만하면 그래도 한번씩 만나서 정말 반갑고 좋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 별일 없는 게 너무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요.
자주 보고 싶어요. 글을 핑계로라도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세상에서 제일 즐겁게.

2014-06-01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2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란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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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100억은 큰 숫자다. 돈으로 따지면 큰 금액이고, 이 돈이 이자의 명목으로 불어나기 시작하면 말아먹지 않는 한 혼자 먹고 살기에는 넉넉하다. 그런데 극소수 운 좋은 연예인은 작품 두 편을 연달아 성공시키거나 노래 두 곡을 띄우면 순식간에 100억 이상의 자산이 불어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100억의 1/10,000에 해당하는 금액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돈)과 사람의 상하관계는 미묘하다. 돈이든 힘이든 뭐가 됐든 자본가가 되려 발버둥치다 양심도 버리고 신뢰도 잃고 건강도 담보잡힌다. 초가삼간 다 태우고서야 정신 차릴 듯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100억은 큰 돈이다. 일례로, 무이자로 1년에 1억씩 저축을 하면 100억을 모으는데 100년이 걸린다. 복리계산이 기간을 단축시키긴 하겠지만 매년 1억씩 저축할 돈이 없으므로 그림의 떡일 확률이 크다. 씀씀이를 어림잡으면 1억을 저축하려면 적어도 3억 이상을 벌어야 한다. 1년에 1억을 벌면서 1억을 저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S그룹 회장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외제차 수집이 취미라 80억 짜리를 포함 차고에 열 대쯤 있다는데, 연비 좋고 행여 부딪쳐도 상대방만 박살나거나 죽는대도 날기는커녕 기어다닐 공간도 없는 이 좁은 땅덩어리 어디서 저런 차를 탄들 폼이 날지 의문스럽다. 그들은 단지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돈을 쓴다. 우리나라 호텔 최고 숙박비는 하루에 1000만원이다. 코스요리가 아무리 비싸도 한끼에 300만원 이상은 안 된다. 돈을 쓰고 싶어 환장해도 하루 먹고 자는 데 2000만원이면 해결된다. 매일 1억씩 '소비'하라는 과제는 길어야 두 달은 행복하지만 머지않아 고역이 될 게 뻔하다. 자동차도 옷도 빽도 술도 보석도 1년 이상 매일 새로 산들 그게 행복이겠는가. <반란의 도시>는 '도시' 이야긴 줄 알았는데 실은 '반란'에 방점이 찍히는 이야기였다. 왜 도시인가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의 시작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구가 밀집하고 자본이 집적되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운동(반란), 노동(혁명), 주거, 돈, 권리에 대한 얘기였다.

 

최저임금 얘기를 해보자. 최근 미국 대통령은 시급을 한화로 만원까지 올리는 법안에 싸인했다는데, 기존 시급의 거의 40%에 가까운 인상률이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우리보다는 높은 시급이었지만 복지가 탄탄한 유럽 선진국들에 비하면 턱도 없이 낮았다. 하지만 우리는 각국의 최저임금 책정이 올바른지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 단순 시급액의 절대적 비교로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저임금액은 단지 노동자들의 월급 인상에 영향을 미쳐 소득수준과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에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을 올리는 데 무척 인색한 나라다. 나도 처음에는 사람을 싸게 부리려는 기업에 동조하는 무능력한 정부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대폭' 상승시키려다 못한 건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비중과 관련이 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비중은 이미 10년 전부터 초과상태였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30% 정도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하다못해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월등하고 심지어 두 배 가까이 차이난다. 요식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 개인쇼핑몰만 봐도 최근 10년 간 폭발할듯 늘어났다. 임금상승은 곧 물가상승을 가져오고, 산업의 재벌독점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한 서민들의 소비는 오히려 위축된다. 높은 제품가격을 다시 고스란히 서민들이 감당해야 한다.

 

이 기형적인 산업구조와 복지수준, 세수(tax revenues)를 포함한 여러가지 문제들 때문에 노동시장과 수요공급의 균형을 예상하기가 매우 어렵고 까다롭다. 복지가 탄탄하면 임금액이 조금 낮아도 살만해진다. 절대적 임금액이 높아도 세를 지나치게 걷으면 설사 절대적 금액이 높더라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런 노동시장 해석은 무척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당시 임금 상승률의 폭은 지난 7년보다 높았다. 대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최저임금은 지금보다 한참 더 상승해야 한다. 나는 그냥도 아니고 초서민이니 내가 남의 사업체에 고용된 경우에는 당연히 지금보다 배로 높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고용하는 입장이라 생각하면 그 당연한 문제조차 쉽게 답이 안 나온다. 의문이 생긴다. 도시가 먼저였는지 사람이 먼저였는지, 개발이 먼저였는지 권리가 먼저였는지. 개발과 발전이 영원할 줄 알았던 이들에게 주거지 위협 사태와 생활 전반의 몰락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반란의 도시>를 통해 저자 하비는 68혁명 때 사용된 일종의 구호였던, 앙리 르페브르(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의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도시권'의 개념에 대한 확정을 시도하는 방법론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를 다각도로 분석, 해설, 탐색하는 형상이다. 또 프랑스 혁명(1789)과 파리 코뮌(1871)을 언급하며 파리를 관통한 두 번의 민중적 혁명을 짚어보고, 오늘날 도시 공간에서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약탈에 대해 비판한다. 약탈의 근거로 무분별한 개발, 공유재의 비극, 사유화 그리고 노동자, 이민자, 성소수자, 빈민자의 권리 침해를 꼽는다.

 

이후 1930년대 공황과 함께 왔던 부동산 버블과 2008년 금융위기를 언급하며 자본주의 역사를 관통해온 도시의 면면을 훑기도 한다. 세계 꿈의 무대로 꼽히는 맨해튼은 이미 가진 자의 공간을 성벽으로 분리하기 시작했고, 시장은 기계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몸통을 맡긴지 오래다. 이로부터 상당한 물리적 거리에 위치한 아프리카, 중동, 남미 대륙도 지배/피지배 시스템에 들끓는 중이다. 세계는 과열되고 있고 부르주아가 위세를 떨치는 반면 노동자들은 점점 더 도시 중앙부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난다. 자본과 결탁한 순간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종교와 예술 역시 겉모습만 다를 뿐, 문화는 또다른 하이에나들의 전쟁터가 되었고 대자본과 권력의 지배로부터 놓여날 수 없어졌다. 음악과 그림이 진열된 소모품으로 변했다. 키치적 소비는 순수한 취미를 고루하고 낡고 보잘 것 없는 개념으로 격하시킨다. 이제 시장은 모든 분야에서 특수함과 독특함, 진정성, 미적 의미보다는 지배, 핍박, 강요에 바쳐진다. 하비는 역사가 말해온 것처럼 개인이 '도시권'을 되찾기 위해 광장과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을 구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권위가 무의미하듯, 점령 당한 민중의 터전을 잃은 민중은 더이상 민중이 아니다. 민중 대 월스트리트당의 투쟁은 지구적 차원의 투쟁이자 지역적 차원의 투쟁이며, 독재 정권 척결도, 평등 교육제도 실현도, 파업 노동자들의 권리 수호도 잃어버린 광장의 탈환와 민중의 결집, 시스템의 전반적 재구축, 투쟁과 반란 등으로 이뤄내야 한다. 도시를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에게 건강하고 공정한 도시를 지키는 일은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숙명이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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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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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겨울 그애의 입술 감촉, 비오는 토요일 오후의 도서관, 텅빈 휴가지에서의 우리 넷, 커다란 고무통에 들어가 샤워하던 포항 민박집에서의 이틀, 국제시장통 작고 허름한 식당의 김치찌개맛, 스물두살 여름 주민센터에서의 둘도셋도 맛난 점심식사, 아지트처럼 모여들던 극장과 카페,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 한여름의 휴게소 번개나들이, 한겨울밤의 공원, 검고 질펀한 모래사장, 소금기 절은 비릿한 바다내음, 가장 어린 날에 가장 높은 곳을 훔쳤던 해운대 스카이라운지 야경, 동네 쉼터 어둠속에서 나눴던 미래, 독서의 처음, 창작의 첫문장, 바다가 보이는 모텔, 처음의 수치, 엄마의 눈물과 아빠의 한숨,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이 깨지는 걸 눈앞에서 보던 날, 비맞고 교문을 넘던 노을진 저녁과 물에 젖은 생쥐꼴을 한 우리, 그애와 이어폰 나눠끼고 듣던 곡, 밤 늦은 공부, 너무 빠르고 너무 늦은 울음, 기약없는 이별과 기다림, 서글픈 바닥을 확인하는 시간, 보잘것없는 날 향한 누군가의 질투, 시기, 외면, 잊히지 않는 표정과 몸짓과 외양과 행위 그리고 말.말.말. 기억.기억.기억. 당신이 뭐라든 유일한 나만의 것. 덧그림과 채색과 마무리. 삶은 기계적이고 프로그램적이고 규격화, 일률화된 규칙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진짜다.

 

<투명사회>에 의하면, 내가 본 투명사회는 상상과 확장, 예측불가능의 개념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다. 거리(distance), 아우라, 비밀, 어둠, 눈속임, 전략, 비유, 파손, 구석, 차이, 내재성, 상징, 초월, 굴곡, 빈틈, 불투명, 즉흥성, 우발, 자유, 자연발생적, 깊이, 베일, 가림, 굽은 것, 우회적인 것, 중간지대, 불명확, 은둔, 균열 등 총체적으로 뭔가 정의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사라진 영역이다. 그러므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진과 그림은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요구되고 아름다움은 본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과다와 과잉은 지양되어야 한다. 관계는 투명하게 내보이는 게 아니라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공평, 온당, 적절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더 오래 더 유익하게 유지될 수 있다. 즉, 투명의 지향점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 즉 무엇도 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예전에 노무현 전대통령이 지금 당장은 역사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결국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투명사회의 대항마는 가시적 과정이 가속화되는 속전속결의 프로세서가 아니라 고유한 시간, 리듬, 박자를 가진 상태에서 때로는 뒤로, 때로는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또 부정적인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결국 이 네거티브한 것들이 시너지를 일으켜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적이지 않은 사회다.

 

우리는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삶이란 투입과 산출을 순환반복하는 기계적 서사에서 움직이는 결말 정해진 책이 아니라 중단, 종결, 상실, 심지어 결핍과 무(空)의 상태에 도달하는 한이 있어도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창의의 영역에 존재해야 한다. 관광자의 삶과 여행자의 삶이 다르듯, 경계와 문턱 없는 도전이 무의미하듯, 매끈하고 평탄한 인생이 재미없듯. 동경과 희망과 기대는 무조건 긍정적인 것의 증식과 대량화가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와 너희가 뒤죽박죽으로 꽉 차 있는 창고와 같은, 정돈되지 않은, 파란만장한 역사야말로 제대로된 매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투명성은 입때껏 말한 수많은 개념들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예상가능한 것, 박자도, 리듬도, 향기도, 아름다움도, 시간의 층과 침전물, 시간의 서사성과 비유의 매력이 사라진 현상, 내면의 심리나 주관성이 아닌 객관적 감정의 표출, 전시, 판매, 재현의 무대. 그래서 필름에 가둬진 시공간을 반복, 전시하는 영화와 즉흥성, 미묘한 차이, 느낌과 욕구에 치중하는 연극의 차이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p.74)

 

눈은 책 속 활자를 좇고, 귀는 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고 내가 문장과 이미지와 소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 당신이 읽은 책을 오늘 내가 읽고, 내일 내가 읽을 책은 모레 당신이 읽는다. 우리는 다른 시공간에서 각기 다른 우주의 길을 걷는다. 책에 대한 느낌도, 감상도, 지식도 모두 다르다. 우리는 일부러 그 감상을 일치시키지도 고치지도 않는다. 우리의 거리도, 감상도, 시간도, 공간도 아무것도 투명하지 않다. 내가 당신을 알 수 있고 당신도 그러하되, 서로 포개지지 않는 것.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지 말고 빛의 방향성, 서사와 인식의 세계, 존재의 저편(초월), 유혹과 변신, 환상과 가상, 기호와 시인이 존재하는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과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공간은 이 주소 블로그 한곳이었지만 매번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을 통과한 채로. 주로 내가 흔적을 남기면 당신이 그 흔적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식이다. 우리 언제 한번이라도 오롯이 함께한 적이 있었을까. '통제사회' 챕터는 버릴 데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지금, 바로, 여기, 서로가 자유롭고 소통하고 자가발전하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적인 동시에 불가능한 미래인지. 당신이 어디 있을까, 무얼 하고 있을까를 상상하는 시간으로 행복해지는 밤.

 

벤덤과 푸코가 말한 구시대의 '판옵티콘'이 벽과 철창으로 분리된 감옥 안에 든 피감시자를 감시자가 일방적으로 지켜보는 개념이었다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현시대의 '디지털 판옵티콘'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공론장에 나와 노출증과 관음증을 동시상영하는 개념으로, 모두가 감시자인 동시에 피감시자가 되는 사회다. 후자는 실질적으로 '좋아요'만 존재하는 공간이며(페이스북의 경우), 자타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자발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행위는 결국 강요와 같다. 마치 경쟁하듯 아이 똥기저귀 사진까지 찍어 올리던, 가사와 육아의 뿌듯함과 고충을 낱낱이 고해바치던 맘들은 생산한 정보가 타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범죄와 협박의 시초가 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친구수, 시간 등 현재와 최초에 목매고 숫자에 안도하는 모습은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그사람이 공개하기로 하는 한, 우리는 얼굴 모르는 사람의 주말 스케쥴과 사생활을 줄줄 꿸 수 있다. 때때로 부분의 합체는 전체의 아류가 되기도 하는 법. 부재하는 사유에 대한 무통無痛은 가시적 소통의 증가를 관계의 깊어짐으로 오해하게 한다. 가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 친구를 통해 듣는 단면적 생활이 마치 내가 지구를 누비는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에 시달리게 한다. 때로는 유명인(셀러브리티)들의 삶을 제것으로 여기며 일주일 동안 빽빽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 티브이 속 가상연애, 가상결혼, 가상동거, 가상육아, 가상여행을 통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남의 것으로 보낸다.

 

적어도 허락된 최대한에서 절반 정도는 오로지 내 오감과 관심과 욕망으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궁금한 마음을 보채지 않고 훔쳐본 걸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고 내보이면서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 이 말이 저 말로 들리게 하지 않고 섞되 섞이지 않고 얼되 쉽게 녹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저 이치에 맞으면 흘러가기도 하고 아니면 멈추기도 하는 만만한 정거장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 공간에도 예전만큼 의미는 두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의미는 더 커진 셈이다. 잊힐 시간이 필요하다. 색다른 색채와 선율을 발견하고 경악과 충동이 미안하지 않을 때까지. 새 페이지에 당신의 이름을 쓰고 함께 하지 않아도 언제나 내편이란 걸 깨달을 때까지. 그리하여 당신이 그립지 않을 때까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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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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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0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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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0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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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0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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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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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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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6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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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7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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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심 아홉 시 뉴스를 사랑한다. 어쩔 땐 뉴스 보며 욕하는 게 나한테 딱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인가 싶을 정도로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이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은 또렷해졌다. 며칠 전 저녁 뉴스에서 중국이 공개한 일제시대 일본군이 작성한 위안부 공금 구매 기록문서를 보았다. 처음에는 싸울거면 저네끼리 싸우지 왜 우리나라 위안부를 들먹이나 했는데 나중에 난징대학살(1937-1938) 때도 같은 일이 많아서 함께 공개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쨌든 일본의 불리한 역사에 대한 안하무인격 부인은 우리 뿐만 아니라 중국한테도 분통터지는 일이다. 새로이 출간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는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중국계 미국인인 이민 2세 아이리스 장은 직접 겪진 않았지만 민족의 상흔으로 남은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조부로부터 전해 듣고 왜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끈질긴 자료 조사 끝에 이 책을 펴냈다. 그녀는 당시 일본군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히틀러, 무솔리니, 크메르 루주(폴 포트)의 그것보다 훨씬 더 흉악하고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건이라고 한다.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하지만 그 성공은 내내 그녀를 위협과 협박 속에서 살게 한다. 마침내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자살한 채로 발견될 때까지. 진실을 알리는 대가치고는 너무 무섭고 소름 끼친다. 진실은 그런 거다. 그래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세상 어디에도 쉽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는 진실은 없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폭격기가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은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독일 공군 루프트바레와 기갑 사단인 판처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인들은 이보다 좀 더 빠른 1935년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군대를 앞세운 일본이 만주 점령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 193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라쇼몽> 같다.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진실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시아 내집단이라 여기면 마지막 두 줄을 역사로 배우겠지만 만약 이 사건 바깥에 존재하는 외집단이라 여길 경우 균형 있는 시각을 위해선 다섯 줄의 역사를 모두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만큼 누군가의 어떤 입장이 되어보기가 어렵단 뜻이다. 역사에 A라는 사건이 존재한다 치면, B는 A를, C는 A,B를, D는 A,B,C를, E는 A,B,C,D를... 이렇게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은 정보의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선택한다. 이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아니면 그저 다행일까. 우린 점점 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아야 할까. 우리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시간을 되돌리고픈 이 순간도 언젠가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한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덧없는지.

 

 

 

아이리스 장의 이 저서는 2005년 옌거링의 <진링의 13소녀>로 이어진다. 진링은 난징의 옛지명이다. 장예모 감독은 이 판권을 사들여 동명의 영화를 만든다.

 

 

 

 

더 알아야 할 것은 난징대학살 혹은 식민지였던 한국에 저지른 일본인 혹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세세한 진실이지만 관심만 가지면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들을 쓰느라 백지를 남용하기는 싫어졌다.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마치 타국의 동의를 구하듯 오바마 대통령에게 일본군 위안부 만행에 대한 생각을 물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치 나 쟤한테 맞았으니 더 힘센 네가 쟤한테 한 마디 해줘, 라는 것 같았다. 물론 제법 강경한 의견을 피력한 오바마의 태도가 의외이긴 했지만 그곳이 청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고, 그걸 대서특필하여 오바마 한 마디에 일본이 '쫄았다'는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은 웃긴다. 어쨌거나 우리 일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게 보기 좋다.

 

 

 

 

 

 

 

<도시와 나>에 실린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는 세비야를 무대로 한다. 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좋아해서 피렌체 두오모를 오르고 헤어진 연인을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미래를 상상하고 부르넬레스키를 좋아하지만, 스페인이 그런 것처럼 가우디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스무살 건축학도였던 단짝친구가 빌려준 책에서 가우디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여행소설 외국편 <도시와 나>를 읽은 게 지난해 연말, [꽃보다 할배]-스페인 편이 세비야로 떠난 걸 방영한 건 올해 3월 말인가 4월 초. 나는 지난 연말에도 모르고 있던 콜럼버스의 삶과 세비야에 눈길이 멈췄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세비야 대성당의 보물이라는 '콜럼버스의 묘'와 후원자와 반대자, 응원과 무관심,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영광과 몰락이 가져다준 거대한 역사. 그걸 떠받친 여행의 힘이 조금 경이롭게 느껴진다.

 

여행의 부수단어가 설렘이라고만 생각했다. 갑자기 시작될 수도 있고, 큰맘 먹고 오랜만에 찾아가는 길도 있고, 누군가의 부고를 받고 떠나는 사연도 있다는 걸 잊지만 않으면 여행은 대체로 들뜬 상태에서 시작되고 또 끝난다.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버리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두 소설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해당 도시만의 매력을 듬뿍 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일탈과 방랑은 적어도 누군가를 위로한다. 아닌 줄 알면서도 여전히 이곳만 아니면 행복하리란 생각에 잠못 이루는 날이 있고, 떠나고 싶어 안달하는 날이 있으면 머물 곳이 있어 다행이다 싶은 날도 있다. 하물며 떠난다는 계획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날이 있다. 여행이 주는 확신은 떠났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돌아와 만나게 되는 내가 이전의 나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리란 확신. 그게 전부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도 읽는 사람이 얼만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배경지식과 가치관이 달라지면 몰입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멜로와 스릴러의 궁합이 절묘하지만 역시 서스펜스가 고도에 다다를 때 이 소설은 가장 빛난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솔직담백하게 써내려간다는 느낌을 주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순간 장악력, 드라마같은 장르적 스토리, 스토리텔러가 되어 정주행하는 작가의 용기와 고집이 보인다. 영국 아마존에서 개인출판으로 성공한 좋은 예. 신인작가에게 기존작가와 겨룰 수 있는 게이트웨이가 넓어졌단 건 기득권이 줄고 기회가 공평해졌다는 점에서 올바른 일인데, 전자책 루트가 종이책 시장을 위협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한편 아찔하고 공허해진다. 세상에 진정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긴 한 걸까. 어느 한 구석 숨쉴 공간 없는 촘촘한 구성을 보면서 케이트와 잭, 폴의 행보가 계속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잘 짜인 구성과 플롯만으로도 충분히 자리를 지킬 만하다. 바이러스, 재난, 모성, 집착, 광기, 첫사랑, 기억과 같은 장르문학 특유의 소재를 잘 버무린다. 중반을 훌쩍 넘어설 때까지도 계속 누굴 믿고 누굴 의심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내달린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데도 팔다리가 뻐근하고 어깨가 뭉친다.

 

 

 

<파계재판>이 놀라운 건 첫장 빼고는 모조리 재판으로만 진행하는 특이한 구성 때문이지 사건의 어마어마한 창작력이나 짜릿한 반전의 쾌감 때문은 아니다. 처음에 일본 고전소설 <파계>를 선뜻 떠올리지 못한 건 그 파계가 그 파계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읽고나니 <파계>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단숨에 <파계>를 연달아 읽었다. 우리도 조선시대 백정(소나 개, 돼지 따위를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屠漢이라는 호칭을 써넣어 차별한 기억이 있고, <파계>에 의하면 일본도 메이지 유신으로 이미 신분제를 철폐했음에도 불구, 여전히 부락민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차별과 편견이 있었다. <파계재판>은 이 상처가 한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주는 문학적 상상의 끝에 서있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이성을 잃게 되는지, 편견이 만연한 사회가 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죄인으로 몰아가는지,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과 금기를 깨트리려는 노력은 때때로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 재판은 한 남자의 절절함을 끝까지 믿었던 위대한 변호사의 승리이자, 실체는 없어도 언제나 응원 받는 진실의 승리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끼고 좋아한다. 인류가 그런 것처럼 천 년의 시간 동안 인간 곁에 머무른 물고기 대구의 일대기를 다양한 시각과 각도에서 서술하는데, 그 대부분의 역사가 미국, 유럽 등 서구에 머물러 있어 괴리감이 느껴지긴 한다. 동생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생선 한 가지만 쓰라는 시험 답안지에 '고기'라고 쓴 적이 있고, 내 기억은 갈치와 고등어를 필두로 가자미, 오징어 외에는 거의 모든 생선을 분간하지 못한다. 물고기는 생선이고, 생선은 먹는 것. 가끔 찌개도 회도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 이해 못하는 이 책 속 대구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대구 서식지, 생김새, 탄생비화, 좋아하는 먹이, 온도, 요리법. 자연은 위대하다. 쉽게 많이 얻으려는 탐욕이 대구라는 어종을 지구상에서 없앨 뻔 했다. 남획이 대구를 멸종시킬 수도 있었다. 대구는 이러한 비극과 불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긴긴 세월, 인간의 어획력은 물론 무역의 판도와 역사를 바꾸거나 새로 쓴 위대한 물고기다. 

 

 

 

 

있어서는 안되는 장면을 버리고 없어서는 안되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스케치부터 세심한 손질까지 구석구석 손보다가 비로소 색을 입히고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다시 읽을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전율한 장면이 실제로도 가능할 거라고, 배 안의 아무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또 믿으려 했다. 두꺼운 레깅스 위에 야상점퍼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세숫물은 차갑고 눈물은 뜨겁고 외침은 공허하고 기다림은 미온하다. 벌써 지치면 안된다. 아직 덜 슬퍼했다. 언젠가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빅토리아 메러디스호'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의로 떠났지만 타의로 돌아오지 못한 모르는 얼굴들을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문학의 기적을 현실의 이기주의가 덮어버릴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데려갈 높고 푸른 사다리 하나쯤 있으리라 믿고 싶었던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지상같지 않은 지상에 머물러 있다.  

 

 

 

하늘의 기를 받아 현실에서 말하는 자들. 소리꾼과 무인은 아주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소리'꾼', 무'인'이라 발음할 때의 야무진 입모양과 피를 토해야만 살 수 있는 고독의 내음까지도. 불꽃같은 삶이 예상되었다. 시대가 고요해도 내면이 들끓으면 지옥과 다름 없는데 이 잔혹한 시대를 맨정신으로 건너는 이들의 삶이 다 그렇지 않던가. 한밤의 갈대숲에서 다리를 벌려 거친 사내의 숨소리를 받아들인 여인은 그날 밤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수께끼 같은 밤 버려진 여자에게로 흘러든 달의 정령으로 잉태된 아들은 어느새 매일 아침 어린 아내가 바치는 신선한 소의 피를 받아마실 정도로 쇠한 사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읽을 때 알아야 할 것은 쇠한 사내인가, 쇠한 사내를 만든 지독한 세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한구석도 보드라운 구석이 없는 세상의 단단함에 다칠 걸 알면서도 줄곧 들이박는 심정으로 걸어가는 자들인가. 이 소설은 국창 임방울(1904-1961)의 일대기를 그린다. 이 연약한 사랑의 기억을 무르익은 소리로 다시 만난다. 

 

 

 

"약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사막 가장자리, 바스토(미국 캘리포니아 중남부의 도시 이름)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로 시작하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감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말하고 싶다. 그 순간 나를 견디게 했었다고. 겁이 많으면서도 환각과 일탈의 순간을 동경했다. 국세청에는 체납자들을 독촉하는 업무를 맡는 직원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지만 남에게 소리 지르는 걸로 스트레스 푸는 사람에게는 딱 맞는 보직이다. 우리는 아무도 누구를 재단할 수 없다. 나는 가장 힘들 때 정작 제일 무겁게 입을 다무는 사람이지만, 남의 불안을 잘 다독이는 편이고, 사항이 중대할수록 오히려 더 대담해진다. 낙관적인 천성과 예민한 본성이 서로를 완벽히 통제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포트노이의 불평이 짜증난다는 리뷰를 많이 보았다. 미국은 여전히 술과 약, 섹스에 탐닉한다. 환상과 비행으로 불안을 표출하는 소년과 닮은 주인공들이 미국 소설에는 많이 나온다. 조니 뎁과 베니치오 델 토로의 연기 궁합에 전율하던 시절, 정신착란이 최고도에 달한 상태에서 라스베가스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했던 철없던 욕망이 기억난다.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지혜(남상미)와 현우(이상우)는 휴가차 제주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 때문에 인연을 맺는데, 그 책은 지난해 한참 드라마 마케팅을 하던 그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에 타자마자 책을 껴안고 잠든 지혜는 제주에 떨어질 때까지 현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잠들었을 때 떨어진 책을 줍다 우연히 페이지 가득한 지혜의 메모를 읽으며 키득거리던 현우가 지혜를 알 뿐이다. 건축가였던 현우는 라디오 메인작가 지혜가 쓴 감성 충만한 메모에 반했고, 지혜가 제주에서 또 책을 흘리는데 그걸 현우가 주우면서 여행길 하루를 함께 하게 되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역사가 이루어진다. 둘 다 즉흥적인 기분파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에서 사랑의 끌림은 역시, 이상하다.

 

 

이중섭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 그때 내게 더 끌렸기 때문에 그 책 대신 이 책을 선택했는데 구성이 특이하다. 여느 일대기처럼 시간순 서술이 아니고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일본 유학시절의 어려움과 고독,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킨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화가의 남은 가족들이 화가의 기념관 행사에 초대되고 참석한 장면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가장 암울하고 불안했던 시대로 돌아간다.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일상과 사랑을 극화시킨다. 가난과 우울로 가득찬 화가의 길은 전시라는 시대상과 맞물려 피난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일본, 부산, 제주를 오가며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그리움에 떨었던 한 화가의 삶은 고스란히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봄이 더이상 봄같지 않게 지나가고, 예전처럼 간절하지 않아도 5월이 온다. 오래 글이 없어 서운했고, 겨우 이만큼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페이퍼 제목은 권정일의 시, '마녀의 도서관'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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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04-3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에는 뉴스를 못 보겠더라구요. 가슴이 아파서.
한마디 더 듣고나면 팔을 못 들어올릴 거 같아서요.

...지금 한지 인강 듣고 있는데 한지 너무 어려워요 ㅠㅠ
수능치는 사람들이 한지를 제일 많이 선택한다는데 나는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 이게 뭐야 진짜!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

아이리시스 2014-04-30 23:47   좋아요 0 | URL
귀염이 소이진님 잘 지내고 있죠? 아프지 말고. 어제는 비오고 오늘은 추워요. 반팔 입었다가 다시 긴팔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는중인데.. 다시 조금씩 힘내고 책 한 권씩 읽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최근에 읽은 책이 아니라서 아직도 책이 재미있을 정도로 눈에 안 들어와요.

한지=한국지리 맞죠? 뭔가 모르게 엄청 어려운 과목이었어요. 심지어 그런 과목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그게 제일 공부하기 쉬우니까 그런 거겠죠? 근데 이게 사회탐구 선택과목이에요? 우리때는 사회문화를 제일 많이 했었는데 나는 문과가 아니었으니까...................( '')

방금 검색 한번 해봤는데(나는 쓸데없이 이런거 잘해....) 이거 해요, 동아시아사.대박.

소리 질러요. 내가 들을 수 있어요. 소이진님 화이팅!!

2014-05-02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2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허먼 멜빌, <모비 딕>)

 

이 좋은 봄날! 세 권의 책을 읽느라 지난 주말을 몽땅 허비했다. 먹는거야 배만 채워도 좋다 싶을 때가 일 년에 반이지만 책은 그럴 수 없다. 주어진 삶도 시간도 너무 짧고 불행히도 나는 오지랖이 넓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게 아닌 한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미뤄둔 드라마를 채울 시간은 날아갔고 어쩌다보니 계속 보는 [아빠 어디가]에서 안정환 vs 송종국 라이벌 매치만 제대로 보았다. 나는 축구보다 여행이 더 좋은데, 지난 주에 이어 여행을 안 갔다. 시청률 안 나온다고 기획의도를 바꾸시면 안됩니다, 소리쳤다.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국가 전반의 구조를 공부하고, 방랑자 이슈메일이 되어 신비로 뒤덮인 바다를 탐험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비극을 겪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런 주말도 있고 이런 주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주말도 의미있고 이런 주말도 의미있다. 비로소 <아프리카 방랑>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모비 딕>의 끝페이지와 조우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징조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자식 세대에는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확신의 기준이었고,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보르헤스는 '모든 지식은 기억에 불과하다'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관심사에 해당하는 많은 내용을 책으로 배우지만 정작 지식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서가 단순히 재미나 흥미 이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냐 물으면 내 대답은 '예스'다. 그걸 바라고 원한다. 이건 이십대 초반에 의견정리 끝냈으니 이젠 독서가 즐거움 이상의 것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맞다,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도 각자 다른 것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서 리뷰의 필요성이 나온다. 하지만 많은 리뷰가 다른 단어를 쓰는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리뷰는 반드시 필요한가. 반복적인 패턴, 자기복제는 나와 상대 중 누구의 시간을 더 뺏는 일일까.

 

아무것도 못 얻었는데 얻은 척 무얼 쓸 필요가 있을까. 나쁜 책을 나쁘다고 쓰는 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경험상 내게는 별로 그렇지 않다.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기는 누워서 떡 먹는 것만큼 쉽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럴 만한 책이 아닌데도 유난히 별점이 후하다면 그건 내가 선택한 책에 대한 실패와 오용한 시간사용을 무마하기 위해 나온 무의식적 처량함이지, 소위 공짜로 받은 책에 대해 주례사 비평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별점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같은 책을 동시에 읽으면서 각자 얻어가는 지식이 다르다는 데 쿨할 자신이 없다. 책이 공짜로 내것이 되는 것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공공도서관이 들어서기를 나는 더 바란다. 시간을 들여 내가 무언가를 했다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알파가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솔직한 것이다. 변하기 싫은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책이기를. 책이 지식이라면 지식이 기억이 아닐 리 없고, 그 반대라고 해도 여전히 지식은 기억이다. 몇 번째 서랍을 열어 말을 꺼내볼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아프리카 방랑>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을, 그전에는 <노예 12년>을, 그전에는 까먹었지만 기어이 찾아내 적어보는 <모사드>, 그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딸 1>, 그전에는 <북극여행자>, 그전에는.. 다섯 권을 연달아 떠올린 건 순서별 기억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랍, 종교분쟁, 인종차별, 노예, 흑인, 이집트 같은 키워드 때문이다.

 

중간중간 <친구 사이>, <침묵의 거리에서>, <길귀신의 노래>, <픽션들>, <눈먼 암살자>, <런어웨이>, <내 아내에 대하여>, <당신이 그만두라고 조를 때까지>, <열세 번째 배심원>, <파계 재판> 등 언뜻 떠올려도 여러 권의 문학을 읽었고, 이전으로 올라가면 서재의 글이 뜸해진 올해 시작점, <디어 라이프>와 <유빅>의 리뷰를 쓸 즈음부터는 <진저맨>, <검은 모래>, <여인의 초상>,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사형집행인의 딸>, <밤의 새가 말하다>, <도시와 나>, <중세의 가을>, <둔황>, <종착역 살인사건>, <블레이베르크 프로젝트>, <파리인간>, <에라스뮈스>, <니체 자서전> 등을 읽었다. 너무나 사소해서 생략되는 몇몇 에세이도 더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을 다시 읽겠다는 다짐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다시 새로운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토요일>, <초조한 마음>, <비행공포>,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불안한 남자>,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포트노이의 불평>, <지도와 영토>, <소리와 분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나무 위의 남작>, <어제의 세계>, <고양이 테이블>은 읽기 시작했거나 읽다만 상태에 있다.

 

 

 

 

 

 

 

 

 

 

 

 

 

 

 

 

불행의 첫 번째 주인공이 아닌 한, 때로는 그 첫 번째 주인공에게조차도, 자신을 찾아온 슬픔이나 절망보다 더 강한 건 현실이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 얘기다. 1달러로 하루를 살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남편이 불치병에 걸린 아내로 인해 오랜 꿈을 접지만, 안다, 누군가 꿈을 포기한다고 아내가 낫지는 않는다는 걸. 비용과 슬픔과 무기력을 태운 가정이 난파당한 배처럼 휘청대자 남편이 결단 내리는 부분에서,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곳에 대해 설명하다가 폴 서루의 <아프리카 방랑>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기억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찾아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읽고, 우리나라 사람이 쓴 아프리카를 읽었으니 외국인이 쓴 아프리카도 읽어야 한다면서 <아프리카 방랑>을 구입했었다. 폴 서루가 세계적인 여행작가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력은 몰랐다. 아프리카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는 땅이 아닌 지 오래된 데다, 우리 삶의 반열로 끌어당기기에는 너무나도 멀다.

 

폴 서루는 30년 전 평화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는 서구열강의 오랜 식민주의로 비문명적이고 질서가 없긴 했지만, 지금처럼 전쟁의 땅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훨씬 더 평온하고 따뜻했다고 회상한다. 열띤 청춘 시절을 잊지 못해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간 건 2000년대 초반, 이 책의 번역출간은 2011년, 오늘은 2014년 춘삼월. 시간이 흘러도 아프리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정적으로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머무르는 동안 남쪽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아프리카의 위험을 경고했다. 여행 떠나오기 전 만난 지인들은 거의 마지막 인사하듯 했다. 30년 전 폴 서루가 가르친 십대 소년은 어느덧 사십대가, 대여섯살에 불과하던 꼬마는 훌쩍 키가 자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청년이 되어 있다. 시간이 그들을 외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아프리카의 비극은 더 심화되었다.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인종, 종교와도 싸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랭보가 이곳에서 그처럼 행복하게 지냈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랭보가 아프리카를 좋아한 이유는, 아프리카가 유럽과 달랐고 서구 세계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이유에서 아프리카가 좋았다. 아프리카는 때로는 반항적이고 때로는 나태한 땅이었다. 아프리카는 내 고향과 완전히 달랐다.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은 암흑성에 있는 것과 같았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아프리카 방랑>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널리고 널린, 흔하디 흔한 일회용의 여행기록이 아니다. 사실적이고 우아한 문체, 사람과 풍경의 생생한 묘사, 이성과 감성을 절묘히 오가는 온도는 아프리카를 아꼈고 아끼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풍경에 집착하거나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생각과 의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치며 어젯밤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오른 장면은 한줄기 빛이었다. 빙하기가 시작되며 필연적으로 찾아온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과정은 역사학적 보편성을 띤다. 인간이 머리를 쓰고 도구라는 걸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당연히 그에 따른 부수적 가치들이 동반성장한다. 아프리카도 그래야 옳았다.

 

아프리카에는 장수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누구도 나이 많은 걸 자랑하지 않았다. 누구도 오래 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나이는 시간을 측정하는 우연한 방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서는 중대한 일을 성취하거나 가치 있는 일을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서구 세계의 두 세대가 아프리카에서는 세 세대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은 일찍 결혼해서 일찍 자식을 낳고 일찍 죽는 삶으로 요약된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폴 서루가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감회에 젖은 채 하얗게 센 머리로 되돌아가는 건 발전의 싹을 어떻게 틔웠는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본 아프리카는 도리어 예전에는 없던 국제 원조와 간섭에 신음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부자 나라의 원조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국가의 가난을 유지하려 하고, 그러려면 무지한 국민이 교육을 받아 똑똑해져서는 안된다. 아프리카의 절망과 신음 그리고 눈물은 그것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폴 서루는 누구보다 강력하게 예전과 지금의 차이를 느낀다. 정작 제대로 된 길이 놓이지 않은 아프리카는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온갖 이해관계가 먹이사슬처럼 얽힌 이곳에서 지구의 반전이 시작되어야 한다. 인종과 노예 문제, 식량 전쟁, 기후와 환경 전쟁, 사회 제반시설의 부족이라는 단어가 아까울 정도의 결핍, 종교적 충돌과 끊임없는 내전과 전쟁까지, 세계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토록 외로워 슬픈 아프리카, 폴 서루는 오히려 무덤덤한데 나는 이 대륙의 모든 가능성들이 아쉽고 아프고 안타깝다.

 

 

 

 

 

 

 

 

 

 

 

 

 

 

 

 

맹세컨대, 이런 생각 해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버나드 쇼는 행여 이런 생각을 했더라도 표면에 드러나는 이상의 뜻에서 한 말이지만, 그건 그가 불우한 어린시절을 딛고 끝내 성공했다고 여겨지니 그럴 뿐이다. 열두 살에 사업실패로 광기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자살한 일은 버나드 쇼에게 자신에게도 숨겨져 있을지 모를 광기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내가 대부분의 작가가 (큰)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이상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만을 작가의 범주에 넣고 꿈을 꾸었다. 어떤 식으로도 구체화되지 못한 꿈이었고, 반드시 작가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슈퍼마켓 주인이 갖다놓은 물건을 일 년이 지나도록 사는 사람이 없는 것과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그럭저럭 원고료를 받고 사는 이가 다를 게 없다. 물론 많은 의미에서 다르지만.

 

사실 내 경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걱정된다. 나는 섬에 고립되더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작가들은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잘 모이지를 않는다. 글만 보면 작가들이 모든 덕목의 표본 같지만, 그들은 상습적인 무정부주의자이며, 논쟁을 좋아하고, 감상적이고, 잘 흥분하고, 누군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말하면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을 통해 활동하는 작가들은 그나마 사회성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홀로 앉아서 세상만사를 머리로만 해결하려 들고 작품에 딴죽 거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탁월한 유머 감각이 없으면 정치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소설가들을 외계인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면 개인주의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진다. 심지어 군인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금전적인 이해를 신경스는 사람이면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지도 않는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경제는 재미있고 정치는 복잡하다. 나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세상은 한 세대 전이지만 우리는 같은 바탕에서 성장한 세상에서 살았고 또 살아간다. 버나드 쇼는 서른 개가 넘는 챕터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수많은 얘기는 핵심으로 다룰 수 있는 단편적 의견이 아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의 지도로 보면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시점은 너무나 작아서 점 하나로도 표현이 안된다고 했다. 일생에서 처음과 끝은 굉장히 길지만 정작 우리는 다 합쳐서 하나의 점도 안된다.

 

우리의 외무부장관 파머스턴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떤 나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고 싶으면 그 나라에 30년 동안 살면서 그 나라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어떤 일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다. (중략) 세상일의 상당 부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할 수는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있기 마련이다. 그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는 것이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중략)

확실히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러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반면 사상가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우리의 어제, 오늘, 내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삶은 결국 정치다. 버나드 쇼가 들려준 것처럼 한사람 한사람에게로 와서 어떤 삶이 되는, 그런 삶.

 

 

 

 

 

 

 

 

 

 

 

 

 

 

 

 

<모비 딕>은 과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고래 보고서! 이 유쾌한 고역, 혼돈, 경악은 시종일관 영혼을 빼놓는다. 멜빌이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 순간조차도 좋다. 영혼이다가 사물이다가, 어제였다가 오늘이다가, 일상이다가 일탈이다가 한다. 끝인가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시작한다. 죄없는 고래는 이유없이 불려나와 모질게 당한다. 인간에게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것을 내어주고 또 빼앗아 간다. 거대한 몸집을 처절하게 뒤집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뿜어내고 죽는, 피흘리는 고래는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북극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낯선 그린란드 어느 외딴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북극곰과 배타고 나가 기다림과 씨름하다 기어이 마주치게 되는, 한시점의 향유고래. 향유고래의 배가 갈리고 내장이 터져나오고 바닥이 피로 흥건해지자 비로소 탐욕을 접는 인간. 자연과 인간의 거대한 싸움에서 나는 경악과 몽환을 동시에 경험했다.

 

처음에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여관은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소설의 계보에서 <모비 딕>은 분명 탐험소설에 속하지만 읽기 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철학적이고 탐구적이다. 바다 앞의 인간, 인간 앞의 바다, 그리고 고래. 크게 잡아도 세 가지로 요약되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빠르지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바다든 갑판 위든 고래든, 열 길 물 속이든 한 길 사람 속이든 아무것도 모른다. 바다는 아무것도, 첫날밤 새색시처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 고래는 대체, 무슨 연유로 끌려나와 쓰러져 피토하고 아낌없이 다 내주고 돌아가는가. 어디로.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거나 모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종교가 정말로 광신적이 되어 그 사람에게 명백한 고통이 되면, 그리하다 결국 우리의 이 지구를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개인을 구석으로 데려가서 문제점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 <모비 딕>)

 

탐험이나 모험에서 볼 수 있는 속도감보다는 사색적이거나 철학적인 여백의 공간이 더 넓다. 단순히 고래잡는 얘긴 줄 알고 덤볐다가 내 주말이 사색으로 가득 찼다. <암흑의 핵심><어둠의 심연>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맞닿는다. 문체는 반짝이고, 시도는 새롭고, 스며드는 시선은 따스하다. 고래의 계보와 특성은 부수적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바다와 기약할 수 없는 긴 항해, 죽음을 무릅쓴 40년 간의 필사적인 사투에서 미지의 공간을 찾을 수 있다. 필요한 건 예비 보트, 예비 돛대용 목재, 예비 밧줄과 작살, 쇠고기와 빵, 물, 연료, 쇠테와 통널 등의 항해 도중 잠깐씩 정박하는 항구에서는 구하지 못할 귀한 물건들이고, 이 미지에 참여한 이들은 기이한 식인종 퀴퀘그, 이슈메일, 빌대드 선장, 펠레그 선장, 에이해브 선장, 채리티 아줌마, 일등항해사 스타벅, 스틸킬트, 래드니, 그들은 바다 위에서 차례로 죽어나간다. 그게 운명이라는 듯, 만약을 영원히 반복하는 벌이 주어졌다.

 

군함의 닻을 계류용 밧줄을 매는 기둥으로 삼고 작살 다발을 박차로 삼아 저 고래에 올라타고 가장 높은 하늘로 뛰어 올라가서, 무수한 천막이 늘어선 가상의 하늘이 정말로 내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진을 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먼 멜빌, <모비 딕>)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바다를 만나고 포경선은 포경선을, 인간은 하늘과 만난다. 멜빌과 <모비 딕>에 쏟아지는 공식적 찬사가 아니라도, 19세기 상상력은 확실히 지금보다 멀고 높고 뜨거웠다. 싸움이 고독한 이유는, 망망대해 배 위에서 후퇴할 공간이 한평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힘과 힘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이야기이기에 성스러운 경지에 있다. 증오는 복수가 되고, 복수는 위험을 무릅쓴다. 에이헤브 선장이 자신을 물어뜯은 고래에게 집착하는 동안 배에 탄 사람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먹힌 에이헤브가 40년간 바다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하늘 아래 두 존재가 동시에 평화로울 수 없다는 상황은 자연에게 지배당할 것인가, 자연을 지배할 것인가와 상통한다.  

 

"계속 태양 쪽으로 몸을 돌리는구나. 죽음을 앞둔 마지막 동작으로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이마를 돌려 태양에 경의를 표하고 기원하는구나. 고래도 역시 불을 경배하는구나. 태양의 가장 충실하고 광대하고 당당한 신하여! 아아,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내 눈이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이 광경들을 보는구나. 보라! 물로 에워싸인 이 광대한 바다를 보라. 더없이 공정하고 공평한 이 바다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먼 멜빌, <모비 딕>)

 

에이헤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복수를 한다 해도 인간의 발을 뜯어먹을 고래는 없어지지 않는다. 종이 번식하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이 없애버리면 그러지 않겠지. 그렇다고 인간이 고래 위에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인간이 고래에게 도전하는 한, 고래에게 먹힐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기한 건 멜빌이 의도한 이 위대한 모험소설 안에 인간 군상은 물론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의도가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신, 사랑과 증오, 일상과 일탈, 종교와 광기, 위대한 주제로 꼽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까지. 마지막으로 고래포획은 금기시되지만 여전히 불법수탈로 이뤄지고 있다. 달리 먹고살 일이 없는 북극에서는 고래를 못잡게 하거나 북극곰 개체가 줄어들자 도시 번화가로 떠나 약탈당한 마을마냥 변두리가 텅 비었고, 여러 생명체의 포획은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도 큰돈이 된다고 들었다. 예전에 푸른 제주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생각이 난다. 뭔가 짠해서 일부러 다큐까지 보고 그랬는데 돌고래조차도 이렇게 감격스러운데 흰 고래라니, 모비 딕이라니, 한동안 북극사진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세계가 지구촌이 아니라는 걸 믿으면서도 세계 어디로든 맘만 먹으면 내 발로 밟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북극은 아직도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미지의 장소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주말이 황홀했다는 것은 동시에 대충봐도 2000페이지는 넘는 문자를 소화하느라 진이 빠졌다는 소리다. 다음 소설 한 권을 집어드는데 페이지가 얇아지니 중무장하고 행군하다가 무거운 거 다 벗어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독서의 무게는 페이지수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만 지난 주말에는 분명 그랬다. 팔과 머리가 동시에 무거웠으니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시간을 팔아 책을 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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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3-2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써로... 폴 서루...
왜 다른 책은 번역이 안되나 했더니, 아프리카 기행문이 있었군요. @@

아이리시스 2014-03-30 07:49   좋아요 0 | URL
이름이 낯익긴 한데 이상하게 다른 데서도 들어본 듯한 이름이에요. <아프리카 방랑>에 보면 자기책 인용 되게 많이 하는데 정작 번역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dreamout님은 벌써 알고 계셨군요!

막 버라이어티한 여행기 기대하시면 드라이하고 딱딱할 수도 있는데 그냥 무난해요^-^b

2014-03-26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30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래서 아이리시스님이 좋아요 ㅋ 불 타는 주말을 보내셨네요. ㅎㅎㅎ
글 속에 쓰고 쓰고 또 쓴 집념의 아이리시스님이 참으로 좋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전 왜이리 숨어지내는지. ㅋ
전 독서가 어렵네요. 글도 못 읽고 쓰지도 못하고 있어요. 푸하

아이리시스 2014-03-30 07:47   좋아요 0 | URL
불 타는 주말, 앗싸라비야, 하고 싶었는데. 사실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일주일에 하루쯤 책만 읽는 거. 그치만 그러기에 제가 너무 젊죠. 건강하고. 예쁘죠. 푸핫.
루쉰님 기다리다 지쳐갑니다. 교도들과 신자들도 모두 파업했어요, 반성하세요!
돌아오세요, 언제든지^-^

Shining 2014-03-29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걸 주말에 다 읽었어요....?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요........(털썩) 저는 모비딕도 아직 안 읽은 독자...ㅋㅋㅋ
저는 이번 주말에 영화 세 편을 보기러 했는데 벌써부터 다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왜 읽지도 못할 책은 만날 보관함에 담고, 당장 보지도 않을 영화를 결제하는거죠? 왜, 왜그러죠. 나만 그런가.......

이번 주말엔 뭐 읽어요? :)

아이리시스 2014-03-30 08:1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주말이 참 짧아요. 후딱 지나가요. 책이 참 별거 아닌데 대단한 게, 세 권 읽느라 지난 주말엔 정말 한 게 없어요. 잠을 많이 자긴 했지만 거의 책만, 진짜 책만 읽어야 이틀(정확히는 하루 반나절이지만)만에 끝납니다..(흐억)

금요일부터 비가 와서 날씨가 되게 별로예요. 어젠 하루종일 비왔고 오늘도 흐려요. 주말 날씨 뭐 이래.. 그렇지만 영화 보러 가기로 했으면 봐야죠! 어떤 영화 보러가는지 궁금해요...

제말이요... 맨날 담아요.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보관함 터져나가요. 오천권은 있을 거예요. 정리할 엄두도 안나요. 어느날 싹 지우고 다시 담기 시작해요. 이게 뭐하는 거죠? 왜그러죠? 두 달 동안 책 안샀어요. 돈 없어요, 흙흙. 집 여기저기 책이 쌓여있으니 엄마 눈치가 좋지 않아요.-_- 이렇게 4월까지 참을까 싶어요. 히히히^-^

이번 주말엔 서평도서를 해치우겠어요. 음음,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포트노이의 불평>, <대구>가 있어요! 근데 어제부터는 <윈터스 테일>을 읽는 중 :)

일요일이 밝았어요! 영화 재미있게 잘 보고 와요 ^______________^

맥거핀 2014-03-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이걸 책지옥이라고 해야하나요, 책천국이라고 해야하나요? 그야말로 책들을 씹어먹으면서 날들을 보내고 있군요. 가끔 보면 저는 알라딘 오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책도 안 읽는데, 왜 여기와서 기웃거리고 있는지...근데 진짜 저 같으면 책 읽다가 지쳐서 포기할 것 같은데...대단해요!

<모비딕>은 아주 예전에 읽었는데...읽고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쓸 생각을 했지,였어요. 어떤 이야기나 책들은 아주 가끔 다른 무엇인가가 인간의 손을 빌어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31 11:14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안녕, 오랜만. 제가 좀 극단의 끝장판이라 중간이 없어요. 다 읽겠다고 작정하고 덤빈 거였으니 목표달성한 셈이죠. 재미로 읽었음 진작에 포기했겠죠. 제 의지도 뭐 그리 굳건한 편 아닌데다, 취미생활에 그럴 필요가.. 책도 안 읽는데 왜 여기와서 기웃거린다니요... 큰일날 소리. 그러다 안오시면 저는 어쩌라구요.........

<모비딕>이 재미있을거란 생각은 들었어요. <해저 2만리>도 재밌게 읽었고, 요즘은 바닷속 세계와 생명체에 관심이 가요. 여튼 대단해요. 눈앞에서 고래가 뒤집는 광경을 보고싶을 만큼. 멜빌이 19세기 사람이라는 걸 전제해도 그렇고 안해도 그렇고요. 그 어떤 현대작가보다도 세련된 문장으로 써요. 맥거핀님은 은근 문학 많이 읽으신 독서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