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허먼 멜빌, <모비 딕>)
이 좋은 봄날! 세 권의 책을 읽느라 지난 주말을 몽땅 허비했다. 먹는거야 배만 채워도 좋다 싶을 때가 일 년에 반이지만 책은 그럴 수 없다. 주어진 삶도 시간도 너무 짧고 불행히도 나는 오지랖이 넓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게 아닌 한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미뤄둔 드라마를 채울 시간은 날아갔고 어쩌다보니 계속 보는 [아빠 어디가]에서 안정환 vs 송종국 라이벌 매치만 제대로 보았다. 나는 축구보다 여행이 더 좋은데, 지난 주에 이어 여행을 안 갔다. 시청률 안 나온다고 기획의도를 바꾸시면 안됩니다, 소리쳤다.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국가 전반의 구조를 공부하고, 방랑자 이슈메일이 되어 신비로 뒤덮인 바다를 탐험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비극을 겪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런 주말도 있고 이런 주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주말도 의미있고 이런 주말도 의미있다. 비로소 <아프리카 방랑>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모비 딕>의 끝페이지와 조우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징조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자식 세대에는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확신의 기준이었고,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보르헤스는 '모든 지식은 기억에 불과하다'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관심사에 해당하는 많은 내용을 책으로 배우지만 정작 지식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서가 단순히 재미나 흥미 이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냐 물으면 내 대답은 '예스'다. 그걸 바라고 원한다. 이건 이십대 초반에 의견정리 끝냈으니 이젠 독서가 즐거움 이상의 것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맞다,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도 각자 다른 것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서 리뷰의 필요성이 나온다. 하지만 많은 리뷰가 다른 단어를 쓰는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리뷰는 반드시 필요한가. 반복적인 패턴, 자기복제는 나와 상대 중 누구의 시간을 더 뺏는 일일까.
아무것도 못 얻었는데 얻은 척 무얼 쓸 필요가 있을까. 나쁜 책을 나쁘다고 쓰는 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경험상 내게는 별로 그렇지 않다.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기는 누워서 떡 먹는 것만큼 쉽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럴 만한 책이 아닌데도 유난히 별점이 후하다면 그건 내가 선택한 책에 대한 실패와 오용한 시간사용을 무마하기 위해 나온 무의식적 처량함이지, 소위 공짜로 받은 책에 대해 주례사 비평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별점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같은 책을 동시에 읽으면서 각자 얻어가는 지식이 다르다는 데 쿨할 자신이 없다. 책이 공짜로 내것이 되는 것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공공도서관이 들어서기를 나는 더 바란다. 시간을 들여 내가 무언가를 했다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알파가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솔직한 것이다. 변하기 싫은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책이기를. 책이 지식이라면 지식이 기억이 아닐 리 없고, 그 반대라고 해도 여전히 지식은 기억이다. 몇 번째 서랍을 열어 말을 꺼내볼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아프리카 방랑>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을, 그전에는 <노예 12년>을, 그전에는 까먹었지만 기어이 찾아내 적어보는 <모사드>, 그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딸 1>, 그전에는 <북극여행자>, 그전에는.. 다섯 권을 연달아 떠올린 건 순서별 기억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랍, 종교분쟁, 인종차별, 노예, 흑인, 이집트 같은 키워드 때문이다.
중간중간 <친구 사이>, <침묵의 거리에서>, <길귀신의 노래>, <픽션들>, <눈먼 암살자>, <런어웨이>, <내 아내에 대하여>, <당신이 그만두라고 조를 때까지>, <열세 번째 배심원>, <파계 재판> 등 언뜻 떠올려도 여러 권의 문학을 읽었고, 이전으로 올라가면 서재의 글이 뜸해진 올해 시작점, <디어 라이프>와 <유빅>의 리뷰를 쓸 즈음부터는 <진저맨>, <검은 모래>, <여인의 초상>,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사형집행인의 딸>, <밤의 새가 말하다>, <도시와 나>, <중세의 가을>, <둔황>, <종착역 살인사건>, <블레이베르크 프로젝트>, <파리인간>, <에라스뮈스>, <니체 자서전> 등을 읽었다. 너무나 사소해서 생략되는 몇몇 에세이도 더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을 다시 읽겠다는 다짐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다시 새로운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토요일>, <초조한 마음>, <비행공포>,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불안한 남자>,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포트노이의 불평>, <지도와 영토>, <소리와 분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나무 위의 남작>, <어제의 세계>, <고양이 테이블>은 읽기 시작했거나 읽다만 상태에 있다.
불행의 첫 번째 주인공이 아닌 한, 때로는 그 첫 번째 주인공에게조차도, 자신을 찾아온 슬픔이나 절망보다 더 강한 건 현실이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 얘기다. 1달러로 하루를 살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남편이 불치병에 걸린 아내로 인해 오랜 꿈을 접지만, 안다, 누군가 꿈을 포기한다고 아내가 낫지는 않는다는 걸. 비용과 슬픔과 무기력을 태운 가정이 난파당한 배처럼 휘청대자 남편이 결단 내리는 부분에서,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곳에 대해 설명하다가 폴 서루의 <아프리카 방랑>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기억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찾아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읽고, 우리나라 사람이 쓴 아프리카를 읽었으니 외국인이 쓴 아프리카도 읽어야 한다면서 <아프리카 방랑>을 구입했었다. 폴 서루가 세계적인 여행작가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력은 몰랐다. 아프리카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는 땅이 아닌 지 오래된 데다, 우리 삶의 반열로 끌어당기기에는 너무나도 멀다.
폴 서루는 30년 전 평화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는 서구열강의 오랜 식민주의로 비문명적이고 질서가 없긴 했지만, 지금처럼 전쟁의 땅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훨씬 더 평온하고 따뜻했다고 회상한다. 열띤 청춘 시절을 잊지 못해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간 건 2000년대 초반, 이 책의 번역출간은 2011년, 오늘은 2014년 춘삼월. 시간이 흘러도 아프리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정적으로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머무르는 동안 남쪽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아프리카의 위험을 경고했다. 여행 떠나오기 전 만난 지인들은 거의 마지막 인사하듯 했다. 30년 전 폴 서루가 가르친 십대 소년은 어느덧 사십대가, 대여섯살에 불과하던 꼬마는 훌쩍 키가 자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청년이 되어 있다. 시간이 그들을 외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아프리카의 비극은 더 심화되었다.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인종, 종교와도 싸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랭보가 이곳에서 그처럼 행복하게 지냈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랭보가 아프리카를 좋아한 이유는, 아프리카가 유럽과 달랐고 서구 세계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이유에서 아프리카가 좋았다. 아프리카는 때로는 반항적이고 때로는 나태한 땅이었다. 아프리카는 내 고향과 완전히 달랐다.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은 암흑성에 있는 것과 같았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아프리카 방랑>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널리고 널린, 흔하디 흔한 일회용의 여행기록이 아니다. 사실적이고 우아한 문체, 사람과 풍경의 생생한 묘사, 이성과 감성을 절묘히 오가는 온도는 아프리카를 아꼈고 아끼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풍경에 집착하거나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생각과 의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치며 어젯밤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오른 장면은 한줄기 빛이었다. 빙하기가 시작되며 필연적으로 찾아온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과정은 역사학적 보편성을 띤다. 인간이 머리를 쓰고 도구라는 걸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당연히 그에 따른 부수적 가치들이 동반성장한다. 아프리카도 그래야 옳았다.
아프리카에는 장수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누구도 나이 많은 걸 자랑하지 않았다. 누구도 오래 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나이는 시간을 측정하는 우연한 방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서는 중대한 일을 성취하거나 가치 있는 일을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서구 세계의 두 세대가 아프리카에서는 세 세대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은 일찍 결혼해서 일찍 자식을 낳고 일찍 죽는 삶으로 요약된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폴 서루가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감회에 젖은 채 하얗게 센 머리로 되돌아가는 건 발전의 싹을 어떻게 틔웠는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본 아프리카는 도리어 예전에는 없던 국제 원조와 간섭에 신음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부자 나라의 원조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국가의 가난을 유지하려 하고, 그러려면 무지한 국민이 교육을 받아 똑똑해져서는 안된다. 아프리카의 절망과 신음 그리고 눈물은 그것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폴 서루는 누구보다 강력하게 예전과 지금의 차이를 느낀다. 정작 제대로 된 길이 놓이지 않은 아프리카는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온갖 이해관계가 먹이사슬처럼 얽힌 이곳에서 지구의 반전이 시작되어야 한다. 인종과 노예 문제, 식량 전쟁, 기후와 환경 전쟁, 사회 제반시설의 부족이라는 단어가 아까울 정도의 결핍, 종교적 충돌과 끊임없는 내전과 전쟁까지, 세계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토록 외로워 슬픈 아프리카, 폴 서루는 오히려 무덤덤한데 나는 이 대륙의 모든 가능성들이 아쉽고 아프고 안타깝다.
맹세컨대, 이런 생각 해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버나드 쇼는 행여 이런 생각을 했더라도 표면에 드러나는 이상의 뜻에서 한 말이지만, 그건 그가 불우한 어린시절을 딛고 끝내 성공했다고 여겨지니 그럴 뿐이다. 열두 살에 사업실패로 광기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자살한 일은 버나드 쇼에게 자신에게도 숨겨져 있을지 모를 광기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내가 대부분의 작가가 (큰)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이상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만을 작가의 범주에 넣고 꿈을 꾸었다. 어떤 식으로도 구체화되지 못한 꿈이었고, 반드시 작가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슈퍼마켓 주인이 갖다놓은 물건을 일 년이 지나도록 사는 사람이 없는 것과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그럭저럭 원고료를 받고 사는 이가 다를 게 없다. 물론 많은 의미에서 다르지만.
사실 내 경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걱정된다. 나는 섬에 고립되더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작가들은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잘 모이지를 않는다. 글만 보면 작가들이 모든 덕목의 표본 같지만, 그들은 상습적인 무정부주의자이며, 논쟁을 좋아하고, 감상적이고, 잘 흥분하고, 누군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말하면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을 통해 활동하는 작가들은 그나마 사회성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홀로 앉아서 세상만사를 머리로만 해결하려 들고 작품에 딴죽 거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탁월한 유머 감각이 없으면 정치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소설가들을 외계인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면 개인주의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진다. 심지어 군인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금전적인 이해를 신경스는 사람이면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지도 않는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경제는 재미있고 정치는 복잡하다. 나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세상은 한 세대 전이지만 우리는 같은 바탕에서 성장한 세상에서 살았고 또 살아간다. 버나드 쇼는 서른 개가 넘는 챕터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수많은 얘기는 핵심으로 다룰 수 있는 단편적 의견이 아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의 지도로 보면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시점은 너무나 작아서 점 하나로도 표현이 안된다고 했다. 일생에서 처음과 끝은 굉장히 길지만 정작 우리는 다 합쳐서 하나의 점도 안된다.
우리의 외무부장관 파머스턴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떤 나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고 싶으면 그 나라에 30년 동안 살면서 그 나라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어떤 일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다. (중략) 세상일의 상당 부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할 수는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있기 마련이다. 그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는 것이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중략)
확실히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러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반면 사상가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우리의 어제, 오늘, 내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삶은 결국 정치다. 버나드 쇼가 들려준 것처럼 한사람 한사람에게로 와서 어떤 삶이 되는, 그런 삶.
<모비 딕>은 과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고래 보고서! 이 유쾌한 고역, 혼돈, 경악은 시종일관 영혼을 빼놓는다. 멜빌이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 순간조차도 좋다. 영혼이다가 사물이다가, 어제였다가 오늘이다가, 일상이다가 일탈이다가 한다. 끝인가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시작한다. 죄없는 고래는 이유없이 불려나와 모질게 당한다. 인간에게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것을 내어주고 또 빼앗아 간다. 거대한 몸집을 처절하게 뒤집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뿜어내고 죽는, 피흘리는 고래는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북극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낯선 그린란드 어느 외딴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북극곰과 배타고 나가 기다림과 씨름하다 기어이 마주치게 되는, 한시점의 향유고래. 향유고래의 배가 갈리고 내장이 터져나오고 바닥이 피로 흥건해지자 비로소 탐욕을 접는 인간. 자연과 인간의 거대한 싸움에서 나는 경악과 몽환을 동시에 경험했다.
처음에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여관은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소설의 계보에서 <모비 딕>은 분명 탐험소설에 속하지만 읽기 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철학적이고 탐구적이다. 바다 앞의 인간, 인간 앞의 바다, 그리고 고래. 크게 잡아도 세 가지로 요약되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빠르지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바다든 갑판 위든 고래든, 열 길 물 속이든 한 길 사람 속이든 아무것도 모른다. 바다는 아무것도, 첫날밤 새색시처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 고래는 대체, 무슨 연유로 끌려나와 쓰러져 피토하고 아낌없이 다 내주고 돌아가는가. 어디로.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거나 모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종교가 정말로 광신적이 되어 그 사람에게 명백한 고통이 되면, 그리하다 결국 우리의 이 지구를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개인을 구석으로 데려가서 문제점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 <모비 딕>)
탐험이나 모험에서 볼 수 있는 속도감보다는 사색적이거나 철학적인 여백의 공간이 더 넓다. 단순히 고래잡는 얘긴 줄 알고 덤볐다가 내 주말이 사색으로 가득 찼다. <암흑의 핵심><어둠의 심연>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맞닿는다. 문체는 반짝이고, 시도는 새롭고, 스며드는 시선은 따스하다. 고래의 계보와 특성은 부수적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바다와 기약할 수 없는 긴 항해, 죽음을 무릅쓴 40년 간의 필사적인 사투에서 미지의 공간을 찾을 수 있다. 필요한 건 예비 보트, 예비 돛대용 목재, 예비 밧줄과 작살, 쇠고기와 빵, 물, 연료, 쇠테와 통널 등의 항해 도중 잠깐씩 정박하는 항구에서는 구하지 못할 귀한 물건들이고, 이 미지에 참여한 이들은 기이한 식인종 퀴퀘그, 이슈메일, 빌대드 선장, 펠레그 선장, 에이해브 선장, 채리티 아줌마, 일등항해사 스타벅, 스틸킬트, 래드니, 그들은 바다 위에서 차례로 죽어나간다. 그게 운명이라는 듯, 만약을 영원히 반복하는 벌이 주어졌다.
군함의 닻을 계류용 밧줄을 매는 기둥으로 삼고 작살 다발을 박차로 삼아 저 고래에 올라타고 가장 높은 하늘로 뛰어 올라가서, 무수한 천막이 늘어선 가상의 하늘이 정말로 내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진을 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먼 멜빌, <모비 딕>)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바다를 만나고 포경선은 포경선을, 인간은 하늘과 만난다. 멜빌과 <모비 딕>에 쏟아지는 공식적 찬사가 아니라도, 19세기 상상력은 확실히 지금보다 멀고 높고 뜨거웠다. 싸움이 고독한 이유는, 망망대해 배 위에서 후퇴할 공간이 한평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힘과 힘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이야기이기에 성스러운 경지에 있다. 증오는 복수가 되고, 복수는 위험을 무릅쓴다. 에이헤브 선장이 자신을 물어뜯은 고래에게 집착하는 동안 배에 탄 사람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먹힌 에이헤브가 40년간 바다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하늘 아래 두 존재가 동시에 평화로울 수 없다는 상황은 자연에게 지배당할 것인가, 자연을 지배할 것인가와 상통한다.
"계속 태양 쪽으로 몸을 돌리는구나. 죽음을 앞둔 마지막 동작으로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이마를 돌려 태양에 경의를 표하고 기원하는구나. 고래도 역시 불을 경배하는구나. 태양의 가장 충실하고 광대하고 당당한 신하여! 아아,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내 눈이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이 광경들을 보는구나. 보라! 물로 에워싸인 이 광대한 바다를 보라. 더없이 공정하고 공평한 이 바다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먼 멜빌, <모비 딕>)
에이헤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복수를 한다 해도 인간의 발을 뜯어먹을 고래는 없어지지 않는다. 종이 번식하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이 없애버리면 그러지 않겠지. 그렇다고 인간이 고래 위에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인간이 고래에게 도전하는 한, 고래에게 먹힐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기한 건 멜빌이 의도한 이 위대한 모험소설 안에 인간 군상은 물론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의도가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신, 사랑과 증오, 일상과 일탈, 종교와 광기, 위대한 주제로 꼽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까지. 마지막으로 고래포획은 금기시되지만 여전히 불법수탈로 이뤄지고 있다. 달리 먹고살 일이 없는 북극에서는 고래를 못잡게 하거나 북극곰 개체가 줄어들자 도시 번화가로 떠나 약탈당한 마을마냥 변두리가 텅 비었고, 여러 생명체의 포획은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도 큰돈이 된다고 들었다. 예전에 푸른 제주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생각이 난다. 뭔가 짠해서 일부러 다큐까지 보고 그랬는데 돌고래조차도 이렇게 감격스러운데 흰 고래라니, 모비 딕이라니, 한동안 북극사진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세계가 지구촌이 아니라는 걸 믿으면서도 세계 어디로든 맘만 먹으면 내 발로 밟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북극은 아직도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미지의 장소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주말이 황홀했다는 것은 동시에 대충봐도 2000페이지는 넘는 문자를 소화하느라 진이 빠졌다는 소리다. 다음 소설 한 권을 집어드는데 페이지가 얇아지니 중무장하고 행군하다가 무거운 거 다 벗어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독서의 무게는 페이지수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만 지난 주말에는 분명 그랬다. 팔과 머리가 동시에 무거웠으니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시간을 팔아 책을 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