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 순교와 그 가족의 삶…일본인에 ‘원수사랑’ 본보기 실천
[기타] 2001년 07월 21일 (토) 12:37
1944년 3월 31일,평양형무소-.

비장한 표정의 40대 여인과 열세살 소년이 면회실에 들어섰다.“아버지가 널 보고싶어 하신다.내가 문을 열어줄테니 그때 인사를 올리거라.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여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면회실로 들어섰다.어린이에게는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문을 여는 그 틈새를 노린 것이다.드디어 푸른 수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여인은 잽싸게 허리를 굽혀 두 사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납처럼 핼쓱한 표정의 남자는 소년을 보자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소년은 신음처럼 ‘아-버-지’라고 부른 후 큰절을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일본인 교도관의 고함-.소년이 고개를 들었을 때,이미 면회실 문은 닫혀 있었다.부자간의 마지막 상봉은 이렇게 끝났다.중년의 남성은 그로부터 21일후인 4월 21일,싸늘한 시체가 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주기철목사와 그의 4남 주광조장로(70·영락교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주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7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결국 옥사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다.일본 형사들은 어머니 조재선,아내 오정모,아들 주광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공중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물을 붓거나 몸을 밧줄로 묶어 그네에 태운 후 매질을 가했다.이유는 한 가지,신사참배 반대였다.

1945년 8월 15일.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내려온 수천명의 일본인들이 평양 숭실대학교에 진을 쳤다.그들의 삶은 비참했다.아침마다 수십구의 시체가 손수레에 실려나갔다.그런데 어느날,주목사의 집에 일본인 여성 셋이 찾아왔다.

“저희를 좀 살려주세요.사흘을 굶었어요” 주광조는 ‘일본인’을 보자 피가 역류했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의 백성들.이제 너희들도 좀 당해봐라” 그때 어머니가 만류했다. “광조야,손님들을 방으로 모셔라”

어머니는 일본 여인들에게 밥을 먹였다.그리고 쌀도 퍼주었다.이튿날부터 대문 앞에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본 여인들이 ‘주기철목사’의 집에 가면 밥과 쌀을 준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오정모사모는 남편을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원수사랑’의 본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순교자 주기철목사와 그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푼 후예들의 가슴에 다시한번 대못을 박는 만행이다.

/임한창기자


[기타] 2001년 07월 21일 (토) 12:37
1944년 3월 31일,평양형무소-.

비장한 표정의 40대 여인과 열세살 소년이 면회실에 들어섰다.“아버지가 널 보고싶어 하신다.내가 문을 열어줄테니 그때 인사를 올리거라.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여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면회실로 들어섰다.어린이에게는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문을 여는 그 틈새를 노린 것이다.드디어 푸른 수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여인은 잽싸게 허리를 굽혀 두 사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납처럼 핼쓱한 표정의 남자는 소년을 보자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소년은 신음처럼 ‘아-버-지’라고 부른 후 큰절을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일본인 교도관의 고함-.소년이 고개를 들었을 때,이미 면회실 문은 닫혀 있었다.부자간의 마지막 상봉은 이렇게 끝났다.중년의 남성은 그로부터 21일후인 4월 21일,싸늘한 시체가 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주기철목사와 그의 4남 주광조장로(70·영락교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주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7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결국 옥사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다.일본 형사들은 어머니 조재선,아내 오정모,아들 주광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공중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물을 붓거나 몸을 밧줄로 묶어 그네에 태운 후 매질을 가했다.이유는 한 가지,신사참배 반대였다.

1945년 8월 15일.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내려온 수천명의 일본인들이 평양 숭실대학교에 진을 쳤다.그들의 삶은 비참했다.아침마다 수십구의 시체가 손수레에 실려나갔다.그런데 어느날,주목사의 집에 일본인 여성 셋이 찾아왔다.

“저희를 좀 살려주세요.사흘을 굶었어요” 주광조는 ‘일본인’을 보자 피가 역류했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의 백성들.이제 너희들도 좀 당해봐라” 그때 어머니가 만류했다. “광조야,손님들을 방으로 모셔라”

어머니는 일본 여인들에게 밥을 먹였다.그리고 쌀도 퍼주었다.이튿날부터 대문 앞에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본 여인들이 ‘주기철목사’의 집에 가면 밥과 쌀을 준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오정모사모는 남편을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원수사랑’의 본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순교자 주기철목사와 그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푼 후예들의 가슴에 다시한번 대못을 박는 만행이다.

/임한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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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만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기타] 2002년 04월 29일 (월) 10:35
찬송:246장 ‘내 주의 나라와’

예배에로의 부름:시편 96;7∼8

신앙고백:사도신경

기도:가족 중에서

본문:사무엘상 22;1∼2

요절:“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의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말씀:아둘람 굴이란 환난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긴 후 사울 왕의 눈에 들어 왕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그렇지만 그때부터 다윗은 모진 고생을 겪게 됩니다.

이는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사울의 죽인 자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식으로 상승하고 사울 왕의 인기는 줄어들자 위협을 느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전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이런 위기에서 다윗이 도망하여 숨었던 굴이 아둘람입니다.이 굴에는 환난 당한 자,빚진 자,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였는데 400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특별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니이다”(삼상 26:24)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손을 피하고 피했습니다.오히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그때마다 고백한 신앙이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이러한 고백이 7번이나 나옵니다(삼하 1:14·16·4:10,삼상 24:6·12·26:9·11·23).

이것은 한 인간 사울을 향한 애정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하나님 중심입니다.하나님의 기름부음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요,하나님의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내가 받은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주일을 성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것입니다.내가 집사 혹은 권사 혹은 목사일 때 하나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신실하게 인생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님과 주기철 목사님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이들은 평양 오산학교 사제지간입니다.1915년 주목사님이 학생이었을 때 조장로님은 교장이었습니다.이 분들은 1930년대에 평양읍 산정현교회에서 담임목사와 장로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부산에 계시던 목사님을 청빙하러 내려갔던 분이 바로 스승인 조장로님이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목사님은 예배시간에 늦은 장로님을 꾸중했습니다.그때 학교의 스승이셨던 조장로님은 눈물을 흘리며 목사님과 성도들께 사과를 드렸습니다.한국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을 만한 훌륭한 인물들이었음을 입증하는 좋은 일화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하나님의 거룩함과 권위는 과연 누가 지켜야 하고 세워나가야 할까요?

기도:주여,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름부음받은 하나님의 종을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그리고 주의 이름이 기록된 직분도 건물도 사역도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주기도문

이창준 목사(천안갈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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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19장 ‘주의 음성을 내
[가정 예배] 흰옷을 입은 자
[기타] 2002년 05월 23일 (목) 10:24
가 들으니’

예배에로의 부름:시편 49;1∼2

신앙고백:사도신경

기도:가족 중에서

본문:요한계시록 3;4∼6

요절:“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말씀:사데 교회는 형식화되고 가식화되어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그런데 그런 중에도 주님의 커다란 격려의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렇게 타락한 사데 교회 속에서도 사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일제시대 정치세력에 야합하고 세속화되는 교회를 걱정하며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오종목 나의 기도’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아,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평양아!평양아!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모란봉아,통곡하라.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드리리다.드리리다.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이다.‘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 정절(大義貞節)변치 아니하오리다.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에는 바울의 기막힌 간증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무너져가는 고려를 붙잡고 눈물 흘리던 충신 정몽주의 시가 있습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신앙의 옷을 더럽히지 맙시다.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주님,성도들이 믿음과 거룩의 정절을 지키어 옷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주기도문

이창준 목사(천안갈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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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그림으로 만나는 위대한 신앙인 42명..'나를 부르는 소리' 출간
2002년 12월 18일 (수) 17:45
시와 그림,일화로 기독교사에 빛나는 신앙인물 42명을 조명한 책이 나왔다.

월간 "새벗"의 김영진 발행인이 쓴 "나를 부르는 소리"(성서원,1만2천원)이다.

사막의 수도자 성 안토니우스,작은 예수 성 프란체스코 등 세계의 신앙 인물 25명과 이승훈 이상재 안창호 등 한국의 신앙인물 17명을 다뤘다.

"조국은 죽음보다 강하여라/애국심과 신앙심으로 무장한 채/오늘도 적진 속으로용감하게 뛰어드는/한 마리 불사조여/열아홉 꽃봉오리여"

저자는 미카엘 대천사의 음성에 이끌려 열 일곱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돼 나를 구한 잔 다르크를 이렇게 노래한다.

또 종교개혁의 영웅 마르틴 루터에 대해서는 "그가 울린 개혁의 종소리는/잠든중세 유럽의 하늘을 일깨웠고/그가 올린 개혁의 횃불은/어둔 세상에 복음의 참빛을 비춰 주었네"라고 찬양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신앙을 전한 탐험가요 의사인 리빙스턴은 "진정 아프리카의 친구"라 했고,마더 테레사 수녀는 "아기를 낳지 않은 처녀였지만 수많은 생명을 다시 태어나게 한 위대한 어머니"라고 기렸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소나무에 비유해 "소나무의 깊은 뿌리/영원토록 푸르고푸르러라"고 노래했으며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목사에게는"이 땅에 오신 작은 예수"라는 제목의 시를 바쳤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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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뿌린 복음의 씨앗 평화·통일로 열매맺길…”
[기타] 2003년 03월 02일 (일) 20:03
3월1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금식기도회’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순교자 가족대표로 참석한 주광조 장로,손동희 권사,이사례 권사는 과거 선친의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며 남북평화와 민족 복음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만세삼창을 주도했다.

극동방송 상임고문이면서 영락교회 원로장로인 주광조 장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4남)이다. 주장로의 기억 속에는 일제에 의해 아버지가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매질을 당하고 고춧가루 물에 괴로워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944년 3월31일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주장로는 푸른 수의를 입고 자신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던 아버지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며 그날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아버지”라고 부른 뒤 큰 절을 올렸다고 회상했다. 주장로는 “이후 한달여 뒤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가 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면서 “이후 일본인만 보면 피가 역류했지만 어머니의 ‘원수 사랑’ 실천을 보면서 오히려 일본을 더 아끼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사례 권사는 ‘관용 백인 겸손’의 세가지 덕목을 가르쳤던 이기풍 목사의 유일한 생존 혈육이다. 4남2녀중 막내인 이권사는 이목사가 57세 때 얻은 딸이다. 1908년 제주도 첫 선교사이면서 첫 개신교회인 성내교회를 세운 이기풍 목사 역시 1938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42년 순교했다. 이목사는 성도 가정이나 교회,노회에서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분쟁을 해결했으며 선교정신의 상징으로 불리운다.

손동희 권사는 6·25때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장녀다. 전남 여천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던 손목사는 퇴각하던 공산당을 전도하다 그들의 총탄공격을 받아 순교했다. 이에 앞서 손권사의 두 오빠도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 좌익 학생들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

손목사는 꽃다운 나이에 먼저 천국으로 떠나보낸 두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 범인을 양아들로 삼아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괴로움을 선생으로 삼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손권사는 “이들 순교자들의 신앙의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열심히 깨어 기도하는 강한 우리 민족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의 후예들이 3·1절 84주년을 맞아 여의도에 함께 모여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이땅의 1200만 기독교인들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촉구하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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