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水巖 > 설날의 세시풍속과 유래
설날의 세시풍습
명절은 세시풍속(歲時風俗)에서 두드러지게 기념하는 날을 말한다. 명절은 우선 경사스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새옷으로 갈아입었고, 맛있는 성찬(盛饌)을 만들었으며, 떡과 술과 음식을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었고, 신을 제사하거나 조상의 차례를 지냈고 또 어른께 세배(歲拜)를 하고 추원보본(追遠報本)도 했다.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명절에는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미풍 또는 양속으로 계승되고, 소년시절의 인상이나 향수는 명절 때의 일이 많다. 옛날을 회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명절 때의 일들이 인상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명절은 계절의 변화를 의식케 하였고 생활화하도록 하였다. 신을 섬기고 조상을 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을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되풀이하는 데서 교육성을 지니게 되었다.
관습적으로 전해 오는 명절의 행사는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이다. 흰 떡국을 먹고 이명주(耳明酒)를 마시고 부럼을 깨물고 달맞이를 하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고 있다. 그 시기에 그런 행사를 하는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무슨 뜻을 지닌 것이다.
원단(元旦)
원단은 1년의 첫날이다. 세수(歲首) 또는 년수(年首)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 또는 ‘설날’이라고 한다. 연수 또는 세수란 일년의 첫째날이란 뜻이고, ‘설’이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간다는 뜻이다. 대회일(大晦日)로 묵은 1년은 지나가고 설날을 시점으로 하여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바, 1년의 운수는 그 첫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옛 사람들은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몸가짐으로 벽사초복(辟邪招福)을 기대하였으며, 연초인 설날에 몸과 마음의 근신을 꾀하고자 했던 뜻도 짐작이 간다.
농자(農者)를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 여겨 왔던 한민족은 신라시대에 원일상경 시일배일월신(元日相慶 是日排日月神)이라 하였으니 1년 동안의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신에게 제사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하는 풍속이 마련되었다.
① 다례(茶禮)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다례(正朝茶禮)라고 한다. 사당은 지손(支孫)은 모시지 않고 장손(長孫)이 모시는데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의 4대조의 신주(神主)를 모셔 두며 정조차례 때에는 차례대로 제사하고, 보통 제사 때에는 해당되는 조상에게만 제사하게 된다. 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에 있는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 때에는 원근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집에 모여들어 함께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 속에서 진행된다. 옛날부터의 오랜 관습에 의하여 원단(元旦)과 추석(秋夕)날은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끼리 지내며 이 때에 하는 행사는 차례가 중심이 된다. 지금도 연말과 추석 명절에 교통이 대혼잡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② 세배(歲拜)
차례가 끝나면 일동은 자리를 정리해 앉는다. 이 때 조부모·부모·백숙부모·형매 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사당(祠堂)을 모신 집이 있으면 먼저 사당에 절을 한 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주식(酒食),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일가 어른이 먼 곳에 살 경우에는 수십 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세배를 할 줄 모르면 교양(敎養)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 먼 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단(元旦)에 상경(相慶)하는 것은 옛날부터 전하는 풍속이다. 새해를 맞이해서 서로 만나 경사스런 인사로 절을 하는 것이다.
③ 성묘(省墓)
설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세배를 하지만 이미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손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효열담(孝烈談)을 들어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 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 복조리 달기
조리장수가 설날 전날 밤부터 복조리 사라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각 가정에서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복조리를 사는데, 밤에 미처 사지 못한 사 람은 이른 아침에 산다.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이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 문안비(問安婢)와 청참(聽讖)
사돈집 사이에는 부인들이 하녀를 서로 보내어 새해 문안을 드리는데, 이 하녀를 ‘문안비’라 했다. 민가에는 벽 위에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가기를 빌고, 설날 두새벽에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1년간의 길흉을 점쳤는데, 이를 ‘청참’이라 했다.
☯ 야광귀(夜光鬼) 쫓기
야광(앙괭이)이라는 귀신은 설날 밤,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리는데 그 신의 주인에게는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귀신이 무서워 모두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 놓은 다음 잠을 잤다. 그리고 채를 마루 벽이나 뜰에다 걸어 두었다. 그것은 야광귀신이 와서 채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는 재미있는 풍속이다.
☯ 오행점(五行占)과 원일소발(元日燒髮)
나무에 오행인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장기짝 같이 만든다. 이것을 던져서 나온 것을 보아 점괘를 얻어 새해의 신수를 점쳣는데 이를 오행전‘이라 한다. 또 원일소발은 지난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상자안에 넣어 두었다가 설날 저녁에 문 밖에서 태우는 풍습이다. 머리카락을 태울 때 나는 냄 새로 악귀나 나쁜 병을 물리친다는 믿음이다
☯ 해지킴(수세:守勢)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믿었으며, 아이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 여 잠들면 장난으로 아이들의 눈썹에 떡가루를 발라주어 놀려주었다. 이것은 설맞이 준비가 바쁘니 이 한밤은 잠자지 말고 일해야 한다는 데서 생긴 말로 보인다. 섣달 그믐날은 자지 않고 설을 지킨다는 뜻으로 ‘수세한다’고 하였다.
설날의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
<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力)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축해 볼 수 있다. <수서(隋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하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 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 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2005 02 06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