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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위대한 발명품 - 이불
스누피에 나오는 ‘라이너스’가 생각이 나지 않아, 검색창에 그에 관련될 듯한 주제로 검색해 봤다. 처음에는 서재질 중인 알라딘에서 검색해 봤다. 도통 진전이 없다. 이불 담요, 블링킷을 쳐보니 당연한 것이 겠지만, 그에 대한 그림동화만 잔득 나온다. 정작 ‘라이너스’라는 단어는 네이버에서 엮고 엮어서 겨우 찾았다. 이런 블링킷 소재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잘 먹힐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은 책이 검색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 중에 단 한권도 어른을 위한 블링킷은 없다. 블링킷 소재의 이야기는 아이들 뿐 아니라, 나 같은 유치한 취향의 사람들에게도 먹힐 듯 한데 전혀없다. 섭섭한데...... (아니, 내 나이가 되면 ‘침구 만들기’ 같은 가사실용서에서 블링킷을 발견해야 하나?)
어른을 위한 블링킷 주제 서적도 있어야 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이불하면, 결혼 적령기 여성에게는 혼수품 1호가 떠오를 듯 한데 나는 이불하면 보들보들, 따뜻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난 이불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비롯 진드기의 왕국이라고 해도, 이불은 내게 안락의 왕국으로 초대장을 보내준다. 아마 수면욕이라는 절대적 만족에 이불이 필수적으로 따라나오니 나의 이런 ‘이불사랑’도 학습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불이 제일 좋다.
어린 날, 이런 이불의 기억이 있다.
큰 이불에 내가 일자로 누워있고, 양끝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짝을 맞춰 이불의 끝을 잡고 서 계신다. 그리고 구령에 맞춰서 이불을 포함해, 내가 든 이불전체를 그네처럼 들어서 흔들어 준다. 그 속에 누은 나는 실실 웃으면서 그 놀이에 행복해 한다.
아버지, 어머니, 나, 이불 이렇게 4가족이 모이면, 그 놀이를 했었다. 아주 어릴 때야 무게도 적게 나가고, 제 자식이 좋아하는 모든 걸 해주고 싶어 할 때였으니, 난 그 놀이를 많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아랫 동생은 이불그네를 많이 탈 수 없었다. 동생을 태우고 이불을 들기 시작하면, 내가 그 이불그네에 냉큼 같이 타버리는 것이다. (동생과 나이차이가 4살 난다.) 가벼운 동생은 쉽게 태워서 흔들 수 있었지만, 4년이나 더 많이 먹이고 4년이나 더 키운 딸의 체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부모님께서는 그냥 포기를 하셨다.
일요일 아침 아버지 어머니께서 늦잠을 달게 자시고, 일어나신다. 이불을 같이 정리하시려 반듯하게 펴서 이불 끝자락을 잡으시면 딸이 벌떡 일어나 이불에 뛰어들었다.
그네 태워 달라는 간절한 딸의 눈빛을 회피하시는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새로운 놀이를 고안하셨다. 더 이상의 그네는 무리셨던 아버지께서 고안하신 놀이는 이불텐트 놀이였다. 아버지께서 이불 속에 드러누으셔야 한다. 사지를 이용해 이불기둥을 잡아야 놓으면 그 속에서 동생과 내가 앉거나 같이 드러누워 “우리집 참 좋지?”, “컴컴하니까 형광등 켜자”하는 단순한 놀이였다. 아버지의 팔이 저리든 말든 책상 스텐드까지 텐트 안으로 끌고 들어와 동생과 호호하며 놀았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마는 영국 버킹검 궁전보다 더 튼튼하고 일본 유황온천 보다 더 따뜻했다.
특별히 힘쓸 필요가 없었던 그 놀이는 동생-아버지-나의 ‘팔각 12四肢(사지)기둥 이불 텐트’로 응용되기도 했다.
화려한 수가 놓인 황실용 이불은 내게 필요없다. 진드기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불을 자주 빨고, 햇빛쬐기를 해주기 때문에 화려한 금색 장식도 무용지물이다. 그냥 면이불, 가벼운 면이불이 좋겠다.
무인도에 혼자 남게 된다면, 지금 덮고 있는 이불을 꼭 들고 가야된다. 무인도에 아무것도 없이 혼자 남게 되면 분명 우울증에 빠져 바다로 뛰어내릴 것이다. 이불과 함께 간다면 오랜만에 이불에게 100% 자연산 일광욕 시킨다고 좋아할 것 같다. 이불 말리고, 빨아 널어놓는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아마 이불 빨면서 혼자 극락의 세계로 빠져 우울증, 무인도 개척사업 등의 힘든 고민도 몽땅 잊고 무인도에서도 잘 살 것 같다.
어렸을 때 어른과 함께 눕혀놓아도, 내가 먼저 이불을 번데기처럼 홀랑 감고자서 내 전용 이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불 색깔이 분홍색 계열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분홍색 계열의 이불이 아니면 이불같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갈색이나, 짙은 장미색, 시원하게 생긴 여름용 하늘색 이불을 덥고 자면 잠을 잔 것 같지가 않다.
슬플 때도 이불을 돌돌 감고 코를 훌쩍이고 한잠 자고나면 그렇게 후련 할 수가 없다. 잠이 들기 전에 손으로 슥슥 이불 결을 만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내게는 상당히 재미있다. 이는 잠이 잘 안 왔을 때 어린 내가 생각해 뒀던 일종의 놀이인데, 이불과 손의 체온 전도력을 실험하는 단순한 것이다. 20년을 넘게 해오고 있고, 결과도 매번 똑같지만, 난 이 놀이를 엄청 좋아한다. 차가운 바깥공기에 접속된 이불 면과 체온으로 따뜻해진 이불면의 차이를 혼자 느끼면서 좋아하는 것이다. 남들은 누웠는데도 잠이 않 오는, 그 잠들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제일 괴롭다는데 나는 이 놀이로 인해 잠들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쉽다.
슬픈TV를 볼 때면 이불을 돌돌 감고서 쇼파에 드러눕는다. TV 드라마의 재미와 이불의 감동을 동시에 느끼기 위한 나의 전략이다. 그렇다고 호러물 TV도 이불과 같이 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주인이야 컬트 적이라도 이불은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순결성을 지켜줘야 한다고, 굳굳이 혼자본다. 잔인한 장면에도 눈을 가리지 않는다. 개그 프로는 내가 방정맞게 웃어대서 이불과 함께 보기에는 성격상 맞지 않는 듯 해서 같이 보지 않는다. 이불과 함께 자정 스페셜을 보면 프로그램의 중요도에 관계없이 이불의 따뜻함에 먼저 녹아 TV를 꺼버리고, 내 방에 이불과 함께 들어가 자버린다. 잠자리는 편해야 한다는 것이 이불과 나의 무언의 약속이다.
일반인이 가슴정도까지 이불을 덮고 잔다고 하는데 나는 코 바로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 당겨 U자로 귀까지 다 덮고 잔다. 이불의 촉감을 흠뻑 느끼고 싶어서 하는 짓이라고 하면 너무 병적인가?
알라딘의 날으는 양탄자도 제 이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나의 장례식 때도 나를 이불에 돌돌 말아서 같이 관에 넣어서 태워달라고 할 것 같다.
ps.글을 쓰고 보니까 완전 애정결핍된 원숭이 꼴이구만. 심리학책에 자주 등장하는 철로 된 원숭이 엄마보다 담요로 된 원숭이 엄마를 선택하는 아기 원숭이처럼 난 오늘도 이불을 덮고 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