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아영엄마 > [펌]어린이책, 전집으로 사지 마세요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에게는 공통된 독서 경험이 있습니다. 주황색 표지, 빨간 책등에 금박 제목 글자가 박혀 있는 50권짜리 전집, <세계 명작 동화>였든가요? 누구는 그 책이 계몽사 것이었다고도 하고, 누구는 그 책등에 삼성당이라고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전집 한 질이면 다 됐지만…
어쨌든 '그 책', 책 좀 읽는다는 아이들은 그 전집을 다 읽으면 세상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읽은 것처럼 배불러 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만한 것이, 그 전집 안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동화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래 동화, 각 나라의 민담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으니까요. 이 전집은 또래 문화의 주류였을 뿐 아니라 독서의 표준이었습니다.
엉뚱한 생각 같지만 부모들이 어린이 책을 구입하기도, 어린이들이 책을 골라 읽기에도 쉬웠던 시절입니다. 이 시절을 지내온 분들이 지금쯤 초등학생 학부형쯤 되었을 겁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예전처럼 “이거 하나면 끝난다”고 할 만 한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주에 수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일일이 읽어보고 책을 권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만큼 어린이들에게 건네 줄 좋은 책들이 많아졌으니 행복한 일이기는 하지만, 옥석을 가려야 하는 어려움은 고민으로 남기도 합니다. 어린이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어린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어른으로서 어린이 책을 고를 때 살펴보면 좋을 몇몇 지점들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 고민에 작은 도움이나 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동화책에 관해 먼저 생각해 봅니다. 아직도 어린이 책을 고를 때 교육적, 교훈적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출판사로 출간 의뢰되는 동화 원고 중 높은 비율이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기도 하고, 어린이 문학을 하시는 분들의 고민이 집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어린이 문학이라고 할 때, (아직 덜 자랐고 보호받고 양육 되어야 하는 존재인) 어린이라고 하는 대상의 특수성에 방점을 둘 것인지, 아니면 '문학' 일반의 규정 안에서 어린이 문학을 볼 것인지는 글을 쓰고 읽는 사람들이 어떤 동화가 좋은 동화인가라는 물음에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큰 갈림길이기도 합니다.
어미 돼지와 꼬마 돼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홍콩 애니메이션 '맥덜'을 보셨나요? 영화의 한 부분, 많은 관객들의 폭소를 이끌었던 한 장면입니다. 맥덜의 어머니가 맥덜이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 줍니다.
“옛날에 거짓말쟁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죽었단다. 옛날에 공부 열심히 하는 소년이 있었는데 커서 부자가 됐단다. 옛날에 말 안 듣는 소년이 있었는데 발목을 삐었단다. 옛날에 잠 많은 소년이 있었는데 다음 날 죽었단다."
많은 이들의 웃음을 자아낸 이 동화의 내용은 실제 근대 유럽에서 여러 가정에서 애독되던 초창기 그림책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작품이 이렇다면, 이 작품은 동화의 교훈적 기능만이 도드라져 보일 뿐 이 글을 읽으며 어린이가 재미와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용과 형식이 좀 더 다양해지고 세련되지기는 했지만, 맥덜 어머니의 자장가는 아직도 어린이 책 속에서 되풀이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상상의 공간과 시간을 열어 주고 성장과 미래를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강제하고 싶은 요구 사항들을 담은 동화들입니다. 어른의 문학에서 뿐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문학에서도 재미와 감동은 한 권의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큰 가치입니다.
그 한권의 재미와 감동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이 자라고 다양한 삶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면, 그래서 마음 건강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면 그 한 권의 동화책이 갖는 힘은 무엇보다 강한 것 아닐까요?
동화책이 갖는 또 다른 힘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어려움을 딛고 이겨낼 힘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어린이들이라도 집과 학교, 또래 집단, 그 밖의 여러 공간에서 많은 스트레스와 함께 살아갑니다. 때로는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도 하구요. 형제간 차별 때문에 겪게 되는 상처에서 출발하여 부모의 이혼, 폭력의 피해, 왕따의 대상, 신체적 장애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마음을 달래 주기에, 그 문제를 대화로 이끌어내기에 동화만큼 좋은 매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간 수많은 국내·외 동화가 출간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비할 바 없이 다양한 소재, 다양한 경우의 어린이 주인공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우리 아이의 고민이 무엇일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적합한 책을 골라 줄 수 있다면, 좋은 친구 하나를 얻게 해 주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전하는 동화책 증가추세
몇 년 전과 비교할 때, 어린이 책 지형에 두드러진 변화는 어린이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전하는 책들이 크게 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10년전까지만 해도 그 책을 만든 편집자를 부러워하며 번역 출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생태, 역사, 인문·사회서들이 국내의 글 작가와 그림 작가,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속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보리의 <생태 도감 시리즈>나 사계절의 <생활사 박물관>은 어린이들에게 큰 효용성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어린이 책 수준의 최고치를 가늠하는 지표 역할을 해 주기도 합니다. 역시 책의 종수가 많아지고 선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책을 고르는 매서운 눈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지식·정보책을 고를 때는 책장을 펼쳐 보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목차를 보면 한 권의 흐름을 볼 수 있고, 본문을 살펴보면 구성의 탄탄한 정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역사나 사회, 철학 등을 다루고 있는 인문서의 경우, 서문이나 후기를 통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어린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이 어른 독자들에 비해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힘겹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기나 가치로 볼 때, 완전히 중립적인 인문학이 성립하기 어려운 것만큼, 완전히 중립적인 어린이 인문책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애국주의 입장에서 쓴 역사책이 있는가 하면 계급적 시각을 견지한 어린이 역사책도 있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이야기 해주는 경제책이 있는가 하면 돈의 가치와 경제의 정의를 전하는 경제책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모가 인정할 수 있는 세계관의 책을 자녀에게 권하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닐까요?
생태나 환경 문제를 다루고 있는 어린이 책들에서도 이점은 중요합니다. 어떤 곤충 도감에서는 곤충의 분류 중 한 항목으로 익충과 해충을 구분하고 있고, 다른 곤충 도감에서는 사람의 이해에 따라 곤충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옳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생태 관련 도서를 고를 때에 또 하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시각 자료들입니다.
그림이 되었건 사진이 되었건 어린이 생태 도서에서 시각 자료가 차지하는 역할 비중은 텍스트 이상일 수 있습니다. 예쁘게 그린 그림인지, 멋지게 찍은 사진인지 하는 문제보다는 정확하게 사물을 보여 주고 있는지, 설명하고자 하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지가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집구매는 신중하게 생각해야…권장도서 리스트 등 참고
끝으로 어린이 책을 구매할 때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제안을 드리며 글을 맺겠습니다. 먼저, 홈쇼핑이나 방문 사원을 통해 전집으로 책을 구매하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직접 읽어 보고 권하는 책이 아이에게 좋은 선물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한다면 전집 구매는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책을 골라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장점보다 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단점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전집이 아니라면 서점을 방문하거나,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서 최소한의 정보를 얻으신 후 단행본을 구매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책을 골라 선물하는 일이 양말이나 속옷을 골라 사주는 일과 같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읽고 자녀에게 건네 주는 책은 지식을 선물하는 것일 뿐 아니라 가족 간에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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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는 아이 (한상수 일산 푸른꿈 어린이 도서관 원장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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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서점의 그 많은 책들 속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주위의 정보를 활용하십시오. <어린이 도서 연구회> 같은 단체에서는 매년 권장 도서 리스트를 만들어 배포합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모여 함께 토의하고 상의하여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책들을 권합니다. 원하신다면 자료집을 받아 볼 수도 있고,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그 리스트를 확인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매주 신문 서평란에는 어린이 책에 관한 기사들이 한 면씩 실리게 됩니다. 담당 기자들이나 어린이 책 전문가들의 조언은 유용하고 믿을 만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을 낼 수 없는 분들이라면 어린이를 회원제로 운영되는 북 클럽이나 도서대여 프로그램에 가입시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단체에서는 나름대로 엄선한 도서들을 정기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겨울 방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책 읽는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참 좋은 계절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