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을 넘어: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9)

 

<오만과 편견>의 그 유명한 시작 부분이다. 이어 빙리 씨를 사윗감으로 점찍은 극성스럽고 귀여운 베넷 부인의 활약이 펼쳐진다. 결국 그녀의 소원대로 출중한 미모와 선량한 성격을 자랑하는 큰딸 제인은 빙리 씨의 아내가 된다. 덧붙여, 베넷 부인 입장에서는 까칠한 성격 탓에 가장 골칫거리이지만 베넷 씨 입장에서는 가장 큰 자랑거리인 둘째딸 엘리자베스, 경박한 리디야 등도 모두 결혼에 성공한다.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은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고 호감(혹은 반감)을 갖고 청혼을 거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구혼소설이자 가정소설답게 미시적인 규모로 오밀조밀하게 포착된 세태와 풍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가 도드라진다. 과연 이들 삶의 절체절명의 화두인 결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잠깐 위컴 씨에게 호감을 느꼈던 엘리자베스는 가드너 부인을 앞에 두고 반문한다.

 

근데, 외숙모,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딘가요?”(219)

 

강조하건대 열정과 낭만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 생활의 생리에도 무관심하다. 소설은 오직 결혼에 이르는 길을 지배하는 심리적, 사회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데, 그 메커니즘이 곧 오만과 편견이다. , 성격과 신분-계급과 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한 오만, 또 그것이 낳은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는 과정이 곧 이 소설의 내용이다. 오만이 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긍심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 소설도 끝난다.

 

 

 

 

 

 

 

 

 

 

 

 

 

 

가령,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허영은 진짜 결점인 반면 오만은진정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면 늘 그것을 잘 통제하기 마련이고, 그건 오만이라기보다 자긍심이라고 해야”(84)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성격이 꽁한 편임을 고백하면서 자기한테 한번 잘못 보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장”(84)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실제로 그의 언행은 오만의 극치처럼 보인다. 특히 메리턴의 무도회 이후 베넷 부인도, 엘리자베스도 심한 모욕감에 치를 떤다. 반면 샬럿 루카스는 차분하다.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분이 오만한 게 나한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아.”하고 살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그건 맞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 사람의 오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거야.”(31)

 

오만과 편견은 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상황과 관계의 맥락에 종속되기 쉽다. 그것을 잘 조율한 결과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한다. 전자는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꼭 필요한 명민한 아내를 얻고, 후자는 신중’, 즉 실용적인 가치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중간계급(중산층)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킨다. 한편, 애초부터 오만과는 거리가 멀었던,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은 어떠한가.

 

 

 

 

 

 

 

 

 

 

 

 

 

 

 

 

 

그녀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가 무참히 거절당한 콜린스 씨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177) 더욱이 소설에서 수차례에 걸쳐 강조되거니와 그녀는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는 여자”, 즉 박색이다. 아무리 분별 있고 똑똑해도, 적어도 엘리자베스처럼 그럭저럭 봐줄 만은한 수준의 외모도 타고나지 못했으니 어쩌랴. 샬럿은 자신의 선택을 치졸한 정략결혼쯤으로 보는 엘리자베스의 반응에 예의 그 특유의 담담함으로 응수한다.

 

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해. 무척 놀랍겠지. (중략)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181)

 

대체로 <오만과 편견>은 인간의 속된 욕망과 생활의 논리(짝짓기와 돈!)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훌륭하게 묘파하면서 재기발랄한 위트와 유머, 경쾌한 현실 풍자와 비판마저 곁들인 수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세계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가장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결국 중용타협의 원칙을 좇음으로써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 한데 정작 작가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고 고로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가 남긴 적지 않은 편수의 소설은 거의 다 구혼을 다루고 있다. 사실상 첫 소설인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처럼 되고 싶은 희망을 슬쩍 내비친 그녀가 실은,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못생긴 편이라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 열심히 공부”(38)한 메리에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싸늘한 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경쾌하고 밝은 소설을 골라 봤습니다. 사춘기 때는 썰렁하게 여겼던 소설인데 서른 넘으니 오히려 재미있게 읽히더라고요. 영화도 많지만(특히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 역을 맡은), BBC에서 만든 드라마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에마>(엠마), <맨스필드 파크> 등의 드라마 버전도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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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지식인의 초상

-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이냐,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이냐

- 나쓰메 소세키, <그 후>

 

 

 

 

 

여름비가 사정없이 퍼붓는 날, 한 청초한 여인이 백합을 들고 다이스케의 집으로 들어선다. “향기가 참 좋지요?”라며 그녀는 가까이서 꽃향기를 들이마신다.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다이스케는 꽃을 받아 수반에 꽂는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당신도 그때는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었잖아요?” 그런 적이 있었던가, 다이스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비와 백합 얘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다이스케가 백합을 사온다. 온 집안에 백합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그는 인력거를 타고 빗속을 달려올 미치요를 기다린다.

 

오늘 비로소 자연의 옛 시절로 돌아가는구나.’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안위(安慰)를 온몸에 느꼈다. 왜 좀 더 일찍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왜 자연에 저항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비 속에서, 백합 속에서, 그리고 재현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이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려들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276)

 

사실 여름비와 어우러진 백합 향기처럼 아찔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체이다. 탐미적인 문체 덕분인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간통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형식, 심지어 가장 플라토닉한 형식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그 정도로까지 환상적이라는 것이다. 제법 절친한 사이인 갑과 을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 갑은 을이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자, 비록 그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의협심에 사로잡혀 그들의 결혼을 주선한다. 3년 뒤 을 부부가 다시 도쿄로 돌아왔는데, 아이를 잃은 상처에 덧붙여 당장 생활도 궁핍하다. 을은 갑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려 하고 을의 아내는 그녀대로 갑에게 돈을 꾼다. 그러는 와중에 갑과 그녀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결국, 갑은 가족과 의절하면서까지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그녀를 선택한다. 이것이 다이스케, 히라오카, 미치요를 둘러싼 사랑 놀음의 전말이다. 과연 속된 말로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은 남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생활의 원칙, 도덕과 관습의 불문율을 저토록 깡그리 무시할 수 있을까. 그 후를 읽으며 품게 되는 가장 큰 의문이다.

 

 

 

 

 

 

 

 

 

 

 

 

 

 

 

 

이 소설은 3인칭 시점을 취하고는 있지만 사실 다이스케의 시점에 국한된, 다이스케의 얘기이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아버지와 형의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곧잘 남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서른 살의 귀족 도련님, 이른바 고학력 백수((高等遊民!).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 이런 생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그 나름의 원칙 또한 분명하다. 가령, 먹고 살기 위해 음악 선생 노릇을 하다가 오히려 음악으로부터 멀어진 한 지인을 예로 들며 그는 말한다. “빵과 관련된 경험은 절실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저열한 거지. 빵을 떠나고, 물을 떠난 고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야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지.” 이런 가치관이 졸업 직후 곧장 취업을 하고 가정을 꾸린 히라오카의 반발을 산다.

 

자네는 돈에 궁해 본 적이 없어서 문제야. 생활이 곤란하지 않으니까 일할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요컨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고상할 말만 늘어놓고.”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밉살스럽게 느껴져서 도중에 말을 가로막았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106-107)

 

다이스케는 그 무렵 히라오카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을 사로잡은 생활욕유럽으로부터 밀어닥친 해일로 치부하며 경멸한다. 절과 절 사이, 공장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도 추해 보이고,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역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것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는 다이스케가 유달리 고상한 탓이 아니라 구태여 생활욕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생활이 영위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의 삶 자체가 역설적이다. 그는 사무라이 문화, 즉 전근대적 일본을 부정하지만 동시에 서양의 영향에 침윤된 현재의 일본, 즉 근대화의 환상을 혐오한다. 한데 다이스케의 품위가 유지되는 것은 구세대적 일본이 이룩한 가치 덕분이다(부유한 명문가의 아들이잖은가). 또 그의 탐미적인 삶은 서양, 특히 영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과 반발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어설픈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중성이 메이지 시대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직면했던 딜레마의 핵심이리라. 다이스케는 이 물음을 연애의 범주에서 던진 것이다.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자연은 곧 사랑(불륜)이며 의지는 제도(결혼)이다. 전자, 즉 비와 백합을 택하는 순간 치명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놀고먹는 삶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무슨 수로 입에 풀칠을 할 것인가? 다이스케는 결국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간다. 과연 그 후가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 네이버캐스트

 

-- 나쓰메 소세키의 탐미적인 문학이 체질에 맞지는 않지만,  그 역시 일종의 넘어야 할 산 같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함께 읽으면 더 그런 느낌이 들지요. 어쨌거나 소세키는 소위 시대정신의 육화인지라...

-- 스무 살 넘기면서 10년 이상을 하루에 두 갑쯤은 거뜬히 바닥내는 골초로 살았는데, 그래서 담배 없이 책읽기와 글쓰기가 가능할까 싶었는데, 읽어지고 써지더라고요...-_-;; 저 글이 그 첫 증거였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엄청나게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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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아름다워라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영어를 제외한 네 과목에서 모두 낙제를 하여 퇴학을 당한 후(벌써 네 번째다!) 겪는 23일 동안의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길다고 하면 한없이 길 수 있는 성장이라는 사슬의 한 고리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변호사 아버지에 헐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를 형으로 둔 이 부유층 자제의 불만은 대체 무엇인가. 왜 그는 스스로 문제아, 시쳇말로 루저를 자처하는가. 친구 샐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학교가] 싫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어해. 그뿐만이 아니야. 모든 것이 다 그래. 뉴욕에서 사는 것도 싫고, 택시니, 메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리라고 고함이나 질러대는 운전기사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그러는 멍청이에게 소개되는 일이나, 밖에 잠깐 나가려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일이나, 브룩스에 가서만 바지를 맞추는 놈들, 언제나 사람들은…」 (중략)

자동차는 어떤지 생각해 봐난 목소리를 낮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구. 조금이라도 긁힐까 봐 걱정하지를 않나, 모이기만 하면 1갤런으로 몇 마일이나 달릴 수 있나 하는 얘기들을 하지. 새 차를 사놓고도 금세 새로 나온 차를 갖고 싶어 하고 말이야. 난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아. 관심조차 없지.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잖아. 게다가 말은…」.(175-176)

 

그 나름으로 지적인 대화”(183)를 꿈꾼 콜필드는 상식적인대구만 해주는 샐리에게 괜히 역정을 낸다. 속물적인 가치 추구에 혈안이 돼 있고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중상층의 삶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콜필드에게 마땅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막연한 이상을 찾자면, 태어나서 줄곧 뉴욕과 그 근처에 산 소년답게 센트럴파크 공원 연못의 오리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좀 더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229-230)

 

콜필드가 지키고 싶은, 또한 붙잡아주고싶은 것은 이 귀여운 소녀 피비가 보여주는 때 묻지 않은, 해맑은 순수의 세계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저 멀리 서부로 가서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돈을 모아 숲 가까이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오빠를 만나러 나온 피비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서부행의 꿈은 좌절된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콜필드는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같은 장황한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밝힌다. 실제로 <호밀밭의 파수꾼>19세기 유럽문학이 사랑한 엄숙하고 진지한 산문 서사시와는 거리가 멀다. 발표 당시에는 금서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 이 불량한, 아니 껄렁껄렁한책이 오늘날에는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을 능가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청춘의 특권이기도 한 방황과 일탈, 영원히 호밀밭에 머물고 싶은 꿈을 절묘하게 포착한 덕분이리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 암시된 건강한 실용주의이다. 이제 한 살 더 먹은 콜필드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퇴원 후 9월 학기에는 또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 서부에서의 은둔 생활은커녕 동부의 중심을 벗어나기도 힘들지 않을까.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48)

 

앤톨리니 선생이 인용하는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스테겔(슈테겔)의 말을 빌자면 홀든 콜필드는 이제 막 성숙한 인간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성장의 한 고리가 완성된 만큼 미성숙한 인간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마땅하리라.

 

-- 네이버캐스트

 

 

-- 어릴 때 참 감흥없이 읽은 책인데, 머릿속에 남아있는 인상과 저 작품의 인기 사이의 괴리를 메워보려고 다시 읽어봤더랬지요. (파인딩 포레스트> 같은 영화에서도 샐린저가 거의 신화적 인물처럼 나오는데요.) 그 결론이란... -_-;; 아무래도 성장소설의 지존(!)은 헤세의 소설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 다시 읽을, 그래서 그의 소설에 대해 쓸 기회가 생기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 교묘하게 비켜가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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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공포증혹은 진부함의 공포

 

 

체호프의 단편 공포(Страх: рассказ моего приятеля,1892)에서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광장 공포증(боязнь пространства)과도 유사한 삶 공포증(боязнь жизни)을 호소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가 정확히 무엇이 그렇게 무섭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전부 무서워요. 나는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고(не глубокий) 사후 세계라든가 인류의 운명이라든가 하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대체로 저 높은 하늘의 문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저 진부함(обыденщина)인데요,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서 몸을 피할 수 없거든요.”(8: 131)

 

실린이 두려워한 진부함은 불륜으로 구체화된다. 그와 친분 관계를 유지해온 는 오래 전부터 그의 아내 마리야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이 애매한 삼각관계는 와 그녀의 밀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흠모해온 여인을 손에 넣은 의 느낌은 불편함과 부담스러움(8: 137)에 가깝다. 한편 실린 쪽에서는 아내와 친구의 불륜을 사실상 그 자리에서 목격했음에도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 이들 부부의 묵직한 권태도, 와 마리야의 심드렁한 불륜도 우리 삶의 한 흐름일 뿐이다. 실린의 말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자신이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양보적인 전제에는 그와 반대되는 자질을 가진 뛰어난 사람의 존재가 상정된다. 만약 진부함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그 출구를 깊이를 가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어떨까.

 

 

 

 

 

 

 

 

 

 

 

 

 

 

 

 

 

 

베짱이(Попрыгунья, 1892)의 여주인공 올가 이바노브나는 예술가를 동경함에도 정작 결혼은 의사와 하게 된다. 결혼식 날에도 남편 드이모프의 단순함과 평범함이 못마땅하고 그 이후에도 예술에 무관심한 남편이 불만스럽다. 그러다 화가 랴보프스키와 연애에 빠지자 로돌프의 유혹에 넘어간 엠마 보바리처럼 그 동안의 설움설욕한다. 보바리 부인의 소설 같은 삶이 올가에게서는 그림 같은 삶으로 실현된 것이다. 고요한 7월의 달밤, 볼가 강의 증기선, 터키옥처럼 짙은 푸른빛 바다, 무엇보다도 기껏해야 생활인에 불과한 남편 대신 진짜 위대한 사람, 천재,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8: 15), 무한한 재능을 타고난 화가와 함께 하는 삶! 그러나 이 대단한 사랑도 시간의 저력 앞에서 환멸을 피하지 못한다.

 

겨울, 남편이 학위논문이 통과되고 강단에 서게 됐음에도 그녀는 완전히 무관심한데 랴보프스키에게 새 애인이 생긴 탓이다. 그 와중에 드이모프가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사망하는데, 전염될까봐 무서워서 아직 단 한 번도 남편의 서재에 가지 않았다고 하느님이 이 순간 자기를 벌할 것만 같”(8: 28)은 그녀의 순진한 죄책감이 실현된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상, 또 올가의 성격적 특수성상 드이모프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깨달음(8: 30)은 무척 자연스럽다.

 

드이모프!” 그녀는 큰소리로 불렀다. “드이모프!”

그녀는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고,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고 싶었다, 인생은 아직도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다고, 그는 드물고 비범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평생 동안 그 앞에서 공경심을 품고 기도하고 성스러운 공포(священный страх)를 느낄 것이라고(8: 31)

 

그러나 올가의 깨달음을 조롱하듯, 문밖의 거실에서는 코로스첼료프가 하녀에게 후처리를 지시한다. 그의 어조는 앞서 올가 앞에서 드이모프의 위대함에 대한 장황한 찬사를 늘어놓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 실무적인 말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올가의 각성이 그녀의 연애만큼이나 찰나적이고 한시적인 것임이 강조되는 듯하다. 이제 와서 남편이 의학사에 남을 위대한 천재였다는 것이(혹은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코로스첼료프가 하녀를 채근하며 하는 말대로 여기에 묻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8: 31)

 

대체로 그녀의 희비극은 그녀라는 존재가 에피고넨(랴보프스키)의 모방, 말하자면 아류의 아류, 패러디의 패러디(‘제곱 패러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베짱이가 수작인 것은 위대한 사람’(великий человек)베짱이’(попрыгунья)의 이분법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엄정한 인과론적 고리(가령 올가가 예감한 인과응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엉성하게 비켜가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교묘하게 핵심을 찔러버리는 미지의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바로 이 비의(秘義)삶 공포증’, ‘진부함의 공포의 진앙이기도 하다.

 

 

 

 

 

 

 

 

 

 

 

 

 

문학 선생(Учитель словесности, 1894)의 주인공 니키친은 사랑하는 마뉴샤를 아내로 맞지만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을 옥죄는 범속함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론 결혼 전에 문학 애호가인 셰발진이 던진 질문(“레싱의 <함부르크 연극론>을 읽어보셨습니까?” 8: 316)에서 시작된, 명색이 문학 선생인데 그런 것도 읽지 않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레싱을 읽고 싶은 마음, 혹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것을 읽지 못하게 하는 속된 현실이 대립각을 세운다. “속물적이고 또 속물적인 것(пошлость и пошлость)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지루하고 한심한 인간들, 스메타나 단지, 우유병, 바퀴벌레들, 바보 같은 여자들속물적인 것보다 더 무섭고 모욕적이고 서글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도망칠 것, 오늘 당장 도망칠 것, 안 그러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8: 332) 니키친의 이 일기로 소설이 끝나기 때문에 이후 그의 행로는 알 수 없다. 레싱과 속물적인 것 사이에 낀 문학 선생 못지않게 더 흥미로운 인물은 지리-역사 선생 입폴리트이다.

 

이 노총각은 교사임에도 전혀 지식인답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불그죽죽한 턱수염, 들창코, 좀 거친 얼굴 등)이며 지리 선생으로서 지도 그리는 것을, 역사 선생으로서 연대를 아는 것을 중시한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수차례 강조하듯, 주로 침묵하거나 아니면 이미 오래 전부터 다들 아는 말만”(8: 318)한다. , 좀처럼 말을 하지 않다가 간혹 내뱉는 말은 무척 식상한 얘기이다. 그의 말을 모두 정리해보자.

 

1) “, 좋은 날씨입니다. 지금은 5월이니까 곧 진짜 여름이 올 겁니다. 여름은 겨울과는 다르지요. 겨울에는 난로를 떼야 하지만, 여름에는 난로가 없어도 따뜻합니다. 여름에는 밤에 창문을 열어놔도 따뜻하지만, 겨울에는 이중창을 해도 춥지요.”(8: 318)

2) “일어나요, 출근해야지요.() 옷을 입고 자면 안 돼요. 그러면 옷이 망가지잖아요. 잠은 침대에 자야지요, 옷을 벗고서”(8: 319)

3) “그 애(마뉴샤)는 김나지움 다닐 때 우리 반이었어요. 나는 그 애를 알아요. 지리 공부는 무난했지만, 역사는 나빴어요. 수업 시간에는 산만했고요.”(8: 323.)

4) “결혼은 진지한 일보(шаг)입니다.() 모든 것을 곰곰 생각하고 잘 따져봐야지, 그냥은 안 돼요. 현명하게 굴다가 손해 볼 일은 없는데, 사람이 독신 생활을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결혼에 임해서는 특히 더 그렇지요.”(8: 323)

5) “지금까지 당신은 결혼한 몸이 아니어서 혼자 살았지만, 이제는 결혼한 몸이니 둘이 살게 될 겁니다.”(8: 325)

6)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8: 326)

7) “볼가 강은 카스피 해로 흘러갑니다말은 귀리와 건초를 먹습니다” (8: 328)

 

1)은 날씨가 좋다는 니키친의 말에 대한 응수이며 2)는 문제의 레싱을 읽다가 옷을 입은 채 소파에서 잠든 니키친을 깨우며 하는 말이다. 3)은 마뉴샤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말인데, 다소 무례한 동문서답처럼 들린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4)는 당신은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니키친의 질문에 상당히 심사숙고해서 내놓은 대답이다. 5)는 니치킨의 결혼식 날 입폴리트 나름의 감동을 담아 건네는 축하 인사이며 6)은 흰 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는 그가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먹는 니키친을 보며 하는 말이다. 끝으로 7)은 임종 직전에 내뱉는 말이지만 화자의 암시대로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도 담고 있지 않다. 이렇듯 입폴리트의 말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그 나름의 진정성을 담고 있음에도 기계적인,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동어반복에 가까워 한 학자의 지적대로 정녕 부조리극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소한 만큼이나 철학적인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의 말이 지녔던(혹은 그러고자 했던) 의미와 무게, 그 지나친 있음에 대해 없음으로 맞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매일 학생들이 그린 지도를 고쳐주고 연대기를 작성하는 하는 것이, 숙고 끝에 흔한 말만 내놓는 것이 그토록 한심한가!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도 뭔가 깊은 생각을 한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대단히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필요악과 같은 환상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입폴리트의 동어반복과 같은 삶이 니키친보다 더 열등할 것은, 적어도 딱히 더 지루할 것은 없다는 점이다.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는 사실(입폴리트는 단독(丹毒: рожа головы)으로 죽는다)에 저 진부함의 공포와 비극이 환기될 뿐이다.

 

대체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체호프가 속물성 앞에서 느낀 우수는 고골의 경우보다 더 암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골에게 그것은 이 인간의 원초적인 작음’, 그 옹색함에 근거한 것으로서 더 높은 이상과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극복해야 하는 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영웅이 사라지고 작은 인간(위대한) 인간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체호프의 세계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저 진부함의 동의어가 된다. 그 때문인지 속물성을 그려 보이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우수와 나란히 씁쓸한 자기 연민과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

 

 

 

-- 논문 <체호프의 우수: 지루한 이야기(1889)검은 수사」(1894)를 중심으로>의 1장. 

 

원래 체호프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저 대목, 즉 체호프식 속물성의 소설화 방식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논의의 편의상(-_-;;) 지식인 소설, 관념 소설을 집중 분석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여하튼 위에서 언급한 세 소설 중, 아니, 여러 인물 중 가장 인상적인 놈은 입폴리트입니다...^^;;  이 인물의 존재를 상기시켜준 건 석영중, <뇌를 훔친 소설가>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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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예술, 사랑에 관한 영화-소설

-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26세의 좌익 혁명가이자 정치범 발렌틴 아레기 파스, 37세의 동성연애자이자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자 루이스 알베르토 몰리나. 무료함을 달래려고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자기가 본 영화 얘기를 들려준다. 갑갑한 감방 안에서 여섯 편의 영화가 재생되는 동안 두 남자는 연인이 된다. 실제로 문제의 영화들은 세부적인 차이(로맨스, 호러, 판타지, 정치선전물 등)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서 사랑에 대한 몰리나의 몽상을 담고 있다.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31)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여자로 여겨 평생 동안 한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싶어”(65)라고 말하는 남자. 이렇게 부르주아적인’, 심지어 퇴폐적인데다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몰리나를 발렌틴은 경멸한다. 반면, 대의명분과 사상에 투신한 혁명가, 정치범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난 현재의 순간을 위해 살 수는 없어. 정치투쟁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야. 그래, 정치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알아듣겠지? 내가 이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것도 모두네가 만일 고문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하지만 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어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

아니야, 넌 그걸 상상할 수 없어내가 이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은계획이 있기 때문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혁명이고, 감각적인 기쁨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이야.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아니 아마도 내 일생 동안 계속될 투쟁을 하면서 감각적인 기쁨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야. 알아듣지? 그런 기쁨은 사실상 내게는 부차적이기 때문이야. 위대한 기쁨은 다른 것이야. 가령, 내가 가장 고귀한 명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그러니까 바로 내가 가진 모든 사상이…」

네 사상이 무엇인데?

내 이상은한마디로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야. 난 그 사상의 기쁨을 어느 곳에서나 느낄 수 있어. 이곳 감방에서도 느낄 수 있고, 심지어는 고문 받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야. 이것이 나의 힘이야.(43)

 

하지만 영화-소설이 진척될수록 일종의 반전이 보인다. 가령 설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지독한 복통도 감내하던 발렌틴이 마르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혁명과 이데올로기에 투신한 자가 부르주아 여성을 사랑하다니, 그는 스스로를 반동분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계급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상류계급만 좋아하는 이 세상의 개만도 못한 놈들처럼 말이야.”(194-195) 여기서 그는 사랑과 정치가 가장 노골적으로 결합된 나치 영화(두 번째 영화) 속의 여가수 레니와 은근히 겹쳐진다. 좀비 영화(다섯 번째 영화)에 반응하며 마르타를 떠올리는 발렌틴 역시 소명의식에 불타는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다.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졌어. 당신만이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야당신도 깨끗하고 편안한 가정에서 자랐고, 인생을 즐겨왔기 때문이야.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순교자가 되고 싶진 않아. 마르타, 난 순교자가 된다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난 훌륭한 순교자가 될 수 없어. 지금 이 순간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중략) 마르타난 아프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야. 내가 죽을지도 모르고모든 것이 여기서 끝날지 모르며, 내 인생이 이 조그만 감방 안에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너무 겁나. 이런 것은 너무 불공평해. 난 항상 관대했고, 그 누구도 착취한 적도 없으며세상을 이해하게 된 후부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착취에 대항해 투쟁해 왔어그리고 난 모든 종교를 욕했어. 종교가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어 평등을 위해 투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나는 신의정의가 있기를 갈구해 왔어. 난 부디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어몰리나, 신을 하느님으로 바꿔줘. 부탁이야…」(236-237)

 

소설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발렌틴은 더욱더 감상에 젖는 반면 몰리나는 남성적인 담대함을 보여준다. 가석방 직전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을 무섭다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고, 자신의 목숨이 극도로 위협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동지들과의 접선을 시도한다. 이렇듯 몰리나는 수감 중에는 이야기 사슬을 엮어감으로써 친구-연인의 목숨을 연장해주고(적어도 고문의 순간을 늦추어주고) 석방 이후에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의사가 몰래 놓아준 모르핀을 맞고 환각 상태에 빠진 발렌틴의 의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중략) 그럼 내가 섬에서 잠을 깨면 넌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영원히 있고 싶지 않아요?>, 아니, 이젠 됐어, 충분히 쉬었어, 음식도 모두 먹고 한잠 푹 자고 나니 다시 기운이 솟아나, 내 동지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날 기다리고 있어, <당신 동지들 이름, 그 말이 바로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에요>, 마르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이 말만은 당신한테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것을 물어볼지 몰라 두려웠고, 그러면 당신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어, <아니에요,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369)

 

197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작가가 쓴 <거미여인의 키스>는 각종 금기와 억압, 나아가 각종 혁명(성 혁명, 정치 혁명, 미학 혁명)에 관한 소설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양성애든 사랑의 논리와 이상은 비슷하다. ‘짧지만 행복한 꿈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

 

-- 네이버캐스트

 

 

 

 

 

 

 

-- 저 글을 쓸 때 처음 읽어본 책입니다. 중남미 작가는 거의 읽은 적이 없네요. 그나마 보르헤스나 마르께스 정도를 읽었지만, 난해하다는(혹은 지루하다?) 느낌을 받은 듯합니다.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을 때 영화도 함께 봤는데요, 몰리나 역을 맡은 윌리엄 허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의 다른 작품도 함께 읽어보고 싶은데, 라틴아메리카도 특색이 강한 것 같아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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