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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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분노(憤怒);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관련 어휘로는 노발대발, 노여움, 격분, 진노, 노기, 울화, 의분 등이 나열되어 있는 사전적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얼핏 사전적으로 단순하게 '분노' 에 대해서 정의하게 되면 발산적인 의미 즉 내가 아닌 상대가 있어 그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능동태적인 의미로 다가오죠. 실상 흔히들 우리가 겪는 부분 역시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드러내는 감정으로 이해되는게 맞을지 모릅니다. '분노' 라는 감정은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한 '화' 나 '열받음' 수준이 아닌 상당한 그레이드를 갖고 있는 초 극상의 감정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초극상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도록 성문화된 법률의 형태나 불문화된 도덕적 관념의 자제심을 끌어들어 초극상의 단계에서 하나 둘씩 저점으로 그레이드를 낮추고 있죠.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우리에게 이러한 등급조절은 당연시 되는 부분이고요. 그렇지만 이러한 조절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고 일명하여 '분노조절장애' 라는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이러한 조절장애는 굳이 '분노' 라는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서설이 길어졌는데요 『원숭이와 게의 전쟁』,『악인』등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분노> 라는 작품을 대면하면서 새삼 '분노' 라는 감정과 그에 얽힌 여러가지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네요. 작품의 제목만 놓고 봐도 많은 상념들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이번 작품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특히나 작품의 제목이 넌즈시 던져주는 의미만으로도 이번 작품은 왠지 핏빛 낭자하고 속도감이 가득한 스릴러장르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증폭시키죠. 작품은 초반부터 의문의 부부 살인사건 그것도 상당히 충격적인 그러니까 작품 제목과 잘 어울리는 사건을 시발점으로 출발합니다. 여기에 아예 초장에 범인을 공개하고 추적에 들어가는 구조를 가진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의 형태를 답습합니다. 무엇보다 사건 현장에 피해자들의 피로 쓰여진 '분노' 라는 두 글자가 일파만파 퍼져 가면서 다양한 범행동기를 추측하는 연결고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말이죠 초장의 강력한 임펙트와는 사뭇 다르게 내러티브가 상당히 요상한 방향으로 진행을 하죠. 성소수자(게이), 철딱서니 없는 엄마와 세상의 풍파를 초연한 딸 그리고 애지중지한던 딸에게 다가서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그 딸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 여기에서 독자들은 상당한 당혹감에 휩싸이게 되는데요 초반의 설정이나 서술과는 180도 다른 방향의 전개와 각각의 인간군상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인간관계가 서로 맞지 않는 퍼즐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대면하게 되는데요. 갑자기 범죄 스릴러에서 인간본연의 심성을 다루는 휴면드라마계열로 급반전하게 되죠. 물론 범인의 추적이라는 추리스릴러의 일환으로 세 남자중에 하나가 범인일 수 밖에 없을 거라는 뻔하디 뻔한 설정을 인지하면서도 작가가 설정해 놓은 덪에 걸려서 허우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진범의 범행동기에 대한 다소 이야미스적인 면도 보이기는 하지만 큰 줄기의 내러티브에서 범인의 역활은 내면의 배신을 촉발하는 촉매제 정도의 역활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릴듯 하네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범인의 색출은 금새 잊어 버리고 세남자 각각이 가지고 있는 포지션에 매료되어 버린다는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여기에 등장하는 범죄 용의자 3명의 삶과 그들과 엮여 있는 사람들의 삶이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는 사회적 소수이자 약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번 작품 역시 요시다 슈이치의 근본적인 사유의 틀에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노' 라는 감정의 이해에서 새삼 새로운 발견을 하게된다는 점이 돋보이는데요. 서두에서 설명했지만 '분노' 라는 감정은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전달되고 표출되는 감정으로 인지되는게 일반적인 현상인데요. 이번 작품을 통해서 '분노' 라는 감정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속에 숨어있는 내면의 어둠에 대한 감정의 형태라는 점에 절로 공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이 산산히 조각나는 시점에서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믿지 못하는 감정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을 향해 울부짖는 형태가 바로 '분노' 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그런 감정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동 빈곤층, 성적 소수자, 오키나와 미군 문제, 불법 금융의 패혜등 현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사회적인 이슈를 골고루 다루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적인 이슈들을 마치 정치사회학적인 주장을 통해서 어필하기보다는 '분노' 로 대표되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성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무적인 기획 의도였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가장 저변에 깔려있는 우리의 본성과 그 본성에 관한 무거운 담론을 딱딱한 순수문학의 형태가 아닌 부담없이 소화할 수 있는 엔터테이먼트적인 장르로 끌어간다는 점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필력을 느낄수도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은 '분노', '배신', '믿음', '상처' 등 인간의 깊숙한 내면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들어내면서도 전혀 삭막한 느낌을 주지않는 따뜻한 인간적인 배려의 시선이 가득한 작품이라고 할까요. 물론 작가인 요시다 슈이치는 온전한 감정의 이해등 활자화적이고 정형적인 그런 배려의 시선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본연의 깊숙한 심성에 대해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단지 그 불완전성을 민낮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인을 믿고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갈수 있는 시발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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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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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명의 작품이 세상에 나올때 마다 극명한 반응이 일어나죠. 머리속에 먹물이 어느 정도 들어앉아 있다고 자부하는 부류에서는 그저 국수국우주의적 성향이 넘치는 일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내 소설이다 즉 팩트(역사적 사실)와 무관한 픽션이라고 치부합니다. 자신들이 여지껏 그러니까 조선사편수위원이자 한국사학계의 대부인 이병도의 학설을 그대로 전수받고 이를 신앙처럼 믿고 있으면 앞으로도 이 신앙을 버릴마음이 티끌만큼 없는 이들에게 더욱 더 김진명의 작품들은 그저 소설에 불과하죠. 그것도 일반 어리석은 대중들의 주머니속을 털기위한 흥미본연의 삼류소설정도밖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게 아마도 작금의 현실일 것입니다. 물론 김진명의 작품들이 소설이 아니라고 부인할려고 하는 항변이나 그 어떠한 바램 역시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김진명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일편의 팩트적인 (정말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요소들을 보고 있자면 하나의 궁금점이 절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 작가는 그런 역사적 팩트들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 그리고 작가가 주장하는 역사적 팩트들(물론 확대된 사유까지 포함해서요)과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의 접점은 어떠한 괴리를 갖고 있을까? 뭐 이런 생각 한번쯤은 갖게 되죠. 극히 정상적인 교육을 받아온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김진명이라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던지는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저버리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이번 작품 <신의 죽음> 은 기존 그의 작품과 또 다른 역사적 팩트를 터치하면서 시작합니다. 김일성의 죽음과 한국사의 왜곡이라는 뜬금없는 소재에서 출발하는데요. 현존하지 않는 "현무첩" 과 그 속에 담겨져있는 "臣 鎭 使 殘 商 三 拾 敎 邦 言" - 신 진은 백제상인 30명을 시켜 우리 말을 가르치게 했나이다 - 키워드 그리고 평안도 덕흥리에 발굴된 안악고분3호의 묘주인 00 鎭 과의 연계 더 확장되어서 고구려의 최대 강역이 유주 즉 지금의 베이징까지 였다는 확대된 논거에 이르기까지 그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을 추리스릴러의 기법으로 끌어가고 있는 작품인데요. 사유의 스케일이 상당히 크게 다가오는 작품이죠. 중국 그리고 북한과 한국 지정학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민낮을 터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매번 느끼지는 김진명의 작품을 읽을때마다 감출수 없는 울분과 더불어 우리는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문을 던지게 하죠. 그 만큼 이번 작품 역시 우리의 안일한 역사적 사고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작품입니다. 왜 무엇때문에 라는 의문점을 자꾸 제시하면서 내러티브는 종국에 가서 그 어떠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고 작품을 끌어 가는 주인공 역시 작품의 성질과는 사뭇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는 기법 역시 이번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이 점 역시 김진명의 교묘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역사의 인식이라는 자체가 특정인에 의해서 이루어질 경우 수 많은 오류와 왜곡을 낳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역사와 무관한 주인공을 설정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에서 돋보이는 설정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인데요. 그 동안 우리는 남북이라는 대치상황에서 특히 친북, 종북, 반미, 친중 등 묘한 입장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아노미 상태지만 이번 작품은 역사라는 큰 명제에서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사고 보다는 민족 혼이라는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왜곡에 맞서 남북의 이해가치를 벗어나 민족 혼의 재정립이라는 차원에서 대승적인 협력과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을 일깨우네요.    


          다시한번 거론하지만 분명히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픽션입니다. 엄밀히 분류하자면 역사추리소설 정도라고 할까요. 그런데 말이죠 이상하리 만큼 일반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독자들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느낌 뭐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단순하게 픽션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북한학계를 제외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일본은 이상하리 만큼 우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의 발굴이나 그 존재의 평가에 대해서 꼬박 꼬박 출석하여 훈수를 두고 있죠) 의 강단학계에서는 안악고분의 묘주를 중국의 망명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학계의 고구려인이라는 소수설과는 정반대의 학설인데요, 이점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까지 북한과의 관계성등을 고려하여 판단한 학설은 아니겠지만 왠지 앞뒤가 서로 맞지않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문제는 우리의 역사와 직결되는 연결고리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즉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일부분이라고 봐도 타당할 것이고 이런 역사적 왜곡에 우리의 학계 나아가 정치권까지 더불어 시인하는 형국에서 일반 대중 독자들이 갈망하는 진실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답답할 따름이죠. 그나마 김진명같은 작가나 일부 재야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반증의 자료들이 하나 둘씩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지만 상당히 미진한 여파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김진명은 이번 작품속에 "역사 왜곡은 항상 전쟁을 불러온다" 는 것을 일본의 조선 감정등의 예를 들어 보이면서 진정한 역사의 바로세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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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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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작품을 대면하면 할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가입니다. 특히나 작품 소재에 대한 컨텍이나 소재를 활성화하는 방식과 스토리에 접목시키는 봉합 스킬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작가이기도 하죠. 노벨문학상을 비롯한 세계유수의 명망높은 작품상을 수상하거나 심지어 국내에서 수여하는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도 없는 작가이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그 어떠한 작가의 작품들 보다 한국인 독자들에겐 가슴 깊은 울림을 주는 작가라는 점이죠. 매번 출간하는 작품들이 서점가의 베스트코너 상단에 자리매김 할 정도로 넓은 독자층과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왠만한 강단역사학자들보다 풍부한 역사적 지식과 그 팩트를 그냥 넘기는 일이 없는 타고난 이시대의 이야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입니다. 바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의 김진명 작가인데요. 그 동안 수 많은 베스트셀러와 스태디셀러의 주인공으로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화두를 던져주는 작가이죠. 이번에는 漢字와 그를 둘러싼 비밀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바로 <글자 전쟁> 이라는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흥미와 위안 그리고 생각 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자(漢字)" 네이버 국어사전을 보게되면 명사로서"중국에서 만들어 오늘날에도 쓰고 있는 문자. 은허에서 출토된 기원전 15세기경의 갑골 문자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현재 알려져 있는 글자 수는 약5만에 이르는데 실제로 쓰이는 것은 5,000자 정도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자는 당연히 중국 글자라는 인식에 대한 그 어떠한 저항감도 없이 받아들여 지고 있는 뜻이라는 거죠. 즉 한글을 일본에서 먼저 만들었다고 하는 비현실성과 일맥상통할 정도의 범확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말이죠 한자가 정말 만약에 조금 더 보태어서 혹시라도 중국애들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면... 한번쯤을 상상해 볼 가치가 있는 질문이 될지 모르겠지만 김진명은 바로 이 한자라는 소재를 마음먹고 작품의 기본 틀로 제단해 나갑니다. 바로 이번 작품 기저의 패러다임을 담당하고 있는 발상인데요. 독자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불러올 만한 스토리를 펼쳐나갑니다.   


          뭐 요즘 젊은 세대들은 모르겟지만 486세대 이상이라면 한자에 대한 한두가지의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입니다. 국어에 영어 그리고 제2외국어 여기에 한자까지 필수과목으로 대학입학시험을 치른 세대라면 더욱 더 한자에 대한 남모를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한자 몰라도 크게 문제될것이 없는 시대이지만(오히려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라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강하게 느껴오겠지만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의 제하나 기사속엔 어김없이 이놈의 한자가 등장했던 시절이 있엇습니다. 그래서 한자 제대로 모르면 신문 읽는데도 지장이 있었고 대학 강단에서 왠만한 인문수업에는 반 이상은 한자가 필서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자는 우리에게는 친숙한 글자이면서도 중국 특히 유교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인해 다가가기 어려운 글자이기도 했던 시절들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자라 하면 당연히 그러니까 1+1=2 라는 불변의 사안처럼 한자 = 중국 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각인되어 있고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들 역시 이에 대한 그 어떠한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죠. 행여 이런 불변의 진리에 실은 한자가 중국 글자가 아니라 한국 즉 동이족이 만든 글자라는 소릴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설쓰고 있네라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그런 소설 같은 이야기가 정말 소설이라는 작품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김진명이라는 작가의 손에서 말이죠.


          이러한 전제조건적인 요소만으로도 이번 <글자 전쟁> 이라는 작품은 본론에 들어가기전부터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김진명이라는 작가의 작품이라 더욱더 그 내용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글과 세종대왕 뭐 이런 전제조건에서 한글의 탄생비화을 담은 작품이라면 대체로 독자들에게는 바로 그 필이 올텐데요. 느닷없이 한자와 한국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서부터 왠지 이번 작품은 심상치 않는 포스를 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기에 정말 또 하나의 뜬금없는 설정이 등장하면서 뜨악하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한자까지는 좋다 근데 돈에 눈먼 군수무기 로비스트가 주연으로 등장하면서 이번 작품은 독자들에게 모호한 상상력을 만들게 합니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된 트릭 같은데요. 한자와 한국이라는 조합과 군수무기 로비스트와 글자라는 조합을 의도적으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게 하는 구도로 진행했다는 것인데요. 작품을 읽어나가는 중에 결국 글자라는 자체가 하나의 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왜 군수무기 로비스트가 주연으로 전면에 배치되었을까라는 의구심을 해소하게 됩니다. 여기에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중 삼중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스트럭쳐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은 한자의 기원과 그 한자를 사용하고 만들었던 동이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냥 한자라는 글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왠지 서운한 느낌을 줄 정도로 한정된 범위의 스토리 진행으로 마감될 수 있었을텐데 여기에 작가는 홍산문화, 은나라와 주나라, 심지어 공자와 사마천까지 끌어들이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스토리로 단번에 내러티브의  깊이와 폭을 확장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역시 김진명이다라는 느낌, 김진명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죠. 그동안 김진명만큼 우리의 역사 그리고 중국와 일본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된 한국고대사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표출한 작가를 찾기 힘들것 입니다. 강단 역사학회에서 스스로 부정하는 한국 고대사를 일개 작가가 이렇게 끈질기게 의구심을 제안하고 그 대안들을 대중에게 어필한다는 자체에서 부터 뭔가 우리사회 조직의 잘못된 점을 보여주는 민낮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거죠. 작품전반에 대한 문학성이나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먹먹한 아우라를 눈을 씻고 찾아볼 수는 없지만(굳이 김진명의 작품을 통해서 그런 고차원적인(?) 카타르시스를 찾고자 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낫죠)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가슴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름아닌 얄팍하고 알량한 민족 자긍심이라는 것인데요. 비단 작금의 역사적 평가와 아쉬운점들은 수도 없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물망속으로 빠져 나갔지만 정말 한민족의 자긍심이라는 하나만은 아직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는 점이죠. 그 구심점에 김진명과 그의 작품들이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이들은 정말 소설을 쓴다는 표현을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작가마저 주변에 없었다면 우리의 고대사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상당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변모했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김진명의 여타 작품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스피드와 작품의 소재에 대한 정당성 부여로 인해 마치 팩트로 인지하게 하는 스토리의 전개가 이번 작품에서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고요, 결말부분에 커튼콜처럼 등장하는 반전등이 잘 어우러져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작품입니다. 상당히 국수적이고 극단적 우익 같은 작가로 매도되기도 하지만 김진명 작가의 작품 색깔이나 그가 표방하는 사고의 함의등은 결코 국수주의적 애국관이라 평가할 수는 없는 부분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단 한번이라도 취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 토로라고 보는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만큼 우리는 우리의 역사 판단을 타의적, 수동적으로 제단해온 습관으로 인해 정작 한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갈려고 해도 수 많은 제약들이 많고 그러한 제약들로 인해 결국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죠. 이런면에서 전 개인적으로 김진명 같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통해서 그 한발자국의 역활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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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이재익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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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과 <곡성> 은 실존하는 지명을 배경이자 영화의 제목으로 선택하여 호응을 받은 작품들이죠. 물론 그 내러티브나 작가 혹은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부합했기에 가능하겠지만요. 단순하게 겉으로만 보더라고 지명을 타이틀로 내세우는 기법은 일반대중에게는 친숙하면서도 왠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죠. 단순하게 일반인들의 귀에 익은 장소이자 대충의 상상력까지 밑바탕에 그리고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재익의 신작 <영등포> 라는 작품 역시 영등포라는 실존하고 익숙한 장소를 그 제목으로 채택했고 스토리의 장소적인 배경 역시 영등포로 확정해서 왠지 독자들로 하여금 손길을 가게 하는 유혹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겟네요. 영등포하면 다양한 독자층에서 다양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테헤란로? 삼성동? 강남역? 홍대? 뭐 이런식의 제목이었다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독자들의 머리속을 재단하는 일맥상통하는 이미지가 그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겠죠. 그러면에서 영등포라는 지명이 독자들에게 풍기는 뉘양스는 연령층 및 남녀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됩니다. 이말은 작가의 이번 작품이 상당한 주목성을 끌 소지가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먼저 영등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과연 무엇일까? 라는 반문을 하게 되는데요.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습적 정체구간, 지옥철을 방불케하는 부적거리는 인파, 경방필 백화점뒤쪽의 집창촌, 노숙자들의 활보...  뭐 우선 이런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대상들은 아마도 중년의 남성들일 것이고 타임스퀘어라는 대형쇼핑몰, 번화한 지하상가, 민자역사와 광장등을 떠올리면 아마도 청춘층일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등포하는 이미지는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에 있어 다양한 이미지상을 재현하고 있는거죠. 솔직히 이런 의미에서 저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은 어느 정도는 먹고 들어가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만큼 제목만으로도 상당한 흥미를 유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이재익이라는 다소 퍼뜩 뇌리속에 떠오르지 않는 작가의 작품이라 더욱 더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뭐 서론이 길어지게 되었지만 이런 개념 정리가 있어야 이번 작품의 참맛을 느끼지 않을까 싶네요.


          <영등포> 는 그야말로 지금의 중년남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의 표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자 장소적 메타포라고 해야할 듯 합니다. 영등포 뒷골목의 집장촌을 배경으로 세칭 아가씨, 이모, 삼촌, 오빠라는 특수한 인물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는 범죄 스릴러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인신매매로 인해 자신의 아내를 읽어버린 한 남성의 치밀하고 처절한 복수극과 그 복수극의 뜻하지 않는 희생자의 삶 그리고 이 사건을 풀어가는 형사의 삶을 큰 그림으로 잡고 있는 어찌 보면 참으로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스릴러물 형태를 띠고 있는게 사실이지만 영등포라는 지명과 집장촌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서로 맞물리면서 스릴러물에서 살짝 변질된 사회비판소설쪽으로 흐른다는 것이죠. 여기에 영등포 뒷골목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구조가 우리의 개발지향주의 경제발전과 오버랩됨으로써 오만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정의, 사랑, 배신 뭐 이런 잡다한 상념들 특히 안 좋은 쪽의 기억들을 야금 야금 끄집어 내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상당히 속도감이 높은 작품으로 독자들의 눈을 쉽게 사로잡는 마력이 있는것 같습니다. 작가가 웹소설쪽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정제된 표현과 더불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행간의 여백등이 상당한 끌림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고요. 무엇보다 핏빛이 진동하는 아니 낭자해야만 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것 같으면서 홍콩 느와르 같은 냄새도 풍기고 여기에 로맨스도 살짝 가미되면서 독자들을 흡입하는 묘한 매력이 있네요. 물론 여기에 성매매와 더불어 이런 환경을 만들어 냈던 시대적인 모순들과 그리고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심층적으로 대두되면서 독자들의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하기도 하고 민낮을 들어내는 어쩡쩡한 도덕적 부끄러움도 살짝 터치한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터치가 강력한 임펙트를 가지고 억지로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은 중도에 손을 뗄 확률이 높았을법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터치감을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치환해 버리는 기막힌 신의 한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바로 "아가씨, 이모, 삼촌, 오빠" 라는 통칭이 의미하는 사회구조적 계층을 다룬다는 점에서 미시적인 구조와 거시적인 구조의 절묘한 결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먹이사슬의 최상층과 최하층을 대변하는 듯한 뉘양스의 집장촌 호칭들이 왠지 씁쓸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모르게 소름돋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구도상 스피드감을 제법 느끼게 하면서도 작품속에서 표방하고자하는 담론은 상당한 무게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독자층에 따라 영등포라는 지명이 전달해주는 아우라 역시 각양각색으로 다가오겟지만 "아가씨, 이모, 삼촌, 오빠" 라는 호칭이 던져주는 무게감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는 생각이 짙게 들게 하는 작품입니다. 군더더기없는 내러티브의 진행과 영화 <살인의 추억> 을 연상케 하는 복선들이 흥미롭게 다가온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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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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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의 독보적인 대가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사라진 왕국의 성> 을 대면했습니다. 아마도 미야베 미유키는 국내 독자들층에 그것도 마니아층이라는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몇몇 안되는 해외작가중에 한명이자 그녀의 작품을 대면할때 마다 작품속에 빠져드는 이유가 바로 탁월한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작품 하나 하나 범접하기 힘들만큼의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번 <사라진 왕국의 성> 역시 상당히 흥미진지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또 다른 미야베 월드작품 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회파추리스릴러의 거목답게 그동안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스릴러라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효능보다 오히려 인간 내면의 본성을 뒤돌아보게하는 역활을 제시하면서 독자들 스스로의 감정정화를 불러일으킨 묘한 매력을 던져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만큼 미미여사의 작품세계는 유니크하면서도 보편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작품들이었죠. 미미여사의 많은 작품을 대면하지 못했지만 이번 작품은 그동안의 작품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큰 방향성에서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고, 그렇다고 SF계열로 보기에는 나사못이 하나 빠진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인데요. 뭐 저 나름 명명해보면 레트로계열의 SF라고 해야할까 싶네요. 그림과 그 그림에 아바타를 삽입해서 현세계에서 그림속의 세계와 접속한다는 아이디어가 왠지 시공간을 초월하는 타임머신 스토리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하니까요. 더욱이 과학적인 일체의 언급도 없으면서 왠지 그럴만한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어쩌면 유년시절 한번쯤은 스토리를 현실화 시켯다는 점에서 도입부부터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군더더기없이 바로 저쪽 세계로 점프하는 오가키 신의 첫모험부터 또 다마미라는 여행의 동반자와 그림속세계에서 우연하게 마주치는 이쪽 사람 파쿠씨와의 만남등 미미여사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대한 일체의 과학적 시나리오는 제공하고 있지않지만 왠지 독자들은 독자들 나름대로 자신만의 과학적 논거를 들이대면서 스스로가 그림속세계와 현실속 세계의 연결통로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는 점이 전형적인 레트로계열의 SF를 보는 느낌을 풍긴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베는 자신의 전가의 보도인 사회성 특히 인간내면의 심성을 이번 작품속에서도 여전히 녹아내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처해진 상황 상황에 따라는서는 한번쯤으로 끝나지 않고 매번) 품었을법한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과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돌릴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보다는 나아지겠지라는 일종의 망상들을 아주 루틴하면서도 현실감있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미야베 미유키라는 생각을 갖게 하죠. 왠지 그럴수있겠다가 아니라 그럴수있다라는 느낌을 던져주면서 독자들을 작품속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인데요. 마치 내러티브속의 고성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첨병의 역활을 한다고 봐야하겠습니다. 하지만 신의 한수랄까 이번작품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레트로적인 SF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통의 상상의 세계라는 스트럭쳐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현실세계를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아닌 희망적인 요소를 보여주지만 결국 세계를 바꾸거나 인생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는 다소 실망스럽지만 뻔한 답에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러한 실망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작품속의 주인공들이나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독작들에게 "사람이 변할수 있다" 라는 파토스를 전달해주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작품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네요. 공통의 공상이던 혼자만의 상상이던 일련의 이러한 생각들이 자신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되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다시한번 바라보게 되면서 세계나 인생을 바꾸는게 아니라 내 자신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수동적이고 과거형인 내 자신을 능동적인 미래지향적인 자신으로는 충분히 변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전반적으로 SF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인간 본성의 심연을 자극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평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가지 이질적인 요소를 기막히게 버물리면서 작품의 내러티브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하죠. 만에 하나 이 두가지 요소중 어느 일방에 무게감을 두엇다면 상당히 지루하거나 그저그런 작품으로 전락했을법하지만 미야베라는 신의 한수에 의해서 매력있는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에 등장인물들의 내면적인 심리묘사가 그림의 세계라는 허상의 세계와 하모니를 이루고 있어 왠지 그럴 가능성이 높겠다고 믿게하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는것 같기도 하네요. 신과 푸코씨의 독특한 캐릭터가 한없이 하방직하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반전시켜주는 역활도 흥미롭게 다가오네요. 작품의 실질적인 메세지는 상당한 무게감을 갖고 있지만 미야베는 이런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의 진실을 좀 가볍게 독자들에게 어필하면서 잊혀질 수 없는 각인으로 독자들 마음 한켠을 자리잡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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