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 일공일삼 94
황선미 지음, 신지수 그림 / 비룡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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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먼저 호감을 주는 책이다. 초등 중학년에서 고학년 정도의 어린이들에게 읽힘직한 책이다. 마침 1013 시리즈이기도!


초등학교 4학년인 주경은 같은 반 아이이면서거 같은 학원에 다니는 혜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손꼽히는 혜수는 남들 앞에서는 주경이를 잘 챙겨주는 좋은 친구인 척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남모르게 조종하고 이용하고 약올리는, 아주 몹쓸 녀석이다. 그걸 까발리지도 못하겠고, 말해도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이 억울함을 풀데도 없는 주경이는 마음이 썩어간다. 그렇게 끌려다니던 찰나에 다른 친구의 구두 한짝을 망가뜨리는 일에 동원되고 만다. 이제까지는 피해자였던 주경이가, 자의가 아니었고 고의도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썩어가던 마음이 이제는 타들어간다.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이다!


오늘 보았던 어느 창원지검의 어느 판사님은 청소년 범죄로 재판장에 온 아이들을, 그들의 부모님을, 또 그 아이들의 선생님을 호되게 야단친다. 가해자의 엄마는 아이가 '모르고' 그랬다고 변명했다. 판사는 호통을 쳤다. 왜 모르냐고. 친구들 돈을 빼앗고, 때리면서 그게 나쁜 일이란 걸 왜 모르겠냐고. 알았지만 했다는 걸 부인하지 말라고 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그 대목이 생각난다. 혜수도 나쁘지만 주경이도 잘못했다. 혜수가 시켰고 또 조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경이가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진 않는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살 집을 잃고 차 안에서 생활하는 초등학생 아이는 부잣집의 개를 훔쳐서 보상금 500만원을 받아 집을 사길 원한다.(500만원이면 집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개는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는 고백해야 했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이의 말을 막지 않고 고스란히 들어주던 노부인(김혜자)은 아이의 어려운 처지와 아픔을 다독여 주지만, 그래도 그건 나쁜 짓이 맞다고 아이에게 설명했다. 그 지점이, 좋았다. 아이에게 값싼 동정 대신 바른 가치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 해 주어서. 이 아이는 좀 더 반듯하게, 좀 더 '잘' 자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겼다. 


주경이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이 행위가, 그래서 치러야 할 마음의 십자가가 일종의 성장통이 되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한 혜수의 행동을 똑같이 누군가에게 해버리는 자신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그렇게 상대방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가. 핑계거리도 있고 변명거리도 있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독자는 주경이가 용기를 갖기를! 과감하게 한발자국 내딛기를 열심히 응원했다.



심각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내내 무겁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비밀스럽기도 한 골목길 가게 언니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매장에서 파는 장화들을 나도 신고 싶었다. 가격도 싸기도 했지. 이런 가게 나도 알고 싶네!



좋은 소재와 주제를 가진 책이다. 다만 평소 황선미 작가님의 책에서 느끼던 벅찬 감동을 생각한다면 다소 짐작되는 전개와 결말이 살짝 아쉬워서 별 하나는 뺐다. 그래도 애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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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 곽재구의 달빛으로 읽은 시
곽재구 엮음, 지성배 사진 / 이가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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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이 엮은 시 모음집이다. 무려 '달빛으로' 읽은 시라니, 달밤에 읽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일지 않는가.


네모난 삼각형


_ 김 중

 

어머니 뱃속에서 나는 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놀았다

아픈 그 여자, 숨어서 울 때마다 비가 왔다

그럼 나도 종이로 우산을 접고 따라서 우는 척했다

그 여자 뱃속은 늘 김이 서린 목욕탕의 거울

어느 날은 거기 네모난 삼각형을 하나 그렸다

삼각형인데 각이 네 개나 되지

대각선도 그을 수 있었다

어수룩한 천사들을 붙들고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기억에, 태어나던 날 도립병원에는 큰 불이 났고

불 그림자 일렁거리며, 난

이 시상한 세상을 향해 힘껏 팔을 뻗었던 것이다

白衣의 바보들은 놀라 주춤 물러섰지만

그 여자, 젖은 나를 꼭 껴안으며

네모난 삼각형을 그려 보이고 기절했다, 오오!

어머니가 삼십 년을 습작하여 발표한 최초의 詩集

그게 바로 나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이다 -57쪽


어머니가 삼십 년을 습작하여 발표한 최초의 시집이 나라는 고백! 어머니라는 창조주가 빚어낸 예술품이 나라는 황홀한 인정! 


지하철에서 1

 

최영미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98쪽


자극적이고 처연한 표현이다. 발끈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서럽기도 한......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올릴 때

 

고정희

 

하루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 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 연기 하늘에 느돞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 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102쪽


고된 노동과, 따뜻한 국수 한 사발이 한 폭으로 겹친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이 떠올랐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노동과 식사, 신성한 두 가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곤 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한줌 따스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책꽂이를 치우며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 앞에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오는 것을 -109쪽

 

간서치 이덕무가 벗들과 함께 아끼던 경서를 팔아서 술 한잔 마셨던 대목이 떠올랐다.

지금도 이고 지고 꾸역꾸역 쟁여두고 사는 이 많은 책들, 다 치우고 빈 벽에서 자유를 좀 느껴보고 싶을 때도, 솔직히 있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126쪽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과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 목울대를 뜨겁게 만든다.

먹는 것은 신성하고, 그 먹거리를 위해 몸에 새겨온 노동의 흔적이 계속 내 마음을 두드린다.


고요

 

이원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거리는 시간이 있다 -171쪽


다시금 읽어보자니, 어째서 이승우가 떠오르는 것일까? 어째서......



시인은 좋은 시를 골라 읽고, 거기에서 따라오는 감흥을 같이 적었다. 어떤 것들은 시인의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어떤 것들은 곽재구 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만 느껴져서 공감이 안 되기도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좋은 시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또 좋은 사진을 같이 만나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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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 -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
아네트 비비오르카 지음, 최용찬 옮김 / 난장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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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기 전까지는...


이 책은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모녀는 여름 휴가 때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열세 살 어린 딸에게 이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여러 주에 걸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이때의 만남을 갖기 전 학교 숙제로 족보를 그린 적이 있었다. 외가와 친가의 가계도를 그리고 증조 할아버지 대에까지 올라가니 아우슈비츠에서 돌아가셨던 일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아이에게는 이 이야기가 그저 과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자기 가족의, 자기 이웃의 현재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우슈비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역사가인 엄마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에 맞추어 대답을 풀어나갔다. 아이는 다시 질문하고, 엄마는 다시 답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설명들은 쉽게 풀었지만 어린이들만 만족시킬만한 내용인 것도 아니다. 곰곰 되씹어서 다시 소화시키게 만드는 양서임에 분명하다. 


아이의 눈높이를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분명 이 주제는 무겁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하지 않고, 어린 딸 마틸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면서 이 책의 주제는 다섯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반유대주의의 기원

둘째, 유대인 학살

셋째, 바르샤바 게토의 생활조건과 봉기

넷째, 학살 책임의 소재

다섯째, 기억의 의무


그저 이런 끔찍한 사건이 있었단다-하고만 끝내서는 아무 깨달음도 남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저 머나먼 나라의 웬 미치광이가 저지른 학살쯤으로 치부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기억의 의무'로 정리한 것이 인상 깊다. 그게 얼마나 필요한지, 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저 주제에 우리 역사를 대입해 보아도 쉽게 나오지 않겠는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혹은 라이따이한 등등...



책에 나온 이 사진을 찍고서 고민이 되었다. 여기에 포함시켜도 될까 싶어서.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로 사진의 크기를 줄였다. 단지 숫자로는 막연히 감 잡을 수 없는 현장의 한 대목을 짐작하게 하고 싶어서.


이럴 때는 또 영화가 크게 한몫을 하기도 한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라의 열쇠, 더 리더 등등... 함께 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있다. 또 옮긴이가 함께 추천한 유타 바우어의 책들도 찾아보려고 한다. 


오늘 어떤 방송을 들으면서 출연자가 한창훈 씨의 말을 빌려 소수의 몇몇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인류에게, 세상에 더 큰 도움을 준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인간이 손을 대어 망가지고 버려지고 나빠지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한걸음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고 반성하는 인간이 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끔찍했던 인간의 흔적을 빌려서 또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게 하는 책이다. 진솔한 역사 교육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반듯한 길잡이이기도 하다. 품절 도서라는 게 안타깝지만, 도서관을 이용해서라도 일독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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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더 킹이 나왔다.

권교정 샘 투병 중이라 홈페이지 들락거릴 때마다 늘 조마조마.

그러다가 소설 출간 소식에 급 화색!

교샘의 작품을 아주 좋아하지만, 그림에서 오는 아쉬움이 없다고는 솔직히 말 못함..ㅎㅎㅎ

예전에 홈페이지에 올려준 콘티를 읽고 무척 놀랐던 적이 있다.

역시 글솜씨가 있기 때문에 만화가를 할 수 있구나 싶었음.

많이 많이 팔려서 필요로 하는 치료 다 받으시고, 어여어여 완치하시길!

킹교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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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1-2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좋다 ㅎㅎㅎ 땡투 누르고~

마노아 2015-01-23 22:06   좋아요 0 | URL
주진우 기자 책과 같이 주문하려고 보니 예약 도서네요. 며칠 차이 안 나니 그냥 받아도 되겠죠? ㅎㅎㅎ

서니데이 2015-01-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교정님의 새 책이네요.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어서 그런지 새 책이 나온다는 소식이 반가워요.
마노아님, 이 책 만화인가요, 아님 라이트노벨처럼 일러스트가 있는 소설인가요.^^

마노아 2015-01-23 22:06   좋아요 0 | URL
이책은 소설이에요. 표지만 그린 것 같은데 속에 보너스로 혹시 일러스트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감지덕지에요.^^

서니데이 2015-01-23 22:08   좋아요 0 | URL
쓰신 페이퍼를 읽으면 소설같은데, 상품설명에는 만화쪽으로 나와서요.
책에 권교정님의 일러스트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아직은 예약판매라서 그런지 더 궁금해요.^^

마노아 2015-01-24 13:44   좋아요 1 | URL
만화 출판사라서 그렇게 표기된 걸까요?
얼른 책 받고 확인하고 싶네요.^^

서니데이 2015-01-24 13:45   좋아요 0 | URL
아, 그럴수도 있겠네요^^

마노아 2015-01-24 13:50   좋아요 0 | URL
작가님도 책 나오기 전에 예고(광고? 안내?)에서 소설이라고 명기하셨네요.^^

서니데이 2015-01-24 13:54   좋아요 0 | URL
그럼 소설 맞겠네요, 저는 서점 카테고리에서 봐서요, 설명해주셔서 감사해요^^

BRINY 2015-01-2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님의 오랜 팬으로서 당연히 사야지요.
무엇보다 교님 건강이 회복되어야하는데 말입니다.

마노아 2015-01-28 00:37   좋아요 0 | URL
주말에 주문했는데 같이 주문한 다른 책만 오늘 도착했어요. 담주 정도에는 이 책도 받아볼 수 있겠죠. 교님의 건강 회복을 위하여~
 

제 2309 호/201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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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피부가 벗겨진다? 건강하게 때 미는 방법!


2시간에 걸친 긴긴 목욕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만난 태연과 아빠, 벌겋게 달아오른 반질반질한 얼굴을 마주보며 바나나맛 우유를 원샷한다.

“캬! 목욕 뒤에는 역시 바나나맛 우유죠.”

“역시 넌 뭘 좀 아는 딸이야. 그런데 엄마는 언제쯤 나오실 거 같더냐?”

“음…, 오늘은 유난히 전투적이세요. 피부를 다 벗겨내기 전까진 목욕탕 밖으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을 듯한 기세였어요.”

“이런, 진짜로 때가 아닌 피부를 벗겨내고 있구나. 살살 조금만 밀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왜 그리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다. 원래 ‘때’는 공기 중의 먼지 같은 더러운 물질과 피부 각질의 죽은 세포, 땀, 피지 등이 뒤섞여서 피부에 붙어있는 걸 말하는데, 이건 비누 샤워 정도만 해도 거의 다 씻겨나간단다. 가볍게 몸을 씻고 뜨끈한 대중탕에 들어가서 푹 불리고 나오면, 이미 때는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는 뜻이야.”

“엥? 푹 불리고 나온 다음에 때를 미는데, 때가 없다니요? 그럼 그 검은 국수가닥의 정체는 무언가요?”

“피부 각질층이지. 피부는 피하 조직, 진피, 표피 순서로 이뤄져 있고 표피의 가장 바깥에 있는 딱딱한 층을 각질층이라고 한단다. 각질층은 피부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도록 보호해주고,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피부 장벽 역할도 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야. 그런데 때를 민답시고 이 각질층을 지나지게 벗겨내 버리면 인체는 손상된 피부를 복구하기 위해 각질층을 점점 더 많이 생산하게 된단다. 그렇게 되면 허연 버짐 같은 게 생기면서 피부는 더욱 거칠고 지저분해지고, 시원하게 때를 밀고 싶다는 욕망이 미친 듯이 강해져서, 결국에는 벌겋게 염증 반응이 일어날 때까지 피부를 벗겨내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지.”

“후덜덜…, 그럼, 때는 절대로 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나쁜 점만 있으면 엄마 아빠가 너랑 같이 목욕탕에 오겠니? 부드러운 천으로 살살 미는 정도의 때밀이는 묵은 각질을 벗겨내고 피부의 혈액 순환을 돕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단다. 특히 너나 나처럼 무척이나 기름진 지성 피부의 경우에는 모공을 막고 있던 각질을 없애 뾰루지를 예방할 수도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온몸의 더러움을 다 벗겨버린 것 같은 개운한 느낌! 기네스 펠트로와 같은 여러 해외 스타들도 우리 때밀이 문화에 푹 빠졌다고 하던데, 그만큼 때밀이의 상쾌함이 행복감을 준다는 거야. 다만, 죽은 각질을 넘어서 살아있는 상피 세포까지 마구 벗겨내는 게 잘못이라는 거지. 보통 거무튀튀한 때를 벗기면 허여멀건 한 때가 나오지? 그건 거의 다 살아있는 세포라고 보면 된단다.

“색깔까지 너~무 실감나게 설명해주셔서 비위가 좀 상하긴 하지만, 암튼 아빠가 목욕탕 올 때마다 빡빡 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이유를 이제 알겠어요. 그런데 각질층을 과다하게 벗겨내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피부 장벽인 각질층이 얇아지면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증상은 수분 손실이야. 때를 빡빡 밀고 나면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는데, 피부가 수분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나타나는 증상이란다. 특히 겨울에는 난방 때문에 실내 공기가 무척 건조해서 수분 손실이 더욱 클 수밖에 없지. 때를 민 피부가 정상적인 보습 상태로 돌아오려면 최소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피부의 보호 장벽이 완전히 제 기능을 회복하는 데까지는 무려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보고도 있어요. 그러니까 일주일 안에 두 번 이상 때를 심하게 미는 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야. 특히 아토피나 건선 등 만성 피부 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증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때밀이를 하면 안 된단다.”

“어쩐지 목욕탕에 그렇게 오기 싫더라고요. 제 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목욕탕을 싫어한 거였어요. 저, 오늘부터 목욕탕과의 결별을 선언하겠어욧!”

“우리 태연이, 누굴 닮았는지 잔머리는 참 잘 써요. 목욕탕 오기 싫은 건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때를 심하게 밀지만 않는다면 겨울철 목욕은 피부에 수분을 공급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란다. 짧은 샤워보다는 훨씬 좋지. 뜨끈한 물속에 10~20분 정도 몸을 담그면 건조했던 피부가 충분히 수분을 충전할 수 있거든. 다만, 따뜻한 물속에서는 우리 몸의 천연 보습 인자도 씻겨나가기 때문에 목욕 후 3분 이내에 보습제를 충분히 발라주는 게 아주 중요해요. 아무리 수분을 보충했다 해도 보습제를 쓰지 않으면 도로 다 빠져나가 버리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 될 수밖에 없거든.”

이때, 때를 아니 피부 각질층을 맘껏 벗겨낸 엄마가 얼굴에 홍조를 가득 띤 채 나타난다. 애니메이션 ‘라바’에 나오는 핑크 라바와 무척이나 흡사한 엄마의 모습에 아빠와 태연 깜짝 놀란다.

“헐, 대박! 때밀이가 사람을 핑크 라바로 변신시킬 수도 있는 건가요?”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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