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폭설 때문에 수영장 셔틀 버스가 운행 중단되었다. 집에서 수영장을 가려면 버스를 한 번 타고 길을 건넌 다음, 좀처럼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을 간 뒤, 다시 내려서 언덕을 좀 올라가야 한다. 눈길을 헤치고 갈 자신이 없어 과감히 수영 패쓰! 오리발 하는 날이어서 살짝 아쉬웠지만 어쩌랴.


그리고 오늘, 기록적인 추위가 덮쳐왔다. 세상에, 위 아래 내복 다 갖춰입고 외출해본 것은 정말 20년 만의 일이었다. 위에만 여섯 겹을 입었는데 둔해서 움직이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그렇지만 나의 직장은 초초초 추운 곳. 대체 난방을 왜 제대로 안 하는 겨...ㅜ.ㅜ 모두들 개인용 난방 도구를 각자 알아서 장만하고 있다. 요새 대세는 뜨거운 물주머니다. 나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물주머니는 데워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다시 무릎 담요를 덮어 온도를 지키고 있다. 


많이 추워서 몸이 움츠러드니 운동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만 월요일도 빠졌으니 오늘은 꼭 가리라 했다. 가서 뜨거운 온탕에 들어가 몸을 좀 녹이고 싶었다. 도착하기 전에 같이 탄 아줌마 한분이 오늘 버스카드랑 현금 모두 안 가져왔다고 집에 갈 때 대신 내달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온탕의 온도는 적절히 뜨거워서 온몸이 노곤해지는 기분. 내가 타는 셔틀 버스는 항상 제일 마지막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나면 안에서는 체조하는 소리가 들린다. 온탕에 들어가는 것을 택한 나는 늘 체조 시간은 놓치고 만다. 


온탕에서 나오는데, 좀 많이 어지러웠다. 요새 자주 어지러워서 안 그래도 지난 주말에 피검사를 하고 온 뒤였다. 결과는 화요일에 나온다고 했는데 어제 약속이 있어서 못 갔고, 오늘은 식구들과 함께 먹으려고 닭강정 주문 기다리다가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병원에 못 들렀다. 내일도 약속이 있어서 검사 결과는 모레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암튼, 나는 좀 어지러웠는데 잠시 앉아 있어도 가라앉지를 않아서 찬물을 한컵 마셨다. 그리고도 상태가 안 좋았다. 이건 나만이 아는 신호인데, 이 정도로 좋아지지 않으면 여차하면 졸도 타이밍이 올 터였다.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그대로 암전.


눈을 떴을 때 상황 파악이 안 돼서 한참을 눈을 깜박였다. 나의 이 아크로바틱한 자세는 뭐지? 아, 또 넘어갔구나. 화장실 문에 머리 처박고 쓰러졌다. 이 화장실은 문고리가 나가 떨어진지 한참인데 좀처럼 고치질 않아서 짜증이 나던 터였다. 문이 안쪽으로 열려야 하는데 내가 넘어지면서 밖으로 밀친 셈이 되었고, 그 바람에 문이 콱! 박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을 아무리 당겨도 열리지 않는다. 위 아래만 들뜰 뿐, 콱 박힌 가운데가 꼼짝을 안 한다. 위쪽 잡고 당기고, 아래쪽 잡고 당기고, 위에 잡고 발등으로 아래쪽을 동시에 당겨도 소용이 없다. 


콩콩콩콩 문을 두드렸다. 아무 소식이 없다.

쾅쾅쾅쾅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아무 소식이 없다.

아쒸,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무엇인가!

이번엔 소리를 질렀다.

여기요~ 저기요~ 누구 없어요오오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무려 20분 간.

하아, 나 화장실에 20분 간 갇혀 있었다.

짜증이 확 솟으면서 괴력 발산. 결국 내 힘으로 열고 나왔다. 문짝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시간은 이미 7시 30분. 화장실에 갇혀 있는 동안 처음에 머리가 멍해서 바로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버스비 내주기로 했던 아줌마는 어쩌란 말인가. 그분은 지금 수영하고 있는데....

오만가지 생각에 머리는 아프고 팔다리는 후덜덜...

그런데 화장실 문 여느라 생쑈를 했더니 어느새 정신이 들고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서 남은 20분은 수영하고 왔다. ㅎㅎㅎ


집에 오니 며칠 전에 주문한 책장이 도착해 있다.

지난 달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에 무지하게 질렀던 책들 때문에 더 이상 수납이 안 되어서 지난 주말에 책장을 샀던 터였다. 

늘어져 있는 가구와 책들과 짐들... 아, 정신 사나와...


책정리하다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잠시 앉았다. 

책상 뒤편으로 한줄만 깔았던 책들을 두줄로 덮을 생각에 선반을 받칠 벽돌을 열장 주문했다. 배송비 포함해서 9,900원.

열라 무거웠는데, 엄니가 벽돌을 왜 주문했냐고, 그거 철물점에서 개당 500원이면 산다고....

헐, 나 벽돌 세개 필요했는데 열 개 단위로 팔아서 열 개 주문했는데...ㅡ.ㅡ;;;;

철물점에서 벽돌 팔거란 상상을 해보지 못했으니 별 수 없지. 


목이 타서 발포 비타민 한잔 마셨다.

손발이 많이 찬데 한약이라도 한재 먹어야 하는 건가?

일단 병원 진료 결과 좀 보고 결정해야지. 

뭐라 해도, 어찌어찌 해도,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건강!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겨! 조심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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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8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12-1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이제야 봤네요. 아이고..이런
이 추운데 어디 길에서라도 쓰러지면 어쩌냐구요..
아이고 정말..
정확한 병명이 미주신경성실신 입니까? 기립성 저혈압입니까?
뭐든 여튼 아이고 진짜 걱정되네요....

마노아 2014-12-18 23:54   좋아요 0 | URL
날씨도 하나의 원인인 것 같아요. 급격한 온도 변화가 혈압에 영향을 주니까요.
며칠 전에 의사가 혈압이 높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혈압 높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어서 좀 놀랐어요.
사실 외가 쪽으로 혈압 가족력이 있거든요.
미주신경성실신과 기립성 저혈압이 증상이 같아요.
정확히 어느 쪽인지는 사실 저도 모른답니다.
아무튼 이번엔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봐야겠어요.
걱정 끼쳐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다락방 2014-12-1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일단 병원에서 결과 나오는 것 좀 보고 그 다음일을 결정해야겠네요. 간혹 이렇게 쓰러져 버리는 걸 얘기한거죠? 그래서 피검사 한거죠? 흐음. 마노아님의 에너지가 너무 엄한데로 다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벽돌을 열 장을 한꺼번에 산다던가 하는 일이요. 일단 결과 나오는 걸 지켜봅시다.

마노아 2014-12-18 23:55   좋아요 0 | URL
10월의 연구수업과 11월의 교원평가가 저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를 준 걸까요?
내일 결과 듣고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어요.
정 답이 없으면 신경과라도 가야지 싶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넌더리가 나네요.ㅜ.ㅜ

섬사이 2014-12-1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도 아가씨였을 때 그렇게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쓰러진 적이 몇 번 있어요. 깨어나면 쓰러지면서 부딪혔던 부분들 온통 멍들어 있고, 때론 사람들이 걱정스럽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둘러서서 보고 있어서 아픈 것보다는 창피하고 당황스러웠던 게 떠오르네요.
일단 병원 검사 결과 빨리 확인하고 체력관리 잘 하세요. 추운 겨울이라 더 걱정스러워요. 많이 먹고 기력충전 하시길... 아침식사 거르지 마시구요.

마노아 2014-12-18 23:57   좋아요 0 | URL
기력충전에 너무 힘을 쏟은 걸까요. 오늘 과식하고 소화가 더디 되어서 피곤한데 잠을 못 이루고 있네요. ^^;;;
그렇죠. 사람 많은 데서 쓰러지면 챙피한 게 아픈 것보다 더 우선할 데가 있죠. 네, 그런 경험도 있습니다.ㅜ.ㅜ
암튼, 최대한 조심조심하고 잘 알아봐야겠어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섬사이님! ^^

2014-12-19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2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12-2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아프지 마세요 ㅠㅠ

마노아 2014-12-23 10:03   좋아요 0 | URL
네네, 건강 관리에 더 신경 쓰겠어요.(>_<)

오후즈음 2014-12-2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쫌 어떠신지요...

마노아 2014-12-23 10:03   좋아요 0 | URL
검사 결과는 다 멀쩡하다고 나와서 다른 추가 검사를 예약해 두었어요. 1월 중순은 되어야 결과를 알 것 같아요.^^;;;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 - 죽음의 땅 일본원전사고 20킬로미터 이내의 기록
오오타 야스스케 지음, 하상련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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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어마어마한 강진이 후쿠시마를 강타했고, 그 여파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인근 주민들은 긴급히 대피했고, 이들의 생활터전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다가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사람은 대피했지만 미처 데리고 가지 못했던, 혹은 허락되지 못한 동물들은 위험한 그 땅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생명들을 두고 볼 수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나섰고,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죽음의 땅에 발을 디뎠다. 한장 한장 사진으로 남기면서 인간의 오만과 욕심, 그리고 어리석음이 빚어낸 처참한 결과를 고발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을 통해 죽음을 고발하는 리얼 다큐다.

 

 

개에 비해서 인간에 대한 경계가 훨씬 강한 고양이들. 몹시 굶주렸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성향을 알기 때문에 먹이를 주고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다. 이 책의 표지를 담당한 사진인데 빛이 들어가서 영민한 눈빛을 잘 못 살렸다.

 

 

먹을 것을 주니 닭에게 먼저 먹으라고 양보하는 착한 개였다. 그야말로 대인배. 네가 인간보다 낫구나.

닭에게는 친절했던 이 개가 인간이 다가가자 짖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고의 집 지킴이였을 것이다. 이런 순간까지도 임무를 잊지 않는!

 

 

사람을 보자 반가워서 펄쩍 뛰었다던 흰둥이. 하얀 털 때문에 흰둥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이름도 흰둥이였다고!

 

흰둥이의 주인은 흰둥이를 보살피러 다시 돌아왔다. 자신들이 거처하는 대피소에 반려견을 데려갈 수가 없어 두고 갔지만 걱정되어 찾으러 왔던 것이다. 이렇게 사랑 받으며 자라온 어린 흰둥이. 천진하게 놀아달라고 주변을 맴돌았구나.

 

개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하지만 축사에 매여 있던 가축들은 처절하게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축사의 문을 열어두었더니 목이 말랐던 소들은 용수로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해 또 고통을 겪었다.

겨우 살아남은 돼지들은 살처분 당했다.

 

이 집은 소와 오골계가 사이 좋게 지내고 있었다. 근처에 고양이가 많았기에 닭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용했다.

알고 보니 온몸을 던져 집을 지킨 일등 공신이 있었다. 본인은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채로...

다른 개에게 물린 상처였다.

함께 사는 인간에게 충실한 동물인 개. 인간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킨다. 이 개의 이름은 곤타인데, 곤타는 두 달 넘게 집과 동물 가족을 지켜냈다. 이렇게 집을 지키고, 떠나간 가족을 기다리는 개들이 많이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애정에, 또 그들을 되찾기 위해 몇 번이나 다시 돌아오는 가족들의 마음이 몇 번이나 울컥하게 만들었다.

 

사실, 보통 재앙이 아니었다. 사람을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사정이었다. 누군가는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엄연히 생명이다. 적어도, 최소한 고통스럽게 죽지 않도록 안락사라도 해줘야 마땅하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일본은 고양이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라 그나마 구조된 아이들이 입양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그런데 만약 이게 우리나라 사정이었다면 이런 구조단체 혹은 개인이 뭇매를 맞을 것이다. 팔자 편하다면서......

 

책에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미국 뉴올리언스의 이야기도 전해줬다. 무려 25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반려동물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연방재난관리국은 대피소에 반려동물과 함께 갈 수 있도록 조처했다고 한다. 하아, 이건 너무 비교되잖아. 이 나라의 재난 관리 수준을 생각한다면......

 

결국 원전으로 돌아간다. 이 시대 원전 지역은 대도시의 식민지라는 저자의 표현에 공감한다. 밀양의 송전탑도 대도시의 식민지가 아니던가......

 

체르노빌의 경험에서, 일본 후쿠시마에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면 재앙은 또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 끔찍한 참상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원전을 포기하지 못하는, 혹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심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충분한 토론은 이뤄지고 있는가? 어디까지 불편을 감수하고 미래를 지켜낼 것인지에 대한 각오는 되어 있는가.

결국은 생명의 문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걸려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의 문제인 것이다. 이건 이웃나라 머나먼 이야기도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동물들의 죽음일 뿐이라며 사소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죽음의 땅은 이제 우리 차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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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4-12-16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신문에서 읽었지만 도저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ㅠ_ㅠ; 마노아님 리뷰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ㅠ_ㅠ;;;

마노아 2014-12-16 16:22   좋아요 0 | URL
저는 평소에 개와 고양이에 대해서 그닥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도 보는 내내 참 힘들었어요. 소와 돼지 사진은 차마 못 올리겠더라구요.ㅠ.ㅠ

아무개 2014-12-1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읍
난 못봐요 못볼꺼같아 ㅠㅠ
젠장할 원전!

마노아 2014-12-17 01:05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은 무리라고 이미 생각했어요. 괜히 마음만 더 아파져요.ㅜ.ㅜ

오후즈음 2014-12-1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는것 만으로도 너무 힘드네요. ㅠㅠ 저는 개와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참혹한 이 광경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거니 참 괴롭네요

마노아 2014-12-17 01:06   좋아요 0 | URL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결국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닌지...까지 생각이 드네요. ㅜ.ㅜ

블라썸 2014-12-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글 보고 도서관에서 바로 빌렸어요. 사진만 봐도 저는 눈물이 너무 나네요. 책소개 감사드려요.

마노아 2014-12-17 13:5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블라썸님! 저도 소개글 보고서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보았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해요. ^^

개똥같은넘 2014-12-2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울컥하네요.

지금 눈물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멈추고 있습니다. ㅠㅠ

마노아 2014-12-22 07:21   좋아요 0 | URL
슬픈 책이에요. 진실을 들여다보는 건 이렇게 아플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ㅜ.ㅜ
 
미생 6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봉수 미생 6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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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뇌와 우뇌를 함께 쓴, 동시에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내용이었다. 요르단 사업 건을 피티하면서 통과시키는 작업은 좌뇌를 썼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라는 짧고 굵직한, 그러면서도 찐한 한 마디는 심장을 마구 치기에 충분했다. 윤태호 작가, 새삼스럽진 않지만 대단하다.


회사라는 생리도 사실 잘 모르거니와 종합상사는 더더욱 모르는 내게 상사맨의 기백을 보여준 파트였다. 골프 약속까지 미루면서 오늘만큼은 회사에 더 남아 있고 싶다고 말한 사장님의 심정에도 공감이 간다. 부정을 걷어내니 좋은 아이템으로 변신 가능했던 요르단 중고차 사업. 그러나 트라우마는 너무 짙어서 보통의 노력과 설득으로는 이 사업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설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변명이 더 짙어지는 아이러니. 그걸 깨기 위해서 장그래는 또 다시 파격적인 한 걸음을 내딛는다.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하는 그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그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오차장의 리더십이 더 빛났다. 


좋은 상사를 만나고 좋은 부하직원을 두고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영업3팀의 역동적인 행보가 기대된다. 결말을 생각한다면 오래 가지는 못하겠지만...


드라마에서는 다른 캐릭터들과 그들의 상사 이야기도 좀 더 안배를 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한석률과 성대리, 장백기과 강대리, 안영이와 하대리가 그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이들 드라마 속 대리급들 배우들의 연기가 참으로 일품이다. 게다가 이런 짝꿍이 또 없다. 뺀질거리는 한석률에게 한수 위의 사이코패스적 성대리가, 스펙 짱짱하나 인간미 없는 장백기는 로봇같이 일하는 강대리와 한팀인 것이 절묘하다. 일급 직원이지만 여자라는 것을 핸디캡으로 여기는 상사들이 가득한 안영이의 자원2팀도 마찬가지다. 현재 장백기와 안영이의 팀은 제법 좋은 쪽으로 호흡이 가다듬어졌지만 내가 본 부분까지 한석률과 성대리는 많이 삐걱거리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성대리의 캐릭터로는 알고 보니 좋은 놈이었더라~라는 결말이 더 별로일 것 같지만...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취해라> "파리의 우울"-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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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해 있지 마라의 역설? 인가요?

마노아 2014-12-16 07:04   좋아요 0 | URL
앞의 권에서 젊은 친구가 취해있지 않다고 오차장이 그랬는데 역설일 수도 있겠네요. ^^

2014-12-16 0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6 0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6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4-12-17 01:05   좋아요 0 | URL
마저 고쳤습니다. 사람 이름을 확 뒤집었네요. ㅎㅎㅎ

보물선 2014-12-1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읽었는데도 까먹었구요... 드라마에서 회사 나간 선배한테 취해있지 말라고 했거든요^^

마노아 2014-12-16 10:20   좋아요 1 | URL
책에서도 오차장이 선배 만난 뒤 장그래한테 취하지 말라고 전화를 했는데, 그때 장그래는 안 취해 있었고 드라마에선 취해있었는데 알겠다도 대답을 하더라구요.^^
 
미생 5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요석 미생 5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박과장의 비리를 파헤쳐서 회사의 암적인 존재를 걷어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또 잘 해냈다. 그러나 영업 3팀을 바라보는 회사의 시선은 곱지가 않다. 꼭 그렇게까지 했으야 했느냐!는 무언의 압박이 있고, 그 바람에 책임을 지고 줄줄이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감시의 대상이 된 것만 같은 불쾌감이 들어 불편한 눈초리들이다.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야 했다. 다른 수가 있겠는가.


연휴가 다가왔다. 친척 어르신들의 등쌀에 시달릴까 봐 이곳저것 떠돌던 장그래가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시달릴 어머니께 미안해서였다. 그런데 술에 잔뜩 취해서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엄마를 문밖에서 목격했다. 그제서야 깨닫게 된 장그래의 혼잣말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기특한 녀석! 이제라도 알아주어서 내가 다 고맙다. 예스, 장그래!


그리고 영업3팀에 새 인물이 충원되었다. 전에 같이 일한 전력이 있던 천과장이다. 드라마에서 천과장은 '닥터 이방인'에서 북한 공작원으로 나와서 제대로 악역을 소화했더랬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꾸 이 사람이 뒷통수 칠까 서늘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 처음에 간 보느라 오차장님께 호되게 야단 맞았지만.... 일하러 왔으면 일할 것이지 간보지 말고, 정치하지 말라는 말! 정곡을 찔렀다. 역시 예리하고 꼼꼼한 오차장님!


그리고 이제 새 일을 시작해야 한다. 새 아이템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영업 3팀에 던진 장그래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그 한마디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언성부터 높아지고 역정까지 내기에 이르렀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본질을 들여다 본다면...


신입사원다운 패기이기도 하거니와, 보통의 평범한 스펙을 쌓고 이 자리에 올라온 게 아닌 장그래이기 때문에 또 가능했을 제안이었다. 안영이의 평가처럼 그에게는 승부사의 기질이 있다. 승부를 놓고 싸우는 치열한 세계에서 십년 넘게 고수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 아니던가.


요르단에 대한 정보가 신선했다. 친구는 코이카에 지원해서 이집트에 2년 반동안 다녀왔다. 처음에 가려던 곳은 요르단이었는데 그곳에서 최소 석사 이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원국을 바꿔야 했다. 당시 막연히 요르단이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위험하단 생각만 했는데, 뜻밖에도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지되는, 무척 역동적인 나라였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이 기쁨! 만약 친구가 그때 요르단을 가게 되었더라면 나는 이집트 대신 요르단을 다녀왔을 테지. 그것도 좋은 선택지다. 하하핫^^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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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6 0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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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6 0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6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6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간을 읊조리다 - 삶의 빈칸을 채우는 그림하나 시하나
칠십 명의 시인 지음, 봉현 그림 / 세계사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열쇠/김혜순

 

역광 속에 멀어지는 당신 뒷모습 열쇠구멍이네

그 구멍 속이 세상 밖이네

어두운 산 능선은 열쇠의 굴곡처럼 구불거리고

나는 그 긴 능선을 들어 당신을 열고 싶네

저 먼 곳, 안타깝고 환한 광야가

열쇠구멍 뒤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그 광야에 한 아름 백합을 꽂았는데

찰칵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이라고

죽은 사람들이 읽는 책에 씌어 있다는데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

당신이 깜빡 사라지기 전 켜놓은 열쇠구멍 하나

그믐에 구멍을 내어 밤보다 더한 어둠 켜놓은 깜깜한 나체 하나

백합 향 가득한 광야가 그 구멍 속에서 멀어지네 -48

 

소개된 시들이 하나같이 좋다.

그런데 아주 짧은 구절만 소개했기 때문에 전문을 찾아보는 수고가 필요하다.

책에 수록된 구절은 붉은색 강조 글씨로 표시했다. 

대부분 몇 구절 정도만 공개했다.

나머지는 여백과 그림이다.

글자수로만 따지면 책값에 어이 없어지겠지만,

그 한 구절 때문에 다른 시들을 찾게 되고,

익숙한 시인의 이름에서 빙그레 웃게 된다. 

순간을, 읊조려 보자.




 

자서/김영승


이 아름다운 밤......

내가 낯선 존재라니......

나는 참 기쁘다.

-56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를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의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66  

 

이 얼마나 따뜻한 시인가. 그래도라는 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주택가/김행숙


가정집이 무엇일까

어린 시절은 무엇일까

나는 20세기의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당신은 21세기의 어린시절을 기억한다

오늘날 주택가는 그런 곳

너희 엄마 집과 아빠 집의 규칙이 다르듯

누구나 다르게 살아가는 거야

똑같이 보이고 싶어하면서

 

큰 개를 키우는 사람은 큰 개에 의지하고

작은 개를 키우는 사람은 작은 개에 의지한다

자기 머리통보다 작은 개를 꼬옥 껴안고 우는 사람이 있겠지, 오늘밤에도 주택가는 그런 곳

버둥거리는 개가 있어

 

그것은 좋다는 뜻일까, 괴롭다는 뜻일까

말하는 개라면 사실대로 짖을까

말하는 창문이라면 수다쟁이 할멈일거야, 그녀가 마음씨 좋은 할머니래도 당신은 창가에서

더 이상의 독백을 잇지 못하리

밤에 주택가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밤의 주유소로

환하게 달려오는 차의 속도가 부러워, 당신은 골목에서 걸어나와 골목이 없는 세계로 뛰어간다

착각처럼 무엇이 바뀔까

완전한 착각처럼 무엇을 굳게 믿을까

밤공기가 차가워, 나는 창문을 닫는다

투명한 유리창을 닫고

불투명한 유리창을 닫고 커튼을 쳐버렸다, 화가 난 듯했다

나는 보이지 않았다

-72

 

제목을 보는 순간 저 한구절이 얼마나 크게 와 닿던지......



자본주의의 사연/함민복

 

성동구 금호 4282번지

네 가구가 사는 우편함

 

서울특별시의료보험조합

한국전기통신공사전화국장

신세계통신판매프라자장우빌딩

비씨카드주식회사

전화요금납부통지서

자동차세영수증

통합공과금

대한보증보험주식회사

중계유선방송공청료

호텔소피텔엠베서더

통합공과금독촉장

대우전자할부납입통지서

94토지등급조정결과통지서

 

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 아닌가

 

-74




삼 십 세/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78

 

서른을 지나온 지는 한참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 울림에 공감한다. 




고독에 관한 간략한 정의/노혜경


공원길을 함께 걸었어요

나뭇잎의 색깔이 점점 엷어지면서

햇살이 우릴 쫓아왔죠

눈이 부시어 마주 보았죠

이야기했죠

그대 눈 속의 이파리는 현실보다 환하다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세상 모든 만물아 나 대신

이야기하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길은 끝나가고

문을 닫을 시간이 왔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84




 

속눈썹의 효능/이은규


때론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 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 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 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하고 불어 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88

 



푸른 밤/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이었다

-90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94


문득, 나를 위해 살아줘요... 라고 말했던 사람이 생각나서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개여울/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97

 심수봉이 부른 개여울을 들어보았다. 여전히 처량맞고 청승맞은, 그러나 그게 매력적인 노래였다.



새우튀김/문숙


바다를 버리고서야 몸을 쭉 폈다

단단한 껍질을 벗고

노란 삼베옷을 입고 기름 속으로 뛰어든다

뜨거움이 스미자

육신에 남아있는 생의 관성으로

바싹 몸을 옹그린다

 

작은 삶이란

살기 위해 자주

제 꼬리를 확인하며 몸을 구부려야 하는 것

조금씩 익어가며

구부리고 펴던 기억마저 버리고 있다

 

튀김솥 밑바닥에 가라앉아

제 몸을 다 익힌 새우

점점 부풀어올라 반달이 되어간다

바닥을 박차며 몸을 솟구친다

창밖에선 하늘까지 물기둥 세우는 빗소리

기름 위를 둥둥거린다

오늘밤

캄캄한 하늘에 수염 달린 반달 여럿

노랗게 뜨겠다

-112

 

인터넷 정육점/조인선

 

달력을 넘기다 손이 찢어졌어요

어머니가 웃으시며 붕대로 감싸주셨어요

 

얘야 시간은 날카롭단다

  

-118

 

그야말로 촌철살인!!




결빙/정호승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 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128

 




슬픔을 모르는 사람/황혜경


몰라?

 

가장 쉬운 말로 하려고 했어

슬픔은 그런 것이니까

침대에서 양발로 딛고 내려오는 아침과

양발로 밀고 시작하는 젖은 아침의 무게가 다르지만

스케일이 큰 문장 뒤에 숨은 자잘한 단어들처럼

슬픔은 함께같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두 사람이 네 사람의 장례를 함께 치르고

나눠 갖고 난 후에 두 사람은

정말 내가 당신 같고 당신이 나 같다, 라고 했대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더 잘게 애틋하게 슬픔을 잘근잘근

 

당신은 애써 슬픔의 영감(靈感)을 걷어차는 사람

부디, 제발이라는 말을 잘도 잊어버리지

 

당신은 포기가 빠르고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자칫, 절도 있는 태도로 보여 당신은 대범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몇 개의 슬픈 알맹이들이 어떻게 굴러가다가 짓밟히고 터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지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고

짜임새라고 믿었던 올들이 어떤 계기로 풀리고 묶이고 매듭이 다시 생기는지 보이지 않는 그 슬픔의 과정을 모른다

 

고아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면 고독한 아이

나는 고아를 잘 모르지만 버려지고 외로워서 슬픈 아이

함께같이 슬픈 나도

 

발이 가장 은밀한 눈물의 부위라고 내가 숨겼을 때 주로 조증(躁症)인 당신의 성기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몇 도였을까 또 나를 비웃었을까, 생각하면

붉가시나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더 붉은지 더 따가운지

나는 난대의 훈풍 한가운데 서 있어도 춥고도 외롭고도 슬프다

 

두 사람이 네 사람의 장례를 함께 치르고

나눠 갖고 난 후에 두 사람은

정말 내가 당신 같고 당신이 나 같다, 라고 했대

두 사람은 부부였대

 

정말 몰라?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당신이 없어도 정말 몰라도

슬픔과 슬픔을 모르는 사람의 거리를 이해하면서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같이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나는 더 모르고 싶고

-148

 

근래, 종교적 성향보다 정치적 방향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 것처럼, 생각이 없는 사람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 더 싫다. 그야말로 실격!



나만 없는 방/이제야


혼자 있어도 나를 들킨 적이 있다

 

내가 묻은 물건들이 걸을 때

나의 날들이 매달려 있다

 

하지 못한 말을 커튼에게 한다

수요일의 햇빛을 잡은 두 손은 어디 있니

말린 내 손을 맞잡으며 커튼을 닫았다

 

듣지 못한 말을 침대에게 한다

왜 오늘 밤은 천장에 별이 뜨지 않을까

접어두었던 책을 어제를 위해 읽었다

 

놓지 못한 말을 신발장에게 한다

우리가 걷던 시계 없는 길은 벽이 되었나

초인종이 없이도 외출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없는데 방 안 가득

나를 아는 내가 있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시계가 있는 방

잊어도 잊히지 않는 달력이 있는 방

꿈에서 깨어도 다시 꿈을 꾸는 방

 

바닥 구석에 내 그림자도 있었다

-152

 



돌아와 보는 밤/윤동주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은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이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늘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62

 




/황인숙


밤은 네가 잠들기를 바란다

 

자장 자장 자장

 

밤은 차곡차곡 조용해진다

 

밤은 너를 잠재우길 바란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자장

 

밤은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170

 

밤조차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을...

그 고요한 밤을 제발 깨우지 말기를......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김개미

 

여기까지 오느라고 숨이 찬 게 아니야,  

숨이 차서 여기까지 왔어

 

-174



 

완벽한 불판/금란


친절하게 고기가 익어갈 때 우리는 젓가락으로 침묵을 만지작거렸네

 

눈에 까만 연기가 들어온다

연기와 연기와 연기가

 

불판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읽지 않은 책으로 쌓여가고

젓가락은 여전히 빈 페이지를 넘기고 있네

 

모든 오해는 시간을 까맣게 태우고 있지

 

핏방울이 떨어지는 불판 위

고뇌와 고통의 무늬가 다른 사람의 얼굴로 오는 저녁

드디어 골목이 어두워지고

늙은 거리의 누추한 냄새처럼 그곳에 도착했네

 

맨살을 뒤적이는 손가락은 하나씩 잘려 나가고 있다

 

어둠이 불빛에 데이듯 시간의 속살을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들은 영원히 익지 않을 젓가락으로 앉아있네

 

불 안의 나는 고기처럼 뜨겁고

불 밖의 그들은 서늘해

안과 밖은 다른 나라의 골목으로 여기서 멀어지네

 

불판은 까맣게 타고 있는데

내 얼굴은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

-188


완벽한 불판이라는 제목에서, 친절하게 익어가는 고기를 상상하면서 한 친구가 떠올랐다. 

고기를 가지고 장난칠 수 없는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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