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릴로 프린치프 - 세기를 뒤흔든 청년
헨리크 레르 글.그림,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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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린다. 저격 대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대공비. 대공비가 먼저 숨을 거뒀고, 총독 관저에 도착한 대공도 이어서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화약통 같았던 발칸반도 위에 불씨를 떨어뜨린 결과가 되었으며, 정확히 한 달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뒤에 서서 역시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이 협상국 측으로, 협상국은 다시 동맹국 쪽으로 맞 선전고포를 하며 대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장기전이 되었으며 전 세계를 큰 혼란으로 몰아가는, 인류 역사상 이전에 없던 큰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이 없었어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도화선이 된 것은 황태자 부부의 죽음이 맞고, 그 죽음을 가져온 청년은 세르비아의 가브릴로 프린치프다. 이 책의 주인공!


사건 당시 가브릴로는 19세였다.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사형판결은 피했고 징역 20년을 선도받지만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얼마만큼의 증오가 따라오면, 얼마만큼의 각오가 다짐되면 19세 청년이 이런 과격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찔렀을 때 스무 살이었고, 윤봉길 의사가 물폭탄을 던졌을 때는 24세였다. 100년 전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좀 더 어린 사람이 좀 더 어른으로 인식되기는 했었다. 또 시절이 하수상할 때에는 일찍 철들 수밖에 없는 게 또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그림으로는 절대 자기들 나이로 안 보인다. 거사 몇 년 전 연애 시작할 때의 모습인데 십대 중반의 나이로는 결코...;;;;)


발칸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기 좋았다. '녹색의 땅'이란 뜻 답게 푸르고 기후도 온화했고,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곳인지라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에 딱 좋았다. 늘 바다로 나갈 출구전략만 찾는 러시아의 눈독을 받아야 했고, 그런 러시아를 견제하는 영국이 중동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땅이었다. 고대로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제국의 침략대상이었고, 훈족의 침입에 이어 십자군 전쟁 때도 살육의 현장이 되었으며,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도 어김 없이 지나간 땅이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 덕분에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고,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가 뒤섞였으며, 여기에 이념분쟁까지 끼어들었으니 유럽의 화약고란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발칸반도는 400년 이상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에 이어 18세기까지는 세계 경제대국 2위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였다는 것이 증명되던 그 시점에 오스만 투르크도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이탈리아에게도 졌다.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는 똘똘 뭉쳐서 오스만 투르크와 맞붙었다.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다. 전쟁은 어이없게도 두 달 만에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끝났고, 이 늙은 제국은 발칸반도의 영토 대부분을 잃는다. 좀전까지 한 편이었지만,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은 다시 분열해서 싸웠고, 마케도니아를 삼키려고 했던 불가리아가 다른 발칸반도 나라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1913년 2차 발칸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일년 전의 일이었다. 


전리품을 챙겼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에 병합해 버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때문에 신경질이 난다. 남슬라브족의 왕국을 세울 기회를 오스트리아 때문에 놓쳤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가 자신들이 놓쳤다고 여기는 땅 보스니아에 온다. 그것도 자신들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날짜, 비도브단의 날에 온다. 민족감정을 건드렸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근거없는 자신감이었을까. 자신들의 날개 아래에서 보스니아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긴 것일까? 암살 위험에 대한 경고가 누차 제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도 '그날'을 꼭 집어서 보스니아를 방문한 것은...


아무튼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는 아들은 자살, 아내(엘리자벳 황후)는 암살로 잃고 후계자로 내세운 조카마저도 잃었다. 그리고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군인만 1000만 명 가까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2천만 명이 넘으며 민간인 희생자도 1,100만 명을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대전이 일어난다. 


물론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 전쟁의 결과를 보기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이 전쟁의 결과를 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확실한 확신범이었으니까. 





거사에 참여한 일곱 명은 모두 '검은 손' 회원이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이 그들의 모토였다. 아버지가 사제였던 트리프코 그라베주는 늘 아버지의 업신여김을 받곤 했는데,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하려는 일을 짐작하는 순간 지지해 주는 장면이다. 종교를 넘어서는 민족감정이 한편으로 섬뜩했다. 물론 민족을 뛰어넘는 종교는 더 끔찍하지만...



덴마크 만화가의 작품인데 그림체가 독특하다. 그래픽 노블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판화로 그린 것 같기도 한데 또 인물이 등장한 걸 보면 펜으로 그린 것 같고... 둘을 섞어서 작업했을지도. 확실히 가브릴로가 태어날 때를 묘사한 저 장면들은 판화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 거대한 세계대전의 결과는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전쟁에 불씨를 제공한 세르비아는 승전국이 되어 주변 나라들을 통합해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되었고, 곧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까지 합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 그 유고슬라비아가 지금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다시 해체되기까지 인종청소까지 해가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마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당연히 잘못한 일인데, 그 유대인이 세운 나라 이슬라엘이 지금 주변 나라들에게 하고 있는 학살을 생각하면......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 같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을 대상으로 치룬 거사들은 그래 마땅했다고 여겨지는데, 낯선 이름들의 외국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모두 공감이 가질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유겠지만, 일단 그로 인해 일어난 파장이, 그 결과의 규모가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만약 이 책에서 오스트리아의 압제가 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또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보스니아도 남슬라브족의 대통합을 간절히 바랐던 게 드러났다면 조금 다르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슬라브 민족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해방된 범남슬라브족의 통일을 믿습니다. 

나는 테러로써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사악한 것을 파괴했으니, 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선한 일을 행하였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생각이 자라났고, 그래서 우리는 암살을 결행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를 변론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1914년 10월 23일, 사라예보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범정 최후진술  -227쪽



민족주의는 언제나 뜨겁다. 청년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누군가의 광기를 자극하여서 집단 학살에 첨여하게도 만든다. 이것이 '애국심'과 결합하면 그 힘은 더 커지고 파괴력도 덩달아 커진다. 너무 없는 것도,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혼란감을 주고 또 곱씹어 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치이며 또 메시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거쳐온 탐욕의 역사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절절하게, 이 노래가 생각난다. 




존 레논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 -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Any You -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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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11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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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본 연재분이 아닌 단행본으로 설희를 보는 게 얼마만인지... 족히 몇 년은 기다린 것 같다. 팝툰으로 설희를 봤던 게 2009년이고, 다음에서 한동안 연재하는 걸 보았다. 그래서 내내 이미 본 것을 복습하는 단행본이었는데, 처음으로 보지 않은 내용인 것이다. 아, 반갑고 반갑다. 


여전히 배경은 강원도이고, 관계들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늘 뒷걸음치기 바쁜 세라가 모처럼 자기 감정에 솔직해졌고, 여전히 조건이라는 전제 하에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이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계속해서 제안이 들어온다. 사람은 쉽사리 성정이 바뀌지 않지만, 세라도 스스로를 위해서 좀 더 내지르고 살았으면, 도전해 버렸으면, 한번쯤 될대로 되라지~ 하며 좀 막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설희와 세이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세이는 조금씩 전생을 기억해 가고 있고, 설희는 그가 기억해내는 전생과,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를 맞춰가면서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다. 자신의 과거에 닿아 있던 인물의 전생을 추적해가는 게 그녀의 목표였지만, 그 목표를 이루고 난 다음 일은 그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이의 말대로 그녀는 늘 과거 속에서만 살지 미래가 없다. 죽지 않고 사는 불사의 몸이기에 더욱, 그녀에겐 미래가 없다. 이 역설적인 진실이라니!


400년 전에 가보았던 전봉사. 천년을 이어온 사찰은 옛 모습을 얼마만큼이나 남기고 있을까. 건물은 흔적을 찾기 어려워도 기억은 쉽사리 잊지 못하겠지. 게다가 그것이 그들의 신혼 여행이었다면... 



건물 그림이 자연스러운 것에 비하면 인물 그림은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그게 강경옥 샘의 매력이긴 하지만.

설희가 자동차 뒷좌석에 기대어 자고 있는 건데, 시트에 기댔다기 보다는 침대에 누워 있는 듯한 모습...



그런데 또 오죽헌 모습은 아주 보기 좋다. 배경 어이스트가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건물은 반듯하니까 사진처럼 나오고 인물만 부자연스러운 걸까? 대학 때 갔었던 오죽헌은 무척 인상 깊었다. 검은 대나무가 신기하기도 했고...



쉽게 잠들지 못하고, 또 쉽게 잠들 수 없던 깊은 밤이 그림에서 느껴진다. 



잠시 나왔던 백여 년 전 설희의 모습이다. 만주에 가겠다고 한 건 혹시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려고 했을까?


이렇게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조국'이라는 말은 사실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땅에서만 내내 살았던 것도 아니고... 그녀라면 국가는 초월해서 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만주라고 하니까 왠지 독립운동 자금이 생각났다.^^


베라의 생각대로, 불사의 몸이 되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여전히 허덕이며 산다면 길게 사는 인생이 도리어 지치게 할 것도 같다. 대단한 인류애와 탐구 정신으로 학문에 매진한다든지, 의학 발전에 이바지한다든지, 아니면 예술의 길로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설희는 요리 따위는 아주 잘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익힐 기회도 충분히 있었다. 그것 말고는 또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그저 전생만 몇 백 년 동안 기다리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녀의 외롭고도 서러웠을 그 빈 시간들이 궁금하다. 


위기가 닥쳤고, 그 위기는 다시 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 그 변화가 설희에게도 따스한 힘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그녀의 짙은 고독이 조금은 사그라들길 바라면서...... 


이제 그녀도 바꿀 수 없는 과거보다, 채 닥치지 않은 미래의 시간에 좀 더 기대며, 기대하며 살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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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4-10-0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희 이번 11권은 연재했던 분량이 아닌거군요. 저도 그럼 처음 보는 이야기일 거 같은데요.
설희는 몇 권이나 더 이어질까요.
저 그림 속의 오죽헌, 전에 가본 적이 있긴 한데요, 아마 설명이 없었다면 못 알아봤을 거에요. ^^
마노아님,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마노아 2014-10-10 14:20   좋아요 0 | URL
무료연재했던 분량이 지난 10권에서 끝났고 11권부터는 아마 유료 연재 분량인 것 같아요. 근데 어디서 연재 중이시지...???
80년대부터 활동하시던 그 시절 여류 작가님들 활동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까 강경옥 샘의 설희는 가뭄 끝의 단비예요. 전 이야기가 길게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옛 한옥이 비슷비슷해서 정말 설명 없으면 알아보기 힘들겠죠?
서니데이님! 이름처럼 화창한 오후예요. 오늘 내일은 낮기온이 제법 높네요.
이 따스함을 우리 같이 즐겨요. 유후~
 

10월은 연구수업 준비로 주로 1차 세계 대전 중심으로 책을 보고 있다.

여러 책을 보느라 전권 다 읽지는 못하고 발췌해서 보고 있다.

나로서는 아주 드문 읽기 방법인데 이것도 은근 마음에 들어서 조금 놀랐다. 일단 경제적이잖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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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ION 과학

제 2234 호/2014-10-08

 

[이달의 역사] 우리의 글자 ‘한글’에 담긴 세계적 창의성


세상에는 온갖 언어가 존재한다. 국제하계언어학연구소가 운영하는 사이트 에스놀로그(Ethnologue)는 세계 곳곳에 현존하는 언어를 7천 개 이상으로 파악한다. 언어를 글자로 표현한 문자의 방식도 그만큼 다양하다.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본따서 그려 넣는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기록하지만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라틴문자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아랍문자, 아무리 복잡한 요소도 하나의 칸 안에 집어넣어 글자를 만드는 중국의 한자, 진흙판에 쐐기 모양을 찍어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와 같이 창의적인 글자들이 많다.

문자는 사람이 발명해서 사람이 사용한다. 많은 민족과 국가가 나름의 글자를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낸 창제자와 창제 연도가 명확하게 기록된 사례는 하나뿐이다. 우리나라의 글자 ‘한글’이다.

한글의 본래 이름은 ‘언문’이었다. 평민이 쓰는 글자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세종실록 중 1443년의 맨 마지막 기록인 음력 12월 30일 편에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 3년이 거의 지난 1446년 음력 9월 30일 편에서야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 책이 완성됐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은 글자의 명칭이면서 책의 제목인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불렀다가 1910년대에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한나라글’과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자를 창제한 원리와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책은 세계 언어 중에서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훈민정음은 세종 대왕이 직접 사용법을 설명한 ‘예의’와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 원리를 설명한 ‘해례’로 구성된다. 그러나 1940년 경상북도 안동의 어느 고택 다락방에서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만이 나돌았다. 일제 강점기 때는 격자무늬로 돼 있는 창살을 보다가 ㄱ, ㄴ, ㅁ, ㅂ의 모양을 떠올렸다거나 인도와 몽골의 고대 글자에서 그대로 가져왔다는 주장이 나돌았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자 모든 의문이 풀렸다. 자음과 모음은 왜 완전히 다르게 생겼는지, ㄱ은 왜 꺾인 모양인지, 모음은 왜 조합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상세히 설명돼 있었다. 창제 당시 최만리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이 거센 반대를 했던 이유도 밝혀졌다.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과 원리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엄밀한 법칙과 획기적인 창의성이 담겨 있었다.

한글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사용해 왔다. 한자는 실제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낸 상형문자에서 출발했다. 이후에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한 지사문자, 상형과 지사를 합쳐 새로운 뜻을 나타낸 회의문자, 뜻 부분과 음 부분을 결합시킨 형성문자, 본래의 의미가 달라져 새 글자로 쓰인 전주문자, 발음이 비슷해 다른 용도로 차용된 가차문자 등이 덧붙여졌다.

이처럼 한자는 ‘모양’과 ‘소리’와 ‘뜻’이라는 3가지 개념을 한데 엮어서 하나의 글자로 만든 체계를 가지고 있다. 상형, 지사, 회의는 모양과 뜻이 일치하고 형성, 가차는 소리와 뜻이 일치한다. 그러나 모양이 소리와 일치하는 경우는 없었다. 글자의 모양만 가지고 발음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글이 창제되면서 모양과 소리를 일치시킨 표음문자 체계가 탄생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이두’와 ‘향찰’은 한자의 소리를 가져다 쓰거나 뜻을 바꿔 사용했을 뿐 완전히 새로운 문자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글은 자음과 모음 모두가 입 안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따서 만든 완전한 표음문자,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음소문자다.

최만리는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용음합자는 옛것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소리를 이용해서 글자를 만든다’라는 뜻이다. 모양과 소리를 일치시키는 이 방식은 한자에는 존재한 적 없기 때문에 성리학자로서 반대한 것이다. 한글의 원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글은 어떤 점에서 한자와는 전혀 다른 원리를 가졌다는 것일까. 우선 자음부터 살펴보자. 훈민정음 해례본은 자음을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아음(牙音)’은 발음하는 데 혀뿌리가 쓰인다. 아음 중에서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떴다’라고 설명한다. 아음에는 ㄱ 이외에 ㄲ, ㅋ, ㆁ(옛이응)이 있다. ‘설음(舌音)’은 혀끝이 발음에 사용된다. 해례본은 ㄴ에 대해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ㅁ, ㅂ, ㅃ, ㅍ 등 ‘순음(脣音)’은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모양이다. ㅅ, ㅆ, ㅈ, ㅉ, ㅊ 등 ‘치음(齒音)’은 앞니에 혀끝이 닿았다 떨어지면서 소리가 난다. ㅇ, ㆆ(된이응), ㅎ, ㅎㅎ 등 ‘후음(喉音)’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다. 발음의 원리뿐만 아니라 발음 기관의 형태까지 감안해 모양과 소리를 일치시킨 것이다.

특히나 라틴문자에서는 완전히 다른 글자인 m(ㅁ), b(ㅂ), p(ㅃ)를 순음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고 비슷한 형태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음성학의 수준이 현대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한다. 된소리를 표현할 때는 ㄱ, ㄷ, ㅂ, ㅅ의 자음을 반복해서 ㄲ, ㄸ, ㅃ, ㅆ을 만들었다. 거센소리를 나타낼 때는 획을 추가해서 ㅋ, ㅌ, ㅍ, ㅊ으로 기록한 것도 놀라운 수준이다.

모음도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땄지만 성리학과 음양오행 사상까지 결합시켰다. 중국 고전서 ‘주역’은 하늘, 땅, 사람을 ‘천지인 3재(天地人三才)’라 해서 철학의 기본 요소로 놓았다. 세종 대왕은 자음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면 모음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천지인의 기본 요소를 이용해서 모음 11자를 만들었다.

중심이 되는 ㆍ(아래아)는 ‘혀가 오그라들고 소리가 깊으니’ 제일 처음에 존재한 하늘을 뜻한다. ㅡ는 ‘혀가 조금 오그라들고 소리가 깊지도 얕지도 않아 평평하니’ 땅을 가리킨다. ㅣ는 ‘혀가 오그라들지 않고 소리가 얕으니’ 그 다음에 생겨난 사람을 나타낸다. 3재를 결합해 ㅏ, ㅓ, ㅗ, ㅜ, ㅑ, ㅕ, ㅛ, ㅠ까지 합하면 모두 열한 글자의 모음이 된다.

한글이 다른 문자와 더욱 차별화되는 점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한 음절을 하나의 글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음절의 첫 자음인 ‘초성’, 모음인 ‘중성’, 끝 자음인 ‘종성’을 한 칸에 담아서 글씨를 쓰도록 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획기적인 발상이다.

훈민정음 덕분에 사람들은 한자처럼 글자에 담긴 뜻을 생각하는 일 없이 주변의 소리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의 후서를 작성하면서 “바람 소리, 학과 닭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도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기록한 것도 한자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그렇다면 한글은 세종 대왕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발명된 것일까. 중국 명나라의 영락제가 펴낸 ‘성리대전’이 세종 원년에 전래됐는데, 그 중에서 권7부터 권13까지 일곱 권이 음성학과 관련된 내용이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범어(梵語)’라 불리던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기록하는 방법이 함께 논의됐고,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음성학의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산스크리트어나 성리대전의 음성학에 관심을 보이고 깊이 연구해 마침내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어낸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 게다가 왕이 직접 공부하고 명령을 내려 국가 차원의 문자 창제를 진행함으로서 완전한 표음문자 체계를 만들고 전파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세종 대왕의 업적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10월 9일은 2006년부터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한글날’이다. 여느 휴일처럼 TV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미 560년 전에 언어의 비밀을 터득한 세종 대왕과 학자들의 놀라운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세종대왕을 기리고 한글 창제를 축하하는 갖가지 행사들이 한글을 사용하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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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9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언니가 호들갑을 떨며 황선미 책을 추천했다. 알사탕 500개에 적립금 3천원 준다며 얼른 주문하라고 했다.

하루 버티면 신한카드 할인인데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가, 책베개 관련 주문은 오늘 하리라 마음 먹고 황선미 책만 주문했다. 신간이니까 만원 미만이지만 무료배송이니까. 그런데 웬걸, 오늘 황선미 작가의 책이 알사탕 1,000개에 적립금 천원이다. 아씨, 오늘 주문하는 게 더 이득이잖아!!!


암튼, 오늘 주문할 책베개 받기 프로젝트 책들을 골랐다.










눈먼 자들의 국가는 세월호에 대해서 작가들이 한마디씩 한 책이다. 동시집도 있던데 그쪽은 별로 관심이 안 갔고 이 쪽으로 시선이 갔다.

이노센트는 속죄 덕분에 반해버린 이언 매큐언의 신작이고, 장미와 주목은 며칠 전에 읽은 '봄에 나는 없었다'에 반해서 사게 되었다. 오늘 사면 알사탕 1,200개다! 

나, 꽃으로 태어났어는 관심 가는 팝업북이고, '서울 시'는 이주의 반값 도서다. 설희는 사던 건데 신작 나와서 구입~

박민규의 신작이 나왔는데 아주 짧다. 이건 다음 주문에 포함시킬 예정이다.


언니는 어제 '장서의 괴로움'을 이미 받았다. 그러니 나는 '무진기행'을 고르겠다.ㅎㅎㅎ

책베개는 생각보다 제법 컸고, 촉감도 훌륭했다. 책상 위에 두고 짧게 낮잠 잘 때 딱이다!


다른 녀석들이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일단 적립금을 좀 모아서 재도전하겠다.

(안 사겠다는 말은 아니 나오니 큰일일세! 그나마 달랑 네개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도 니콜라 냄비받침에 미련이 남아서리...ㅜ.ㅜ )










언니는 오래 전에 읽은 무진기행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무진기행을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었다.

내가 발견하고 지웠다. 그리고 내 책꽂이에 있던 책을 갖다 주었다. 더불어 루시드 폴과 마종기 시인의 '아주 사적인 긴 만남'도 함께 갖다 주었다. 최근 후속편이 나오자 전작에 관심을 가졌던 것. 


언니는 절판본을 중고샵에서 구했다며 신이 나서 자랑을 했다. 읽고 빌려주겠다며~

나도 이주 뒤에는 자유의 몸이 될 터, 그때 읽어주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두 자매가 책장이 미어터지도록 책을 사들이고 있는데, 읽는 건 그닥 없는 것 같....;;;;


아무튼, 나도 책베개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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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0-02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팝업북이라니 탐이난다♥♥

마노아 2014-10-02 11:40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아무개 2014-10-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게 갖고 싶은데
사고 싶은 책이 없어요.
없어 없어 없어!!!!!!!!!!!!

1년중에 유일하게 바쁜 10월입니다.
일년치 일을 10월 한달동안 다 몰아서 하는것 같네요.
마노아님도 연구수업 잘 마치시길!^^

마노아 2014-10-02 22:08   좋아요 0 | URL
이런 이벤트 열 때마다 꼭 넣어야 하는 대표 책이 마음에 드는 게 없거나 이미 산 책일 경우가 많아서 책 고를 때 난감해요..;;;; 그런데도 책베개는 다 갖고 싶어요ㅜ.ㅜ

아아, 요새 연구수업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폭발하네요. 안 아픈 데가 없다능..ㅜ.ㅜ
마인드 컨트롤~~~~ 잘 해낼게요.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