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SION 과학

제 2209 호/2014-09-03

 

차례상에 담긴 음양의 법칙

“일 년 삼백육십오일 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
38년 만에 가장 빨리 맞는 올해 2014년의 민족 명절 추석(秋夕).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 ‘달 밝은 가을밤’이라는 의미로, 연중 8월 한가운데 달빛이 가장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은 ‘크다’,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이다. 또 가배(嘉俳), 가배일(嘉俳日),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도 한다.

■ 차례 상차림에도 ‘음양’의 이치가 있다

추석날 행사의 으뜸은 바로 차례다. 차례는 ‘차를 올리면서 드리는 간략한 예’를 뜻하지만, 이는 차만 올리자는 뜻이 아니라 ‘술을 올리더라도 차를 빼놓지는 말자.’라는 의미다.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는 상차림은 기본이다. 흔히 제사 음식을 제수라고 하고, 제수를 격식에 맞춰 차례상에 올리는 것을 진설이라고 한다. 제수는 각 지방마다 나오는 특산품이 달라 지방과 가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제수를 놓는 위치 또한 다소 다르다. 그 때문에 제수 진설에 말이 많다. 여북해서 ‘남의 제사에 곶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참견 마라’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래도 기본 원칙은 있다. 추석 차례상은 방향에 관계없이 지내기 편한 곳에 차리면 되는데, 이 경우 ‘예절의 동서남북’이라 하여 신위(神位, 지방)가 놓인 곳을 북쪽으로 한다. 그리고 제사 지내는 사람(제주, 祭主)의 편에서 차례상을 바라보았을 때 신위의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다. 신위를 북쪽에 놓는 것은 북쪽이 음양오행설의 오행 가운데 수(水)를 뜻하고 가장 높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상을 높이 받들겠다는 뜻이다.

차례 상차림에도 음양의 법칙이 존재한다. 제수품마다 나름의 의미가 있어, 놓는 위치와 수가 다르다. 예를 들어 생선을 놓을 때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는 두동미서(頭東尾西)의 방향성을 갖는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동쪽은 남쪽과 더불어 양의 방향이다. 동쪽은 해가 솟는 곳으로 소생과 부흥을 뜻하므로 머리를 동쪽에 둔다. 반면, 해가 지는 서쪽은 동쪽과 반대되는 암흑과 소멸을 상징하므로 꼬리는 서쪽을 향하도록 한 것이다.

또 음양의 원리에 따라 땅에 뿌리를 두고 얻어진 음식은 음(陰)을 상징한다고 해서 종류의 수를 짝수로 했고, 그 이외의 음식은 하늘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해 양(陽)의 수인 홀수로 맞추려고 했다. 한마디로 우주 삼라만상이 녹아든 상차림이다.

차례 상차림은 총 5열이 기본이다. 각각의 열은 과거의 조상들이 먹어왔던 음식을 순서대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시기적으로 가장 먼 수렵·채집 시대에 먹었던 음식을 의미하는 과일과 나물, 채소를 맨 앞쪽과 둘째 줄에 놓고,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익혀 먹었던 것을 의미하는 음식인 전류, 농경 시대에 들어서면서 먹었던 주식과 반찬을 의미하는 탕, 적, 메(밥), 갱(국) 등이 나머지 세 줄을 장식하고 있다.

■ 진설과 제수에 담긴 의미들

1열은 제주와 가장 멀리 있는 곳을 삼는다. 1열에는 메(밥)와 갱(국)을 놓는다. 추석엔 메(밥) 대신 송편을 올린다. 송편을 올리는 이유는 송편이 추석의 상징적 의미인 둥근 달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때 갱(국)은 동쪽(오른쪽)에, 메는 서쪽(왼쪽)에 놓는다. 송편과 함께 밥도 올리는 경우, 반서갱동(飯西羹東)이라 하여 밥과 술잔은 왼쪽, 국과 송편은 오른쪽에 놓는다. 이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2열에는 세 가지의 적과 전을 놓는다. 어동육서(魚東肉西)에 맞춰 어류는 동쪽, 육류는 서쪽에 둔다. 하늘로부터 얻어진 음식이므로 적과 전을 합해 홀수로 놓는다. 3열에 올라가는 탕은 어탕, 육탕, 계탕을 모두 올리거나 한 가지만을 놓는다. 탕도 하늘로부터 얻어진 음식이라 홀수로 올려놓는다. 탕은 건더기만을 떠서 놓는데 여기에는 조상들이 먹기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4열에는 삼색 나물과 식혜, 김치, 포 등이 올라간다. 이때 좌포우혜(左脯右醯)를 원칙으로 삼는다. 북어와 대구, 오징어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에 둔다.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북어는 우리나라 동해 바다의 대표적인 어물이자 머리도 크고 알이 많아 훌륭한 아들을 많이 두어 알과 같이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유래가 있다.

삼색 나물의 삼색은 검은색과 흰색, 푸른색의 세 가지 나물로 역시 귀함을 뜻하는 양(陽)의 수인 홀수이다. 흰색은 뿌리나물이라 하여 도라지나 무나물을 쓰고, 검은색은 줄기나물로 고사리를 쓴다. 푸른색은 잎나물로 시금치나 미나리를 쓴다. 뿌리는 조상을, 줄기는 부모님을, 잎은 나를 상징한다.

마지막 5열, 즉 제일 앞줄에는 과일과 약과, 강정을 둔다. 과일은 땅에서 난 것이므로 짝수 종류를 놓고, 한 제기에 올리는 과일의 양은 귀함을 뜻해 홀수로 놓는다. 이때 조율이시(棗栗梨枾)와 홍동백서(紅東白西)를 지킨다. 즉 왼쪽부터 대추와 밤, 배, 곶감, 약과와 강정 순으로 차리고 사과와 같은 붉은 과일은 동쪽, 배 등 흰 과일은 서쪽에 둔다.

■ 영양을 고려한 추석 차례상

그렇다면 왜 차례상은 조율이시, 홍동백서, 어동육서, 좌포우혜, 두동미서로 놓는 것일까? 좌포우혜의 경우 포(脯, 말린 것) 종류의 음식보다는 혜(醯, 소금에 절인 젓갈류) 종류의 음식이 좋고, 어동육서 또한 육(肉, 육류)의 음식보다는 어(魚, 생선류)의 음식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두동미서는 미(尾, 꼬리)의 음식보다는 두(頭, 머리)의 음식이 좋은 것이니 좋은 것을 먼저 먹고, 자주 먹어야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율이시의 경우 과일은 신위 쪽에서 가장 먼 줄에 있으니 약처럼 가끔씩 먹을 일이로되 뼈에 좋은 대추, 머리에 좋은 밤, 배에 좋은 배, 피부에 좋은 감의 순서로 좋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홍동백서는 백(白, 흰색) 종류의 음식보다는 홍(紅, 붉은색) 종류의 음식이 좋은 것이니 먼저 먹고 자주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들을 함께 먹어야 몸에 좋다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한의학적으로나 현대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함을 갖춘 조상들의 상차림 지혜에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다.

글 :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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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4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5 0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4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5 0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동안 1일에 들이닥치던 지름신을 물리치고 살았는데, 그넘의 냄비받침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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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곰 2014-09-02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정말 알라딘에서는 꼭 낚이는 듯. 전

마노아 2014-09-03 08:28   좋아요 0 | URL
우린 늘 알면서도 낚이고 또 낚여요..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에요...;;;;

노란곰 2014-09-0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래서 전 이벤트 첫날 바로 변신이야기 냄비받침을 포함해 질렀어요. (근데다사서욕실타일로바꾸고싶다는;;;;;)

마노아 2014-09-03 14:38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저도 두개 장만했는데 아직도 갖고 싶은 게 남았어요. 다들 넘 이뽀요. 실물 보니 더 주체할 수가 없어요. 주르륵..ㅜ.ㅜ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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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은 어느날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를 한편 빌려보았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으니, 조연 중의 주연으로 등장한 한 배우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오년 전 자신이 수염을 길렀을 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난 앨범을 찾아가면서까지 확인해본 일이다. 잠이 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이 사나이의 지나치게 조용한 일상에 큰 파문이 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비디오를 돌려보는 시절이어서 영화처럼 간단한 구글링으로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자는 아주 집요하고 끈질기게 자신과 똑닮은 배우를 찾아낸다. 해당 영화사의 영화를 대거 빌려서,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의 이름을 대조해서 해당 배우가 나오지 않은 작품의 이름은 지워가면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다. 


주제사라마구 특징이 문장이 아주 길다. 지칠만큼! 눈 먼 자들의 도시나 눈 뜬 자들의 도시는 그것도 매력이었는데, 이 작품이 그 작품만큼 재미가 없어서인지 아주 힘들었다. 읽다가 말장난에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을 겁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당신의 얼굴인지 내 얼굴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래도 당신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흉터를 생각해 봐요, 만약 내가 미쳤다면, 아마 당신도 미쳤을걸요.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글쎄요, 경찰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까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니엘 산타클라라라는 배우와 통화를 하려고 전화를 두 번 건 것뿐인데, 내가 그 배우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모욕한 것도 아니고, 해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정확히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죠. 어쨌든 아내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죠, 그거면 충분해요, 이제 전화 끊겠습니다. -246쪽


하여간 이 남자의 고단한 작업이 끝나고,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흉터까지 지닌 이 조연 배우를 만나기까지, 정확하게 이 책의 절반을 소요한다.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이쪽이야 이미 충격을 받았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상대방은 어디 그렇던가. 그러나 나와 똑같은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데, 만나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일상의 평온이 깨질 거라고 예상이 가능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 궁금증을 포기하겠는가. 나라도 당연히 만난다. 그리고 만나지 않으면 그 불안은 어쩔 것인가? 나와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버젓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좀 무섭지 않은가? 클론도 아니고? (클론이면 더 무섭겠지만...)


배우 다니엘 뿐아니라 아내 헬레나도 혼란에 빠져 있다. 남편과 똑같다는 그 사람, 이미 확인한 바로는 목소리도 똑같다.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미 상대방은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부엌으로 갔다.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어. 그녀는 원래 그렇게 단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호한 것은 아니다. 간결함이라는 재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짧고 함축적이고 간결한 말 네 마디로 다른 사람 같으면 사십 마디를 말해도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258쪽 

그녀가 눈을 떠보니 방 안이 거의 어둠에 가까운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다. 남편의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집 안에서 다른 숨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와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실일 수도 있고, 부엌일 수도 있고, 복도로 통하는 문 뒷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존재가 바로 여기 있었다. 두려움으로 몸을 떨면서 헬레나는 남편을 깨우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성이 그녀를 제지했다. 여긴 아무도 없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바깥에 누가 있을 리가 없어, 그냥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거야, 가끔 꿈이 그 꿈을 꾸고 있는 뇌에서 빠져나오는 경우가 정말 있지, 사람들은 그런 걸 환영, 환상, 예감, 징조, 다른 세상에서 온 경고라고 해, 숨소리를 내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 방금 내 소파에 앉은 사람,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환상이야, 나를 향해 곧바로 다가와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이 남자와 똑같은 손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 -252쪽


두 사람은 기어이 만났다. 만났고, 경악했다. 심지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온 아폰소마저도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 놀라운 사태 앞에서도 우스운 기싸움을 벌인다. 바로 민증깐 것이다. 


그래, 태어난 시각이 언제죠. 오후 두 시예요. 안토니오 클라로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보다 삼십 분 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십삼시 이십구분에 머리를 내밀었어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태어났을 때 내가 이미 세상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복사본이에요.-302쪽 


일방적으로 '복사본'이라는 호칭으로 불려버렸다. 졸지에 클론으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로 먼저 자신이 원조라고 강요할 만큼, 다니엘 쪽이 더 흔들렸다. 그랬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었고, 그것이 그들의 파멸을 불러왔다. 자신이 원본이라고 우기는 순간, 상대방의 여자 역시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전율이 사본이라는 첫 번째 단어가 아니라 복사본이라는 두 번째 단어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의식했다. -331쪽 


이제부터는 작품이 좀 더 흥미로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작들의 아우라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그을린 사랑'을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는 훨씬 흥미롭고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어 냈다. 소설로 시큰둥했던 반응을 오오! 하며 등받이에서 몸을 떼게 만들어 냈으니까. 


소설은 정말 나와 똑같이 생긴 유기체로서의 도플갱어를 만들어 냈지만, 영화는 그보다 나의 욕망이 투여된 또 하나의 자아로서의 도플갱어를 표현해 냈다. 전제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결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탄탄한 원작이 있기 때문에 그걸 뛰어넘는 패러디도 나오는 거겠지만, 그래도 내 저울은 영화 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래도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다가간 것은 맞다. 영화가 친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금 떠오른 이 생각은 마치 오랫동안 지연되다가 샤워기에서 떨어져내린 축복 같았다. 세 여자가 발코니에서 벌거벗고 즐긴 샤워(『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온 장면-옮긴이)가 아니라, 안전이 언제 깨어질지 몰라 불안한 아파트에 혼자 갇혀 있는 이 남자가 누린, 정화의 샤워. 물과 비누를 가지고 연민 어린 손길로 그의 몸을 더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의 영혼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샤워. 그는 일종의 향수와도 같은 고요한 마음으로 마리아 다 파즈를 생각했다. -369쪽


이런 식으로 전작의 한 대목을 가져오는 장치는 소설가가 해낼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 아닐까. 그 작품을 즐겁게 본 독자로서도 반가운 장치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도플갱어' 그리고 '동굴'까지 포함해서 주제 사라마구의 '인간 3부작'으로 꼽는다. 흠, 기왕이면 세트를 맞춰서 동굴까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이 스친다. 모두 인간의 내재된 욕망, 욕심, 진심... 이런 것들이 보였다. 동굴에선 무엇을 찾아야 할까? 몹시, 철학적인 느낌이다.


혼돈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질서일 뿐이다.

-『반대의 책』                                          -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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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8-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서 제가 보지 못한 영화 [에너미]를 떠올렸거든요. 혹시 그 영화가 이게 원작인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맞네요. 저도 에너미를 보도록 해야겠어요.

마노아 2014-08-29 09:17   좋아요 0 | URL
묵혀둔 책을 영화 보기 전에 보려고 부랴부랴 읽었어요. 근데 그러고 또 한참 지났네요. 감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역으로 책을 보게 된 경우예요.^^

아무개 2014-08-2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8년도인가 그쯤에 눈먼자들의 도시를 친구에게 선물 받았었어요.
뭐 이렇게 재미없고 두꺼운 책을 나더라 읽으라는거냐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십년 넘게 책장에 꽂혀만 있던 책은 얼마전 파지 할머니 손으로 넘어 갔지요. ㅜ..ㅜ

이 책 주었던 친구가 책을 참 많이 읽던 녀석이었어요. 데미안도 고딩때 이놈땜시 읽고 이게 뭔소리야 싶었던 기억이...
그러고 보면 저는 책을 읽지 않아도 많이 읽는 친구들을 항상 좋아했던거 같네요.

마노아 2014-08-29 09:19   좋아요 0 | URL
앞서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 읽을 때 꼭 그런 기분이었어요.
뭐 이렇게 재미 없이 두껍기만 할까...ㅎㅎ
책보는 친구가 많은 건 어쩐지 무척 기분 좋은 관계인 걸요. 우리도 독서 클럽 하나 만들어 볼까요? ^^ㅎㅎ
 
우리집
사이바라 리에코 지음, 김문광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언제쯤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시절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도 이런 마을이 있다면, 그건 너무 비참한 일이니까.


말도 못하게 가난한 바닷가의 마을. 십대에 이미 가출과 매춘과 약물은 기본이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일도 다반사고, 매맞는 여인과, 폭력이 일상인 남자들이 가득한 그런 마을의 이야기이다. 


책이 좋다는 소리를 몇 번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문을 열기 어려운 소재였다. 비참해도 너무 비참했고, 처절해도 너무 처절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속절없이 웃고 마는 그런 주인공들을 보며 '희망'을 떠올릴 수 있는 건지, 그들을 응원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기시감이 들었던 것은 '자학의 시' 때문이다.

그 작품도 그랬다. 초반에는 뭐 이런 매저키스트 여주인공이 다 있나 싶어 화딱지가 났다. 날마다 밥상이나 엎으며 도박하겠다고 아내의 노동에 쩔은 돈을 가져가는 그런 남자를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라니...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냐고 화를 내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놓고는 작품을 다 읽을 무렵에는 막 눈물 나게 만드는,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냐고 외치게 하던 그 작품이 떠올랐다. 비슷하게 성의 없는 그림체고, 비슷하게 짤막한 이야기들의 연속이건만, 마지막에 다달을 때에는 어떤 철학마저도 느끼게 하고, 가슴 깊이 찐하게 우러나오는 감동 같은 게 있었다. 이런 아픈 이야기, 비참한 이야기에 감동 받기 싫었는데 말이다. 



여자를 울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저버린 자신을 반성하는 남동생. 그런 동생에게 '절대'란 건 없다고 말해주는 누나.

최대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니 세상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에도 동생을 용서해주겠다고 말하는 이 속깊은 누나.

그런데 누나는 거의 사기단 수준의 창녀였고 동생은 어린 아이를 앵벌이 시키는 폭력범이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조화라니...



새끼는 아무 여자나 다 낳지만 모두가 엄마가 되는 건 아니라고, 그래서 자기는 자식을 버렸다고 당당히 말하는 이 호탕한 아줌마는 괭이 할매라고 불린다. 모두 열다섯 정도의 아이를 낳았지만 열손가락 안으로 살아남았고, 집집마다 버려져서 이동네 저동네에 살고 있다. 버려진 아이들이 엄마를 곱게 볼 리 없지만 끼니를 챙겨주며 살뜰히 맞아주는 딸도 그 중에 하나는 있다. 이 괭이 할매가 죽었을 때 온동네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모인다. 그리고 죽은 엄마를 찾아온 아이들이 만나면서 이웃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서로가 형제임을 확인한다. 그런 동네다. 이곳은...



자기 인생에 익숙해지란 말은 얼마나 답이 없는가. 초연해지라는 것인가, 인정하고 포기하라는 것인가...



삶이 너무 비참한 까닭에, 조그마한 행복에도 크게 기뻐하는 누나의 삶의 자세가 돋보인다. 

행복을 너무 많이 갖다 주면 다 흘러버려서 아깝단다. 자신의 손은 작으니까.



한 걸음짜리 충고 때문에 350보 쯤 후퇴한 사랑이라니... 꼬마가 누나 닮아서 개똥철학이 깊어지고 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들. 그 말이 딱 맞을 것이다.

분쟁 지역인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하고 돌아온 어느 기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곳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니 그게 뭔지를 못 알아듣더라고.

미래에 뭐가 되고 싶냐고 다시 물어보니 '미래'라는 말을 모른다는 것이다.

설명에 설명을 거듭했지만 끝내 이해시키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전날 미래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 지역이 폭격으로 주민들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 아이들이 꼭 그랬다. 십대에 이미 처절한 삶의 고통을 맛보고, 20대에 이미 늙어버린다. 

젊어서 칼맞거나 약물중독으로 사망하는 일도 다반사다.

온전히 제 수명을 살아가는 아이를 축복이라 해야 할지, 저주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여자 등처먹는 남자들이 부지기수고, 그걸 수다거리 안주거리로 삼아 껄껄껄 웃어버리는 여자들이 즐비한 곳...

그게 이 마을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서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었던 똥파리 같은 지저분한 아이들...



그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쩌면 그 아이들은 모두 친자식이 아닐 것 같은 그런 아저씨에게서 자신의 미래가 겹친다. 

원래는 아이들에게 일거리를 주어서 푼돈이라도 쥐어주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 아저씨에게 일감을 주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일은 잘 못하고 연신 사고만 친다. 그런데 버릴 수가 없다. 이 가난한 아저씨와 그 아저씨의 아이들이 밟히기 때문이다.



움막만도 못한 집이 불타버렸다. 건질 세간 하나 없었겠지만 비를 피할 집한칸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하하 웃는 이 아저씨. 아이의 소풍날이었다는 것도 기억해내는 자상한 아버지다. 

이 와중에 같이 소풍가자고 말하는 이 아픈 부정...

언덕 위에 올라가 바다도 보여주고 숲도 보여준다. 이런 좋은 아빠가, 이 지독한 가난으로 좋은 아빠 노릇을 하기 어려운 이 참담한 현실을 계속 지켜보는 게 참 힘겨웠다. 그게 작품 속 픽션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맛난 걸 어딘가에 숨겨두고 잊어버리는 누나. 그러다가 몇 년 지나서 발견하면 보물상자 찾은 것처럼 기뻐하는 소박한 행복을 즐길 줄 아는 누나. 그 누나의 가장 큰 추억은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던 기억이다. 그래서 그 집이 소중했던 것이다. 그 집에서 한 울타리를 지키고 사는 가족들이 소중한 것이다.



아까 그 네아이의 아버지처럼, 주인공 형제의 누나처럼 인생을 끌어안아 주는 소중한 가족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삶을 살아갈 용기를, 최소한의 용기라도 가질 텐데, 모두가 그런 가족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족이 되어주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의사는 없지만 약쟁이는 가득한 동네. 그런 동네에 깃발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그 주인공이 차린 포장마차는 오뎅 가게다. 욕심 없이 오뎅만 팔게 놔두지 않는 세상이라는 게 함정...



누구도 끊어낼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 그렇게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청춘은 소리 소문 없이 연락두절이 되고, 그런 형을 기다리는 동생은 그런 형의 인생을 되밟아간다. 그런 인생들이 가득 모여 있는 동네의 '우리집'이다.


다시 '자학의 시'를 떠올린다. 자학이라는 단어와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시', '희망'이라곤 쥐똥만큼도 없을 것 같은 이 몹쓸 동네와 우리집에, 그런데 그 조심스러운 희망이 보인다. 감히 희망이라고 명명하기도 미안한, 그래서 더 귀하디 귀한 희망이... 


이 동네 사람들이 보다 잘 살고, 약물중독도 치료하고, 십대 소녀들이 매춘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극적인 변화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어도 품어 안으며 따뜻하게 키우려고 하는 아버지가 있고, 세상 모두가 버려도 나만은 너를 지지하겠다고 말하는 누나가 있고, 너만은 거짓말하지 않는, 정직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형이 있다. 동생이 장만해 준 발에도 맞지 않는 커다랗고 촌스런 하이힐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발이라고 행복해하는 누나가 있다. 이런 가족들... 때로 짐이 되지만 때로 힘이 되는, 때로 멍에가 되지만 때로 버틸 기둥이 되어주는 그런 가족과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이, 이토록 시궁창같고 쓰레기 같은 현실 속에서도 빛이 난다. 그들에게서 숭고한 삶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작품, 참으로 아프고, 참으로 속상하고, 참으로 고맙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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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8-25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람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좀 답답했엇습니다.

평생을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한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까 하구요...

마노아 2014-08-26 10:38   좋아요 0 | URL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저 조용히 응원해 주고 지켜봐주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살라고도, 살지 말라고도 할 수가 없어서 참 아파요...

2014-08-28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28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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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8-2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다. 특히 윗부분이요. 경찰을 뽑을 때 산수 정도는 하는 사람들을 뽑아야 하는데, 다른 것만 보나봐요. 충성심 같은 거....

마노아 2014-08-26 10:38   좋아요 0 | URL
경찰 추정 보수 집회로 하면 우리나라 인구가 1억이 넘고, 진보 집회를 경찰 추정으로 하면 한 2천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