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먼저 할 거야! - 이기심, 욕심, 질서에 대한 이야기 꿈터 지식지혜 시리즈 27
최정현 글, 유미선 그림 / 꿈터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확히 몇살인지 모르겠는데, 큰조카 세현이가 한참 뭐든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때가 있었다. 세살? 네살? 대충 그 정도였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응가를 하고 할머니가 물을 내렸다고 화장실이 부서져라 울어버렸다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박탈 당한 것에 대해서 억울해 한 것이다. 고만한 나이 대의 아이들이 많이 그렇다-고 들었다. 여기 등장한 개구리 아해도 그랬다. 뭐든 자기가 먼저 해야 하고, 혼자 해야 하고, 일단 손부터 번쩍번쩍 든다. 그 와중에 다른 친구들의 기회가 자꾸 무시되고, 혼자 너무 나대다가 질서를 어지럽혀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이 개구리의 문제는 단순히 나도 할 수 있어요! 혼자서도 잘 해요!를 뽐내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본 때를 보여줄 필요도 있는 법! 버르장머리를 고치기로 결심한 이는 주방장 돼지 아저씨 되겠다. 



접시 위에 놓인 것은 개구리가 가장 무서워 하는 악어! 이빨을 드러내고 험악한 표정을 짓는 악어가 접시에서 뛰쳐나와 당장 개구리를 잡아 먹을 것만 같다. 화들짝 놀란 개구리 아해!



기가 죽어 버린 개구리는 이제 다시 나 먼저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읽고 나서, 조금 찝찝... 아이가 변하게 되는 계기도 내게는 설득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나 먼저 하겠다-가 늘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자기한테 좋은 것만 먼저 하겠다고 해서 빈축을 샀지만, 이런 성향의 아이에게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면 '궂은 일'도 나 먼저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야단치기보다 다른 방향으로 칭찬을 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는 것도 좋지만, 그걸 위해서 공포심을 이용하는 건 좀 껄끄럽다. 


하여간! 더불어서 함께 사는 공동체의 질서를 배우는 것은 중요한 법. 읽고 난 뒤 이야기를 더 나누면 좋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정 파이 - 아빠는 나를 정말 사랑하나 봐 꿈터 지식지혜 시리즈 26
마이클 에스코피어 글, 크리스 디 지아코모 그림, 임 나탈리야 옮김 / 꿈터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식을 일삼는 아기 두꺼비에게 아빠 두꺼비는 민달팽이를 먹이고 싶다. 맛나 보이는 파이 속에 민달팽이가 감춰져 있지만 아기 두꺼비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상황! 아빠는 달팽이가 아니라 요정 파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요정인데 왜 날개가 없냐는 반응에 날개를 떼어냈다고 하는 아빠. 

요정파이 요리 과정을 보여주지만, 레시피에는 사실 민달팽이 요리 방법이 적혀 있다. 


민달팽이 파이가 요정 파이로 둔갑한 것처럼, 두꺼비 가족은 드래곤으로 둔갑한다. 아들의 상상력은 아빠의 허무한 장담이 한몫 했을 것이다. 드래곤이 맞다고 큰소리 치는 아빠! 요정 파이를 다 먹으면 날아 보겠냐는 아들의 제안에 아빠는 콜!을 외친다. 그러나 날개 없는 아빠 두꺼비가 어찌 날 것인가! 어어어, 그런데 날고 있다. 이 무슨 일???



날개가 새로 돋은 것은 아니었다. 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했을 뿐. 이름하여 파이가 아니라 진짜 요정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요정들, 드래곤 요리가 먹고 싶다고 한다. 아빠 두꺼비, 이제 자신은 드래곤이 아니라 두꺼비라는 것을 또 얼마나 열심히 설명할 것인가!


이전 꿈터 시리즈와 다른 느낌의 책이어서 엇! 하고 놀랐는데 외국 그림책 번역이었다. 그래서 스타일이 달랐구나.


편식하는 어린이에게 영양가 있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 엄마 아빠들은 소소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가끔 그런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요정 파이를 만들려고 요정 날개를 떼어냈다는 설명은 조금 꺼림칙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반전이 재밌어서 하하하 웃게 만든다. 


그나저나, 난 개구리일 거라고 여겼는데 두꺼비였다. 내가 두꺼비 어떻게 생겼는지 사실 모르는 게 아닌가... 잠시 고민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깜짝 놀랄 팝업북.
겁쟁이 아기 곰 하하! 호호! 입체북
키스 포크너 지음, 장미란 옮김 / 미세기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에 친구 집에 다녀왔다. 지난 2월 초에 아기를 낳고 분유를 전혀 먹지 않는데 모유라고 많이 먹지도 않는 아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아주 피폐해진 친구였다. 친구가 밖으로 나오기는 당분간은 힘이 들터, 내가 집으로 찾아갔는데, 도착하고 나서 생각났다. 아뿔싸! 아기 주려고 사둔 책을 안 가져왔네...;;;;;


친구 집에는 키스 포크너의 팝업북이 하나 있었다. 아기가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 팝업북은 아기와 놀기 좋은 책이지! 역시 팝업북으로 사두길 잘했어! 안 그래도 아기한테 매일 같은 책을 읽어주다보니 본인이 지겨워서 못 견디겠다는 친구에게 책을 몇 권 보냈다. 책은 어제 출발했고, 리뷰는 오늘 쓴다.ㅎㅎㅎ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자다가 깨어난 아기 곰이 집을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대체 이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기 곰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서운 동물은 다 떠올린다. 사자와 고릴라, 코끼리와 코풀소... 무섭기보다 일단 체격이 큰 동물들 같다. 팝업북으로 펼쳐지는 커다란 동물들과 이불 뒤집어 쓰고 벌벌 떠는 아기 곰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무서워진 아기곰은 엄마 아빠 방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그리고 소리의 정체가 아빠의 코고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안도해 버린다. 이제까지 무서웠던 그 소리는 이제 자장가쯤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제 7개월 된 아기가 코고는 소리를 알겠으며 사자 고릴라를 알겠느냐마는, 펼치면 무언가가 파다닥 나오는 이런 입체적인 책이 있다는 것으로도 즐거울 것이다. 움직이는 모빌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처럼.


로버트 사부다의 환상적인 팝업북이 더 아름답지만, 그건 아직 앉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주기엔 너무 고가의 작품이 아니던가!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ㅎㅎㅎ

이 무렵에 나는 '깜짝깜짝 색깔들'로 꽤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친구는 그 책이 별로라고 한다. 오랜만에 해당 책의 리뷰와 당시 찍은 다현이 동영상을 보니 다시 좋다. 난 여전히 좋은 걸~


팝업북을 직접 만드는 것도 태교에 좋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다가, 아이 성질이 나빠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또 불쑥 들었다. 하여간! 이 책 재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OCUS 과학

  제 2185 호/2014-08-04


큰빗이끼벌레, 자연이 보내는 경고?!

최근 4대강(한강ㆍ금강ㆍ낙동강ㆍ영산강) 유역에서 큰빗이끼벌레가 잇따라 출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강변에서 주로 보이더니 6월 10일 남한강에서는 강바닥에서도 발견됐다. 4대강 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박창근 가톨릭관동대 교수는 “큰빗이끼벌레가 강변에 주로 서식해 수거하면 된다던 환경부와 수자원공사의 대책은 틀렸다”며 “큰빗이끼벌레가 강바닥에 대거 서식하면서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4대강 조사위원회가 금강 강바닥을 촬영한 영상에서는 큰빗이끼벌레가 강바닥에 대거 서식하고 있었다.

■ 1㎜ 크기 개체가 모여 군집 생활

해삼처럼 생긴 큰빗이끼벌레는 1㎜ 안팎의 작은 개체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태형동물이다. 2014년 6월 금강에서 발견된 2m 크기의 군집은 수많은 큰빗이끼벌레가 모여 있는 셈이다.

생소한 이름 탓에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큰빗이끼벌레는 1994년과 2001년, 2004년의 봄ㆍ여름철 갈수기 때 대청호 등에서 이미 존재가 보고됐다. 이 외래종이 들어오게 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양식장에서 키우는 수입 물고기를 통해 큰빗이끼벌레 휴면아(休眠芽)가 유입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휴면아는 내부의 세포덩어리를 딱딱한 키틴질이 둘러싸고 있는 태형동물의 특수 구조로, 열악한 생존 환경을 견딜 수 있게 한다. 그러다 온도 등 생육 조건이 맞으면 세포덩어리에서 새로운 개체가 형성된다.

큰빗이끼벌레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몸의 99.6%가 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벌레의 독성 여부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견이 엇갈린다.

강원대 최재석 환경연구소 연구 교수는 큰빗이끼벌레 자체에는 독성이 없지만 집단 폐사하는 과정에서 암모니아 등 위해성 물질이 다량 유출돼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큰빗이끼벌레의 농도가 15%인 수조에 넣은 물고기는 40분 만에 모두 폐사했다. 군체가 부패하면서 발생한 암모니아 탓이다.

반면 환경부는 큰빗이끼벌레가 독성이나 수질 오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들 벌레가 유기물을 섭취해 일시적으로나마 수질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 쉽사리 한쪽으로 결론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 유속 감소ㆍ개흙 등 뚜렷한 변화

다만 이번 논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큰빗이끼벌레가 왜 4대강에서 대거 번식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환경 전문가, 시민단체 등은 “댐, 저수지, 호수 등 정체 수역에서 사는 큰빗이끼벌레가 4대강에 나타나게 된 것은 4대강이 강이 아니라 호수가 돼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적한다. 녹색연합 황인철 평화생태국장도 “4대강에 16개 보를 세워 물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이 돼 버렸다”며 “강이 호수처럼 변하는 호소화(湖沼化)가 상당부분 진척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 4대강조사위원회가 6월 6~11일 4대강 27개 지점에서 유속을 조사한 결과 12곳(44%)의 유속이 초속 2㎝이하로, 측정 불가능한 정도였다. 박창근 교수는 “4대강 사업 이전에는 강물이 흐르는 속도가 초당 50~100㎝였다”며 “그때보다 최소 30분의 1 수준으로 유속이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4대강 보 상류 22개 지점의 강바닥 표면에서 20㎝ 깊이로 채취한 하상토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16분의 1에서 256분의 1㎜ 크기인 끈적끈적한 개흙(뻘)의 비율이 평균 28%에 달했다고 밝혔다. 4대강 사업 이전에는 강바닥 개흙의 비율이 10% 미만이었으나 현재는 낙동강 20%, 영산강 20.5%, 금강 54.75%, 한강 16.33%에 달했다. 국토환경연구소 이현정 책임연구원은 “유속이 느려지면서 흙 등이 퇴적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하천생태계 변화 톺아봐야

문제는 이 같은 환경에서는 녹조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고, 수질 역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유속이 느려지면 물의 자정능력이 떨어져 부영양화가 일어나기 쉽다. 게다가 수온까지 올라 식물성 플랑크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녹조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

이현정 책임연구원은 “개흙이 덮으면서 강바닥이 산소가 부족한 혐기성 상태로 변해 저서 생물들이 살기 매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하천 생태계가 고유 모습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다. 측정 결과 물에 녹아있는 산소량을 나타내는 용존 산소량은 강 표면의 경우 4~6ppm을 기록했지만 강바닥은 0.5ppm 수준으로 거의 0에 가까웠다. 2013년 3월 남한강의 강천보에서 재첩이 집단 폐사했는데, 재첩이 살던 모래 위에 개흙이 덮이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됐었다.

재첩 집단 폐사처럼 강바닥에 개흙이 계속 쌓이면 모래층에 사는 생물들은 호흡을 못해 죽게 되고, 이들의 사체가 부영양화를 초래해 녹조 현상이 가속화된다. 또한 큰빗이끼벌레는 식물성 플랑크톤과 인ㆍ질소 등 영양 염류를 먹이로 하기 때문에, 녹조는 큰빗이끼벌레의 확산의 원인이 된다. 대거 번식한 큰빗이끼벌레가 암모니아를 내뿜고 폐사하면서 하천 생태계를 악화시키고, 이들 사체가 또 다시 부영양화를 이끌어 녹조 발생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이 계속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환경운동연합 염형철 사무총장은 “4대강 보를 철거하는 것은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실행으로 옮기긴 어렵다.”라고 하면서도 “보의 수문을 개방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우선 수문을 열어 강물이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큰빗이끼벌레는 4대강 사업으로 신음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일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일은 큰빗이끼벌레의 생리, 대량 발생 원인, 개체수 증가가 하천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4대강 사업으로 인한 하천 생태계의 변화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글 : 변태섭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찔레꽃 - 가난한 삶에서 피어난 어머니들의 노래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 지음, 구자행 엮음 / 보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근무했던 학교는 한달에 두번 방통학교를 겸하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 음악 선생님이 방통학교 근무도 같이 하셨는데, 그곳의 나이 많은 학생들이 얼마나 재밌고 열정적인지를 자주 강조하셨다. 그때는 직접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 와닿지 않았는데 그 후 내가 만학도를 대상으로 하는 대안학교에 근무를 해보니 눈으로 목격한 이분들의 배움에 대한 목마름과 열정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기억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되살렸다.


이 책은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의 시를, 이분들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구자행 씨가 엮은 것이다. 평소에는 방송으로 공부를 하다가 한달에 딱 두번만 등교를 하니, 이분들과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귀했겠는가. 그런 소중한 시간을 문제 푸이로만 보낼 수는 없었다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삶을 담아내는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이분들의 삶의 한자락 한자락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다. 꾸며내고 억지로 장식한 것이 아닌, 진솔한 삶이 묻어나는 언어들은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시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읽은 중학생 소녀들의 시보다는 이쪽이 훨씬, 훨씬 더 내 마음을 움직였다. 


엄마

 

강선심 47세

 

나는 항상 엄마, 엄마다.

익숙한 소리고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다.

엄마, 내 옷 어디 있어 응?

바지는 밑에 서랍, 윗도리는 윗서랍에 있다.

알았다.

그래 놓고는 내일이면 똑같은 말을 또 할 것이다.

희수 엄마, 양말은 어디 있노?

방에 작은 서랍 두 번째 있는데.

알았다.

아! 잠시만 내가 꺼내 줄게.

양말 한 켤레 꺼낼리고 서랍을 온통 뒤집어 놓을 것이 생각나서

내가 찾아 주는 것이 속 편하다.

또 엄마 하고 부른다.

엄마, 방통 수업 몇 시에 들을 끼고?

왜? 좀 있다 할 건데.

그냥. 나도 컴퓨터해야 해서 물어봤다.

수야 엄마, 차 키 못 봤나?

잘 좀 찾아보소.

없다. 수야 엄마가 치운 거 아니가?

마루로 나가 보니 계단 위에 놓여 있다.

여기 있네.

나는 왜 안 보이지 하면서 웃는다.

아침에만 엄마 소리를 대충 스무 번은 듣는 것 같다.

동네 아줌마들도 ‘희수 엄마’ 하고 부른다.

어느 순간부터 희수 엄마가 내 이름이 되어 있었다.

저녁이면 대문 열면서부터

희수 엄마, 오늘 반찬은 뭔데?

아! 더운데 맥주 한잔 없나.

엄마, 우리 통닭 시키 물래? 맥주하고 딱인데.

우리 식구는 이런 하루하루를 행복이라 생각하고 산다.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곳은

경남여고에서 한 달에 두 번

내 이름 선심 씨가 되는 날이다.    -28쪽


늘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서만 존재하다가 출석이 불리면서 제 이름을 찾는 여고생 선심 씨! 이름이 불릴 때의 설렘이 진하게 느껴진다. 만학도 분들과 수업할 때, 학생이 꽤 많았지만 매일매일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누구누구 씨~하고 부르면 어찌나 경쾌하게 대답들을 하시는지,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하는 그 시간이 곧 음악이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의미가 있는 일인가. 가끔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호칭 대신 이름을 불러드리는 게 어떨까. 아들 딸 대신 가끔은 친구가 되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부터도~



울 엄니!

 

조신향 50세

 

가엾은 울 엄니!

너무너무 보고 싶어 목이 아프네요.

엄마!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 보는 것 같네요.

평생을 황소같이 일만 하시다가

젊디젊으신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가신

보고 싶은 우리 엄니!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보니

작은 단칸방에 사과 궤짝 달랑 하나

그 안에 그릇 몇 개 숟가락 몇 개가 살림살이 전부였다나.

거기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까지

한방에 같이 살아야 했다는 얘기. 허 참!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시집온 지 한 달 만에 어린 색시 혼자 어떻게 살라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군대를 가 버렸다네.

할머니 혼자 두고 군에 가기 걱정되어

엄마랑 서둘러 결혼하신 걸까.

 

그날 이후 엄마는 시장에 배추 트럭이 오길 기다렸다가

떼어 버리는 겉잎들을 주워 와선

김치도 담고 나물도 하고 국도 끓이고

하시다 보니 굶는 날이 더 많았다는군요.

그 때부터 엄마는 닥치는 대로 양철로 된 큰 다라이에

물건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다 보면 목이 내려앉는 것처럼 아프셨다네요.

 

어느 날은

머리 가득 물건을 이고 강을 건너다가

불어난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

떠내려갈 뻔했던 적도 있었다네요.

돌아오는 길에 밀가루라도 한 봉지 사 들고 오는 날이면

큰 부자가 된 듯 기뻤다네요.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고

아버지도 제대하셨고

단칸방에 고물고물 동생들과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네.

할머니는 꼭 새벽 네 시면 자는 나를 업고 교회를 가셨다.

교회 종을 치는 사람은 언제나 할머니였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 번도 새벽 기도 빠진 적이 없다 하셨다.

나중에서야 할머니께서 왜 그렇게 새벽 일찍

기도를 열심히 다니셨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늘 구박만 받고 사신 우리 할머니!

언제나 겨울이면 무를 숟가락으로 긁어서

우리들 입에 넣어 주시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선 울 아버지를 낳은 지

돌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는군요.

외동아들이라 오냐오냐 키웠더니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가 돼 버렸다는 할머니의 탄식 소리

 

울 아버지는

자기밖에 모르고 모든 걸 챙겨 주어야 하고

배려심도 없고 부모 공경도 모르는

그러니 엄마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을까.

성격은 얼마나 불같으셨는지

조금만 마음에 안 차면

집안을 전쟁터로 만드는 바람에

우리 엄마는 평생을 대꾸 한번 못 하고 사셨다네요.

 

천사표 울 엄마!

우리가 자라면서 보아 온 엄마는

정말 진짜 천사였어도

저렇게 마음이 고울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베풀기를 좋아하시고 심성이 너무너무 고우셨다.

가게를 하시면서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이웃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냄비에 국 끓여 나르기 바빴고

 

반찬 챙겨 드리고 김치 담아 드리고

새벽 일찍 집 앞 긴 동네 골목을

아침마다 깨끗이 쓸어 놓으시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가게에 오면

꼭 밥 먹여 보내시고

없어 본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알고

굶어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 심정 안다고

꼭 우리 엄마가 그랬다.

 

동네 어르신들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

세상에 니 엄마 같은 사람 없을 끼라.

자라면서 우리는 엄마에게 한 번도 크게 혼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감싸 주시고

챙겨 주실 줄만 아셨던 엄마였던 것 같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고달픈 삶을 선하게만 살아오신

천사 같은 울 엄니를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엄마!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며칠만이라도 저와 같이 있다 가시면 안 될까요?

꼭 하고 싶었던 말도 많이 있고

해 드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

불쌍한 우리 엄니!

엄마!

정말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68쪽



한 편의 산문을 본 듯한 이 시는 많이 아팠다. 새색시 한달 만에 신랑은 군대 가고 시엄니 봉양하고 산 시간이라니... 이기적이었던 아버지, 그게 미안했던 시어머니, 그럼에도 불평도 없이 그 식솔들 모두 챙기며 베풀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이 이 글 속에 모두 담겨 있다. 마지막 소절을 읽어 보면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러니 울 엄니께도 더 잘해야지!



우리 엄마

 

정원예 59세

 

우리 엄마는 앞을 못 보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눈은 누구보다 맑고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일흔여덟 해를 사시는 동안 남을 미워하거나 남을 해친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많이 아프십니다.

볼일 보러 가시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로

누워만 계시는 분이 되고 말았지요.

앞을 못 보는 것도 안타까운데

얼마 전에 대퇴골 수술을 하셔서 다리를 못 쓰는 날이 오고 말았지요.

이런 심정을 그 누가 알까요.

 

우리 엄마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깔끔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남의 손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마셨지요.

엄마는 자존심이 강한 분입니다. 의지도 강하시고.

자기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우리 사 남매를 아주 잘 키우셨습니다.

남들이 봉사 자식들 더럽다는 말, 남이 손가락질할까 봐

우리들을 너무나도 깔끔하게 키우셨습니다.

 

그런 우리 엄마가 지금은 가만히 누워서 계십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하는 말에 내 가슴이 찢어지고 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실수를 해 놓고, 내가 얼른 죽어야지 미안하다 미안해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고 또 찢어져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어야 합니다.

엄마 괜찮아. 인생은 돌고 돌아.

옛날에 엄마가 보지도 못하면서

우리들 똥기저귀 치우면서 키웠잖아. 이쁘게 말이야.

그래서 나도 그 빚 갚는 거야.

엄마 나 빚 갚게 아무 말 하지 말고

미안해 하지 마 알겠지.

 

우리 엄마 이름은 이외출입니다.

출아 출아 우리 출이 수고했다 잘했어 아이구 이쁘네 하니까

눈물 반 웃음으로 고맙다 하셨습니다.

 

그럭저럭 하루하루가 갑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겁이 나는지

밤이나 낮이나 나를 찾습니다.

희야 있나?

응 왜? 하면

어디 갔나 해서.

엄마 걱정 마. 내가 나가면 간다고 할게 마음 푹 놓아.

그러면 마음이 놓이는지 편안해 하십니다.

 

밤에는 내 손을 꼭 잡고 주무십니다.

어느 날 엄마가 편안하게 웃는 모습이 얼머나 아름다운지

꼭 천사 같았습니다.

그 웃음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데 너무나 찡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잊지 않을 거요 그 모습 그 화사한 웃음 그 웃음을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웃음만으로도

난 너무나도 엄마의 추억을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엄마 옥황상제의 딸이 되셔서

공주님이 되셔서 꼭 행복하세요 하니까

고맙다 내 꼭 공주님 할게 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길 그 언젠지 몰라도

살아 계시는 동안은 마음 편히 모실게요.

철이 들고 한 번도 엄마를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답니다.

누구보다도 의지가 강하신 분

누구보다도 자식을 사랑하신 분

그 사랑으로 엄마를 사랑합니다.  -80쪽


앞의 시와 비슷한 감동을 주었다. 앞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사남매를 깔끔하게, 봉사 자식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애썼을 그 마음이 그려진다. 그리 고생 많으셨던 어머니가 몸도 불편해지셨으니 이 분은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을까. 아기 같아진 마음으로 돌봐주던 자식 곁을 비울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절절하게 아프다. 어린 시절 우리 똥기저귀 갈아주셨던 그 빚 갚는 거라며, 미안해 하지 말라고 엄마 마음 다독여주는 마음은 또 얼마나 크고 깊은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 또 있을까 싶다. 아름답다. 

 


어머니의 눈물

 

이명자 44세

 

어느 날 어머니 사촌 오빠께서 오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사촌 오빠께 하룻밤만 주무시고 가시라고 하니

아니다 너 얼굴 봤으니 됐다고 하며 가신다.

어머니는 사촌 오빠 손을 잡고 차머리까지 따라가시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101쪽


짧은 시에 어머니의 그리움이 가득 묻어 있다. 아마도 시집 와서 친정 식구들 자주 못 만나고 사셨던 분 같다. 어쩌면 두 분 사이에 또 다른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짧은 시에서 드라마 한편이 써질 것만 같다.

 


아버지

 

윤미정 42세

 

한때 우리 집은 신발 가게를 하였다. 그날도 새 물건들이 진열장에 진열이 되었다. 그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빨간 구두가 있었다. 아버지 귀에 대고, 나 저 신발 한 번만 신어 보면 안 될까? 옆에 계시던 엄마가 팔아야지 하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눈물이 나서 우는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빨간 구두를 내 발에 신겨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우리 딸이 신어서 예쁘면 다른 사람도 사겠지 하셨다. -112쪽


팔아야 되는 물건이라고 눈 흘겼을 엄마 심정도, 우리 딸이 예쁘게 신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아빠 마음도 모두 크게 공감이 간다. 이런 아버지라면, 아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신발에 대한 미련을 접게 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딸의 편을 들어주면서 예쁜 추억을 남겨주셨다. 사랑이 가득한 시다.


 

어린 시절 내 고향

 

유상예 54세

 

푸른 하늘빛 받아 온 들녘에

수놓아 버린 황금빛 알알

형형색색 들꽃이 피어 있었지

 

가시 속에 숨어 영글어 터진 알밤 땡감

동무들과 주워 먹으며 좋아라 했던 곳

뒷동산이 있었지

 

조카 업고 고무줄 뛰고

공치기했던 우리 집 마당

금이 줄줄 그어진 손등에 붉은 빛이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따먹기했던

당산나무 밑이 있었지

 

장에 간 엄마 기다리며 동무들과

저기 울 엄마다

모두의 엄마가 되어 다가오면

실망하여 한자리에 앉아

한없이 기다리던 곳

바우깨가 있었지

 

뛰놀다 다치어 빨간 피가 줄줄 흐르면

뛰어가던 동무 집이 있었지

동무 엄마 놀라

된장 한 줌 붙여 동여매어 준

동무 집이 있었지

 

내 고향 산촌 그대론데

둘러봐도 둘러봐도

어버이 모습 보이지 않고

텅 빈 우리 집

 

삶의 무게 못 이겨

어리광 부리고 싶어 찾은 곳은

떼 덮인 어버이 집

옛적 어머니 모습 되어 술 한 잔 따라 놓고

나 거기 엎드려 있네

내 고향에  -119쪽


장에 간 엄마 기다리다가 저기 울 엄마다! 소리에 모두의 엄마가 되었다가, 이내 실망하며 다시 앉아 기다리던 고향 모습이 한편의 그림처럼 지나간다. 이 시처럼 가슴 가득 품을 '고향'의 이미지가 내게는 없지만, 이런 그리움은 상상해볼 수 있다. 삶의 무게가, 삶의 시간이 느껴지는 묵직한 시다.

 

 

커피 한 잔

 

남정임 40세

 

길가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았다.

향긋하고 진한 커피

기뻐할 그분 얼굴이 떠오른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집

좁고 가파른 계단을 두어 번 지나면

옥상이 나오고 회색빛 강아지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방문에서 뛰쳐나온다.

어머니, 봉생복지관에서 나온 아줌맙니다.

방문 앞에 서면 번들거리는 회색 가구와

미풍으로 돌고 있는 선풍기

자리에 누우신 어르신은

영원히 눈을 감고 있을 것처럼 누워 계신다.

안녕하세요?

눈을 뜨고 한참을 보고서야 작은 미소가 번지며

어서 와.

커피 드세요.

이번엔 더욱 기쁜 얼굴을 하신다.

삼십 원이지?

몸을 지탱하기 힘든 팔은 내 몸을 기둥 삼아

난 손목에 힘을 주어 안는 듯이 일으켰다.

죄송한 마음이 든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온 힘을 다 모으고 기대앉는 것이다.

예전에 군인이셨다.

여군! 얼마나 당당한 모습이셨을까.

아마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좋고 싫음이 분명한 여군이었을 것이다.

일그러져 있던 얼굴은 다시 평온을 되찾아서

참으로 귀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신다.  -150쪽


커피 한잔이 이리 귀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자판기 커피 30원 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독거 노인분이 여군이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시를 쓰신 분은 복지사 같은데 일상과 감정이 잘 어우러져 이분이 느끼는 감정이 독자에게도 전달되고 있다.



비가 온다

 

이명자 51세

 

나는 비가 참 좋다.

우리 아들은 구질구질한 비가 왜 좋냐고 묻는다.

아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 것인가.

언제나 바쁘게 살아온 나는

비가 오는 날은 쉴 수가 있었다.

낮잠을 잘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며 추억에 잠길 수도 있고

몸도 마음도 쉴 수가 있으니 비가 오면 행복했다.

지금도 비가 오면 행복해진다.

신호등이 없는 길을 골라 그냥 걷는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닷가를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법당에 홀로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곳이 극락이다.  -159쪽


얼마나 고단했으면 내리는 비가 반가웠을까.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극락을 찾아내는 소박한 마음에 인생의 깊이가 느껴진다. 지금 이시간,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두 해 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심지어 다리가 부러져도 결코 결석 없이 열심히 학교에 다니시던 분이 떠오른다. 이 책을 먼저 알았더라면 그때 선물로 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책에 시를 쓰신 많은 어머니들은 대부분 제때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신 분들이다. 나이 마흔은 아주 어린 편이고, 쉰 넘고 예순 넘는 분들도 아주 많았다. 그 나이에도 배우고 싶은 욕망과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싶은 마음은 지극히 간절하다. 형편 때문에 학업을 못 마칠까 전전긍긍하는 마음, 가족에게 차마 밝히지 못해서 발 동동굴리는 마음, 혹은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행복하게 공부하는 학생까지, 아주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이분들을, 또 지금도 힘들게, 열심히 공부하시는 늦깍이 학생들을 모두 응원한다. 


가난한 삶에서도 하얗게 꽃을 피워낸 어머니들의 노래가 참으로 아름답다. 이렇게 일상에서 시를 써내는 삶이라면, 삶조차도 노래로 다시 피어나리라.

도시락

오석엽 59세

오늘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생각했다. 내 초등학교 때, 도시락을 싸 가면 옥수수 급식을 못 타 먹기에 엄마는 절대 못 싸게 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너무 먹고 싶었던 도시락. 엄마 몰래 한 번 싸 가서는 부끄러워 결국엔 혼자 웅크리고 먹었던 도시락.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을 일구어 주는 오늘 이 순간 방통 점심시간. 행복하여라. -43쪽

진흙 속 한 줄기 연꽃

서옥자 67세

예순이 넘어서야 내 손으로 내 인생 열었구나. 반백 년 전 시골뜨기 말총머리 소녀가 고등 교육 유학길. 영리하지도 못했는데 가정의 울타리 속에 묵묵히 작은 일이라도 도우며 쉬운 서적이라도 읽곤 했으니. 가는 세월에 적응하면서 비바람도 맞고 돌부리에 부닷치기도 하면서. 이젠 겨우 필 들고 살아가니 진흙 속이 아니면 한 줄기 연꽃은 필 수 없구나. -49쪽

감자

최윤선 40세

시골에서 돌아온 남편 손에
박스 하나가 들려 있다.
알알이 여물은 감자가 가득 담겼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저랑 동우랑 감자 억수로 좋아하는데예.
그래 올해는 씨알이 작다.
아닙니다 삶아 먹기 딱 좋아예. 잘 먹겠습니다.
고생은 어머니 아버님이 하시고
저희는 먹는 거만 잘하네예. 죄송합니다.
아이다 비가 와서 다 못 캤다.
나중에 캐면 또 부치 주께. 작으나따나 무라.
예 어머니 때 잘 챙겨 드세요.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뼈마디 굵어 계신 시어머니 생각에 죄스러웠다.
문안 인사도 자주 못 하는 내가 뭐 이쁘다고

어머님 아버님 사랑합니다.
알콩달콩 잘 살게요.
어머니 감자가 참 맛있어요. -56쪽

아부지

이재언 46세

아버지는 어부이셨다.
바다에 나가시지 않은 날은
우리 삼 남매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하셨다.
우리 삼 남매가 배 깔고 엎드려 공부하고 있으면
옆에 가만히 앉아서 연필을 깎아 주곤 하셨다.
예쁘게 깎아서 필통에 길이 순서대로 나란히 넣어 주셨다.
아이들이 연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도 아버지 생각하면서 내 손으로 연필을 깎아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도 엄마 어렸을 적에 손수 깎아 주셨노라고
그러면 아이들이 물어본다.
엄마, 외할아버지도 연필을 이렇게 못난이로 깎았어요?
그 소리에 연필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못난이처럼 깎아 놓은 것 같았다. -62쪽

내 새끼

이숙조 42세

삶이 너무 팍팍해
앞만 보며 동동거렸습니다.

비 오는 어느 휴가 날
베란다에서
내 새끼 등굣길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눈물에 흐릿하게
멀어져 가는 조그마한 등이
하늘만큼 크게
가슴에 쿵 박혔습니다.

조금 늦게 낳아
언제나 가슴 저린 내 새끼는
그렇게 제 인생의 발자국을
조금씩 내딛고 있었습니다.
이제 여덞 살 내 새끼가 말입니다. -76쪽

시장에서

배영자 50세

빈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탔다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도 서서히 깬다.
얼마 가지 않아 내렸다.
새벽 시장이다.

입맛 없는 여름철 아이들이 생각나
열무 세 단 샀다.
그리고 뭘 살까?
뭘 살지 계획도 없지만
그냥 시장에 온다.

한 소코리 주이소.
막내딸이 좋아하는 참외다.
"곱고 점잖하이 참 예쁘지만
아지매도 많이 늙었네요."

이십 년도 넘게 다닌 시장이다.
과일 장수 아저씨도 나물 파는 할머니도 나도
그 세월을 함께 보아 가며 늙었다.
인사도 안부도 묻진 않지만
시장에서 볼 수 있으면 다 무사한 거다.

세월 따라 늙어야지요, 많이 파이소. -148쪽

내 탓이다

문명숙 53세

따르릉 알람 소리
천근만근 모뭉아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
물만 바르고
계란 후라이에 야구르트를 서서 넘긴다.
치약 냄새만 풍기고
손을 흔들며 일터로 나갔다.
힘 좋은 날들을 베짱이처럼 보내고
개미가 되어 보려 하지만
무거운 짐은 이 땡볕에 더 부풀고
흰 머리카락은 햇빛에 더욱 빛난다.
젊은 날을 내 탓 아닌 당신 탓이라고
애들 때문에 산다고
최선을 다한 삶을 살지 못한 탓에
이 햇빛 좋은 날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가슴을 엔다.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 나오는 구절 -174쪽

그네

마은희 52세

운동장 한 곁에
저 혼자 뛰는 그네
누가 뛰었길래
여지껏 흔들리고 있는가

그곳에 그네는
아직 흔들리고 있을까?
그네는 멈추었는데
나 홀로 흔들리고 있구나 -184쪽

202 구자행(엮은이)
평생 시 근처도 안 가 보신 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셨을까.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삶에서 글이 나오고 시가 나오는 법이니까. 시는 시인들만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또 한번 증명된 셈이다. ‘지도’란 말은 부끄럽다. 나는 별로 한 게 없다. 지난밤 내린 봄비에 꽃이 활짝 피듯이 그렇게 시가 피어났다. 공부 시간에 시를 들고 가서 읽어 주면 모두 자기가 쓴 것처럼 기뻐한다. 내가 시평을 무어라 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하고 기다리신다. 그래, 시가 선생이지! -2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