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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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한 '말'이 그 말이었구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이 떠오른다.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9쪽

뿌리로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10쪽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18쪽

호모 루아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24쪽

아홉번째 파도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에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쌍용자동차
75피트···현대자동차
462피트··영남대의료원
593피트··.유성
1545피트··YTN
2161피트···콜트-콜텍
2870피트···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부끼는 손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발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電線 또는 戰線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몰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74쪽

잉여의 시간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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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4-07-29 21:45   좋아요 0 | URL
예! 꼭 필요해요. 4.16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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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착했을 때는 피아니스트 이희아가 막 연주를 마치고 뜻밖에도 노래를 부르던 시점이었다. 이어서 여러 시인들이 단위에 올라왔고, 자신들이 쓴 시를 거의 울면서 읽어냈다. 시인의 육성으로 듣는 시는 그 자체로도 뜨거운데, 그것이 하물며 침몰된 사람들을 향해서 쓴 것이니 오죽이나 절절할까. 


기다리래

김기택

 

  기다리래​. 6835톤 배가 뒤집히는 동안, 뒤집힌 배가 선수 일부분만 남기고 가라앉는 동안, 기다리라는 방송만 되풀이 하고 선장과 선원들이 빠져나가는 동안,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꼼짝 말고 기다리래. 해경은 침몰하는 배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고 급히 구조하러 온 UDT대원들과 민간 잠수사들을 막고 있지만, 텔레비전은  열심히 구조하고 있으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래.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다 지친 컴컴한 바닷물이 먼저 밀려들어 울음과 비명을 틀어막고 발버둥을 옥죄어도, 벗겨지는 손톱과 부러지는 손가락들이 닥치는대로 아무거나 잡아당겨도, 질문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래. 바닷물이 카카오톡을 삼키고, 기다리래를 삼키고, 기다리래를 친 손가락을 삼켜도, 아직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래. 엄마 아빠가 발 동동 구르며 울부짖어도, 구조된 교감 선생님이 터지는 가슴에다 목을 매어도, 유언비어에 절대로 속지 말고 안내 방송에만 귀 기울이며 기다리래. 죽음이 퉁퉁 불어 옷을 찢고 터져 나와도, 얼굴이 부풀어 흐물흐물해져도, 학생증엔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잇으니, 손아귀에 그 얼굴을 꼭 쥐고서 기다리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맹골수도 물속에서 기다리래.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방송은 안 나와요" 2014. 4. 16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톡 메시지




[출처] 기다리래 / 김기택|작성자 dust47




아기단풍

 

 

                                         김해자

 

 

현관문 열어두마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네 방 창문도 열어두마 한밤중 넘어올지 모르니

수도꼭지 흐르는 물속에서도 쏟아진다 엄마 엄마 소리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빗줄기 뚫고 널 맞으러 가마

네가 오지 않으니 내가 가마 맨몸으로 가마 두들겨 맞으며 가마

물에 찍힌 음계를 밟고 나는 한 계단씩 내려가마

하얗게 부서지는 푸른 춤을 밟고 너는 오렴 오오 노래하며 와주렴

기다려 주렴 평생을 다해 네게로 헤엄쳐 가리니

벽이 된 바닥 미끄러지는 하늘 기어서 가리니

  


얼마나 추웠니 아가야 이리 오렴 젖은 기저귀 갈아줄게

다리 힘차게 차며 발랑거리는 아가,

알처럼 동그란 네 배는 내일을 낳지 못하겠구나

하나 피워 하나 지우는 물의 나이테처럼 영영 나이먹지 않겠구나

사랑해요 저를 용서하세요,

물에 찍힌 마지막 말.

말이 되지 못한 공기방울

사랑한다 아아 아가야 용서해다오 온통 눈물뿐으로

출렁이는 저 바다처럼 우우 우릴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기다려 너에게로 갈게.............

맹서뿐인 말이 끝난 곳

오늘을 불러올 태양이 없는 저 너머,

잎도 꽃도 피우지 않는 얼음정원

눈시울 붉은 아기단풍 꽃 꽃 꽃들


 소금 속에 눕히며 

 

                            문 동 만

 

억울한 원혼은 소금 속에 묻는다 하였습니다 
소금이 그들의 신이라 하였습니다

 

차가운 손들은 유능할 수 없었고 
차가운 손들은 뜨거운 손들을 구할 수 없었고 
아직도 물귀신처럼 배를 끌어내립니다 
이윤이 신이 된 세상, 흑막은 겹겹입니다 
차라리 기도를 버립니다 
분노가 나의 신전입니다 
침몰의 비명과 침묵이 나의 경전입니다

 

아이 둘은 서로에게 매듭이 되어 승천했습니다 
정부가 삭은 새끼줄이나 꼬고 있을 때 
새끼줄 업자들에게 목숨을 청부하고 있을 때 
죽음은 숫자가 되어 증식했습니다 
그대들은 눈물의 시조가 되었고 
우리는 눈물의 자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곱 살 오빠가 여섯 살 누이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줄 때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먼저 보내고 
아가미도 없이 숨을 마칠 때 
아이들보다 겨우 여덟 살 많은 선생님이 
물속 교실에 남아 마지막 출석부를 부를 때 

죽어서야 부부가 된 애인들은 입맞춤도 없이

 

아, 차라리 우리가 물고기였더라면 
이 바다를 다 마셔버리고 살아 있는 당신들만 뱉어내는 
거대한 물고기였더라면

 

침몰입니까? 아니 습격입니다 습격입니다! 
우리들의 고요를, 생의 마지막까지 번지던 천진한 웃음을 이윤의 주구들이 
분별심 없는 관료들과 전문성 없는 전문가들이 
구조할 수 없는 구조대가 
선장과 선원과 또 천상에 사는 어떤 선장과 
선원들로부터의……습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3층 칸과 4층 칸에 
쓰린 바닷물이 살갗을 베는 
지옥과 연옥 사이에 갇혀버렸습니다 
우리도 갇혀 구조되지 않겠습니다 
그대들 가신 곳 천국이 아니라면 
우리도 고통의 궁극을 더 살다 가겠습니다

 

누구도 깨주지 않던 유리창 위에 씁니다 
아수라의 객실 바닥에 쓰고 씁니다 
골절된 손가락으로 짓이겨진 손톱으로 
아가미 없는 목구멍으로 
오늘의 분통과 심장의 폭동을 
죽여서 죽었다고 씁니다 
그대들 당도하지 못한 사월의 귀착지 
거긴 꽃과 나비가 있는 곳 
심해보다 짠 인간과 인간의 눈물이 없는 곳 
거악의 썩은 그물들이 걸리지 않는 곳 
말갛게 씻은 네 얼굴과 네 얼굴과 
엄마아 아빠아 누나아 동생아 선생니임 부르면 
부르면 다 있는 곳


소금 속에 눕히며 
눕혀도 눕혀도 일어나는 그대들 
내 새끼 아닌 내 새끼들 
피눈물로 만든 내 새끼들 
눕히며 품으며 입 맞추며


가장 목메이게 했던 순서는 성우 안현서 씨와 영상 속 아이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내용이었는데, 함께 했던 야곱도 나도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한참 들썩였다. 맙소사, 오 맙소사...



감탄을 자아내는 샌드아트. 그러나 그 내용을 생각하면 서러워서 다시 눈물바람. 


유가족분들 몇이 무대 위로 올라왔는데, "엄마, 아빠, 내 동생 어떡하지"라고 말했던 학생의 어머니와 여동생이었다. 아, 그 육성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금 마음이 무너졌다. 어쩌지, 정말 어쩌지...



손에 찍은 스탬프가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이 시작되는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손등에 남아 있다. 스탬프는 지워져도 기억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게 하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모르겠다. 10만 명을 소원했지만, 2만에서 5만까지, 매체마다 추정하는 인원이 다 다르다. 

그러나 이 정도 인원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이 정부...



오세훈 때는 이 광장을 딛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래도 이젠 시청 광장쯤은 힘들이지 않게 빌린다며 야곱과 얘기 나눴는데, 그 얘기가 무색하게 이리 장막 속에 갇혀 버렸다.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그 짧은 길을 기어이 못가게 한다고 이렇게 막아버렸다. 비는 거세게 왔고, 경찰들은 요지부동.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고 비키라고 외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날 추모 공연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이승환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우린 어느 순간부터 참 불쌍한 국민이 되었다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린 너무 알아채버려서

많이 알아채버려서

불쌍한 국민이 된 듯한 느낌

 

국가가 우릴 지켜주지 못하는

혹은 지켜주지 않는

국가의 무능함과 무심함을 알아채버린

 

그리고 어떤 일에도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그런 곳임을 알아채버린  

그리고 국민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지 않으려는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는

이상한 곳임을

알아채버렸기 때문입니다.....”



결코 먼저 지치지 않을 각오를 다시 새겨본다. 다시 100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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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7-2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마노아님의 님
이러다가 진짜 방송 출연은 못하겠는데요. ^^::::::

접힌 부분 펼치지 말껄 이런..아침부터 또 눈물바람.......

마노아 2014-07-28 11:55   좋아요 0 | URL
이 정권 하에서 내 님의 공중파 출연은 언감생신이 아닐까 뭐....;;;;
시집 읽고 있는데 계속 눈물 나요. 진정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어요.ㅜ.ㅜ

세실 2014-07-28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오셨군요.....
거기 모인 분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글만 읽어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입니다.

마노아 2014-07-28 11:57   좋아요 0 | URL
우린 이제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우린 정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요.ㅜ.ㅜ

꼬마요정 2014-07-28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호를 참사로 만든 정부가... 자신들은 아니라고 자꾸 우리 더러 종북 좌파라며 손가락질 하네요.
어디 누워 있던 시체 한 구 가져다 놓고 유병언이라며, 그래서 유병언이든 누구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솔직히 세월호의 참사는 유병언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배 수명 늘리고, 책임 소재 파악은 커녕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혼자 저 위에서 고개 돌리고 있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만든 거 아닌가요?

그나저나.. 공중파에서 이승환 보고 싶은데.. 이번 앨범 참 좋던데.. 안타깝네요.. 가을에 나오는 앨범도 기대됩니다.

마노아 2014-07-28 22:27   좋아요 0 | URL
유병언은 믿기지 않는 시체로 돌아오고, 유병근의 경호원 팬카페가 생기고, 이석기는 징역 20년을 선고 받고... 아직도 놀랄 게 남아 있다는 게 충격적인 오늘의 대한민국이에요. ㅠ.ㅠ

이승환 11집은 '전'과 '후'로 나뉘어 발매할 생각이었는데 '후'의 발매는 불투명해졌어요. '전'이 잘 되어야 그 후원으로 만들 수 있는데 들인 돈에 비해 잘 되지 않았거든요. 드림팩토리는 문 닫았고, 내 님의 새 앨범은 깜깜합니다. 크흑...ㅜ.ㅜ

코코죠 2014-07-2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쩌나... 어떡해요.... 눈물이 그치질 않아요....

마노아 2014-07-28 22:28   좋아요 0 | URL
오즈마님, 우리 실컷 울고 다시 기운 내요. 갈 길이 너무 멀어요.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는 세상은 보다 안전하고 바른 세상이어야 하니까요. 불끈!

순오기 2014-07-29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하지요.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 자들~~~ 응징하고 새로 시작해야 되는데...

마노아 2014-07-29 21:45   좋아요 0 | URL
특별법 제정 촉구를 외치던 생존 소녀 두명을 에워싸고 어버이 연합이 막말을 해댔더라구요. 세상에, 정말 인간이 아닌 걸로 보여요.ㅜ.ㅜ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724180209197
 
플루트의 골짜기 - 소설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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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열두 편을 묶어낸 선집이다. 그간 고종석의 단편 '제 망매가'와 '엘리야의 제야'가 절판인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글을 몇 차례 보았던지라 그의 글빨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읽어보고 난 뒤, 확실히 그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꼭 매력적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제는 영화 '군도'를 보았다. 감독의 기본 내공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괜찮은 배우가 여럿 출연하니 당연히 기대를 갖는 게 자연스러웠다. 또 좋아하는 사극 영화니 더더욱 기대감이 있었는데 먼저 보고 온 언니가 별로라고 해서 한풀 기대치를 꺾고 보았음에도 나 역시 그냥 그랬다. 본 걸 후회하진 않지만 기대에는 못 미쳤다. 굳이 따지자면, 아주 못 만든 건 아닌데 '매력'이 없었다. 이 괜찮은 배우들로 이 만큼밖에 못 만들다니.


어쩌면 그건 취향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단편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긴 호흡으로 큰원을 그리면서 하나로 수렴되어지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를 키워서 절정을 맞이하고 마침내 결말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원하는데, 단편소설은 그런 그림을 그리기에는 호흡이 너무 짧으니까. 


이 책의 여러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고종석이 확실히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구나.... 라는 것과,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된 면(사실 이건 그의 트위터 글을 줄곧 보다가 극도로 피곤함이 몰려와서 결국은 언팔하게 된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이 있구나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근친의 뉘앙스를 꽤 풍겼는데 이건 의도된 것인가? 직전에 읽은 '해피 패밀리'와 겹쳐서 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고전소설이나 혹은 고전 시가의 제목을 가져와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덮은 것은 꽤 신선했다. 특히 '찬 기 파랑'이 그랬다. 홍세화 씨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두편 있었는데 두분이 어떤 친분이 있나?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거나 혹은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데 본인의 경력에 기반한 것일 테지? 


깔끔한 문장이 돋보였지만 크게 가슴에 남지는 않았고 그간 절판되었던 책들을 드디어 만났다는 반가움도 그리 크지 않았다. 나하고는 그다지 궁합이 좋지 않다. 

언어라는 건 권력인 것 같아. 아니 억압인 것 같아. 무지막지한 억압. 예컨대 타자기로 글씰 쓰다가 ‘사랑’이란 말을 ‘사렁’이라고 오타를 냈대봐. 종이 위에 찍힌 그 ‘사렁’이라는 말을 그리도 촌스럽고 낯설게 만드는 게 결국 말이 가진 억압의 힘 아냐. 말의 그 전제주의, 표준어의 그 전제주의 말이야. 자기와 다른 걸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릇된 것으로 판정해 매정하게 배제해버리는 그 완고한 전제주의 말이야. ‘사랑’이란 말의 어감이 ‘사렁’이란 말의 어감보다 꼭 그 자체로서 더 사랑다운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사렁’이라는 말은 전혀 ‘사랑’의 감정을 환기시키지 못하잖아. 정말 끔찍한 독재자야, 말은. 물론 그 독재력의 원천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힘이나 귀함 때문이겠지만. -36쪽

그날만은 아니었다. 골수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러니까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한 뒤로 줄곧 그 아이는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썼고, 그럼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45쪽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은 표정이 다르다. 묘하게도 일본 사람들의 표정은 뭔가 어둡고 비장한 데 견주어 조선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낙천적이다. 그 거꾸로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영국인과 에이레인의 표정에 대한 내 관찰과도 일치한다. 그런 낙관주의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된 건지, 아니면 나라를 잃은 아픔을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낙관적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과는 무관한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프랑스인들이나 심지어 앵글로·색슨계 미국인들의 표정도 영국인들의 표정에 비하면 대체로 밝고 낙천적이니까. 그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든. 내가 에이레 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듯이 나는 조선 사람들을 금방 좋아하게 돼버렸다.
-270쪽

그는 전 스페인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가 이 자유의 투사들에게 올린 감사의 말에 대한 답사를 옛 전우들을 대표해서 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은, 비록 의례적인 말일지라도, 겸손과 연대로 무르익은 어떤 정신의 경지로서 기록해둘 만하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입니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들은 파시즘과 싸울 기회를 얻었고, 참다운 국제주의를 배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들 가운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옛 전우들과 스페인 사람들을 눈물범벅으로 만든 기 파랑의 그 답사는 그가 오십팔 년 전에 피에르 맹데스-프랑스에게 한 말을 다시 연상시킨다. "모든 정치가 더러운 것은 아니다. 모든 행동이 헛된 것은 아니다."
-308쪽

뒷자리의 아이에게 뭔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어 주머니를 뒤저보았지만,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24시간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나는 민우에게 그 앞에 차를 잠시 세우도록 부탁한 뒤 초콜릿을 한 상자 사다가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한국어로 고맙다고 말하며 수줍게, 환히 웃었다. 민우도 뒤질세라 콘솔 박스를 뒤지더니 오르골 하나를 꺼냈다. 민우가 태엽을 돌리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을 받아든 아이는 다시 한 번 환히 웃었다. 아이는 주머니를 뒤져 땅콩 한 줌씩을 민우와 나에게 내밀었다. 우리도 환한 웃음으로 그것을 받으며 아이에게 사의를 표했다. 차는 다시 출발했고 뒷자리에서는 오르골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계속 흘러 나왔다. 오늘 밤 이 캐럴은 온 누리에서 수백 개의 언어로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네팔에도 그 나라 말로 이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있을지 모른다. 한 움큼의 허우룩함 속에서 그들의 초라한 집 앞에 세 식구를 내려주었을 때 시각은 자정이 넘어 있었다. 구세주가 오신 날이었다.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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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7-27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고종석에게서 근친의 혐의를 몇번 느꼈어요. 해피패밀리 말고도 제망매인가 거기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저는 저희 자매님들과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아 공감은 안갔답니다. 그나저나 저는 원래 사극을 안좋아해서, 역린도 안보고 민란도 안봤어요. 그러면서도 광해같은 영화는 봤단 말이죠. 아무튼 사극을 피하는 제 선택이 이번엔 연속으로 맞은 것 같네요

마노아 2014-07-27 16:17   좋아요 0 | URL
이 책 안에 제 망매가 있는데 그거 포함해서 둘인가 셋인가에서 근친 내용이 좀 있더라구요. 의도한 것인가 싶어 궁금해졌어요.
역린은 평가보다 재밌었는데 너무 폄하된 느낌이 있고요. 광해는 만들어진 폼새보다 더 과장되게 평가받은 것 같지만 그래도 충분히 수긍이 가요. 군도는 강동원 헌정 영화였어요. 여자들은 비명을 지를만큼 멋진 강동원을 보고 올 수 있지만 그게 다였거든요. 이제 저는 '명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ㅎ
 

   

제 2179 호/2014-07-23

 

고혈압만 조심? 여름, 저혈압도 조심!

뙤약볕 아래 초연한 사람은 없지만, 혈압이 낮은 사람은 더욱 죽을 맛이다. 현기증이 나고 몸에 힘이 쭉 빠져 주저앉고 싶어진다. 땀을 많이 흘릴수록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저혈압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7~8월에 가장 많은 이유다. 연평균보다 40% 많은 환자가 몰린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13).

환자 수도 2008년(1만 2천명)과 비해 9천 명(2012년 기준, 2만 1천명)이나 늘었다. 나이대별로는 70대 이상이 전체 27%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는데, 여성의 경우 70대 이상(21.1%) 다음으로 20대 환자(15.2%)가 뒤를 이었다.

저혈압의 정확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수축기(최고) 혈압 90mmHg 이하, 확장기(최저) 혈압 60mmHg 이하를 말한다. 수축기 혈압은 심장이 수축하면서 혈액을 내보낼 때, 확장기 혈압은 심장이 이완되면서 혈액을 받아들일 때 혈관벽이 받는 압력을 말한다.

하지만 수치보다 증상의 유무가 중요하다. 저혈압의 가장 흔한 증상은 현기증과 두통, 무기력증이다. 심하게는 구역질이나 실신, 불면증이나 변비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 더위에 기진맥진한 이유

혈압은 쉽게 말해 수압에 비유할 수 있다. 수압이 낮을 때는 물이 졸졸 약하게 흐른다. 흐름이 약하다보니 몸 속 구석까지 충분한 혈액이 도달하지 않아 기운이 없고 심장은 빨리 피를 공급하기 위해 더 빠르게 뛰면서 두근거림을 유발한다. 심한 경우 혈액이 시신경과 관련된 후두부까지 전달되지 않아 시력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저혈압 환자 중 오랜 시간 누워 있다가 일어나거나, 앉았다가 일어날 때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저혈압의 한 종류인 기립성(起立性) 저혈압이다. 이 경우, 중력의 영향으로 피가 아래쪽으로 몰린 상황에서 갑자기 움직이면 머리로 피가 빠르게 순환하지 못하면서 증상이 나타난다. 이럴 때는 옆으로 누워 잠시 쉬거나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 좋다.

증상은 여름에 더 심해진다. 원인은 땀이다. 우리 몸은 2/3가 수분으로 이뤄져 있고 그 중 약 5ℓ는 혈액이다. 수분은 콩팥에서 걸러져 소변과 땀 등으로 배출되고 그 양은 항상 적절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기온이 오르는 여름이 되면 우리 몸은 체온을 떨어뜨리기 위해 혈관을 팽창시키고 땀을 많이 내면서 체내 수분양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수분양이 줄면서 혈액의 양은 줄고 흐름은 약해져 더위 앞에 기진맥진 해진다. 저혈압의 경우, 본래 약하던 혈액의 흐름이 더 약해지기 때문에 증상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 피가 부족하거나 심박동이 느려도 어지럽다

저혈압은 빈혈과도 증상이 비슷해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원인이 달라 치료법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은 필수다. 빈혈은 피에 산소 공급을 담당하는 헤모글로빈이 부족하거나 헤모글로빈이 있는 적혈구의 수가 부족할 때 발생한다. 철이 부족해도 생긴다. 반면 저혈압은 순환이 잘 되지 않을 뿐 피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서맥(徐脈)도 증상이 비슷하다. 서맥은 심장 박동이 천천히 뛰는 것으로 1분에 50회 미만이거나 수초 이상 심박동이 정지하는 병이다. 심장의 기능 이상이 원인이다. 심박동은 우심방 오른쪽 위에 있는 동결절이 만든 전기가 심실로 전도되면서 발생한다. 이 때 동결절에서 전기 신호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거나 전기 신호가 심실로 전도되지 못한 경우 심박동이 느려진다. 서맥은 부정맥의 한 종류로 돌연사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빠른 치료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영구 심장 박동기를 삽입하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전기 신호를 만들어 규칙적으로 심장에 흘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고단백 간식과 물은 필수

저혈압의 원인은 다양하다. 심장 질환이나 내분비 질환 등 다른 질환 때문에 나타나기도 하고 이뇨제나 혈관 확장제, 전립선 비대증 약, 안정제와 같은 약물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원인이 되는 약물을 조절하거나 질환을 치료하면 저혈압도 자연스레 없어진다.

하지만 특별한 원인 없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아 정해진 치료법은 없다. 다만 증상이 심각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클 경우, 혈액 순환을 돕는 호르몬제나 혈압을 높이는 약 등을 처방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저혈압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물을 많이 권한다. 특히 여름에는 땀으로 배출하는 수분이 많아 물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꾸준한 운동과 충분한 수면도 도움이 된다. 충분한 영양소 섭취는 혈액의 생성과 순환을 돕기 때문에 충분한 칼로리의 규칙적인 식사도 필수다. 술과 찜질방도 멀리하는 것이 좋다. 둘 다 혈관을 확장시켜 혈압을 낮추고 뜨거운 목욕은 체내 수분을 증발시킨다.

태풍 너구리가 지나가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 더위에 입맛도 없어지고 열대야로 푹 자기도 어려운 상황. 이럴 땐 다이어트를 잠시 멈추고 틈틈이 간식을 챙겨먹자. 저혈압 환자 중에는 물을 자주 마시는 사람이 적은데 물을 많이 먹기 어렵다면 연한 커피에 얼음을 많이 넣어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 야외 활동을 즐기더라도 중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등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병원에 가지 않고도 건강한 여름을 날 수 있다.

글 : 이화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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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7-2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황당한 의학 상식이군요. 저혈압, 탈수증, 일사병, 부정맥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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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방 카페에는 이동진이 직접 고르고 한줄 평을 쓴 책들이 꽂혀 있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이 책이었는데, 나를 흠뻑 빠지게 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이란 표현은 시인의 것이었다. 그래서 따옴표가 있었던 거구나!

마침 내 가방 속에는 이 시집이 있었다. 


시에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덕분에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쉬운 한글로만 쓰여 있었다면 휙휙 지나쳤을 문장들을 조금 더 음미하면서 다가갈 수 있었다. 

좋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더 무엇을 보태기 어려운 게 바로 시집이다. 

그래도 역시 좋았다는 말은 남겨 본다. 


덧글) 의도하지 않았는데, 좋다고 표시해둔 시 세 편이 모두 '그'로 시작하는구나. 하하핫!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쪽

그해 가을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군인 간 친구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제주산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남미기행문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국산영화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고가도로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할 때
지난 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천부의 백치는
인골로 만든 피리를 불며 밀교승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 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 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시키지도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이장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66쪽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有婦女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考試에 합격하거나 文壇에 데뷔하거나 美國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胎兒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月給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國會議員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X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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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3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시집인데 갖고 있군요~
이성복 시는 가슴에 콕콕 박히면서 아파요.ㅜ

마노아 2014-07-23 08:23   좋아요 0 | URL
한글자 한글자 콕콕 박으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좋은 시들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시들은 아픈 시들이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