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29 호/2014-05-14 

[만화] 멸종 비상 바나나, 해답은 유전자 다양성!

태연, 식탁 위에 바나나를 산더미만큼 쌓아놓고 콧소리를 내가며 신나게 먹는다. 사람인지 배고픈 고릴라인지 알 수 없는 진풍경이다.

“태연아, 그러다 진짜 원숭이 되겠다. 그만 좀 먹어!”

“아빠는 지금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그 유명한 바나나 다이어트를 위해 억지로 먹는 거라고요. 호호호, 지금 저의 웃음은 깊은 고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해탈의 웃음인 것이죠.”

바나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열량이 높은 생과일 중 하나야! 100g당 무려 93kcal, 토마토의 3배가 넘는다고. 또 100g당 탄수화물은 24.1g로 파인애플의 4배가 넘어요. 대신 지방이 적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을 쉽게 느낄 수 있어서 다른 음식을 적게 먹으니까 살이 빠진다는 건데…. 그런데 넌, 정말 너무 먹잖아! 고기를 먹어야만 살찌는 게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도 풀만 먹는다고!!”

“정말요? 저는 바나나를 먹을수록 살이 빠지는 줄 알았잖아요. 좋아하는 바나나도 엄청 먹고 살도 빼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는데, 힝~ 완전 망했어요. 어쩐지 점점 코끼리 몸매가 된다 했더니.”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지금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구나. 바나나 값이 크게 오르거나, 아니면 바나나가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니 말이야.”

“아빠…, 그… 그런…, 무서운 얘긴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맛있는 바나나가 사라진다니요. 12년 평생 그렇게 무서운 말은 처음 들어봐요.”

“슬픈 얘기지만 사실이란다. 최근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바나나 불치병’, ‘바나나 암’이라고 불리는 ‘변종 파나마병(TR4)’이 중동과 아프리카의 바나나 농장으로 급격히 퍼져가고 있다고 발표했거든. TR4는 바나나 풀(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여러해살이 풀이다)의 뿌리가 곰팡이에 감염돼 서서히 말라죽는 병으로, 보통 2~3년이면 거대한 농장 전체를 고사 상태로 만들지.”

“난 또 뭐라고. 사람들이 참 뻥이 심해, 그죠? 아니 전염병 한두 번 겪어봐요? 조류 독감, 구제역 할 것 없이 허구한 날 전염병이 퍼진다고 해도 닭이나 돼지가 멸종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과학자들이 다 잘 알아서 할 텐데 뭘 그러세요. 휴~, 진짜 바나나 못 먹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런데 바나나는 좀 경우가 다르거든.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 한 가지 품종뿐이야. 씨를 뿌려서 재배하는 게 아니라 우수한 품질을 가진 바나나 풀의 뿌리나 줄기를 접붙여서 번식시켰기 때문에 유전자가 극도로 단순해졌지. 바나나 풀이 수만 개가 있다 해도 각기 다른 바나나가 아니라 모두 복제품이라는 거야.”

“그게 어때서요? 제일 좋은 품질의 바나나만 먹을 수 있으니까 좋잖아요.”

“잘 생각해봐. 세상에 딱 한 가지 유전자 조성을 가진 바나나만 있는데, 그 유전자 조성에 치명적인 질병이 생겨났어. 그럼 어떻게 될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염이 될 거고 차단도 쉽지 않을 거야. 실제로 캐번디시 이전에는 ‘그로미셜’이라는 한 종류가 바나나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파나마 병이 창궐해 멸종됐단다. 농장들은 다행히 파나마 병에 잘 견디는 캐번디시라는 품종을 개발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지. 그런데 캐번디시에 치명적인 TR4가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해 제2의 그로미셜 사태, 즉 바나나 멸종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 거란다.”

“진짜요? 그럼 빨리 제2의 캐번디시 품종을 개발해야죠!!”

“물론 그래야겠지. TR4는 한 번 발병하면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염병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유전자군을 찾는 것뿐이야. 그러나 그 전에 유전자 다양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단다. 자연 상태의 생명체는 여러 유전자들이 끊임없이 섞이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이가 일어나면서 풍부한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하게 돼있어. 그래서 질병이나 가뭄 같은 급격한 환경 변화가 발생하면, 그 변화에 취약한 유전자군은 죽고 이를 이겨낸 유전자 변이 개체들은 살아남아 종을 보존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뛰어난 품질의 동식물을 대량 생산하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점점 유전자군이 단순화되고 바나나 멸종 같은 극단적인 일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란다.

“그러다 몽땅 멸종돼 버리면 난 뭘 먹고 살아요. 흑흑”

실제로 1847년에 ‘아일랜드 대기근’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어. 아일랜드 전체 인구 800여만 명 가운데 200여만 명이 사망하고 200여만 명은 먹을 것을 찾아 해외로 이주한 일이었는데, 유전자 다양성을 무시한 인재(人災)로 유명한 사건이지.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지속적으로 감자를 품종개량해서 거의 동일한 유전자를 보유한(매우 낮은 수준의 유전자변이) 감자만을 생산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갑자기 감자 잎마름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가 출현해 모든 감자가 죽어버린 거야. 그래서 감자가 주식이던 아일랜드인들의 1/4이 굶어 죽는 참변이 발생한 거지. 그런데 그 이후로도 인간의 욕심은 점점 더 유전자 다양성을 축소시켰고, 지금은 감자, 바나나 같은 식물은 물론 가축들의 유전자도 극히 단순해져 버렸단다. 외부의 환경 변화에 저항할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뜻이지.

“아빠, 진심으로 12년 평생 가장 슬픈 이야기에요. 제가 사랑하는 이 세상의 엄청나게 많은 먹을거리들의 유전자가 단순화되고 있다니요. 그러다가 인간 유전자까지 단순해지는 거 아니에요? 좋은 유전자를 가진 아가들만 만들어내면 어떡해요! 인간도 멸종되는 거여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유전자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다 같이 진지하게 해야겠지. 그런데 태연아, 너 대화하는 내내 바나나를 무려 17개나 먹어치운 거 알고 있냐!! 멸종에 대한 불안감이 너에게 폭풍 바나나 식탐을 불러온 건 이해하겠지만 이건 아니지, 정말 코끼리가 될 수도 있다고!!”

“코끼리의 특성을 지닌 인간이라…. 유전자 다양성 측면에서 좋은 일 인거 같아요. 그럼 전 딱 17개만 더 먹을 게요~! 그리고 딸기로 다이어트 시작!”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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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5-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전염성 질환들은 유전자의 다양성이 지켜지지가 않기때문에 발생하는거 같더군요.
오로지 인간의 단기적인 편의만을 위해서 종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으니 킁...

마노아 2014-05-14 14:01   좋아요 0 | URL
소탐대실이네요. 이런 게 너무 많다는 게 더 한숨이구요. 끙...!
 
하얀 꽃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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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에는 안산 합동 분향소에 다녀왔다. 처음 집을 나설 때는 시청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영정사진은 안산에 있으니까, 게다가 쉬는 날이니까 좀 멀리 가도 좋겠다고 여겼다. 고잔 역에서 내려서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눈을 감았다. 몇 분이 지나고 갑자기 온 몸의 힘이 쫙 빠지면서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심장에 압박이 느껴져서 눈을 떴다. 그리고 차가 곧 멈췄다. 아마도 심리적인 탓이었겠지만, 정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버렸다. 


쉬는 날이어서 사람들이 무척 많았는데, 한번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꽃을 올리고 묵념을 하니 생각만큼 많이 기다린 것 같지는 않다. 앞에 줄이 이동을 하면 한걸음씩 앞쪽으로 이동을 하는데, 그때마다 더 크게 보이는 영정사진이 무겁게 다가왔다. 마치 여고괴담에서 마지막에 최강희 얼굴이 턱턱턱 다가오는 것처럼.


한줄에 한 80개 정도의 영정 사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려 4층에 걸쳐 펼쳐져 있는 영정 사진. 

가운데에는 제일 먼저 희생자로 발견되었던 정차웅 군이 보였다. 그렇게 몇 번 뉴스를 타느라고 얼굴을 알고 있던 사진들이 더러 있었다.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뒤쪽으로 어린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엄마가 언니 오빠들 하늘나라 갔다고 말한 것 같았다. 천진한 아이는 이렇게 질문했다.

"하늘 나라 뭐 타고 갔어??"


아아, 아이야... 하늘나라 세월호 타고 갔단다..ㅜ.ㅜ 


아이들이 저 학생증 사진을 찍었을 때 얼마나 멋도 부리고 화장도 좀 하고 예쁘게 찍었을까. 누구라도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거라고 예상 못했겠지. 


꽃을 바치고, 두번의 묵념을 하고, 그리고 한바퀴 돌아서 나올 때, 마지막에 교감 선생님 사진이 보였다. 이렇게 끄트머리에서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시구나. 너무 아픈 목숨들이다. 하나도 빠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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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2학년 3반 교실이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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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빨간 책방 오프닝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이 계절의 꽃들이 흰색이 많은 것은 푸른 잎들 사이에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지금 보이는 하얀 꽃들은 모두 조화같다고... 내 기분도 꼭 그렇다.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창체 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팝업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가위질 5분 만에 남학생들은 한숨과 함께 못해먹겠다고 두손을 들어버리는 사례 속출. 한 반에 완성시킨 아이가 한 명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 보니 힘들긴 하더라...;;;;


집에 있던 색지를 사용했는데, 종이가 얇아서 내가 원한 만큼의 효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팝업 카드가 되었다. 흰색 꽃은 카네이션처럼도 보이고 장미로도 보이고 연꽃으로도 보이지만, 어쨌든 한송이 조화로서 펴놓았다.


혹시 누군가 만들어 보고 싶을지 모르니까 도안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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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요즘이다. 웃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웃을 일이 당최 없기도 하다. 

오늘 유일하게 나를 빵터지게 한 건 이거였다.


https://twitter.com/ifkorea/status/464991882842370048/photo/1


참 tv조선스럽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가 입원해 계실 때 병원 로비에 내내 틀어져 있던 게 이 방송이었지.

며칠 전에 엄니가 tv조선 보고 계시길래 얼른 다른 채널로 돌려놨는데, 오늘도 이 방송을 보고 계시길래 버럭했다. 

이런 막장 방송은 보지 마시라고. 제발, 제발 보지 마시라고!


그리고 오늘 가장 진지하게 본 것은 이거였다.


어느 한 강남 좌파의 생각


다시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2번 찍어주겠다고 굳게 약속해놓고 막상 투표장에 가서는 1번 찍고 오셨던 엄니의 배신이 떠올라서 잠깐 또 울컥했다. 박근혜가 당선되면 엄마 딸들은 이땅에서 밥벌어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고, 지금보다 더 힘들어진다고 얘기했는데도 기어이 거기 찍는 이유가 대체 뭘까. 실제로 내 친구 중에 이명박이 되어야 세금 덜 내기 때문에 mb찍었다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갸야 내야 할 세금이라도 많았다지만 가진 것 암 것도 없는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이런 게 우리 엄마만의 이야기는 물론 아니지만...ㅠㅠ


노무현 대통령의 어버이날 편지를 읽었다. 그분이 가신 그날도 다가오고 있다. 여러모로, 4월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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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에게는 큰 절을 두번 하는 날입니다. 한 번은 저를 낳고 길러 주신 저의 부모님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또 한번은 저를 대통령으로 낳고 길러 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저는 경남 김해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판자 석자를 쓰시는 아버지와 성산이씨셨던 어머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저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지만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을 물려주셨지만 남을 돕는 따뜻한 마음도 함께 물려 주신 아버지셨습니다.
매사에 호랑이 같았던 분이지만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신념도 함께 가르쳐 주신 어머니셨습니다.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 
내가 슬프면 나보다 더 슬픈 사람, 
내가 기쁘면 나보다 더 기쁜 사람,' 

오늘 그 두 분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국회의원의 어버이도 국민입니다. 
한 인간을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개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먹기에 달린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군말없이 따라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여러분의 관심 하나에 이 나라 정치인이 바뀌고 여러분의 결심 하나에 이 나라의 정치는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심과 결심 또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낳아 놓고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잘 하면 칭찬과 격력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농부는 김매기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 냅니다. 농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선량한 곡식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사리사욕과 잘못된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는 일부 정치인. 

개혁하라는 국민 대다수의 뜻은 무시하고 개혁의 발목을 잡고 나라의 앞날을 막으려 하는 일부 정치인. 

나라야 찢어지든 말든 지역감정으로 득을 보려는 일부 정치인. 

전쟁이야 나든 말든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정치인. 

이렇게 국민을 바보로 알고 어린애로 아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국민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어떤 저항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통령의 의무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헌법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실 일은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고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도 어버이의 회초리를 드십시오. 국민여러분의 회초리는 언제든지 기꺼이 맞겠습니다. 아무리 힘없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그것이 국익의 회초리라면 기쁜 마음으로 맞고 온 힘을 다해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 있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드는 회초리라면 매를 든 그 또한 국민이기에 맞지 않을 방법은 없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너 내 편이 안되면 맞는다'라는 뜻의 회초리라면 아무리 아파도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큰 뜻을 위배하라는 회초리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기댈 데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희망을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런데 하나 경계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힘있는 국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체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할 때는 그 누구에게 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오직 국익에 의해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중심을 잃는 순간, 이 나라는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 비판자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이라는 중심을 잡고 흔들림없이 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익집단은 있지만 집단이기주의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대한민국. 좀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돕는 대한민국. 동(東)에 살고 서(西)에 사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대한민국. 바로 화합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대 차이는 있지만 세대 갈등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식은 부모세대가 민주주의를 유보하며 외쳤던 '잘 살아 보세'를 존중하고 부모는 내 아이가 주장하는 '개혁과 사회정의'를 시대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자식은 부모에게서 경험을 배우고 부모는 자식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배우는 대한민국. 자식은 밝게 자라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하고부모는 자식의 밝은 생각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대한민국. 바로 사랑으로 행복한 대한민국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높은 자리, 많은 돈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 사랑하는 아이를 한 번 더 안아 주지 못한 것,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답니다. 

저도 IMF 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전국의 노동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느라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저의 이 편지가 부모님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 대한민국이라는 가족공동체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효도 많이 하십시오. 우리 모두의 가슴에 마음으로 빨간 카네이션을 바치며... 


2003년 5월 8일 대한민국 새대통령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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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주기.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 손수건과 티셔츠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다...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문구던가. 

갈 길이 멀다. 신발끈을 고쳐 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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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1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의 편지가 유독 다가오네요. 우린 정말 좋은 사람을 잃었어요..

마노아 2014-05-11 07:41   좋아요 0 | URL
국민을 섬길 줄 아는, 국민을 사랑하는 대통령을 잃었지요...ㅠ.ㅠ

blanca 2014-05-1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봐도 울컥하네요. 저 교실. 이게 과연 현실이라니 악몽보다 더 악몽 같아요. 저 아이들을 볼모로 대체 어른들은 뭘 한 건지....

마노아 2014-05-11 12:51   좋아요 0 | URL
정부는, 왜 검찰총장 아들만 찾아준 걸까요... 저런 사진들을 접할 때마다 몇 번이고 마음이 무너져요. 대체 이 나라는 어찌 굴러가는 건지...ㅠ.ㅠ

수퍼남매맘 2014-05-1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텅 빈 교실 보니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마노아 2014-05-11 21:05   좋아요 0 | URL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 생명들을 다 어찌합니까...ㅜ.ㅜ

paviana 2014-05-12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어떤것인지 요즘 조금은 알 거 같아요. 저도 안산 다녀왔습니다. 그 많은 예쁜 아이들. ㅠㅠ 이게 나라냐!!!!

마노아 2014-05-12 13:28   좋아요 0 | URL
오늘 급식지도하면서 애들 식판에 김치를 담아주는데, 그냥 다 내새끼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진짜 자기 자식을, 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까요. 정말, 이런 것도 나라냐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ㅜ.ㅜ
 
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박노해라는 이름이 본명인 줄 알았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뜻으로 지은 필명이라고 한다. 그의 온 삶으로 증명해 낸 이름이라 하겠다.
2월 18일에 본 그의 사진전에서 아주 큰 감동을 받았다. 대부분 흑백사진이었는데 영혼이 들여다보이는, 영혼을 담아온 듯한 그런 사진들이었다. 그 자신의 사진도 청명해 보인다. 이 전시회에 재능기부를 해준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사진이 유독 마음에 들었던 두분 배우만 찍어왔다. 특이하게도 사진을 찍어도 되지만 소리나지 않게 찍으라는 당부가 있었다. 뭐 플래시는 기본으로 잠재워야 했고... 핸드폰의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막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열심히 찍었더니 책에 다 나와있다고 해서 주춤했다.
커다란 양장본 책은 정말 훌륭했지만 십만원 이상의 고가라서 나는 반양장본으로 작은 책을 구매했다. 이 책도 훌륭하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디아, 티벳의 가난한 사람들을 담아냈다. 가진 것 없지만 정직한 노동의 가치와 땀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든 사진에 녹아 있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숙연해지게 되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이 컷들은 전시장에서 부스를 구분하던 안내판이었다. 책에는 다른 사진이 들어 있다.

벽과 기둥과 집에도 정령들이 살아있어 서로 말을 한다고 믿는 인디아 농민들이 흙집 벽에 정성껏 그린 그림들이다. 모두가 예술가고 모두가 성직자로 보이는 인디아 사람들이다. 시골 마을 집집마다 여신을 상징하는 차나무 '둘씨'가 심어져 있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바친다. 하루 일을 마친 여인은 둘씨 앞에 맨발로 서서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으론 종을 흔들며 하루 생에 대한 감사 기도를 바친다. 날마다 하루의 삶을 감사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네 전쟁 같은 일상들이 보다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30년 동안 빈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왔다는 한 남자. 그 주에 천 그루의 나무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총칼이 번득이는 카슈미르에도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작지만 위대한 일을 끝까지 꾸준히 해나가는 사내의 수고에 고개가 숙여진다.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바닷가에 내내 나무를 심었던 그 청년의 마음과 닮아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적을 포기하며 살았던 게 아닐까.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만년설산의 가장 높은 오두막 집에서 엄마가 저녁밥을 지으며 노래를 불러준다.
"딸아 사랑은 불 같은 것이란다.
높은 곳으로 타오르는 불 같은 사랑.
그러니 네 사랑을 낮은 곳에 두어라.
아들아 사랑은 강물 같은 것이란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강물 같은 사랑.
그러니 네 눈물을 고귀한 곳에 두어라.
히말라야의 흰 눈처럼 언제까지나
네 마음의 빛과 사랑을 잃지 말거라."

대구가 훌륭하게 이어졌다. 낮은 곳에 사랑을 두라는 가르침이 긴 여운을 준다.
이런 노래를 들으며 자란 아이 역시 이런 노래를 들려주는 어버이가 될 테지.

6개월간 일당 1만 원의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모은 돈의 절반을 시주하러 떠난 청년의 오체투지다. 그리 힘겹게 번 돈을 어찌 내놓을까 싶은데 그의 말은 우문현답이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내 영혼을 위해 순례길에 나섰습니다.
돈은 빛나도 내 마음이 어둠이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렇게 심신의 극한으로 오체투지 순례를 하다 보면
나를 괴롭혀온 욕망과 미움의 찌꺼기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 그저 텅 빈 몸과 마음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삶에 대한 만족도가 대한민국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은 이유를 알겠다.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경지다.

공기도 희박한 티벳의 대지.
경운기와 트랙터가 있지만 동력기계를 쓰면 땅이 굳고 생명력이 죽어가기에
말이 끄는 작은 쟁기질로 대지에 말랑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삶에서 가치 있는 것들, 지켜야 하는 것들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들이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부끄러워진다.

언덕에서 관광객을 말에 태워 산정 전망대까지 데려다 주는 티베트 여인이 해지는 언덕에서 주저앉아 있다.
종일 숨찬 걸음을 내딛었음에도 손님을 태우지 못한 모양이다.
집에는 가족과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말조차도 주인을 위로하는 듯 아련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돌아앉은 등의 침묵이, 깊은 한숨이 사진 너머로도 느껴진다.

전시회 마치고 나오면서 사왔던 엽서 중의 하나다. 많지 않았던 컬러 사진 중 하나다.
작품은 구입 신청을 하면 새로 인화를 해주는데, 여러 사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팔려 있었다. 사진이라 한장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장 인화할 수 있는 게 좋았다. 그 수익금으로 많은 곳에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다.
사진을 살 수 있는 돈이 내게는 없었지만 호기심에 가격을 물어보았다.
가장 작은 크기가 1,650,000원이었고,
중간 크기가 4,400,000원
그리고 가장 큰 사진이 7,700,000원이었다.
하하핫, 이런 사진 사갈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이야? ㅜ.ㅜ
내가 가장 탐냈던 사진은 '내가 살고 싶은 집'이었다.
스티커가 아주 많이 붙어 있었는데 나같이 느낀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인도네시아 토착민인 가요족 전통 모자를 쓴 마르야나(20)는 엄마 아빠를 따라 커피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증조할머니가 심은 이 나무는 백 살이 넘었다고 한다.
커피 체리를 딸 때마다 안개 너머 지금 커피잔을 들고 미소짓는 누군가를 떠올린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커피를 마셔야겠다. 이 커피를 만들기 위해 수고한 누군가의 건강한 노동을...
그러기 위해서 공정거래 커피만을 마셔야...;;;;;

세계 최장기 군부 독재의 총칼 사이로 피어나는 미소의 나라 버마. 그러나 굳게 닫혀있던 아시아의 마지막 빗장이 풀리자, 버마에는 지금 느슨해진 독재권력의 자리에 더 무서운 자본 독재가 들어서고 있다. 자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전 세계 어디에서건 확인할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가난 속에서도 소득의 십일조를 들여 아침마다 불전에 꽃을 바치는 사람들.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영혼이 없는 밥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람들. 훌륭한 깨달음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디아 여성 농민은 누구나 최고의 건축가라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손수 디자인해 집을 짓고 살아가면서 불편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고쳐 나간다고 한다. 어느 한곳에서도 똑같은 집이 없는, 저마다의 개성이 담긴 자연을 닮은 집들... 닭장같고 성냥갑같은,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선 대한민국의 집과 크게 비교된다.

이미 자본주의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도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자연속에 녹아든 삶은 동경하고 경이롭게 바라볼 수는 있어도 따라갈 자신은 없다. 그저 이렇게 조금 엿보는 정도로, 조금이라도 내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전시회를 다녀와서 책을 샀더니 전시회 티켓이 들어 있었다. 한번 더 보아도 충분히 좋을 자리였지만, 아직 보지 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야곱에게 표를 전했다. 그후 다시 보지 못해서 감상을 듣지 못했다. 다음 번에 다시 만나면 어땠는지, 얼마나 좋았는지, 어떤 사진이 최고였는지 묻고 싶다. 얼마나 통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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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5-0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성이라고 하나 ...
아무튼 혁명이나 투쟁에서
이젠 마음의 평화 같은걸 추구하는걸로 보이는 박노해씨는
현장 활동가들에겐 이젠 지난날 이야기에만 남을 인물이 된듯하더군요.

그나저나 사진값은 정말 심하네요.
아무리 좋은 곳에 쓰인다 해도,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사용하는 사람의
사진가격으로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어떤 노동자가 그의 그림을 살수 있나요....흠....

마노아 2014-05-08 09:50   좋아요 0 | URL
사진값 물어보고 정말 화들짝 놀랐어요.
그런데 저기서 0 하나 빠진다고 평범한 노동자가 사진을 살 수 있나 싶더라구요.
그러면 노동자들의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진이나 그림과 달리 아주 저렴하게 팔아야 하나...
이게 어려운 문제 같아요.
기꺼이 그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소장하고, 저같은 사람은 전시회로 만족을...
사실 이런 전시회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긴 하죠.
티켓이 싸든 비싸든 말이에요.

아무개 2014-05-08 11:38   좋아요 0 | URL
살수 있나 없나 보다는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나 한건지
사진에 문외한인 저로써는 뭐 참 흠 킁!!!

마노아 2014-05-08 13:25   좋아요 0 | URL
저는 보고서 참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값을 듣고는 당황스러웠어요.
뭔가 안드로메다 같은 이야기였죠.

2014-05-08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구판절판


라당의 여인들

올해는 감자 수확이 좋지 않지만
라당의 여인들은 우울해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밭을 오르내리면서도
소녀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대화한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죠.
풍년에는 베풀 수 있어 좋고
흉년에는 기댈 수 있어 좋고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하고 웃음을 짓는 거죠.”
- 21쪽

마당에 모여 앉아

가장 가난하여 가장 높은 곳에 살아가지만
정결하고 단아한 살림 솜씨가 빛나는 집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노을이 물든 마당에 모여 앉아
수확한 감자와 갓 볶아내린 향긋한 커피를 마신다.
“아이가 자라서 라당의 농부가 되면 좋겠어요.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 23쪽

천연설탕
아렌

아렌 설탕은 맛이 좋고 건강에 좋아 널리 애용된다.
소년 시절부터 야생 숲을 누비며 살아온 우딘(60).
십 미터가 넘는 나무를 타고 올라 수액을 받아내고
서서히 달여 아렌 설탕을 가내생산해왔다.
인도네시아에는 자연이 길러준 것들을 거두어
채취경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약 1만 년 전 농경정착을 시작하기 전까지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취로 살아왔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다 공짜다.
- 31쪽

하늘 호수의 고기잡이

하늘빛이 맑은 물에 그대로 비쳐
‘하늘 호수’라 불리는 타와르 호수.
아버지는 고기를 잡고 아들은 낡은 배의 물을 퍼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고요한 호수처럼 말이 없어도
서로의 몸짓에 의지하며 서로를 깊이 느끼는 듯하다.
부모란 이렇듯 아이와 한배를 탄 좋은 벗이 되어
그저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고 삶으로 보여주며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사이가 아니겠는가.
- 53쪽

가장의 걸음

산정 외딴집의 가장이
자신이 기른 묵직한 양배추를 지고
십 리 길 아랫마을 장터로 나간다.
어깨는 무거워도 사랑이 가득 담긴
아내와 아이의 배웅을 등에 받으며
맨발로 내딛는 가장의 걸음에는
할 일을 다한 자의 당당함이 실려 있다.

- 55쪽

벌거숭이 아이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야 어디서나 흐뭇하지만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특별히 감동이다.
이 땅은 네덜란드와 일본의 350년 식민지 나라,
그들은 저항운동의 싹부터 말리고자
초등학교부터 아예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독립저항의 주체인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잔인한 책략이다.

브랜따 항구 갯벌에서 벌거숭이로 뒹구는 아이들.
아이들은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잠자고
마음껏 꿈꾸도록 그저 자유의 공기 속에 내비두면 된다.
자기 안에 이미 온전한 무언가를 다 품고 있으니.
- 63쪽

아빠의 ‘시간 선물’

수확을 마친 농부 아빠가 아들과 놀아주고 있다.
“이 의자는 아이가 처음 말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이 목마는 아이가 첫걸음마 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오늘은 대나무 깎아 새장을 만들어 줄 거예요.”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 69쪽

파도 속에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다

2004년, 쓰나미가 아체 주민 수십만 명을 쓸어갔을 때
울렐르 마을은 가장 먼저 해일이 덮치고
가장 처참히 파괴된 거대한 폐허의 무덤이었다.
당시 울렐르 마을의 스물다섯 살 청년 사파핫은
손가락만 한 나무를 홀로 바닷물 속에 심고 있었다.
“이 여린 바까오 나무가 지진 해일을 막아줄 순 없겠지요.
하지만 자꾸 절망하려는 제 마음은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릎을 꿇고 나무를 심던 사파핫은 끝내 파도처럼 흐느꼈다.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가느란 바까오 나무가 파도 속에 자라나 숲을 이루었고,
그는 오늘도 붉은 노을 속에 어린 바까오를 심어가고 있었다.
절망의 바닥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은 희망이 아니지 않느냐고.
파도는 끝이 없을지라도 나는 날마다 나무를 심어갈 것이라고.
- 73쪽

짜이가 끓는 시간

하루에 가장 즐거운 시간은 짜이가 끓는 시간.
양가죽으로 만든 전통 풀무 마시키자로 불씨를 살리고
갓 짜낸 신선한 양젖에 홍차잎을 넣고 차를 끓인다.
발갛게 달아오른 화롯가로 가족들이 모여들고
짜이 향과 함께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 99쪽

아프간 난민촌 소녀의 꿈

파키스탄에는 160만의 아프간 난민이 살고 있다.
국경 인근의 유서 깊은 페샤와르는 ‘꽃의 도시’라는 뜻인데
지금은 ‘총의 도시’가 되어 하루걸러 총성과 폭음이다.
고향에서 피난올 때 엄마가 품고 온 어린나무에
소녀는 매일같이 물을 주며 귀향의 날을 기다린다.
“아프간 제 고향으로 꼭 초대할게요.
달콤한 석류랑 포도랑 살구 케이크랑 듬뿍 먹고
우리 함께 파란 하늘에 연을 날려요.
이 나무가 제 키만큼 자라면 꼭 돌아갈 수 있겠죠?”
아, 기다림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만 리 길도 걸어간다.
- 107쪽

코너에 몰린 생의 아이들

미군의 폭음과 홍수가 휩쓸고 간 오지 마을.
영하의 추위에 난로도 외투도 양말도 없고
책걸상도 공책도 칠판도 선생님도 없다.
자습이 끝나자 늘 허기져 눈만 큰 아이들이
품에 싸온 제 몫의 감자 한 알을 나에게 내민다.
아,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지구의 벼랑 끝, 막다른 코너에 몰린 생의 아이들.

- 113쪽

파슈툰 소년의 눈동자

10년 넘게 계속되는 미국의 침공 속에 자라난
파슈툰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
한 생에 겪을 고통과 비극을 다 보아버린 눈동자.
만년설산이 들어박힌 저 푸른 눈빛, 아니 푸른 불꽃.
부모를 잃은 어린 가장인 알람샤를 안아주자
만년설이 녹아내리듯 소리 없이 긴 눈물을 흘린다.
나는 한번만이라도 이 아이들의 웃는 모습과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기를 바랐다.
눈물 젖은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나는 신神을 본다.
거대한 성전이 아닌 이 눈동자에서 신神을 만난다.

- 117쪽

쌀과 총

‘다섯 줄기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끝이 보이지 않는 비옥한 곡창 지대 펀자브.
페르시아, 아랍, 영국도 탐을 내던 지역이다.
소작농들 주위에는 대지주들이 고용한
무장 경호원들이 총을 들고 감시 중이다.
독점하는 자는 어디서나 총구에 의지하고
독식하는 자는 언제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정직한 쌀에는 총이 필요없다.

- 131쪽

어린 양을 등에 업고

며칠 전에 태어난 어린 양을 등에 업고
양떼를 몰고 멀리 풀밭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 아이는 아직 풀도 못 먹고 잘 걷지도 못하지요.
어미 젖을 먹이고 햇살도 바람도 먹여야지요.
이 녀석들 모두 이렇게 제가 업어 기른 양들이랍니다.”
- 135쪽

내가 살고 싶은 집

높고 깊은 산맥에 소중히 숨겨진 가쿠치 마을.
흰 만년설과 푸른 하늘과 붉은 흙집과 노란 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가을날.
남자들은 산 위에서 야크를 치고 땔감을 구하고
여인들은 양털을 자아 옷감을 짜고 빵을 굽는다.
따사로운 가난마저 고르게 빛나는 마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작은 흙집.
마음까지 환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집.

- 142쪽

아름다운 배움터

한 자리에서 11개의 만년설산을 볼 수 있는 마을.
봄이면 살구꽃 자두꽃 앵두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노란 포플러잎과 빨간 사과가 마을을 물들인다.
맑은 햇살이 비추고 신선한 바람이 불 때면
아이들은 답답한 교실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배운다.
지식 경쟁의 제도화에 얽매이기 이전의
마을 속 학교는 아름다운 삶의 배움터다.
- 147쪽

내 손으로 집 짓는 날

식구가 늘어나 집을 늘려 짓는 날.
기분 좋은 부인은 도와주는 이웃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다니며 고마움을 전하고
남편은 물담배를 피우며 기운을 돋운다.
뜨거운 지열과 습기와 맹수로부터 안전하기 위ㅏ해
한 층을 비우고 한 층 높게 짓는 지혜의 건축.
살던 집과 새 집은 나무다리가 연결한다.
집이란 이렇게 사고 파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내삶의 무늬를 새기며 오래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지상의 단 하나뿐인 기억과 소생의 장소이니.

- 167쪽

고산족 마을의 수력 발전

라오스의 산간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주민들은 지혜를 모아 강보에다 나무와 폐품을 조립해
자력으로 마을 수력발전소를 창조해냈다.
자연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자연의 힘을 살려 쓰는
개전個電은, 거대 독점 시스템도 고압송전의 낭비도 없고
블랙아웃과 전기세 걱정도 없는 최고의 적정기술이다.
전기는 태양과 바람과 강물을 타고 흘러야 한다.
방사능과 석유와 약자의 눈물을 타고 흐르는
눈부신 세상은 인간의 어둠에 다름 아니기에.

- 187쪽

아카족 마을의 햇살 학교

지도에도 없는 깊은 산 속의 아카족 마을.
고운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짝을 지어 학교에 모여든다.
선생님은 아이를 등에 업은 동네 이모다.
아빠들이 짜준 책상에 하나뿐인 책을 놓고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우다 공부 삼매경에 빠져든다.
누가 공부 잘하냐고 물어보자 서로 어리둥절하다가
“다 잘하는데요, 이 친구는 셈을 잘하구요
저 오빤 나무 타고 과일을 잘 따구요
얜 물고기를 잘 잡구요 전 노래를 잘해요.
아참, 저 이쁜 언니는 최고의 날라리래요.”
- 197쪽

꽃다운 노동

물 위에 떠 있는 광활한 농장 쭌묘는 최고 품질의
채소를 길러내는 버마 농산물 생산의 심장부다.
이 쭌묘에서도 심장부는 불전에 바치는 꽃밭이다.
버마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소득의 1/10을 바쳐
꽃을 사고 매일 아침 불전에 올리며 기도를 드린다.
덧없이 사라질지라도 삶은, 밥보다 꽃이 먼저라는 듯이.
꽃을 기르는 마 모에 쉐(21)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쭌묘에서 꽃밭을 가꾸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은 제 손에 향기를 남기지요.
꽃을 든 사람들의 미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처님께도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거예요.”
- 213쪽

오리와 소녀의 행복한 산책

아침 햇살 빛나는 만달레이 타웅따만 호숫가에
오리를 치는 소녀 판이쀼(16)가 나타나자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오리들이 금세 모여들어
새 을乙 자로 줄지어 산책을 나선다.
“꼬마 때부터 오리들과 함께 놀았어요.
기도할 때마다 오리들이 아프지 않게 빌어요.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을 아나 봐요.”
드넓은 호숫가를 노닐며 산책하는 오리들도,
오리들의 친구가 되는 소녀도 행복한 아침이다.
- 228쪽

들꽃 귀걸이를 한 소녀

부드러운 아침 햇살 아래 열세 살 소녀 마 모우가
손수 짜 만든 대나무 멍석 앞에서 첫 손님을 기다린다.
이 무거운 짐을 이고 세 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 내려왔건만,
낡은 옷은 풀을 먹여 빳빳하고 검은 머리는 곱게 빗어 묶었다.
힘든 노동 속에서도 이처럼 지극한 정성과 아름다움이 살아있고
자신의 인생이 깃든 생산물은 이토록 당당한 자부심으로 빛난다.
“우리 마을엔 전깃불은 없지만 철마다 꽃등불이 가득 피어나요.
너무 멀어 다 데려올 수 없어서 한 송이만 제 귀에 걸고 왔어요.”

- 231쪽

즐거운 나의 강

작은 마을들을 감싸 흐르며 인레 호수로 향하는 인떼인 강.
여인들은 빨랫방망이를 두들기며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물장구치며 놀다가 물고기를 잡고
물소는 몸을 씻겨주는 주인의 손길에 기분 좋게 목을 축인다.
내가 사는 가까이에 있고 내 몸과 기억 속을 흐르는 강.
강의 생명은 콘크리트 댐 속의 많은 물이 아니다.
강의 생명은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물이다.

- 234쪽

맨발의 입맞춤

인디아 여성 농민들은 논밭에서 맨발로 일하고
흙길에서도 맨발로 걷기를 좋아한다.
신발을 살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지는 인간을 품어 기르는 신성한 몸이기에
맨발로 정중한 입맞춤을 하는 게 도리인 것이다.
맨발에는 금과 은으로 된 발찌와 발가락찌로
정성을 다해 치장하고 늘 청결하게 씻는다.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
대지에 뿌리박은 삶에서 행복이 차오르는 것이니.
286

- 275쪽

물 항아리 머리에 인 여인의 걸음

물 항아리 머리에 인 여인의 걸음으로 깨어나는 인디아의 아침.
묵직한 물 항아리를 이고 걸으면 등허리와 목선이 곧게 펴지고
단전에서부터 온 몸에 기운이 차오르는, 최고의 일상 요가가 된다.
인디아 여성의 늘씬한 몸매와 우아한 자태는
날마다 물 항아리를 이고 걷는 노고의 선물인 것만 같다.
고귀한 것은 늘 무거운 것, 고귀한 짐을 아름답게
이고 지고 가는 자가 고귀한 사람인 것을.
- 286쪽

푸른 초원 위의 낮잠

고단한 유목의 계절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온 청년이
수고했던 말들을 풀어놓고 초원에 누워 낮잠을 잔다.
순백의 구름은 유유히 떠가고 들꽃 내음은 향기롭게 흐르고
보리를 베는 여인들의 노래 소리는 바람결에 실려온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청년은 지구를 배경 삼아
푸르른 초원에 누워 깊고 달콤한 낮잠을 누린다.

-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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