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24 호/2014-05-07

[이달의 역사]대항해 시대를 연 캡틴 쿡의 일생

 

[이달의 역사] 코너에서는 ‘과학자의 열정과 삶을 돌아보다!’라는 주제로 과학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과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과학적 열정을 다루고자 합니다.


캡틴 쿡으로 잘 알려진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은 영국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항해 시대를 연 장본인 중 한 명이다. 1747년 18살이 된 쿡은 석탄 운반선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영국 해안을 오가며 항해술을 익힌 후 보다 넓은 바다를 동경하여 1755년 영국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그의 항해 능력은 곧바로 인정을 받아 한 달 만에 하사관이 되었고 바크선(Bark船, 범선)의 선장이 됐다. 이후 약 10여 년 동안 영국 해협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등지에서 지도 측량을 하면서 지도 제작법을 배운 것이 그로 하여금 과학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는 단초가 됐다.

■ 세 차례에 걸친 항해

쿡은 세 번에 걸쳐 중요한 탐험을 수행했다. 1차 항해는 막강한 권위를 갖고 있던 영국왕립학회와 영국해군본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타히티로의 금성 관측 탐사대 파견이다. 1769년에 금성이 태양면을 통과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서로 멀리 떨어진 데서 관측하면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를 정확히 잴 수 있다고 생각한 영국 정부가 탐험대를 구성한 것이다.

이 탐험대는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는데 과학을 위한 탐험대 파견으로는 최초이기 때문이다. 해군 본부는 이 일을 맡을 인물로 하사관 쿡을 추천했다. 쿡은 뛰어난 항해술뿐만 아니라 측량과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으므로 쿡을 대위로 승진시킨 후 탐사 대장으로 지명한 것이다.

1768년 8월, 쿡의 제1차 탐험대는 엔데버 호(Endeavor, 368톤)에 94명의 일행을 태우고 플리머스항을 출항했는데 일행 중에는 동·식물학자, 사생화가들도 포함됐다. 1769년 타히티섬에 도착한 탐험대는 관측소를 설치한 후 이어서 비밀리에 내려진 ‘미지의 남방 대륙‘ 존재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항해에 들어갔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양 극에 두 개의 주요한 대륙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구가 자전할 때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면 북반구의 유라시아 대륙처럼 거대한 땅덩어리가 남반구에도 있어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남방 대륙을 탐색했지만 이들이 발견되지 않아 쿡에게 이를 탐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쿡은 이 항해에서 뉴질랜드가 2개의 섬으로 나뉜 것을 발견했고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탐사한 후 문명인이 살 수 있는 땅임을 확인했다. 그는 이 대륙의 동쪽 땅을 뉴사우스웨일스라고 명명한 뒤 영국 땅임을 선언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는 그가 찾던 남방 대륙은 아니었다.

쿡은 1차 탐험에서 30명이나 되는 선원을 잃는 악전고투 끝에 1771년 7월 영국 도버에 귀환했다.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항해 답사기를 제출했는데, 꼼꼼하고도 철저한 항해 보고서는 당대의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노고는 곧바로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그의 이런 파격적인 승진은 쿡의 정밀한 항해 기록으로 태평양 지역이 세계 지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쿡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채집한 갖가지 동식물 표본은 박물학(생물학)에 크게 이바지했고 그가 데려 온 캥거루는 유럽인들의 미지에 대한 관심을 끌게 했다. 쿡은 단순한 선박의 함장이 아니라 완벽한 과학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1차 항해에서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는 데 실패하자 영국 정부는 계속 미지의 남방 대륙을 탐사하도록 2척의 배를 배정했다. 1772년 7월, 1차 탐험 때보다 훨씬 좋은 과학 장비를 싣고 영국을 출발했다. 승선 인원은 총 200여 명으로 선원뿐만 아니라 천문학자 등 과학자들도 포함됐다.

■ 대항해 시대와 괴혈병

2차 항해는 쿡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것은 당대의 항해에서 고질병이었던 괴혈병을 치료하는 선구자가 됐기 때문이다. 15세기 들어 대형 선박으로 원(遠)거리 항해가 가능해지자, 오랜 항해 동안 저장 음식에 의존하자 괴혈병이 생기기 다반사였다. 괴혈병의 증상은 매우 고약스러워서 몸이 피곤해지고 허약해지며 팔다리가 붓고 잇몸에서 피가 난다. 좀 더 진행되면 폐와 신장까지 문제가 생겨 사망에 이른다.

쿡도 처음부터 괴혈병 치료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원들의 괴혈병을 처음 접한 것은 1758년인데 괴혈병이 가져오는 참상에 놀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기간 항해를 하다 보면 당연하게 괴혈병이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 역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임스 쿡이 부여받은 임무는 항해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선원들의 건강이 담보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부여된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쿡은 선원들의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선원들에게 공급했다. 만약 항해 중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떨어지면 절인 양배추를 보급했다. 그리고 쿡은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제일 먼저 신선한 식료품부터 챙겼다. 그의 식단에 결론적으로 비타민C가 공급되어 괴혈병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이른바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셈이다.

처음에는 선원들이 그가 제공하는 식단에 불만을 터트렸으나 그가 지휘하는 함선 내에서는 괴혈병이 발병되지 않자 그의 식단은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많은 선단들이 그의 식단을 기본으로 채택했다. 놀랍게도 그의 식단은 고질적인 괴혈병을 거짓말같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를 궁극적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과학자로 인식하는 이유다. 쿡의 조치는 결론적으로 비타민C, 즉 아스코르브산을 먹도록 한 것이다.

■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아서

쿡은 2차 탐험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남극 대륙의 75마일 지점까지 접근하였는데, 당대로서는 대단한 항해 기록으로 평가된다. 그때까지 남극해는 그 누구도 항해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바다였다. 쿡은 이곳에서 처음 빙산을 보았고 이어서 남극까지 얼음으로 대륙이 덮혔다는 것을 발견했다. 쿡에 의해 ‘미지의 남방 대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2차 항해에서 쿡은 미스터리로 잘 알려진 남태평양 상의 이스터섬에서 유명한 ‘모아이’를 발견하기도 했다.

2차 항해는 쿡에게 큰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영국왕립학회는 평민인 그를 특별히 회원으로 선출했고, 항해 중 괴혈병 희생자를 내지 않은 공적으로 왕립학회의 최고 영예인 코플리(Copley) 메달을 수여받았다. 쿡이 왕립학회로부터 이와 같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괴혈병 방지 노력 외에도 항해 역사상 특별한 업적 때문이다. 당시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는데 쿡은 크로노미터(chronometer)를 이용해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해 냈다.

■ 3차 탐사에 나서다

쿡에게 주어진 3차 탐사의 목적은 북서항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 열강은 북극해를 지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북서항로를 경쟁적으로 찾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가 이번에도 경험 많은 쿡을 탐사 대장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제임스 쿡은 2차 항해에서 사용했던 2대의 함선에 200여 명의 선원과 과학자들을 태우고 출항했다.

1778년 1월, 쿡 일행은 북쪽으로 항해를 시작해 유명한 크리스마스 섬은 물론 유럽인 최초로 샌드위치 제도(지금의 하와이)를 발견했다. 그들 일행이 하와이에 상륙했을 때 예상외로 원주민들은 낯선 방문객들을 호의적으로 맞아주었다. 그들이 하와이 원주민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것은 풍요의 신 로노(Lono)가 하얀 돛을 단 카누를 타고 온다는 하와이의 전설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쿡의 선단은 하와이를 출발해 다시 북상하여 북서항로를 발견하려 했지만 태풍 때문에 하와이로 기수를 돌렸다. 이것이 쿡의 마지막이 됐다. 하와이로 항로를 잡은 것은 바로 전 해에 원주민들이 그들을 성대한 의식에 초대하는 등 환대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시 쿡의 일행, 즉 부하들이 하와이 원주민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원들은 만취하여 서로 싸움을 하고, 잘못된 우월감을 가지거나 원주민 여성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일쑤였지만 큰 말썽 없이 하와이를 출발하여 탐험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태풍을 피해 다시 하와이로 들어왔을 땐 과거에 쿡의 부하들이 저지른 행동에 원주민들이 분개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원주민들은 그들 선박에 있는 쇠붙이들을 빼냈다. 어느 날 배에 딸린 소형 보트까지 사라지자 쿡은 대원 10명과 함께 상륙해서 추장을 붙잡아 원주민들이 훔쳐간 배와 물건을 돌려주기 전에는 추장을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이 쿡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다. 성난 원주민 수천 명이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오자 쿡 일행은 상륙선 10m 앞까지 달아났지만 쿡은 원주민들에게 결국 살해됐다.

그는 위대한 항해가, 탐험가, 지도 제작자이자 뛰어난 리더십, 불굴의 용기, 탁월한 항해술,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쿡이 빈농의 아들이라는 낮은 지위였음에도 당대의 유능한 항해가로, 또 과학자로 떠오른 것은 항해에 과학적인 바탕을 세우고 제도법과 항해술에 과감하게 새로운 기준들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하층민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노력과 실력만으로 사회적 높은 지위를 성취한 의지의 사나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는 당대의 다른 탐험가들이 기독교를 모토로 대부분 비인도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인도주의적인 교양을 심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다른 문화의 정복자나 파괴자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리 정치학적 과제를 수행했다고 하지만 그 목적은 영국의 해상 패권 장악을 위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를 보는 시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선장이었던 제임스 쿡은 과학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과학적 탐구 조사 중 맞은 영웅적 죽음, 즉 ‘과학의 순교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고한 영국 해군이 비로소 쿡의 희생으로 인해, 그의 행동들은 괴혈병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그가 주장한 식단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항해에 과학적인 바탕을 세우고, 괴혈병을 사라지게 만든 원동력이 된 제임스 쿡은 과학적 인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글 :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과학저술가

※ 참고문헌
『탐험과 발견』, 이병철, 아카데미서적, 1989
『탐험사 100장면』, 이병철, 가람기획, 1997
『이타적 과학자』, 프란츠 M. 부에티츠, 서해문집, 2004
「제임스 쿡」, 표정훈, 네이버캐스트, 2009.04.29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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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어릴 때부터 신께 바쳐진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마치 사무엘처럼. '신'의 이름으로 낙인 찍힌 그 말이 주술처럼 나를 옭아매어서 내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소망하는 것도 안 된다고 여기며 살았다. 인생의 행로가, 도착지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다른 샛길로 나가봐야 무엇하는가 싶었다. 교생 실습을 목전에 두고 있던 대학교 4학년 봄, 답답한 마음에 교수님께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수님은 아주 심플하게 충고해 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내가 아무리 피해가려고 해도 그 길을 가야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길이라면 내가 가고자 기를 써도 갈 수 없다고. 그 말은 나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모두 무색해졌다. 신의 섭리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지 목적지 하나만 두고 말하지 않을 것인데, 나는 불필요한 고민에 너무 오래 내 몸을 담그고 괴로워했다. 


이후 파울로 코엘료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에서도 비슷한 깨달음과 감동을 얻었다. 사랑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치유의 은사를 접고 신에게로 향하던 진로를 내려놓은 남자를 보는 것이 여자는 괴로워서 도망쳤다. 하지만 남자는 따라와서 그녀를 잡았다. 그가 아니더라도 신이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필요하다면, 신은 그리 할 것이다.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물론, 나는 겁먹고 내쳤었지만......


이 작품은 W수도원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작품 후기를 보고서 이곳이 왜관이겠구나 싶었다. 요한 신부님께 아빠스님(대수도원장)은 자신의 조카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냈다. 아마도 죽을 병에 걸린 모양이다. 10년 전에 불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그래서 신부 서품을 앞두고 있던 젊은 사제 요한이 소명을 내려놓으려고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슴 속 불덩이가 다시 치올랐고, 그들의 10년 전 이야기가 재생된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다지 없어서,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수사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내게 무척 신선했다. 요한에게는 삼총사로 묶이는 친구 수사가 둘 있었다. 냉철하고 이지적인 미카엘과 천생 천사같은 착한 심성의 조각같은 얼굴의 안젤로. 둘의 성격을 보여주는 말투를 들어보자.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역설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교회, 낙태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왜 젊은 엄마들이 배 속에 든 자신의 아이를 죽일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조금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교회, 수백 명의 인명을 살상하려는 강대국의 무기 판매에 아무 경고도 하지 못하는 교회! 이혼은 죄라고 하면서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불행하게 사는지 보이는데도 모른 척하는 교회! 동성애가 무슨 취향인 줄 아는 교회! 그 교회가 나를, 여자들과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수도원의 형제들이 노동한 대가인 그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수사들과 같은 수위로 처벌하려 하는군. ‘부자가 재산을 자랑할 때 약탈과 착취가 묵인되고, 군지휘관이 승전보를 알릴 때 대량 학살이 묵인되고, 고관대작이 권력을 뽐낼 때 폭력이 묵인되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것들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 부류 속에 있음을 의심하라!’하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 -67쪽


교회와 장상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던 미카엘의 각진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에 비하면 안젤로의 목소리는 좀 더 느리고 보다 부드럽고, 그리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안젤로는 초콜릿을 노수사님들의 입에 넣어주고는 노수사님들의 식판에 담긴 밥을 자신의 입에도 넣었다.

예수님이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꼭 같이 고통받기를 정말 바라실까요? 토마스 수사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병실에서 자기는 아파서 물도 삼키지 못하면서 제가 친척들이 사 온 주스며 빵을 먹고 있는 걸 보기를 그리 좋아하셨는데요.” -37쪽


안젤로는 요한이나 미카엘에 비해서는 배움이 짧았다. 그래서 모르는 것도 많았고 실수도 아주 잦은 수사님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는 본질적인 깨달음이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금식하는 것을 자랑삼던, 계율을 지키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던 바리새인의 오만함이 그에게는 없다. 예수님이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꼭 같이 고통받기를, 정말 바라실까? 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부모도 그리 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교회와 장상의 처사에 염증을 느낀 미카엘 수사가 신부 서품을 아예 내려놓으려고 할 때 요한 수사가 말렸다. 


 

“긴 인생에서 겨우 한 해 늦추어졌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잖아요. 우리 수련수사 때 수련장 신부님 말씀하신 거 전 가끔 생각해요. 나가는 것도 좋다. 길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평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69쪽


분노와 충동 속에서 급하게 내린 결정은 반드시 후회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평화 속에서, 그리고 침묵 속에서 스스로와 만난 뒤 내려야 한다. 이렇게 강조한 요한도 10년 공부를 물리고 사랑하는 여자, 그것도 약혼자가 있는 여자의 손을 잡기 위해 수도원을 나가려고 했다. 비극적인 그 사고가 없었다면 그리 했을 것이다. 


큰 사고가 일어났고 죄없는 사람이 죽었다. 많이 사랑한 만큼 더 큰 슬픔이었고, 젊은 목숨이었기에 더 아까워 했다. 사랑은 뜨겁고 사랑은 달달했고 사랑은 또 더없이 가슴을 충만하게 만들었지만 현실의 벽은 언제나 그보다 높고 견고했다. 살아온 배경이 달랐고, 넘어야 할 산도 많았으며, 앞으로는 더 막막했다. 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보다 무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누군가는 제동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소희 자신이었을까, 아빠스님이었을까, 아님 신이었을까. 


작품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서,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한 사제의 연민과, 수도원 가족들을 향한 동지애와 신을 향한 사제들의 사랑까지 다양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북한 자강도 옥사덕 수용소에서 생지옥을 경험하고도 고국 독일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 토마스 신부의 이야기와, 흥남부두 철수 때 무려 14,000명의 피난민을 무사히 실어나르고, 이후 신께 바쳐진 삶을 살았던 마리너스 신부의 이야기는 독자마저도 숙연하게 만들었다. 특히 마리너스 신부님의 이야기는 실화이기 때문에 더 뜨겁다. 배는 기름을 끌어안고 있었고, 폭격이 시작되면 모두 죽을 판이었다. 당장 떠나도 위험한 판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피난민들을 싣겠다는 선장을, 선원들은 당연히 말렸다. 그런 그들에게 캡틴은 이렇게 말했다.


‘압니다. 할 수 없는 이유 9999가지를요. 그러나 합시다. 이건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건 흥정의 대상도 고려의 대상도 아닙니다. -334쪽


지난 삼주간,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돈 앞에서 얼마나 휴지조각처럼 취급되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았다. 그래서 더 가슴을 쳤을 것이다. 이런 선장을, 이런 배를......


영하 20도의 눈보라 치는 항구를 떠나 사흘 만에 도착한 그 나라의 남쪽 항구는 영상 1도. 생명과도 같이 보드라운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거제도의 주민들이 우리 배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주먹밥을 준비해 부두에 나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맑고 신선한 이 나라의 물도 함께 말입니다. 우리 선원들은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지요. 예수라는 이름도 없고 교회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도 없는 이곳에서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펼쳐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341쪽


사흘동안 무사히 항해를 했다는 것도 기적이었다. 그런데 그 사흘동안 정원의 몇 배를 초과한 승객들이 보여준 질서도 기적이었다. 누구하나 죽지 않고 누구하나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버텨낸 기적의 사흘 뒤 도착한 전혀 다른 풍경의 항구 모습. 누구라도 이 순간을 목격했다면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2부에 도착했던 따듯한 남쪽 항구에서 읊조린 '메리 크리스마스'에 눈물이 났다. 전쟁 중에도 인간은 이렇게 사랑을, 기적을 보여주는구나.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전쟁이 아닌 데에도 이토록 비참한 죽음들을 본 것이구나......


속세를 떠난 사제들이 겪는 유혹이나 스트레스를 논문 주제로 삼았던 소희는 그 자신이 바로 유혹이 된 셈이었다. 그녀의 행보는 충동적이었고 이기적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에게 충실했고 솔직했다. 마지막 순간에 더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에도 그녀의 사랑이 깔려 있었다. 신과 대결하기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이지만,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었던 사랑이 그녀에게 있었다. 


다시 십년 전의 나로 돌아가 본다. 그 사람은 중학교 때 이미 신께 자신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서원한 사람이었다. 선교사가 되고 싶었고, 이미 그 길을 걸었던 전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힘들었다. 지극히 세속적인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함께 가자고 하면 가지 않을 나를 알기에 그는 스스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소명도 내려놓고 서원도 팽개치고 내 곁에 있어도 되겠냐고 했지만 그 순간 나는 더 무서워졌다. 마치 내가 신을 향해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살면서 해본 거절 중에 가장 매몰찼던 순간이 아닐까. 그 순간의 이별은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했다. 다시 십년이 지나고 그때의 내 선택을 후회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할 때에, 늘 내게 잔잔한 조명불이 되어주던 야곱이 충고해 주었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라고. 


동의한다. 결과를 보고서 되짚는 설명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야 편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거기까지가 우리의 인연이었을 거라는 지적에도 수긍한다. 진정 연이 닿았다면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의 남자 주인공처럼 그녀를 끝까지 붙잡았을 것이다. 그 사람도 나도 그러지 않았으니까 우린 여기까지인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고 있는 공지영 작가의 이 책에서는 무턱대고 강조하는 종교성이 없다. 오히려 나같이 그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좋은 책이다.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한 수사에게서 지극히 작고 평범한 우리네 사람을 본다. 그 혹독한 갈등과 시련 속에서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본다. 우리의 역사와 맞물려서 펼쳐놓은 기적같은 이야기들은 더 진한 여운과 감동도 주었다. 좋은 책이다.


연재를 마치고 떠난 에스파냐의 수도원에서 작가는 후기를 썼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더 깊이 절망하겠습니다. 더 높이 희망하기 위해서. -379쪽


야곱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높고 푸른 사다리를 작가를 통해서 보았다. 이 깊은 절망 뒤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 날기 위한 이 추락을...fall to 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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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5-0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가 나올꺼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좋네요.^^

마노아 2014-05-07 16:20   좋아요 0 | URL
의도한 건 아닌데 하필 부처님 오신 날에 수도원 배경으로 한 성직자가 주인공인 책 리뷰를 썼네요. 어쩐지 살짝 미안했어요.^^;;;
 
인 디즈 워즈 2 - MM 코믹스 인 디즈 워즈 1
Guilt|Pleasure 지음, 이은주 옮김 / MM코믹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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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인 디즈 워즈 2편이 나왔다. 이번에도 초판 한정 이중커버였는데, 다섯종 랜덤이라고 하니 팬들은 애간장 태웠을 듯하다. 내가 본 책도 강렬한 속커버가 있었는데, 사진은 찍었지만 차마 올리지는 못하겠다. 명백한 19금이므로. 근데 검색하면 다 나온다...;;;;

1권 표지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해골을 들고 있었는데, 이번엔 연쇄살인범이 해골 비스무리한 걸 들고 있다. 저런 마스크, 뭐라고 불러야 하나?

속표지다. 작품의 내용 때문인지 별 것 없는 이 그림도 굉장히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보인다.

지난 번에 아파트로 돌아가지 못한 의사는 연쇄살인범과 단 둘만 밀폐된 곳에 있게 되는 위기에 빠졌다. 날마다 시달렸던 악몽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작품은 독자를 두번 더 놀래켰는데, 그가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과, 또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점. 어느 쪽이 맞는 걸까? 정말 꿈일까? 정말 현실일까? 둘다 아닐까?

얼음 여왕이라는 별명이 딱 들어맞는 닥터. 정색하고 스테이크에 대한 의견을 말할 때 친구가 떠올랐다. 아, 스테이크라면 내 친구지!

평범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의 두 사람은 확연히 미모 차이가 보인다.
이 작품은 아무에게나 쉽게 권하기엔 너무 하드한데, 그림만큼은 참 발군이다.
원작이 따로 있는 모양인데 그게 스토리 작가 것인지, 아니면 소설 등을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알면, 읽고 싶어질 것 같긴 하다. 1권 시작이 만화가 아니라 소설처럼 열었던 게 참 인상적이었지.

작가의 다른 작품 소개다. 책 뒤쪽의 이 그림은 흑백이다.

그리고 책에 끼여 있던 엽서는 컬러다.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서 두 개 다 찍어보았다.
출간되면 이쪽도 관심이 갈 듯하다.
소장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작품이다. 작품성은 있지만 말 그대로 정말 하드코어여서 내 책장에 놓여 있다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그런 작품. 그렇지만 3권도 나오는 대로 볼 생각이다. 일단 궁금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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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5-07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언제 이렇게 사진을^^

마노아 2014-05-07 21:56   좋아요 0 | URL
지하철 안에서 찍었습니다. 속표지는 찍을 때 살짝 민망했어요.ㅎㅎㅎ

crazyshout67 2022-03-26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마스크를 역병의사 마스크라 부릅니다

마노아 2022-03-26 12:24   좋아요 0 | URL
정보 감사합니다~
 
타조는 엄청나 웅진 지식그림책 12
조은수 글 그림 / 웅진주니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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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또 무거운 새 타조! 비록 새라고는 하지만 날 수 없는 타조. 몸무게가 무려 150kg이나 한다고. 그래도 다다다다 달리는 빠른 발의 소유자 타조! 타조의 발가락은 단 두개. 땅을 단단히 받치고 서 있을 모습이 상상이 간다. 타조의 깃털은 아주 성기다. 몸속의 유분을 곳곳으로 묻혀서 비에 젖지 않도록 털 고르기를 한다. 게다가 그 와중에 기생충도 골라내고 있으니 무척 부지런해 보인다.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시력도 아주 좋다고! 우리가 2.0이면 눈 좋다고 말하는데 타조는 25 정도 된다고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난다. 역시 타조는 엄청나!



꾸물꾸물 목주머니. 목구멍주머니. 먹은 모이를 저기 잠시 저장해 둔다고 한다. 먹을 게 있을 때 일단 먹고 저리 저장해 두었다가 소화가 다 되면 내려보내는 걸까? 인간도 저런 주머니가 있다면 다이어트가 좀 될 것도 같지만... 미용상 예쁘진 않으니 갖고 싶지는 않다. 안 보이게라면 모를까.



크기도 큰만큼 분뇨도 엄청날 게 분명한 타조. 차마 사진을 크게 보여줄 수 없었다...;;;;


타조의 짝짓기 춤이다. 왼쪽이 암컷, 오른쪽이 수컷! 그리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타조알! 

낮에는 엄마가, 밤에는 아빠가 알을 품고 있다고 한다. 뭔가 민주적인 걸! 아빠도 알을 품는다는 게 무척 마음에 든다. 


근래에 타조백이 유행을 했는데, 점점이 검은 자국이 타조 털 뽑은 자국이란 소리를 들은 이후 그 가방이 그렇게 꼴보기 싫어졌다. 정말 털 뽑은 자리인지도 사실 모르지만....


잘 때는 앉아서, 그리고 적이 올지도 모르니까 목을 길게 빼고 잔다고 한다. 근데 새들은 다 앉아서 자지 않던가? 말은 서서 잔다고 하고... 


타조를 직접 본적이 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직접 본 것인지, 아님 방송이나 책에서 본 것인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못 본 것 같다. 공작새 본 건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타조가 엄청나다는 것에는 기꺼이 동의한다. 타조는 엄청나, 타조는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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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5-0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집에 없는데 사줘야겠어요

마노아 2014-05-07 16:20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좋아할 책같아요.^^
 
마조 앤 새디 vol.3 - 궁극의 주부 마조의 정신없는 생활툰 마조 앤 새디 3
정철연 글 그림 사진 / 예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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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여러장 찍었는데 모두 어디로 갔는지 두장 남고 다 사라졌다. 그나마 한장은 너무 흔들려서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다. 결국 건진 건 달랑 한장 뿐...;;;


마조와 새디는 사무실을 열었다. 사무실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나왔고, 사업가로 변신한 새디의 활약(?)이 돋보였다. 만화가여서 그런지, 아님 만화에 등장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삶의 모습은 정말 만화 같이 유쾌하고 재밌다. 



뭐뭐뭐를 걸겠다~라를 말투를 응답하라 1994에서 보았다. 그때도 빵 터졌는데 여기서도 보고 크게 웃었다. 일초도 못 버티고 죽은 마조 때문에 더 웃었다. 나도 집에서는 고기 두점 넣고 쌈 싸먹는데 나가서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1편에서도 나왔던 양문 냉장고가 이번에도 시리즈로 나왔는데 역시 크게 웃었다. 뼛속까지 주부인 마조의 맹활약!


만약 부자가 된다면 패밀리 뷔페 가서 달랑 샐러드 한접시 먹고 나오겠다는 새디의 발언에 크게 공감했다. 맞아맞아! 배터질 때까지 먹는 게 아니라 아주 가볍게 한접시!


진정한 부자가 한명 나왔는데 꽂힌 물건이 있어서 아예 그 회사를 인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 얼마 전에 들은 연회비 200만원짜리 카드 쓰는 회장님이 생각난다. 뭔가 넘사벽이 느껴지는 세계의 사람들이다. 


책 읽은지 한참 지났다. 거의 한달 가까이. 그런데 뒤늦게 리뷰를 쓰려고 하니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재미 있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아쉬운대로 거기까지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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