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소설이었다. 작중 화자는 살인자다. 그것도 연쇄 살인범. 그는 무수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한번도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감옥살이 한번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뇌수술을 받은 뒤 살인 의욕이 떨어져서 그후 25년 동안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게 70세 노인이 된 그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이 사라진다. 깜박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통으로 잊어버린다. 과거의 일은 더 선명하게 기억나건만, 오늘 아침 일이 생각나지 않고, 알짱거리는 저 개가 우리집 개인지 남의 집 개인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수없이 메모를 하고, 앞으로 할 일을 녹음기로 녹음한 뒤 수시로 재생시키면서 자신의 행동을 체크한다. 노력형 전직 살인자 치매 환자라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한 설정뿐 아니라 몹시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작품의 강점이다. 


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 9쪽


시를 쓰는 킬러라니. 이걸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 엽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있는 소재를 가지고 시를 쓴다. 당연히 피가 난무하는 현장 묘사가 등장하지만, 강사는 그것이 '상징'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현재 이 자의 가장 큰 고민은 수양 딸이 살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고 살인자는 살인자를 알아보았다. 연이어 주변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의 주범으로 그가 지목한 상대가 딸아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는 25년 만에 다시 연장을 갈아야 할 때가 왔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수시로 잊어버리고 마는 치매 환자인 것을... 이제 전직 연쇄살인마가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지 독자는 기대를 갖고 지켜보게 된다. 


작품은 비교적 짧은 편이고 그마저도 빠르고 쉽게 읽힌다. 해설에서 빨리 읽으면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부러 천천히 읽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내게는 이 작품이 재밌었지만 예상 가능한 반전에서 다소 흔한 설정이었고,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는 어느 정도 포장이 잘 된 감성적인 소설로 읽힌다. 그걸 단점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딱히 어떤 메시지를 찾거나 의미를 두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것 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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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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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운명은 방죽에 고인 물과 같은 것이었다.
-19쪽

어린 나이였지만, 한 번도 어린아이다운 적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지긋지긋한(그는 내게 그 표현을 썼다. 그 나이에 벌써 현실에 대해 엄청나게 비극적인 상상을 하곤 했노라는 것이다)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기를 꿈꿨다. 요컨대 그의 독서에의 몰두는, 책속에서 낙원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현실에 눈감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들은 일찍부터 마취제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자신의 글 만들기가 마취제인 셈이라고, 그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지막하게 고백했다.
-22쪽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23쪽

‘세상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가 아닌 모든 사람의 편이었다.’(《생의 이면》, 99면)
-76쪽

그는 두 개나 되는 재를 터벅터벅 걸어서 넘었다. 집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가 지나온 두 개의 재에 비하면 언덕이라고나 해야 할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 오랫동안 버려진 채로 있는 교회당으로 갔다. 어둠이 매우 느리게, 그러나 아주 체계적으로 땅을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77쪽

현실 속에서 부정해 버린 아버지를 신화 속에서 되살려 내려는 나의 무의식적인 기도를 아버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분은 신화 속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내가 지워 버린 현실 속으로 불쑥 얼굴을 내미는,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출현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86쪽

나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부정해 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내 신화 속에 만들어 넣으려고 찾아온 무극사에서,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아버지를 만난 충격이 하도 커서 나는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흔적>, 《생의 이면》, 198~200면)
-88쪽

그는 자신의 그 참혹한 가난과 외로움을 극복해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비난하는 대신(비난하는 것은 참여한다는 뜻이다) 혐오하거나 기피했다. 말하자면 초월하려고 했다.
-108쪽

풍경화는 나를 질리게 한다. 서정시들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것들은 나의 심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침을 튀겨 가며 감탄해 마지않는 소위 명작들 앞에서 한없이 밋밋하기만 한 내 멀뚱한 심장을 노려보며 절망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는 불행하다. 다른 정상인들처럼 색을 식별하지 못하는 색맹임을 알게 된 충격이 가세하여 한동안 기형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사실을 고박할 필요가 있을지.
-113쪽

나는 기억한다. 세상은 나를 힘들어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그런 것처럼. 그것은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들어와야 한다고 세상은 내게 말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자기 품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사전에 이해를 확보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19쪽

아하, 쉼 없이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여태 이야기 상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 놓고 솔직하게 늘어놓기 위해서이다.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한없는 끈기와 인내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어 줄 상대를 찾아서 사람들은 기도처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무슨 뜻이 있을까.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상대, 이제까지 나는 그 상대를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늘 나의 일상은 불안하고 외롭고 헛헛했던 것이다.
-181쪽

살부(殺父) 인식은,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또렷해지면서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이제 부재가 아니라 원죄였다. 원죄는 시간으로 지우지 못한다. 원죄의 무게 앞에서는 시간도 무력하다. 그는 자주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을 꾸며 잠을 설치곤 했다. 때때로 아버지에게 그가 살해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세상은 그와 너무 달랐으므로. 정신 이상의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에 의해 감금된 것처럼 그 또한 세상으로부터 감금되어 있었으므로.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판단하고 일찍부터 세상에 대해 적의를 품고 살아왔으므로.
-215쪽

그는 다 식어 빠진 한 모금의 커피로 목을 축이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의 쓸쓸한 웃음 뒤로 언뜻 회한 같은 것이 어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강 상류로 헤엄쳐 올라온다는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기억이 그의 영혼에 일으키고 있는 파장을 나는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나는 그를 재촉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쉼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띄엄띄엄 자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끔씩은 고통스러워서인지 얼굴을 찡그렸고, 때때로 부끄러움 때문인지 낯을 붉혔다.
-221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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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 때 되면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묻는 리포터의 질문에 길가던 사람들이 "발렌타인 데이요!"하고 외치는 영상이 나오곤 했다. 

신기하게도 대보름날과 자주 겹친다. 

요즘은 보태기 설명이 하나 더 늘었다. 오늘이 안중근 의사가 사형판결을 받은 날이라는 것!



 


경기도 교육청의 바람직한 광고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손가락을 잘라 조국을 위해 일할 것을 맹세했던 그분은 제 목을 바쳐 그 조국에 헌신했고, 그 시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1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안중근 의사도 대단하지만 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도 놀라운 분이시다.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여기지 말라며 항소하지 말라는 이 의연함 앞에 숙연해지고 부끄러워진다. 이렇게 피흘려 지킨 조국의 현실은....;;;;

 

 








몇 해 전 뮤지컬 '영웅'이 처음 막이 올랐을 때, 오프닝 날이 10월 26일이었다. 보통 이런 공연은 월요일이 휴무지만, 그날은 월요일인데도 날짜의 중요성을 기려서 오픈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바로 그날. 같은 날 또 다른 독재자가 부하 손에 죽던 그 날 이 작품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류정한 주연으로. 그 후 몇 차례 더 뮤지컬이 진행되었는데 최근 주연으로 JK김동욱이 나왔다. 마성의 목소리를 지닌 이 남자의 노래가 궁금했는데 지난 번 '해를 품은 달'을 보러 예술의 전당에 갔을 때 오페라 극장에서 이 작품 실황을 무대 밖 TV로 볼 수 있었다. 때마침 가장 하이라이트인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노래 잘하는 가수라 하더라도 뮤지컬 무대에 서면 긴 시간을 다 소화해내는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 마성의 목소리도 음이탈로 문밖 관객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중요한 노래에서..ㅜ.ㅜ

사형 당시 안의사의 나이는 31세였다. 오늘날의 31세를 생각하면... 정말 상상도 가지 않는 의기다. 나의 31세도 마찬가지였다. 

'더 킹 투 하츠'에서 이순재는 아들 조정석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되라고 했다.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라고 가르쳐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끄러운 짓을 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거라고. 어제 두가지 중요한 재판이 있었다. 모진 시간 무죄 판결을 기다려왔던 분들에게 사죄를 해도 모자를 판에 반박성명을 냈다. 인간의 얼굴을 기대하지 않았으니 사죄하지 못하겠거든 부디 그 입 다물라, 다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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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로 2014-02-1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서재를 눈팅하고 있는 독자인데요... 위에 소개하신 책 중에서, 초록색 표지로 된 "시대의 스타카토: 안중근 이상 남인수 황우석 김연아"라는 책은 부적절해 보입니다. 남인수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황우석은 안중근, 이상, 김연아와 나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거든요. 이왕이면 다른 책으로 바꿔주세요. ^^

마노아 2014-02-14 21:43   좋아요 0 | URL
제가 이글 쓰고 나가면서 조갑제 옹 책은 뺄까? 생각했는데 다른 책에서 원성이 들어왔네요.
책은 기꺼이 뺐습니다. 말씀대로 부적절한 선택이었어요.

수퍼남매맘 2014-02-1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월 14일이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날이었군요. 저도 몰랐네요.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꼭 알려줘야겠어요.

마노아 2014-02-15 17:40   좋아요 0 | URL
3월 26일에 사형이 집행됐어요. 그때 더불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듯해요.
안의사를 닥터로 아는 아이들이 있으면 곤란해요.ㅠ.ㅠ

순오기 2014-02-1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기도 교육청 덕분에
올해는 광주시교육청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이라는 안내장을 보내서
우리동네 학교에서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초콜릿 돌리는 걸 자제했어요.

마노아 2014-02-17 11:33   좋아요 0 | URL
안중근 의사와 초콜릿은 분위기가 너무 상반되죠. 경기도 교육청이 바람직한 본을 보였어요.^^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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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공황 상태가 잘 묘사되었다. 그 자가 25년 전에 은퇴한 연쇄살인범이고 유머를 중시하는 시인이라는 것이 엽기적이면서 매력적이다. 깊은 감흥은 없지만 눈길은 확실히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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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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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9쪽

나는 오직 살인만 생각했다.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다시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그때는 DNA 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쇄살인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다. 수십 명의 거동수상자와 정신병자가 용의자로 지모고대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몇몇은 허위 자백까지 했다. 경찰서들끼리는 서로 협조를 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경찰 수천 명이 작대기를 들고 애먼 야산만 쑤시고 다녔다. 그게 수사였다.

좋은 시절이었다.-32쪽

며칠 후 내 시가 실린 지방 문예지 200부가 집으로 배달돼왔다. 등단을 축하한다는 카드도 동봉돼 있었다. 한 부만 남기고 199부는 땔감으로 썼다. 잘 탔다. 시로 데운 구들이 따뜻했다.
어쨌든 나는 그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38쪽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42쪽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52쪽

"고아원 원장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죽었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엄마는 그럼 지금 어디 계실까요?"
"모르지. 어쩌면 아주 가까운 데 있을지도."
예를 들면 우리 집 마당이라든가.-103쪽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115쪽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mr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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