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역사, 곧 인류의 역사
서민의 기생충 열전 -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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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득한 우리나라이건만, 기생충에 대해서 소개할 만한 대중서가 없다는 것이 저자를 안타깝게 했다.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직접 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이름하여 서민의 기생충 열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무수한 기생충들이 있겠지만, 그걸 모두 다룰 수는 없고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한 녀석들을 선택해서 소개했다. 녀석들의 생활사를 그림으로 설명하고, 위험도와 증상 등을 별점으로 표현했다. 가장 익숙한 회충이 사실은 별거 아니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대중서를 표방하기도 했거니와 저자 자신이 워낙 유머 감각이 있는 분인지라 기생충에 감정이입되어 설명할 때마다 사소하게 빵빵 터졌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들 말이다.


막 나온 회충 알은 사람에게 감염되지 않으므로 친구가 회충에 걸렸다고 해서 절교할 필요는 없다.-85쪽


어린아이들이 다 그렇듯 알을 깨고 나온 유충도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럴 때 엄마 회충이 얘야, 세상은 원래 그런 거란다라고 얘기해 준다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어린 회충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엄마는 다른 사람의 뱃속에 있다. -86쪽


1970년대까지만 해도 50%를 넘던 회충 감염률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90년대에는 0.1%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한 사람 안에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던 시절은 갔고, 지금은 잘해야 한 마리가 고작인 세상이 됐다. 어두컴컴한 사람의 몸 안에서 자기 친구는 언제쯤 올까 궁금해하며 고독을 삼키는 회충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아프다.-89쪽


편충은 영어로 ‘whipworm’이라고 부른다. ‘채찍 벌레라는 뜻인데, 두꺼운 뒷부분이 손잡이 역할을 하고 가느다란 앞부분이 채찍의 때리는 부분에 해당된다. 편충의 슬픈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채찍 부분이 충체의 앞부분인데 사람들은 여기를 꼬리라고 생각해 꼬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uris)’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느다란 앞 부분에 입도 있고 식도도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편충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황한 사람들은 뒤늦게 머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ocephalus)’라고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줬지만, 그전 이름에 익숙해진 학자들은 그냥 쓰던 대로 쓰자. 편충이 서운해 봤자 지가 어쩌겠어?”라며 기존 학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시에서 보듯 제대로 된 이름은 하물며 기생충에게도 중요한 법, 이 사건으로 인해 편충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94쪽


열대말라리아는 겨울철에 16~18도 이하로 떨어지면 전파가 안 되는데, 영하 10도 쯤은 우습게 넘기는 우리나라 겨울을 견뎌 낼 재간은 없다. 삼일열말라리아가 9개월이라는 매우 희한한 잠복기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나라의 겨울이 춥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 온난화가 될 경우, 그래서 우리나라가 확 더워져 버리면 열대말라리아가 유행할 수도 있을까?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계속 걱정하는 사안인데, 지구 온난화는 혹시 백인들의 피가 먹고 싶은 말라리아의 음모가 아닐까?-231쪽


재밌는 이야기만 전달해 준다면 대중서의 자격 요건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기생충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역사도 잊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곧잘 발견된다는 미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신선했다. 양반이든 상놈이든 모두 기생충과 함께 살았을 게 분명한데 부디 양반가 후손들이 미라로 발견된 조상들의 몸에서 발견된 기생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도리어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귀한 자료를 주신 조상님들을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생선회 문화에 대한 언급도 재밌었다. 일본을 더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회문화가 먼저 발전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문헌자료로 보건대 시작은 중국이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일본보다는 우리가 더 빨랐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08년도에 함께 동동주를 마셨던 두 편집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한참 논박을 했었다. 서로 문헌을 들이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데 그 전문성에 놀라서 기죽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유대인들이 돼지굽을 기피하는 것과 성서에 나오는 불뱀 이야기도 역시 눈길을 끌었다. 인문학과 역사와 자연과학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반가운 정보였다. 회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들도 잘 지적해 주었는데 회 먹지 않는 나로서는 어쩐지 좀 더 안전해진 기분이 들어서 다소 위안이 되었달까. 하하핫!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은 무척 가볍게, 쉽게 서술되어 있다. 기생충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은 잠시 내려놓고, 때로 귀엽기까지 한, 그리고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는 기생충들을 만나 보자. 이 책을 보고 난 뒤 기생충에 대한 흥미가 더 깊어진다면 그 다음에는 정준호의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이 역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게, 무엇보다도 의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기생충의 문제는 나라별 빈부 격차와 무척 연관이 있는 문제이므로 당신의 인류애도 충분히 자극시킬 테니까.


덧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연도를 1493년으로 표기한 게 두번 나왔다. 1492년이 맞을 텐데 이상하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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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2-06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싸인만 받아 놓고 부끄럽게도 아직도 이책 못읽고 있네요.

오늘 아침에 고객센터에 항의 글 남겼어요.
전 소설을 대부분 중고로 판매하는데 이렇게 표지가 찢어져서 왔으니 힝 그냥 보관해야할듯.

출근하는데 회사 입구에 유기견이 있네요. 겨울인데 털은 왜그리 박박 밀어 놨는지...
그나마 뜨신 옷은 입고 있긴 하던데 ...
뭐라도 먹이려고 쫒아 다녔는데 어찌나 짖어대고 도망가는지..
도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 왔는지 모르겠어요.
유기견 보호소에 연락해도 여기 못들어오는데 어쩐다....에혀...

마노아 2014-02-06 13:57   좋아요 0 | URL
저도 여름에 사두고 한겨울에 읽게 되었어요. 하하핫, 이런 일은 너무 많은지라...;;;;;

항의 잘 했어요. 한번도 아니라면서요. 중고책도 그리 오면 화가 날 텐데 새책이 망가져서 오다니, 나빠요.ㅜ.ㅜ

아까 유기견 사진 봤어요.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이 무슨...
옷까지 입힌 걸 보면 그동안은 사랑 받았을 것도 같은데, 그 개는 또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요.
인간은 모조리 미워 보일 거예요. 안타까워라..ㅜ.ㅜ
 
서민의 기생충 열전 -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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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에 비유한 것도 잘못됐다. 기생충은 언제나 먹을 만큼만 먹는다.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22쪽

2009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총 39구의 미라가 발견됐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미라는 쉬지 않고 발견되고 있다. 건조한 기후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운 기후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만들어진 비결은 뭘까? 답은 ‘회곽묘’에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양반들이 쓰기 시작한 회곽묘는 17~18세기에는 중·하류층에서도 널리 이용됐는데, 우리나라의 미라들은 100% 이 회곽묘에서 발견된다. 서울대 신동훈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회곽묘가 미라를 만드는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산소 차단. 나무로 된 관 주위에 회반죽을 부으면 산소가 차단되어 산소를 좋아하는 호기성 세균이 다 없어진다. 둘째, 열 발생. 산소가 차단돼도 혐기성 세균이 남아 있으니 시체가 부패할 수 있는데, 회반죽이 굳을 때 발생하는 열이 남은 세균들을 모조리 죽인다. 연구에 따르면 섭씨 100도 이상의 고열이 세 시간 이상 지속됐다고 하니, 이 정도면 어떤 세균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실제로 신 교수가 쥐를 죽여서 회곽묘에 넣어 봤더니 일반 관에 넣은 쥐와 달리 3년이 지나도 거의 썩지 않고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31쪽

미라가 나오는 회곽묘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를 좌우했던 명문가의 조상들. 그러다 보니 자기 가문의 조상이 미라가 됐으며 또 기생충까지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장 과정에서 발견되니 미라들 중 많은 수가 연구자 손을 거치지 못한 채 그냥 화장돼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온 미라들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 유수의 외국 학술지에 실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반 가문들의 대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그 당시 사람들 중 기생충에 안 걸린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또 하나는 고고학자들과 의학연구자들의 공동 연구다. 발견된 미라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 그 시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기생충의 알을 많이 찾는다 해도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리라.
-37쪽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기생충학과가 의과대학에 먼저 생겼다는 거다. 기생충은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생물체가 기생충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어 길을 가는 쥐를 잡아서 조사해 보면 거의 대부분 기생충이 발견된다. 그 기생충들 중에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신기한 것들이 많고, 그중 일부는 사람에게도 감염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각 대학의 자연대마다 기생충학과가 있고 그 후에 의과대학에 생기는 게 맞고, 만약 그랬다면 기생충 연구의 저변도 지금보다는 넓었을 것 같다.
-43쪽

회충 알은 회충 암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변을 봤을 때 외계로 배출된다. 막 나온 회충 알은 사람에게 감염되지 않으므로 친구가 회충에 걸렸다고 해서 절교할 필요는 없다. 회충 알이 감염력을 가지려면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2~3주가량 숙성되어야 하며, 촉촉한 땅에서는 그 뒤에도 오래도록 살아 있으면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날만 기다린다.
-85쪽

정부에서는 양성자를 색출해 회충약을 먹였다. 수많은 회충들이 회충약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갔고, 그 바람에 대변으로 나오는 회충 알의 개수가 확 줄었다. 겨우 살아남은 회충들이 대변으로 알을 내보냈지만, 회충의 감염경로를 제대로 파악한 우리 정부는 "인분 비료 사용금지"라는 철퇴를 내린다. 이는 대변에서 잘 숙성된 알이 배추를 통해 사람 입으로 전달될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것으로, 회충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다. 게다가 변기가 점차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회충은 멸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0년대까지만 해도 50%를 넘던 회충 감염률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90년대에는 0.1%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한 사람 안에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던 시절은 갔고, 지금은 잘해야 한 마리가 고작인 세상이 됐다. 어두컴컴한 사람의 몸 안에서 자기 친구는 언제쯤 올까 궁금해하며 고독을 삼키는 회충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아프다.
-89쪽

편충은 영어로 ‘whipworm’이라고 부른다. ‘채찍 벌레’라는 뜻인데, 두꺼운 뒷부분이 손잡이 역할을 하고 가느다란 앞부분이 채찍의 때리는 부분에 해당된다. 편충의 슬픈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채찍 부분이 충체의 앞부분인데 사람들은 여기를 꼬리라고 생각해 ‘꼬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uris)’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느다란 앞 부분에 입도 있고 식도도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편충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황한 사람들은 뒤늦게 ‘머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ocephalus)’라고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줬지만, 그전 이름에 익숙해진 학자들은 "그냥 쓰던 대로 쓰자. 편충이 서운해 봤자 지가 어쩌겠어?"라며 기존 학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시에서 보듯 제대로 된 이름은 하물며 기생충에게도 중요한 법, 이 사건으로 인해 편충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94쪽

생선회 하면 누구나 일본을 떠올릴 만큼 일본의 전통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혹시 우리나라에서 회를 먼저 먹은 건 아닐까? 일본에서 생선회가 널리 퍼진 건 임진왜란 후인 에도시대 이후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전에도 생선회를 먹은 흔적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이 말고도 간디스토마의 알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묘에서 제법 발견되고, 심지어 삼국시대 화장실로 추정되는 구조물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이 여러 차례 나왔다. 예컨대 가장 오래된 화장실로 알려진, 백제 시대에 사용됐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을 발견했고, 그보다 이른 시기의 화장실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이 나온 바 있다.
그렇다고 생선회의 원조가 우리나라라는 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시경』에 구운 자라와 생선회 이야기가 나오고 ‘인구에 회자되다’의 ‘회자’가 ‘날생선과 구운 고기’라는 뜻이니, 다른 문화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생선회도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겠지만, 최소한 일본보다 먼저 회를 먹은 건 확실해 보인다.-110쪽

우리나라야 와포자충 감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상기하자. 외국에 나가면, 그게 설령 스웨덴이나 미국이라 할지라도, 물을 끓여 먹거나 메이커 있는 생수를 사 먹길 권한다. 좋은 물을 먹는 데 돈을 쓰는 것이 체류기간, 혹은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물설사를 쭉쭉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것 같아서다.
135
우리나라에는 뱀을 먹는 집단이 존재했다. 군대 말이다. 생존훈련이라고, 식량도 없이 낙하산으로 아무 곳에나 떨어뜨려 놓은 뒤 부대로 찾아오게 하는 이 훈련은 병사들을 강하게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스파르가눔과 서울주걱흡충에 걸리게 만듦으로써 전투력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119쪽

한 환자는 수시로 출몰하는 스파르가눔 때문에 7년간 여섯 차례나 수술을 했단다. 후자의 환자는 공수부대 출신으로, 군부대에 있을 때 낙하산을 타고 깊은 산골짜기에 투하되어 부대까지 찾아오도록 하는, 소위 생존 훈련을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다. 산속에 먹을 거라곤 뱀과 개구리뿐이었는지라 그가 여러 마리의 스파르가눔을 갖고 있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듭된 스파르가눔으로 고생하던 그는 국가에 소송을 제기했고, 2007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그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163쪽

32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미라에서 선모충이 발견된 것처럼 선모충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돼지고기를 먹고 얼굴이 부었다면 돼지고기가 원인이라는 것 정도는 과거 사람들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부정한 것이다. 이런 것들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주검을 건드려도 안 된다."
성경책에 쓰인 이 구절을 보면 성서시대 초기에도 이미 돼지고기의 위험성을 알았던 모양이고, 과거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못 먹게 했던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게 보이는 돼지를 잡아먹은 뒤 쓰라린 경험을 했던 게 한 원인이 됐다고 한다. 7세기 경 모하메드가 식단에서 돼지고기를 금지한 것 역시 선모충의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189쪽

1791년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모차르트의 사인으로 중독설을 비롯해서 연쇄상구균 감염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선모충이다. 모차르트는 죽기 44일 전 돈가스 비슷한 돼지고기를 덜 익혀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감염된 선모충이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인류가 모차르트의 주옥같은 곡들을 즐길 기회를 기생충이 빼앗은 셈이다.
-190쪽

호바스라는 학자는 얼룩말의 줄이 수면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로로 된 줄무늬가 편광현상을 일으켜 파리가 사물을 식별하는 데 지장을 준다고 한다. 즉 얼룩말은 원래 수면병에 취약한 동물이었는데 줄무늬를 만듦으로써 체체파리에 물리지 않게 됐다는 것. (...)진화 과정에서 줄이 있는 얼룩말이 더 많이 선택되도록 압력을 받은 결과라는 건데, 이 실험에 대해 한 언론은 얼룩말의 줄이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파리 격퇴제"라고 격찬했다. 그러니 정 사파리를 가야겠다면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는 게 좋겠다. 그냥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 옷을.-211쪽

지독한 경험을 했을 때 ‘학을 떼다’라는 말을 쓰는 것도 말라리아가 그만큼 지독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호란 때 잡혀갔다 돌아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소현세자의 경우 독살설이 유력하지만, 학질로 죽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
-223쪽

열대말라리아는 겨울철에 16~18도 이하로 떨어지면 전파가 안 되는데, 영하 10도 쯤은 우습게 넘기는 우리나라 겨울을 견뎌 낼 재간은 없다. 삼일열말라리아가 9개월이라는 매우 희한한 잠복기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나라의 겨울이 춥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 온난화가 될 경우, 그래서 우리나라가 확 더워져 버리면 열대말라리아가 유행할 수도 있을까?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계속 걱정하는 사안인데, 지구 온난화는 혹시 백인들의 피가 먹고 싶은 말라리아의 음모가 아닐까?
-231쪽

회충이나 장디스토마처럼 장을 침범하는 기생충은 대부분 별다른 증상을 일으키지 않지만, 폐디스토마나 스파르가눔처럼 조직을 찾아 들어가는 기생충은 필연적으로 병을 일으켜 사람을 고통받게 한다. 더 이상 보약으로 가재즙을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민물게장을 먹을 땐 폐디스토마 유충이 있는지 조심하자. 보름 이상 담근 건지 물어 보는 것만 잊지 않으면, 맛있는 게장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 보름 간 담궈 둘 여건이 안 된다면 하루 정도 냉동시키는 것도 기생충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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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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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의 조각(爪角). 겉으로 보기엔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정도로 보이지만 그녀는 40년 이상 업계에 몸을 담은 전문 킬러였다. 그들의 언어로는 방역업자로 통한다. 어린 시절 구구절절 사연 많은 이야기는 건너 뛰자.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고 갈곳 없는 그녀를 받아준 것은 류였다. 류의 본업을 모르던 조각은 자신을 덮친 주한미군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웠고, 그 찰나의 솜씨를 알아본 류가 그녀를 전문 킬러로 키웠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류였지만 조각은 그를 마음에 담았다. 


그러나 업계의 속성상 적이 많은 그들이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된 류가 안아주던 밤, 그는 지킬 무언가를 만들지 말자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던 류도 누군가를 지키며 제 목숨을 버렸다. 이 바닥에서 연민은 가장 불필요했고, 지켜야 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제 생명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이었다. 

그렇게 무엇도 남기지 않고 무엇도 아끼지 않은 채 40여 년이 흘렀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조각은 마음과 달리 빠르게 쇠해가는 몸의 변화를 눈치 채면서 퇴직의 시간이 가까워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늦게, 이제와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 여기지만, 뭘 해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피도 눈물도 없을 전문 킬러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자그마한 평화가 지켜지기를 원했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 위험도 없었을 그 평화는, 그러나 그녀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산산이 부서질 위기에 처한다. 업계에 몸 담은지 40년이 지났으니 그녀 손에 죽어간 사람이 오죽 많았겠는가. 게 중에는 그렇게 저세상 간 사람의 유가족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그녀처럼 킬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노쇠해서 사그라지는 그녀에게 젊디 젊은 킬러가 복수의 칼을 품고 다가오는 것이다. 조각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먼 시간 속의 일을 근거로.

무척 흥미로운 소재다. 킬러가 등장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은데 그 킬러가 65세 할머니다. 나이는 65세고 아직은 젊은 사람 못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지만, 얼굴 주름만 보면 열살은 더 늙어보이는 쇠잔한 몸의 노인이 주인공이다.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갖지 않던 이 할머니가 버려진 개를 한마리 주워왔다. 개 역시 늙어있었고 누가 먼저 죽을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서로의 육체가 쇠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지하는 모습이 짠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냉장고 안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버린 과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파과破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222쪽


문장을 끊지 않고 한페이지 전부를 사용할 만큼 길게 늘여놓았다. 의도한 만연체겠지만, 그래도 독자는 읽기에 피곤했다. 특히 첫 장면의 지하철 진상 노인에 대한 묘사는 초반부터 읽는 사람을 엄청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심히 앉아 있다가 일어난 노부인이 킬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작품은 빠른 속도로 독자를 끌어당겼다. 300쪽이 훌쩍 넘는 책인데 다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작품으로 무언가를 남겼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대답할 거리가 궁색하지만, 적어도 흥미와 재미만은 확실히 챙겼다고  답하겠다.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흥미로울까. 비슷한 소재로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 있었지만, 젊고 싱싱한 육신을 가진 배우가 킬러라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중년 여배우가 액션도 소화하면서 킬러로 나온다면... 와우... 무척 신선할 것이다. 김해숙 씨 같은 배우라면 어떨까. 액션은... 무리일까? 그렇다고 은교처럼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하고 찍는 건 어쩐지 사기 같아서 별로고...


그녀의 이름처럼 손톱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 상징적인 소재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그러게.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 없고, 둘 모두여도 괜찮다. 시간은 정직하다. 40년 경력의 킬러 할머니에게도, 사람에게 된통 데여버린 나에게도.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오직 시간 뿐. 당신의 한시간과 나의 한시간이 같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걸 어떻게 쓰는가는 각자의 몫. 분노가 치밀어 오르던 밤 내 옆에는 소설 한권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 내 감정을 비추어볼 때, 적절한 선택이었다. 다시 골라 보겠다. 내게는 破瓜가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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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6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구판절판


그에게서만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한마디였으나 나는 당신 어머니가 아냐, 라고 그녀는 토를 달지 않는다.
-203쪽

"복숭아가, 달고 맛있더군요, 저쪽 시장에서 어르신들 파시는 게."
조각은 이미 시작한 말을 도중에 멈추지 못한 채, 다만 자기의 말들이 조악한 질감과 형태가 있어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대로 과자처럼 바스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 어절을 떼면서는 뭔가 의도를 담고 한 말이 아니었지만 말을 하는 동안 왠지 거기에 모종의 위협이 담긴 것처럼 상대방이 받아들일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적에는, 당신 부모님이 파시는 과일의 품질과 맛이 좋으며 그런 물건을 파는 부모님 또한 좋은 분들인 것 같다는 그 이상의 뜻을 나타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맥락과 개연성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나는 당신 부모님 이미 찍어놨고 얼굴 다 알아.’ 후환이 두렵다면, 부모님이 안전하길 바란다면 그날의 일에 대해 누구에게든 술자리 안주로라도 입 벙긋하지 말라는 새삼스러운 재확인. 여기다 한층 더 이완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딸 아이의 순면 같은 두 뺨과 작게 돋은 온디콩 같은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면 쐐기를 박는 셈.-204쪽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222쪽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지금 이렇게 두 팔을 둘러 오히려 조금 전보다 포옹을 견고히 하면서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조각은 잠자코 들었다. 그가 그렇게 믿고 말한다면 그의 말이 옳을 것이었고, 팔에 깊이 힘이 들어간 것은 이 기이한 제사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뜻했다.-236쪽

잊어버려.
그녀는 멈춰 선다.
왠지 언젠가 비슷한 장면이 실제로 있어서 그런 말을 누군가한테 했던 것만 같다.
그녀가 방역 현장을 제삼자에게 목격당한 경우는 많지 않다. 언제였더라? 순간 한기가 돌고 콧속이 간질거린다.-243쪽

이번 일만 끝나고 날씨가 풀리는 대로 녀석에게 산책을 좀더 자주 시켜줄 것이다. 보통의 노부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목줄에 개를 끌고 다니고, 조금만 가면 사람이 개를 끄는지 개가 사람을 끄는지 모를 만큼 빨라지는 걸음을 숨이 찬 듯 쫓아가며, 역시 개를 산책시키는 다른 이들과 눈인사도 나눌 것이다. 동네의 다른 개들도 만나게 해주고, 서로 눈 마주치게 놔두어 탐색의 시간을 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개 주인들은 혈통이나 천 것을 운운하며 꺼릴지도 모르지. 분명한 것은 일상생활의 확장에 불과한 이런 평범한 약속을 운명처럼 걸어두어야 할 만큼 투우는 쉽지 않은 상대다.
-277쪽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283쪽

최 씨의 대답을 듣기 전에 경고음이 몇 번 흐르다가 전화가 끊어진다. 주머니가 가볍고 남은 동전은 이제 없다. 단지 동전이 바닥났을 뿐인데도 조각은 지금껏 형태를 유지해온 자신의 남루한 삶 전체를 비워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286쪽

그들은 손톱을 보고 바로 이어서 손톱 주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지도 모르지. 도저히 당신과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식이 아니라는 편견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만 침묵하거나 헛기침하며 흘끔거리겠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332쪽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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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소시오패스

   FUSION 과학

제 2059 호/201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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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yword로 읽는 과학] 소시오패스, 누구냐 넌?

2014년 KISTI의 과학향기에서는 [Keyword로 읽는 과학]이라는 코너를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와 관련된 과학계의 신조어도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이에 [Keyword로 읽는 과학] 코너에서 최신과학기술용어나 신조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서비스할 예정입니다. 
독자 분들의 참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내 독자참여-주제제안 란, 또는 댓글로 알고 싶은 키워드를 남겨 주시면 선정 후 기사로 제작할 예정입니다. 과학향기 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소설 속의 유명 탐정 ‘셜록 홈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국 드라마 <셜록(Sherlock)>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드라마에서 홈즈는 뛰어난 추리력을 갖고 있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별나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 예로 홈즈로부터 무시당한 한 법의학자는 그를 ‘사이코패스(psychopath, 정신병질자)’라 비난한다. 그러나 거칠 것 없는 홈즈는 자신은 고기능 ‘소시오패스(sociopath, 사회병질자)’라며 공부 좀 더 하라고 맞받아친다. 

비슷해 보이는 두 명칭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현재 정신의학에서는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란 하나의 진단명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이를 구분해서 사용하거나 혹은 의미를 혼용(混用)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최근 인기 몰이중인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한 남자 주인공이 방송사 누리집에는 사이코패스로, 언론에서는 소시오패스로 소개되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공통점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진단기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법과 사회적 관행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묵살하며, 후회나 죄의식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서, 감정의 폭발이나 폭력적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불량배, 깡패, 무법자, 건달, 악당, 양아치 등 많은 별명을 갖고 있는 이들의 반사회적 행동에는 낮은 공감 능력과 부족한 양심이 깔려있다. 

반면,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점은 사회적 교류 수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아예 감정의 교류를 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비해 소시오패스는 일정 수준의 공감과 사회적 애착 형성이 가능하다. 실제 반사회성 인격장애 환자 중 사이코패스 정도가 높은 집단의 뇌에서만 공감, 도덕적 판단, 친사회적 감정의 처리에 연관된 영역의 회색질(뇌나 척수에서 신경세포체가 밀집돼 있어 짙게 보이는 부분)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 연구 결과가 있다. 반면에 사이코패스 정도가 낮은 반사회성 인격장애 환자 집단은 일반인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소시오패스의 감정 처리는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 소시오패스가 감정을 자극하는 단어(예를 들어 시체, 고문)가 포함된 문제를 접할 때 이들 뇌의 측두엽으로 혈류 공급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 연구 결과가 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약간의 지적 능력이 필요한 문제를 풀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소시오패스가 감정을 처리할 때 일반인처럼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한 예상과 달리 소시오패스는 매력적인 경우가 많다. 이들이 호감을 쉽게 얻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감은 정서적 공감이 아닌 인지적 공감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그래서 이들은 적절한 표정으로 감정을 연기하며 주변 사람을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조종하며 착취하는 기생적 인간관계를 맺곤 한다. 

소시오패스는 또한 거짓말을 하는 데에 능숙하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를 생각해보자. 혹시라도 들통날까봐 긴장하고,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시오패스에게 양심이란 그저 사전 속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은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일말의 거리낌이나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소시오패스가 거짓말을 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사회성 인격장애 진단 기준 중 하나인 높은 사기성을 보인 사람들이 보통 사람에 비해 두뇌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의 회색질이 14.2% 감소한 반면에 백질은 22.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 연구 결과가 있다. 인간의 두뇌에서 회색질은 신경 세포들이 밀집돼 있는 겉 부분이고, 백질은 신경세포를 서로 연결하는 신경 섬유망이 깔려 있는 속 부분이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소시오패스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전전두피질의 신경세포가 적어 도덕적인 판단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것일 수 있다. 대신 신경세포 사이에 더 많은 통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 기억과 생각들을 수월하게 연결할 수 있다.소시오패스가 그럴 듯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기존 정보를 잘 연상할 수 있는 두뇌 구조 덕분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는 왜 생기는 것일까? 일부 사람들은 소시오패스가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와 달리 후천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소시오패스의 원인은 어릴 적 심리적 외상이나 신체적, 감정적 학대와 같은 부정적 환경이다. 그러나 원인을 이렇게 나누어 단정 짓는 것은 다소 성급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요인은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56%, 나머지는 환경적 요인이거나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시오패스의 원인으로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는 만큼 이를 예방할 수 있다면 인구의 약 4%를 차지하는 이들의 비율을 줄이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외국의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부모가 자녀에게 충분한 애정과 관심을 줘 건강한 애착을 형성하는 것이 이런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학대와 같은 생애 초기 스트레스를 겪는 아동에게 사회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시오패스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범죄자가 아닌 한 책의 제목처럼 ‘옆집의 이웃’일 수 있다. 이들은 공감과 양심 없이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주변 사람을 이용하고 조종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들의 무기가 위협하는 ‘공포’가 아니라 연민을 자아내는 ‘동정심’이란 점이다. 사회적 규범은 무시한 채 탁월한 연기와 화려한 거짓말로 당신의 마음을 측은하게 만드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라. 그는 그에게는 없는 당신의 양심을 공격 중임을. 

글 :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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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02-1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사람들과의 약속을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잘 어기곤 한다.
2. 자신의 매력으로 남들을 이용하는데 쓰곤 한다.
3. 지루함을 쉽게 느끼는 편이고, 위험한 일에 쉽게 흥미가 간다.
4. 어렸을 적에 했었던, 어떠한 잔인한 취미가 있었다.
5. 거짓말을 자주하고,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자신도 피해자임을 호소하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6. 말을 교묘하게 구사하며, 타인을 유혹하거나 착취 하려는 성향이 있다.
7. 시기심과 질투심이 강하다.
8.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사람을 잘 속인다.
9.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꼭두각시이며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10. 흥미를 잃게되면 금방 포기한다.
11. 바보인척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 의 진짜 속마음을 숨기려 한다.
12. 이해타산에 밝다.

소시오패스 테스트라는데...사실 이런 사람 의외로 꽤 많습니다.

마노아 2014-02-05 15:1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런 사람 흔할 것 같아요. 생각보다 평범한 조건들인데 그래도 당하는 사람은 아주 넘어가는 것들이죠.ㅠㅠ

아무개 2014-02-06 12:01   좋아요 0 | URL
헛.....꽤 많이....
해당되는거 같은데요... 쿨럭~

마노아 2014-02-06 13:57   좋아요 0 | URL
에이 무슨... 저 동창 중에 떠오르는 사람은 있어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절친이었지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