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린의 아기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5월
품절


바르크 씨가 잠시 말을 멈췄다.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제가 스무 살 되던 해였어요. 스무 살 나이에 뭘 알겠어요. 아무 것도 몰랐죠. 그저 몸만 다 자란 어린애였지요. 난 아직 아이였는데, 아이일 뿐이었는데, 사람들은 제 손에 총을 쥐어줬어요. 지금도 기억납니다. 당신 나라의 그 모든 풍경이요. 마치 어제 떠나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생생하게 내 속에 남아 있어요. 그 향기, 그 색깔, 그 비와 그 숲, 아이들의 웃음과 목소리까지도,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기만 합니다."-67쪽

무슈 린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사람들이 그의 배를 갈라 한때 긴요했지만 이제는 쓸모없어져버린 장기를 들어낸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무언가가 휑하니 비어버린 느낌. 주체할 수 없는 노곤함이 그의 온몸을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는 손녀딸이 그걸 눈치 채기 원치 않았다. 그 아이를 위해 그는 강해야만 하는 ㄱ넛이다. 상디유에겐 그가 필요했다. 아직 너무도 어리고 여린 아이였기에 무슈 린은 약해질 자격도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86쪽

무슈 린은 문득 합숙소 생각이 났다. 자신을 놀려대던 여인들도, 카드에 빠져 지내던 남자들도, 시끄럽기 그지없던 아이들까지도 모두 떠올랐다. 같은 나라 말을 쓰는 그들이 없어 아쉬웠다. 사무치게 아쉬웠다. 비록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 없던 그들이지만, 그래도 그들과 함께 합숙소에 있을 때에는 고향의 말을 들으며 콧소리 나고 톡톡 끊어지는 가락 속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멀기만 했다. 왜, 도대체 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나왔어야만 했을까? 다 산 늙은이 인생 마지막이 왜 이리 온통 사라지고 묻히고 죽고 하는 것들로만 채워져야 하는 것일까?-90쪽

새로 지내게 된 이곳에서 그가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똑같은 옷을 걸치고 같은 공간에 둘러앉아 지내면서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인지. 마치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를 보듯, 그 누구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들리는 싸움 소리가 다였다.-91쪽

무슈 린의 머리는 피로와 고통에 절고 환멸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은 혼란과 너무 잦은 떠남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산다는 게 무언가? 자신이 살면서 받은 상처들을 목걸이처럼 엮어 차고 다니는 게 인생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점점 약해지고 상처받기만 하는데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도 이미 충분히 힘겹건만 어째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고 쓰라려야 한단 말인가?-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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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김성민 글, 이태진.조동성 글 / IWELL(아이웰)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한다. 


제목이 주는 섬뜩함이 있었다. 안중근이 죽인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을 쏘았다? 호감이 갈 법하다. 

이 책은 굉장히 짧은 역사소설이다. 폰트도 아주 커서 15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죽었고, 안중근도 사형 당했다. 그는 나라 잃은 조국에 큰 획을 그으며 영웅의 이름으로 잠들었지만 남겨진 가족의 생은 분명 서러웠을 것이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아들 못지 않게 담대하시고 큰 배포를 가지셨지만, 안중근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도 그럴 수 있었을까? 큰 아들은 일곱살 어린 나이에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어버렸다. 낯선 사람이 준 과자였다. 배고팠던 아이가 허겁지겁 삼켰을 과자에 발라져 있던 독. 끔찍하다. 그러니 그 어미가, 남은 아들과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책은 바로 그 둘째 아들 준생의 힘겨운 성장과정을 극화시켜서 독자에게 보여주었다. 심지어 임시정부가 습격을 당할 때 안중근의 유가족을 챙기지 못해서 김구 선생이 진노한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어쩌면 준생은 버림 받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고 조국의 영웅이지만, 그에게는 처자식을 버린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가 모진 세월을 견디면서 아버지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하며 전국을 순회한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의 행위는 아버지를 배신한 것뿐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행위였다. 한 사람이 견디기에는 가혹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장준하 선생님의 아들 장호권 씨의 인터뷰를 보면 민족의 큰 발자국을 남긴 거대한 아버지를 둔 아들의 비애가 잘 느껴졌다. 가족은 돌보지 못하고 조국과 민족만 생각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비명에 가시고 남겨진 가족도 테러를 당하며 험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서 원망이 드는 것과 별개로 인간 장준하를 존경했다. 아버지가 남긴 족적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며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안준생도 그래야 했다. 그게 쉬운 일도 아니고, 당장 입에 풀칠하며 살기도 어려울 때에 보통의 결심과 각오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역시... 이건 아니었다. 호부 아래 견자가 나온 꼴이니... 아버지는 물론 그에게도, 또 나라 전체에도 비극적인 행보였다. 


이 책은 안준생의 입장을 많이 옹호하는 느낌으로 쓰여졌다. 역사 소설이라고 이미 밝혔지만, 안준생의 입장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한 것은 아닌지, 다소 위험하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이게 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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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7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10-08 23:09   좋아요 0 | URL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고 30년 뒤의 일이었어요.
제가 어제 몰아서 급하게 쓰다 보니 너무 생략을 많이 했네요.
집에 가서 조금 더 보충해서 써야겠어요.
안준생은 안중근의 아들이에요. ㅜㅜ

2013-10-08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10-08 23:09   좋아요 0 | URL
앞에는 준생이라 쓰고 뒤에는 중생이라 썼네요. 오타예요. 수정했어요.^^;;;;

아무개 2013-10-0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중생이 실제로 사과한거 였어요? 헐...저는 소설속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네요.
이래서 어설픈 정보가 더 나쁘다는 ㅜ..ㅜ

잘지내시죠?
날씨가 쌀쌀해지니 여기저기 감기 바이러스들이 난리난리입니다.
감기조심~~ ^^

마노아 2013-10-07 13:21   좋아요 0 | URL
부끄러우니까 사실은 잘 언급이 안 되죠.
뭐, 윤봉길의 손녀도 지금 새누리당에 가 있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최필립 정수장학회 전 이사장의 아버지도 독립운동가였죠. 하하핫...ㅜㅜ

어제는 태풍이 오려는지 바람이 엄청 거셌는데 오늘은 바람이 별로 안 부네요.
추울 줄 알았는데 은근 덥구요. 이런 날씨가 감기 걸리기 정말 좋죠.
우리 건강 유의하고 완연한 가을날에 만나요. 낙엽 좀 밟아 봅시다.^^

transient-guest 2013-10-0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운동 한 분들이 해방 후에 자식들은 독립운동 시키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죠. 기억도 희미한 아버지보다는 당장의 밥이 더 급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더구나 이런(?)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매우 교묘하게 당위성을 조작하니까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친일청산은 커녕 정치, 사회, 경제, 언론, 등등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다양하고 많은 분야에서 상위자리를 차지한 것은 친일 매국노와 그 후손들이잖아요. 속상하네요.

마노아 2013-10-08 15:1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은요, 다시 우리나라가 식민지배와 같은 국난을 당하면 두팔 걷어부치고 독립운동할 수 있을 것인가 묻게 되어요. 이 꼬라지를 보면 말이지요. 한숨 나와요... 정말 속상하네요.ㅜ.ㅜ

maestroX 2013-10-1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아들이 독살당할 때 나이가 7세 였다면 안준생씨는 다 어렸겠죠. 당시 힘없는 사람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너무 호되게 나무라지 마시길... 당신이라도 별 수 없었을겁니다^^ 이러쿵 저러쿵 논하는 것도 안증근 의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마노아 2013-10-12 22:37   좋아요 0 | URL
7세보다 더 어렸을 나이의 안중생 씨를 얘기하는 게 아니니까요.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었다-로 마무리 짓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죽하면 안준생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가 호부견자일까요. 안중근이란 빛을 얘기하면서 안준생이라는 그림자도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쉬쉬하는 게 더 욕되게 하는 것 아닐까요.

maestroX 2013-10-13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은 부모에게서부터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난 환경도 그 이상 중요합니다. '호부견자'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아버지와 아들을 대조하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결국 안준생씨를 만든 안중근 의사나 그를 돌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과거 모습을 탓하는 것이 됩니다. 당시 손가락질을 받는 반 고아를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마노아 2013-10-13 10:33   좋아요 0 | URL
저는 안준생 씨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헌신해 놓고 해방된 조국에서 오히려 억압 받고 탄압받은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가족들이 가난에 시달리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살게 된 우리의 현실이 더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역사가 기막히다고 쓴 겁니다. 2년 쯤 전에 한국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가 사망을 했는데 암투병 중에 돌아가셔서 장례비 포함 1000만원의 부채가 있었다고 해요. 조의금으로 500을 갚고 500이 남아서 정부에 탄원서를 올렸다고 하네요. 이명박 대통령께서 친히 '10만원'을 조의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인 거죠...ㅜㅜ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크로마뇽 시리즈 1
정준호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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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은 8미터에 달하는 촌충부터 고래 장 속의 구두충, 전자현미경으로 간신히 보이는 작은 박테리아, 우리에게 익숙한 회충, 체외에서 살아가는 벼룩이나 빈대 등 다양하다. 혹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탁란을 하는 뻐꾸기도 기생생활의 일종이다.

기생충의 생활사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직접 전파되는 회충 알은 질긴 껍질로 거친 환경에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고, 간접 전파되는 간충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생활사를 택했다. 이는 주변 환경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며, 생활 주기의 각 단계에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기생충은 항상 상상력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고전 의학서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 민담 등에서 기생충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상상력은 이후 의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민수기 21장 6~9절

신경 매독으로 인한 기형

항생제가 개발되기 이전 신경 매독은 치료가 불가능한 치명적인 질환이었다. 뼈와 살에 침입해 안면 기형을 일으키기도 하고, 뇌에 침입해 마비나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따라서 말라리아를 이용한 치료법은 혁명적이었다.

고소득 지역에서는 기생충 질환이 상당수 사라졌지만, 여전히 전 세계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한 종류 이상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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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0-04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기생충 검사한다고 주기적으로 채변봉투를 돌려서 모았더랬죠-_-: (이게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어요) 늦으면 선생님이 혼내니까, 가끔 화장실에서 남의 것을 슬쩍하거나, 길가에서 개똥을 주워서 넣는 친구들도 있었는데요, 선생님한테 혼났던 것이 기억나네요. 선생님 왈 "넌 도대체 뭘 먹고 다니길래, 응가에서 개하고 사는 기생충이 나오냐???!!!"

마노아 2013-10-06 21: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봄마다 했던 것 같아요. 남의 똥이나 개똥을 대신 냈다가 희귀사례 보고로 간택(?)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ㅎㅎㅎ
그 시절에는 해마다 구충제 꼬박꼬박 챙겨 먹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네요. ^^

transient-guest 2013-10-08 12:48   좋아요 0 | URL
온갖 기생충으로 겁을 주던 선생님과 보건위생당국의 압박이 사라진 탓이겠죠? ㅎ

마노아 2013-10-08 15:12   좋아요 0 | URL
그만큼 위생 상태가 좋아졌다는 증거가 되겠죠. 기생충 박사님도 회충약을 아니 드신다는데...ㅎㅎㅎ
근데 정말 아토피가 문제예요. 조카가 아토피가 심해서 이번 주에도 붕대 감고 있었거든요.;;;

transient-guest 2013-10-09 01:16   좋아요 0 | URL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견지에서의 위생은 좋아졌으나 생화학적인, 아니면 환경적인 요인으로 일어나는 증상들은 더욱 늘고 심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아토피에는 바깥 공기가 좋다고 하더라구요. 예전에 본 허영만의 '식객' 에피소드 중에 아토피가 있던 아이가 시골에서 놀면서 이 증상이 없어지는 걸 봤어요.

마노아 2013-10-09 12:41   좋아요 0 | URL
'풍욕'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식객 보면서 우리 조카들은 시골 가서 살아야겠네.. 싶었어요. 현실적으로 시골로 이사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요. 우리집이 그나마 북한산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다른 동네보다 공기가 좋다고 알려진 곳인데도 아토피는 쉬운 일이 아니네요. 이 책에 보면 선진국에서 자주 보이는 아토피가 말라리아가 있는 곳에선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참 역설적이에요.
 

   FUSION 과학

제 1969 호/2013-10-02

동물끼리는 ‘인간이 모르는 말’ 쓴다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 또는 ‘고등 생물’이라 부른다. 가축이나 야생동물보다 지능지수가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머리가 좋은 고등한 존재라면 그보다 못한 하등 생물의 생각이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정반대다.

영국 작가 휴 로프팅(Hugh Lofting)이 지은 동화 ‘리틀 선생님’에는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앵무새 ‘폴리네시아’가 등장한다. 둘리틀 선생님에게 동물의 언어를 가르쳐줄 정도로 똑똑한 폴리네시아는 동물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곤 한다.

“이 세계가 생긴 지 벌써 몇 천 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왜 인간은 아직도 동물의 말을 한 가지밖에 못 알아듣는 거죠?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은 즐겁기 때문이래요. 이것밖에 모르다니 인간은 정말 바보 같지 않아요?”

현실 세계에서는 둘리틀 선생님처럼 모든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련이나 훈련을 통해서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거나 따라할 뿐이다.


•인간의 언어 흉내 내는 코식이․알렉스․코코

용인 에버랜드 동물원에 사는 스물세 살 코끼리 ‘코식이’는 사람의 말을 할 줄 안다. “안녕”, “좋아”, “아니야”, “누워”, “앉아”, “안 돼”, “아직”의 일곱 단어뿐이지만 사람과 똑같은 목소리로 정확하게 발음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교 연구진이 코식이의 발음을 녹음해 일반인에게 들려주자 “안녕”과 “아니야”를 알아들은 사람이 각각 56%와 44%에 달했다.

사람처럼 말하는 동물은 또 있다. 2007년까지 살았던 아프리카 회색앵무새 ‘알렉스’는 1에서 8까지 숫자를 셀 수 있었고 50개에 달하는 물건의 이름을 구별할 줄 알았다. 또한 150개의 단어를 조합해 짤막한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일반적인 새의 능력을 뛰어넘었다고 해서 ‘천재 앵무새’라 불렸다. 죽기 전날 남긴 유언은 평소에도 즐겨 말하던 “잘했어요. 내일 봐요. 사랑해요.(You be good. See you tomorrow. I love you)”였다.

코식이와 알렉스는 사람의 발음을 흉내 냈지만 손을 사용해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도 있다. 1971년생 고릴라 ‘코코’다. 사람이 발음하는 단어 중 2,000개를 알아듣고 1,000개의 단어를 수화로 표현할 줄 안다. 아끼던 고양이 ‘올볼’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을 때는 “나빠. 슬퍼. 찡그려져. 울어.” 하고 반복적으로 표현하며 흐느껴 울기도 했다. 같은 영장류에 속하는 침팬지 중에도 인간의 수화를 배운 경우가 많다.

인간은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신기해한다. “손” 하는 소리에 강아지가 앞발을 내밀면 표정이 밝아지고 “점프”라는 조련사의 외침에 돌고래가 물 위로 뛰어오르면 격려의 박수를 치게 된다. 사람의 말을 흉내 내면 더욱 놀란다. “안녕하세요”, “나도 몰라” 하고 앵무새가 말을 하면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도 한다. 동물들은 말을 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끼리도 의사소통을 한다. 다만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식으로 대화할 뿐이다. 침팬지나 코끼리뿐만 아니라 새, 돌고래, 심지어 곤충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한다.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는 꿀벌의 춤에 담긴 의미를 알아내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기도 했다. 40년 동안의 연구 끝에 프리슈는 꿀벌이 원을 그리거나 8자 모양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꿀이 가득한 꽃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동물들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 노던아리조나대학교의 콘스탄틴 슬로보치코프 교수는 초원에 사는 설치류 ‘프레리독’의 언어를 연구하고 있다. 프레리독은 여러 가지 패턴의 소리를 조합해서 문장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단어만 50개를 넘는다고 한다.

2013년 3월에는 돌고래의 언어도 발견됐다.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와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합동 연구진은 플로리다주(州) 사라소타 인근 해안에 서식하는 큰돌고래를 연구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한 쌍의 큰돌고래를 포획한 뒤 몇 주 동안 개별 철창에 넣어 소리를 녹음한 뒤 다시 풀어주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른 큰돌고래의 고유한 음성패턴을 따라하는 현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큰돌고래는 특히 여러 사물을 접할 때마다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이것은 사과”, “저것은 포도” 하는 식으로 각각의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성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진 각자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의미를 학습하는 소통 방식을 ‘참조적 의사소통’이라 한다. 동물 중에는 인간과 회색앵무새 그리고 큰돌고래에게서만 발견된 언어 능력이다.

혹시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인간처럼 정식 언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에 따라 정해진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고양이는 전 세계 어디서든 야옹 하고 울어야 하고 새들은 종에 따라 고유의 소리를 내야만 한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 동부 해안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켄트 섬의 새들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1980년부터 2011년까지 30년 동안 초원멧새들의 울음소리를 녹음해 비교한 결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의 구성이 조금씩 바뀌어 왔던 것이다.

켄트 섬의 초원멧새들은 도입(intro), 중앙(middle), 버즈(buzz), 트릴(trill) 등 4개 단락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울음소리만 낸다. 그러나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면서 중앙 부분에 짧고 강한 스타카토가 삽입됐고 마지막 트릴 부분은 낮고 짧은 소리로 바뀌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말투가 달라지고 억양이 바뀌는 것처럼 새들의 소리도 문화적인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등 생물인 인간은 이처럼 동물마다 서로 다른 의사소통 방식을 언제쯤 모두 알아듣게 될까. 최근 한림대학교에서는 개의 뇌파를 읽고 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뇌의 전두엽에 심어진 센서가 뇌파 변화를 감지한 후 미리 입력된 문장 중 적합한 것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아직은 8가지 문장만을 인식하지만 미래에는 동물의 생각을 알아내 사람의 언어로 풀어내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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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소풍 가기도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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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데기
박윤규 지음, 이광익 그림 / 시공주니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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