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예민할 거야 사계절 웃는 코끼리 14
유은실 지음, 김유대 그림 / 사계절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장실에서 힘주느라 잔뜩 인상을 찡그린 정이의 표정이 재밌다.
이 책의 표지 그림이다.
마찬가지로 정이가 주인공인 '나도 편식할 거야'를 미처 읽지 못했는데, 캐릭터가 겹치는 걸 보니 앞의 이야기도 내용이 짐작이 간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키도 잘 자라지 않고 몸도 마른 오빠에 비해서 튼튼하고 잘 먹고 신경도 무딘 편인 정이가 오빠에게 기울어 있는 관심을 가져오고 싶어서 예민하고 싶다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고모 할머니의 조언에 따라 오빠에게 침대를 사주겠다고 하자 정이는 속상하다.
머리만 닿으면 어디서든 잘 자는 정이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 마음이야 어디 그렇던가.
이래서 이층 침대가 필요한가 보다.
우리 조카들은 열두살에 여덟살이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사려고 하면 똑같은 걸 두개 사야 한다.
서로 다른 걸 두개 사면 싸움이 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배낭처럼 메고 쓸 수 있는 물총 가방을 두 개 샀다.
열두 살 짜리가 여덟 살과 똑같이 굴면서 놀려고 하고, 여덟 살은 지가 열두 살인 줄 착각하면서 이기려 드니 남매 간에 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주인공 정이와 오빠 혁이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오빠는 좀 샌님 분위기인데 정이는 장부 같다.
이러다가 정이가 혁이 키를 훨씬 넘겨 버리면 혁이가 정이한테 맞을 지도...;;;;

회사가 망한 뒤 농부 학교에 들어가서 농사일을 직접 배운 아빠.
그리고 이제는 정말 농부가 되어 땅을 일구는 자랑스런 아빠다.
그 바람에 주말 부부가 되긴 했지만 두 분 사이는 좋아 보인다.
엄마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공무원인 듯.
시리즈가 더 나가면 엄마가 시골 우체국으로 전근을 가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정이네 식구가 모두 한 집에서 살 수 있겠지.


정이는 아빠를 완전히 빼다박았다. 얼굴 생김새도, 성격이나 여러 특성도 말이다.
여자 아이인 정이가 이리 생긴 아빠를 판박이로 한다는 것은 솔직히 마음이 아프지만,
씩씩한 우리 정이는 아빠 닮은 얼굴 덕분에 길도 잃지 않고 마을을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
동네 할머니들도 한눈에 정이가 누구네 집 딸인지 알아보기 때문이다.

먹보 정이에게 먹고 싶은 걸 참는 건 심각한 고문이다.
작가님의 친구 중에는 자는 게 먹는 것보다 좋아서 잘 때 깨우는 걸 가장 싫어했다고 하는데, 우리 정이는 자기만 빼고 먹는 걸 가장 싫어한다. 그건 정말 서러운 일!
그런데 문제는 닭고기다!
한입 베어물면 군침이 자르르 흐르는 맛난 고기가 집에서 키우던 꼬붕이였다.
아, 잔인한 현실! 마음의 울림을 따르자니 뱃속의 부르짖음이 역정을 낸다.
기어이 눈물 콧물 쏟으며 닭고기를 먹는 정이.
하하하, 어른들 보기에 귀엽고 재밌지만 어린 정이 입장에서는 잔인한 먹이사슬 관계를 깨닫는 순간이다.
'꼬붕아 미안해. 너는 정말 맛있구나.'
나는 슬프다. 맛있어서 슬프다.
(이 부분은 마치 다락방님의 시를 보는 듯한 느낌!!!)
정이의 마음 속 표현이 시적이다. 웃어서 미안한데, 정말 재밌었단다.

책속 부록이다.
7,8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인데, 이맘 때의 아이들은 스티커에 열광하기 마련!
그림이 개성있고 거친 편인데, 똥 좋아하는 또래 아이들의 눈높이에는 아주 즐겁게 보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게 나의 취향은 아니지만...^^

유은실 작가님 책 중에서 대상 연령대가 가장 어린 책이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초등 고학년이나 청소년 대상 소설 쪽이 내게는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래도 유아 어린이 용 책도 특유의 밝고 씩씩한 기운으로 잘 읽혔다. 여전히 반가운 작가님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3-06-25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다락방님의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란 말씀 아주 딱이네요 ^^

마노아 2013-06-25 15:36   좋아요 0 | URL
하하핫, 바로 알아 보시는 군요. 그쵸? 딱 그 느낌이에요.^^

다락방 2013-06-27 08:01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바로 이 대화였군요! 하하하하하

마노아 2013-06-27 09:18   좋아요 0 | URL
하하핫, 동의가 되십니까? ㅎㅎㅎ

다락방 2013-06-27 10:01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노아 2013-06-27 13:17   좋아요 0 | URL
이구동성으로 합창할 판이에요. 네! ㅋㅋㅋㅋ
 

   FOCUS 과학

제 1894 호/2013-06-24

 

기억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만일 살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조각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어떨까. 한번 본 것이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어떨까.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 사는 거라고요." - 소설 ‘궁극의 아이’ 中 앨리스의 대사

과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상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 한다. 이 증후군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종종 드라마, 문학 속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해 왔다. 장용민의 소설 ‘궁극의 아이’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일명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인 앨리스는 일곱 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몇 백만 명 중 한 명이 생길까 말까 한 희귀한 증세지만, 실제로 전 세계에 수십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프라이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실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 적이 있다. 한 외국 여성은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 일들이 마치 일상을 녹화해 놓은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며, 사소한 일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자가 직업인 한 남성은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뿐 아니라 며칠 전 편집장이 회의에서 한 말도, 몇 년 전 의사가 한 말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10년 전의 의미 없는 사건도 사진처럼 생생히 저장돼 현재와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기억이 다가 아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수준의 기억만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기쁨은 물론 슬픔, 좌절, 분노, 고통 등)도 똑같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흔히 과거가 좋은 이유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아픔이건 공평하게 모두 지나간다. 이러한 ‘망각’의 행운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일반인과 뇌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내게 과거는 상영 중인 영화 같아요. 멈출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요.” - AJ

2006년, 뇌과학 분야의 학술지인 ‘뉴로케이스’에는 공식적으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판정을 처음 받은 여성의 사례가 등장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경생물학과의 제임스 맥거프 박사가 주도한 이 연구에서 AJ라는 가명의 여성은 11세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거의 빠짐없이 기억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후에 밝혀진 여자의 본명은 질 프라이스. 맥거프 박사에게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판정을 받기 전까지 그녀는 35년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에 대해 가족에게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각종 검사 결과 질 프라이스의 기억 능력은 자서전적인 기억에 치중돼 있었다. 학습 영역으로 볼 수 있는 암기력에는 취약했으며 기타 인지능력은 평범했다. 맥거프 박사팀은 일화기억의 인출을 담당하는 좌우 대뇌피질의 특정영역이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이후 후속연구에서 그녀의 뇌 영상을 촬영한 결과, 대뇌구조의 24개 영역이 일반인에 비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인은 오래된 과거의 기억을 뇌의 우전두엽에만 저장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우전두엽과 좌전두엽에 모두 저장한다. 물론 이것이 과잉기억증후군의 모든 이유로 볼 수는 없다. 밝혀지지 않은 의문들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런 초인적인 기억력을 나타내는 증상으로 서번트 증후군도 있다. 이는 자폐증상을 가진 사람 중 극히 일부에서 나타나는 증후군으로 암기능력이나 음악, 미술 등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한다. 영화 ‘굿윌헌팅’, ‘레인맨’ 등에는 이 증후군을 앓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특히 레인맨의 실제 모델이었던 천재 킴 픽은 1만 2,000여 권의 책을 암기한다고 알려졌다. 영국의 화가 테판 윌트샤이어는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놀라운 기억력을 이용해 도시와 건축물의 모습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세계 명 지휘자 ‘로린 마젤’도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악보를 한번 보고 기억했으며 교향곡을 통째로 외우는 천재소년이었다. 이런 기억력을 포토그래픽 메모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으로 본 것을 마치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억력은 일종의 암기력으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과는 차이가 있다. 질 프라이스를 비롯해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을 연구한 결과, 학습의 영역과 기억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기력은 훈련을 통해 어느 수준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을 ‘뉴런 사이의 일정한 연결 패턴이 저장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뉴런은 신경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세포를 말한다. 인간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각각의 뉴런은 5,000~1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성인의 뇌에는 총 500~1,000조의 시냅스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 15~30배 정도를 저장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우리가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이 방대한 네트워크의 연결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다. 시냅스는 더 견고해지기도, 더 약해지기도 하며 아예 새롭게 형성되기도 한다. 이 정교하고 신비로운 과정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하다. 기억과 망각의 세계, 이를 밝히기 위한 과학자들의 도전이 계속되는 이유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6-24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13-06-2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 스마트폰의 패턴 잠금.해제 모양이 떠올라버렸습니다.
저는 상상력이 좀 과한 편인데요, 상상에 빠졌을 때는 뇌의 시냅스가 어떤 모양인지 궁금하네요.(웃음)

마노아 2013-06-25 00:25   좋아요 0 | URL
아마 그 순간에 엘신님의 뇌는 반짝반짝 마구 불이 들어올 것만 같은 걸요.
그 순간의 무늬는 어쩐지 세포를 확대한 것처럼 무척 예쁘게 보일 것 같아요.^^
 
은밀하게 위대하게 슬럼버
최종훈 글 그림 / 걸리버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은밀하게 위대하게 '슬럼버'다. 수면, 잠, 파자마... 뭐 이런 뜻이 있던데, 왜 '슬럼버'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작품은 본편의 번외편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주인공 원류환을 아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먼저 꼬마 조장 리해진!
본편에서 원류환이 꼬마 해진에게 상처를 입히는 장면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번에 그 속내를 보여주었는데 이제야 납득이 가고 이해가 간다.
그때 남겼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애초에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동무를 밟고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야수의 세계에서, 동무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사치처럼 느껴지던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굶주린 배는 닭고기 한덩어리에 좀전에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희석시켜 버린다.
바로 그걸 지적해버리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간 선배의 조언이 애처롭다.
배고픔 앞에서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핑계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공간이 있을 것이다.

리해랑의 기억도 엿볼 수 있었다.
밝고 명랑하며 오버하는 스타일로 보이지만 누구보다 외로움을 타고 정에 굶주려 했던 친구다.
그에게 원류환은 역시 특별했을 것이다. 해진과는 다른 의미로.
친구지만 친구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전사의 우정이 뜨겁고 아프다.
마지막이라면 꼭 배웅하고 싶은 상대, 기회만 있다면 꼭 보고 싶은 상대가 류환이었다.
친구지만 친구라고 부르지 못하는 하나뿐인 친구

해랑이 기타에 붙이고 다녔던 두장의 사진이 아프다.
어머니 사진 한장, 친구 사진 한장.
마음 기댈 거라곤 그렇게 두장의 사진 뿐이었다.
아버지는 마음에서 버렸다.
아니, 그가 먼저 버림받았다.
죽기 적전 그가 끌어안았던 기타의 깊은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후회 없이 눈을 감았다.
살리고 싶은 목숨이 있었고, 데리고 가야 했던 목숨이 있었다.
그래서 제 몸을 던졌다.
온몸이 찢겨졌지만 마지막에 담고 싶은 것들을 마음에 담았다.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잘 놀았다고 말했다.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애석하게도...

동네 이웃들에게 그는 동구였다.
바보 동구. 모자라도 성실하고, 궂은 일 마다않고 해주던 우리 동네 동구,
내 작은 아들 동구.
그 아이가 간첩이라고 한다. 남파 간첩.
믿을 수 없는 진실 앞에 당연히 망연자실한다.
국정원에서 뭐라고 떠들건 그들에게 동구는 해맑고 순박한 청년일 뿐이다.

동구도 그랬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어머니에게만 쓴 게 아니었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 정착하고 싶어했던 그곳에,
마음으로 새긴 고향 땅에,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진 그 땅의 이웃들에게 그가 남긴 마음이 애잔하다.

자신이 떠난 뒤 그들에게 남을 자신의 모습을 걱정했다.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그들이 가질 감정이 두려움은 아니길 원했다.
야수로 태어나서 괴물로 자란 그가, 인간 병기로 길러진 그가 바란 마지막 소망이었다.
그것도 적국 대상 요원에게 부탁한...
그들도 이렇게 인간인 것을... 사람답게 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인간인 것을....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조각난 조국이 안타깝고 가엾다.

원작 만화를 재밌게 읽고 영화도 즐겁게 보고 왔다. 이 외전 성격의 책은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에 출간되었는데, 본편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무척 짧아서 아쉬움이 큰데 사이사이의 여백을 잘 메꿔준 느낌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라쟁이 2013-07-21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지 모르게 모든면에서 조금씩 당위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이야기였는데 빈칸메우기 같은 책이네요.

마노아 2013-07-21 23:45   좋아요 0 | URL
그렇게 빈칸을 메우고도 완벽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조금 달래주었죠. 그게 어디에요. ㅎㅎ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 물리학자 이승헌의 사건 리포트
이승헌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합조단이 과학의 이름으로 천안함사건의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물리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살고 있던 이승헌 교수가 이렇게 사건에 뛰어들어 보고서를 쓰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국내에 있지 않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연구를 하던 이승헌 교수는 한발자국 먼저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 존스홉킨스대학 서재정 교수에게 격려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혹시라도 물리학자의 의견이 필요하면 말해달라며. 그렇게 시작된 한걸음은 그가 예기치 못했던 깊이만큼 더 빠져들게 되었다. 과학자의 양심이 이끈 길이었다.

 

'1번 어뢰'를 기억할 것이다.

 

후부 추진체에 300도의 열만 가해졌더라도 잉크는 완전히 타 없어졌을 것이다. 비등점이 이보다 높은 유성잉크나 페인트를 사용했더라도 어뢰 외부의 페인트가 타버릴 정도였다면 내부의 유성잉크나 페인트도 함께 탔을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외부 페인트가 탔다면 “1번”도 타야 했고, “1번”이 남아 있다면 외부 페인트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고열에 견딜 수 있는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고, 저온에도 타는 내부 잉크는 남아 있다. -서재정·이승헌 – 47쪽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는데, 폭발이 있었다면 응당 따라올 고열에도 당당하게 살아남은 파란 잉크의 1번 어뢰 글자. 그러니까 북한 소행이라고 합조단은 발표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모의실험을 했고, 그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과학자가 지적을 했다. 정당한 지적을 수긍하던가, 아니라면 재차 실험을 통해서 반박을 하면 된다. 그러나 합조단 측은 거절했고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가며 색깔론을 펼쳤다. 너무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지만 여전히 참 창피하고 뻔뻔한 수순이다.

 

이교수는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국제 과학 학술지나 언론사에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마다 관련 자료들을 보내주고 인터뷰를 하고 필요하다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국내 기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공계 소양을 갖춘 기자가 많지 않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 무척 답답해하는 인상을 받았다. 동감한다. 과학의 결과물들이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이므로 젊은 이공계 출신들이 의원 보좌관과 기자로도 많이 진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 까마득해 보인다. 이공계뿐인가. 국문학과가 속속 폐지되고 있는 시점이니, 대한민국의 앞날이 참으로 갑갑하다.

 

수개월에 걸쳐 이 문제에 힘을 쏟으면서 이교수는 여러모로 난처한 입장에 처할 때가 있었다. 본인은 과학적  신념과 지식인의 사명을 가지고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자신 때문에 일본인 친구가 화를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사직을 청할 생각까지도 했는데, 오히려 일본의 J교수는 이교수를 만류한다.

 

"토오꾜오대가 외부의 압력에 굴할 정도로 만만한 데가 아닙니다. 토오꾜오대 교수들이 전문가 입장에서 이교수의 주장이 맞다고 판단하면, 이교수가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대해 과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인정해줄 것입니다. 이교수의 일본인 친구가 그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건강한 자세가 아닌가. 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로서는 놀라는 쪽 반응이 더 당연하다는 게 슬프다. 실제로 일본의 대학은 J교수가 장담한 대로 움직였다.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 주간지 기사가 이승헌 교수님의 소속을 밝혔으니 학교 본부에서 교수님과 가족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토오꾜오 경찰과 일본 경찰청에 이교수님의 개인정보를 주어야 하는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다니.
“토오꾜오대는 이교수님의 보호를 위해 경찰이 필요하면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가급적 삼가시고, 꼭 갈 일이 있으면 며칠 전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경찰청이 그 도시에 교수님의 행적을 미리 알려 보호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사회의 저력이랄까 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사회가 이 정도로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지키는 일을 지원해주다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 152쪽

 

세상에,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너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을 지 모르니 나가!가 아니라, 보호해 주고 협조해주고 대책을 세우겠다고 하지 않나.

 

이런 식의 비교될 일은 무척 많았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낙향 후에 직접 설계한 버지니아 대학 건축 이야기도 부러운 부분 중의 하나였다. 퇴직한 대통령이 이렇게 재능을 발휘해서 조용히 지낼 수도 있구나... 싶어서. 이교수님은 그리스계 아내와 살고 있는데, 두 부부가 어린 아이들을 함께 돌보며 가사 일도 같이 돕는 것 등도 무척 부러워보였다. 책의 말미에는 이필렬 교수와의 대담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일본 토오꾜오대 연구소에는 내부 승진이 없다고 하자 독일도 그렇다고 대답해서 역시 마구마구 부러웠다. 천안함 사건의 과정에서 정부 측 손을 든 노교수의 잘못된 발언에 대해 비판을 하자 버릇없다고 호통치는 이런 서열식 한국 문화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과학이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매해 노래부르는 노벨상도 소원할 것이고.

 

이 책은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승헌 교수가 천안함 사건에 어떻게 발을 담그게 되었나부터 이 한권의 책으로 어떻게 마무리를 짓는가의 여정이 시간 순으로 쭉 배열되어 있다. 자신의 전공 분야인 물리학에 기대어 합조단의 실험 결과가 왜 문제가 있는지, 그들의 주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주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해외 언론사들과 국내 언론사들, 그리고 과학 관련자들의 움직임과 입장에 대해서 많이 소개했다. 그가 안타까워 했듯이, 우리나라 풍토에서 개인이 실명을 걸고 이 문제를 짚고 나오기에는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가 많이 크다. 여차하면 연구비가 다 끊길 판이니. 그래서 조직과 연대의 이름으로 단체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마 그 조직도 그렇게 큰 덩어리가 아닐 것이니 이해는 가지만, 역시 지성의 이름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옛날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서 북한이 금강산 댐을 만들고 있다며 우리는 평화의 댐으로 응수하자고 전국적 모금운동을 벌이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던 교수님, 안 부끄러우셨습니까? 사사오입 개헌 때 2/3를 채우지 못한 걸 반올림 해서 통과되었다고 우긴 어용수학자, 얼굴 화끈거리지 않았습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십여 년 전 황우석 사건 때 국제적으로 얼마나 망신스러웠던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감추는 것도 당연히 안 될 일이지만, 21세기에 과학적 진실이 얼마나 오래 덮어둘 수 있다고 이토록 용을 쓰는지... 그만큼 국민이 우습거나 그만큼 감춰야 할 것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게 밝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숨겼던 것들, 왜곡했던 것들 모두 말이다. 그리하여서 희생된 장병들의 억울함이 조금은 가실 수 있기를,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기를, 대한민국의 언론도, 과학계도, 집단 지성도 모두 한뼘씩 성장하고 자정되기를!

 

 

이필렬 교수와의 대담에 등장한 사진이다. 오, 멋지다. 지성미가 돋보인다! 사진이 조금 잘렸지만 사과 마크 노트북도 아주 새끈함!

 

 

덧글) 오타가 있다.

257쪽

과학의 존엄성와 엄밀성에 >>> 존엄성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 물리학자 이승헌의 사건 리포트
이승헌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장바구니담기


후부 추진체에 300도의 열만 가해졌더라도 잉크는 완전히 타 없어졌을 것이다. 비등점이 이보다 높은 유성잉크나 페인트를 사용했더라도 어뢰 외부의 페인트가 타버릴 정도였다면 내부의 유성잉크나 페인트도 함께 탔을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외부 페인트가 탔다면 "1번"도 타야 했고, "1번"이 남아 있다면 외부 페인트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고열에 견딜 수 있는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고, 저온에도 타는 내부 잉크는 남아 있다. -서재정·이승헌

-47쪽

6월 24일경 노종면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정희 의원실에서 합조단에 흡착물질을 요구했더니 천안함 선체의 흡착물질(AM-1)과 어뢰추진체의 흡착물질(AM-II)은 주겠다고 했는데 모의 폭발실험에서 나온 흡착물질(AM-III)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뭔가 확실히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다음날 노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웃으며 "모의 폭발실험 흡착물질의 EDS데이터가 조작되었군요."라고 말해주었다.

-100쪽

저녁에 서재정 교수와 인터넷전화로 통화를 하다 참여연대 보고서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참여연대가 지난달 발간한 『천안함 이슈 리포트』의 영문판을 유엔 안보리에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과 정부를 위시한 보수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국가적 이적행위"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우익단체 회원들이 참여연대 사무실 앞으로 몰려가 물리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경찰은 팔짱을 끼고 방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101쪽

백낙청 교수가 젊었을 때 어떤 분이었는지는 잘 몰랐는데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 의하면 60년대초 돈과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다 군대를 빠질 때, 하버드 박사과정 재학중 귀국하여 입대하고 군복무를 마친 분이라 한다.l 또한 스물여덟의 나이에, 그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분이 아닌가. (...) 현정부와 한나라당의 고위직 중에서 군 복무를 회피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어찌 백낙청 교수 같은 분과 비교가 되지 않겠는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 불사’를 부르짖고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전쟁 불가’를 외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119쪽

정간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얼마 전에 현 태국정부로부터 국외추방을 당한 탁신 전 수상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여기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때 태국정부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자회견 사실이 알려진 후, 한국 정부로부터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항의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다고 한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한국정부의 이해 부족에 기자클럽에 있는 동료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웠다고 하셨다.

-142쪽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 주간지 기사가 이승헌 교수님의 소속을 밝혔으니 학교 본부에서 교수님과 가족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토오꾜오 경찰과 일본 경찰청에 이교수님의 개인정보를 주어야 하는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다니.
"토오꾜오대는 이교수님의 보호를 위해 경찰이 필요하면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가급적 삼가시고, 꼭 갈 일이 있으면 며칠 전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경찰청이 그 도시에 교수님의 행적을 미리 알려 보호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사회의 저력이랄까 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사회가 이 정도로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지키는 일을 지원해주다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152쪽

기사에 의하면 러시아 조사단의 결론은 천안함이 먼저 수심이 얕은 해역에서 좌초했고 깊은 물로 가려다가 무언가 사고가 일어나 천안함이 세 동강났다는 것이다. 좌초의 증거들 중 하나는 스크루 날개의 변형상태였다. 이 ‘초기 좌초설’은 이미 『서프라이즈』대표 신상철씨와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이종인씨가 처음부터 주장했던 건데, 어뢰 공격 이외의 모든 가설은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에 의해 조명받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이 박사학위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 전문가들 또한 똑같은 결론을 냈으니, ‘초기 좌초설’의 신빙성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61쪽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신문지상에서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이 문제는 정권과 보수세력 전체의 존립이 걸린 문제라, 정부의 주장을 계속 되풀이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믿게끔 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과학이라는 권위를 빌리면 국민들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 과학계의 나약한 침묵이 또 하나의 이유다. 이 정도로 문제가 제기되었으면,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한국물리학회 같은 공인된 과학단체에서 진실규명을 요구하거나, 직접 실험을 통해서 진실규명을 하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폭발 초기 버블 팽창과정이 가역적인지 비가역적인지는, 아주 기초적인 물리문제이어서 실험을 할 필요도 없는데, 개개인이 익명으로는 발언을 해도 실명으로는 하지 않는 이유는, 현 정부에 밉보이면 연구비가 끊길 것 같아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렇게 개인이 하기 어렵다면 공인된 단체가 나서야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187쪽

버지니아대학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이 낙향 후에 직접 교정과 건물을 설계하고 세운 학교로 유명하다.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던 제퍼슨은 교정에 유럽풍의 건물과 파도 같은 담장들을 세웠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정원들을 만들어놓았다.

-235쪽

하나 재미있는 것은 합조단이 발표한 최종보고서에는 실제로는 합조단의 결론을 뒤집는 씨뮬레이션 결과나 EDS데이터 등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합조단 실무과학자들은 양심적으로 모든 자료들을 다 주었고 합조단 고위관계자들은 이를 종합하는 단계에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자료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다 보고서에 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졌다.

-240쪽

이과대 학생들의 발표에서 전두환정권 시절의 금강산댐 에피쏘드를 듣고는 새삼스러운 감회가 일었다. 한 학생은 당시 어울대 모 교수가 TV에 나와 금강산댐이 열리면 여의도 63빌딩이 40층까지 물에 잠긴다고 주장했던 예를 들며, 과학이 정치에 부역했던 사례라고 지적했다. 과학자가 자신의 발언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지인으로부터, 10월 28일 합조단 단장을 지낸 윤덕용 교수가 포항공대에서 학부생을 상대로 천안함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강연을 들으면 이수학점을 받을 수 있어서 많은 학부생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교수들도 몇몇 오고 학교 행정관계자들도 왔다고 하며, 또한 포항가속기연구소의 연구원들, 포항공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등 소장 과학·공학자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윤교수의 강연 후 토로시간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245쪽

특히 박병규 박사라는 분은 자신의 인터넷 필명이 Gaia라고 소개한 뒤, 데이터 조작이라는 말도 꺼내며 윤교수를 몰아세워 그가 당황해하자, 몇몇 교수들이 원로이신 윤교수께 무례하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데 쓸데없는 권위에 기대어, 진실을 추구하는 그 노력을 묵살하려 하는가. 미국에서 학위를 하면 나이에 전혀 상관 없이 지도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존칭 없이 그저 "철수야" 식으로 이름으로 부른다. 이는 단지 우리와 그들의 언어적 차이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고 학문에 있어서 서로간의 평등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히고 학회나 쎄미나 등 발표 후 토론은 오직 무엇이 과학적 진실인지만을 따질 뿐이다. 이렇게 연령·직책에 대한 권위의식이 전혀 없는 미국 등지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을 한국 교수들 중 일부가 권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참 우스울 따름이다.

-246쪽

침몰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진상규명과 함께 병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데이터 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다. 이 ‘조작혐의’의 진상은 과학의 재현성 때문에 언젠가는 꼭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이명박정권이 한국사회에 준 ‘과학적’ 선물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간단히 모의 폭발실험을 다시 하면 된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현정부에 감사한다. 그날이 오면 한국사회는 명실공히 참된 민주사회라 불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48쪽

과학적데이터의 조작이 국제무대에서 이용된 적도 있는데, 그 결과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 예가, 잘 알다시피,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직전에 당시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유엔에서 이라크에 대량살상용 생화학무기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죠. 당시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유사시 45분 내에 상화학무기를 배치, 발사할 능력을 갖췄다는 식의 보도가 줄을 이었는데요, 이는 뒤에 모두 조작된 정보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7년여 간의 전쟁을 통해 희생된 무고한 인명들에 대한 책임은, 당시 미국과 영국 등에서 무기 자문역을 했던 과학자들에게도 상당 부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제 외교장에서는 이라크전쟁처럼 무언가 결정되고 실행되면, 무수한 인명피해 같은 매우 불행한 결과들을 피할 수 없죠.

-253쪽

이렇게 미국의 경우는 과학자들이 실명을 걸고 과학적 문제 제기를 하는데요, 아마 미국 과학계가 훨씬 크고 다양하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 만연된 인정주의보다는 과학의 존엄성과 엄밀성에 더욱 가치를 두는 미국 과학계의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에서는 실명을 걸고 남을 비판하면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자신의 연구비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연구비를 따는 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심한 것 같습니다.

-257쪽

이번 국정감사에서 보니 한나라당이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공사대표를 추궁하는 방식은 세가지더군요. 하나는 ‘어느 당이냐?’며 소속을 묻는 사상검증입니다. 둘째는 ‘전문가인가?’라고 묻는 식의 권위주의에 기대기, 셋째는 ‘직접 폭발실험을 해보고 하는 소리냐?’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첫 번째 태도는 거론할 필요도 없는 반인권적 발언이고, 두 번째는 이종인씨는 이 문제에 있어 누구 못지 않은 과학적 탐구정신을 보여주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네요. 세 번째는 물리학의 정성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회의원과 이를 반복해서 재생하는 언론사들의 무교양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다보니 국민들은 이를 진실게임인 양 결론이 나지 않는 어려운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265쪽

(이필렬)2차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과학자들은 군사주의에 동참했던 과거사를 반성하며 민주과학자연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 또한 그들의 독립성이라는 전통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273쪽

(이승헌)제가 머물던 토오꾜오대 연구소에는 내부 승진이 없습니다. 즉 조교수가 부교수로 올라가려면 다른 대학으로 자리릉 롬겨 그곳에서 부교수가 되어 활동하다, 잘하면 부교수나 정교수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토오꾜오대에는 쿄또오대 출신이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수 집단 내의 패거리정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동종 교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실력은 없어도 내 후배니까 끌어줄게라는 식의 문화는 한국보다 훨씬 적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든, 공대를 나왔든 다른 전공을 했든 실력이 있다면 인정한다는 거지요. 이런 것들이 연구의 자율성에서 중요한 토대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274쪽

(이필렬) 교수의 승진 씨스템은 독일과 마찬가지군요. 한국의 경우는 요즘 들어 연구실적을 따지면서 점점 개선되어간다고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내부승진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단의식이란 것이 생기고 남을 비판하는 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생겨나지요. 더구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 예컨대 천안함사건 등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입장을 드러내기가 그리 수비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2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