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플라워 -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들을 볼 수 있어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절판


"찰리, 세상 사람들이 다 눈물겨운 사연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또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변명거리가 될 순 없지."
아빠의 말씀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우리 가족은 함께 텔레비전을 봤지. 누나는 여전히 나를 미워하지만 아빠는 옳은 일을 한 거라고 하셨어. 내가 옳은 일을 한 것이기를 바라지만 가끔은 옳은 말을 하는 게 너무 힘들기는 하더라.
-54쪽

할아버지는 울고 계셨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울고 계셨어.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지. 엄마가 어렸을 때, 성적표를 한 손에 들고 다시는 이런 점수를 받아오면 안 된다며 엄마를 때리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했어. 할아버지는 형과 누나 그리고 나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거야.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은 당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거지. 그런 생각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자식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도 잘 모르겠어. 딸들과 마음을 나누며 지내는 대신 자기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인 건지도 잘 모르겠어. 아무 판단도 할 수 없어. 그래서 난 가만히 앉아 할아버지를 바라봤어.
-101쪽

기분 좋은 소식은 패트릭이 내 선물들을 모두 다 좋아한다는 거야. 세 번째 선물은 그림물감 세트와 도화지 몇 장이었어.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것들이라 해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네 번째 선물은 하모니카와 연주법을 가르쳐주는 책이야. 이것도 그림물감과 같은 뜻을 지닌 선물이야. 난 모든 사람들이 그림물감과 자석판 시집 그리고 하모니카 정도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108쪽

"처음으로 키스한 그 사람이 널 사랑한다는 걸 확신하도록 해주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래." 그애는 더욱더 슬프게 울었어. 나도 울었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거든.
"난 확신을 주고 싶을 뿐이야. 알겠니?"
"알았어."
그리고 샘은 내 입술에 키스했어. 그 키스는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떠들고 다닐 그런 키스가 아니었어. 그건 내가 그때까지 정말 행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키스였어.
-117쪽

조지 베일리는 마을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어. 그 덕분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그가 마을을 구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마을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던 거야. 모험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싶었지만 마을의 발전을 위해 꿈을 포기하고 남았던 거야. 하지만 그 결과가 비참하게 나타났을 때,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어. 그런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만약 그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게 되었을 지를 보여줬어. 그 마을 전체가 겪었을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준 거야. 또 그의 아내가 어떻게 ‘나이 많은 하녀’로 살아가는지도 보여줬어.
-126쪽

아빠가 쓰던 낡은 침대에 누워 창문 밖의 나무를 봤어. 아빠가 바라봤을 땐 훨씬 더 작았겠지. 그 나무를 보면서, 떠나지 않으면 절대 자신만의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그날 밤 아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 이곳에 남아 있었다면 아빠는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았을 거야. 적어도 아빠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145쪽

엄마와 난 묘소 앞에 꽃을 놓거나 가끔은 카드를 놓기도 했어. 우리가 이모를 그리워하고, 자주 생각하고 있으며 또 우리에겐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걸 이모가 알아주길 바랐던 거야. 엄마가 늘 말씀하시지만, 이모가 살아 있을 땐, 그런 생각이 없었어. 그리고 엄마도 아빠처럼 그 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 죄책감이 너무 컸던 엄마는 이모에게 돈 대신, 함께 머물 수 있는 가정을 제공했던 거야.
-147쪽

그날 밤에 책을 또 한 번 읽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다시 울게 될 것 같아 그랬던 거야.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완전히 지쳐서 잠이 올 때까지 책을 읽었어. 아침에는 끝까지 다 읽은 책을 곧바로 다시 읽었어. 울고 싶다는 생각을 없애고 싶어서 그랬어. 헬렌 이모에게 약속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154쪽

그날 밤에는 책을 읽고 싶지 않아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운동기구 광고를 30분간이나 지켜보고 있었어. 1-800으로 시작되는 주문번호가 계속 화면에 깜빡거리길래 전화를 걸었어. 전화받은 여자의 이름은 미첼이었어. 미첼에게 나는 아이여서 운동기구 같은 건 필요하지 않지만 좋은 밤을 보내라고 말해줬어. 미첼은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어.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어.
-195쪽

"네가 이제 나이가 됐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더욱더 조심해야 하거든. 보호도구를 사용하도록 해라. 만약 여자가 싫다고 하면, 진심으로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해... 만약 상대가 원치 않는 일을 강제로 하게 되면, 넌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거다. 알아듣겠지? 그리고 싫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좋다는 뜻을 표현하는 거라면, 솔직히 너를 하찮게 대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할 가치가 없는 거야. 의논할 일이 생기면 내게 와라. 하지만 나에게 말하기 어려우면 형과 의논하도록 해.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돼서 참 기쁘구나."
-198쪽

"난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너를 위해 살지 않을 거야."
그 말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타인들과 인생을 공유하기 위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아.
-265쪽

"네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가 돼준다는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기댈 어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어깨를 둘러줄 팔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할 건데? 구석에 가만히 앉아 너의 인생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앞세우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선 안 된다구. 너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해."
-315쪽

"난 누군가의 짝사랑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아닌 진정한 내 모습을 사랑해주길 원해. 또 그가 마음 속으로만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걸 내게 보여주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원하거든. 그가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모두 다 할 수 있기를 원해. 그리고 만약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거야."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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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
이노우에 마사지 글 그림, 정미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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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과일 가게 앞에 사과 한 개가 놓여 있다.
그 앞을 지나쳐가는 많은 동네 사람들이 사과를 보고 한마디씩 한다.
쌩 하니 바삐 달려가는 남자를 보며 사과는 그 이가 회사원이라고 짐작을 했고,
사과가 어디서 자랐는지에 관심을 가진 아저씨들은 농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과의 빛깔을 보며 감탄을 한 남자는 화가로 보였다.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사과를 대했다.
사과 역시 그랬다. 자신을 보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관심이 기분 좋아 보인다.

사과를 어떻게 담아서 팔면 더 나은 이문을 남길까 고민을 한 사람은 과일 가게 주인임이 분명하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금메달, 점심은 은메달, 저녁에 먹는 사과는 동메달이라고 병원에 오는 사람에게 알려주겠다고 한 이는 필경 의사 선생님이실 거다.
사과를 보고 어떤 노래가 만들어지나 떠올린 아가씨는 작곡가 언니다.
사과의 가격과 수량으로 문제를 만들어낸 이 분은 분명 수학 선생님!
그런데 사과 하나에 삼십 원하던 시절은 대체 언제인가요?
며칠 전에 배하나에 5,700원 하던 것 보고 좌절했는데.....;;;;;

온몸에 붕대를 동여맨 사람이 눈물을 떨구면서 사과를 보았다.
대체 어떤 사연일까?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것일까?
그밖에도 경찰 아저씨와 목수 아저씨도 지나갔고
얼굴에 '개구쟁이'라고 써 있는 어린 친구들도 다녀갔다.
감을 싸 가겠다느니, 배를 먹겠다느니 말하는 것을 보니 이 친구들의 내일이 어떤 날인지 알겠다.

바로 소풍날!
여태까지 사과 한 알만 색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흑백 그림이었는데 아이들의 소풍 그림은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배경을 보니 가을 소풍인가 보다.
사과는 옷에 쓱쓱 문질러서 크게 베어 먹는 게 제 맛이지.

이렇듯 하나지만 백 개도 될 수 있는 저마다의 사과.
백설공주도 떠오르고, 제사상도 떠오르고, 나로서는 무엇보다 '사과 하나'라는 그림책이 떠오른다.
둘 모두 유아와 어린이 친구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다현양의 초등 1학년 추천 도서다.
내일은 부활절을 기념하여 책을 선물해야겠다.
달걀과 함께 내밀면 더 좋으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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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베카 O.S.T. [3CD]
옥주현 외 노래, 실베스터 르베이 (Sylvester Levay) 작곡, 미하엘 쿤체 (M / Kakao Entertainment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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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한 막심이 가장 좋지만 유준상 막심도 매력적이다. 오만석은 살짝 아쉬웠다. 신영숙 댄버스 부인을 좋아하지만 옥주현의 댄버스 부인도 근사했다. 김보경을 좋아했는데 노래를 듣고 보니 임혜영이 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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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3-04-0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류정한 막심이 좀 오버라고 생각했어요. 막심 드 윈터는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신사인 줄 알았는데, 류정한 막심은 막말에 개그를 던져서 저는 위화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노래가 좋다는 것은 인정. 공연 보고와서 바로 이 CD 주문했답니다.

마노아 2013-04-01 23:35   좋아요 0 | URL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신사 풍으로 유준상이 잘 어울렸고요. 류정한은 거기에 레베카로 인해 이성을 잃고 광기 어린 모습으로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오만석은 좀 애매한 게 귀족풍의 느낌은 잘 안 들더라구요. 물론 제가 노래만 들은 거지만요. 요새 아침 알림으로 '칼날같은 그 미소'와 '레베카'를 이용하고 있어요. ㅎㅎㅎ
 

   FOCUS 과학

제 1829 호/2013-03-25

비아그라 출생의 비밀

‘우물 파다 노다지를 캐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다’. 어떤 행동이 생각지 못한 행운을 가져온 상황을 비유할 때 쓰이는 속담이다. 이 속담들은 새로운 약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곧잘 어울리는 비유가 된다. 역사적으로 특정 용도로 개발된 의약품이 우연히 다른 용도로 쓰이면서 대박을 터뜨린 사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약품은 발기부전 치료제로 유명한 ‘비아그라’다. 비아그라의 원료인 ‘실데나필’은 처음부터 발기부전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다. 실데나필의 원래 임무는 고혈압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흔히 놀라거나 화가 났을 때 ‘혈압이 오른다’고 말한다. 신장 옆에 붙은 부신에서 정상보다 많은 호르몬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탓이다. 아드레날린은 심장의 박동을 촉진하고 혈관을 수축시키는 기능을 가졌다. 심장에서 뿜어내는 피가 증가한 상태에서 혈관 구멍이 좁아지니 혈압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고혈압 치료제는 이 아드레날린의 작용을 차단해 심장박동수를 줄이고 혈관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임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해 실데나필은 아무래도 고혈압 치료제로는 부적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막대한 연구비가 투자된 상황이기 때문에 연구 결과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는 연구 성과를 ‘살리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이때 자일즈 브린들리의 깜짝쇼에 관한 자료가 진지하게 검토되기 시작했다.

브린들리는 영국 의사로, 1980년대 초 미국의 한 비뇨기학회 강연에서 페녹시벤자민을 직접 주사해 그 효과를 시연했다. 고혈압 치료제 페녹시벤자민은 1950년대 인체 호르몬 아드레날린의 구조를 살짝 바꾸어 만들어졌다. 페녹시벤자민은 몸속에서 마치 아드레날린처럼 행세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드레날린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페녹시벤자민과 마찬가지로 실데나필 역시 발기부전을 치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남은 문제는 실데나필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보이는지, 그리고 부작용은 없는지 검사하는 일이었다. 동물 실험에서는 일단 합격이었다. 이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첫 단계에서는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약이 투여된다. 그런데 시험 결과 협심증 치료제로 오래 전에 개발된 니트로글리세린에 비해 훨씬 작용이 약하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 내약성 실험(최대 용량을 투여해 부작용을 관찰하는 실험) 결과 흥미로운 부작용이 발견됐다. 8시간마다 50mg을 10일간 복용한 사람에게서 다른 부작용과 함께 발기가 된다는 점이 보고된 것이다.

이에 화이자사는 연구 방향을 발기부전에 맞추기 시작했다. 1994년 5월 화이자사는 발기부전증 환자 12명을 대상으로 하루에 한차례 실데나필을 투여한 결과 10명에게서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소식은 비뇨기학회에 전해졌고, 의사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이후 화이자사는 몇 차례에 걸친 철저한 임상시험을 거쳐 1998년 3월 27일 마침내 식품의약국으로부터 비아그라의 상표명을 달고 신약허가를 얻었다.

비아그라는 신약개발의 과정에서 상당히 운이 좋은 사례로 통한다. 이미 같은 성분을 가지고 ‘협심증 치료제’로서 동물실험과 임상 첫 단계 시험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실험 속도가 빨랐다. 신약개발의 경제성 측면에서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고 평할 정도다.

한편 고혈압치료제의 일종인 미녹시딜도 탈모치료제로 더 인기를 끌었다. 대머리였던 한 고혈압환자가 고혈압치료제의 일종인 미녹시딜을 복용한 뒤 머리털이 돋아난 것이다. 이후부터 미녹시딜은 탈모방지, 발모촉진제로 널리 사용됐다. 해열·진통제로 널리 쓰이는 아스피린은 본래 내복용 살균제로 개발된 것이었다. 암치료제로 이용되던 인터페론의 경우는 관절염에도 특효가 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관절염 치료제로도 쓰이고 있다.

금연 치료제로 사용되는 부프로피온(상품명 웰부트린)은 원래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됐다. 이 약은 니코틴 금단 증상을 완화시켜 흡연에 대한 욕구를 줄여준다. 식욕 충동도 조절해 금연으로 인한 체중 증가를 막는 효과도 있다.

이렇듯 과학기술은 종종 특정 분야에서 나온 결과물을 다시 활용해 새로운 성과물을 만들고 있다. 자칫 버려질 뻔했던 연구결과를 발상의 전환을 통해 유용하게 재활용한 사례들, 이런 사례를 교훈삼아 인류에 도움이 되는 신약이 많이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글 : 강건일 과학평론가(전 숙명여대 약대 교수)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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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전설은 창비아동문고 268
한윤섭 지음, 홍정선 그림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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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을 전하는 아이'를 몹시 재밌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읽었다. 그 책을 쓴 한윤섭 작가님의 작품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준영이네 가족이 득산리로 이사를 가면서 시작한다. 시골 할아버지 목사님의 뒤를 이어 목사님으로 부임한 아빠를 따라서였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준영이는 시골행이 반갑지가 않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모두 즐거워하는 분위기다. 준영이에게도 한학기 동안 신나게 놀라고 하시는 통큰(?) 부모님!

 

여러모로 낯설고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새 학기를 맞이한 준영이에게 담임 선생님은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과 꼭 같이 가라고 하셨다. 축구를 하고 집에 가겠다는 친구들과 급작스럽게 친해지고 싶지 않았던 준영이는 혼자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친구들은 절대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마을에는 전설이 있는데,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혼자서 득산리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아이들의 이야기 보따리는 이야기 속 이야기로 재미와 오싹함을 함께 선사했다. 마을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와 절반 쯤은 허풍과 과장으로 채운 이야기에 준영이는 잔뜩 긴장하고 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혼자서 집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그렇게 준영이는 득산리에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맞이한다. 복숭아꽃이 잔뜩 피어서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던 득산리는 흡사 에덴 동산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근사한 풍경을 자랑했다. 아이는 한달 만에 얼굴이 까맣게 타버렸고 체중도 부쩍 늘었다. 짐작하기에 무척 건강해진 혈색으로 변했으리라.

 

준영이가 가을을 눈치 채는 대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제까지는 분명히 여름이었건만 하룻밤 사이에 가을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시에서는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는 계절의 변화를 아이가 한눈에, 그리고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것만으로도 준영이의 시골 생활은 축복이고 은총이리라.

 

'아람 불다'라는 표현을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 이런 관용구가 있구나. 덕분에 '아람'의 뜻도 찾아보았다.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라고 사전에 나온다. 친구들은 밤나무로 유명한 돼지 할아버지네 집에서 밤 서리를 하면서 준영이에게는 망을 보게 한다. 할아버지는 도둑놈들이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지만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올해도 무사하신지 들러보는 거라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도 끝까지 쫓아오지 않고, 아이들도 할아버지가 겉으로만 자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름의 공생 관계랄까.

 

그런데 준영이는 영 편치가 않다. 정말 정말 맛있는 밤이지만, 그 밤을 맛있게 먹는 것도 죄스럽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할아버지가 끝까지 쫓아오셔서 도망치는 것에 실패한 준영이는 할아버지의 예상치 못했던 면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새벽녘에 밤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는 행운까지 얻는다. 가을 내내 아람 불었던 밤들이 새벽이슬에 미끄러져 낙엽 위로 떨어지는 소리는 누군가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소리.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준영이 느꼈을 황홀경을 독자도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새벽의 빛깔과 밤알 떨어지는 소리의 조화라니... 게다가 그 과정에서 보여준 돼지할아버지의 온정은 또 얼마나 따뜻하고 인자하던가.

 

준영이처럼 독자도 득산리가 점점 좋아지려고 한다. 무척 시골스럽게 들리던 마을 이름도 점점 정감이 간다.

 

이야기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서 대단원의 성장을 보인다. 막연히 상상하던 수목장이 무척 장엄하고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나 죽으면 당연히 화장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그 뼛가루가 이렇게 나무의 거름이 되어서 내가 이땅에 한줌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무로 다시 태어나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시적인 일인가.

 

 

해가 바뀌어 득산리에 다시 봄이 왔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에덴 동산 같고 무릉도원 같은 그 봄이. 그리고 학교에 전학생이 왔다. 일년 전 준영이가 그랬듯이 새 전학생도 마을의 전설에 푹 젖을 차례다. 얼마만큼 용감한 아이로 성장할지 자못 기대가 크다.^^

 

서울 아이가 시골에 가서 겪는 이야기라는 설정은 흔할 수 있지만, 우리 동네 전설은~ 하면서 마을의 오랜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가 잘 조화되어서 무척 신선하게 읽혔다. 계절이 변해가는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웠고, 어린 준영이가 나름의 자존심과 용기를 키워가면서 마을에 적응해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그리고 어른은 어른이라는 생각에, 조금씩이라도 등장하는 마을의 인물들도 고마운 캐릭터였다. 어린이 친구들만 보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두루두루 같이 읽고 함께 푹 빠질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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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3-25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는 못 썼지만, 정말 괜찮은 동화였어요~ 우리동네 전설도 떠오르고요.
사계절 삽화를 저렇게 모아놓으니 뚜렷이 비교가 되네요~ ^^

마노아 2013-03-25 08:32   좋아요 0 | URL
굳이 선호도를 따지면 편지 전하는 아이가 더 좋았지만 이 작품도 충분히 훌륭했어요.
어릴 적 우리 동네에 따라다니전 전설은 관련 건물과 개천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도 사라진 듯해요.
아쉬운 부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