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은 지 제법 지난 책이다. 그때는 안철수가 대선 출마를 공식 발표하기 전이었고, 지금처럼 18대 대통령이 결정되지도 않았던 때이다. 그러니 보다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이제 정치판에 뛰어든 안철수를 경험하고, 또 선거의 결과까지 알아버린 시점에서 그가 쓴 글을 다시 들여다 보니 어쩐지 서글픔이 몰려온다. 안철수가 주장한 내용들은 특별히 혁신적이거나 아주 가파르게 진보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지극히 '상식'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그 상식적인 주장들이 '퍼주기' 식으로 오염되어 통용되기 일쑤다. 가슴 아픈 일이다.

 

자살률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하는데요, 불행히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전체 중 1위입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비해 10배나 높아요. 거의 매일 40여 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1년이면 1만 5,500여 명이 비극적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가를 보여주는 수치죠. 출산율이란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낳은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기대에 따라 출산율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낮은 나라. 한마디로 지금 가장 불행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 83쪽

 

선거 끝나고 고작 일주일 지났을 뿐인데, 벌써 다섯 명의 노동자가 생을 달리 했다. 이 절망의 죽음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죽을 이유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선진국들의 경험을 보면 복지국가는 정치·사회 세력 간에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합의가 이뤄져야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보수, 진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이 두 진영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세력이고, 진보는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세력이죠. 양쪽이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도전과 발전의 기회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이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협력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누가 봐도 절실한 복지 확충, 경제 민주화 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좌파’의 딱지를 붙이며 색깔 공세를 펴는 비상식적 세력이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방해하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상식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소통과 합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90쪽

 

건전하고 건강한 보수를 대선 막바지에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보수를 만나기까지 몇 십년이나 걸렸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김구 선생님이 천수를 누리셨다면, 극우 성향을 가진 분들 중에서도 건강한 보수주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역사의 슬픔이다.

꼭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고만 하지 말고 민간의 다세대주택을 사들여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정책 같은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많은 재원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미래가 불안정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보다 국가 보증하에서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 106쪽

은평 뉴타운의 실패로 분양되지 못하고 놀리던 집들을 박원순 서울 시장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글을 보았다. 누군가는 얼토당토 않다는 반응을 보이던데 나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아주 가까이에 대학교가 있지 않아서 거리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은평구에서 서대문구 신촌은 그다지 멀지도 않다. 일년 만에 서울시의 부채를 1조 2천억이나 갚아낸 시장님의 능력을 믿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본주의의 모든 장단점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고 사실 많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부패에 대해 엄격한 법과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의 건강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시장이나 기업 범죄, 탈세 등에 대해서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나 병합선고, 즉 모든 죄의 형량을 합산해서 처벌하는 방식으로 엄벌을 내리죠. 기업 간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범죄행위도 강력하게 처벌하고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통령까지도 하야시킬 수 있는 법으로 부패를 막고 있죠. 우리나라는 미국의 제도를 많이 들여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 144쪽 

제발, 정말 제발이다.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재벌들만 살만한 나라 말고, 국민 모두가 살맛 나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정치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정치 때문에 신명나는 대한민국 말이다.

 

북한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북한과 평화적인 경제협력이 활성화되면 내수시장이 확장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우리 경제는 현재 성장이 정체된 상황인데 북한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북한 내 지하자원, 관광자원, 인적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요. 동북아 경제권 형성을 위한 길이 열릴 수 있고 육로를 통해 부산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연결될 수도 있죠. 지금은 북한에 막혀서 남한이 사실상 섬나라와 같은데, 대륙이 연결돼 원자재와 수출품 등의 수송이 쉬워지는 거죠. 그러면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북이 경제협력을 통해 격차를 줄여나가면 서독과 동독이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 비용을 줄인 것처럼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통일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 152쪽 

북한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적대'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리하여 북한 퍼주기가 겁나 겁나는 어르신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한없는 슬픔을 느낀다. 우리가 정말 슬픈 세월을 살았다는 게 실감나는 대목이다.

 

여러모로 되새겨볼 만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과, 이런 정치를 해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테지만, 안철수가 건강한 정치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그가 부르짖었던 상식과 소통이 건강하게 진행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주역으로 말이다. 이번 대선은 그에게도,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많은 아쉬움을 남겼을 것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어떤 의구심마저도 모두 걷어낼 수 있는, 그런 진정성 있는 정치인으로 다시 조우하기를 바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2-12-2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간절히 바란다는 현실이 참 서글프죠.....
대단한걸 바라는것도 아니고 그저 상식적인 사회를 바라는건데 말입니다.
솔직히 안철수씨가 정치를 하지 않길 바랬던 사람중에 하나지만
본인이 정치를 꼭 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좋은 정치인의 모습을 기대할뿐입니다.


마노아 2012-12-28 01:47   좋아요 0 | URL
상식적인 일을 간절히 소망해야만 하는 처지에 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막막하게 만드네요.
안철수 씨에게 희망을 걸었던 많은 분들이 실망하는 일이 없게, 이런 정치인도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으면 해요.

순오기 2012-12-2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사회인데.... 우린 그걸 소원하는 나라에서 살아요.ㅜ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불끈 힘을 내자고요!!
안철수~~~ 5년 후는 어떨지 기대해봅니다.

마노아 2012-12-28 01:49   좋아요 0 | URL
오늘 곽노현 교육감 헌재 판결 보고서 또 주르륵....ㅜ.ㅜ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사실에 또 놀라면서 좌절감이 들지만,
그조차도 사치스러워서 다시 불끈 힘을 내봅니다.
5년 후, 이 나라의 정치 지형이 '상식'적으로 바뀌기를 소망해요. 그날까지 고고씽!!!
 
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 김영사 / 2012년 7월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선진국들보다 훨씬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눈부신 성과를 이뤘지만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인권이나 민주화를 무시했던 산업화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의 성과를 부정했던 민주화 논리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구체제적 사고죠. 또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문제들, 예를 들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외면하는 태도도 구체제이고, 성장과 효율성만을 앞세워서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를 방치하는 것도 구체제이며, 청년들이 기회를 잃고 국민들이 불안에 떠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도 구체제. 다시 말해 국민의 생각을 받들지 못하는 정당들,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키는 정치시스템, 계층 이동이 차단된 사회구조,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경제 시스템, 공정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 기득권 과보호 구조 등이 구체제. 새로운 체제는 이런 구체제를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통과 합의’가 필요하고요.
-37쪽

저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게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득의 과정, 공감의 과정이 핵심이죠. 그래서 민주주의가 전제군주제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결국은 장기적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소셜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도 마침 때를 맞춰 확산되면서 이런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강화시키고 있고요.
-41쪽

자살률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하는데요, 불행히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전체 중 1위입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비해 10배나 높아요. 거의 매일 40여 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1년이면 1만 5,500여 명이 비극적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가를 보여주는 수치죠. 출산율이란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낳은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기대에 따라 출산율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낮은 나라. 한마디로 지금 가장 불행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83쪽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복지국가 건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경제는 기존의 제조업만으로는 성장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제조업의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일자리 창출이 쉽지 않게 됐거든요. 새로운 산업동력의 창출 차원에서 지식정보산업의 발전과 창업활성화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한 번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주거와 보육, 의료 등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튼튼해서 기초적인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실패한 사람도 다시 도전할 의욕을 가질 수 있죠. 복지는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을 돌봐주는 사후처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업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이디어와 지식이 부를 창출하는 구조에서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새롭고 과감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지식경제 사회에서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란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로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들고 잠재성장률이 추락할 위기에 놓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복지 강화는 필수적-85쪽

실리콘밸리의 본질은 성공의 요람이 아니라 실패의 요람입니다. 100개의 기업이나 기업주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고, 열심히 성실하게 했는데도 실패했다면 그 사람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게 실리콘밸리의 미덕입니다. ‘개인 실패의 사회적인 자산화’ 지식정보산업의 발전이나 창업의 활성화는 이런 토대가 없으면 잘 생겨나지 않습니다.

-87쪽

선진국들의 경험을 보면 복지국가는 정치·사회 세력 간에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합의가 이뤄져야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보수, 진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이 두 진영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세력이고, 진보는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세력이죠. 양쪽이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도전과 발전의 기회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이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협력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누가 봐도 절실한 복지 확충, 경제 민주화 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좌파’의 딱지를 붙이며 색깔 공세를 펴는 비상식적 세력이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방해하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상식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소통과 합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0쪽

전쟁과 정치는 적과 싸운다는 점은 같답니다. 그런데 전쟁은 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고, 정치는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을 믿으면서 싸우는 것,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면서 대결하는 것이 정치라는 얘깁니다. 이런 믿음 위에서 소통의 정치를 추구해야겠죠.

-91쪽

보편적 복지는 내가 낸 세금의 혜택을 실감하고 ‘함께 누리는 복지’를 확대할 수 있는 체제라고 하겠습니다. 반면 선별적 복지만 고수한다면 부유층과 중산층의 ‘반(反)복지 동맹’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요. 세금 내는 사람 따로, 혜택 보는 사람 따로이니, 사회적으로 증세와 복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선별적 복지는 또 ‘낙인 효과’를 만들어 사회통합에 금이 가게 하죠. 국민을 ‘시혜자’와 ‘수혜자’로 구분하니까요. 예를 들어 학교급식의 경우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무상급식을 하면 ‘얻어먹는 아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 효율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권과 정서라는 측면에서도 배려가 필요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선별적 복지를 하다 보면 수혜 자격, 즉 가난을 입증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행정 비용이 든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고요.

-95쪽

유시민 전 의원이 TV 토론에 나와서 그러더군요. "그렇게 세금을 많이 냈는데 먹여도 되지 않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부유층 자녀는 부모, 조부모가 이미 많이 낸 세금의 혜택을 당당히 누리는 것이지 결코 ‘공짜’로 먹는 게 아니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사회적인 부조를 받는 것이고요.

-98쪽

남유럽국가들의 복지 수준은 유럽에선 하위권에 불과합니다. 복지 지출이 많아 재정위기를 맞았다면 훨씬 수준이 높은 북유럽이 먼저 망했어야 했겠죠. 그런데 스웨덴 등 북유럽국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안정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복지의 안전망이 오히려 위기에서 경제를 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죠. 남유럽의 문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유증, 즉 부동산시장 붕괴와 구제금융, 재정지출 확대가 원인이었고 유로 통화 통합으로 환율의 경기대응 기능을 잃은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재정 수요가 늘어나는데 무리한 감세 정책을 써서 조세 수입이 줄고 재정적자가 늘어난 것, 탈세가 만연한 것, 복지 설계가 사회 서비스 확충 대신 현금소득 지급 위주로 잘못된 것 등에 원인이 있다고 분석되고 있죠. 복지를 늘릴 때 재정 건전성을 함께 생각하는 자세는 꼭 필요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복지 지출 수준이 OECD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형편에서 좀 늘리자는 얘기를 두고 ‘재정위기’를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99쪽

현재 국내 국공립 보육시설의 수용 능력은 아동수를 기준으로 전체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럽 선진국은 70~80%에 이른다고 합니다.

-100쪽

꼭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고만 하지 말고 민간의 다세대주택을 사들여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정책 같은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많은 재원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미래가 불안정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보다 국가 보증하에서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106쪽

스웨덴에 대해서는 "부자라서 복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독일 등 대다수 선진국들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정도일 때 복지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과감하게 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은 그보다 훨씬 가난할 때 복지제도를 갖추기 시작했고요. 노령연금이 도입된 게 1919년, 기초수급제가 도입된 게 1930~40년대랍니다. 가난할 때부터 차근차근 복지안전망을 늘려왔기에 부자나라가 될 수 있었고, 지속 성장이 가능했다는 얘기죠. 이런 탄탄한 복지 안전망이 지금 스웨덴의 산ㅇ넙 경쟁력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의 소득 수준에서 복지 제도를 확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지가 없는 것이지 불가능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정치가 지금처럼 편을 갈라 싸우면 복지 국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스웨덴도 사민당이 야당과 대통합, 협력해서 복지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독일도 우파정권이 사회대통합으로 야당을 끌어들이면서 복지체제를 완성했어요. 우리가 선진 복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념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과제가 시급합니다.

-107쪽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공생하는 파트너의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계적인 기업 혁신의 90%가 중소기업에서 나옵니다. 산업생태계를 통해 믿을 만한,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들이 쑥쑥 성장해야 대기업들도 더욱 발전할 수 있어요.

-121쪽

저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하는데요, 시장만능주의에 빠지면 탐욕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규제를 줄이는 것은 좋지만 감시는 강화해야 하고, 시장이 정글이 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25쪽

우리나라에서 창업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대표이사 연대보증제 때문에 실패한 기업인의 재기가 어렵게 돼 있기 때문인데요, 실패의 경험임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금융제도도 개선해야 합니다.

-129쪽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본주의의 모든 장단점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고 사실 많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부패에 대해 엄격한 법과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의 건강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시장이나 기업 범죄, 탈세 등에 대해서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나 병합선고, 즉 모든 죄의 형량을 합산해서 처벌하는 방식으로 엄벌을 내리죠. 기업 간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범죄행위도 강력하게 처벌하고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통령까지도 하야시킬 수 있는 법으로 부패를 막고 있죠. 우리나라는 미국의 제도를 많이 들여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144쪽

우리 사회도 그동안 효율성을 앞세우면서 부패에 관대한 문화를 키웠죠. 그러나 앞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궤도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합니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조사한 우리나라의 부패인식지수는 세계 43위로, 경제규모 10위권의 국격과 비교하면 매우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145쪽

선거에 의한 견제도 있지만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견제되는 장치도 필요합니다. 미국은 종신제가 적용되는 대법관 등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 선거로 뽑힌 공직자들을 견제하죠. 지금도 총리제의 입법 취지를 잘 살리면 어느 정도의 분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49쪽

북한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북한과 평화적인 경제협력이 활성화되면 내수시장이 확장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우리 경제는 현재 성장이 정체된 상황인데 북한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북한 내 지하자원, 관광자원, 인적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요. 동북아 경제권 형성을 위한 길이 열릴 수 있고 육로를 통해 부산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연결될 수도 있죠. 지금은 북한에 막혀서 남한이 사실상 섬나라와 같은데, 대륙이 연결돼 원자재와 수출품 등의 수송이 쉬워지는 거죠. 그러면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북이 경제협력을 통해 격차를 줄여나가면 서독과 동독이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 비용을 줄인 것처럼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통일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152쪽

외부에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봉쇄해도 중국의 지원이 있기 때문에 고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북한을 고립시키려다 북한 광물자원의 선점 등 북한경제의 중국 예속만 급진전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남북경제협력이 위축되자 북한은 중국과 경제협력을 확대했고 북한의 경제지표는 그리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153쪽

남북이 대화의 공간을 마련하고 평화체제를 정착시켜야 북한이 핵에 의존할 명분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하려면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말했죠.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 누구든 기본적으로 생존이 가능해야 변화를 희망할 수 있을 겁니다.
-157쪽

기업들이 ‘고용 없는 성장은 자본에도 독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비용인 동시에 기업이 생산한 상품의 수요자이기 때문이죠. 고용이 따르지 않는 성장은 궁극적으로 상품에 대한 수요를 위축시켜서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167쪽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질 좋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죠. 제가 전에 강연에서 "대기업은 내버려둬도 잘하고 있으니 더 이상 성공한 맏자식 걱정에 계속 매달리지 말고 그동안 희생한 둘째를 돌봐야 할 때"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런 뜻이었죠.

-169쪽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에게 최저임금을 근로자 평균임금의 60%로 하도록 권고하고 있고, 우리나라 노동계는 50%를 요구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 최저임금 수준은 30%를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노동계가 요구하는 평균임금의 50%까지 점진적으로 인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한계기업들이 도산하고 일자리가 오히려 줄어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제 연구결과는 다릅니다. 적절한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구매력을 높여서 일자리를 늘린다는 연구결과도 있거든요. 물론 영세자영업자 등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타격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존엄성 측면에서 이 문제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173쪽

대출을 해준 은행 등 금융회사가 만기를 연장해주고 변동금리를 장기고정금리로 전환해주는 등 부채 구조조정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득 범위 내에서 갚아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죠.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주택 대출도 선진국처럼 20~30년 만기의 장기대출 형태로 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87쪽

소위 영재라고 불리면서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는 학생들에게 ‘속도’, ‘문제해결’, ‘결과’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학생들이 학습의 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죠. 이미 해답이 나온 것을 찾는 데만 익숙해지면 답이 나오지 않는 불확실한 환경에 대한 대처가 서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실 세상일은 참고서나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딱 부러지게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게 오히려 드물죠.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는 남들이 먼저 만들어놓은 것을 좀 더 세련되게 모방해서 1등을 하는 것에는 탁월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는 취약하죠.

-193쪽

국사뿐 아니라 세계사도 필수과목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동물의 경우 주어진 그 순간만 생각하고 반응하지만, 사람은 그전에 일어났던 일과의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 국사와 세계사를 모르고 지금 당장 필요한 지식만 익히는 접근방법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197쪽

우리가 내는 수신료 중에서 EBS는 2.8%인 162억 원, 한국전력이 6.8%인 391억 원을 가져가더군요. 국민이 내는 수신료를 정당한 사용목적에 포함된 EBS보다 수수료 징수를 대행하는 한전이 더 많이 가져가는 상황, 이건 비합리적이죠.

-200쪽

눈앞의 이익이라는 논리로만 따지다 보니 우리나라가 사람 목숨 값이 싼 나라가 됐는데요, 지금은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거나 사람들에게 위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국가가 경제논리만으로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204쪽

대전에 여러 정부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장들 상당수가 서울에 자주 오가면서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낸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윗사람과 일을 하려면 얼굴을 직접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고요. 국회에서도 질의응답을 위해 관련 직원들이 하루 종일 대기하고 있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책 결정권자의 자리에 있으면 지역 균형발전이 표류할 수밖에 없죠.

-223쪽

공공재로서 언론의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편집권의 독립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다고 언론의 논조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에 비해 언론자유도가 아주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죠. 올해에도 세계 87위, 중하위권으로 평가받거나, 부분적 언론자유국 정도로 분류되고 있으니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에 비하면 아주 부끄러운 일이지요.

-227쪽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사람 모이는 것은 대개 잔치이고 좋은 일이라 여겨왔습니다. 오늘날 정부가 사람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정통성이나 정당성에 대해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열린 마음으로 들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29쪽

옆에 있는 친구가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세요. 스스로 실력을 키우고 더 가치 있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세요. 동시에 이 정도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준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굶주리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장차 일부라도 돌려줘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 중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260쪽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지적하면서 ‘나만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 경고의 이면에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주변의 문제에는 눈과 귀를 닫으라는 이기적 주문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주변의 도움은 필수적이죠. 사회와 개인, 나와 타인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 공생의 관계라는 것을 알고, 사회와 더불어 행복할 길을 찾겠다는 의지를 단단히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6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도세자는 가시 같은 이름이다. 그의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일단 아프고 시작하는 이름이다. 그같은 감정은 정조에게도 동시에 이입된다.

 

이 책은 사도세자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비극적인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과 거기서 비롯된 역사에 대해서 무척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집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사료는 '한중록'이다. 원전을 꼼꼼히 살펴서 번역한 이전 저서(한중록)가 이 책의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저자는 기존에 인기를 끌었던 이덕일 씨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면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다. 제시하는 사료들의 근거를 보다 보면은 저자의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영조가 더 큰 정신병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뒤주에 갇혀 죽기 전에 이미 사도세자는 고사된 상태였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아들을 저주하고 핍박하고 학대할 수가 있었을까.

 

심지어 영조는 백성들이 얼어 죽거나 주려 죽거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생겨도 “소조에게 덕이 없어 이러하다”고 꾸중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날이 조금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임금이 또 무슨 꾸중이라도 할까 사사건건 두려워하며 떨었다.
– 142쪽
영조는 특별히 중요한 일로 질책하지도 않았다. 간병하는 세자의 옷매무새나 행전 친 모양 등을 가지고 꾸짖었다.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울부짖으며 정신을 못 차리는 세자에게 영조는 사소한 트집을 잡았다.
– 145쪽
궁궐이 피로 물든 시기였다. 영조는 이렇게 좋지 않은 자리에는 꼭 세자를 불렀다. 자기가 일을 끝내고 들어갈 때 세자가 없으면 늦은 시간이라도 꼭 불러 인사를 받았다. 그때 영조가 던진 인사는 고작 “밥 먹었냐”였다. 이는 영조가 그날의 불길한 기운을 씻으려는 행동이었다.
– 154쪽
영조는 세자의 외출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 161쪽
사도세자는 스물두 살이 되도록 능행 수가를 한 번도 못했다.
영조는 사형죄인을 심문하거나 죽이는 불길한 일에는 자주 세자를 불러 곁에 앉혔지만, 밝고 빛나는 경사에는 부르지 않았다.
– 162쪽
평소 영조는 미신적인 조짐이나 금기를 강하게 믿었는데, 그 속에서 세자는 늘 ‘재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세자를 거둥에 끼웠더니 아니나 다를까 재변이 생겼다. 이에 세자를 향해 “날씨 이런 것이 다 네 탓이라, 도로 돌아가라”고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 166쪽
『이재난고』 등에 의하면 영조는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자식을 죽여놓고는 마치 적국을 평정한 것처럼 승전가를 연주하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영조는 듣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은 아들을 죽여놓고 역적을 토벌한 것처럼 개선가를 울리며 대로를 행진하는 득의양양한 영조를 보았다.
– 227쪽

 

 

액받이 무녀라도 되는지, 온갖 재수없는 액은 아들에게 모두 돌리고, 심지어 아들을 죽여놓고는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 이 멘탈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에서도 이같은 영조의 정신 상태를 정신병으로 진단하는 것을 보았다. 사도세자에 앞서 그쪽이 내게는 더 설득력이 있다.

 

권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비정하다. 나로서는 영조가 즉위하는 과정도 수상한 점이 많았고, 그랬기 때문에 더 비정상적으로 권력에 집착한 게 아닐까 의심이 간다. 정통성이 있었더라면, 스스로 콤플렉스에 잠식되지 않았더라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싶다. 더 큰 비극은 대를 이을 세손(정조)이 없었더라면, 영조가 이같이 비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에 정조가 가엾고, 지나치게 장수해서 아들 잡아먹기까지 오래 산 영조의 질긴 명줄도 얄궂다.

 

저자는 객관성과 사실적 분석에 대해서 무척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는데, 비판하는 대상들에 대한 근거들을 따져본다면 반박할 거리가 그다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본인도 좀 치우치는 감은 있어 보였다. 경종의 불임에 대해서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기 전 하초를 잡아서라는 설이 있었다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대목을 써넣은 것도 그랬고, 정조의 즉위 일성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를 해석하면서 ‘내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지만,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써놓았는데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좀 작위적인 느낌이다.

 

이 책을 읽은 지는 몇달이 지났는데, 뒤늦게 짧게나마 리뷰가 쓰고 싶었던 것은 대선을 지나면서 느낀 권력의 무참함 때문일 것이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다 갖는, 그래서 권력을 가지면 모두를 얻고,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 살벌한 싸움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식마저도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비정함 말이다. 씁쓸하고, 슬프고, 갑갑하다.

 

책을 무척 꼼꼼하게 집필한 느낌이다. 근래에는 좀처럼 오타 없는 책을 볼 수가 없었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매우 치밀했다.

 

65쪽 명나라에게 죄를 얻지도 않고 청나라를 화나게 하지도 않으려는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비판하면서 >>>후금

318쪽 정순왕후는 권력을 놓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서인지 수렴청정을 끝낸 일여 년 후 죽고 말았다.>>>'일년 여'가 더 자연스럽다.

 

딱 이 정도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원고도 완벽하게 쓰려고 했다는 느낌이 들고, 편집자도 무척 꼼꼼성실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작년에 저자분과 문학동네 회원들과 함께 창경궁과 창덕궁을 함께 거닐었는데, 그때 연재되었던 이 원고들을 먼저 읽고 보았더라면 좀 더 많은 것들을 담아 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공부가 많이 되는 시간이었다. 뒤늦게 책을 읽어 복습을 했고, 더더 늦게 리뷰 도장을 찍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구판절판


영조는 "그만한 일을 혼자 결단치 못하여 내게 번거롭게 취품하니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 꾸중했고, 그래서 이런 일을 묻지 않으면 "그런 일을 어이 내게 취품치 않고 스스로 결정하리" 하며 나무랐다.
(...)
심지어 영조는 백성들이 얼어 죽거나 주려 죽거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생겨도 "소조에게 덕이 없어 이러하다"고 꾸중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날이 조금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임금이 또 무슨 꾸중이라도 할까 사사건건 두려워하며 떨었다.
-142쪽

영조는 특별히 중요한 일로 질책하지도 않았다. 간병하는 세자의 옷매무새나 행전 친 모양 등을 가지고 꾸짖었다.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울부짖으며 정신을 못 차리는 세자에게 영조는 사소한 트집을 잡았다.
-145쪽

궁궐이 피로 물든 시기였다. 영조는 이렇게 좋지 않은 자리에는 꼭 세자를 불렀다. 자기가 일을 끝내고 들어갈 때 세자가 없으면 늦은 시간이라도 꼭 불러 인사를 받았다. 그때 영조가 던진 인사는 고작 "밥 먹었냐"였다. 이는 영조가 그날의 불길한 기운을 씻으려는 행동이었다.
-154쪽

영조는 세자의 외출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161쪽

사도세자는 스물두 살이 되도록 능행 수가를 한 번도 못했다.
영조는 사형죄인을 심문하거나 죽이는 불길한 일에는 자주 세자를 불러 곁에 앉혔지만, 밝고 빛나는 경사에는 부르지 않았다.
-162쪽

평소 영조는 미신적인 조짐이나 금기를 강하게 믿었는데, 그 속에서 세자는 늘 ‘재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세자를 거둥에 끼웠더니 아니나 다를까 재변이 생겼다. 이에 세자를 향해 "날씨 이런 것이 다 네 탓이라, 도로 돌아가라"고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166쪽

『이재난고』 등에 의하면 영조는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자식을 죽여놓고는 마치 적국을 평정한 것처럼 승전가를 연주하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영조는 듣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은 아들을 죽여놓고 역적을 토벌한 것처럼 개선가를 울리며 대로를 행진하는 득의양양한 영조를 보았다.
-227쪽

영조는 정조를 자주 곁에 두었는데, 그러고는 신하들 앞에서 걸핏하면 세자 걱정을 했다. 걱정 끝에는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 나라를 세손에게 맡겨야겠다는 말을 곧잘 했다. 세자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것도 대리청정으로 국정의 일부를 맡고 있는 판에 손자에게 나라를 넘기겠다는 중대 발언을 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268쪽

권력자에게는 친구처럼 친근한 사람은 있어도 친구는 없다. 더욱이 영원한 친구는 없다. 이 점을 명심해야 권력을 오래 누릴 수 있는데 홍국영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홍국영은 1779년 9월, 조정 내의 논란을 뒤로 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조는 쫓겨나는 홍국영을 봉조하로 만들어주었다. 은퇴한 노대신에게 내리는 명예직을 서른두 살의 젊은 신하에게 내려준 것이다.
-305쪽

유일한 벗 홍국영까지 떠난 조정에서 정조는 이제 아무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이 되었다. 철저한 고독만이 그의 벗이었다.
-306쪽

영조는 늘 임금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전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영조의 전위 선언을 진정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임금이 나라와 백성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는 한 그는 결코 권력을 벗을 수 없다. 권력에서 벗어나려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믿어야 한다. 후계자를 믿어야 한다. 후계자를 믿으니 이제 물러나겠다고 해야 한다. 세자에게 국정의 일부를 맡긴 대리청정은 권력욕을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에 대한 더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세자까지 직접 자기 권력 아래에 두겠다는 표시다.
-326쪽

죽음이 두려워 평생 죽을 사(死) 자와 돌아갈 귀(歸) 자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던 영조도 죽었다. 권력은 때가 되면 놓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죽을 때를 모르는 것처럼 권력도 놓을 때를 알지 못한다.

절대 권력자는 자기 것을 뺏으려드는 자도 공격하지만, 권력을 뺏을 힘을 가진 자도 미리 싹을 자른다. 권력의 존립을 위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 권력의 비정함은 여기서 나온다. 영조는 평소 사도세자에게 냉정하고 엄격했다. 자식을 죽일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 없다. 영조는 종묘와 사직을 위한다면서 자식에게 죽음을 요구했다. 하지만 본질을 보면 그가 말한 사백 년 종사는 다름 아닌 자신의 권력이다. 권력의 핵심인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은 털끝만 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자식이라도 봐줄 수 없다.
-327쪽

나누지 않는 권력은 외롭고 위태롭다.
-329쪽

경희궁은 현재 복원했지만 원형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정전인 숭정전은 뜯겨서 조계종에 팔려 현재 동국대학교 내의 법당인 정각원이 되었다.
-391쪽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길 건너편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왕실의 정원인 함춘원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그 한쪽 편에 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들어섰다. (...) 경모궁은 개인 사당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 어림잡아 볼 때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두 모신 종묘의 절반 크기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임금의 생부로서 사도세자처럼 오랫동안 추존되지 못한 사람이 없었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99쪽

정조는 자신이 직접 참배하지 못할 때도 아버지를 뵐 수 있도록 경모궁 망묘루에 자신의 초상을 걸어두었다.
-401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2-12-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죠.근데 일설에는 사도세자가 소론세력을 뒤에 얻고 아버지를 쫒아내려는 친위 쿠테타를 벌이려고 했다는 설이 있지요.실제 실록에도 사도세자가 평안도로 암행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는데 평안도는 조선의 정예부대가 있어 영조도 신경이 날카로와 졌다고 하는군요.

마노아 2012-12-28 21:44   좋아요 0 | URL
뭔가 군사 행동을 보였다는 정황이 분명 보이는데, 그걸 이덕일은 노론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았고 정병설은 역모라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본인이 세자이고 십수년 째 대리청정을 하고 있고, 연로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 받는데, 세자가 왜 그런 짓을 할까요? 그러니 양보해서 사도세자가 정말 정신병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첫째도 둘째도 영조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 2016 영광군민 한책읽기운동 선정도서 선정, 아침독서 선정, 2013 경남독서한마당 선정 바람그림책 6
이세 히데코 글.그림, 김소연 옮김 / 천개의바람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좋아하는 이세 히데코의 작품이다.

책장을 열고 작가와 역자 이름이 소개된 그 페이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첼로 교실에 새 학생이 왔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나'보다 훨씬 어려운 곡을 술술 연주해냈다. 힘이 넘쳤지만, 왠지 화를 내는 것 같은 그런 연주를...

연습이 끝나고 늘 가는 공원에 들렀다. 거기서 그 아이와 만났다.

그 아이는 내 첼로 소리가 꼭 강아지 소리 같다고 했다.

잃어버린 강아지 그레이를 떠올리게 해서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아빠는 강아지 대신 첼로를 사주셨다. 그렇게 해서 연주하게 된 악기다.

그 아이는 같이 연주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언덕 위에 편하게 앉아 첼로를 켜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첼로로 여러 소리를 연주해 냈다. 활자만으로는 소리를 들을 수 없건만, 저렇게 음표를 그려주니 정말로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 같고, 강물이 또르르르 구르는 것만 같다.

피아노의 숲에서 내가 종종 감탄하게 되는 배경 묘사와 비슷하다.

 

 

그 아이는 고베에서 왔다고 했다.

연주를 마치고 큰길로 나왔을 때 진풍경을 보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첼로를 메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다.

두 아이도 따라가 보았다. 건물 안에는 첼로는 꺼내는 사람, 무언가 신청하고 나누어 주는 사람, 그리고 온갖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 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일까?

알고 보니 이 자리는 '대지진 복구 지원 음악회' 참가 신청을 받는 곳이었다.

지진으로 무너진 마을이나 피해를 당한 마을 사람들을 응원하는 음악회라고 한다.

첼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고.

고베에서 왔다는 그 아이는 당장 참석하겠다고 했다.

아이는 신청서를 접수하자마자 건네받은 악보를 앞에 놓고 바로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진지한 얼굴에 이끌러 '나' 역시 케이스에서 첼로를 꺼냈다.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느끼면서 연주하는 거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연습을 마치고 다시 들른 공원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순간에 마을도, 집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사라져버렸던 참혹했던 지진의 참사를...

지금 할아버지가 연주하는 첼로는 그때 세상을 떠난 친구의 유품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폐허더미 흑백 사진 앞에 첼로를 들고 서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빛조차 스며들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그림 속에 자리한다.

 

 

그 아이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동물까지 돌볼 수가 없어서 하늘로 보내준 새들의 이야기를...

그래도 그 새들은 날개라도 있어 더 높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람 손을 필요로 하는 다른 동물이었더라면 더 안타깝지 않았을까...

 

복구 지원 음악회에 나가기로 한 뒤 '나'의 첼로 소리가 달라졌다고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지극한 마음이 소리의 깊이와 감동의 무게를 더해준 게 아닐까.

첼로 교실에는 참가자가 더 늘어났다.

할아버지와 그 아이와 '나'는 공원에서도 연습을 했다. 숲이 청중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연주였으리라.

무엇보다도 위로가 가득한 따뜻한 연주.

 

가을이 오고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첼로를 켤 때면 그레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떠나보낸 새 플로르를 떠올리며 연주를 할까.

 

 

드디어 대지진 복구 지원 음악회가 열리는 날, 참가자가 천 명 넘게 불어났다.

일본 여기저기에서 백 명, 이백 명씩 모여서 연습했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첼리스트가 많이 왔다.

색색의 케이스를 멘 사람들 행렬이 공연장으로 향한다.

모두 자신의 그림자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중한 또 하나의 자신을....

 

객석에 있는 수천수만 개의 눈과 귀가 연주자들에게 쏟아졌다.

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들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울려 퍼지는 천 개의 첼로 소리.

높고도 낮게, 빠르고도 느리께, 부드럽고도 힘차게, 그렇게 앞으로 나왔다가 뒤에서 받쳐주는 소리, 소리들...

천 명이 첼로를 켠다. 첼로의 활은 바람이 되어 스쳐간다.

천 개의 첼로는 천 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의 곡을 이루었다. 하나의 마음이 된 것이다.

 

 

대지진 이후, 고베에서는 25만 그루의 목련을 심었다.

목련은 봄이 되면 하얀 꽃을 피운다. 마을마다 나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천개의 소망이 하나가 되어 하늘로 향한다.

간절한 소망과 위로를 담아서....

 

첼로는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연주하는 악기라고 했다. 낮지만 힘차게,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울리는 첼로 소리.

 

이 작품을 쓴 이세 히데코는 고베 대지진이 있고 두달 뒤에 스케치북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그렇지만 백지 스케치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은, 그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림으로써 안심하게 될까 봐, 눈과 손이 기억한 후 잊어버릴까 봐...

 

그로부터 3년 후 고베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고베 대지진 복구 지원 자선 행사인 '천 명의 첼로 음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열세 살 때 첼로를 처음 만났던 이세 히데코는 그렇게 1998년 11월, 천 명 중 한 사람이 되어서 잊어서는 안 될 풍경 앞에 섰다.

그렇게 마음을 담았던 첼로 연주는, 분명 연주자들까지 치유해 주는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세 히데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리지 못했던, 그리지 않았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그림책이 완성되기까지 그가 그린 첼리스트도 천 명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극진한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을 만들어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모양을 한 악기,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악기 첼로.

첼로를 켜는 사람의 모습은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영화 굿바이에서 주인공은 오케스트라가 해산된 이후에 고향에서 시신 닦는 일을 하게 된다. 구토도 일으키고 여러모로 좌절도 했지만 마침내 장례사로 거듭난다. 영화 마지막에서 그는 망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무사히 가길 바라면서 언덕 위에서 첼로를 연주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보내고 남은 사람을 또 위무했다. 여기 이 책의 사람들처럼.

 

지금 대한민국에도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 참 많다. 이 추운 날, 마음이 가난한 무수한 사람들에게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가 다가갔으면 한다. 기꺼이 그 연주에 동참해줄 우리도 기대해 본다. 그렇게 위로하고, 상처는 치유하며 살아보자. 어떻게든, 열심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12-26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