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 과학

제 2324 호/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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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취! 에이오오이이~ 취히!”

두꺼운 이불을 돌돌 말고 앉아서 연신 재채기를 해대는 태연. 감기에 아주 제대로 걸렸다. 아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온병에서 뜨끈한 보리차를 따라 태연에게 준다.

“어쩌다 이렇게 홀딱 감기에 걸렸어. 옷을 얇게 입는 애도 아니고, 집이 추운 것도 아니고, 주변에 감기 걸린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때,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태연의 목도리와 장갑이 아빠의 눈에 들어온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잽싸게 그것들을 들고 킁킁 냄새를 맡는 아빠, 순간 안쓰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태연의 머리를 콕 쥐어박는다.

“아야! 지금 환자한테 폭력 쓰시는 거예욧??!!”

“아빠가 목도리랑 장갑 자주자주 빨아야 된다고 했지! 저렇게 폭 삭은 홍어 냄새가 날 때까지 목도리를 안 빠는데 감기에 안 걸리고 배기냐?”

“헐, 과장이 너무 심하신 거 아녜요? 겨우 이틀 안 빤 양말 수준이더구먼. 그리고 목도리 더러운 거랑 감기랑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많아도, 너~무 많아요. 얼마 전 기사에서 보니까, 보통 사람들의 목도리와 장갑에 사는 세균이 온갖 오물로 가득한 쓰레기통 안쪽 면보다 무려 4배나 많다고 하더구나. 그럴 만도 한 것이, 세균은 수분과 양분으로 자라는데 목도리나 장갑은 입김과 땀 때문에 수분이 충분하고 살과 직접 맞닿아서 피부 각질 등의 양분도 넉넉하거든. 세균에게는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는 거지. 거기다 면섬유와 달리 겨울옷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아크릴이나 폴리에스테르 같은 화학섬유는 세균들이 아주 잘 번식할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단다. 지금 네 목도리와 장갑도 다 화학섬유니까, 세균이 무척 잘 번식했겠지? 그럼 감기에 걸리겠냐, 안 걸리겠냐!”

“대박! 그러니까 세균 입장에서 보면, 제 목도리가 먹을 게 넘쳐나고 머물기에도 더없이 쾌적한 7성급 호텔이란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러니 너 같으면 그 좋은 데를 떠나고 싶겠냐? 마구 번식을 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싶겠지. 조사 결과, 목도리와 모자에서는 피부 질환과 호흡기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황색 포도상구균(Staphylococcus)이 아주 많이 나왔고, 장갑에서는 특히 장염과 탈수를 유발할 수 있는 간균(Bacillus)이 많이 검출됐단다.

“피부병이나 장염까지 걸릴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귀찮다고 이빨로 장갑을 물어서 벗는 습관은 제발 좀 그만해 줄래? 그러다 장염 걸리면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세상의 많은 음식과 잠시 이별할 수도 있단 말이다. 또 봄·여름·가을 세 계절 동안이나 밀폐된 장롱 속에 있던 겨울옷을 처음에 딱 꺼내 입으면 잠시 콜록콜록 기침이 난다거나 갑자기 없던 여드름이 생긴다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바로 오랫동안 겨울옷 속에서 쑥쑥 자라난 진드기, 곰팡이 균 그리고 섬유 먼지와 같은 유해 물질 때문이란다.”

“맞아요! 겨울옷 처음에 입으면 코끝이랑 목 같은 데가 간질간질하던데, 그게 세균 때문이었구나! 그럼 겨울옷은 어떻게 관리해야 해요?”

“가장 좋은 건 물론 빨래야. 특히 목도리랑 장갑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빠는 게 좋아. 하지만 코트, 패딩 같은 겨울옷들은 자주 빨 수가 없으니까, 베란다에서 툭툭 먼지를 턴 다음 햇볕에 한 두 시간 정도 말려주면 어느 정도는 세균 번식을 막을 수 있단다.

“내 친구 보니까 뿌리는 살균제를 쓰던데, 그럼 손쉽게 세균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일시적으로는 세균이 죽지만 수분과 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 바로 다시 세균이 증식하니까 장기적인 효과를 보기는 힘들지.”

“어쨌거나 제일 좋은 건 세탁이라는 건데…”

“그렇다고 막 빨면 비싼 소재의 겨울옷을 다 버릴 수도 있으니, 무척 신경을 써야 한단다. 소재별로 주의점이 상당히 많은데, 만약 그걸 다 외우기 어렵다면 소재별로 꼭 피해야 하는 것 하나씩만 기억하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어, ‘니트는 더운물 NO, 울 소재는 햇볕 NO, 기능성 아웃도어는 드라이클리닝 NO’ 이런 식으로 말이야. 다운 패딩 역시 드라이클리닝보다는 집에서 미지근한 물로 빠는 게 훨씬 좋지.”

“어? 생각보다 쉬운데요? 근데 비싼 옷은 무조건 다 세탁소에 맡겨서 드라이클리닝 하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아웃도어랑 다운 패딩을 집에서 빨라는 건 뜻밖이에요.”

드라이클리닝은 의류의 기능성 막을 손상시켜 특수 기능을 떨어뜨리고 발수력도 저하시킬 가능성이 높거든. 그보다는 순한 중성 세제를 이용해서 집에서 미지근한 물로 빠는 게 훨씬 안전한 방법이란다.”

“놀라운 아빠의 빨래 지식을 들으면서, 또 한 번 느꼈어요. 역시, 배움엔 실천이 최고예요. 약주 드시고 새벽 4시에 들어오신 그 망년회 만행 사건 이후, 엄마에게 벌 받느라 매일 그렇게 열심히 빨래를 하시더니. 두 달 만에 겨울옷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셨잖아요. 정말 대단해요.”

“흑흑흑. 빨래 때문에 손바닥이 온통 주부 습진이야. 눈물 젖은 아빠의 손바닥 호~ 한 번만 해주면 안 될까?”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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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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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성석제는 만담꾼이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의 재기발랄함에 반해버렸다. 진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게 아닌데도 그의 넘치는 유머가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진지함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작품 때문에.


일제강점기 부잣집 삼대독자로 태어난 지식인 할아버지는 사상 문제로 고문을 받았고, 그런 할아버지를 구제하느라 그 대단한 집안 살림이 거덜났다. 그리고 야반도주를 해야 했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반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공부는 멀리하고 땀흘려 노동한 대가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로. 그러나 도망친 그곳은 농사 짓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살림은 궁핍했고 가족들은 고단했다. 그렇게 3남3녀가 태어났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중 넷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인 만수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만 크고 팔다리는 비실거렸던, 워낙에 수재였던 큰형에 비해 모든 게 느리고 더뎠던 아이 만수는 약아빠진 셋째 아들 석수하고도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그러나 뭐든 느리고 굼떴던 이 만수가 결국엔 집안의 대들보가 된다. 고엽제로 월남에서 큰형을 잃고,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왔다. 가족 부양을 못한 할아버지를 대놓고 경멸했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도 모자라 폭력을 일삼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자식들이 결혼하지 않고 자신을 부양하기를 바랐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그 아버지를 똑닮은 석수도 마찬가지로 하게 된다.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상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으리라. 천분을 넘어서는 것을 욕심내지 마라. 욕심이 과하면 탐심이 생긴다. 탐심은 남의 것을 훔치게 만든다. 도둑질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된다. 필요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내가 가진 것과 바꾸어라.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빌려라. 먼저 말을 하고 구하면 얻으리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훔치는 건 안된다. 훔치지 마라. 훔치고 나면 너는 네 것을 모두 도둑맞게 된다. 네 삶을 도둑 맞는다.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남겠느냐.-28쪽


염치를 강조했던 할아버지의 말씀은 만수의 머리와 가슴 속에만 새겨졌나 보다. 삶의 고비고비, 굽이굽이에서 만수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모두들 그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알고 있고 고마워했지만, 누군가는 알았어도 고마워하지는 않았다. 누이와 남동생의 차이였다. 그러나 염치를 아는 듯 했던 막내 누이도 결국엔 변해버렸다.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든 데는 만수 오빠의 책임도 있다. 처음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어른이라면 그런 나쁜 놈을 알아보고 쫓아버렸어야 했다. -333쪽


학생운동하다가 만난 남편은, 소위 진보입네 했던 그 남편은, 한마디로 쓰레기였다. 그런 쓰레기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한때 자본주의와 국가의 이빨과 독재의 칼날 앞에 놓인 민중을 구하겠다는 뜻을 같이한 적이 있는 동지였다. 민중과 하나가 되어 평생을 살겠다는 각오를 나눈 사이였다. 그런 중에도 동지가 몸살로 정신없이 앓는 틈을 타서,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성폭력을 가하고 나서 ‘내가 도장을 찍었다’고 하던 인간이었다. -318쪽


작품은 만수라는 한 인물이 겪어온 인생의 여정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 세대에 이르고 자본주의 끝장을 보고 있는 오늘에 닿기까지, 즉 대한민국 현대사를 한 인물에 투영해서 보여주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 순박함과 순수함에, 그 애달은 가족애에 뭉클하기도 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비극들에 가슴을 끓게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노조가 정당한 노동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업장의 피해는 변상할 의무가 없다고 법에도 나와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권을 행사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 공장에서 먹고 자고 싸운 모든 게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불법은 법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법은 어차피 가진 놈들, 힘 있는 놈들,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판검사, 정부, 정치가, 경찰, 강자의 편이었다. -298쪽


단 한번도 가족을 귀찮아 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았던 한 사나이. 빚조차도 살아갈 동력이라 여기며 살아있는 것을 늘 감사했던 한 사나이. 그러나 그의 희생과 헌신을 누군가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리던 그가 마침내 투명인간이 되었다. 소설은 투명인간이 된 만수를 알아본 또 다른 투명인간의 반응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투명인간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오는 데에는 150여 쪽을 할애해야 했다.  

-맞다. 인간은 염력으로 피라미드도 세우고 신대륙도 발견했다. 투명인간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다. -152쪽


염력으로 피라미드를 세우고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선상에서 취급된 투명인간은 '대단한' 누군가로 보인다. 그러나 만수 씨의 고단한 인생을 들여다 보고 마지막에 맞닥뜨린 투명인간은 세상이라는 파도에 깎이고 깎여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힘들었던 한 사나이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최후의 수단으로 보였다. 오죽하면, 오죽했으면......


'국제시장'은 천만 이상의 관객이 본,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천만 씩이나 볼법한 영화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천만이나 보고 싶어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영화였다. 고단했던 그 시절을 살아냈던, 땀흘려 일하고 가족을 지키고 그걸로 애국을 해냈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게 보내는 일종의 찬사와도 같은 영화였다. 그 영화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그 시대를 묘사하고, 그 시대의 빛과 어둠을 모두 보여주는 소시민 중의 소시민 만수 씨가 이 책에 있다. 이런 만수 씨를 보며 답답해 하고, 고마워하고, 그러면서 또 이용하고 원망까지도 하는, 우리들이 갖고 사는 온갖 감정의 찌꺼기도 모두 이 속에 있다. 우리의 현대사가, 우리네 인생들이 모두 녹아 있다. 좋은 작품이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련해지는, 먹먹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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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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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앞부분을 읽다가 중단됐는데, 거기에 작가가 히말라야를 꿈꾸게 되는 이유를 이 작품을 빌어 설명했다. 승민이 그토록 원했던 안나푸르나를 꼭 가야만 했다고. 그곳에 가야만 슬럼프처럼 한줄도 쓰지 못하게 된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거라고 작가는 대책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안나푸르나로 향했다. 그 이전까지 내가 읽은 정유정의 책은 "28" 하나 였으므로 나는 당연히 '내 심장을 쏴라'의 승민을 몰랐다. 그가 꿈꾼 안나푸르나가 어떤 의미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막연히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얼라!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주연 배우는 이민기와 여진구. 오, 출연진도 좋다. 막강 조연진도 합류했다. "28"을 워낙 인상 깊게 보았으므로 이 작품이 많이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보고 싶었다. 


소설은 흥미로웠다. 28만큼 정제되지는 않았어도, 초기부터 힘있는 문장을 구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캐릭터들도 살아 움직였다. 직접 체험까지 하고 돌아온 정신병원의 세태도 세밀하게 그려냈다. 최근작과 비교한다면 문장에서 덜어냈으면 하는 군더더기가 다소 느껴졌지만, 만약 이 작품을 먼저 읽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분량이었다. 마찬가지로 28을 먼저 읽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에 대한 만족도는 더 높았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별점 넷을 준 이유다. 이 작품을 먼저 읽었다면 기꺼이 다섯을 주었겠지만, 어쩌다 보니 상대평가가 되어버렸다.^^


정신병원에서 만난 스물 다섯의 청년 승민과 수명.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친 자가 있다면 전자는 수명이요, 후자는 승민이 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병원에 숨는 것을 택한 수명과, 출생의 비밀+재산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승민의 만남이었다. 살아온 삶의 방식도 다르고 성격도 판이하게 다른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철저하게 수명이 승민에게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강제입원 100일에 닿을 때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단 한 번 뿐인 기회도 스스로 놓을 만큼 서로를 걱정하고 위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음과 양처럼 무척이나 다른 성질의 두 사람이었지만 그 둘이 하나가 되어 이루는 조화가 멋드러졌다. 표면적으로는 워낙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승민이 수명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승민이 최후의 최후까지 승민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는 결국 수명이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역시 두 사람은 음과 양처럼 하나로 묶여도 좋을 법한 관계였다.


책을 다 보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에 대한 평점은 무척 낮았다. 덕분에 기대치를 놓고 갈 수 있었다. 예고편만 봐서는 잘 이해가 안 갔다. 캐스팅 된 두 배우. 특히 이민기는 승민이 책을 뚫고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싱크로율이 높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낮은 평점이 이해가 됐다. 그건 이를테면 웹툰으로는 높이 평가를 받은 강풀 작가의 작품이 영화로 옮겨지면 망하는 것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매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원작 소설이 훌륭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훌륭하지만, 그걸 그대로 영화에 옮긴다고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소설은 350쪽에 달하는 긴 지면에 캐릭터들을 다 소화시킬 에피소드들을 넣고 엮고 볶을 수 있지만 영화는 기껏해야 두시간이다. 그러니 그 두 시간 동안 관객을 홀릴 수 있게끔 다시 각색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게을리 했다. 혹은 능력이 없었거나.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냥 그랬다. 특히 주인공들이. 싱크로율은 높은데 연기가 어색하다. 연기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본이 별로였던 게 아닐까. 나야 원작을 읽었으니 저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사이사이의 이야기들을 알지만, 그런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들은 뜬금없지 않을까? 그래서 더 웃겼어야 할 조연들이 덜 웃기고, 더 진지했어야 할 이야기들의 진정성이 떨어졌던 게 아닐까. 원작만큼이거나, 원작보다 더 좋은 영화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원작에 못 미치는 영화는 왜 이리 많은 것일까. 아쉽다.


다만 영화에서 보트 타고 호수를 가르는 장면은 시각적 효과가 주는 시원함이 있었다. 그 부분은 같이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신과 전문의로 정유정 작가가 직접 출연했는데, 워낙에 샤프한 인상이어서 분위기에 잘 맞았다. 까메오 출연 반가웠어요!


치매 기운이 있어서 간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만식씨를 염소가 기억을 뜯어먹었다고 표현했다. 기수였던 그가 승민을 향해 '또별'이라고 부르며 매달렸던 게 기억에 남는다. 승민이 찢겨진 바지를 입고서 트위스트를 췄던 것, 수명 역시 문을 통과하면서 트위스트를 추었던 게 유난히 좋았다. 같이 노래하며 박수를 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수명의 선택. 그러니까 승민을 위해서 그가 선택했던, 그래서 그가 치러야 했던 희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불과 100일 동안 함께 했던 사람인데, 그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온통 뒤흔들었다. 이제껏 세상으로부터 도망만 치던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으로 한발자국 내딛게 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선택이고 도전이고 희생이었다. 서로에게 고마운 인연이다. 


재밌게 읽었는데 28 때와는 달리 딱히 북다트를 꼽지 않았다. 갖고 싶고 담고 싶을 만큼 홀릴 문장은 적었다는 의미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갖고 있는 7년의 밤으로 바로 시선이 옮겨 간다. 읽을 거리가 아직 남아 있어서 기쁘다. 예전 작품 중에 절판된 책이 많은데 다시 출간됐으면 좋겠다. 일단, 읽다가 중단된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먼저 소화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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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터너 엽서집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지음 / 유어마인드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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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에서 '읽고 싶어요'에 체크한 것을 본 친구가 기프티북으로 보내주었다.

우울하던 찰나에 반짝 빛이 되어준 깜짝 선물이다. 북플은 그야말로 요물이고! ㅎㅎ


윌리엄 터너 '엽서집'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실제로 엽서 크기다. 15*10 정도의 크기



사이즈는 엽서 크기로 작지만 종이 재질은 두껍다. 모두 24장의 그림이 실려 있다. 



엽서의 뒷면엔 그림 제목이 영어로 표기되었고 그림을 그린 연도도 표시해 놓았다. 

그야말로 깔끔 그 자체다. 원한다면 편지를 써서 누군가에게 엽서로 보내도 좋다. 당연히 우표를 붙이고~



그림의 실제 크기가 표시되지 않은 것은 살짝 아쉽다. 원본 그림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알면 감상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전시회에서 터너의 그림을 몇 번 보았는데, 내 기억에 그렇게 컸던 것 같지는 않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아이사쿠스와 헤스페리에. 신화의 한대목을 옮긴 듯한데 낯설다.



폐허가 된 틴턴 수도원이다. 음, 12월에 본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에서 이 작품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서 폐허가 된 수도원 그림이 있었고, 그 장소를 사진으로 담아온 작품이 있었는데, 그림보다 사진이 더 좋았었던 기억이 난다. 근데 그게 터너 그림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그 전시회에 터너 그림이 있었던 건 맞지만...



초판 1쇄 발행이 2015년 1월 22일인데 2쇄 발행이 1월 28일이다.

초특급으로 많이 팔린 것일까, 초판을 부러 조금만 찍었던 것일까? ㅎㅎ


영화 미스터 터너를 보지는 못했는데,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요일 코너에서 김혜리 기자가 이 영화를 소개해 준 적이 있다. 비록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작은 엽서집을 통해 그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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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5-02-1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째 사진의 그림,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고 놀랐어요.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서요.
인상깊은 그림이라 그림엽서 사왔답니다.

마노아 2015-02-13 01:53   좋아요 0 | URL
우와, 실물의 감동을 느끼고 오셨군요!
전에 일리야 레핀 등 러시아 작가들의 그림은 엄청 커서 액자 크기에도 화들짝 놀랐었는데 참 대조적이에요.^^

rosa 2015-08-2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 영국갔을 때, 가는 곳마다 정말 이 작가의 작품이 많아서(근데 왜 난 첨 들어보는 느낌이었는지..), 하여튼 영국사람들이 사랑하는 화가인가보다.. 했었지요. 그래서 사고 싶다, 사와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답니다. 마노아님이 좋아하는 작가였나요? ^^

마노아 2015-08-24 22:20   좋아요 0 | URL
작년에 전시회에서 그림 보고는 느낌 있다~ 생각했지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님은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 들여다 보면 은은하게 좋더라구요.^^
 
에네껜 아이들 푸른도서관 33
문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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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검은꽃을 인상 깊게 보았다. 분명 소설인데 너무 리얼한 구석이 있어서 좀 더 찾아보고 싶었다. 같은 소재를 다룬 이 책을 발견해서 무척 반가웠다. 


우리나라 사람이 해외 노동자로 처음 간 곳은 하와이였지만, 고생길은 멕시코에서 더 크게 열렸던 것 같다. 살아온 환경이 더 크게 차이나는 것도, 그래서 더 고된 노동이 기다리는 곳도 멕시코였으리라. 조선에서의 삶이 너무 가혹해서,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혹은 어떤 이유로 조선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 1,033명이 멕시코로 이민을 갔다. 열심히 일을 해서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그곳이 지상 낙원일 거라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잔혹한 어저귀 농장이다. 밧줄의 원료가 될 이 거친 식물은 가시투성이여서 작업 시간이 길다. 몇 개의 어저귀를 베어 묶는 데만도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만다. 게다가 채찍으로 사람을 치는 그런 감독관 밑에서 치르는 고역이라니...


태평양을 건너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거센 폭풍우를 견뎌야 했고, 아직도 양반입네 하며 목에 깁스한 사람들도 견뎌야 했다. 그 과정에서 덕배는 옥당마님이라고 불리는 양반의 딸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혼인을 앞두고 신랑이 급사하는 바람에 초야도 치르기 전에 과부로 살아야 할 팔자가 된 소녀를 위해 온 가족이 멕시코로 이민을 온 것이다. 죽어도 시댁 귀신이 되라고 떠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아무 대책도 없고 별다른 각오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난 이 세상물정 모르는 양반님네를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전직 백정인 덕배 아버지는 덕배만큼은 공부를 시켜서 사람답게 살게 하고 싶어했다. 조선에서의 백정에게 그런 기회가 있을 리 만무. 과감히 태평양을 건너온 것이다. 약초에 밝은 감초 아저씨 부부가 있고, 다리 밑에서 구걸하며 지내다가 일본인에게 속아서 배를 탄 봉삼이 등이 등장한다. 사연 많은 사람들의 또 다른 사연 덩어리가 터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대개 전개가 짐작이 되는 것들이어서 소재의 신선함에 비해서 많이 식상했다. 캐릭터들도 뻔한 구석이 있어서 뒤로 갈수록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사실 이 책을 검은꽃보다 늦게 읽긴 했지만, 소설 집필은 검은꽃이 훨씬 앞쪽이다. 작가분도 검은꽃의 영향을 받으셨으려나? 


보진 못했지만 예전에 만들어진 영화 '애니깽'도 결국은 이 소재이지 싶다. 당시 개봉도 안 한 영화가 국내에서 시상식을 마구 휩쓸어서 외압이 있었던 것 아니냐-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검색해 보니 내용들이 대개 비슷하다. 하하핫...;;;;


소설적 재미보다는 이 소설을 시작하게 만든 역사적 배경에 더 관심이 간다. 조선을 떠나 멕시코로 향했던 사람이 천 명이 넘으니,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손을 퍼뜨렸을 인원도 상당할 것이다. 그분들은 지금 조상들의 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한류 열풍이 부는 이 시점에서 어떤 느낌을 갖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좀 더 관련자료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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