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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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지젝거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최근에 급기야는 ‘지젝거리는’ 이들을 위한 교본까지 등장했으니,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가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삐딱하기 보기>(시각과 언어, 1995) 이후에 열댓 권이 넘는 지젝의 책들이 우리말로도 번역/소개되었으니 우리 또한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한편으론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 지젝의 지적 파워를 확인시켜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의 말들을 (도대체 알아먹지 못할) 지저귀는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가뜩이나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오해받는 지젝에 대한 반발과 미움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마이어스의 책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로서 그러한 오해와 미움을 단번에 불식시켜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한 입 크기로 적당히 썰어놓은 지젝의 아이디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다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결국엔 저자의 이러한 결론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지젝이 라캉으로 ‘되돌아가고’, 라캉이 프로이트로 ‘되돌아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젝에게 ‘되돌아갈’ 것이다.”(231쪽) 

 

이러한 여정의 안내자로서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지젝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 즉 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을 앞세운 이후에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그의 사상을 갈무리한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이 주제들을 다루는 각 장의 말미에 친절하게 요약돼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지젝에게서 과연 무엇이 새로운가는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지젝은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근대적 주체로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그가 말하는 주체(subject)는 ‘자기로의 철회’라는 극단적 상실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고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이 텅 빈 자리는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는바, 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주체’와 ‘주체화’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견주어 ‘주체론적 차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이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는 아무런 내용물도 갖지 않는 텅 빈 장소이자 공백이지만, 이 공백은 언제나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젝은 근대(모던) 주체철학의 계보를 계승한다.

 

하지만, 그의 주체철학은 탈근대(포스트모던)의 탈-주체철학 이후에, 그것을 비판/극복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도래 가능한 철학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이후, 즉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이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를 우리는 그가 다루는 다른 주제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지젝의 사상을 안내하는 여정의 끝에서 저자는 지젝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소급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기에 그는 현재 ‘유령’이다). 그러한 예언을 다만 미래의 것으로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1989/1991년 이후의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젝의 작업들은 그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헤겔'일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리고, 마이어스의 책은 이 ‘또 다른 헤겔’ 입문서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제대로 ‘지젝거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의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유령이라 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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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6-1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거리고 싶은데요, 지젝의 책을 읽어볼까 하는 단계입니다. 이 책으로 시작해도 될까요. 그의 삐딱하게 보기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읽어내는 '잉여쾌락'의 맥락을 짚어보고 싶어서요. 혹 먼저 추천해주실 만한 책 있나요?

로쟈 2005-06-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이 책이 제일 쉽습니다(몇 가지 오역/오타만 확인하시고 읽어보시길). 이어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정도를 읽으시면 될 텐데, 슬슬 만만찮아집니다. 물론 좀 익숙해지다보면, 지젝을 읽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얼마나 유익한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아시게 될 겁니다.^^

돌바람 2005-06-1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에는 지젝이랑 놀아야겠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고 밑줄그어대는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하여간에 책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마치 책사태처럼. 그런 사태는 지긋이 한번 무시하게 되면 계속 속편하지만, 괜히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남의 돈 세는 일 같아 남세스럽지만, 대개는 사두지 못할 책들을 또 몇 권 나열해 본다(물론 가끔 한두 권씩을 사게 되고 읽게 된다. 나도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처음에 꼽을 책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처녀작' <세미오티케>(동문선). 아마도 '모스크바통신'을 하릴없이 유심하게 읽은 분이라면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기억할지 모르겠다(모스크바에 온 보람을 안겨주었던 그 책이 내가 작년에 꼽은 '올해의 책'이다). 그 러시아어본에는 바흐친론인 <시학의 파괴>와 함께 <세미오티케>와 <소설 텍스트>가 합본돼 있었다(이 책들은 영어본이 아직 안 나와 있다).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세미오티케>(원서 제목은 희랍어로 돼 있다)는 박사학위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과 함께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여성 '사무라이'가 얼마나 '센지'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아직 영어본도 나오지 않은 까닭에 우리말 번역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떡하니 서점에 깔려 있어서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론 놀랍고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 거의 동문선 전속이라고 할 만한 역자는 이미 10여 권의 번역서를 낸바 있고, 그 중에는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과 그녀가 편집한 <미친 진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수준은 좀 미심쩍은데,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생각없는 번역서를 보노라면 기본적인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사건은 터져 버린 것을. 게다가 크레스테바 전공자란 분들의 번역도 대개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이 경우만 유난스러울 건 없으리라는 계산까지 하게 되면, 결론은 '울며 겨자먹기'이다(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읽기는 이번 여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건, 12편의 논문 가운데, 4편이 빠진 채 8편만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 역자가 후기에 밝혀놓은 사실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분량 때문에?(도스의 <폴 리쾨르>도 890쪽짜리로 번역돼 나온 걸로 봐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빠진 논문들을 보니까 대개 기호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데리다의 <입장들>에 실린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60년대 후반 크리스테바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의 선두주자였다). 해서, 우리말 <세미오티케>는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책이 돼 버렸다. 거듭 유감스럽다. 번역의 질이 그 유감을 상쇄해줄 수 있을는지?

 

 

 

 

두번째 책은 작년에 방한하기도 했던 페터 슬로토다이크의 대표작 <냉소적 이성비판1>(에코리브르)이다(이번에 1권이 나왔는데, 2권도 곧 나오는 건지?). 작년에 나온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지 제법 오래 됐는데(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읽을 거리가 그새 또 추가됐다. 책은 이미 '냉소주의'를 우리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틈틈이 참조하고 있는 책으로 낯설지 않은데(<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도 이 점은 언급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는 책이다. 책은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이 신간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리뷰가 요긴한데, 잠깐 옮겨오면,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어디 써먹기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

 

 

 

 

세번째 책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 영화론 연구서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물론 들뢰즈의 <시네마>를 친절하게 소개/해설해 준다는 데 있을 터이고, 그런 종류로는 좀 얄팍하지만 <들뢰즈: 철학과 영화>(열화당, 2004)란 책도 이미 소개돼 있다. 그리고 논문집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도 이 주제로 참조할 만한 책이다. 한데, 신간은 저자가 이미 <현대영화이론의 궤적>(원제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믿을 만한 영화학자이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참고서'로서 유용할 듯싶다. 문제는 정작 들뢰즈의 <시네마>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것. 애꿎게도 1권 운동-이미지만이 두 차례 번역되었을 뿐이다. 무얼 갖다놓아야 해설을 할 게 아닌가? 그러한 순서개념이 좀 부족한 것은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므로 크게 흠잡을 건 없지만, 조만간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해설서로서 로도윅의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철학분야의 신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이다. 이미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를 소개한 역자의 '신작'인데,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고 조만간 소개될 듯한 자크 랑시에르까지 포함해서 알튀세르 사단의 3총사를 이룬다. 신간은 이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듯. 앞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순서는 좀 뒤바뀌었다. 정작 스피노자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기 이전에 대표적인 연구서들이 먼저 책장에 꽂히게 된 것. 역자의 계획대로 제대로 된 스피노자 번역본들이 조만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책세상), 터키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의 <눈>(민음사), 그리고 한국의 '유령작가' 김연수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손꼽을 만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좀 삐딱한 마음으로 러시아작품을 고르도록 하겠다. 보리스 필냑(삘냐끄)의 <마호가니>(열린책들)이 그것이다. 잠시 소개문을 인용하면, "보리스 삘냐끄의 '마호가니(Krasnoe Derevo)'는 1929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트로츠키 공산주의자의 시점에서 혁명 후 10년의 사회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삘냐끄는, 작가 동맹에서 추방당하고 1937년 대숙청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필냑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0년대에 나름대로 아부도 하고 분투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한 불운한 작가였는바,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해>(1921)은 이미 소개돼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가/작품은 <마호가니>에 같이 묶인 유리 올레샤의 <질투>(이들 작품들은 모두 이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던 것이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올레샤는 <기병대>의 작가 이삭 바벨과 함께 오뎃사 출신의 대표적인 '동반자작가'인바, 개인적인 생각으론 새로운 이념에 헌신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지도 못하는 '동반자' 문학의 핵심이 <질투>에는 잘 그려져 있다. 게다가 아주 코믹하다(하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코믹이다). 그리고 그 코믹은 '감정의 음모'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에는 올레샤의 동화 <세 명의 배불뚝이>(기탄출판)도 출간되었다. 그의 '음모'가 얼마나 코믹한지 한번 구경들 해보시길.  

여러 분야에서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다 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끝으로 한 권만 꼽자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새 비평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문학평론집으로서는 최근에 서영채의 <문학의 윤리>에 이어서 꼽아보게 되는 책이다.

 

 

 

 

책은 '존재의 변증법4'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이 그의 네번째 비평집이란 뜻도 된다.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을 시작으로,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그가 이전에 낸 비평집들인데, 기억에 아마 시비평들만을 묶은 마지막 책을 제외하고 '존재의 변증법'이란 문구를 제목이나 부제로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실상 '존재의 변증법'이란 모호한 문구가 문학의 술어로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굉장히 선호하는 문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비평행위를 그 문구에 집약하고자 하므로.  

정과리는 '문지' 4인방의 뒤를 이은 '문사' 세대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했었지만(작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이번 비평집도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평론가 김현 사후에 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비평가로 지목됐었지만(적어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생전에 그의 일부 비평에 대해서 '관념의 체조 같다'는 평을 '스승'인 김현은 내린바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그의 궤적은 그러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문학의 지형변화, 혹은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 두 가지는 맞물리는 것이지만).

태도의 변화? 가령 이번 비평집에도 수록돼 있지만,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지"라는 식의 태도. 해서, 그의 비평은 문학 이후,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무덤을 앞에 둔 비평이다. 그러니 애도는 있을지언정 열정은 더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각되는 건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비평이 '디지털화'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내게 암시해준 책이고, 한 젊은 비평가의 '패배주의'를 확인하게 해준 책이다. 이후에 그는 알다시피,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도 합류하면서 '최연소' 원로 비평가로 자리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영광이 더 남아 있는 것인지?

책머리에 실려 있으면서 아마도 표제를 빌려주었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욕망'이란 평문은 1988년에 씌어진 것이고 나는 그 글을 읽던 때를 기억한다. 대학가의 그 골목과 지금은 없어진 그 서점에서 신간으로 나온 <문학과사회>를 들춰보던 때가 그 때였지 싶다. 욕망은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원로 비평가'의 욕망도 그때 거기서 들끓지 않았을까? 나는 '쿨한' 욕망을 믿지 않는다...  

05.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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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30 14: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가 근간 예정이라고 한다. 구색을 맞추게 돼서 다행이고 반갑다...

주니다 2005-05-30 15:45   좋아요 0 | URL
<세미오티케>는 기대한 책이었건만 난감한 지경이군요. 동문선은 언제나 이름값을 하려는지...<시네마-1>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던데 어떤게 상태가 좋은지요? 그리고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라는 책이 의욕적으로 한꺼번에 나왔던데 살펴보셨습니까? 그나저나 이번 학기도 얼마 안남았군요.

로쟈 2005-05-30 16:42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두 권도 서점에서 봤습니다(제가 몇 마디 참견할 만한 책들은 아니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단한 필력이다 싶은데, 곧 이주헌씨 뺨치겠더군요.^^ <시네마>는 둘다 깔끔하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제가 비교해보지는 못했습니다(둘 다 갖고 있지도 않지만). 또 <시각영화>라는 책도 번역돼 나왔는데, 저로선 아무래도 제목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청각영화'니 '후각영화'라는 게 있지 않은 한...

주니다 2005-05-30 17:29   좋아요 0 | URL
오, 이주헌씨 뺨 칠 정도라면....<시네마>는 주은우와 유진상씨가 번역했죠? 유진상씨는 미술이론하는 분 같은데, 서점 가면 찾아봐야 겠습니다. <시각영화>는 원제가 Visionary Film이더군요, Visionary의 원뜻으로 보나 "'몽환trance'이라는 맥락하에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다"는 소개글로 보나 탐탁지 않은 제목이로군요. 그냥 편집부에서 쉽게 간 것 같죠? 이 책은 일전의 '재귀적인 영화' 때문에 눈이 번쩍 뜨여서 보관함에 넣어 뒀었는데, 실물을 확인해보고 구입 여부를 결정해야겠네요.(본다고 확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핫)

로쟈 2005-05-30 17: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실물'이 중요합니다. 화장빨이나 얼짱 각도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palefire 2005-05-30 17:43   좋아요 0 | URL
엄격히 말하자면 [운동-이미지]는 재역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 나온 새길판(주은우/정원)이 좀 더 낫습니다. 비록 영역판을 많이 참고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적,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이나 들뢰즈에 대한 배경지식에 있어서는 새길판(아마도 지금은 절판상태?)이 더 낫습니다. 시각과언어판은 이런 점에서 단점이 많은 번역본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그리고 Visionary Film=시각영화도 정말 탐탁치 않은 제목이긴 해요. 환영적 영화 또는 몽환적 영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시트니의 개념이나, 그가 다루고 있는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흐름(당장 Deren과 Anger만 생각하더라도)에도 부합합니다. 저도 번역본은 보지 못했지만, 실험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실천중인 시카고 MFA 출신들이 번역자로 참여해서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어의 개념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유보적 예측을 해 봅니다.

주니다 2005-05-30 18:36   좋아요 0 | URL
palefire님의 예상치 못했던 답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시각 언어>에 대한 palefire님의 자세한 서평을 기대해 봅니다.(영화전공이신듯 하여...문외한들을 위하여)

2005-05-3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5-31 17:30   좋아요 0 | URL
주니다님/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은 오래 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번역에는 역시나 전문용어와 관련하여 오류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일종의 '사전'이기 때문에 구비해놓는 게 요긴한 책이긴 한데(원서를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테바에 대한 책을 구하신다면, 역시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나온 <크리스테바>를 권하겠습니다(저는 며칠 전에 복사했습니다). 컴팩트한 분량에 깔끔한 정리가 그 시리즈의 특장이죠. 국내서 중에서는 역시나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집을 추천하겠습니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제 기억엔 후기 크리스테바의 '테마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이론 읽기>의 한 장이 크리스테바에 할애돼 있는데, <시적 언어의 혁명>에 대한 해제입니다. 초기 크리스테바와 관련하여 참고하시길...

주니다 2005-05-31 17:55   좋아요 0 | URL
Noelle McAfee가 쓴 것이 맞죠? 일단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부터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5-05-31 19: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2005-06-0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번에 <신곡>의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실물'을 보지 못한 까닭에 긴가민가해 하며 이전 번역서를 이미지로 올렸지만, 어제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의 책. 968쪽에 38,000원이다. 이전 번역본을 다시 손본 것이라 해도 '본격적인' <신곡> 완역본이라 할 만하다. 역시나 다시 나온 것이긴 해도, 두어 달 전에 나온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와 함께 올해 나온 고전 번역서로서 손꼽을 만하다.  서해문집에서 같이 나온 <신곡> 해설서와 나란히 놓고 읽으면 구색도 맞으리라.  

 

 

 

 

지난번 신간 소개글을 올린 지 며칠 안 됐지만, 이후에 나온 책 몇 권을 또 열거해 보기로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건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연구서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아직 서점가에 깔려 있지는 않지만 곧 나올 책으로 돼 있고, 이미 일간지 리뷰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기호학자 에코의 출세작이기도 한 <기호학 이론>(이 책의 불어판 번역서<부재하는 중심>의 우리말 번역서는 <기호와 현대예술>)의 '속편'으로 지난 2000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에 서울문고에서 처음 보고 구입한 적이 있는데, 이 신간과 함께 이제 읽어볼 만하겠다(분량상 원서를 독파하는 건 상당한 '여유'를 필요로 한다. 원서는 본문 464쪽이고, 번역본은 616쪽). 아마도 '칸트와 누구누구'라는 책 제목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 앞에 선 칸트' 정도의 뜻으로, 혹은 유머로 새기면 될 듯하다. 책의 부제는 '언어와 인지에 관한 에세이들'이고, 전체 6개 장에서 2장이 '칸트와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에 대한 것이다(미국 철학자 퍼스의 책들이 이제껏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오리너구리?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 동물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오리이며 너구리다. 이걸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 이걸 분류할 수 있는 (칸트식의) 선험적 도식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이 난처한 사태에 칸트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독자를 일단 다른 철학서들과는 다른, 편안한 태도로 이 책에 접하도록 한다(끝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기호학이론>을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물론 우리말 <기호학이론>은 재미있기에는 너무 곤란한 번역서이다. 개역본이 나와야 될.) 이 책은 배꼽을 잡고 읽을 만하겠다.

 

 

 

 

두번째 책은 '잡설가' 박상륭의 <소설법>(현대문학). 그의 다섯번째 창작집이고, 표제작은 '소설-법'이면서 '소-설법'의 의미라고. 한국문학의 이단적인 작가이면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린) '주류' 작가이기도 한 박상륭에 대해서 사실 나는 별반 읽은 게 없다. 그의 <죽음의 한 연구>(작가는 <죽음의 연구>라는 제목을 끝까지 고집했었다고)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사두긴 했지만, '잡설들'을 읽을 만한 '여유'를 그간에 갖지 못했던 것.  가령, "'小說'이라는 개새끼[怪色鬼]는, 어떻게도 갈블 수 없이 雜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깊어지는데, 이는, '감성'과 '이성'이, 어지럽게, 그리고 사련적邪戀的으로 혼합되어, 학(鶴,은, 言語의 상징이기도 하거니!)의 털을 뽑고, 시뇨屎尿의 가마솥에 넣어 삶는 잡탕이라는 그 생각이 (글쎄, 패관만을 한정해 말이지만) 패관께는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소설론'을 읽으면서 소설에 대해 깨치는 바가 있는 이라면, '난놈'이라 할 만하지만, 나는 박상륭 마니아도 아니고 '난놈'도 아니다. 다만, 그의 잡설들이 우리의 '근대소설'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는 "동서고금의 종교 신화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거대한 스케일, 독보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시켜왔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라면 All or Nothing이다(박상륭은 한국문학보다 크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번째 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생애를 다룬 <평전 파솔리니 - 죽음과 삶의 몽타주>(이룸). 소개에 따르면, "영화감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문학과 사회 분야의 평론가이자 생애와 작품이 모두 현대 유럽 사회의 예술과 정치, 종교와 성 담론에서 시대를 뒤흔들었던 현대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기로는 로로로 시리즈의 <파솔리니>(한길사, 2000)가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번에 나온 건 훨씬 방대한 분량이고(613쪽), 엔초 시칠리아노라는 이탈리아의 평론가의 솜씨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 Pasolini는 '파솔리니'와 '파졸리니', 어느 쪽으로 발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씨네21> 같은 영화지에서는 '파졸리니'라고 기재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씨네21>에서는 30년 전에 살해당한(목이 잘려서 도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던가?) 이 문제적 감독 살인사건이 재조사될 거라는 외신을 전하고 있는데("동성애 혐의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경험도 있는 그는 1975년 많은 의혹을 남긴 채 로마의 빈민가에서 17세의 동성애자에게 난자당해 숨졌다") 살해 혐의로 9년간 복역했던 용의자(동성애자)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파졸리니를 죽인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세 청년이었고, 이들이 그를 "더러운 공산주의자"라고 욕하면서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비참한 죽음을 맞은 거지만, 요는 그가 동성애자로 죽었는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로 죽었는가 하는 것.

'파졸리니'란 이름으로는(그래서 '파솔리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10년 전에 그의 소설 <폭력적인 삶>(세계사, 1995)이 번역/소개된바 있고,  그의 영화로는 <마태복음> <테오레마> 등이 출시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오래전 영화를 전공하던 선배로부터 빌린 비디오로 <살로, 소돔의 120일>, <오이디푸스왕>,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본 적이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작은 기사를 보니까 <살로, 소돔의 120일>은 네티즌들이 출시를 고대하는 DVD로 4위에 꼽혔다. 한 네티즌 왈 "과연 파졸리니 영화도 우리나라에 출시될 수 있는 건가요? 흠... 특히 무삭제로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한 획을 긋는 충격적인 사건이겠네요." 이미 제자인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무삭제 개봉됨으로써 '한 획'은 그어졌지만, 스승의 <소돔 120일>은 같은 '한 획'이더라도 붓의 종류가 좀 다르다. 파졸리니의 '악몽'에 견주면, 베르톨루치의 '몽상'은 가히 천진난만이다.

같은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책을 거명한 김에, 파솔리니/파졸리니의 평전을 거푸 거명하는 것이 '의리'에 맞을 듯하지만, 거리를 둔 건 이 신간의 편제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상하고 육중하다. 나는 그런 모양새가 '격렬한 삶' 혹은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파솔리니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물론 덕분에, 글자도 큼직큼직하게 박은 책값은 아주 '격렬'해졌다).      

네번째 책은 문화비평가이자 '미디어 이론가'의 대명사 마샬 맥루한의 마지막 책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실상 그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언을 예언한 맥루한인 만큼 그에 책들에 대해서 주절이주절이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이미지들로 대신한다.

 

 

 

 

제일 왼쪽이 이번에 나온 책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어지는 두 권은 <미디어의 이해>에 대한 2종의 번역서이다(민음사판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세번째는 또다른 주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인데, 이전에 번역이 잘 안 읽힌다는 서평들을 읽은바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이 <미디어는 맛사지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인데, 분량으론(100쪽) 별볼일 없는 책이다. 맥루한의 책들이 대개 난해하다지만, 이 책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맛사지용으로도 불편하고. 그리고 마지막 <맥루안>은('맥루안'을 고집한 역자의 고집이 돋보인다) 가장 얇으면서 유일한 입문서.  

신간에 대한 한국일보의 리뷰를 잠깐 인용하면, "맥루한의 글은 화려한 비유로 넘치지만 비교적 읽기 좋게 번역한 데다 곳곳에 친절한 역자 주가 붙어 있어 읽기에 썩 어렵지는 않다. 다만 책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잡지처럼 너무 가벼운 표지를 쓴 것이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쓴 마샬 맥루한 영자 이름에 탈자를 낸 성의 없는 편집이 아쉽다." 그 탈자라는 표지에서 마샬(Marshall)의 'r'을 빼먹은 것(보이시지요?). '읽기 좋게 번역한' 것만으로도(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스러움에는 틀림없지만, 외치건대, "마무리를 잘하자!"

 

 

 

 

다섯번째 책도 마무리가 잘 안된 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1919- )의 <셰익스피어의 시대>(을유문화사)가 그것. 뒷표지처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는 아니지만(어떻게 비평가가 '가장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있는가? 과대포장도 예의는 아니다. 그냥 '이 시대 최고의 비평가' 정로로만 띄워좋도 충분하다. 물론 그것도 영국에서의 일이고), 프랭크 커모드는 명망있는 비평가이고 믿을 만한 저자이다(그는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니, '커모드 경'이다). 비록 우리에게 소개된 건 일천하지만. <종말의식>(1967/2000)이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 1993)으로 번역된 게 단행본으론 전부이다. 한 추천사에 따르면, 이 신간에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책에 격조있게 담겨 있다." 거기에 장점은 분량이 얇은 것. 200쪽 정도니까 반나절만 투자해도 남을 만한 분량이다(이미 여러 권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평전 중에서 가장 얇다. 가장 지명도 있는 저자임에도).

내가 '마무리'를 들먹인 건 책날개에 실린 약력에서 커모드의 저서로 <로맨틱 이미지: 종말의 의미>라고 소개한 대목 때문. <로맨틱 이미지>와 <종말의 의미>는 각기 다른 책이고, 후자는 언급한 대로 국역돼 있다. 표지나 책날개처럼 눈에 잘 띄는 것도 없을 텐데, 좀더 세심한 교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책의 역자는 이미 이 책의 포함된 크로노스 총서에서 <르네상스>, <민족과 제국> 등을 번역한바 있는 전문가이다. 해서, 내용은 믿어봄 직하다. 한편, 셰익스피어 관련으로 내가 고대하는 책은 커모드급, 혹은 그 이상의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이다(블룸의 셰익스피어를 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본문에 각주가 단 한 개도 달려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명도만으로도) 소개되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다섯 권을 다 꼽아버렸는데, 약간 아쉬운 책은 <수량화 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심산)이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소개에 따르면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명이 성취했던, 질적 관점에서 양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논하는 책이다. 이러한 전환이 근대의 과학기술, 관료제, 상업 등을 가능하게 했고, 시공간의 정확한 측정 및 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대체적 추세로서의 '양화'가 아닌, 양화의 실상 즉 시간, 공간, 수학, 시각화, 음악, 회화, 부기 등 다양한 문화 아이템 각각에서 양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바로 그 양화가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설명한다."

 

 

 

 

저자, 앨프리드 W. 크로스비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미 "다른 대륙, 다른 문명의 사람들과 달리 유럽인들은 근대 이전부터 해외로 팽창하여 왔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그런 곳으로서 이곳에서는 유럽 출신 백인들이 기존의 정주민들을 내몰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거기에 유럽 문명을 복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단지 인간의 소행일 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팽창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주경철)란 요지의 <생태 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가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05. 05. 23. 

P.S. 지난 20일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1913년 생이니까 그는 지상에서 꼬박 아흔 두 해를 살았다. 백 세를 넘겼던 가다머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애이며, 그가 남겨놓은 업적과 자취 또한 후학들이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로 깊고 광대하다.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들어온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 - 삶의 의미들>(동문선)을 앞당겨 대출했다. 890쪽이니까 그의 생애에 그 나름으로 견줄 만하다(참고로,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200쪽까지 무난하게 나가지만 이후엔 '재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제 그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

 

 

 

 

리쾨르의 책들이 그래도 여러 권 번역돼 있지만, 리쾨르에 관한 책은 아직 드물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한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건 리처드 커니의 대담집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에서의 리쾨르 편이다. <폴 리쾨르>의 중간에 실린 화보에는 1988년 한 학회에서 커니와 리쾨르가 함께  찍은 사진도 들어 있는데, 당시 75세의 노학자 리쾨르에 비해 커니는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모습이다. 커니의 책은 현대 사상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에 다른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요긴하고 유익하다(데리다에 대한 두툼한 책을 쓴 존 카푸토는 데리다 입문서로도 이 대담집을 꼽은바 있다).    

지난 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장들 가운데, 이제 1908년생인 레비-스트로스 정도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듯하다(동급생인 메를로-퐁티가 죽은 지 거의 반 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사상은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에 비례할 듯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나면, 말 그대로 텅 비게 된다.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하다못해 올해로 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20세기 영화사가 그러하고 한국 현대시사가 그러하며, 한국문학 비평사가 그러하다. 해석학으로 분야를 지극히 한정하더라도 리쾨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세울 만한 이가 또 나올는지는 의심스럽다(사상에는 구조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남은 건 안락한 아류들의 지루한 여생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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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3 11:50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 너구리 리뷰 읽었어요.
기대되는 책이고, 또 구매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더군요.
전, 님으로부터 책공부와 러시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렸던가요?^^

갈대 2005-05-23 13:11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번역이 걱정됩니다(미네르바 성냥갑의 안 좋은 기억). 역자가 독어본을 중역한 것 같은데 말이죠.

로쟈 2005-05-23 15:28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역시 빠르시네요.^^ 갈대님/ 역자는 다르지요? 이번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역자분인데, 저는 반신반의하는 쪽이고 확실한 건 '물건'을 열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2005-05-26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래는 지난 주말에 작성되어야 하는 글이었는데, 사정상 며칠 늦어졌다. 그 런 사정을 반영하여, 제일 처음에 꼽고자 하는 것은 새로 나온 <단테>와 그 해설서이다. 이건 오늘 아침에 한국일보에서 <신곡>을 완역한 한국외대 한형곤 교수와 그 해설서 <신곡 - 단테, 신의 나라로 여행을 시작하다>(서해문집)를 쓴 부산외대 박상진 교수의 대화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다시 검색해 보니까 한형곤 교수의 이탈리어어 완역본은 지난 78년에 삼성출판사(세계문학전집)에서 나왔었고, 2003년에 개역본이 한국외대출판부에서 <풀어 쓴 단테의 신곡>으로 다시 나왔다. 이후에 새로운 판본이 다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요즘 <신곡>보다 더 많이 팔려나가는 것은 <단테 클럽>이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같이 단테의 이름을 '참칭'한 책들이지만,  교양있는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세계 3대 문호로까지 꼽히는 단테의 <신곡>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혹은 읽은 척이라고 할 필요가 있고, 적어도 책이라도 서가에 꽂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말 역자나 해설자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커녕 끝까지 다 읽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나부터도 그렇지만). 그건 원작 자체가 완벽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시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번역도 까다롭거니와 원작의 맛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이 '숭고한' 책에 대해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건 읽어보려고 노력하거나, 읽은 척하는 것이다. 다시 나온 번역본이나 새로 나온 해설서가 요긴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적어도 읽은 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정말로 '읽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게 '읽은'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도 단테는 (페트라르카 등과 함께) 하나의 콤플렉스 거리이다. 푸슈킨도 이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서 여러 모로 참조하고 있지만("푸슈킨과 단테"라는 게 "푸슈킨과 셰익스피어"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연구주제이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고골의 <죽은 혼>이 그 3부작 구성에 있어서 이 <신곡>의 구성을 의도했었다는 점. 그러니, <죽은 혼>을 (강의에서건 어디에서건) 얘기할 때마다 단테의 <신곡>도 덩달아 언급하게 되지만, '정보' 이상의 내용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에 걸맞는 얘기를 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하지만, '언어장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건상 그간에는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해설서는 그런 의미에서 반갑다. 물론 영어권에서 나온 해설서들도 참조할 수 있겠지만, <신곡>을 영역본으로 읽는 건 또 만만하겠는가?(나는 러시아어본도 구하긴 했다.)  

지난 2월에는 단테의 <새로운 인생>(민음사)도 우리말 번역본을 얻은바 있으니 언제 짬을 내서 단테의 세계로 한번 잠수해볼 일이다(이 책은 이탈리어 역이 아니라, 단테 로세티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T. S. 엘리엇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 그 사이에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괴테가 들으면 섭섭해 할 일이지만, 하여간에 사정들이 그러하다고도 하니 우리의 얄팍한 교양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도 단테를 좀 읽어보도록 하자(중2 때 단테의 <신곡>을 들고 다니던 한 친구 때문에 나도 덩달아 얄팍한 번역서 한 권을 들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번역이 제대로 읽혔을 리 없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해설에서 읽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뿐).  

 

 

 

 

두번째 책은, 역시나 우리의 교양과 관련된, 그리고 단테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첫손가락에 꼽았을 책인바,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문학동네)이다.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의 형이기도 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우리의 경우 그런 형을 둔 영화감독으로 봉준호가 있다) 동생만큼 유명한 건 아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영문학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그에게 걸맞는 칭호는 '이론가'나 '비평가'가 아니라 '연구자'이다. 실제로 그는 스탠포드대학의 소설연구센터를 지휘하고 있는 연구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미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로 우리에게 소개된바 있고 몇 년전에는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지만, 겸손하게도 고작 '연구자'인 탓인지 주변에서 생각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모레티는 중요하다(적어도 재미있다). 그러니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해서건, 재미있어서건.(모레티는 페터 지마만큼 이론 지향적이지만, 테리 이글턴만큼 재미있다.) 

모레티는 문학연구에 통계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등을 도입하는 걸로 유명한데, 기본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제한다면, 그의 프로젝트는 '(러시아)형식주의 + 다위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의 형식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그는 텍스트사회학의 창시자 페터 지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마가 문학사회학의 상관항으로서 '텍스트성'을 파고든다면, 모레티는 대범하게 그러한 형식이나 텍스트성의 진화에 대해 고찰하고 기록한다(거기서 중요한 건 진화의 '단위'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예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 같은 걸 만들어보기도 한다. 비록 재미있다 하더라도 문학연구의 '핵심'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은 내가 보기엔 역사학 연구에서 인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인구변동의 통계나 다룰 듯하지만, 인구학적 접근은 역사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얘기해주는데(가령 인구학자 토드의 <유럽의 발견> 같은 책), 모레티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문학사를 '문학의 도살장'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참신한 것인지!

지난 1987년에 처음 나온 <세상의 이치>는 모레티의 비교적 초기 저작이다(나는 Verso에서 나온 이 1판을 갖고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얼마전 개정판이 나왔다. 확인해 보니까 2000년에 'New Edition'이 나온 것).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이란 부제에 걸맞게 책은 '상징적 형식으로서 교양소설'이 근대사회사의 전개 속에서 갖는 의미맥락을 추적하고 재구성한다. 그런데, 결코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면, "모레티의 저작에는 페이지마다 순수한 지성이 살아숨쉰다." 읽어볼 도리밖에.

참고로, 러시아문학과 관련해서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과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1840)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러시아문학 작품(곧 교양소설)이다. 주로 스탕달을 다루고 있는 장에서. 이 때문에, 나는 이전에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었다. 이들과 더불어 거명되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인은 미하일 바흐친이다. 한가지, 사실주의(리얼리즘)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한 문학형식이라는 게 모레티의 대전제인데,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게 러시아문학이며, 모레티 자신이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한 대담에서 루카치가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은 톨스토이와 당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모레티는 이렇게 답한다. "톨스토이는 제게 골치아픈 적수죠. 제 주장과 어긋나는 작가거든요. 이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안과밖>, 제12호, 273쪽) 모레티는 솔직한 사람이다.

 

 

 

 

세번째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한울). 아마도 현대 지리학자 중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학자이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이가 하비일 것이다(그의 책은 최소한 7권이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번에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나무)라는 묵직한 책이 나온바 있는데, 이번엔 2003년에 나온 그의 최신간이다. 역자는 하비의 책을 번역한바 있는 최병두 교수. 하비에 대해선 영국 옥스포드의 좌파(맑시스트) 지리학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책 몇 권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고 있다), 이번 저자 소개를 보니까 뉴욕시립대학의 인류학과 교수로 돼 있다. 지리학자에서 인류학자로 변신? 한편으론, 그가 지리학의 외연을 거의 인류학 수준으로 확장했다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이 경우는 문화인류학의 하위범주로서 '도시인류학'이 될 것이다). 한편, 지난번에 나온 책과 관련하여 갖는 바람. 또 다른 '맑시스트' 마샬 버만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또다른 수도는 파리 외에 페테르부르크와 뉴욕이 있다. 하비급의 학자가 나서서 이 '두 도시 이야기'마저 파리 이야기만큼 써주었으면 좋겠다. 근대의 세 도시, 혹은 근대의 세 가지 유형학에 대하여. 

                    

 

 

  

네번째 책은 프랑스쪽의 '행동하는 지성'들에 관한 것. 거물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실천이성>(동문선)이 불쑥 나왔고, 드레퓌스 사건을 촉발했던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하다>(책세상)가 책세상문고의 한권으로 선보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유익한 책은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자인, 2002)인바,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부르디외의 신간은 동문선의 간판 번역자 김웅권의 작품인데, 그가 번역한 <파스칼적 명상>에 대한 평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기에 나로선 유보적이다. <순진함의 유혹> 같은 좋은 번역서도 있는 반면에, <구조주의의 역사2-4> 같은 어수룩한 번역서도 내놓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는 다른 분들이 먼저 읽고 판별해 주었으면 한다(책값이 싼 것도 아니고). 여하튼, 부르디외의 거의 모든 책들이 번역되었다. 해서, 부르디외식 사회학이 한국에서도 꽃필 수 있을까? 기대는 해보지만, 판돈을 걸지는 않겠다. 부르디외 '전공자'가 태연하게 조선일보에도 글을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 사회이기에.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꼽는 시집, 조정권의 <떠도는 몸들>(창비). <산정묘지>(민음사, 1991), <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1994) 이후에 10여년만에 나온 신작 시집인데(정말이다!), 그런 만큼 기대해봄 직한 시집(적어놓고 보니 시인은 출판사들도 떠돌고 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때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산정묘지1')라고 선언했던 '조로한' 시인의 '후일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헌 누더기'의 행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서평들을 보니 시집의 컨셉은 여행인 듯하다. 동아일보 서평에 따르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자취가 깃든 여행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저자 자신은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일상에 발목을 잡히는 모습은 예술가로서 저자의 고민을 공감하게 한다. '어디로 가도 지상의 오줌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스스로를 망명자로 자처한다'(국내 망명자)는 이 같은 시인의 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망명시인의 명단을 하나 더 늘여야 할 모양이다...

05. 05. 18.

 

 

 

 

P.S. 알고 보니까 연초에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새로운 장정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표지만 바뀌었을 뿐,  편제나 내용 자체는 그닥 달라진 것 같지 않다(이젠 칼라화보라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얼마전 <씨네21>의 창간 10주년도 맞고 해서 영화관련 글들을 제법 읽게 되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다. 조만간 영화와 영화비평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이렇게 적어놓으면, '의무감'에서라도 몇 자 적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게 화행, 곧 'speech act'이다)...   

 

 

 

  

P.S.2. 부르디외 사회학의 한국적 적용과 관련하여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책은 <문화와 계급>(동문선, 2002)이다. 그 중 문화자본에 대한 장미혜 박사의 (실증적인)연구가 나로선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장박사는 짐작에 "소비양식에 미치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상대적 효과" 같은 주제의 학위논문을 썼는데,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더듬어보자면, '경제자본'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문화자본'이라는 게 있고, 이 두 변수(돈과 눈높이)에 따라 네 가지 사회적 계층이 분류될 수 있다(이 경우 사회계층이란 게 이분법적이지 않다). (1)돈도 많고 눈도 높은 경우, (2)돈은 많지만 눈은 없는 경우, (3)돈은 없는데, 눈만 높은 경우, (4)돈도 없고 눈도 없는, 속편한 경우. 거기서 가장 '문제적인' 계층은 (3)이다. 책 살 돈은 없으면서 즐겨 책타령을 늘어놓는 어떤 이도 분류하자면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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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8 12:26   좋아요 0 | URL
맨날, 사정상......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영화야그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으실꺼죠?^^

로쟈 2005-05-18 12:32   좋아요 0 | URL
예, 맨날, 날이면 날마다...

비로그인 2005-05-18 13:26   좋아요 0 | URL
아 봉인된 시간 안그래도 이번에 구입할 생각이었다 장바구니에서 뺐는데 로쟈님이 말씀하시니 여쭤봐야겠네요. 보니 독일어를 번역해놓은거더라구요 원래 독일어로 쓴건 물론 아니겠죠? 번역이 어떤지요? 읽을만하면 그냥 한국어번역본으로 구입하게요. 그의 영화에 머리깼던 생각이 나서 읽고는 싶은데 괜히 책도 겁납니다..^^

로쟈 2005-05-18 13:30   좋아요 0 | URL
'이상한' 일이지만, 제가 러시아어본을 아직 못 봤습니다(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책들을 제법 많이 갖고 있음에도). 국역본은 읽을 만한 책입니다. 정 미심쩍으시면, 영어본을 읽으셔도 되겠지만...

주니다 2005-05-18 19:19   좋아요 0 | URL
소개하시는 책들에게 Thanks to 할 수 있도록 편집해주시죠. 좀 귀찮으시겠지만. 그럼 쌓일 적립금이 꽤 되지 않을까요? 번번이 날로 먹자니 원....

로쟈 2005-05-18 19:41   좋아요 0 | URL
책 표지사진만 끌어다 놓았습니다. 제가 '편집' 같은 데 서툴러서요. 제가 누구처럼 책을 공짜로 드리는 것도 아닌데.^^

주니다 2005-05-18 20:1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링크를 책 전체에 걸어야 되나 봅니다. 풀어 쓴 단테의 신곡만 Thanks to가 생기는 걸로 봐서는.... 다시 해 주세요 ㅎㅎㅎ 이왕이면 귀국 후 쓰신 글들에도 다 해주세요.

주니다 2005-05-18 20:14   좋아요 0 | URL
여기서 노는 사람들은 대충 3번째의 문제적 사회계층이 가장 많지 않을까요? 심지어 주제는 모르고 눈만 높아서 결혼도 못한 사람도 있고....크크크

로쟈 2005-05-19 15:25   좋아요 0 | URL
주제를 모르신다면, 아직 '가망'이 있습니다. 지 주제를 알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balmas 2005-05-20 00:57   좋아요 0 | URL
어이구,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군요.
그런데 [신곡] 완역본이 300쪽밖에 안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로쟈 2005-05-20 13:35   좋아요 0 | URL
그게 대조해 보지 않아서 현재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풀어썼다면' 분량이 더 늘어나야 정상일 텐데요.^^

n69 2005-12-09 04:01   좋아요 0 | URL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은 물론 어렵긴 하지만, 읽었을 때 도대체 의미판독이 안되는 책은 아닙니다. 역자가 <실천이성>을 번역하면서 <파스칼적 명상>의 번역이 어려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허나, 다른 부르디외 번역서 이를테면 <예술의 규칙>이나 <텔레비전에 관하여>보단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불어할 줄 전혀 모르나, 읽어보았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로쟈 2005-12-12 12:16   좋아요 0 | URL
<파스칼의 명상>을 자세히 검토하진 않았기에 제 의견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주변의 의견까지 참조하면 그리 과장된 건 아니지만). 역자에 대해서는 저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데, 훌륭한 번역서와 남루한 번역서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좀 의아할 따름입니다...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를 읽었다. 분량도 많지 않지만, 좋아하는 철학자에 관한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는 아니고, 며칠 걸려 읽었다. 중간에 다른 일들이 항상 끼어들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니 오고가는 전철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읽은 듯하다. 복사한 원서까지 무릎에 펴놓고...

일단 우리말 번역본은 아마도 좀더 편안하게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갖은 짓'(친근한 표현으로)을 다했다. 그냥 '슬라보예 지젝'으로 돼 있는 원서의 제목을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바꿔놓았을 때 이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책의 소제목들도 대부분이 옷을 갈아입거나 분칠을 했다(가령, "The curse of Jacques: Limitations on the influence of Zizek"이란 절은 두 대목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혹은 생뚱맞은", "데리다와 라캉을 중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라 이름붙여졌다). 그리고 용어들도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걸로 바꾸었으며(가령 '누빔점'으로 번역되던 point de caption은 '소파 고정점'으로 바뀌었다) 원서에는 한 장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인물사진/참고사진 등도 꽤 여러 장 집어넣었다(이런저런 이유로 책의 분량은 142쪽짜리 원서의 2배 가량이 되었다. 부록으로 원서에 없는 글 한편이 국역본에는 더 들어가 있더라도). 한마디로 편집자가 부릴 수 있는 수단은 다 부려본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책을 읽으면서 받았다. 해서 한국어 독자들이 훨씬 더 친근감 있는 지젝을 만날 수 있는 멍석은 마련된 셈(*point de caption은 point de capiton의 오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게 275쪽 '찾아보기'에 point de caption으로 잘못 타이핑돼 있고, 나는 그걸 받아적었던 것. 본문 134쪽에는 제대로 표기돼 있다) .

책이 나오기까지의 자초지종과는 무관한, 약간 도취적인 역자서문을 뒤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 한 입 크기로 잘 썰어놓은 지젝을 만나게 되는바, 우리말로 된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란 선입견에 걸맞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솔직히 두드러진 경력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 저자이지만 이 만한 '정리력'을 선보이는 게 영미학계의 '내공'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1급 학자들을 뒷받침하는 2급 학자층이 두터워야, 즉 미드필드가 두터워야 새로운 이론/업적이 나오든가 말든가, 골도 들어가든가 말든가 한다. 골대 앞에 한 명 세워놓고 골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건 전근대적인 방식이자 요즘의 동네축구도 못되는 방식이다. 하긴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영어사용자들이고, 지젝이 영어로 쓴 책들을 읽은 것이기 때문("지젝은 유연하면서 쉽게 이해되는 문체로 글을 쓰는데"(229쪽) 같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쁜 한국 독자들도 있겠다). 애당초 지젝이 한국어로 책을 썼다면, '나'라도 이런 정리를 못하랴 싶다. 하지만, 핑계는 핑계로 내버려두기로 하자.  

어쨌든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정도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다. 그리고 일부 회의적인 시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마이어스의 마지막 문장. "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Quite simply, Zizek will have been." 그러니까 그의 크기가 다 드러나고 제대로 평가받는 건 미래의 일이 될 거란 얘기). 적어도, 1989/1991년 이후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업들은 그가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걸 확증해준다. 마이어스의 책은 그런 '지젝 따라잡기'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초심자라도 두번쯤 책을 통독하게 되면, '웬만한' 지젝을 읽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다시 참조해가면서).    

번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마이어스가 지젝의 사상을 요약하기 위해서, 그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설명 이후에 내세운 핵심 이슈는 다섯 가지이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등. 이들 각 장마다 말미에 내용요약(Summary)까지 박스 처리돼 있는 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다는 건 동어반복이겠는지라(나중에 '읽기'를 시도한다면 모를까), 여기서는 국역본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오타와 미심쩍은 대목만을 지적해둔다. '이보다 더 쉬울 수 없는 지젝'이지만, 혹 옥의 티 때문에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갖게 되기 때문에. 즉, 몇 가지 지적사항만 고려한다면, 책은 지젝 입문서로서 나무랄 데 없다는 걸 거듭 강조해둔다.

-32쪽에서 지젝의 동료이자 두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클(Renata Salecl)'의 올바른 표기는 언젠가 지적한 대로 '레나타 살레츨'이며 이미 도서출판b에서도 '살레츨'로 표기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지난 3월말에 지젝은 아르헨티나에서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연하의 신부와(첫결혼을 일찍 한 그이기에 아마도 세번째 신부는 자신의 아들보다 나이가 더 어릴 듯하다). 마이어스가 요약해주고 있는 지적 경력에 따르면, 지젝은 1971년 그러니까 22살에,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1975년에 400쪽에 달하는 학위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는 대학교수직을 얻을 뻔하지만, 그의 '강의'가 학생들을 물들게 할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우려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그는 동료였던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고(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이었다. 둘이 시작한 학회였고), <제문제>란 잡지와 <아날렉타>란 시리즈도 낸다(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은 자신의 책에 대한 악평이나, 있지도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젝은 1979년 류블랴나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는데, 당국의 염려/배려에 따라 그는 강의 부담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연구만을 수행하게 된다(이 때문에 지젝은 방한강연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노라고 조크를 섞어 얘기했다. 굳이 의무적인 강의까지 해야 하는 미국 등지의 대학으로 유명세에 걸맞게 옮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198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슬로베니아를 방문했었던 라캉의 사위 자크-알랭 밀레르의 초청으로 친구인 돌라르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밀레르의 세미나에 참석한다(그 세미나를 통해서 비로소 라캉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젝은 고백한바 있다). 지젝은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편, 밀레르의 정신분석도 받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있었는지 1985년 밀레르의 지도로 지젝은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지만, 밀레르로부터는 논문의 출판을 거부당한다. '좌절'한 지젝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며 정치활동에 뛰어든 그는 1990년에 슬로베니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출간한 것이 1989년의 (영어권)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다. 이후에 그가 현재까지 (영어로) 낸 책이 최소 26권 이상인바(나는 그 중 24-5권 정도를 갖고 있다), 올해도 최소 2권 이상이 나올 예정이다(얼마전에는 란 연구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에서 마이어스는 두 가지 중요한 모멘트를 지적한다. 비주류/비제도권적 성향과 관련한 것인데, "이와 같은 비제도성으로 인해 적어도 두 번(한번은 석사논문과 관련해서, 다른 한번은 두번째 박사학위와 관련해서) 기성제도에 편입할 기회를 놓쳤지만, 지젝은 제도에 대한 이런 저항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했다... 지젝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부분적으론 이른 시기에 겪은 실패와 그 실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제와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37쪽) 이러한 교훈을 따르자면, 이론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실패'이다. 그것도, 두 번. 지젝의 말을 비틀자면,  "이론가는 반드시 두번 실패해야 한다." 마이어스는 주체에 대한 지젝의 특이한 관점/이론이 이러한 자기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지적하는데, 그럴 법한 견해이다.

-58쪽. 라캉의 두 타자에 대해 설명하는 소단락에서 마지막 문장.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58쪽) 여기서 '상징계'는 '상상계'의 오타이다. 문맥상 '이런 타자성'이란 게 '상징계의 타자성'이므로 원서와 대조하지 않더라도 오타라는 걸 알 수 있다.

-112쪽. "왜냐하면 어머니의 초자아적 명령 아래에서 이 딸에게 남겨진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고통의 강도에 개입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에서 '고통의 강도'는 'a degree of pain'을 옮긴 것인데,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얼마간의 고통' 정도의 뜻이 아닐까 한다. 다른 대목들에서 읽기 편한 쪽으로 옮겨주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강도'란 표현은 좀 낯설다. 113쪽 소단락에서 "이런 은폐야말로 법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긍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에서는 positive의 역어로 '긍정적'보다는 '실정적'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건 오역을 지적한다기보다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positive만 하더라도 우리말로는 적극적/긍정적/능동적/실정적 등으로 옮겨지는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번역에서 애를 먹는 경우는 상응하는 우리말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이처럼 너무 많을 때이다(주체/주어/주제로 번역되는 'subject'나 반성적/반사적/성찰적/재귀적으로 번역되는 reflexive도 마찬가지이다).

-115쪽에서, "이 예수상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실재 예수를 주창한 자들에게는 결코 오직 않을 그의 부활이 아니라, 실제 예수가 몸소 보여준 자기발전의 영적 편력이다." '오직 않을'은 물론 '오지 않을'의 오타이고, 시제상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미래와 관련된 건 '부활'이 아니라 '재림'이다). 원문은 "Resurrection, which... never actually happened"이므로, "실제적으로는 일어난바 없는 부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겠다.

-119쪽. 오역이랄 건 없지만, 좀 모호한 대목: "지금까지 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타자란 그 자체로는 그/그녀의 주체가 못 되는 상상적 사본, 사실상 그/그녀를 향한 메시지로 자기충족적인 자아(타아)의 측면이다." 뒷문장의 원문은 "[T]he Other is reduced to the other, an Imaginary counterpart who is not a subject in his/her own right, but in effect, an aspect of a self-sufficient ego (the other) with a message for him/her."(59쪽) 여기서는 대문자 타자Other와 소문자 타자other 간의 구별이 중요한데, 다른 대목들에서 Other를 '대타자'라고 옮겼으므로, 처음에 나오는 '타자' 역시 '대타자'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소문자 타자라는 것, 이런 대타자의 상상적 대응물(counterpart)이다. 그런 한에서, 이 소문자 타자는 (대타자와 같은) 제 값의 주체가 아니며, 단지 자기-충족적인 자아의 측면에 불과하다. 대략 그런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147쪽. 첫문장에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에서 '좌파'는 동사 leave의 과거분사형left를 명사로 잘못 옮긴 것이다('이데올로기 일반론'이 갑자기 '좌파 이데올로기론'으로 둔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데, "지젝은 두 죽음.."으로 시작되는 대목부터 149쪽 전체는 147쪽의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이라는 소단락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내느라고 꼼꼼하게 교정을 보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재판을 찍는다면, 마땅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이란 장의 결론은 이렇다. "현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것,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그런 비판을 위한 첫걸음은 그것의 실행가능성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의 모델이 지향하는 목표이다."(147쪽)

-154쪽. "지젝은 이 공식(=라캉의 성차 공식)의 난폭한 수용에 언제나 경의를 표하지는 않는다." '난폭한 수용'은 'outraged reception'인데, 내가 보기에는 라캉의 성차공식에 대해 '불편해하는', 혹은 '다혈질적인 반응' 정도의 뜻이다. 지젝은 (라캉처럼) 그런 반응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 조금 내려가서,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 원문은 "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이다. 번역문은 '이론'과 '사유'를 비교의 대상으로 놓았는데, 이건 오류이다. 이론이 뭐하는 것보다 뭐하는 데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즉 더 전력하는 시대에, 란 뜻이어야 한다. nuanced thought란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다소 모호한 사유'란 뜻이다. articulate란 것은 그걸 분명하게/명료하게 한다는 뜻이고. 지젝은 그런 뉘앙스를 즐기지 않고 대놓고, 아주 공격적으로 말한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 그게 지젝다운 면모이다.   

-159쪽. 이것도 편집상의 실수인데,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가 말이 되는가? 173쪽에서는 한 문장이 누락됐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데올로기와 비슷하다."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성적 차이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e may even say that it is the ideology of sexual difference.)가 빠졌다. 마지막 문장의 '일치'는 '화해' 혹은 '조화' 정도의 뜻이다(남성과 여성의 '일치'가 불가능한 건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당연하지 않은가?). 원문은 "[I]t is not possible to reconcile 'man' with 'woman'."

-224쪽. 이건 궁금한 점이다. 지젝 비판가들을 다루면서 마이어스가 "Theorists such as Teresa Ebert and Denise Gigante..."라고 한 대목을 번역본은 "좌파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테레사 에버트, 프린스턴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데니스 히간테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이라고 옮겼다. 역자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테레사 에버트'와 '데니스 히간테'의 뒷조사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Gigante'가 '히간테'로 표음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일부 인구어에서 g와 h 사이에 호환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경우에도 그런 건지 궁금하고 Gigante란 이름만 갖고 이 사람의 출신 국적까지 파악되는 건지 신기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글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은 역자에 따르면, "지젝의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보내준 미발표 원고"(235쪽)인데, 대부분, 즉 241쪽에서 252쪽까지는 이미 작년에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생각의나무)에 "아메리카 하위문화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럼스펠드가 아부 그라이브에 관해 알고 있는 모르는 것"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것이다. 물론 다른 대목들도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알베르트 슈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환상의 돌림병>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건, 252쪽에서 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이전에도 지적한바 있지만, '벤야민'이란 기존의 표기가 어떤 점에서 결격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식한 자들의 이런 '상징폭력'은 불쾌하다.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인 경우엔 상식과 관행을 존중하면 된다).

원서의 Further Reading은 번역서에서 '지젝의 모든 것'이란 제목으로 갈무리돼 있다(이 책이 2003년에 나온지라 작년에 나온 <이라크> 등은 서지에서 빠져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 간추리면, 마이어스는 먼저 지젝의 책 중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권하겠다고. 그가 어려운 책으로 꼽는 것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근간)이고, 초심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은 <환상의 돌림병>이다(국역본은 물론 '만만찮다'). 최근에 나온 <까다로운 주체>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데, 우리의 경우엔 유감스럽게도 가장 못 믿을 책이며 따라서 가장 안 팔린 책이다(나도 뜯어말린 책이지만). 현재까지 나와 있는 지젝 선집으로는 라이트Wright 부부가 편집한  <The Zizek Reader>(Blackwell, 1999)가 있다. 지젝의 원문을 '한번' 읽어보고픈 독자에게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 책을 꼽을 수 있겠다...

05. 05. 16.

P.S. 한 가지. 248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화 <이중처벌Double Jeopardy>의 국내 출시명은 <더불 크라임>(1999)이다. 토미 리 존스와 애슐리 저드가 나오는 영화. 애슐리 저드가 찍은 이 계통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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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이어서 이전 글을 삭제했더니 아니다 다를까 댓글도 사라져버렸네요. 자명한 산책님과 self-so님의 양해를 바랍니다...

lizom 2005-05-2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로자님에게




다른 사람의 번역본을 꼼꼼하게 원문 대조까지 하면서 읽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이토록 꼼꼼하게 읽고 교정까지 해 주신 건 지젝에 대한 로자님의 각별한 애정과 출판 기획자 겸 번역자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하신 대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출판사(앨피)의 공격적인 개입이 두드러진 번역서입니다. 번역에서부터 교정까지 모든 작업을 번역자에게 일임하고 그저 ‘제본’만 하는 기존 출판사의 안일함과 비교할 때 앨피의 ‘과도할’ 정도의 개입은 제게 신선한 충격이자 출판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한 기회였습니다. 원고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여 소제목을 바꿔 달고, 성실한 교열과 그림 선별 및 해설까지 달아준 앨피의 노력에 대해서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박수를 보내야할 것입니다.




제목에 대해: 지적 발랄함이나, 대중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지젝이 한국의 지식사회에 안정적으로 터를 잡지 못한 건 그의 이론이 접근하기 ‘두려울’ 만큼 난해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입장에 ‘미워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논쟁적이라는 거죠. 그 ‘미워할 만함’에 그의 작업이 지닌 생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와 제국적-민족주의로 재무장한 우파와 교착 상태에 빠진 구좌파 양쪽에 대해 공격의 칼날을 휘두르는 지젝의 논의는 확실히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만, 저는 지젝의 사유 ‘결과’보다, 그 사유의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현대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입각해서 재독해 할 필요성을 던져 주는 데 지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역에 대해: 영국식 영어문장에 익숙지 않아 정확치 못하거나 불명확한 번역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112쪽 ‘고통의 강도'는 ’얼마간의 고통’으로 고치는 게 맞습니다.(참고로, 말씀하신 대로 저는 원문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한, 한국어스럽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3쪽 ‘긍정적positive 조건’의 positive는 ‘실증적’과 ‘긍정적’의 두 가지 뉘앙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그래서 보통은 실정적으로 번역했는데) 이 경우는 부정되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은폐’가 오히려 법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는 것을 살려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관련하여, 항상 고민스러운 reflexive의 번역어를 처음엔 ‘반성적’이라고 했다가, 문맥상 닿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 ‘무리하게’ ‘재귀적’으로 고쳤는데, 사실, 여전히 불만스럽습니다.


147쪽의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 는 “이론이 불명료한 사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자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시대”로 고치는 게 맞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결정적으로, 


147쪽 첫문장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의 오역(leave의 과거분사 left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


147쪽의 본문과 상자글 편집 실수.


159쪽.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 ->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


등은 마지막 최종 교정을 거치지 않아 생긴 ‘결정적’실수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인명에 대해: 인명 표기는 항상 고민스러운데, 성실한 조사가 관건이겠죠. Denise Gigante를 데니스 지간트로 발음하지 않고 데니스 히칸테로 한 건, Gigante가 giant(거인)에 해당하는 스페인어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어에서 G와 J는 ‘ㅎ’ 에 가까운 [x]로 발음되어, Gigante는 ‘히간떼’로 들린다는 데 착안하여 그렇게 표기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식으로 ‘지간트’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252쪽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은 오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유식한 자들의 ‘상징폭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로자님이 이번에 번역하신 <까다로운 주체>의 163-164쪽 “실체는 praxis, 즉 능동적 개입인 반면에 주체는 theoria, 즉 수동적 직관이다. 여기서 Sein과 Sollen이, 진과 선이 대립하고 있다.”에서 원어praxis, theoria, Sein, Sollen에 해당하는 한국어(가령, 실천활동, 이론활동, 존재태, 당위태 같은)나 발음표기도 없이 그대로 남겨둔 것이 혹 그 상징폭력에 해당하는 건 아닐까요?


 다시 한번, 꼼꼼한 지적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누가...>와 <까다로운 주체>가 서로 상승작용하여 지젝이 많이 읽히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로쟈 2005-05-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에도 편집진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교정은 좀 소홀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굉장히 읽기 편한 번역이어서 몇 가지 '옥의 티'들이 못내 아쉽더군요. 그리고 저는 <까다로운 주체>의 번역자가 아닙니다. 아마 '로카드님'과 혼동하신 모양입니다.^^

로즈마리 2005-06-07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다 대단하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