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를 읽었다. 분량도 많지 않지만, 좋아하는 철학자에 관한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는 아니고, 며칠 걸려 읽었다. 중간에 다른 일들이 항상 끼어들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니 오고가는 전철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읽은 듯하다. 복사한 원서까지 무릎에 펴놓고...
일단 우리말 번역본은 아마도 좀더 편안하게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갖은 짓'(친근한 표현으로)을 다했다. 그냥 '슬라보예 지젝'으로 돼 있는 원서의 제목을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바꿔놓았을 때 이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책의 소제목들도 대부분이 옷을 갈아입거나 분칠을 했다(가령, "The curse of Jacques: Limitations on the influence of Zizek"이란 절은 두 대목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혹은 생뚱맞은", "데리다와 라캉을 중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라 이름붙여졌다). 그리고 용어들도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걸로 바꾸었으며(가령 '누빔점'으로 번역되던 point de caption은 '소파 고정점'으로 바뀌었다) 원서에는 한 장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인물사진/참고사진 등도 꽤 여러 장 집어넣었다(이런저런 이유로 책의 분량은 142쪽짜리 원서의 2배 가량이 되었다. 부록으로 원서에 없는 글 한편이 국역본에는 더 들어가 있더라도). 한마디로 편집자가 부릴 수 있는 수단은 다 부려본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책을 읽으면서 받았다. 해서 한국어 독자들이 훨씬 더 친근감 있는 지젝을 만날 수 있는 멍석은 마련된 셈(*point de caption은 point de capiton의 오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게 275쪽 '찾아보기'에 point de caption으로 잘못 타이핑돼 있고, 나는 그걸 받아적었던 것. 본문 134쪽에는 제대로 표기돼 있다) .
책이 나오기까지의 자초지종과는 무관한, 약간 도취적인 역자서문을 뒤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 한 입 크기로 잘 썰어놓은 지젝을 만나게 되는바, 우리말로 된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란 선입견에 걸맞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솔직히 두드러진 경력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 저자이지만 이 만한 '정리력'을 선보이는 게 영미학계의 '내공'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1급 학자들을 뒷받침하는 2급 학자층이 두터워야, 즉 미드필드가 두터워야 새로운 이론/업적이 나오든가 말든가, 골도 들어가든가 말든가 한다. 골대 앞에 한 명 세워놓고 골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건 전근대적인 방식이자 요즘의 동네축구도 못되는 방식이다. 하긴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영어사용자들이고, 지젝이 영어로 쓴 책들을 읽은 것이기 때문("지젝은 유연하면서 쉽게 이해되는 문체로 글을 쓰는데"(229쪽) 같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쁜 한국 독자들도 있겠다). 애당초 지젝이 한국어로 책을 썼다면, '나'라도 이런 정리를 못하랴 싶다. 하지만, 핑계는 핑계로 내버려두기로 하자.
어쨌든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정도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다. 그리고 일부 회의적인 시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마이어스의 마지막 문장. "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Quite simply, Zizek will have been." 그러니까 그의 크기가 다 드러나고 제대로 평가받는 건 미래의 일이 될 거란 얘기). 적어도, 1989/1991년 이후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업들은 그가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걸 확증해준다. 마이어스의 책은 그런 '지젝 따라잡기'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초심자라도 두번쯤 책을 통독하게 되면, '웬만한' 지젝을 읽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다시 참조해가면서).
번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마이어스가 지젝의 사상을 요약하기 위해서, 그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설명 이후에 내세운 핵심 이슈는 다섯 가지이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등. 이들 각 장마다 말미에 내용요약(Summary)까지 박스 처리돼 있는 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다는 건 동어반복이겠는지라(나중에 '읽기'를 시도한다면 모를까), 여기서는 국역본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오타와 미심쩍은 대목만을 지적해둔다. '이보다 더 쉬울 수 없는 지젝'이지만, 혹 옥의 티 때문에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갖게 되기 때문에. 즉, 몇 가지 지적사항만 고려한다면, 책은 지젝 입문서로서 나무랄 데 없다는 걸 거듭 강조해둔다.
-32쪽에서 지젝의 동료이자 두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클(Renata Salecl)'의 올바른 표기는 언젠가 지적한 대로 '레나타 살레츨'이며 이미 도서출판b에서도 '살레츨'로 표기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지난 3월말에 지젝은 아르헨티나에서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연하의 신부와(첫결혼을 일찍 한 그이기에 아마도 세번째 신부는 자신의 아들보다 나이가 더 어릴 듯하다). 마이어스가 요약해주고 있는 지적 경력에 따르면, 지젝은 1971년 그러니까 22살에,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1975년에 400쪽에 달하는 학위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는 대학교수직을 얻을 뻔하지만, 그의 '강의'가 학생들을 물들게 할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우려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그는 동료였던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고(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이었다. 둘이 시작한 학회였고), <제문제>란 잡지와 <아날렉타>란 시리즈도 낸다(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은 자신의 책에 대한 악평이나, 있지도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젝은 1979년 류블랴나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는데, 당국의 염려/배려에 따라 그는 강의 부담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연구만을 수행하게 된다(이 때문에 지젝은 방한강연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노라고 조크를 섞어 얘기했다. 굳이 의무적인 강의까지 해야 하는 미국 등지의 대학으로 유명세에 걸맞게 옮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198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슬로베니아를 방문했었던 라캉의 사위 자크-알랭 밀레르의 초청으로 친구인 돌라르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밀레르의 세미나에 참석한다(그 세미나를 통해서 비로소 라캉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젝은 고백한바 있다). 지젝은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편, 밀레르의 정신분석도 받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있었는지 1985년 밀레르의 지도로 지젝은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지만, 밀레르로부터는 논문의 출판을 거부당한다. '좌절'한 지젝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며 정치활동에 뛰어든 그는 1990년에 슬로베니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출간한 것이 1989년의 (영어권)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다. 이후에 그가 현재까지 (영어로) 낸 책이 최소 26권 이상인바(나는 그 중 24-5권 정도를 갖고 있다), 올해도 최소 2권 이상이 나올 예정이다(얼마전에는 란 연구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에서 마이어스는 두 가지 중요한 모멘트를 지적한다. 비주류/비제도권적 성향과 관련한 것인데, "이와 같은 비제도성으로 인해 적어도 두 번(한번은 석사논문과 관련해서, 다른 한번은 두번째 박사학위와 관련해서) 기성제도에 편입할 기회를 놓쳤지만, 지젝은 제도에 대한 이런 저항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했다... 지젝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부분적으론 이른 시기에 겪은 실패와 그 실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제와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37쪽) 이러한 교훈을 따르자면, 이론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실패'이다. 그것도, 두 번. 지젝의 말을 비틀자면, "이론가는 반드시 두번 실패해야 한다." 마이어스는 주체에 대한 지젝의 특이한 관점/이론이 이러한 자기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지적하는데, 그럴 법한 견해이다.
-58쪽. 라캉의 두 타자에 대해 설명하는 소단락에서 마지막 문장.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58쪽) 여기서 '상징계'는 '상상계'의 오타이다. 문맥상 '이런 타자성'이란 게 '상징계의 타자성'이므로 원서와 대조하지 않더라도 오타라는 걸 알 수 있다.
-112쪽. "왜냐하면 어머니의 초자아적 명령 아래에서 이 딸에게 남겨진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고통의 강도에 개입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에서 '고통의 강도'는 'a degree of pain'을 옮긴 것인데,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얼마간의 고통' 정도의 뜻이 아닐까 한다. 다른 대목들에서 읽기 편한 쪽으로 옮겨주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강도'란 표현은 좀 낯설다. 113쪽 소단락에서 "이런 은폐야말로 법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긍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에서는 positive의 역어로 '긍정적'보다는 '실정적'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건 오역을 지적한다기보다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positive만 하더라도 우리말로는 적극적/긍정적/능동적/실정적 등으로 옮겨지는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번역에서 애를 먹는 경우는 상응하는 우리말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이처럼 너무 많을 때이다(주체/주어/주제로 번역되는 'subject'나 반성적/반사적/성찰적/재귀적으로 번역되는 reflexive도 마찬가지이다).
-115쪽에서, "이 예수상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실재 예수를 주창한 자들에게는 결코 오직 않을 그의 부활이 아니라, 실제 예수가 몸소 보여준 자기발전의 영적 편력이다." '오직 않을'은 물론 '오지 않을'의 오타이고, 시제상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미래와 관련된 건 '부활'이 아니라 '재림'이다). 원문은 "Resurrection, which... never actually happened"이므로, "실제적으로는 일어난바 없는 부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겠다.
-119쪽. 오역이랄 건 없지만, 좀 모호한 대목: "지금까지 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타자란 그 자체로는 그/그녀의 주체가 못 되는 상상적 사본, 사실상 그/그녀를 향한 메시지로 자기충족적인 자아(타아)의 측면이다." 뒷문장의 원문은 "[T]he Other is reduced to the other, an Imaginary counterpart who is not a subject in his/her own right, but in effect, an aspect of a self-sufficient ego (the other) with a message for him/her."(59쪽) 여기서는 대문자 타자Other와 소문자 타자other 간의 구별이 중요한데, 다른 대목들에서 Other를 '대타자'라고 옮겼으므로, 처음에 나오는 '타자' 역시 '대타자'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소문자 타자라는 것, 이런 대타자의 상상적 대응물(counterpart)이다. 그런 한에서, 이 소문자 타자는 (대타자와 같은) 제 값의 주체가 아니며, 단지 자기-충족적인 자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대략 그런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147쪽. 첫문장에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에서 '좌파'는 동사 leave의 과거분사형left를 명사로 잘못 옮긴 것이다('이데올로기 일반론'이 갑자기 '좌파 이데올로기론'으로 둔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데, "지젝은 두 죽음.."으로 시작되는 대목부터 149쪽 전체는 147쪽의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이라는 소단락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내느라고 꼼꼼하게 교정을 보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재판을 찍는다면, 마땅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이란 장의 결론은 이렇다. "현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것,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그런 비판을 위한 첫걸음은 그것의 실행가능성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의 모델이 지향하는 목표이다."(147쪽)
-154쪽. "지젝은 이 공식(=라캉의 성차 공식)의 난폭한 수용에 언제나 경의를 표하지는 않는다." '난폭한 수용'은 'outraged reception'인데, 내가 보기에는 라캉의 성차공식에 대해 '불편해하는', 혹은 '다혈질적인 반응' 정도의 뜻이다. 지젝은 (라캉처럼) 그런 반응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 조금 내려가서,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 원문은 "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이다. 번역문은 '이론'과 '사유'를 비교의 대상으로 놓았는데, 이건 오류이다. 이론이 뭐하는 것보다 뭐하는 데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즉 더 전력하는 시대에, 란 뜻이어야 한다. nuanced thought란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다소 모호한 사유'란 뜻이다. articulate란 것은 그걸 분명하게/명료하게 한다는 뜻이고. 지젝은 그런 뉘앙스를 즐기지 않고 대놓고, 아주 공격적으로 말한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 그게 지젝다운 면모이다.
-159쪽. 이것도 편집상의 실수인데,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가 말이 되는가? 173쪽에서는 한 문장이 누락됐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데올로기와 비슷하다."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성적 차이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e may even say that it is the ideology of sexual difference.)가 빠졌다. 마지막 문장의 '일치'는 '화해' 혹은 '조화' 정도의 뜻이다(남성과 여성의 '일치'가 불가능한 건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당연하지 않은가?). 원문은 "[I]t is not possible to reconcile 'man' with 'woman'."
-224쪽. 이건 궁금한 점이다. 지젝 비판가들을 다루면서 마이어스가 "Theorists such as Teresa Ebert and Denise Gigante..."라고 한 대목을 번역본은 "좌파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테레사 에버트, 프린스턴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데니스 히간테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이라고 옮겼다. 역자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테레사 에버트'와 '데니스 히간테'의 뒷조사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Gigante'가 '히간테'로 표음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일부 인구어에서 g와 h 사이에 호환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경우에도 그런 건지 궁금하고 Gigante란 이름만 갖고 이 사람의 출신 국적까지 파악되는 건지 신기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글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은 역자에 따르면, "지젝의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보내준 미발표 원고"(235쪽)인데, 대부분, 즉 241쪽에서 252쪽까지는 이미 작년에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생각의나무)에 "아메리카 하위문화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럼스펠드가 아부 그라이브에 관해 알고 있는 모르는 것"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것이다. 물론 다른 대목들도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알베르트 슈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환상의 돌림병>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건, 252쪽에서 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이전에도 지적한바 있지만, '벤야민'이란 기존의 표기가 어떤 점에서 결격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식한 자들의 이런 '상징폭력'은 불쾌하다.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인 경우엔 상식과 관행을 존중하면 된다).
원서의 Further Reading은 번역서에서 '지젝의 모든 것'이란 제목으로 갈무리돼 있다(이 책이 2003년에 나온지라 작년에 나온 <이라크> 등은 서지에서 빠져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 간추리면, 마이어스는 먼저 지젝의 책 중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권하겠다고. 그가 어려운 책으로 꼽는 것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근간)이고, 초심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은 <환상의 돌림병>이다(국역본은 물론 '만만찮다'). 최근에 나온 <까다로운 주체>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데, 우리의 경우엔 유감스럽게도 가장 못 믿을 책이며 따라서 가장 안 팔린 책이다(나도 뜯어말린 책이지만). 현재까지 나와 있는 지젝 선집으로는 라이트Wright 부부가 편집한 <The Zizek Reader>(Blackwell, 1999)가 있다. 지젝의 원문을 '한번' 읽어보고픈 독자에게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 책을 꼽을 수 있겠다...
05. 05. 16.
P.S. 한 가지. 248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화 <이중처벌Double Jeopardy>의 국내 출시명은 <더불 크라임>(1999)이다. 토미 리 존스와 애슐리 저드가 나오는 영화. 애슐리 저드가 찍은 이 계통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