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을 먹으며 몇 자 적는다. 어제 하려고 했던 책 얘기이다. 지난주에는 딱히 관심사에 부합하는 책들이 별로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막판에 두어 권이 합류하는 바람에 다섯 권이 채워졌다. 앞으론 이 '기록'도 그냥 부정기적으로 다섯 권의 책이 채워지면 기록해두는 방식으로 해볼 생각이다.
첫번째 책은 김윤식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문학사상사)이다.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되었던 원로 비평가의 자서전/회고록이다. 그는 36년생으로 올해 고희를 맞았다. 최근에 몇 권의 책이 거푸 출간되고 있는 건 그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책과 함께 비평집 <작은 글쓰기, 큰 글쓰기>(문학수첩)도 지난주에 나왔다. 신간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이란 부제를 담고 있는데, 그 길이란 사실 책들과의 만남으로 다 채워져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것도 자서전의 한 축을 구성할 테지만, 그건 오직 책들과의 만남을 보완하는 의미일 테다. '20세기의 문학과 사상'이란 제목의 문구가 거창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읽고 쓴 책들이 우리문학의 20세기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김영랑의 본명으로서의 김윤식이 아니라 비평가 김윤식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였다. 거기엔 '한국문학의 연속성'이란 단원이 있었던바, 고 3때의 국어선생님은 이게 비교적 어려운 글이라고 했다. 나름대로 시골뜨기였던(19살의 내가 경험했던 서울은 작년에 내가 경험한 모스크바 이상으로 낯선 도시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다소 놀랐던 건 교과서(혹은 신문)에나 나오던 이들이 버젓이 교정과 강의실을 활보하고 다니던 것. 첫학기에 나는 문학개론과 같이 신청했던 철학개론을 종교학개론으로 변경신청해서 듣고는, 2학기에 (비평가가 아닌) 김윤식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이는 매번 강의시간이 되면 (대형)강의실에 들어와서는 강의를 하고 끝나면 나갔다. 미스테리란 아주 단순한 것에 있는데, 나에게 미스테리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저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것!(하이데거의 현존재, 즉 거기에-있음과는 좀 다른 양태로 '저기에-있음'이란 것. 어, 저 사람이 저기에 있네! 철학자 박이문이 파리 유학시절에 강의실에서 본 데리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저기에 있다니! 그러니까 미스테리라든가 기적이란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 양태론적인 것일 테다. 어떤 인간/사물의 존재는 그 자체로 기적/미스테리가 된다. 그걸 바라보는 시선/태도에 의해. 그걸 '대상 a'로 보는?) 하여간에 그런 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나는 종교학과 국문학쪽 강의를 학부 내내 들었다(대학원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해서,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의 많은 대목을 나는 비평가의 육성으로 읽을 수 있다. 잡지에 연재되었을 때 처음 몇 번은 도서관에서 복사를 해 읽었더랬는데, 많은 대목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언제가 들어본, 들어본 거 같은, 이미 들어버린 이야기들이었던 것). 그걸로 656쪽이다. 나는 그의 비평열차가 20세기의 종반을 향하던 무렵에 탑승한 승객이지만 나름대로 끼어들 감상이 없지는 않다. 그가 쓴 책들이 내가 젊은 날 읽은 책들의 서가 한 켠 정도는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 진화해나간다지만 인간의 열정까지 진화해가는 것 같지는 않으며, 따라서 문학/사상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 나름의 폭과 크기를 자랑했던 앞 세대의 비평가들이 점차 황혼에 접어들고 있는 풍경은, 아쉬운 장관이다.
두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문예출판사). 이미 두 영문학 교수의 번역으로 10년전에 책이 나왔더랬다. <문화와 제국주의>(창, 1995). 나는 그 책을 당시 내한했던 사이드의 강연장에서 구입했다. 강의는 주로 헌틴턴의 문명충돌론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리엔탈리즘>이 한창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던 시기여서 나름대로 성황을 이루었던 강의였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내가 읽은 사이드는 그의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Out of Place)>, 김석희 역(살림, 2001) 밖에 없는 듯하다. 그것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좋은 번역이었다. 하지만, 사이드의 나머지 책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 모양이어서 인터넷서점의 서평들은 대부분 번역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작인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1991/2000)부터가 그렇다. 그러니 내가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손해본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내용을 잘 요약해주고 있는 책들은 많다). 해서, 이번 번역본도 반신반의하게 된다.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 있는 집, 2003)까지 낸 역자이지만 사이드 번역은 저작보다 더 만만찮은 모양이다.
사이드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와 함께 역시나 얼마전에 나온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의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앨피)이다(얼마전 독지가께서 보내주신 책의 하나인데, 원서는 언젠가 복사해두었던 책이다). 사이드와 함께 소위 탈식민주의 3인방을 이루는 이가 스피박과 호미 바바인바,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3)의 저자 스피박에 대해서는 역시나 같은 시리즈의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근간 예정이므로 기다려볼 일이다(스피박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영역자로 유명하다). 그리고 호미 바바의 책으론 <문화의 위치>(소명출판, 2002)가 출간돼 있다. 언젠가 이 연재에서 한번쯤은 언급했던 책들일 것이다(물론 쉽게 읽히는 책들은 전혀 아니다. 아무래도 번역에 있어서의 식민상태를 우리는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우리 머리/언어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 새로운 세대, 새로운 경향의 탈식민주의에 대해서는 현대 중국영화에 관한 책인,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이산, 2004)을 단연 손꼽을 만하다(따라서 우리도 탈식민주의와 관련하여 '고전적인' 책이 곧 나올 만하다).
세번째 책은 재작년인가 한번 예고가 되었던 책인데, 우리의 영미문학 번역 실상을 점검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이다. 이 책은 고전이라는 '상징계' 너머, 고전 번역의 '실재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각 대학마다 교양필독서의 목록들을 '남발'하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어떤 책을, 혹은 어떤 번역서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나 가이드는 태부족인 게 현실이다(나는 이게 '기만적 현실'이라고 본다). 영어로 된 원서라면, 그나마 원서 추천이라는 게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기타' 언어의 고전들은 어떻게 읽으라는 말인가. 물론 번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그렇다고 영역이나 일역으로?). 하니 고전이 아무리 숭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접하는 건 턱없는 번역들뿐이다. 따라서, 그 턱(수준)을 좀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하며, 그 사전정지 작업으로 번역서에 대한 점검 또한 요구되는 것. 이게 간단히 정리한 이 책이 의의이다(아쉽다면, 이런 가이드북은 재생지를 쓰더라도 책값을 싸게 매겨서 널리 보급시키는 게 좋지 않았을까 라는 점. 32,000원은 부담스럽다.)
584쪽의 책은 나름대로 방대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고 나는 모든 언어권에 걸쳐서, 그리고 철학/과학을 막론한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러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교양필독서를 꼭 집어줄 수 있어야 하며, 번역서의 경우 (랭킹까지는 아니더라도) 등급/평점까지는 매겨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나무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어리석은 짓이 재연되지 않는다. 가령 <로빈슨 크루소>, <오만과 편견>, <막대한 유산>, <모비 딕>, <무기여 잘 있거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소리와 분노> 등 영미문학의 대표작 12편의 경우 읽을만한 추천본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동안 우리는 무얼 읽어왔다는 말인가?(이런 건 하고많은 영문학도들이 석고대죄할 일이다.)
네번째 책은 W. I. T. 미첼의 <아이코놀로지: 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서지락)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시카고대 영문학/미술사 교수인 저자가 언어적 관점에서 이미지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네 명의 이론가, 넬슨 굿맨, 곰브리치, 레싱, 그리고 에드먼드 버크를 역순으로 짚어가면서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관한 이들의 논의를 정리하며, 그 이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파헤친다." 이 책이 눈에 띈 건 내가 원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3부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는 이 방면의 다른 책들에서 자주 추천되는 대목이므로 일독할 만하다(마지막 장은 "우상파괴의 수사학: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물신숭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예술/대중문화쪽으로 분류돼 있지만, 언어학/기호학쪽으로도 분류되어야 하는 책이다.
다섯번째 책은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이산). 원저는 2002년에 나왔고 말 그대로 도쿠가와 시대부터 2001년가지의 일본 현대사를 훑은 책이라고 한다. 656쪽으로 분량도 맘에 든다. 저자는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라는데, 동양학에 있어서만큼은 하버드대가 이름값을 한다는 게 내 인상이다. 껄끄러운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지향적인 것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이다. '애국적'인 견지에서라도 짬찜이 읽어볼 만한 책(일본 망가만 보지 말고).
엊그제 EBS에서 우연히 청소년을 위한 도올 김용옥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면서 우리 주변의 4강,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걸 그는 특히 강조했다. 당연히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그는 특히 러시아어를 강조했다). 유전 사업과 관련하여 매일같이 '러시아'는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정작 러시아에 관한 좋은 책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일본이나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일이다. '애국적'인 견지에서도(러시아어도 좀 배웁시다!).
05. 05. 11.